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문화] (28) 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 사천 가산오광대 예능보유자 한우성씨 | |
몸짓·대사·탈·의상 옛모습 그대로… 전통춤 지키는 곧은 춤꾼 1972년 48세 때 입문해 집안어른들에게 대사·탈 제작 등 배워 2000년 예능보유자 지정 | |
“이런 제기하고 기겁을 할 녀석들이 근일에 운풍이 자악하니 봄날이 따뜻해지니까 낮 귀신 난 듯이 모두 모여 말 잡아먹고 장고 매고 소 잡아먹고 북 매고 개 잡아먹고, 소고 매고, 안성 마침 깽상 치고, 홍문연 잔치처럼 떡 치고, 술 빚고, 양반의 청룡띠에서 그저 밤낮없이 둥둥캥킹.” 노란 두루마기에 털이 더부룩한 양반탈을 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 사천 가산오광대 예능보유자 한우성(73) 보존회장이 커다란 부채를 흔들며 점잖게 대사를 읖조린다.
한 회장은 고향인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 왔다. 가산리는 조선시대 말까지 조창(漕倉)이 있었던 곳으로 인근 7개 군의 세곡을 징수해 이곳을 통해 제물포로 운송하던 항구였으며 당시엔 300여 호의 대취락지로 큰 시장이 형성돼 다른 지방과 교류가 많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발상한 탈놀음인 가산오광대는 약 200~300년의 전통을 가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문헌 기록은 없다. 가산에는 청주 한씨가 정착한 지 11대에 이르고 있어 마을 역사가 오래됐음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동제인 천룡제(天龍祭) 과정에서 성황신 다음에 모시는 상신장과 하신장의 석장승, 그리고 마을 주민의 생명수 구실을 하고 있는 방갈새미에 정성을 다해 제를 올리고 있다. 음력 정월초하루에 모시는 천룡제 직후부터 시작하는 지신밟기가 정월 보름에 연희하는 오광대놀이까지 연결되는 것들은 이 놀이의 역사가 오래됐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 회장은 48세(1972년) 때 오광대에 입문했다. 입문 시기가 늦은 것은 가산오광대가 1960년 연희를 끝으로 중단되었다가 강용권 동아대 교수에 의해 발굴되면서 1970년대 초반 복원됐기 때문이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어릴 적부터 조부인 한경팔옹, 부친인 한재동옹 등 집안 어른들이 벌이는 놀이판을 보며 자라왔기 때문에 춤사위와 대사 익히기가 어렵지 않았다.
큰아버지 한계홍(옹생원·악사·가면 제작) 옹, 집안 아저씨인 한윤영(말뚝이·할미·가면 제작) 옹 등으로부터 대사, 탈 제작 등을 본격적으로 배워 지난 2000년 7월 22일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때 동생 한우은, 조카 한종기 옹이 같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모두 작고해 한 회장이 가산오광대의 유일한 예능보유자다. 보존회원들이 많지만 거의 혼자서 가산오광대를 짊어지고 가야 하니 부담이 크다. 틈틈이 공부해 1시간 분량의 6과장 대사를 모두 외웠고 공연소품도 꼼꼼히 챙기고 있다. 영노, 큰 양반 역 예능보유자인 한 회장은 매년 4월 선진리성 벚꽃축제 때 열리는 정기공연과 해외공연을 빼고는 공연에 잘 나서지 않고 있다. 연로한 데다 전수자, 이수자들에게 공연 기회를 줘 가산오광대의 맥을 잇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신 가산오광대의 원형을 지키고 보급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가산오광대의 대사, 춤사위, 탈, 의상 등은 지난 1980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특히 한 회장은 6과장에 등장하는 탈, 의상, 오색나래비 등 85종목 385가지 소품 하나하나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들 소품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놀이를 할 수 없다고 한다. 소품이 다양하고 화려하기 때문에 다른 오광대와 함께 공연을 할 때면 가장 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는다.
한 회장은 원형 보존을 위해 한계홍 옹과 한윤영 옹의 어깨 너머로 배운 탈, 의상 등 소품 제작기법을 손옥희 보존회 사무국장에게 직접 전수하고 있다. 오방신장탈·포수탈·몰이꾼탈·할미탈·옹생원탈 등은 두꺼운 마분지를 잘라 만든다. 문둥이탈·말뚝이탈 등은 바가지, 영노탈은 대삼태기, 영감탈은 대소쿠리, 어딩이는 종이찰흙으로 제작한다.
한 회장은 “선친들이 100년, 200년 전에 하던 것을 그대로 이어야 문화재다. 조금이라도 변한 것이 있다면 창작”이라는 지론을 폈다. 한 회장에 또 하나 중요시 여기는 것이 학생 전수다. 가산오광대의 맥을 잇고 보급하기 위해 2002년 축동초등학교, 2004년 함안 관동초등학교, 2007년 사천 용남중을 가산오광대 자매학교로 지정해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자매학교 학생들은 매주 토요일 전수관을 찾아와 대사와 춤사위를 익히고 돌아간다. 한 회장은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애쓴다. 학생들이 성장해 가산오광대의 맥을 잇고 널리 알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특기적성 교육의 일환으로 배우는 것도 학생들이 올바르게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학생들이 전수에 많이 참여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한 회장의 이런 열성 덕분인지 관동초등은 지난 2006년 제18회 전국 청소년탈춤경연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고, 사천 용남중은 제19회 대회에서 은상을, 사천 축동초등은 제15회 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으며 몇몇 특출난 학생들은 보존회원들과 함께 국내외 공연에 출연하고 있다. 대학생 전수도 하고 있지만 기숙사가 없는 탓인지 뜸한 편이다. 정부와 경남도, 사천시 등에 기숙사를 지어 달라고 건의했지만 성사되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 가산오광대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안팎으로 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2003년 경남도무형문화재연합회장을 역임했으며 지난 3월에는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등 13개 탈품 중요무형문화재 모임인 전국탈춤연합회장에 선임돼 활동하고 있다.
글=양영석기자 yys@knnews.co.kr 사진=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가산오광대는=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에서 전승되는 가산오광대는 다른 지방의 탈놀음보다 가장 최근까지 전승됐는데 1960년 연희된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때 중단된 것을 동아대 강용권 교수가 1971년 발굴해 재연시켰으며 1974년 경남도 지방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됐다. 마당은 제1과장 오방신장무, 제2과장 영노, 제3과장 문둥이, 제4과장 양반, 제5과장 중, 제6과장 할미·영감 등 모두 6과장으로 되어 있어 다른 오광대와 비슷하다.
오방신장무가 있어 오광대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영노는 사자와 같이 생겨서 통영의 사자춤을 겸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오방신장탈은 오방색으로 만들었으나 문둥광대탈은 진주오광대의 문둥광대탈처럼 오방색으로 나누지 않고 불그스레한 살색으로 통일하고 있다. 문둥마당, 양반마당, 중마당, 할미·영감마당 등은 오광대에 모두 공통된 과장이나, 놀이에서 다소 차이가 있어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영감이 죽어서 하는 오귀굿은 고형(古型)에 가깝다. Copyright ⓒ 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