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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연 회장 - 여자 - 재미 사업가
양 력: 1946년 2월 2일 00:10
음/평: 1946년 1월 1일 00:10 여자
시 일 월 년
庚 丁 己 乙
子 未 丑 酉
戊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戌 酉 申 未 午 巳 辰 卯 寅
817161 5141 3121 11 1
대운 시작: 1세 1월 11일
현재 나이: 66 세 (2013년)
현재 대운: 丙
1946년 음력 1월 1일 자시, 경북 김천 출생
1965년 김천고등학교 졸업
1968년 남동생 자살, 가족과 미국(동부 버몬트)로 이민, 태권도장 운영, 이민 초기 미국인과 결혼, 두 번 유산으로 인한 건강 악화, 죽을 고비 넘김.
1978년 미국 여자팀을 이끌고 <국제태권도 대회> 참가.
1985년 실리콘 벨리로 이주, <라이트 하우스> 사업 시작,
1989년 LMS (Light Monitering System) 발명,
1994년 시계 무술 마스터 협회에서 Grand Master 인정서 수여함.
1995년 <라이트 하우스>가 연간 매출액 5천만 불 달성. <라이트하우스>가 미국 100대 유망 100대 기업으로 선정됨. 미주 교민회의 상 수상.
1996년 태연 김 쑈 진행 (샌프란시스코 시장, 풋볼 선수 등 유명인사를 초청해 김태연이 직접 진행하는 토크 쇼, 전미 150여개 도시에 배급, 20-40대 중반 여성 중 5-6백만 명의 시청자 확보함.
1998년 < Businessperson of the Year> 상 수상
2001년 라이트 하우스 연간 매출액 1억불 달성, 경쟁업체 PMS를 제치고 반도체 클리닝 분야에서 업계 1위가 됨, 미용(엔젤힐링), 인터넷(모닝플래닛, 테이터스토어) 등 유망 분야로 사업 확장함.
2003년 7개 사업체 운영.
年매출 1억 달러 IT 女帝, 美 TYK그룹 김태연 회장
“정월 초하루에 태어난 계집애라는 이유로 언제나 천덕꾸러기 신세였습니다. 아버지는 재수 없는 년이라고 늘 때리고 구박하셨죠. 친구들도 함께 놀아주지 않았습니다. 슬프고 괴롭고 마음 아플 때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가 바로 별입니다. 별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하곤 했죠. 이 꽃의 이름은 ‘스타게이저(Stargazer)’ 입니다. 별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김태연 회장은 자신의 자리에 놓인 꽃 한송이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얼굴로 가져가 향기를 맡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이 향기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바로 그녀가 말한 스타게이저(금자백합)다.
자신을 상징하는 꽃이다. 그녀가 가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어김없이 이 꽃이 따라다닌다. 김회장이 소유한 12만평 규모의 대저택 이름도 바로 이 꽃 이름에서 따온 ‘스타게이저’다. 김회장은 불우했던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김회장은 연 매출 1억달러인 미국 라이트하우스의 최고 경영자다. 최근 사업 다각화를 꾀해 미용분야의 엔젤힐링, 인터넷 분야의 모닝플래닛, 데이 더 스토어, 엑스닷컴 등을 거느린 TYK그룹을 이끌고 있다.
TYK는 바로 김태연 회장 본인의 영문 이니셜이다. 라이트하우스는 현재 반도체 클리닝룸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 회사로 손꼽힌다. 지난 95년에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유망 1백대 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비즈니스에서는 돈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
국내 벤처기업인 탑헤드와 사업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탑헤드는 하나의 모티터로 두 개의 화면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새로운 개념의 PC모니터인 ‘수퍼모니터’ 개발업체. 뛰어난 아이디어로 주목을 받고 있는 제품이다.
“너무나 혁명적인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상품이라면 세계 무대를 보고 한 번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라이트하우스의 실무팀이 직접 방한, 탑헤드 관계자와 미팅을 통해 사업 협력을 논의했다.
탑헤드와는 지분투자, 미국 내 합작법인 공동설립, 글로벌 시장에서의 마케팅 등에서 협력할 방침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투자금액이나 지분참여 계획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지 않은 상태.
김회장은 “비즈니스에서는 돈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며 “탑헤드와 협력하게 된 것도 바로 탑헤드 직원들 모두가 마음이 아름답고 신뢰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이 사람들이라면 같이 손을 잡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인 금액과 방법은 밝히지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탑헤드뿐만 아니라 국내 IT산업에 투자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내 외모가 곧 나의 상품”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천덕꾸러기로 생활하던 김회장은 24세때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하루 세 끼 수제비만 해먹었다고 할 정도로 고생스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 접시닦이, 화장실 청소 등 생소한 미국 땅에서 그녀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허드렛일로 고생만 하던 그녀에게 기회를 가져다준 것은 바로 태권도였다.
7살 때 삼촌들에게 배웠던 태권도가 미국 땅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허드렛일을 전전하던 김회장은 인근 학교를 무작정 찾아가 태권도를 가르치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물론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한달쯤 매달린 끝에 그녀는 결국 그곳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게 됐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것이다. 지금도 ‘캔 두’(Can Do : 할 수 있다)정신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로 통한다.
태권도를 통해서 미국에 자리를 잡았고 결국 사업가로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김회장은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공인 태권도 8단인 ‘그랜드 마스터’의 자리에 서게 됐다.
김회장의 성공 비결에는 캔두 정신과 함께 특유의 이미지 관리도 한몫 했다. 5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고유의 헤어스타일과 화장술로 자신의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왔던 것.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 “내 자신이 곧 상품”이라는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또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독특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1백년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죠. 난 항상 누구를 만나든지 오늘이 마지막 생애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이 바로 미래고 또 과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를 만나든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회사 내에서도 아랫사람이나 청소원 등 말단직원들을 먼저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십여섯의 나이에 아직 미혼이다.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녀의 말이다. 하지만 파란 눈의 아들과 며느리에 손자까지 둔 대가족을 이끌고 있다.
그녀가 모두 입양한 자녀들이다. 이 가족들은 그녀와 함께 대저택 ‘스타게이저’에서 함께 살고 있다. 김회장의 자식들은 현재 라이트하우스를 비롯한 TYK그룹의 중요한 요직들을 맡고 있다. 외국 출장 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들과 동행한다.
자녀들 모두 태권도를 통해 김회장과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이다. 모두 좋은 학교를 나와 인정받는 사회생활을 했지만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의 낙오자가 될 뻔했던 사람들이다.
부모의 이혼, 알콜중독, 마약중독 등으로 나락에 떨어졌던 그들은 하나같이 김회장을 만나 태권도를 배우면서 새로운 삶을 얻게 됐다.
가장 최근 김회장의 아들이 된 막내는 이탈리아 마피아계 출신의 망나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던 막내아들 역시 김회장을 만나 태권도를 배우면서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고, 현재 TYK그룹의 계열사인 모닝플래닛 사장을 맡고 있다.
또 약물중독자, 장애인, 공사장 막노동꾼 등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고용해 훌륭한 인재로 키우는 것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나의 성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 열린 인간개발연구원의 강연회에서 행한 김태연 美 TYK그룹 회장의 강연을 간추려 싣는다. 김회장은 23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할 수 있다(Can do)’ 정신으로 오늘날 TYK그룹을 이룬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이다.
나는 23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캐나다 국경 근처 동부 버몬트에 자리를 잡았다. 버몬트는 눈이 많고, 경치도 아름다웠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차갑기만 했다. 68년 당시는 동양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멸시와 인종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Sun is not disappear(태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구름에 가려질 뿐이다. 언젠가 태양은 다시 나와 햇빛이 비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하나의 상품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을 몰라서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 쓴 뒤 100여 집을 찾아 다녔다.
“내 이름은 김태연입니다. 나는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Hi, My name is Kim Tae Yun, I want to be your friend).” 100여 집을 다녔지만 문을 열어준 곳은 몇 집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꿈은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컸다.
어떻게 하든지 문을 열겠다는 마음이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자리잡고 있었다. 100 집 중 단 3곳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라고 했을 때 내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100 집 가운데서 3곳이라고 하면 적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어떤 집에 들어갔더니 친절한 얼굴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소린지 잘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냥 “Yes(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주인이 커피를 내 주었다. 나는 얼마나 쓰던지 첫 모금을 뱉어내고 말았다. 나는 아직까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3년간 태권도 가르쳐
나도 경상도 여자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참 고집쟁이들이 많다. 어린 시절 여자들은 정말 대접받지 못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나였지만 미국에 가면서 마음먹은 것은 빨리 미국인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빨리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그곳에 간 첫째 목적은 일자리를 얻는 것이었다. 한 달을 계속 찾아갔지만 반응이 없었다.
한 달을 넘기자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사전을 찾아 적어 놓았던, 태권도를 가르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다치는 것이 싫다며 거절을 하였다.
나는 태권도란 그런 것이 아니며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다시 설명하였다. 그랬더니 1주일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1주일이 지난 후 다시 찾아갔다. 교장선생은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회를 달라고 했다. 기회를 줘 보고 만족스럽지 못하면 그 때 다시 생각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다.
월급도 필요 없다고 했다. 돈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경험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해 말 나는 최고의 선생님으로 선정되었다. 오후 3시에 수업이 끝난 다음 체육관에서 일반인과 선생님들을 상대로 교육을 하고 밤에는 화장실 청소까지 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주유소에서 일을 했다. 그 때 나는 노래를 부르면서 생활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책임을 다하자고 생각했다. 나는 청소 일에 평생 머무를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나는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라는 마음을 깊숙이 가지고 있었고 지금은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삶에는 항상 역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항상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3년을 일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좋은 학벌을 가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최고의 학교, 인생의 학교에서 정신의 공부를 하였다. 나는 1946년 정월 초하루 자시에 태어났다. 당시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
그런 때에 어머니가 배가 아프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손자가 나오니 조상님도 이해를 하실 것이다”며 제사를 미루고 기다리게 하셨다. 대를 이을 손자가 나온다고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핏덩어리에게 고추가 없자 할머니는 “아이구, 김씨 집안도 망했네”라고 하셨다. 그런데 바깥에서 할아버지가 “우리 손자 고추가 얼마나 큰가”하고 물어왔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고추가 없다고 하자 다시 찾아보라는 명까지 내렸다고 들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그 즉시 제사상으로 달려가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벌을 주십니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이런 출생으로 나는 설날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재수 없는 계집아이의 생일이라는 것이 식구들에게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함께 하는 팀워크 부족
우리 회사에는 공채가 없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빨리 평가한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서류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서로를 믿는 것이다.
공채가 없다는 것은 사랑과 인내와 보호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부하 직원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보답을 해 준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에 못 미친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팀워크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은행돈을 빌리지 않는다. 나는 사업을 새로 하는 사람에게 3년 동안은 이익을 낼 생각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모두 회사에 재투자하라고 얘기한다. 나는 몇 개의 회사가 있지만 서로간에 돈을 대주지 않는다. 내가 맨손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내 자식들에게 그 힘을 물려주고 싶다. 내 손녀는 11살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그냥 주지 않는다. 자립정신,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물려주고 싶다. 아이가 돈을 쓰고 싶다고 하면 왜 하고 싶은지 물어보고 주었다.
잔디를 깎고, 접시를 닦으면 용돈을 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손녀의 손을 잡고 은행으로 간다. 그리고 계좌를 만드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을 5∼6살 때부터 가르쳤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그렇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다 해주려 한다. 또 기업을 할 때 청소부부터 챙기라고 얘기한다. 미국에서는 훌륭한 사업가들이 가난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다.
인텔의 시작도 차고였다. 나는 가끔 변장을 하고 직접 청소를 한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이 회사에 대해, 상급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 다음으로 오늘을 마지막 생애로 생각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사람들은 오늘을 잊어버리고 100년을 살 것처럼 생각한다. 현재가 바로 우리의 미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오늘의 할 일을 진실을 다해 하라고 얘기한다.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경우도 많다.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생애가 더욱 멋지게 펼쳐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신의 3년 후의 바람을 생각해 보라.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이렇게 해 보라.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하나씩 벗을 때 힘든 일들을 하나씩 벗어버린다고 생각하라. 몸을 씻을 때 어려움도 하나씩 씻겨 내려간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샤워실을 나올 때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시작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두려움이 들었을 때 그것을 이겨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대신한다.
젊음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 기울여
- 어떻게 태권도를 시작했으며, 미국에 간 경위는. 한국에서도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6세가 끝나고 7살 때 외가집에서 지냈는데 삼촌이 8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새벽마다 고함소리가 들려와서 보니 외삼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댔다. 삼촌들은 여자아이가 무슨 운동이냐며 거절했지만 결국 내 고집에 꺾여 가르쳐 주었다.
지금 시애틀에 있는 그 삼촌을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미국에 간 이유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고 어머니를 자주 때리셨다. 그리고 첩이 5명이나 있었다.
어느 날 남동생이 어머니와 나를 때리는 것을 말리다가 많이 맞았고 자살을 해 버렸다. 나는 너무나 상처를 받았고 도망가다시피 떠났다. 내가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아마도 굉장히 불행했던지 성공했던지 했을 것이다. 여러분 판단에 맡기겠다.
- 나이와 상관없이 젊음을 유지하고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사는 비결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자신의 몸을 쓰레기통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 목을 보면 아직 주름이 없다. 손은 젊은 사람 같다. 그것을 위해 나는 많은 노력을 했다. 지금도 잠은 2시간밖에 자지 않고 매일 운동을 한다. 그리고 기운동과 공부를 한다. 외부적으로 받는 도움은 우리 회사의 스킨케어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유일하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의 때를 벗는 것이다.
- 강연을 듣고 나니 마음이 상쾌해졌다. 김 회장이 느끼는 한국 여자와 남자의 인상은.
한국 여성들은 매우 훌륭하지만 서로 밀고 당겨주는 힘이 부족하다. 서로 힘을 합하면 무궁무진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둘째가 한국 남성들 흉내내는 것을 보면 유머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남성들은 권위를 찾는다. 사진을 찍으면 웃다가도 폼을 잡는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을 더 해야 한다. 기존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분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실리콘밸리 신화 이룬 김태연 회장의 영화 같은 인생 이야기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김태연 회장은 기자들의 명함을 받으며 꼭 기억하겠다는 듯 이름을 힘주어 읽었다. 그리고 인터뷰 내내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불렀다. 악수는 손을 감싸 쥐며 가볍게 흔들면서 당당하게 해야 한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다정스러운 자신감은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 당당함과 진실함은 아마도 오늘의 그를 만든 비결이었을 것이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받았던 냉대, 성공의 밑거름이 되다
정월 초하루 자시, 제사를 준비하고 있던 김씨 문중 사람들은 종손 며느리의 진통에 제사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뒤흔들 장군감’� 기다리던 식구들의 기대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사그라졌다.
아이를 받아낸 할머니는 “김씨 집안 다 망했네”라며 부엌에서 끓고 있던 미역국을 솥째 내동댕이쳤고, 태어난 아이가 여자임을 확인한 할아버지는 조상 앞에서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큰 벌을 주십니까?”라며 통곡을 했다.
세계를 대표하는 여성 리더로 인정받고 있는 김태연 회장(62)은 그렇게 태어났다. 아무도 축복해주지 않았던 출생의 순간은 낙인이 되어 자라는 내내 그를 힘들게 했다.
가족들의 싸늘한 시선은 상상할 수도 없는 구박과 냉대로 이어졌고, 술주정이 심했던 아버지에게는 무관심과 폭력을, 한 맺힌 어머니에게는 원망을 받아야만 했다.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도 그를 ‘재수 없는 아이`’라고 부르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참 많이도 받았어요. 내 눈물을 채우자면 한강도 넘칠 거예요. 항상 ‘너는 안 돼’라는 말을 듣고 자랐어요. 정월 초하루에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요.”하지만 지금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위치에 섰다.
그는 반도체 장비 회사인 라이트 하우스(Lighthouse Worldwide Solutions)를 비롯해 모닝 플라넷, 데이터 스토어X, 엔젤힐링 등 6개 회사를 소유한 TYK 그룹의 회장이자 태권도 도장인 ‘정수원’을 운영하는 태권도 8단의 여성 최초 ‘그랜드마스터’다.
라이트 하우스는 실리콘밸리가 벤처 위기로 무너져가던 때에도 성장을 거듭해 동종 업계 1위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는 우량 회사이며, 그가 진행하는 ‘태연 김 SHOW’와 직접 출간한 책들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사람들은 제게 ‘어떻게 그런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참 힘들었겠어요’ 라고 얘기하죠. 네. 정말 어렵고 고통스러웠어요. 하지만 좌절과 시련은 누구나 겪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쓰러져버려요. 인생은 전쟁이니까요. 저도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의 무기는 ‘눈물을 알았다’는 것이라는 점을요.”
아픔을 겪었고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 시간들은 김태연 회장에게 밑거름이 되었다.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정말 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절실히 했고 탄탄하게 자신을 갖추려 노력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과 공상을 구별하지 못해요. 흔히 공상을 꿈이라고 생각하고 좇으려 하는데 그건 틀렸어요. 냉정하게 판단해서 꿈을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꿈을 정했으면 레이저를 쏘듯 집중해서 파고들어야 해요.”
‘할 수 있다’는 도전 정신은 인생의 필수 준비물
그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면 자동적으로 따라붙는 말이 있다. 바로 할 수 있다는 ‘Can Do’ 정신. 지난 2001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CAN DO쇼’를 열어 감동을 준 바 있다.
‘김태연=Can Do’라고 연결될 만큼 고유명사처럼 사용된다. “저는 버스를 탈 줄 알고, 전화를 걸 줄 알고, 화장실에 갈 줄 알고, 입에 밥을 떠 넣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꿈을 가지고 마음속에 그리면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포기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은 ‘재수 없는 가시나’였던 김태연을 ‘한국을 빛낸 55인’ 중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맨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사람들을 사귀고, 사무실을 겸한 방 한 칸으로 잘 알지도 못한 사업에 뛰어든 일화들은 유명하다.“멸시와 배척은 한국에서만 겪었던 것이 아닙니다.
스물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면서 동양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버몬트에서의 삶이 시작됐죠. 영어 한마디 못하는 조그만 동양 여자아이를 누가 좋아했겠어요?
‘내 이름은 김태연입니다. 친구가 되고 싶어요’라고 쓴 종이를 들고 1백 채의 집을 돌아다녔어요. 딱 세 군데서 문을 열어주더라구요. 끊임없이 두드린 결과, 사람들이 마음을 열어줬어요.”
사업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통 이민자들은 식당이나 세탁소, 미용실 등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뛰어들었다. 신앙의 힘으로 반드시 잘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출발했지만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며 손가락질했다.
집까지 팔아 돈을 마련했고 근처 식당에서 개 먹이로 쓰라고 공짜로 주던 소 뼈다귀를 매일같이 얻어와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오늘의 이 시간을 기대하면서 고생과 동고동락했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라’는 말처럼 중심으로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무작정 실리콘밸리로 옮겨 부딪치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계약을 할 때도 다른 업체에서는 10만 불에 체결되는 걸 우리에게는 70만 불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들은 제가 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저는 ‘좋아, 이번은 내가 손해 보마’라는 생각으로 승낙해요. 그리고 최고의 기술과 정성, 믿음을 보여주는 거죠. 지금 당장 눈앞의 것만 계산해서는 사업을 할 수 없어요. 멀리 내다보고 판단한 뒤 공격적으로 움직여야 해요.”
도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실을 다지고 정성으로 모든 일을 대하는 것이 기본이다.
김태연 회장은 자신도 ‘상품’임을 항상 잊지 않는다고 한다. 한번 보면 누구나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화려한 외모 또한 ‘인생 전략’이다. “살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상대방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상대의 시선을 잡아 끌 수 있을까 고민해요.”
내면을 보여줄 기회를 얻기 위해 우선 상대방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려면 특징적인 외모만큼 좋은 것도 없다. 이렇다 할 배경도 없는 조그만 동양 여자로서는 보통 사람들과 동일한 출발선에 서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이다. 화려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은 어떻게 보면 필수적인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듣는 말이 ‘Are You Chinese or Japanese? (당신 중국인이에요? 아니면 일본인?)’였어요. 그들 눈에는 다들 비슷비슷해 보이니까 그랬겠지만 그 소리가 정말 듣기 싫더라구요.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머리도 올리고 화장도 하고. ‘튀는’ 외모 덕분에 다들 중국인도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김태연’으로 기억해요. 외모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이야기를 먼저 건네기도 하구요. 만나는 사람들, 혹은 그 자리의 성격에 맞춰서 옷을 입어요.”
그는 인터뷰 자리에 꽃이 수놓인 연두색 정장을 입고 나왔다. 인터뷰에 임하는 오늘의 ‘전략’을 물었다. “초록색을 기본 컬러로 선택한 것은 편안한 마음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고 싶어서예요. 오랜만에 친정(한국)에 왔으니 잘 보이고 싶거든요(웃음). 이 꽃은 국화예요.
내 동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국화 같은 누나, 내 몫까지 잘살아줘’라고 글을 남겼어요.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국화처럼 씩씩하고 멋지게 잘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동생도 봤으면 해서 입었습니다.”
그가 화장과 옷차림만으로 외양을 가꾸는 것은 아니다. 올해로 62세가 됐지만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체력과 활기를 가졌다. 태권도로 다져진 몸은 군살 하나 없이 탱탱하고 손이나 목도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운동은 종류 상관없이 두루 좋아해요. 태권도야 말할 것도 없고 축구, 야구, 탁구 다 즐겨요. 도전을 즐기기 때문에 스카이다이빙 같은 것도 즐겨요. 그리고 늘 긍정적으로, 계획적인 생활을 유지하려고 애쓰죠.”
서로의 가슴속 상처를 품어 안으며 만들어진 가족의 인연
엄청난 부와 성공을 거뒀고 후회 없이 모든 일에 도전해왔던 그도 사실 아쉬운 점은 있다.
“어렸을 땐 다들 나보고 못생겼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고 또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해봤어요. 연애를 하면 어떨까 궁금하네요. 지금이라도 나를 사랑해주는 멋진 남성이 나타난다면 좋겠지만…. 나는 연애도 열정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용기 있는 남자가 없네. 하하.”
이민 초기, 주변의 권유에 떠밀려 한 미국 남자와 결혼을 했었다.
하지만 서러웠던 어린 시절만큼 남편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의 인종 차별과 멸시 또한 매서웠다. 그 시절 그는 두 번이나 유산을 했고 의사로부터 ‘장례 치를 준비를 하라’는 선고를 받을 만큼 죽을 고비도 넘겨야 했다. 결혼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지만 그의 곁에는 소중한 자녀들이 있다.
그에게 태권도를 배우다 양자가 된 6남 3녀.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마약과 폭력, 섹스로 얼룩진 생활에 빠져 있던 아이들이었지만 김태연은 이들이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보듬었다.
따뜻한 정과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맺은 자녀들은 이제 그의 가장 큰 보물이 되었다.
자녀들은 든든한 사업 파트너로, 능력 있는 직원으로, 유쾌한 아들로, 다정한 며느리로 모습을 바꿔가며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 또한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이 ‘어머니’란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말할 만큼 자녀들을 아낀다.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 아들이 ‘햇볕정책’에 대해 질문을 했더니 김 전 대통령께서 놀라시더라고요. 저는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음식까지 가르쳤어요. 내가 한국인이니까 아이들에게는 어머니의 나라잖아요. 한국의 효를 배워서일까요? 정말 놀랄 만큼 효자들이에요.”
눈물겨운 기억만 가득한 한국 생활이었지만 김태연은 한국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뿌리는 잘라낼 수 없기 때문이란다.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만큼, 외국인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는 이름이 있을 법도 한데 김태연에게는 외국 이름이 없다. 덕분에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태연’이라는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리고 그가 한국 사람임을 꼭 한 번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앞으로 그의 꿈은 ‘김태연 같은 사람을 많이 키워내는 것’이다. “내가 잘났으니까 나 같은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나의 ‘성공’이 아니라 나와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을 키우고 싶은 거죠.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이겨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어려운 아이들과 특히 여성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요. 엄마가 아이를 키우잖아요.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인내를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엄마니까 여성들의 역할이 무척 크죠.”
사회 교육 사업에 힘을 쏟고 싶다는 그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교과서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끊임없이 도전한 김태연 회장의 성공을 보며 사람들은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스스로 훌륭한 브랜드가 되어야 해요. 자기만의 생각에 깊이 빠지지 말고 유연한 사고로 어떤 일이든 포기하지 않으면서요. ‘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나는 왜 못해요? 할 수 있어요! Can Do!”
김태연 회장은 어떤 사람???| 우리들의 이야기
GTF.프레타 |조회 180 |추천 0| 2009.06.1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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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사고/국제성/창의성/발상의 전환/극기와 성공신화 등을 통해 세계속에 각인된 자랑스런 한국인
미국 100대 우량기업 중 하나로 선정된 성공한 벤처기업 '라이트하우스'의 CEO는 바로 김태연. 사무실을 겸한 방 한 칸에서 사업을 시작한 그녀는 이제 5개 회사의 CEO가 되었고, 12만평 대지의 대저택에서 살고 있다. 모국도 아닌 곳에서 더욱이 여성이 어떻게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스물세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작한 일이 구정물 냄새 맡아가며 쓰레기통 치우는 청소였는데 아주 신바람 나게 일했습니다. 딸이라서 받았던 설움 대신 동양사람 냄새가 난다는 비아냥에 시달렸지만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일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성공해서 한국 땅을 밟을 것'이라고 결심하자 한국에서 받았던 천덕꾸러기 대접은 오히려 오기가 되어 험난한 삶을 헤쳐나가는 저력이 되었다고....
1985년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한 라이트하우스는 10년만인 1995년 연간매출액 5000만 달러를 달성하면서 미국 유망 100대 기업으로 선정됐으며, 2001년 매출 1억 달러를 달성하면서 업계 1위로 정상에 섰다. 실리콘밸리가 무너지는 현실에서 라이트하우스의 성장은 교민사회에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최첨단 기술만이 살아남는 실리콘밸리에서 그녀의 유일한 무기가 된 것은 'Can Do' 정신. 모두들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했을 때 그녀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믿고 채용해 그들과 함께 회사를 일궈냈다. 이러한 김태연만의 독특한 경영철학과 조직관리를 통한 성공비결을 알아본다.
▒ "나도 상품이다"
항상 완벽한 메이크업과 정장. 자신을 상징하는 헤어스타일과 꽃(Stargazer,금자백합)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김태연은 뛰어난 Self-Marketing 능력으로 필요하다면 자신을 철저히 상품화시켰다. 또한 중요한 미팅은 월요일에 잡지 않는다.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의 취향에 맞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 나는 5분 후에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만난다 등 나름대로 대인관계의 원칙을 정한 고차원적인 매너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공채는 없다"
과거 약물중독자, 공사장 인부, 백화점 안내원 및 장애인 등으로 구성된 라이트하우스. 김태연은 현재의 능력보다는 그들의 사람 됨됨이를 보고 채용을 결정한다. 그 이후 그에 맞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끔 지원하며 끊임없는 신뢰와 정을 쏟아주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라이트하우스의 거의 모든 사원들은 10년 이상을 김태연과 함께 회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 "은행돈은 NO"
많은 사람들은 사업하면 초기 자본금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나 김태연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오늘의 성공에까지 왔다. 남의 돈을 얻어 사용하게 되면 꼭 해내야겠단 마음가짐 자체가 약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김태연의 모든 회사사이엔 계열사간 지급 보증, 자본유동은 없으며 주식투자 또한 하지 않는다.
▒ "청소원부터 챙긴다."
'사업은 곧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진 김태연. 회사의 작은 일을 맡아하는 사원일지라도 그들과 대화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항상 사기를 북돋아 준다. 그래서 그의 막내아들 아담에게 처음 시킨 일이 바로 세일즈였고 그 과정을 통해 사업에 있어 사람의 중요성, 경영자의 자질 등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
김태연의 일과표를 보면 하루에 두 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는다. 시간을 아껴 알뜰하게 사용하다 보면 하루가 24시간이라도 모자란다는 말이다.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 여긴다면 매 순간 만나는 사람들에겐 최선을 다하게 되고 생활에 있어선 준비하는 자세가 갖춰 줘 훨씬 효율적인 삶을 꾸릴 수 있지 않겠냐는 그녀만의 지론인 셈이다.
김태연에게는 CEO의 능력 외에도 특별한 것이 많다. 여성 최초의 미국 공인 태권도 8단의 'GrandMaster', 1996년부터 시작해 미국 150여 개 도시에서 방송되는「태연김쇼」의 진행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그녀를 만나 올바른 인생을 살게 된 6남 , 그들의 '어머니' 역할까지 하고 있는데. 이러한 김태연의 다양한 모습을 엿본다.
▒ CEO
CEO라는 호칭은 그녀의 현재의 성공을 가장 잘 상징한다. 1985년 무작정 캘리포니아로 건너와 소프트웨어, 비디오게임 개발로 라이트하우스를 시작해 1989년 집적회로나 하드드라이브, 의료기기 등 청정실 오염방지에 필요한 LMS(Lighthouse Monitoring System)를 개발하고 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라이트하우스가 개발한 LMS는 현재 실리콘밸리의 Museum of Innovation에 전시돼 있고 미국 굴지의 반도체회사와 삼성전자 등에 납품될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이제 7개의 해외지사를 가진 라이트하우스는 반도체 장비(클린룸 모니터링 시스템) 분야에서 업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무도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던 시절 컴퓨터 사업의 유망함을 간파한 것은 그녀만의 慧眼이자, CEO로서 그녀의 자질을 증명한다. 지금도 김태연은 장래 성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미용과 인터넷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리한 확장은 금물. 그녀는 여태까지 사업을 하면서 한번도 은행돈을 쓴 적이 없다. 또한 김태연의 남다른 인간경영 능력은 모든 회사 직원들이 끈끈한 정으로 하나가 되게 만들어 회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 GrandMaster
GrandMaster는 낯선 미국 사회에서 성공한 그녀의 집념을 잘 나타낸다. 한국에 살던 시절 김태연은 '계집애가 무슨 태권도냐'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굴하지 않고 7세 때부터 태권도를 익히기 시작했다. 스물넷에 미국으로 이민, 3D 직종을 전전하던 그녀는 무작정 인근학교를 찾아가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겠다고 끈질기게 교장을 설득해 한 달 만에 허락을 받았다. 그 이후 그녀는 태권도를 통해 미국 사회에 적응했고, 마침내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 공인 태권도 8단의 GrandMaster라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 어머니
그녀에게는 6남의 자식들이 있다. 그들은(총 6남) 김태연과 함께 모여 살며 그녀를 진짜 어머니처럼 극진히 섬긴다. 자신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방황하던 시절 어머니의 매서운 가르침과 사랑 덕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남 격인 Scott Salton은 45세 유태인으로 미국 코네티켓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IBM에서 근무한 재원이다. 젊은 시절 마약과 알코올 중독으로 직장마저 잃을 위기였던 그는 김태연을 만나 태권도를 배우게 된 후 올바른 인생에 접어들었고 지금까지 20여 년째 한결같이 다정한 모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와 함께 라이트하우스 창립공신인 둘째 Michale Fell(現 정수원 운영), 셋째 Thomas Saunders(라이트하우스 부사장)도 사연은 비슷하다. Michale은 뉴욕 롱아일랜드 출신으로 금융 명문인 Fell가 출신이다. 스위스와 영국에서 유학까지 했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18세부터 마약 중독으로 시달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가장 최근 아들로 맞은 여섯째는 이탈리아계 마피아 집안 출신으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고 오직 윈드서핑에만 관심이 있었던 Adam Giandomenico. 그는 태연을 만나 심신수련을 하며 1990년, 1991년 두 해 연달아 전미 윈드서핑 선수권대회에서 챔피언이 되었다. 현재 그는 필리핀에 본사를 두고 있는 모닝플래닛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러한 김태연 회장의 성공비결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특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는데
첫째, 누군가 할 수 있다면 본인도 물론 할 수 있다는 적극적 사고의 구현이며 둘째, 미국사회에 객체가 아니라 주류로서 참여하는 국제성의 구현이며 셋째, 새로운 변화에 창조적으로 적응하는 발상의 전환과 창의성의 구현이며 넷째, 태권도 정신을 바탕으로 한 한민족정신과 극기정신의 구현 등을 통하여 세계속에 각인된 자랑스러운 한국인 - 바로 오늘의
김태연박사가 고난을 넘어서 대중 앞에 우뚝 서게 되었다 할 수 있겠다.
<김태연 회장 약력>
1946 음력 1월 1일 경북 금릉 출생.
1968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미국 동부 버몬트). 태권도장 운영
1978 미국 여자팀을 이끌고 '국제태권도대회' 참가.
1985 실리콘밸리로 이주 '라이트하우스' 사업을 시작.
1989 LMS(Lighthouse Monitoring System) 발명.
1994 세계무술 마스터 협회에서 GrandMaster 인정서 수여함.
1995 라이트하우스'가 연간 매출액 5000만 불 달성. '라이트하우스' 미국 유망 100대 기업으로 선정됨. 미주 교민회의 상 수상
1998 <Businessperson of the Year>상 수상
2001 라이트하우스 연간 매출 1억불 달성(경쟁 업체 PMS를 제치고 반도체 클리닝룸 분야에서 업계 1위가 됨). 미용(엔젤힐링), 인터넷(모닝플래닛, 데이터스토어 x.com) 등 유망 분야로 사업 확장. 태연김 쇼 진행(1996년부터 제작. 샌프란시스코 시장, 풋볼선수 등 유명인사를 초청해 김태연이 직접 진행하는 토크 쇼. 전미 150여 개 도시에 배급, 20~40대 중반 여성 중 5~6백만 시청자 확보).
2002 캘리포니아주의회가 선정하는 '올해의 여성상'
YWCA가 여성의 지위와 지도력 향상에 기여하고 정의와 평화를 정착시킨 여성에게 주는 TWIN상 수상
2003 숙명여대 경영학 명예박사학위 .
실리콘 밸리 "라이트하우스" 40여개 신제품 개발 공로
2004 여성 최초로 마국 공인 태권도 8단으로서 반도체 장비회사 회장
등으로 잘 알려진 동포 여성기업인으로 선정돼 화제가 되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 소재 라이트하우스 월드와이드솔루션사의
김태연(59) 회장은 지난 새크라멘노에서 열린
2004년도 캘리포니아주 "상공인상" 시상식에서 40여개의 신제품
을 공로를 인정받아 기업부문상을 수상했다.
[출처] 김태연회장 이야기|작성자 임시물개
많은 사람들은 김태연 회장을 단순히 성공한 기업인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실리콘 밸리의 작은 거인’, ‘여성 최초의 그랜드 마스터’, ‘미국 100대 우량기업 여성 CEO’, ‘김태연 Can do’. 그녀의 이름 앞에 붙는 수많은 수식어들은 그녀가 미국에서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있는지를 대변해준다. 반도체 장비회사인 라이트 하우스와 웹사이트 전문회사 모닝 플라넷, 놀스타, 데이터스토어X, 엔젤힐링 등 유망 하이테크 산업의 최고 경영자일 뿐만 아니라 정수원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미국 최초의 여성 그랜드마스터로서 젊은이들에게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심어주고 있다.
주변에서 모두들 성공을 인정하고 있는 그녀는 그러나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턱없이 무시당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64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그녀는 정월 초하루가 시작되는 밤12시 무렵에 첫 울음을 터뜨려 온 집안 집안 사람들로부터 ‘세상을 흔들 장군감’이란 기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도 잠시였을 뿐 태어난 아이가 사내가 아니라 계집아이라는 사실은 가문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진 시련이 시작되었다. ‘집안을 망하게 할 아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늘 싸늘한 시선을 받아야 했으며 특히 아버지의 지독한 냉대는 어린 마음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그녀의 유년 시절은 그렇게 눈물이 마를 새 없이 지나갔다.
그녀의 고난은 미국 생활에서도 그칠 줄 몰랐다. 고향에서 제대로 기 한번 못펴고 지내다가 23세 때 가족들과 함께 이민길에 오른 그녀는 유색인종으로서 겪어야 할 갖은 어려움은 다 당했다. 어린 시절 배운 태권도로 도장을 운영을 할 때나 자신의 사업을 꾸려 나갈 때도 혼자 넘어야 할 산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스스로를 다잡았다. 할 수 있다는 마음,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라는 신념으로 버텨다.
현재 그녀가 운영하는 라이트 하우스는 연매출이 1천5백억원을 기록하는 우량기업이며 환경, 컴퓨터, 인터넷, 피부미용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확장 시켰다. 사업뿐만 아니라 태권도 도장인 정수원 아카데미의 그랜드 마스터로, 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인 ‘태연 김 쇼’ 진행자 등 미국 내 저명인사들의 반열에 올라있다. 그녀는 분명 성공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성공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POINT 1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올해 초 김 회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을 했다. 지난 96년 방문 이후 5년 만에 다시 고국을 찾은 그녀는 이번 방문을 통해 사람들의 뇌리에 자신의 오랜 신념을 깊이 심어주었다. 지금까지 숱한 고생 속에서도 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Can Do’를 잊지 않았던 그녀는 프로그램 마지막에 특유의 강한 목소리로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왜 나라고 못하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녀의 성공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수많은 기업체와 학교들로 쇄도하는 요청을 수락, 강연을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 인터뷰에 응한 그녀는 그 자리에서도 자신의 성공 포인트는 ‘할 수 있다’는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인생을 결정짓는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안된다고 생각 때문에 조바심을 내고 자학을 하는 것처럼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자신의 발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을 왜 자신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까? 모든 일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부터 출발을 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꿈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이 발로 성공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POINT 2 도전하는 자만이 성공을 만난다
성공을 한 사람의 공통점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바로 도전정신이다. 김 회장 역시 남다른 도전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 특히 그녀의 인생을 살펴보면 무엇 하나 쉽게 이루어진 것이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은 그녀로 하여금 세상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신감으로 도전하는 자세를 갖추게 했다.
그녀가 미국에 갔을 때까지만 해도 그곳에서는 동양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버몬트에 새로운 둥지를 튼 그녀는 자신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새로운 터전에 적응을 하기 위해서는 친구가 필요했지만 누구 하나 마음을 터놓고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그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기로 결심했다. 흰 종이에 큰 글씨로 ‘내 이름은 김태연입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문구를 적어 피켓을 만든 그녀는 그것을 들고 무작정 마을을 돌았다. 하루에 백 군데를 돈다는 목표를 세운 그녀는 집집마다 방문해 초인종을 눌러댔다.
대부분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창 밖으로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방문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씩 문을 열고 악수를 건네거나 집 안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을 홍보하고 다닌 그녀의 노력은 마침내 마을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이웃들도 점점 늘었다. 미국에서의 첫 도전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녀가 미국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된 것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도전이었다. 버몬트의 한 고등학교의 교장을 찾아가 무작정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작은 동양여자가 되지도 않는 영어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하니 학교 측으로서는 쉽게 믿을 수 없었지만 워낙 당당하고 열정이 느껴져 수업을 허락했다. 그녀가 미국에서 최초의 여성 그랜드 마스터가 되는 첫 출발이었다.
그녀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결국 사업으로까지 이어져 1985년 오랫동안 머물렀던 버몬트를 떠나 캘리포니아의 산호세에서 새로운 둥지를 마련, ‘라이트 하우스’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하고 컴퓨터 사업을 시작했다. 버몬트에서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찾아 왔다가 양아들이 된 스캇과 마이클, 토머스가 그녀를 도왔다. 실리콘밸리의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POINT 3 포기라는 말을 사전에서 지운다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면서 성공에 대한 확신도 있었고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의지로 치밀한 계획도 세웠다. 넉넉하지 않은 자금으로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에 들어갔다.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열심히만 하면 자리를 잡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넘치는 의욕과는 달리 현실은 냉혹했다. 집에 마련한 작은 사무실에 컴퓨터 몇 대가 고작인 새로운 업체를 알아주는 곳은 없었다. 게다가 워낙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돈을 아껴쓰기 위해 늘 수제비와 고구마로 끼니를 이어갔다.
처음 의뢰가 들어온 프로젝트를 위해 매일 밤을 꼬박 새가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6개월씩이나 늦게 완성을 하는 등 처음부터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일이 들어오지 않아서 수제비 만들 밀가루를 살 돈이 없을 때도 있었다. 하루하루가 버티기 힘들만큼 어려운 적이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 사업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털렸을 때도 꿋꿋하게 버텼던 그녀였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라이트 하우스가 미국 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것도 어려움 앞에서 포기하기보다는 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녀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은 사업에서뿐만 아니라 태권도장을 설립하고 그랜드 마스터가 되는 과정에서 더 감동적으로 나타난다. 버몬트에서 오래된 창고같은 허름한 건물의 2층을 빌려 도장을 열었을 때 그녀가 겪은 시련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끔찍했다. 동양인 여자가 운영하는 체육관이라고 해서 허가를 내는 것부터 애를 먹이더니만 ‘더러운 동양 여자는 나가라’, ‘동양인은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등 갖가지 욕을 하는가 하면 도장안에 쓰레기를 던지는등 심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저에 대한 그들의 시기와 질투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이 저를 주저 앉히지 못했죠. 오히려 제 자신을 더 채찍질 했습니다. 그런 모욕을 받을 때마다 반드시 성공을 하리라고 결심을 했으니까요.”
힘들 때마다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 목놓아 울면서도 그들보다는 강해지고 단단해져 언젠가는 성공하고 말겠다고 스스로를 다졌다는 그녀는 무슨일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승자의 미소를 갖게 되었다.POINT 4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한다
현재 그녀는 산호세에서 15만 평의 대지에 ‘스타게이저’라는 대저택에서 살고 있다. 오래 전 자신과 인연이 없는 남자와의 결혼을 접은 그녀는 6명의 아들과 세명의 딸을 입양해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들은 현재 그녀의 사업을 이끌고 있는 주춧돌이기도 하다. 그녀는 현재 자신이 이룬 성공도 자녀들로부터 얻은 ‘어머니’란 이름에 비하면 하찮을 것일 뿐이라는 말을 할 만큼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녀와 좋은 관계로 만난 것은 아니다. 이들이 지금의 어머니인 김 회장을 만나기 전에는 결손가정의 자녀들이었으며 폭력과 마약, 섹스 등 사회의 어둠속을 떠돌던 그야말로 문제아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런 아이들을 그저 쉽게 판단하고 가까이 하기조차 꺼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사실 이들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부에는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그 재능을 높이 샀다.
대부분 자신의 도장을 찾아와 태권도를 배우면서 김 회장과 사제지간으로 만나기 시작한 이들은 그녀가 보여준 따뜻한 정과 인간적인 마음에 이끌려 모자의 인연을 맺었다. 특히 김 회장으로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은 이들은 과거의 어두웠던 생활은 완전히 잊고 지금은 모두들 김 회장의 그룹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녀가 지금의 성공을 이루기까지 6남3녀의 역할은 눈부심 자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이들 모두가 과연 외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극한 효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일이라면 모두들 자다가도 달려나올 정도며 어머니의 말이라면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지킨다.
김 회장에 대한 태도는 비단 양자가 된 6남3녀뿐만 아니다. 그녀의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 그리고 그녀가 설립한 정수원에서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많은 제자들이 그녀를 대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이는 곧 그녀가 그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거 진실하게 대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녀는 자신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원들을 위해 파티를 자주 여는 편인데 언제나 가족을 동반하라고 이른다. 그리고 파티가 열리면 가장 말단 사원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내고 그들의 능력을 아낌없이 칭찬한다. 가족들 앞에서 회장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사원이 더욱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OINT 5 내 자신도 ‘상품’임을 잊지 않는다
김 회장을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그녀의 화려한 외모에 먼저 눈이 가게 된다. 스스로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다고 밝힐 만큼 그녀의 복장은 눈에 띤다. 화장도 보통 사람들에 비해 짙다. 인터뷰를 위해 김 회장을 만났을 때 그녀는 선명한 빨간색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오른쪽 가슴에 하트 모양의 브로치를 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복장은 철저하게 상대를 배려한 것이라는 것을 한참동안 대화를 나눈 후에야 알게 되었다.
“레이디경향은 여성 독자들이 많은 잡지죠? 그래서 일부러 빨간색 의상을 선택했어요. 만일 잡지 성격이 달랐으면 제 복장도 달라졌겠죠. 가슴에 단 하트 모양의 브로치는 비록 지면을 통해서지만 제가 독자들과 마음을 터놓고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달았습니다.”
짧은 인터뷰를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쓸 만큼 그녀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사실 그녀가 화장을 하고 의상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외모를 꾸미는 일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었던 그녀가 자신을 변모시킨 이유는 스스로가 ‘상품’임을 내세우면서부터다. 키 작은 동양 여자에 대해 눈길을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한 특별한 방법을 생각하다가 다소 ‘튀는 느낌’을 주기 위해 화장을 시작했고 의상을 준비했다. 요즘에도 그녀는 미팅의 성격에 따라 어울리는 의상을 준비해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갈아 입는 성의를 보인다.
그녀가 신경을 쓰는 것은 비단 외모뿐만 아니다. 올해 55세인 김 회장은 그러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건강하고 활기차다. 한국 태권도연맹이 공식으로 인정한 세계 최초 그랜드마스터인 만큼 여전히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며 늘 계획적인 생활을 유지한다. 워낙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한번 시간에 쫓기다 보면 하루 일과 자체가 엉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과 방송, 강연등 많은 일을 하면서도 명상과 운동 등 스스로를 단련하는데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그녀가 여전히 젊게 사는 비결이며 성공의 한 요인이기도 하다.
개괄적인 이력은..
1946 음력 1월 1일 경북 금릉 출생.
1968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미국 동부 버몬트). 태권도장 운영
1978 미국 여자팀을 이끌고 '국제태권도대 회' 참가.
1985 실리콘밸리로 이주 '라이트하우스' 사업을 시작.
1989 LMS(Lighthouse Monitoring System) 발명.
1994 세계무술 마스터 협회에서 GrandMaster 인정서 수여함.
1995 라이트하우스'가 연간 매출액 5000만 불 달성. '라이트하우스' 미국 유망 100대
기업으로 선정됨. 미주 교민회의 상 수상
1998 상 수상.
2001 라이트하우스 연간 매출 1억불 달성(경쟁 업체 PMS를 제치고 반도체 클리닝룸 분야에서 업계 1위가 됨). 미용(엔젤힐링), 인터넷(모닝플래닛, 데이 터스토어 x.com) 등 유망 분야로 사업 확장. 태연김 쇼 진행(1996년부터 제작. 샌프란 시스코 시장, 풋볼선수 등 유명인사를 초청해 김태연이 직접 진행하는 토크 쇼. 전미 150여 개 도시에 배급, 20∼40대 중반 여성 중 5∼6백만 시청 자 확보).
수상내역..
TYK Group 회장 & 최고 경영자
Lighthouse Worldwide Solutions 회장 & 최고 경영자
MorningPlanet 회장 & 최고 경영자
Angel Healing/Bio-Dermaceutical Research Institute 회장 & 최곡 경영자
NorthStar Productions 회장 & 최고 경영자
Human Resources Development Center(인력 개발 센터) 회장
TYK Jewels 회장
Media for Cultural Awareness 회장
케이블 TV "Tae Yun Kim Show" 호스트
“The Peoples Network” VIP인사 & 강사
“The Wisdom Channel” VIP인사 & 강사
4th Annual Summit for Women in San Francisco 기조 연설, 2001
Martin Luther King Academic School Women’s Summit 기조 연설, 2001
the Board and Spokesperson for the United Way 핵심 멤버, 2001
Kaiser Permanente Annual Fundraiser 기조 연설, 2001
NAACP 41st Annual Prayer Breakfast, Sacramento 연설, California, 2001
“Unstoppable Women” by Cynthia Kersey 출연 , 2001
the Crook & Chase Talk Show on TNN 출연자, 1999
Businessperson of the Year Award(올해의 경영인상), Chamber of Commerce, Silicon Valley 수상, 1998
the Howie Mandel Show 출연 게스트, 1998
International Mastermind Lecture for CEOs & Executives, Dallas Convention Center 강의, 1997
Top 100 Fastest Growing Company( 100대 최고속 성장 기업으로 뽑힘), 1995
Cultural Living Treasure Award 수상, 1995
the Horatio Alger Award 노미네이트, 1994
Women of Achievement Award(여성 성취상) 수상, 1990
Living Legacy Award 수상, Germany, 1988
February 2nd, 1998 Tae Yun Kim Day, in Silicon Valley
(1998.2.2 실리콘 밸리 김태연의 날 지정)
Susan B. Anthony Award(수잔 엔쏘니 상) 수상, 1984
첫댓글 와 흥미롭네요. 글로만 읽다가 유튭 지료를 살피니까 전혀 다른 사람이네요. 역시 저승사자
자료 출처 : 도무사님
긴 인생의 스토리가 참으로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