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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스포츠 게시판 스크랩 논산 육군훈련소
jogh11 추천 0 조회 4,111 11.11.13 22:22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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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훈련소의 모든것

 

▲ 육군훈련소 내의 훈련병 식당 모습.

대한민국 남자들의 제2의 고향으로 불리는 곳이 충남 논산의 육군훈련소다.

그만큼 많은 예비역들이 거쳐 간 곳이 육군훈련소요, 또 고향에서의 유년 시절 체험 못지않게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 연무대라는 얘기다. 그 육군훈련소가 지난 11월 1일로 환갑이 되었다.

1951년 11월 1일,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구국의 횃불로 창설된 부대가 바로 육군훈련소다. 아들을 군에 보내는 어머니, 연인을 군에 보내는 여성이 가장 궁금해하는 곳이 논산 육군훈련소다. 만 60세가 된 육군훈련소의 가장 최근 이야기와 지난 60년 동안의 이야기들을 Q&A 형식으로 정리해봤다.


진짜 이름은 연무대인가 논산훈련소인가.
2011년 현재의 공식 명칭은 ‘육군훈련소’다. 연무대(鍊武臺)라는 이름은 이 부대가 위치한 지명(논산시 연무읍)에서 비롯된 부대의 별칭이고, 논산훈련소라는 이름 역시 이 부대가 논산시에 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인데 공식 명칭이 아니다. 창설 초기에는 제주도에 육군의 제1훈련소가 있었기 때문에 ‘제2훈련소’라는 명칭도 사용했었다.

군대에 가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모두 연무대로 가나.
아니다. 해군이나 공군, 해병대에 지원한 장정들은 당연히 육군이 아니므로 연무대에 가지 않는다. 육군으로 가더라도 모두 연무대에서 신병 교육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육군 가운데 대략 3분의 1은 연무대에서 신병 훈련을 받지만, 나머지 3분의 2에 해당하는 병사들은 각 지역에 주둔한 사단 등에서 신병 훈련을 받는다.

지금까지 연무대를 거쳐 간 육군 병사는 얼마나 되나.
60년 동안 약 730만명의 병사들이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육군의 정예 용사가 되어 복무를 마쳤거나 하고 있다. 대략 대한민국 남자 4명 가운데 한 명은 이 훈련소를 거쳐 간 셈이다.

하루에 입영하는 장정은 얼마나 되나.
입영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실시되는데, 평균 1500명 정도가 한꺼번에 입영한다. 1500명의 장정들과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함께 온 가족들을 합하면 5000명에서 많게는 1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연무대를 찾고 있다.

연무대로 가면 모두 전방에 배치되나.
그렇지 않다. 육군훈련소에는 전국에서 장정들이 모여들고, 다시 전국으로 흩어진다. 전방에 배치될 수도 있고 후방에 배치될 수도 있다. 훈련병들의 자대 배치는 컴퓨터에 의해 이루어지며, 모든 과정이 공개된다.

현역들만 연무대에서 훈련을 받나.
아니다. 보충역 및 복무전환요원들도 연무대에서 훈련을 받는다. 다만 이들이 받는 교육의 기간과 내용은 현역들과 다르다. 현역이 5주의 훈련 기간을 거치는 반면 이들은 4주만 교육을 받는다. 따라서 교육의 내용도 약간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밖에 전·의경이나 ROTC 병사들도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다.

입영열차는 지금도 운행되나.
가수 김광석의 노래에 나오는 ‘입영열차’는 지금은 사라졌다. 입영하는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출발지에서 저마다의 교통편으로 입영을 하게 된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배치되어 갈 때는 대개 관광버스를 이용한다.

훈련소에도 면회나 외박이 있나.
원칙적으로 없다. 다만 신병 훈련을 끝내고 수료식이 열리기 이틀 전에 실시되는 가족 면회 행사가 2011년부터 부활되었다. 4시간 동안이지만 훈련병과 가족들이 부대 안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힘든 훈련을 마치고 다시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훈련병들의 심신을 달래주기 위한 행사이자, 아들이나 연인을 난생처음 군대에 보내고 노심초사 하는 가족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행사다. 훈련병과 가족들은 정성 들여 싸온 음식을 나누며 회포를 풀게 되고, 훈련병들은 다시 힘을 얻어 본격적인 군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훈련소에도 PX가 있나.
당연히 있다. 하지만 훈련병들은 이용할 수 없다. 신병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부대에서 제공되는 음식 이외에는 접할 기회가 없다. 물론 흡연도 금지다. 따라서 훈련병들은 현금을 사용할 일이 없다.


 

▲ 육군훈련소 내의 훈련병 식당 모습.

 

 

입영할 때 뭘 챙겨 가야 하나.
지병이 있는 사람이라면 평소 복용하던 약을 챙겨간다. 그밖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식주와 훈련에 필요한 일체의 물품은 부대에서 지급한다. 인터넷에 보면 세면도구나 운동화를 챙겨 가야 한다는 글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속옷과 양말부터 세면도구, 필기구, 운동화와 체육복, 전투복 등 모든 것이 지급된다.

훈련소에 있는 훈련병과 연락을 취할 방법은.
가족의 사망 등 긴급한 일이 있을 때는 부대로 전화를 하면 된다. 그밖의 통상적인 연락은 우편을 통하거나 인터넷 편지를 이용한다. 부대 홈페이지(www.katc.mil.kr)에서 해당 훈련병이 어느 연대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있는지 검색할 수 있고, 바로 메일을 보낼 수도 있다.

훈련소에도 고참과 쫄병이 있나.
육군훈련소에는 매주 신병들이 입영한다. 따라서 1주일이라도 먼저 들어온 훈련병들이 선임병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주가 바뀔 때마다 입영하는 병사들의 교육 연대도 달라지기 때문에 동기들 이외에 선임병이나 후임병은 없다. 단, 교관이나 조교의 통제를 받는 것은 기본이다.

훈련소에서 유급을 당해 더 오래 군 복무를 하는 경우도 있나.
장기 입원 등으로 유급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통상적으로 유급이 될 일은 많지 않다. 모든 훈련병들을 대상으로 누구에게나 가능한 수준의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훈련이 어렵거나 힘들어서 유급을 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유급을 당하더라도 그 기간은 군 복무 기간에 포함되며, 따라서 복무 기간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예전에 비해 훈련 강도가 약해졌다는데, 사실인가.
기합, 구타, 얼차려 등의 가혹행위가 사라지면서 훈련 강도가 약해졌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제식, 총검술, 사격, 유격, 행군 등 모든 훈련 과정에서 병사들이 도달해야 하는 수준이 낮아진 것은 아니다. 작업이나 개인적인 빨래 등이 사라지고 훈련 자체에만 일과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에 훈련의 집중도와 성과는 오히려 높아진 측면이 있다.

지금도 가스실에 들어가 가스 체험을 하나.
많은 예비역들이 가장 오래 잊지 못하는 훈련 가운데 하나가 가스실에서 이루어지는 가스 체험 실습이다. 방독면을 벗고 가스를 들이마시는 상태에서 노래도 부르고 함성도 지르는 등 매우 힘든 훈련이었다. 눈물 콧물이 저절로 나오고 눈도 뜰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훈련을 하지 않는다. 대신 방독면의 정화통을 갈아 끼우는 훈련만 한다. 정화통을 정해진 시간 안에 제대로 분리했다가 다시 끼우지 못하는 훈련병은 실제로 가스 체험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럴 일은 거의 없다.

억지로 살을 빼게 한다는데 정말인가.
고도비만인 경우 다이어트를 권장하고, 자원하는 훈련병들에 한해 별도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강제로 시키기 위해 식사량을 임의로 조절한다거나 별도의 힘든 훈련을 시키지는 않는다.

아파도 치료를 받기 어렵다는데 정말인가.
육군훈련소는 수천 명의 병사들이 생활하는 대형 부대다. 게다가 훈련병들은 연일 고된 훈련을 반복한다. 당연히 부상하는 병사도 있고 환자도 생기게 된다. 훈련소에서는 아침저녁으로 훈련병들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환자가 발생하면 야간에도 진료를 보낸다. 연대별로 의무대가 편성돼 있고, 훈련소 안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종합병원 수준의 규모와 시설을 갖춘 지구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예전의 짬밥에 비해 식사가 좋아졌다는데, 얼마나 달라졌나.
한마디로 정리하면 웰빙식과 영양식을 결합한 식사가 제공된다. 일반 성인의 하루 권장 칼로리 양은 2600㎉이며 우리 육군은 3300㎉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연무대는 이에서 더 나아가 4300㎉를 기준으로 식단을 짜고 있다. 고된 훈련에 영양이 부족해지는 현상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 식단을 짤 때는 훈련병들의 의견을 반영하며, 모든 식재료는 최상의 것들을 사용한다.

육군훈련소는 큰 부대라는데, 얼마나 큰가.
연무대는 전군(全軍) 최대 규모의 부대다. 주둔지 넓이만 185만1239㎡(56만평) 정도고 훈련장 부지는 495만8677㎡(150만평)에 달한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100개 이상 지을 수 있는 넓이다. 여기서 평균 1만2000여명의 훈련병들과 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4000여명의 기간병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들의 식사를 위해 하루 쌀 300가마, 돼지 12마리, 닭 827마리, 소 1.7마리가 사용된다. 달걀 1만3200개, 250mL 우유 1만6500개가 필요하다. 부대 안의 세탁 공장에서는 하루에 전투복 1만3000벌을 처리할 수 있다.

훈련소 생활관(내무반)에도 침대가 있나.
아직은 없다. 모두 침상에서 생활한다. 전방 부대의 경우 신형 막사에 침대가 설치된 생활실이 많아졌지만 아직 모든 부대의 생활실이 침대형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훈련소 역시 마찬가지여서 아직은 침상을 사용한다.


 

▲ 육군훈련소의 정문. 이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군대 생활이 시작된다.



훈련소의 꽃, 조교는 아무나 될 수 있나.
육군훈련소의 조교는 모든 훈련병들에게 스승이자 선배이며 닮고 싶은 사람 1순위가 되는 존재다. 원한다고 아무나 빨간 모자의 조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하고 별도의 전문적인 교육도 받아야 한다.

훈련소에서도 주말엔 쉬나.
그렇다. 하지만 모든 훈련병들이 똑같이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훈련 결과가 좋지 못한 훈련병들은 주말에 별도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훈련병들은 종교행사에 참석하고, 개인적인 용무를 처리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훈련 가운데 가장 힘든 훈련은.
많은 훈련병들이 야간행군을 꼽는다. 20㎏ 무게의 완전군장을 메고 30㎞를 행군해야 하는데 특히 체력이 약한 병사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발에 물집이 잡히는 경우도 많고 중간에 낙오되어 트럭에 실려 귀대하는 병사들도 간혹 있다. 하지만 훈련의 강도는 훈련병 개인마다 다른 것이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유격이나 각개전투가 가장 힘들다는 병사도 있고, 사격이 잘 되지 않아 애를 먹는 병사도 있다.

상벌제도를 운용하는 이유는.
모병제가 아니라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훈련병들이 교육에 임하는 적극성의 정도는 훈련의 성과와 직결된다. 누구에게나 어렵고 피하고 싶은 것이 신병 훈련일 수 있는데, 보다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 것이 상벌제도다. 육군훈련소는 낙오되는 훈련병들의 처벌을 위해 상벌제도를 운용하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이고 훈련 성적이 좋은 훈련병들에게 다양한 상을 주는 방향으로 이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유격을 열심히 하고 또 잘 해낸 훈련병에게 집에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해준다거나 특등사수가 된 훈련병을 수료식에서 연대장이 표창하는 식이다.

연무대가 다른 신병 훈련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육군훈련소는 신병 훈련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 전문 부대다. 이를 위한 시설과 프로그램이 여타의 신병 훈련소와는 많이 차별화돼 있다. 시설, 프로그램, 교관 등이 전문화되고 특화돼 있으므로 어떤 훈련소보다 실질적인 신병 훈련을 실시할 수 있고 받을 수 있다. 또 육군 내에서 가장 대규모로, 가장 정석으로 교육 훈련을 진행하는 부대이므로 이곳 출신들은 스스로 정통 훈련소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창설 60주년 논산 육군훈련소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연무대 60년

 

 

 

 

 

▲ 육군훈련소의 애초 명칭은 ‘육군 제2훈련소’였다.

 

 

▲ 1953년 훈련소 개소 기념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 1951년 창설 당시의 연무대 막사

 

 

▲ 1960년대 신병 집총 제식 훈련

 

 

▲ 1960년대 취사장 모습

 

 

▲ 1960년대 행군 모습

 

 

▲ 1970년대 훈련병의 복장

 

 

▲ 1980년대 총검술 훈련 모습

 

 

▲ 1980년대 도수 체조

 

 

▲ 1990년대 대민지원 봉사활동

 

 

 

 

연무대가 나를 남자로 키웠다

 

▲ 11월 1일 논산 육군훈련소가 창설 60주년을 맞는다. 육군훈련소에서는 아침마다 알몸 구보를 실시한다. 체력은 군인의 기본.

 

윤창중 문화일보 논설실장

 

 

외갓집은 너무 멀었다. 내 나이 다섯 살, 여섯 살 때.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살던 충남 강경에서 10㎞나 떨어진 연무읍 친정집을 걸어서 갔다.
   
1960년대 초. 강경에서 연무읍을 가려면 걸어서 갈 수밖에 없었던 빈곤의 시대. 강경과 논산훈련소가 있는 연무읍 사이엔 유일하게 기차 ‘강경선’이 있었지만 훈련병을 수송하기 위한 것.

아침에 아버지 출근을 지켜보고 강경을 떠나 연무읍 근처에 이르자면 거의 해질 무렵이다.
   
한참을 걷다보면 어머니한테 뒤처진다. 어머니, “창중아, 빨리 걸어라. 해질라”.

그렇게 걷다 보면 연무읍이 나타난다. 연무읍의 밭과 논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황토. 비가 오면 무릎까지 황토에 발이 쑥쑥 빠져 나오질 않는다.
   
논산훈련소가 어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허기 때문에 뭐라도 먹고 싶었던 시절이다. 그때 들었던 어머니의 말씀, 잊지 못하고 살고 있다.

“창중아, 저기 훈련소 보이지. 저 땅이 다 네 외할버지 땅이었단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중에 내가 중학교·고등학교 다닐 때인가, 어머니한테 자세히 들은 설명이다. 외할아버지께선 연무읍에서 전북 익산에 이르는 거대한 평야에 상당한 토지를 갖고 계셨다고 한다. 아무개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어딜 가나 외갓집 땅을 밟고 다닐 만큼 땅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김일성의 6·25 남침 전쟁이 터졌다.

대한민국은 국군을 훈련시킬 훈련소조차 없었던 상황. 무참하게 밀리던 대한민국은 마침내 1951년 훈련소를 만든다는 결정을 내린다.
   
   
외할아버지가 국가에 헌납한 땅
   
훈련소 부지를 물색하던 이승만 정부는 연무읍 일대의 평야를 후보지로 결정하고 땅 주인이었던 외할아버지를 찾아왔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땅을 거의 헌납했다고 한다. 물론 정부가 불하 형식을 밟았던 것 같았다. 어머니의 말씀이다. “그때 나라가 한다니까 거의 돈을 받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점이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그 많던 땅을 네 외할아버지께서 거저 나라에 주다시피해서 내 친정이 어려워지게 됐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머니 말씀대로 외갓집은 형편없이 몰락해가다가, 큰외삼촌은 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지금으로 말하면 쪽방 같은 옹색한 집에서 돌아가셨다. 서울 성북구의 한 누추한 방에서 누워 계신 큰외삼촌을 보며 어머니의 회고를 떠올려봤다.
   
물론 그때 외할아버지가 어떤 계약 형태로 자신의 땅을 나라에 헌납했는지를 밝혀주는 증거 자료를 난 찾아보려 하지도 않았고, 또 찾아본다 해서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냥 가슴속에만 간직해왔다. 정부로부터 외갓집 가족이 감사장을 받았거나 하는 것도 전혀 없었다.
   
그건 진실일 것이다. 6·25 남침에 맞서 뭐라도 나라에 헌납해야 한다는 애국심이 존재했을 것이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살다가, 다시 찾은 나라에서 전쟁을 겪은 세대들의 이런 애국심이 뭉쳐 지금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을 것! 확신한다.
   
난 논산훈련소와의 애틋한 스토리를 간직한 채 1977년 7월 10일 내 고향의 강경역에서 강경선을 타고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그 당시 논산훈련소는 박정희 대통령이 장병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시멘트 벽돌로 막사를 막 완공한 상황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학교 3년을 마치고 군에 들어간 나로선 실로 엄청난 시련.
   
   
훈련소 첫 식사 때 구역질 나와
   

▲ 1959년 강경역의 군인열차 개통식.

 


첫날 나온 저녁 식사- 이건 인간으로선 먹을 수 없는 음식이란 이름의 쓰레기.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1식 3찬이라 해서 밥과 된장국, 깍두기, 멸치조림이 나왔다. 욱! 하고 구역질을 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때 된장국 냄새를 맡는 듯이 착각할 때가 있다.
   
쏟아지는 욕,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구타, 원산폭격! 그땐 그랬다. 그러나 이겨내야 했다. 사실 난 고향이 논산훈련소와 가까운 강경이었기 때문에 속된 말로 군대를 빼려면 얼마든지 뺄 수 있었다.

당시 강경은 연무읍보다 환경이 좋아 논산훈련소 간부들이 사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들이 이들에게 부탁해 군대를 빼는 친구가 많았다.
   
그러나 집안 분위기는 남자는 당연히 군대 가는 것! 그런 결의를 갖고 논산훈련소에 들어갔지만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당시는 ‘카레라이스’가 막 군대에서도 나왔을 때. 그런데 먹었더니 몸에 엄청난 두드러기가 나는 것 아닌가. 교관들의 눈치를 보다가 어렵게 의무대에 갔더니? 군의관이 “니 애비, 니 애미가 니 몸을 잘못 만들어서 그래, 돌아가!” 하는 것 아닌가! 아직도 그 치욕은 머리에 남아 있다.

지금도 병원에서 의사를 볼 때마다 떠올리곤 하는 불행한 기억. 그러나 참자! 참자! 그때 유행했던 말, ‘인내는 성공의 어머니’였다.
   
제일 고통스러웠던 건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을 참는 것이었다. 강경선만 타면 집에 가는데. 지척에 집이 있는데. 하지만 다 부질없는 생각, 버리고 훈련에 전념하자. 왜? 난 대한민국을 지키는 남자니까.
   
훈련을 마치고 병과를 배치받았다. 웬걸? 힘들다는 ‘전투공병 폭파병(demolition engineer)’.

다시 시작된 김해 육군공병학교에서의 8주간 후반기 교육 - 처음 경험한 지옥이었다.

인간 이하의 구타와 기합의 연속에 생전 처음 해보는 훈련들 - 지뢰 매설 및 해체, 부교(浮橋) 설치, 교량 폭파. 결국 난 무사히 제대하고 부모님께 신고했다.
   
   
‘남자로서의 자부심’ 갖게 해
   

▲ 최근의 육군훈련소 훈련병들.

 


난 논산훈련소를 비롯한 군 생활을 거치며 크게 성장했다. 자부한다. 인내심, 세상을 넓게 보는 시각, 그리고 내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열정. 이걸 키우게 된 건 군대가 나한테 준 인생의 축복! 단연코 말할 수 있다.

후배들에게. 그냥 군대 가면 썩는 게 아니다. 설령 썩었어도 좋다. 썩었다 해도 인내심을 키우고, 인생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애국심을 키운 시절이라면 썩었어도 좋다.
   
난 군대에 제대로 갔다 오지 않은 사회 지도층에 대해선 적대감을 갖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걸 바로세우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결국 국가 해체의 길을 밟을 수밖에 없다.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을 오고갈 때 연무읍에서 강경으로 펼쳐진 평야, 그 위에 드리워졌던 석양(夕陽). 난 그걸 잊지 못하고 산다. 내 마음속 영혼의 자양분! 그 어린 시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석양의 고독한 사색이 평생 신문사에서 글을 쓰며 사는 언론인으로 살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감수성으로.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고~쁜이 고갯마루 넘~어~서~갈~때…” 나훈아의 ‘고향역’, 어쩜 그렇게 내가 봤던 고향역인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그 석양 속에 서있는 내 고향 강경역이여.
   
이 노래를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살아가던 중 몇 년 전 어느 날 언론계 후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작사·작곡가 임종수 선생-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심사하는 임종수 선생을 인터뷰했다는 것 아닌가? 만났다.
   
임 선생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 살았던 곳이 바로 호남선에서 강경역 다음인 함열역 근처라는 것 아닌가? 원래 곡명은 ‘차창에 어린 모습’이었는데, 나훈아가 당시 유행했던 고고풍으로 바꾸자고 제의해 함열역 근처에서 살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 제목을 고향역으로 바꾸고, 가사도 다시 썼다고 한다. 임 선생은 흥이 많으신 분이라 거나하게 취해 여러 차례 ‘차창에 어린 모습’과 ‘고향역’을 부르셨다. 유쾌했던 만남이다.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논산훈련소에서의 젊은 시절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고생하고 있는 젊은이들도 많은 번민을 하고 있을 것. 그러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건 논산훈련소가 건재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바친 젊음은 대한민국의 풍요와 발전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건 대한민국 남자의 자부심!

대한민국 ‘논산훈련소’여, 영원하라!

 

 

 

 

 

군대얘기하면 말도 많다.

위 글 쓴분은 우리가 만든 호텔에서 훈련소를 보냈으니 참 부럽다.

옛날 논산군번 따지던 시절이니 내 군번이 12*** 로 나간다^^

그러고 보니 오래 살았나보다.ㅎ

 

영락없는 거지 새끼다. 배가 고파 쓰레기통이라도 뒤질 형국이다.

위 사진 70년대 훈련병 복장인데 옷이 아니고 걸레다. 통일화라고 천으로된 군화^^

여기나가면 이쪽으로 오줌도 안눈다고 하며 6주 훈련받았다.

막사는 판자집인데 겨울에 시원하다 . 유명한 30연대^^

 

자대를 배치받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트럭에 태워 야밤에 도착했는데 이북방송 왕왕 들리고

내리자마다 따블빽메고 선착순.ㅎㅎ

이북 애들이와서 모가지 따간다는 말부터한다.(참 재수도 없지~~^^)

..

 

참 웃기는 일이있었다.

국산 M16A1이 처음 생산되어 배급을 받았다.

당시 카빈을 썼는데 총열 윗덥개가 자꾸빠져 철사로 매서 다녔다.(보통은 M1이고 행정병이라서)

기름종이에 둘둘 말려서 포장된 총을 받고 중대장과 영점사격을 나갔다. 표적지가 지금 A4용지 만한데

전원이 한발도 안맞는 거다. 표적지에 한발도 안들어간다.ㅎ

중대장이 교본을 가져오고 난리가 나서 신문지 커다란 걸 붙이고 사격을 해봤다. 하탄만 나온다

공장에서 출고할 때 좌우는 맞춰있고 상하는 전혀 수정이 안되어 있는 걸 몰랐던 거다.

애매하게 패기만 하다가 머쓱한 중대장. 참 또라이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보냈는데 요즘은 재미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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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1.13 22:33

    첫댓글 지나고보면 별거 아닌데 다녀오기 전에는 참 마음 심난하게 했던 군대...

  • 11.11.13 22:37

    막짤의 회색 활동복은 봐도봐도 최악이네요 진짜 죄수복 같이 생겼어요..

  • 11.11.13 22:40

    회색 활동복 좋아보이는데요 ㅋ

  • 11.11.13 22:48

    떡볶이 활동복이 진짜 좋았는데..... 회색은 조약합니다. 가만..... 저 녹색 번호표는 -_-;;; 어디서 많이보던 25연대....?!

  • 11.11.13 23:11

    아 저 그 구보하는사진 찍을때 진짜 귀찮앗는데 그거찍을라고 몇분을 웃통벗고 대기했는지..ㅋㅋㅋㅋ

  • 11.11.13 23:11

    난 25연대 8중대 ㅋㅋ

  • 11.11.13 23:45

    25연대 4중대 줄섭니다

  • 11.11.13 23:50

    25연대 1중대입니다~ ㅋ

  • 11.11.14 00:30

    25연개 10 중대입니다!ㅋㅋ

  • 11.11.14 07:51

    저도 25연대 1중대 ㅋㅋ

  • 11.11.14 18:10

    20연대 10중대 4소대 4분대 ㅋ

  • 11.11.14 22:59

    전 25연대 5중대..(공익입니당.. 한달갓다왓어요 여튼 25연대 5중대엿네요..ㅋ)

  • 11.11.14 00:51

    현재 학군사관 후보생인데 이번 겨울에 논산 또 갑니다ㅠㅠ

  • 11.11.14 11:56

    논산에서 훈련받나요?? 학군교는 어찌 된거죠?

  • 11.11.14 12:32

    이번 입단자들이 학군교에서 훈련받고 1년차들은 논산갑니다....

  • 11.11.14 12:34

    1년차들 괴산간다는 소문은 다 뻥이었군요

  • 11.11.14 12:34

    아마 1년차들은 내년 하계쯤 가지 않나 싶네요.... 52기 입단자들이 이번에 괴산간다고 들었거든요...

  • 11.11.14 16:34

    후배님 반갑네요ㅎㅎ 힘내세요~ 후보생 훈련이 더 힘들죠 나중에 임관후 보다 더 힘듭니다 ㅋㅋ임관후에는 단지 시간이 멈출뿐 ㅋㅋㅋ전역 4개월 지난 47기 ㅋㅋㅋ

  • 11.11.14 01:24

    논산으로 갈 걸 그랬나...

  • 11.11.14 03:34

    ㅋㅋㅋ 저는 논산이 가까워서 논산으로 가고싶었는데...... 생전 가본적도 없는 의정부까지 혼자서 처음으로 KTX를 타고 갔더랬죠.......

  • 11.11.14 03:40

    정확히 1주일후 논산행 급행열차를 타야 한다니 ㅜ

  • 11.11.14 11:21

    28연대 2대대 7중대.... 구막사에서 관물대 쓰다가 부대가서 관물대 보고 너무 좋아 놀랐었습니다. ㅋㅋ

  • 11.11.14 13:37

    26연대 3중대 출신입니다....정말 다시 하라면 못할 훈련병....ㅋㅋ

  • 11.11.14 23:38

    종교활동의 꽃 우리는 끝났다 각!개!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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