학력 열등이 빈민운동가로
지난 4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학력을 허위로 기재해 12월 10일 대법원으로부터 1년형을 선고 받은 열린우리당 이상락 의원(51·성남 중원)이 의원직이 박탈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리고 그는 11일 오후 구속수감 되었다.
언론에 밝혀진 이력을 보면, 대강 이렇다. 충남 서천군의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소작농의 아들이었던 그가 본격적으로 사회에 눈을 뜬 것은 1977년 현역병 전역과 함께 서울 구로공단의 한 공장에 취직하면서부터다.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던 그는 학력이 낮다는 이유로 생산직에만 전전하게 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나 거부반응이 생겼다. 이에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자신의 학력에 대해 말하지 못하거나 얼버무리게 되었다.
이후 구로공단 공장에서 1980년 친척집이 있는 성남으로 내려가 이해학 목사를 만나 도시빈민운동가로 성장한다. 이해학 목사는 당시에 전도사 신분으로 국가보안법으로 투옥되기도 한, 진보적이고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이의원은 또래의 교회친구들과 성남 YMCA를 만들고 분과활동으로 근로청소년합창단 지휘자, 야간학교 교장 등을 맡으면서 지역 빈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생계수단으로 노점상을 하면서 도시빈민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1985년엔 빈민운동가로 유명한 제정구와 허병석 목사로부터 도시빈민활동가 과정을 교육받고 빈민운동가로 활동한다. 당시 사회문제로 대두된 서울 상계동, 목동의 대규모 철거민 투쟁에 개입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혹독한 삶을 체감한다.
6월 항쟁 이후 정치인으로
빈민운동을 하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87년 6월 항쟁이다. 고, 제정구 의원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이끌면서 성남지역의 주요 시위를 주도하면서 느꼈던 것이, 정치권력을 잡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그의 생각은 91년 지방자치가 부활되면서 기회가 왔다. 6월 항쟁 뒤 목공일을 하면서 밥벌이에 정신이 없던 그는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의 권유로 시민후보로 추대되어 성남시의회에 나갔다.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당선된 것이다.
성남시의회에서 시장과 시의회 의장과의 밀월관계, 시의원들 뇌물수수 사건 등을 『말』지에 폭로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이 사건으로 성남시의회에서 제명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정치적 입지는 더욱 탄탄하게 됐다.
이후 지방선거에선 경기도의원으로 연거푸 당선됐다. 줄 곧 무소속이었던 그는 지역구 의원인 조성준 전, 의원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했고, 지난 17대에는 열린우리당 창당에 뛰어들어 경선으로 공천을 받고, 4월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학력의 실체가 드러나다
그의 정규학력은 충남 서천군의 비인초등학교가 전부다. 초등학교 졸업 뒤 보령군 주산면에 주산재건중학교를 나왔으나 이 학교는 인가를 받지 못한 학교다. 그는 지난 10월 초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무식한 놈이라고 굳이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다.”며 “누군가 학력을 물어오면 주산고를 졸업했다거나 고향인 주산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말로 넘겨왔다.”
이 같은 말로 가까운 지인들은 그가 주산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게 되었다. 학력에 대한 그의 ‘얼버무리기’는 노점상을 하고, 빈민운동을 하던 시절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지난 1991년 성남시의원으로 출마할 당시 선관위 후보자 등록란에 학력을 주산고 졸업으로 기재하면서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갔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1995년, 1998년, 2002년 등 세 차례 더 경기도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지난 총선에서 예비후보자 제도가 도입되면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그의 선거참모가 선거 15일전 예비후보자 등록 때 평소 알고 있던 대로 주산고등학교 졸업으로 등록을 시켰고, 선관위는 이를 인터넷 등에 공개한 것이다.
거짓 학력을 위해 공문서 위조
그런데 정작 후보자 등록 때는 ‘무학’으로 등록했다가 다시 선관위의 조언에 따라 ‘독학’으로 고쳤다. 이에 선거 캠프에선 이를 놓고 분란이 일어났다. 갑자기 ‘독학’으로 등록하려는 이유가 원인이다. 하지만 그는 고졸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거캠프에 끝내 밝히지 않고, “그냥 무학으로 가자.”며 얼버무렸다.
이런 와중에 그의 처남은 주산고등학교로 달려가 다른 사람의 졸업증명서를 위조증명서로 만들어 온 것이다. 그는 처남에게, “왜 이런 짓을 하느냐. 걱정하지 마라.”고 화를 내면서도 증명서를 자신의 점퍼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녔다. 이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어, 이처럼 큰 화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난 4월 7일 성남지역 방송사가 개최한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그는 사회자로부터, “도의원 선거 때는 고졸 학력으로 기재했고, 이번에는 독학으로 돼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당황한 그는 “호적상 이름과 초등학교 재학 때 이름이 달랐기 때문.”이라며 얼렁뚱땅 넘기려 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안주머니에서 호적등본을 꺼내려다 문제의 위조증명서가 튀어나온 것이다.
이 장면을 목격한 성남의 한 인터넷신문 기자가 다음날부터 끈질기게 취재를 요청했고, 그는 “처남이 위조해온 위조 졸업증명서가 잘못 나왔다.”고 실토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곧 바로 성남지역 언론을 통해 퍼져나갔고, 그는 결국 ‘허위사실공표’ 및 ‘위조공문서행사죄’로 고소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상락과 동병상련(同病相憐)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 학교에 진학하는 이들은 이상락의 이런 열등의식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난 이상락의 이런 학력콤플렉스를 이해할 수 있다. 동병상련이라 했나. 난 1975년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사회에 나왔다. 모두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집안사정으로 사회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해야 했다.
초등학교 졸업학력으론 사회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 처음으로 취업한 곳이 중국음식점이다. 이른바 철가방 일을 시작했는데, 머리를 빡빡 밀고 중학교를 다니는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학업에 크게 흥미가 없었지만,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학교를 다니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사실 가슴 아픈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다. 당시만 해도 이른바 가방 끈이 짧은 아이들이 주로 이 같은 일을 했는데, 멸시와 무시를 당하는 건 기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접을 받기 힘들었다. 모두가 학력이 가져온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그 구조는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우리 사회 학력차별 실상
그렇게 일정기간 지내면서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학업을 병행코자 했으나 뾰족한 대안이 없어 당시 전기기술을 대안으로 철가방 일을 그만두고 수원으로 왔다. 전기기술을 익히고 기술자노릇을 하면서도 학력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대우는 늘 밑바닥이었다.
시간이 지나 국방의 의무 나이가 되어 신검을 받았다. 현역을 갈 수 있는 등급이었으나 ‘국졸’이란 이유로 그토록 싫어하는 ‘방위’ 판정을 받았다. 또 한 번 학력으로 사회적 타살을 당하는 경험을 했다. 한탄을 많이도 했지만 달리 해법이 없어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학력이 무엇이냐’를 두고 많은 우울감을 느꼈다.
학력콤플렉스는 계속됐다. 강원도 춘천과 인천의 직업훈련소를 입학하려다 국졸이라고 불합격 당한 일, 공장에 취업하려다 국졸이라고 불합격 당한 사실, 서울 신촌의 한 전산학원에 등록하려다 국졸이라고 거부당한 일, 자격증 시험 볼 때마다 학력란에 기록을 하는데, 항상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던 심정 등등...
약점을 강점으로, 당당하게 국졸을
방위복무를 마치고 다시 호구를 위해 기존의 기술업에 취업했다. 머리가 좀 커서인지 온갖 고생을 하면서 차별적 대우를 인식하고, 상품가치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서서히 시작한다. 때문에 진실로 피눈물 나게 공부를 했다. 당시 국민학교 졸업수준으로 닥치는 대로 자격증과 면허증을 따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보면 대다수가 쓸모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지만, 당시엔 학력을 상쇄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그것들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반 미친놈처럼 이들을 섭렵해 나갔다. 자격증과 면허증들을 하나 둘 따내면서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서서히 사라졌다. 어느 때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국졸이란 말을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를 당당하게 대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얼굴이 붉어져 국졸이라 차마 언급조차 못하다 자신감이 붙으면서 당당해진 것이다.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학력에 대한 차별을 재인식케 하는 경험을 한다. 90년 말, 리비아에서 생활하면서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귀국하면서 학문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장애가 무척 많았으나 학력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무수한 밤을 지새웠다. 이를 통하는 과정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지만 학력이란 결코 극복의 대상이 아닌, 그저 관념의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한 즈음엔 오히려 허탈하기도 했다.
아무튼 앞으로도 학력에 대한 차별적 현상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우열의 개념이나 대상을 준수하려는 것이 아닌,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좋든 싫든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인생을 비유하자면 자전거와 같다고 할까. 굴리지 않으면 곧 쓰러지는 존재.
정치인의 도덕성은 무엇보다 중요
우리 사회가 학력차별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검정고시제도를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고, 특별(?)한 수학코스도 있으며, 동양문고 대표인 김태웅 사장이 고등학교를 자식과 함께 졸업한다는 소식이 미담으로 전해진 것처럼, 직접 학교를 다닐 수도 있다.
즉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학력이다. 따라서 학력차별이 무조건 잘못된 것처럼 비판해선 곤란하다. 특히 사회의 최전선에서 정치를 담당하고 있던 그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유리한 고지에서 초스피드로 극복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회피하고, 학력차별 때문에 피해자 운운하는 태도는 부정만 당할 뿐이다.
권토중래하는 마음으로 성찰해야 한다. 생각을 주장으로 바꾸고, 이를 지지로 결집시켜 권력을 잡는 것이 수순이긴 하지만, 바탕에 지지할 것이 있다. ‘도덕성’이다. 위조 졸업장을 만들고 이것이 발각되고도 이를 냉철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의 구조를 비판하는 듯한 모습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말하자면 과정은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제대로 그 배역을 수행해 내지 못한 것이 사회가 책임질 일은 아니란 얘기다. 권력을 취득하는 과정은 매우 험난하다. 때문에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고도의 합리와 봉사정신, 투철한 자기 희생정신, 높은 도덕성이 담보되지 않는 사람에겐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부디 건강하게 출소하여 진실로 정정당당하게 국졸출신을 인정하고, 이를 토대로 다시 시민에게 다가가기를 바래본다.
첫댓글 이상락 의원이 구속되던 2007년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