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용설명서Ⅱ]-다섯 번째 이야기
본대로 느낌대로 – 제국의 자기소개서
역사의 선택-영웅이 써내려간 탐욕 일기
이은화sujejada@hanmail.net
파리의 개선문
프롤로그-통치의 변주와 탐욕의 변주사이에서
백신이 답이지만 어느 백신도 안전을 보장 못하는 딜레마는 정치력이나 지성으로 풀 수 없다.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눈앞에 닥친 의학적인 난제는 복병으로 등장한 변이 바이러스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완전한 백신은 없다. 균의 퇴치나 면역력이 답이지만 신문과 뉴스가 전하는 세계의 정세도 하루하루가 종잡을 수 없고 뚜렷한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나라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에 국익과 실리를 따지는 계산에 정세가 뒤바뀌며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세계지도를 다시 힘과 경제의 논리로 양분해야 할지 모르는 혼돈과 위기가 공존하고 있다. 많은 경우의 수를 대입하며 해결하려는 과정과 방법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누구든 멈추지 않으면 다 같이 공멸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두려움이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문제들을 해결하고 풀어나가는 길은 공생과 공존이기에 주도할 열강들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다. 소수가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기 위해 필요한 역할 분담은 필수다.
소수민족들의 분열된 목소리가 강대국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그들을 주변국으로 품고 있었던 나라들로서는 그들의 목소리가 반가운 일은 아니며 주변국들도 무조건 모른 척할 일만도 아닌 듯하다. 미국의 지도자를 탓하는 것으로 타결되어진다거나, 중국의 ‘일대일로’를 대국의 횡포와 억지라고 성토하는 것으로 단락 지어질 것이 아님에도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탓하는 이해당사자국들의 속보이는 행태다. 중국이나 미국만 잘 하면 해결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힘의 대립에서 불리와 유리의 위치는 상대적이라 있는 자의 횡포와 없는 자의 불합리를 따지게 되는 이치다.
역사는 강자의 편에서 기록되고 서술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의의는 소수의 목소리와 상대의 위치에서 입장을 대변하며 읽을 수 있어야 하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그 힘을 가진 주체는 강한 제국의 지도자였고 그들은 멈추지 않는 정복자의 모습으로 일관되게 영웅의 모습으로 역사는 그려왔다.
대국과 제국은 역사와 같이 있어왔다. 그렇다면 세계사는 나라와 민족들의 조상들이 분쟁 속에서 상실한 ‘정체성’의 회복을 위한 투쟁의 지난한 기록이며 제국사가 남겨 놓은 과제다. 정신이 지배당하는 것을 몸을 지배당하는 것보다 더 치욕으로 생각했기에 사활을 걸고 지키는 것이기에 소수민족만의 욕구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정체성이 회복하기까지 끝날 수 없는 전쟁이라는 점이다. 제국이 끝까지 가지 못한 패착이 정복자의 실수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다.
가깝게는 여전히 나라의 근간을 세운 영웅과 실패로 끝난 인간의 욕심과 탐욕 사이에서 평가를 다시 받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와 멀리는 나폴레옹의 대관식 그림에 유령처럼 등장한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44)와 불사의 꿈을 꾸었던 진시황제(BC 259~210)가 통과 한 시간들과 제국의 영광과 함께 사라진 칭기즈칸(1156~1227)의 몽골 제국의 그림자로 읽는 제국의 모습이다. 실패하거나 혹은 성공 전에 주저앉았던 제국이어서 암울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같은 꿈을 꾸는 자들이 바라보며 스스로 선택한 그 우상의 몰락도 그대로 따라 간 인물들의 선택을 확인하는 일이 암울하다.
그들은 우상의 성공신화와 함께 패착점을 읽어야 했지만 그가 과정에서 보여준 무모한 이루지 못한 욕망을 그들이 이룰 과업으로 대체한 것이다. 지금의 강대국과 과거의 제국이 같은 환경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경제(돈)와 자본(땅)에 집중하고 확장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실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자신들은 다르다는 정체성의 혼란과 그들의 우상이 그들을 지배하는 한 자신들의 우상과 다를 것이 없는 결과는 제국이 안고 가야 할 평행이론처럼 닮았는지 모른다.
우상偶像이 준 선물–정체성으로 잇는 통치철학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7)의 눈 여겨 볼 우상론은 ‘극장의 우상’ 과 ‘종족의 우상’이다. 극장의 우상이란 말 그대로 모델이 된 유명한 인물의 행동이나 말이 선입견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며, 한 종족이나 민족이 가지는 관용적 선입견이 생긴다는 뜻이 종족의 우상이다. 여기에서 우상을 뜻하는 아이돌‘Idol’이 나왔다. 이미 형성된 익숙한 우상은 그들의 정체성을 이루기도 한다. 또 베이컨은 우리와 다른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과 같은 선입견도 잘못 인식된 오류라고 보았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해서 배척하는 심리가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이야기다. 다른 문화와 다른 인종에 대한 배타적인 심리를 정확하게 읽어냈다. 정복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그것을 확장하는 과정이 전쟁이고 정복이라고 보았다.
베이컨의 우상론이 아니더라도 선입견에 대한 신뢰는 상상이상으로 그것이 개인에게 사상을 뛰어넘는 관념적 신앙이라면 그들이 만든 국가가 가진 정체성은 굳은 이념이 된다.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품고 사는 일련의 정신적 기질이 민족성은 다른 민족이 이룬 국가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물론 목적이나 실현 방법은 다르더라도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연합을 해도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은 같다. 세상을 향한 끝없는 질주의 본능과 목적을 수단화하는 정신력인 국가의 정체성이 필요할 것을 오래 전 지혜로운 철학가는 예견했는지 모른다. 그 ‘정체성’의 강화와 질주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세계사다. 인간에게 욕망은 멈출 수 없는 전차로 전복되거나 장애에 막혀 중단될 때까지 직진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초상화
우상이 된 알렉산드로스–그의 뒤를 따르는 황제와 왕을 거느리다
진시황제가 꿈꾸었던 정복의 길을 받쳐 준 선명한 밑그림이 있었다. 이미 그보다 앞서 한 세기 전에 세계를 자신의 발아래 두었던 대왕 알렉산드로스(BC356~326)의 세계 정복기는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제에게 훌륭한 교과서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두 대륙을 하나로 이었고 그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은 얼마 남지 않은 세상 끝에서 도전의 끝을 앞두고 있었다. 거기서 멈출 수 없었던 그가 외친 말은 훗날 그의 도전정신에 매료된 이들에게 도전을 자극하는 출사표가 되었다.
나는 마케도니아에서 출발, 그리스를 정복했다. 트리발리아와 메디아를 차지하고, 헬레스폰트에서 홍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아시아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의 끝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이르렀다. 이제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리라.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리라. 나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을 허문 사람이노라. 왕위에 오른 지 9년 만에, 나이 스물여덟에, 두 대륙의 주인이 되었노라.<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가 세운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분열되어 존속 기간은 10년 정도의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업적인 헬레니즘 문화의 기원을 세웠다는 의의는 그저 의의일 뿐 세계사의 큰 지분을 차지하는 제국의 부침을 설명해주는 판례로는 약할 수도 있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그후로도 오랫동안 정복에 나선 이들에게 동경의 대상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기초를 쌓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나폴레옹도 그를 동경하고 그와 같은 원정길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를 영웅으로 만든 전젱 신화가 심은 선입견이다.
훗날 나폴레옹의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로 각색이 되는 알렉산드로스의 가우가멜라 전투는 기사회생한 전투로 무한한 가능성과 위기도 맞서면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그의 신화를 탄생시켰다. 그 전쟁에서 밀린 알렉산드로스의 진영이 두 동강이 나고 보급대가 적의 손에 떨어지는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아군을 공격하느라 흐트러진 적진을 뚫고 다리우스에게 직접 공격을 퍼부었다. 다리우스가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고, 이쪽 진영 깊숙이 들어왔다가 고립된 적의 선발대를 다시 알렉산드로스가 맹공격하면서 페르시아 군은 와해된다. 이 전투를 두고 몽테스키외는 ‘이수스전투(BC333)가 그에게 티레와 이집트를 주었다면 아르벨라(가우가멜라)전투는 그에게 전 세계를 주었다’고 말했다. 그가 그린 지도는 헬레니즘 지도로 지금도 그의 이름과 함께 다닌다. 그의 짧은 기간에 이룬 정복전쟁은 믿고 보는 신화가 되었지만 그의 정복은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된다.
기원전 326년 겨울이다. 지금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 지점에서, 원주민의 완강한 저항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다 겨우 회복한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를 따르던 부하들은 귀국하기를 간청했지만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던 알렉산드로스의 대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미래를 앞당기고 만다. “내가 평생을 바쳐 추구한 과업을 여기서 멈추란 말인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실패자가 되지 않으리라. 세상이라는 극장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연기를 하리라.” 그는 그의 극장에서 자신이 만든 역할에는 충실했지만 그가 원한 성공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후세에 그를 보고 따르는 많은 정복자들에게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을까. 그렇게 극장에서 만들어진 아이돌은 훗날 황제와 대왕을 팬으로 거느린 성공한 아이돌이 되었다. 멈출 수 없는 욕망이 그의 삶을 삼켰지만 혼신을 다한 자신의 연기를 보고 추종하는 무리가 뒤 따른 그는 실패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의도가 성공이라면 성공일수도 있겠다.
쉼표가 없는 ‘욕망’-포기할 수 없는 ‘정체성’
알렉산드로스를 닮은 정복자는 또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중국의 진시황제의 정복기록이 후대 정복자에게 보여준 그림은 화려하고 또렷했다. 최초로 중국대륙을 통합하고 법치를 행한 강력한 군주로 대륙을 다스렸던 그는 잔인함과 명민함을 동시에 가진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다. 그가 정복전쟁으로 일군 국가에서 황제로 군림한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불로장생을 꿈꾸고 자신의 나라에서 영원한 통치를 꿈꾸었지만 길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죽게 되는 진시황제의 사후 중국이 어지러워 진 것은 예견된 미래였다. 그에게 많은 전쟁은 경력이고 자랑이었지만 그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는 미지수다. 경험과 기억이 강화될수록 지혜가 느는 것이 아니라 패기와 욕심도 함께 자랐다. 그는 스스로 황제가 되었고, 그 이름에 걸맞는 대우를 자국인 중국에서 받고 있는 이룩한 업적이 뚜렷한 세계적인 인물은 맞지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서 가는데 까지 갔던 정복자다.
분열되어 패권을 다투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시대는, 스스로 시황제가 되었던 진나라의 초대황제 정(진시황제의 이름)을 만나면서 끝을 보였다. 기원전 230년에 진나라 군대는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 221년 제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통일을 이룬다. 7웅의 나라들이 수백 년을 할거해왔던 땅을 약 10년 만에 정복해나갔다. 그가 나라를 세우기까지 이웃하는 제후국들의 연합도 있었고, 그의 독주를 막으려는 최후의 수단으로 암살시도도 있었지만 제국의 성립을 막지 못했다. 제국의 탄생을 도운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진시황제
뛰어난 인재를 얻는데 주력했던 진시황은 상앙과 한비자의 법가를 중시해서 한비자, 한사람을 얻기 위해 한나라와 전쟁을 치렀다고 전한다. 상앙의 변법을 비롯해 과감하고 실용주의적인 개혁을 행함으로 나라의 법이 강한 절대군주가 집권하는 중앙집권제를 택한다. 그의 힘은 뛰어난 책사策士와 인재의 발굴에서 왔다. 병사들에게도 공과에 따라 상을 베풀어 자신의 사람을 만드는데 공을 들이고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고 사과하는 성격으로 기록된 그는 정치적인 역량도 뛰어나 다른 제후국들을 내분에 휩싸이게 하는 치밀한 전략가였다. 명분보다 실리를 택하고 체면보다 실수를 바로잡는 데 빨랐다고 전하는 그의 정치력과 개혁으로 다진 업적은 통일만큼 중국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전형적인 절대군주다.
통일 후 그가 보여준 행적은 실로 놀랍다. 영토의 통일에서 그치지 않고 법가 중심의 개혁으로 나라의 법을 굳게 세우고, 철저한 상벌제도를 통해 공과 과를 다루었다. 외국인이라도 공을 세우면 상을 내리고, 공신으로 사용했던 그는 스스로를 황제라 칭할 만큼 작은 나라들과 자신을 구별했다. 자신의 땅을 돌아보기 위한 도로를 건설했다. 통일 후 전쟁보다 나라의 안정을 추구했던 그는, 북쪽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을 쌓는데 이것이 보완되고 증축된 것이 만리장성이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 세운 벽이 이제는 중국의 가장 유력한 관광자원이 되어 앞으로도 천년에 걸쳐 중국을 먹여 살릴 자원이 되었다. 이 많은 것을 단 십여 년 만에 이룬 진시황제가 살아서 세운 만리장성은 죽어서 남긴 능과 함께 중국인의 자존심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백성의 착취와 욕심으로 점철된 폭정의 흔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한 업적과 세계가 감탄하는 유물과 유적으로 탈바꿈했다. 의미로 힘을 얻는 해석이 역사다.
진시황의 획기적인 업적은 도량형의 통일과 화폐의 통일이었고, 문자의 통일은 무엇보다 그의 통치를 극대화한 도구였다. 땅의 통일하고 기획한 것은 또 있었다. 중국을 하나로 잇는 길의 확장과 포장이었다. 그 길은 중국을 하나로 이었다. 로마의 아피아 도로에 견줄 만큼 넓고 잘 포장된 도로였다. 땅과 체제를 아우른 통일이었다. 그렇게 힘과 함께 전략과 지혜까지 있었던 진시황제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욕심의 결과도 그의 업적만큼 불가사의하다.
스스로의 소개서에 갇힌 나폴레옹-자신이 묶은 올무에 갇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에 영국은 즉각 아미앵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아미앵조약은 1802년 3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1805년 도버해협이 내려다보이는 브로뉴에 대군을 집결시켰고, 다급해진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제3차 對프랑스동맹을 체결했다. 그해 10월, 나폴레옹은 근위기병 대령 복장으로 프랑스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수도 빈을 간단하게 점령했다. 12월에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나폴레옹의 전술에 밀려 대패하고만다.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트조약을 체결하며 항복을 선언하기에 이르고 나폴레옹은 이 승전을 기념하여 파리에 개선문을 설치하도록 명했다. 후손들에게 프랑스 최고의 관광자원은 그의 화려한 승전가였고 스스로 세운 자기 소개서였다. 승전보와 함께 그곳으로 입성한 나폴레옹의 위풍당당한 힘이 느껴지던 개선문 앞에서 한사람의 영웅의 발자취에 취했었던 기억은 돌아보니 그의 의도에 화답했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나폴레옹의 육군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던 1805년 10월, 프랑스 해군은 트라팔가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게 패한다. 이 패배로 나폴레옹의 영국 점령계획은 멀어졌고 대서양과 지중해의 제해권도 완전히 영국에게 빼앗기며 후에 해양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불리해졌지만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나폴리 국왕에,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국왕에 임명한 뒤, 3국간에 라인동맹을 발족시켜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을 보호국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천년 역사의 신성로마제국도 무너졌다.
평범한 군인에서 프랑스의 황제까지 오른 나폴레옹은 영토확장에 끝없는 의지를 불태운 인물이다. 직진하는 것과 확장하는 것만이 목표였던 과정에서 맞닥뜨릴 큰 위험은 러시아로의 진출에서 맞는다. 지형과 기후를 고려하지 않고 대부분의 땅이 불모지인 그곳을 얻었을 때의 반사이익이 크지 않은 것은 계산에 없었던 것 같다. 러시아 정벌은 그의 패착이었고 그로 인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시민들에게서 얻은 인기와 명예를 지킨다는 이유로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실정을 하면서도 워털루 전투(1815)에서 명예회복과 복권을 노리지만 영국에 패배하면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자족하고 멈출 수 있는 데에는 전진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멈추지 않아서 자신의 성과와 업적을 축소시킨 인물이 나폴레옹이다. 그도 자신의 우상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카이사르는 반대파의 반감을 사서 타살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고, 끝을 보고 말겠다는 욕망의 끝이 비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아 자신의 최후를 앞당겼다. 인간이 땅에 대한 집착과 확장에 대한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끝을 모르고 질주하다가 맞이한 최후의 모습은 그가 남긴 소개서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스스로 만든 열망에 무너진 카이사르-분쟁의 씨앗으로 남은 정체성
신뢰의 대상이자 동료였던 이에게 배신을 당한 비운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면서 로마의 최고 지위인 프로콘솔에 이른 그에게는 여인과의 사랑도 정치였던 고대의 인물이 카이사르다. 그는 배후 공작이나 선전 같은 사소한 기술뿐만 아니라 행정력과 통솔력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한 이 모든 분야에서 그는 최고의 명인이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정치적 야망은 업적으로 드러났다.
로마의 법령은 같은 계급에서는 평등했지만 다른 계급 사이에서는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계급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투표권 때문이었다. 돈과 잔치를 통한 환심으로 지지자들을 만들어 내기 위한 정치적인 폐해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땅이 없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무신계급이 많아지는 것은 사회가 불안정한 구조로 가는 것이었고, 그것은 로마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힘만으로 유지하기 힘든 제국이었지만 처음부터 실패는 아니었다.
카이사르가 절대로 건드리지 않은 것은 있었다. 종교였다. 그에게 있어 정치와 종교의 혼재는 피해야 할 정치 노선이었고 그의 선택은 옳았다. 종교와 신앙은 곧 그들의 삶과 정신을 하나로 묶는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도 이 정체성은 지엽적으로 일어나는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로마제국이 어긋난 것은 향유하던 사회적인 구조를 다른 민족과 공유하지 못하면서 로마는 균열이 갔고 결국은 무너졌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고 지탱할 힘도 있었지만 모두를 품지 못한 로마는 옛 영화로 남아야했다. 지금은 정치는 달라졌을까.
율리우스 카이사르
몽골제국의 역사-칭기즈칸의 제국 속으로
가까이서 더듬어 본 제국의 역사는 한사람에게서 시작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종결되었다. 칭기즈칸(1162~1226년)이다. 몽골의 역사는 칭기즈칸 전후로 나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최초로 중국에 이민족(흉노족)으로 제국을 건설하고 중국의 역사를 나누어 가진 몽골이다. 후에 훈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그들은 투르크 족으로 익숙한 세계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갔다. 그 서막에 칭기즈칸이 있었다.
칭기즈칸은 그의 고백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고, 자기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세계를 품었다. 그의 힘이 실리고 경험에서 온 확신에 찬 어록은 그의 일생을 모르더라도 ‘나는 남의 말을 잘 들었다’는 고백은 그의 삶을 한마디로 보여주고도 남는다. 척박하고 광활한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이 이룬 정복의 결과는 세계의 역사를 바꾸고 지도를 다시 그렸다. 칭기즈칸의 역사는 곧 정복전쟁의 시작이었고 세계문화의 흐름을 바꾸는 전환기였다. 세계 속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금속공예의 길도 찾을 수 있는 칭기즈칸이 그린 전쟁과 정복 지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만든 지도에 대적할 수 있는 거대한 제국의 지도다.
몽골은 자신들의 문자를 가진 문명 국가였다. 세계사의 흐름 속에 진시황의 지배를 피할 수 없었지만 거대한 고조선을 무너뜨린 한나라에 맞서는 힘도 지녔다. 한사람이 만드는 역사가 세계를 바꾼다는 변함없는 사실은 배우고 알아가는 역사가 증명한다. 시대도 중요하고 무기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생각이 빚어 낸 행동의 결과가 역사다. 세계를 관통하며 세계사를 재편성했던 생각과 행동의 주인공은 몽골의 영웅을 넘어서는 칭기즈칸이다.
선택과 집중은 어디에서도 유효한 정책이다. 파괴와 동시에 건설과 통합을 이룬 지도자로. 정복전쟁에 나선 칭기즈칸의 기록도 다르지 않은 잔인한 전쟁 역사의 기록이면서도 그는 몽골의 역사자체였다. 대륙과 대륙을 잇는 정복전쟁으로 이미 서방세계에서 정복자와 황제로 유명한 칭기즈칸의 기병대를 놓고 역사학자가 한 줄의 저술은 최고의 찬사로 보인다. ‘칭기즈 칸의 기병대가 15세기를 가로질러 돌격하자 세계의 경계가 다시 그려졌다. 칭기즈 칸은 돌이 아니라 나라로 건축을 했다.’ 문자와 헌법을 만들고 쓰며 교역로를 열어 양대륙을 가로질러 길게 뻗은 자유무역지대를 만들 그의 업적이 못내 아쉬운 오늘의 몽골일터이다. 그의 업적이 초원에 가려졌고 그의 정복전쟁의 잔인함은 기억에 남았다.
몽골제국의 영토
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상상력으로 풀어야 할 칭기즈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난 1162년 세계는 여러 지역 문명과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시아는 유럽의 존재를 몰랐고, 유럽은 아시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현재까지 문헌적 기록을 살펴볼 때 칭기즈칸 이전 시대의 중국과 유럽 사이의 여행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사망이후 1227년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은 외교와 무역으로 연결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칭기즈칸은 출생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개인의 장점과 충성심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체계를 건설했다. 그는 비단길을 중심으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었다. 칭기즈칸은 국제법을 만들고 정복한 나라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배운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다던 칭기즈칸의 놀라운 정치적응력이고 실천이었다.
초원을 통합하는 일은 무력만으로 통합을 이루지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전쟁과 정복을 반복하며 일찍 깨달은 칭기즈칸의 정치적 포용력은 자신들이 유목민이었던 점을 잊지 않고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그들의 종교까지도 다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다른 정복자와 차별되는 정치력이다. 그것 때문에 많은 갈등과 분열을 겪는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많은 부족과 민족을 품어야 했던 제국의 힘은 다른 점과 틀린 점을 구별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한 지도자의 능력이다. 중국의 실크로드를 잇댄 이들에게는 초원길이 열려있었고, 초원은 그들의 삶을 지속시키고 확장시키는 터전이었다. 오아시스와 역참驛站으로 연결된 초원의 원정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가 일군 제국의 토대는 그가 죽은 뒤에도 150년 동안 더 팽창하여 그 뒤로 700년가량을 황제와 왕으로 영향력을 유지했다. 몽골 전쟁을 주도한 정복자이면서 문화 전달자의 역할도 수행하는 정복자다. 제국의 역사와 지도를 재배치한 칭기즈칸은 테무친(칭기즈칸의 이름)에서 대륙을 지배하는 칸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칭기즈칸-대륙을 잇는 지배자의 등장
테무친은 칭기즈칸의 이름이다. 그의 분배정책에서 돋보이는 점은 전투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이 물자를 나누어준 것이다. 이 정책을 통해 부족 내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힘의 원천인 병사들의 충성심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병사들은 자신이 전투 중에 죽더라도 테무친이 남은 가족을 돌보아준다는 확고한 신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전의 정복과 약탈의 유목민 부족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혁신적인 분배정책이자 사회보장제도에서 보듯 사람도 잘 다룬 그였다. 국가 내의 충성과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 각 부족들의 장손을 자신의 수하에 '볼모'로 두는 볼모제도를 없애고 관료로 훈련시켜 천호, 만호 단위의 백성들을 직접 관리하는 관리자로 삼았다. 볼모제도를 바꾸어 정부의 한 행정제도로 전환시킨다.
칭기즈칸의 새로운 통치방식은 몽골을 포함하여 동일시대 다른 대륙의 국가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문자를 알지 못했던 칭기즈칸이 다양한 외국의 통치체계와 법률제도를 검토하여 자신의 새로운 제국에 반영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과 비전으로 타국의 사례와 경험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직관에 의지하여 새로운 제국의 기초를 확보했다. 제국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 칭기즈칸은 문자체계를 도입했다. 새로 생긴 많은 법률들을 기록하고 광대한 제국의 땅에 그 법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대한 의사결정과 자신의 결정사항을 기록관을 두어 모두 기록하게 했다. 글자를 모르는 지도자의 뛰어난 결정적 결단이었다. 기록으로 세워지고 남은 몽골의 유물이 그의 능력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대제국을 통합하고 힘의 분배로 균열이 생기는 것도 막았다. 그의 군사들을 통합하고 그들의 수장까지 질서를 유지하도록 그들을 배려했던 지도자다. 그는 아들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임하고, 다른 아들들에게는 오고타이의 말에 따르도록 세심한 배려와, 오고타이에게 강성한 군대와 국가를 물려주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절대 권력자인 칭기즈칸이 전쟁을 결정하는 절차와 방식이다. 그는 단독 명령으로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참여 민주적 방식'으로 국가적 지지기반을 먼저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군주의 민주적 정치였다.
칭기즈칸의 사망 후, 칸의 후예는 칭기즈칸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정복지역을 잘 조직된 제국으로 개편했다. 칭기즈칸의 전쟁은 파괴와 약탈로 진행되었지만 그가 벌인 정복전쟁은 몽골 제국의 출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넓은 대륙을 통합하고 거대한 제국을 세우는 일은 힘만으로 안된다는 것을 보여 준 칸의 등장이기도 했다. 지도자에게 필요한 판단력이었지만 칭기즈칸에게 부족한 것은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13세기 몽골제국은 세계무대의 변방에서 새로운 상상력으로 세계무대의 중심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힘은 칭기즈칸이 품었던 초원의 꿈의 현실화였다. 그렇게 800년 전 세계지도를 재편한 칭기즈칸의 나라는 이제 세계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내몰렸다. 세계를 호령하던 칭기즈칸이 초원에서 키운 상상력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상상력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는 흥할 것’이라는 칭기즈칸의 경고는 자신의 후손들을 향한 격문이 되었다.
에필로그- 이제는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해야 할 때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간섭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과 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정체성을 빼앗기는 치욕이다. 지금까지 있어 온 독립운동이 이민족이나 타국에 의해 상실된 민족적 자존심과 긍지를 회복하려는 지난한 싸움이었다. 지금도 지구촌은 이문제로 시끄럽고 소란하다. 그로 인한 분쟁과 싸움은 끝낼 수 없는 싸움일지 모른다. 하지만 공멸로 가는 것은 막아야 하는,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싸움인지는 안다.
소유가 힘이다. 강한 나라들의 전투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강한 자보다 나를 아는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정보전쟁은 소리는 없지만 살벌한 전쟁이다. 이 또한 힘과 정보를 소유한 강자들이 만들어 낸 시대적 산물이며 비극적 결말을 예고한다.
스스로 만든 열망고 탐욕에 복종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가 되길 원하는 제국이 만든 정치적 상황은 반발과 반대에 부딪혀 왔다. 모든 분쟁의 씨앗은 정체성의 회복과 전복이 문제였다. 이미 확보된 정체성은 흐려지거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지배를 받거나 상실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실체가 확실해지는 시대의 우상이다.
제국의 위협이 커지는 때에 흐름으로 엮고 싶었던 세계사다. 시대를 나열하고 시대 순으로 읽는 사건과 인물의 나열보다 제국을 세웠으나 잃은 자들의 사상과 사건을 엮어 해석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철학적인 명제를 던지며 아직도 풀고 싶고 풀어야 할 영역은 차고 넘친다. 이제 다시 주시해야 할 시점이다. 사상적 기반에도 정치적인 기저가 깔려 있고 정치와 결탁한 종교는 타락했으며, 바른 정치는 정착되고 꽃을 피우기 전에 자본주의에 잠식되어 가는 현실은 여전히 안타깝다.
힘이 센 나라가 강한 나라가 아니라 다른 민족과 소통하며 살아남는 나라가 강한 나라다. 세계를 보는 이들에게 중요하게 작용하는 우상은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보고 재단한다. 경제 논리로 푸는 세계사는 힘의 논리로 비약되고, 경제적 약자는 힘의 논리에서 밀린 약소국가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이상하지 않은 세계사를 조금은 다르게 보고 싶었다. 어차피 역사 속에서 완성된 제국의 형태는 없었다. 강했던 그들이 멈추지 않거나 제가 가진 탐욕을 다스리지 못해 주저앉거나 스러져 간 전철은 밟지 않아야 한다는 대의명분은 확실해졌다.
강한 나라라고 기록됐던 그들이 세운 것은 그 옛날 하늘까지 닿아서 그들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욕망에서 비롯된 바벨탑이었다. 역사 속에서도 욕망의 기초위에 세워진 탑은 무너졌다. 서로의 힘겨루기에서 이긴 자가 세운 것은 기념비적 건물이었고, 정복하고 세운 것이 개선문이고 오벨리스크였다. 그러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퇴색한 옛 영화일 뿐 자기 자리조차 찾지 못하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그들의 후손에게는 자긍심에 생채기를 내는 아쉬운 유물과 유적이 된 경우도 많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칭기즈칸 어록에서)
살펴 본 제국의 지도자의 모습은 서로 닮았다. 욕망의 질주를 하는 제국이 세우는 바벨탑의 미래는 여전히 미지수다. 주위가 정리되지 않은 탓을 정치력의 부재 때문이라고 밀어붙이는 것도 멈추지 못한 탐욕을 위한 비겁한 변명이다. 공생과 상생은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멈추지 못한 제국의 결국을 불안 속에서 맞닥뜨릴 미래는 같이 공멸하는 방향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만으로는 안 된다. 지금은 내일의 날씨가 궁금하다. 매일 매일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에 바쁜 인류다. 두서도 없고 계획도 없이 그저 풀어야하는 문제이니 풀고 멈추어야 할 때이니 멈춘다. 나누어 가질 미래가 제국의 미래와 겹쳐 보인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기대하지만 예보를 보아도 심란하다.
첫댓글 파리의 개선문
진시황제
몽골제국의 영토
사진이 첨부되지 않아 따로 올렸음을 양해바랍니다.
[역사사용설명서] 연재 원고를 보내주신 이은화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