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98
3월16일[사순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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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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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GgEdNK_tLw
[서울대교구 유재현 다니엘(송천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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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오늘 우리의 신앙은 혹시라도 진지한 성찰과 회심이 생략된 신앙,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배제된 값싼 신앙이 아닌지요?>
인류 역사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한 숱한 사이비 교주들이나 거짓 목자들이 많이 등장했고,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아직도 그 사악한 무리들은 약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피정 센터에서 사목하면서 피해자 부모님들을 가끔 만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세상 사랑스러운 딸이 거기 들어간 지 삼 년, 오 년, 십 년입니다. 어떻게서든 빼내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백약이 무효입니다.
사이비 교주로부터 자녀를 한번 구해보겠다고 별의별 방법을 다 강구해보지만, 보편적인 우리 머리 꼭대기에 있는 그들을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자녀를 따라 전국을 헤매다 보니 가정은 폐가망신이요 풍비박산입니다.
사이비 교주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의 사악한 계약 앞에 선량한 백성들을 속수무책으로 넘어집니다. 간당간당한 재산을 다 털어 갖다 바칩니다. 혈연까지 결연히 끊어가며 사악한 무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생의 중차대한 결정 앞에 정확한 판단력이며 식별력입니다. 사실 종교라는 것,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우리네 인생에 종교는 큰 부분이요, 더 나아가서 삶의 전부입니다.
어떤 종교를 선택할 때, 중요한 기준이랄까 지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과 이성이 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진지한 성찰과 회심이 생략된 신앙,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배제된 값싼 신앙, 고통과 십자가는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현세적 성공과 축복만을 청하는 싸구려 신앙, 우리가 목숨 걸고 반대해야 할 웃기는 신앙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바로 보는 관점에 있어서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바라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예언자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할 메시아, 구세주 하느님으로 바라봤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안에서 누군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가?
예수님께서는 당대 거짓 예언자들이나 사이비 교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완전 다른 존재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기 위한 식별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 신앙을 성찰해봅니다. 자신의 동굴 안에 깊숙이 갇힌 나머지, 세상의 고통이나 슬픔, 눈물이나 아픔에는 단1의 측은지심도 없는 것은 아닌지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라는 열매는 하나도 없이 그저 말로만, 결심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닌지 깊이 묵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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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이 세상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끝까지 거부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를 기점으로 인해 예수님은 인간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탄생을 기점으로부터 서양 역사의 기원인 서기(西紀, Anno Domini-A.D)를 세기 시작합니다.
역사 시간에 기원전 이란 말로 통용되는 "B.C" 역시 Before Christ,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인류 역사 안에 한 획을 긋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진정한 행복을 찾은 사람,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분으로 인해 인생 쫄딱 망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그분으로 인해 인생 종치고 죽음의 길로 접어든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자유 의지를 무척이나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맡기십니다. 인간 측의 자유의지에 일임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죽어도 예수님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존재를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고 끝까지 수용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사람, 괜한 똥고집을 잘 부리는 사람, 뭔가 특별한 것만 찾는 사람, 대단한 것들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입니다.
사실 메시아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데, 천국 문이 바로 우리 일상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는데, 눈이 너무 높기에,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너무나 물질 만능주의,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에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쉽게 쉽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단순한 사람, 소박한 사람, 가난한 사람,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거부감 없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님을 주님으로 기꺼이 고백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입술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응답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분의 일생을 내 삶 안에 깊이 각인시키겠다는 맹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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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WH6cvhcq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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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 빛으로 빛을 보는 일>
오늘 복음은 성경 해석에 관한 요한복음의 이해를 보여줍니다. 복음사가들은 생각했습니다. 왜, 어떤 이들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어떤 이들은 그 반대로 나아갈까?’ 루카 복음은 그 사람 안에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부자와 거지 라자로’ 비유에서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할아버지는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 즉 성경을 믿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부활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희들에게 표징이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이 너희 눈을 가려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예언자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다고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성경은 모두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성경을 읽어도 그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요한은 루카 복음에서 더 전진하여 결국 그들 안에 ‘사랑’이 없어서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뒤에 나오는 것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율법대로 그녀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을 존중해 주면서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율법 위에 자비와 사랑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그들 안에 사랑이 없으니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서 하는 행동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빛으로 빛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꽃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이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개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꽃이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주가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인식할 수 없는 이유는 우주 밖으로 나가 우주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한계 내에서 보이는 것만 인식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없다면 성경을 읽어도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 없이 아들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게 됩니다. 의족으로 걸어야 하는 아들을 엄마는 일으켜 주지도 않습니다.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라며 모질게 떠납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아들은 그런 어머니가 미웠습니다.
운동회 날 아들은 학교 가기를 꺼립니다. 그러나 엄마는 빨리 일어나 운동회에 가라고 합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운동회에 가라는 엄마가 밉습니다. 그에게 걸림돌은 비탈진 골목길 계단이었습니다. 일반인도 오르내리기 어려운 경사의 길을 매일 지나다녀야 했습니다. 특히 눈이 오는 날은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항상 눈이 쓸려 있었고 그것을 어머니가 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모진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눈이 오는 어느 날, 병원에서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급히 달려간 아들은 어머니를 찾습니다. 그런데 병원 앞에서 눈을 쓸고 있는 것입니다. 짜증 난 목소리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아들이 말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못 알아보고 말합니다.
“눈 쓸어요. 눈이 오잖아요. 우리 아들이 학교 가야 하는데, 다리가 불편해서.”
그제야 아들은 깨닫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 “혼자 일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했던 말과 “운동회라 창피해서 학교에 못 간다고? 그럼 평생 숨어 살아!”라고 했던 말이 이해됩니다. 어머니가 사랑이셨다는 것을 다시 믿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몰라요, 그거.”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겉옷을 벗어서 열심히 눈을 쓰는 어머니를 덮어드리고 안아드립니다. [출처: ‘치매 걸린 어머니가 한겨울에 눈을 쓸고 있었던 이유’, 유튜브 채널, ‘JTBC Voyage’]
먼저 사랑을 믿어야 사랑의 행위가 보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믿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머니의 모든 행위가 미움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믿으니 모든 것이 사랑으로 보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없는 사람은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랑이심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같은 성경을 보고도, 같은 십자가를 보고도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직전에는 당신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인 성령을 받으라는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에 의해 쓰였습니다. 사랑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도 하느님 사랑의 계시인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빛이시고 어둠 속에 머물지 말라고 하십니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인데, 진리는 성령의 빛으로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죄를 지은 사람 안에는 머무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요한 8,34)라고 하시고, 그들이 성령을 지니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거짓의 아비”를 따라서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요한 5,44) “아비의 욕망대로”(요한 8,44)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것이 빛이 아닌 어둠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그 어둠 속에 빠져있기 때문에 빛을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믿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죄에서 벗어나 성령을 충만히 받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편 36,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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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침 산보 길에 ‘뉴스와 강의’를 듣는 것이 저의 일상입니다. 묵주기도를 마치고 늘 하던 대로 뉴스를 들으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먹통이 되었습니다. 핸드폰을 꼈다 켜면 되곤 했기에 그렇게 했는데도 여전히 먹통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에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산보를 마무리 했습니다. 다행히 사제관에 설치된 ‘와이파이’ 덕분에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날 핸드폰에 문제가 있어서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핸드폰 문제인줄 알았습니다. 통신사 대리점엘 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리점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핸드폰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신사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정부는 그것이 사이버테러일 수 있다는 ㅣ가능성을 두고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핸드폰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통신사에 있었는데 ㅣ ㅣ핸드폰만 탓했습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새벽에 자고 있는데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문자를 하거나, 전화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일의 전후 사정을 잘 모르고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열심히 살았는데 고난과 멸시를 받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잘못 판단하셔서 악인들에게 힘을 주고, 악인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닌지 살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탄원합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한국에서라면 소비자들의 민원도 빗발치겠지만, 통신사도 오전 중에 문제를 해결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은 나라가 커서 그런지 소비자들의 민원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통신사도 아예 대리점 문을 닫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도 워낙 바쁘시기에 자신의 고난과 아픔을 미처 모르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께 민원을 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사람’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권력으로, 재물로, 업적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습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행복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행복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행복은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니코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요, 메시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영적인 눈이 멀었습니다. 예언자요, 메시아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만이 율법과 계명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듣지도 보지 못했던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박해하려했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잘못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진리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일의 종류나 일의 가치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 장소와 일을 하는 때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자세입니다. 아무리 누추한 곳이라 해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은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보여도 그곳에 탐욕과 분노가 있다면 그곳은 악취가 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곧 ‘봄’이 오면 어두운 땅 속에서 파란 새싹이 나올 것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저 풀과 꽃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더욱 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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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7,40-53: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리가 있겠는가?
초막절을 지내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과 행적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모세가 약속한 예언자(참조 신명 18,15)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 않겠느냐며 논쟁을 한다. 그분이 자라나신 나자렛에 가려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동정녀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대부분 사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점으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성전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에 압도되어 감히 예수님을 잡아서 끌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46절) 하였을 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49절)이라고 욕한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을 모르던 사람들이 율법을 내리신 분을 믿었고, 율법을 가르치던 사람들은 그분을 업신여겼다. 결과적으로 율법학자인 바리사이들은 눈먼 자들이 되었고, 율법을 모르면서도 율법을 만드신 분을 믿은 이들은 보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가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51절) 하였을 때,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52절)하고 니고데모에게 핀잔을 주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52-53절 참조). 이것이 비극이다. 믿음의 체험이 하나의 무미건조한 논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분은 우리가 올바로 알고 누려야 하는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또한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권력이나 지식이나 교만으로 쌓은 벽을 허물어야 한다. 이것을 다 헐어버릴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이 사순절의 기간이 진정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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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논란을 점진적 구조로 펼쳐 나갑니다. 전반부에서는 군중 사이, 후반부에서는 권력가들 사이의 논쟁이 나옵니다. 사회의 하층부부터 상층부까지 예수님에 대한 논란이 점차 고조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고 권력층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위험한 인물로 여깁니다. 결국 ‘위험인물’ 예수를 잡으려고 성전 경비병들까지 보내지만 그분을 체포하지는 못합니다. 경비병들조차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감탄하며 연행을 주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도층은 ‘율법’을 근거로 그들을 비난합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신망받는 율법 학자였던 니코데모가 “우리 율법에는”이라는 전제를 달며, 율법에 근거하여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심판할 수 있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결국 이에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수선한 불안과 부당한 적대감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논쟁과 격분과 폭력에 침묵하실 뿐입니다. 독서에 나오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처럼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리는 자세로 계십니다. 사람들은 논쟁하고 술렁이며 요동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한 침묵으로 마지막 때를 기다리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존엄, 전전긍긍하지 않는 태도로 아버지의 뜻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그 거리만큼 구원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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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45-52)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체포하라고 경비병들을 보낸 일은 앞의 3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는 경비병들의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힘’에 압도되어서 감히 예수님을 체포할 수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체포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입니다.>
경비병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힘’에 압도당한 상황은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31-32)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고, 그 힘에 압도당했고, 그래서 몹시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갔던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거역할 수 없는 ‘하느님의 힘’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예수님을 ‘사람들을 속이는 자’로, 즉 사기꾼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 27장을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서 ‘저 사기꾼’이라고 표현한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27,63)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라는 말은, 자기들의 생각이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라는 뜻이고, 대단히 오만한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이 ‘메시아의 일이며 말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으면 ‘메시아의 일과 말씀’이고, 안 믿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거나,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경비병들은 ‘믿는 쪽’에, 또는 ‘믿으려고 노력하는 쪽’에 선 사람들이고, 최고의회 의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 믿는 쪽’에, 또는 ‘믿기를 거부하는 쪽’에 선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라는 말에서 ‘율법’은 넓은 뜻으로 성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율법)을 모른다는 말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말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경비병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이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를 짓는 말입니다. 최고의회 의원들과 바리사이들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고, 경비병들은 그 권력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리사이들이 하는 말은, 권력으로 ‘갑질’을 하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와 같은 말입니다.>
51절에 있는 니코데모의 말은, 신명기 1장 16절-17절과 신명기 17장 4절을 근거로 한 말입니다. 그의 말은, 예수님을 변호하기 위한 말은 아니고,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한 것은 율법에 정해져 있는 절차를 지키지 않은 불법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변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 성전 경비병들을 비난하고 모욕한 것과 같은 말로 니코데모를 비난합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라는 말은, “당신도 예수와 한패인가?”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라는 말은, 니코데모가 성경을 모르고 있다고 비난하는 말이고, 경비병들에게 했던 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이라는 말과 뜻이 같은 말입니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라는 말은, “예수는 갈릴래아 출신이니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갈릴래아 지역을 비하하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들의 생각대로 제한하려고 하는 ‘신성 모독’ 발언이기도 합니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는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갓 헤페르’ 출신인데, 그곳은 나자렛 옆에 있는 마을, 즉 갈릴래아에 있는 마을입니다.(2열왕 14,25)>
바리사이들은 경비병들에게는 권력의 힘으로 ‘갑질’을 했고, 니코데모에게는 ‘다수의 힘’으로 ‘갑질’을 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힘으로 남을 억압하는 갑질은 악이고, 어둠입니다. 다수가 ‘악의 어둠 속에’ 있고, 소수만이 ‘선의 빛 속에’ 있는 상황은 인류 역사에서 흔히 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선과 악, 빛과 어둠’의 싸움이었습니다. 박해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일은, 악의 어둠이 선의 빛을 이긴 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을 뿐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빛이 어둠을 완전히 물리치고 이긴 일입니다. 신앙인들은 빛의 자녀들로서, 그 빛을 받아서, 그 빛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요한 12,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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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조윤제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
옷가게에 가보면 점원들이 겉으로는 ''어서 오세요''하면서 아래위를 주욱 훑어봅니다. 옷차림새가 제법 그럴 듯 하면 친절하게 안내도 해 주지만, 옷 차림새가 허름하면 대충 보고 가라는 듯한 표정입니다.
우리 생활 전반에 겉으로 판단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도 사람의 겉모양을 보고 나보다 좀 못하다 싶으면 은근하게 무시하는 일들..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여 말을 합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그러나 니코데모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같은 바리사이파 사람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날까? 그것은 복음의 표현대로 니코데모는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얘기를 나누어보고 그분을 만난 이후로 그분이 무언가 다른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같은 신앙인이면서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반면 같은 신앙인이면서도 예수님을 가려버리는 사람 또한 많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냥 성당에 왔다갔다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고 제 멋대로 살 것입니다. 반면에 니코데모처럼 예수님을 찾아가고 만나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삶을 살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신앙인이라면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는 이들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보냈는데 성전 경비병들이 그냥 돌아왔습니다.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진정으로 그분을 만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처럼 말하고, 그분처럼 사랑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분처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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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군중, 성전 경비병들, 수석 사제들, 바리사이들, 니코데모 사이에서도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여러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로, 군중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마태 1,1 참조), 베들레헴 출신이시라는(마태 2,1; 루카 2,4 참조) 사실 관계조차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분을 거부합니다.
두 번째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성전 경비병들에게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라며 나무랍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저지르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니코데모는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바리사이들에게서 타박만 듣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을 어떤 메시아로 생각합니까? 혹시 우리의 신앙생활이, 각자가 원하는 모습을 그분께 ‘투사’하는 것에 머무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는 유다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우리 각자의 모습에 비추어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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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분명히 그 예언자이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7,40~41)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예전에 여러 본당에 가서 사순절 특강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제 강론을 들었던 신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강론 후 신자들의 인사말과 눈길로 대충 짐작할 수는 있지만 ‘제 강론이 어떠했나요?’라고 물을 용기도 없고, 사실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저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는가, 물을 따름입니다. 또한 이젠 신자들의 반응에 따라서 저의 느낌이 업 혹은 다운되지 않기도 하고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인 반응은 다양합니다. 예수님을 예언자요 메시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평소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무시하고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흔히 ‘말의 수난’처럼 각자는 자기 식대로 알아듣기에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곡해하고 오해하고 흠집을 잡기 마련입니다.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저 역시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식대로 들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말이나 내용도 별로 달갑지 않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듣는 자가 말하는 타인에 대한 편견이고, 자기중심적 이기심에서 기인한 오만에 따른 자연적 반응이라고 느낍니다.
영화로도 보고 책으로도 읽었던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제목이 저에게 강한 이미지의 잔상을 깊게 남겼습니다. 편견, 사실 偏見이란 단어만이 아니라 偏자가 들어가는 단어는 지극히 부정적인 뜻과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별로 좋아하지 않은 글자입니다. 그런데 편견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사물 · 현상에 대하여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의견이나 견해를 가지는 태도. 다시 말해서 특정 인물이나 사물 또는 뜻밖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가지는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이나 의견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어느 사회나 집단에 속하는 다수의 사람이 특정 대상, 특히 특수한 인종이나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간직하는 나쁜 감정, 부정적인 평가, 적대적인 언동의 총체總體이다. 논리적인 비판이나 구체적인 사실의 반증反證에 의해서도 바꾸기가 어려운 뿌리 깊은 비호의적인 태도나 신념을 말한다.』고 풀이하고 있더군요. 이처럼 편견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은 예수님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모든 시대와 장소에 늘 있었습니다. 이런 편협되고 편중된 경향과 신념을 가진 부류 때문에 참으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겪고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유대인들의 골수까지 박힌 오만과 편견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7,41.52)라고 단정 짓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붙잡아 오지 않은 성전 경비병들은 지도자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7,45)라고 추궁하자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성전 경비병들은 열린 마음 곧 편견 없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면서 지금껏 자신들이 만난 그 어떤 존재보다도 순수하고 진솔하신 분이심을 금방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표현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미 자신 안에 편견의 너울이나 프리즘으로 눈과 마음이 가려져 있는 그들은 오히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는 자들이다.”(7,48~49)라고 예수님께 대한 편견과 군중들에 대한 오만을 표출하고 있잖습니까? 군중을 비난하고 무시한 그들은 바로 그 군중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사형선고 내리도록 연출한 영악하고 사악한 존재들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 하나가 다 자신들의 입지를 불편하게 하고 자신들의 처신을 난처하게 만든 예수님께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시선을 기대하지도 않지만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도대체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는 그들이 안타깝고 애처로울 뿐입니다. 그들은 이미 굳어버린 오만과 편견이라는 비늘로 눈과 마음을 가려서 보아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의 이 오만과 편견이 모순되게도 자신들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온 메시아를 자기들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입니다.
이들의 예수님께 대한 오만과 편견을 보면서 나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편견과 오만을 갖고 멀리하거나 무시한 사람이나 집단은 없었는가를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오만과 편견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가? 물론 누구한테나 크기와 깊이가 다를 뿐 편견과 오만은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두 주인공, 즉 귀족 남자 다르시가 ‘오만’에서, 평민 여자 엘리사벳은 ‘편견’을 극복하고 사랑의 존재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 역시도 그렇게 변화되고 서로 견해나 신념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르시와 엘리사벳’은 자신들 스스로 만든 ‘오만과 편견’의 덫에서 해방되었기에 서로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하나가 되는 사랑으로 환희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처럼 누구한테나 나름대로 오만과 편견이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참으로 지혜롭고 축복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사회 일부에서 일어나는 편견의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현행 국적법은 이주 아동이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도 한쪽 부모가 한국 국적이 아니면 아동의 국적 취득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이 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이 바로 지금은 사라진 새누리당의 ‘이자스민’ 의원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법안을 제출한 이자스민 의원을 향해 극우 사이트 ‘일베’와 진보 성향의 ‘오유’ 사용자 상당수가 동시에 그녀를 성토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새누리당 지지자가 새누리당 의원을 공격하고, 새정치연합 지지자도 이주민인 이자스민 의원을 비난합니다. 그녀에 대한 편견에는 이주민 혐오가 응축돼 있습니다. 특히 이자스민 의원은 이주여성이라는 점에서 이중으로 타자화됩니다. '불법체류자를 위해서 우리의 혈세를 낭비하려 한다.'는 혐오 논리입니다. 이렇게 계산된 편견은 시민인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낸 세금을 정부가 '이주민· 성소수자 같은 비(非)시민, 종북세력 같은 반(反)시민을 지원하는 데 쏟아붓고 있다.'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편견이 그녀를 몰아세워도 이자스민 의원이 숨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했다고 하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사실 그녀를 향한 일부 보수와 진보의 편견은 우리의 현주소이며 자화상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녀가 당당하게 세상의 혐오와 편견에 올바른 처신과 대응을 해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이자스민 의원에게 한 것은 곧 모든 이주민에게 한 것, 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 모두 인생을 걸어가는 동반자요 도반입니다. 이 인생길에 예수님께서도 저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몸소 오늘 이 세상의 소수자들과 이주민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앞장서서 골고타를 향해 걷고 계십니다. 우리 또한 그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길을 걸어야 하지 않나요? 영화 ‘동주’에서 정지용은 윤동주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지."라고 충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최소한도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에게만 부끄러움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단죄하였기에 사형선고를.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저 역시도 제가 더불어 이 땅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편견으로 그들을 거부하고 단죄하는 어리석은 무지와 이기적인 악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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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프랑스의 의상 디자이너 코코 샤넬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쪽 분야에 거의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저도 샤넬 복장이 현대 여성복의 시초였다는 것, 그리고 샤넬 복장을 착용한 여성이 스타일과 분위기 등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샤넬 넘버 5 향수를 뿌려야 한다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샤넬의 패션과 향수는 전 세계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창시자 코코 샤넬은 고령에도 활동적이고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결국 자리에 눕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력은 떨어지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힘들어했습니다.
1971년 1월의 어느 주일, 그녀는 리치호텔의 스위트룸에서 곱게 차려입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그녀 곁에는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런 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아! 당신이 날 죽이고 있어요.”
“당신은 날 죽이려 하시는군요!”
그리고 87세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살포시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죽는구나.”
코코 샤넬의 말대로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아파서는 안 되고, 자기는 늙어서는 안 되고, 자기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고 늙고 죽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걸어가야 할 과정인데도, 이를 인정하지 못해서 하느님께 불평불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당연한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 뜻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느끼는 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바리사이들이 니코데모에게 한 이 말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암시하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태생이 아니라 베들레헴 태생이며, 그 집안은 다윗 임금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 말씀대로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그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 그분 뜻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워서 진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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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말보다 바로 나>
요한 7,40-53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지도자들)
그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나의 말보다 바로 나>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 한걸음
만이라도
나보다
나의 말을
뒤에
두는 겁니다
나
비록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나
있어
모든 것
말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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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식은 지혜 안에서 활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교수는 ‘구약성경은 한국의 선황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도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외면한 채 자기가 아는 것이 다 인양 주장하였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이고 신약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책인 성경을 알량한 지식으로 다 알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긴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니, 성경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하더라도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살지 않는 한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경비병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7,46) 하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가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보았고, 예언자로 메시아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율법만이 보였습니다. 오늘도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주님을 제대로 만날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사심 없는 눈으로 보아야 볼 것을 볼 수 있거늘 자기 안에 갇혀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에 견주면, 성경에 무식한 경비병의 눈이 오히려 밝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체로 학자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눈에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현주) 그러니 섣불리 지식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식은 지혜 안에서 활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학사’는 ‘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 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는 ‘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랍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헛된 바람을 지니지 말고 기도와 성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뭘 좀 안다고 스승행세를 하지 말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일 수 있길 희망합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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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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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결정은 하되 단정하지 않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여러 부류가 설왕설래하는 얘기입니다. 일반 군중은 예수님이 메시아 또는 예언자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오라고 보냈던 성전 경비병들은 왜 붙잡아 오지 않았느냐고 수석 사재들과 바리사이들이 질책하자 예수께서 대단한 분이라고 합니다.
니코데모가 본인의 말을 듣고 한 일을 알아본 뒤에 심판하라는 율법을 들어 신중론을 펴자 무지막지한 말로 그 말을 막아버립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이것을 보면서 저는 ‘결정과 단정’을 오늘 강론 주제로 잡았습니다. 결정(決定)과 단정(斷定)
지도자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단정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단정이란 끊을 단(斷), 정할 정(定)이니 다른 사람의 의견은 죄다 끊어버리고 혼자서 그러니까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 교회가 많이 노력하는 시노달리따스와 정반대지요.
시노달리따스는 함께 여정을 간다는 뜻의 Synod에서 나온 말로 함께 결정하는 방식과 그런 정신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사실 뭔가를 결정할 때 제일 쉬운 방식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단체의 최고 지도자가 혼자 결정하면 다른 사람은 그저 따르는 방식입니다.
제일 쉬운 방식이지만 이것은 제일 나쁜 방식이지요.
민주주의적으로도 나쁜 방식이지만 신앙적으로도 나쁜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사람이 독점하는 방식이고, 다른 사람에겐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식이니 말입니다.
그다음 쉬운 방식이 다수결 의결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독단적인 결정 방식보다 한결 민주적이긴 하지만 제일 좋은 방식은 아니고 제일 완전한 방식도 아닙니다.
제일 좋고 완전한 방식이 바로 시노달리따스입니다. 밑에서부터 공동으로 합의를 이루어낼 때까지 서로 설득하고 계속 논의하는 방식이니 제일 완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근자에 시노달리따스를 많이 얘기하고 있는데,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지지부진한 상태이지만, 우리 교회가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사도 회의부터 십수 차례 공의회까지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 집단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우리 역사에서 이러하지 못한 적이 실제로 있었고, 우리 단체들 가운데서 이러하지 못한 곳도 많지요.
이런 면에서 제가 제일 마음 아픈 것은 저희 프란치스칸 공동체들 가운데도 이런 곳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시노달리따스 정신을 제일 잘 살아야 할 사람들이 프란치스칸인데 말입니다.
사실 프란치스칸 공동체는 Fraternitas 곧 형제적 공동체가 아닙니까? 공동체 책임자가 있지만 그는 장상이 아니라 봉사자요 수호자이고, 모든 형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모든 형제와 함께 식별하고 결정하는 존재이지 결코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단정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함을,
결정은 하되 단정은 하지 말아야 함을,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에게서 배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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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요한 7,30)
<십자가 사랑!>
오늘 복음(요한 7,12.10.25-30)은 '예수님의 때(kairos)'에 대한 말씀, 곧 '십자가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유다인들을 피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 손을 대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이유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기적을 체험한 이들에게 이 기적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셨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께서 잡히신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결정적인 때를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공관복음이 전하는 '겟세마니에서의 기도'이고, 요한복음 17장이 전하고 있는 '당신 자신과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세상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파견하신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해 십자가 나무에 매달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십자가 나무에 매달림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라고 기도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사랑이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죽는 사랑이 나와 너를 살리는 길, 함께 부활하게 하는 길입니다.
사순시기가 참으로 은혜로운 이유는, 구원과 부활의 대전제인 이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고, 이 사랑 안에 깊이 머무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돌아오라고!'
'회개하라고!'
'서로 사랑하라고!'
'용서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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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dcNRZLdl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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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요한 7, 41)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이
이제는
있는 곳이
됩니다.
바라볼수록
놀라운
신비일 뿐입니다.
예언은
신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만든
교만한
선입견에는
축복이 없습니다.
어느 누가
알겠습니까
하느님의 계획을.
선입견을
허무시며
갈릴래아를
선택하시는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쓸데없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려
노력합니다.
버려지는
갈릴래아가
아니라
살리는
갈릴래아입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살아가는
사람의 시각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맡겨두어야 할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는
막을 순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선입견을
사랑으로
다시 보게
하십니다.
감춰진 사랑
감춰진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사랑의
여정입니다.
선입견에서
빠져나와야
다시 보이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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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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