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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비평적 성서 읽기 :
http://column.daum.net/talk2uson <제61호> 한국교회의 십일조 제도는 종교적 범죄행위 2001년 08월 31일 다음은 김창규님의 이메일로 문의하신 질문입니다: Q. 안녕하세요. --- (중략) ---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는 저희 목사님도 내는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드리시더라구여. 그런데, 님은 십일조에 대해서 안 내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성서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맞나요? 이렇게 생각하시게 된 배경에 대해 여쭤볼 수 있을까요? 꼭 답변 부탁드립니다. ---------- 한국교회의 십일조 제도는 종교적 범죄행위 들어가는 말 (신앙배경): 한국교회에서 언급이 금기시된 십일조제도를 어떻게 독자들에게 쉽게 접근하여 풀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습니다. 본 제목을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1) 성서적, (2) 역사적, (3) 신학적인 측면에서 광범위하게 다루어야 하겠지만, 위의 요소들을 일체 생략하고, 저의 개인적인 신앙배경(Personal Testimony)을 중심으로 답을 드리지요. 저는 소위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가정에서 엄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 했어요. 십일조 생활과 주일성수는 삶의 철학이었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까지 계속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그토록 굳어졌던 기존의 신앙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영국에서 유학생활이 시작되면서였습니다. (참고로 저는 그리스도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교회에 출석하면서 공부했거나 가르친 경험이 있으며, 현재는 성공회 소속 목사입니다) 십일조/헌금바구니 없는 영국교회: 유학을 떠날 때가 1984년 6월이었고, 그 당시 거주했던 동네의 한 영국침례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지요. 예배 중 헌금바구니를 돌리지 않더군요. 처음엔 “특별한 날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헌금시간과 목사의 축복기도가 없더군요. 얼마 후에야 안 일이지만, 헌금바구니를 돌리지 않고 [헌금함] 상자가 교회 뒤편 코너에 놓여 있어서 원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유롭게 헌금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물론 한국에서 신앙의 척도로 간주되는 십일조, 작정헌금, 건축헌금등 각종 헌금봉투도 찾아 볼 수 없었으니까요. 주일성수 없는 영국교회: 전부터 느껴왔지만,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성도들이 교회를 잘 나오지 않더군요. 어느 화창한 봄날의 일요일은 300여명의 성도들이 20여명 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담임목사님께서 웃으시며 예배시간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아주 좋은 날씨입니다, 많은 가족들이 봄나들이 가셨나 봅니다. 모두들 즐거운 시간 갖기를 기도합니다.” 가족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공원을 찾는 것에 대하여 그는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습니다. 오히려 예배에 참석한 내가 이 좋은 날 갈 곳 없어 교회에 출석한 것처럼 취급받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충격이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영국교회가 망했다더니---웃기는구나.” 다른 교회들은 어떻게 예배하는지 의문이 일기 시작했고 주일이면 외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십일조 없는 유럽 교회: 영국을 벗어나 유럽 다른 나라들의 예배형식도 궁금해지더군요. 그 해 여름방학은 프랑스에서, 겨울방학은 독일에서, 이듬해 여름방학은 다시 독일의 공대학생들과 유럽16개국 자전거 여행에 합류하여, 먼 거리는 열차로 이동해 가면서 지방에 도착하면 자전거 행렬이 이어졌어요. 틈이 날 때마다 주일예배형식, 헌금방식, 십일조제도에 관해서 리서치를 수행했지요. 오순절교회, 희랍정교회등, 간혹 어떤 교회들에서는 헌금바구니를 돌리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교회들이 헌금바구니 대신 헌금함을 배치하였고, 십일조나 각종 헌금 제도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주일성수와 십일조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학문의 세계로: 일단 유럽교회들은 십일조제도가 없고 헌금함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 한 후, 여기에 대한 성서적 근거도 연구하고 싶었어요. 석사과정에서는 조직신학이었지만, 박사과정에서는 성서학(구약)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관련학과목인 고대근동학, 고대문헌학, 역사고고학, 문서비평학, 성서언어학, 문화인류학, 사회학등에 거침없이 도전했습니다. 그 당시 세계구약학회 회장이기도 했던 원로 지도교수는, 연구분야가 지나치게 광범위함으로 학위논문의 방향을 바꿀 것을 여러 차례 제시했지만, 저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6년 동안 하루 평균 3,4시간의 수면으로 버티어 내는 열심에 감탄 하더군요. 중간에 어려움으로 포기할 위기를 몇 차례 넘기며 외롭고 긴 유학여정이 끝나는 과정에서, 암흑 속에 가리어 졌던 기독교의 실상 (죄악상)들이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했고, 십일조 제도나 각종 헌금갹출이 종교적 범죄행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박사학위 심사가 끝나던 날 지도교수는 나를 끌어 않으며, “이 분야에서는 자네가 세계적 권위자라네”하며, 이젠 학자로서의 동등함을 일깨워 주더군요. 목사 공화국 대한민국: 학위를 받고 바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유럽문화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탓인지 한국에서의 생활은 질식하기 직전이었어요. 부패한 정부, 무질서한 사회, 타락한 종교지도자들, 동서남북 어느 곳을 돌아봐도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목사를 섬기고, 목사는 교회를 장사하는 회사로 경영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이런 실상들을 느끼거나 보지 못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세뇌되고 맹종당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 충격이었습니다. 종교적 부는 반드시 타락과 부패로 귀결되지요. 한국교회의 이런 현상은 돈이 지나치게 많은데 있다고 판단하고, 잘못된 십일조 폐지운동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여러 대학에 교수임용신청서를 제출했어요.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충격을 받은 것은, 교수를 이미 내정해 놓고 신문에 광고만 내든가, 그렇지 않을 경우 1,2억을 요구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있더군요. 아~아~ 대한민국. 십일조제도 폐지운동: 몇 곳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한국교회의 타락상과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다가 두 대학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경험을 했는데, 학과마다 이사장이 심어둔 요원(?)들이 있는 대학도 있더군요. 십일조제도 폐지운동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 신학대학교수들을 상대로 몇 차례 십일조제도에 관한 공개토론을 제의했지만 아무도 나서주는 상대가 없었어요. 원고를 작성하여 각 기독교 신문사/잡지사에 발송했으나 단 한곳도 원고를 실어 주지 않더군요. 방향을 바꾸어 일반신문사의 인터넷 자유게시판/토론방을 통하여 글을 올리기 시작하였지요. 그 때가 1996-1998년이었으며, 그 당시 쓴 원고들이 책 2권 분량이 됩니다. 십일조제도 폐지라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목사/선교사들로부터는 “벌집이 되기 싫으면 그 일을 중단하라”는 협박을 수없이 받으며 신상에 위험을 느끼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젊은층에서 십일조에 대해 서서히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많은 문의와 격려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그야말로 생사를 건 투쟁이었습니다. 철벽같은 한국교회에 십일조의 파문을 불러 일으켜, 지금은 소신 있는 젊은 후배들이 나타나 그 바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한 학문은 결국 한국교회의 십일조폐지 운동의 불길을 지피었으니까요. 한국교회는 400년 전의 유럽교회: 지금의 한국교회 모습은 16세기 종교개혁이전의 유럽교회 전철을 밟고 있어요. 재언하면, 한국교회는 유럽교회에 비해 400 년이 뒤떨어졌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복사판이어요. 교회가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게 되면 망하게 될 징조입니다. 미국교회는 완전히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고, 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이 한국교회보다 10 년을 앞서가고 있어요. 한국에 교인수가 많은 이유: 한국의 목사들은 유럽교회가 망했다는 설교를 즐겨 하더군요. 한마디로 무지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이후 교인수가 많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신앙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지요. 제가 볼 때 한국교회는 출석인원의 5%정도가 성도라면, 유럽의 교회는 98%가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교인수가 많은 또 다른 이유는, 아직 한국인들의 삶의 질이 낮고 가난하며 사회가 불안하기 때문이지요. 이 잘사는 시대에 무슨 말씀이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인간의 종교적 성향은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어요. 유럽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시설이 어디나 잘 되어 있고, 사회복지제도가 완벽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갖는 여러 가지의 불안요소들을 찾아 볼 수 없어요. 다시 말씀드리면, 한국에서는 교회에서 위로받고 축복받기 원하는 불안한 요소들을, 유럽에서는 사회복지제도가 해결해 주기 때문에 반드시 교회를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유럽교회들은 왜 십일조제도가 없을까 이 글을 통하여 어떤 위대한 학설이나 고상한 성경지식으로 십일조제도 폐지의 정당성을 주장하려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저의 신앙적 배경을 자랑삼아 늘어놓은 이유는, 단 한마디의 질문을 드리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후, 왜 유럽교회들은 십일조제도를 단죄하여 교회로부터 추방한 것일까요? 유럽교회들이 폐지하고 있는 십일조제도를, 왜 한국교회들은 그토록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관하여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전통이나 신앙은 무조건 믿으면 안심이 되고 행복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며, 알고 나면 못 믿을 것들이 또한 전통이요 신앙입니다. 신앙은 믿으면 모르고, 알고 나면 못 믿습니다. 남기고 싶은 한마디: 십일조제도는 한국의 삯꾼교수, 기회주의 신학자들이 빵 한 조각을 얻어내기 위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고, 3대 근성 (명성-권위-탐욕)에 눈이 먼 목사 집단들이 만들어 낸 종교적 범죄행위입니다. 신앙이나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속지 마세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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