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학기 2주차 과제
“우주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정 우 조
우리는 “하나님이 무(無)에서부터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서의 기록과 상충하는 주장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다고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으나 바로 그 직후에, 그러니까 첫 번째 창조인 ‘빛’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땅과 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2절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구절은 사실 현대인들에게 생소하고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아니 빛이 등장하기도 전에 먼저 존재하고 있는 이것들은 뭘까.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땅이 있고 수면이 존재했다고? 그래서 이 장면은 고대 근동 신화들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것들이 모두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창조’라는 말을 떠올릴 때 딱 한 가지 측면만 생각합니다. 없던 것을 있게 하는 일. 존재하지 않던 그 무엇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 창조라고 말이죠. 하지만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있어서 ‘창조’란 한두 가지의 측면들을 더 추가한 개념이었습니다. 먼저는 ‘질서를 세우는 것’이고, 거기에 더해 ‘비어있는 곳을 채우는 행위’죠.
고대인들은 무질서한 상태, 곧 현대인들이 ‘카오스’라 부르는 혼돈을 파멸과 같은 것으로 인지했습니다. 질서가 사라짐은 곧 망하는 것을 의미했지요. 혼돈스러운 세상은 멸망한 곳이고, ‘창조’를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질서를 세우고 틀을 만드는 데서 그쳐선 안 되고, 그 질서와 틀 속에 내용들을 채워넣고 각자에게 걸맞는 기능들을 부여해주는 것이 진정한 ‘창조’의 사역이라고 고대인들은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는 세상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전 혼돈과 공허의 바다가 존재합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창조란 ‘무(無)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라기보다, 흐트러진 우주에 질서를 세우고 그 질서 안에 올바른 기능들을 부여하는 일이었죠.
그런 배경을 감안해서 보면, 창세기 1:2은 창조 이전의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해줍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혼돈과 공허의 상태조차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지만 창조의 초점(point)이 없던 것을 있게 하는 일이라기보다, 질서를 세우고 빈 곳을 채우는 사역이라는 데 맞춰보면 2절의 상황 역시도 하나님이 창조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혼돈과 공허의 바다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창조기사의 이런 서술들을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 모두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fact)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혼돈과 공허를 정복하는 것이 창조’라는 게 고대 근동 사람들의 우주관에서 비롯된 개념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분이 ‘문자 그대로’ 혼돈의 바다 위를 운행하고 계셨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보다, 이 모든 기록들이 고대인들의 지식적인 한계를 충분히 감안하신 하나님께서 당대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성서의 저자들을 통해 계시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실도 있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점과,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의 규칙들과 질서들을 친히 제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의 바다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면 세상은 결코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지 않으시는 곳은,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러한 원리를 잘 보여주는 대목들이 있는데, 하나는 대홍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예레미야 4장입니다.
창세기 6:3에는,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신 세상은 대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온 땅이 다시 깊은 물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2의 상황이 정확하게 재현된 모습입니다. 세상이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버린 것이죠. 그리고 홍수가 끝난 후 창세기 8:1에는 ‘하나님이 노아와 피조물들을 기억하사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셔서 물이 다시 물러나게 만드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때 물 위에 불기 시작한 ‘바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한 하나님의 ‘영’과 같은 단어입니다. 혼돈과 공허의 바다로 돌아가버린 피조세계 위에, 하나님의 영이 다시 운행하기 시작하신 것이죠. 그러자 물이 물러가고, 세상에는 다시 생명과 질서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노아 시대에 일어난 대홍수 이야기를, ‘새로운 창조’의 맥락으로 이해하는 성서학자들도 꽤 많습니다.
예레미야 4:23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정확하게 창세기 1:2의 상황이죠. 이 대목은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의 악함과 총체적인 부패의 모습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떠나시면서 유다의 패망이 예고됩니다. 그런데 유다가 멸망하는 모습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창세기 1:2의 표현을 들어 예언합니다. 혼돈과 공허, 그리고 빛이 없는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면, 우리는 창조되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성령께서 떠나버리시면 세상은, 그리고 우리의 삶은 비참해집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의 혼돈과 공허를 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 곧 ‘성령’은 깊은 절망과 냉소적인 허무함이라는 무질서를 물리치고, 우리네 삶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라는 가장 아름다운 ‘질서’를 세우시는 분이죠. 혼돈과 공허라는 표현이야말로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낱말들일지 모릅니다. 시대정신이라 부를 만한 굵직한 사상조차 찾기 어려운, 진한 사랑도 참된 스승도 드문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으니까요. 하수상한 이 시절에 다시 한 번 사랑과 창조의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길 소망해봅니다. 이 세상 가운데 긍휼의 법과 자비의 질서가 다시 세워져 창조의 아름다움이 회복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