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칠장사 주지 지강스님 |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육상대회가 아닌 글을 쓰는 대회에 참가했다는 것이 뜻 깊었고 좋은 경험이 되었고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고3 수험생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올해도 꼭 참가하고 싶습니다. … 대학에 들어가서도 공부 열심히 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고 본보기가 되며 스님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멋진 사람이 되겠습니다. 또 시간이 될 때마다 내려와서 봉사하겠습니다.” 2월16일 안성 칠장사 종무소 옆 작은 다실에 편지 한 통이 놓여있었다. 칠장사에서 장학금도 받고 ‘어사 박문수 백일장’에 참가했던 한 학생이 주지 지강스님 앞으로 보낸 감사의 편지다. 지역에서 칠장사의 역할을 가늠해 볼만한 내용이다.
“많이 가져야 행복할까요? … “내려놓아야 행복합니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은 베풀지 않아서 그런 것 지혜와 복 함께 닦으세요”
칠장사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에 있는 고찰로 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의 말사. 경기도문화재자료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은 본래 아미산이었는데 산 아래 토굴에서 수행하고 있던 혜소국사(972~1054)에 의해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루는 마음이 선량하지 못한 7인이 찾아와 뵙기를 청하여 국사와 마주하였는데 이들이 국사의 신묘한 도력에 이끌려 설법을 청했고 국사는 이들을 교화하여 일곱 현인(賢人)으로 만들었다는 연유로 산 이름을 칠현산(七賢山)으로 고쳐 부르고 칠장사(漆長寺)를 칠장사(七長寺)라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혜소국사비 기록에 따르면 칠장사는 그 당시 이미 무료급식소를 차려 서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무료급식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칠장사는 오가는 인연을 중시하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1000여 년이 흐른 지금의 칠장사도 그 전통을 계승해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2007년 3월 지강(志剛)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부터는 지역사회와의 소통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다. 주지소임을 맡자마자 스님은 사찰과 지역의 인연을 생각하며 할 일을 모색했다. 시골이다 보니 어려운 아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와 학교 선생님들을 초청해 필요한 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첫 부처님오신날을 기해 학교 두 군데를 선정해 장학금을 전달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교복을 못해 입는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문제부터 해결해줬다. 어떤 해는 7~8명, 10명에 이를 때도 있다. 집안형편 때문에 학원이나 과외는 꿈도 못 꾸는 고교생들이 야간학습조차 받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학교에 매년 50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중학교를 챙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매년 500만원씩 챙기다 보니 한 학교 교장선생님이 사용 내역까지 상세하게 만들어줘 난처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신도들에게는 신심을 고양하고 나눔의 동기를 부여하는 계기가 됐다.
초임 때 지역여건 청취 초중고 장학금부터 지급 독거노인 생일잔치 지원
학부모들도 결국 이 모두가 칠장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신도들의 마음은 부자가 되어갔다. 사찰입구에 걸려 있는 ‘나눔과 소통으로 함께 하는 칠장사’ 현수막의 내용은 단순한 구호성이 아니라 이렇게 실현되어 가고 있었다.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많이 하려 한다”는 지강스님은 ‘소통과 나눔’도 결국 여기서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상대의 입장을 들어줘야 그들이 필요한 것을 정확히 알 수 있고 ‘나눔과 소통’의 의미가 거기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는 것. “과연 무조건 주는 것만이 무주상일까? 보시문화가 사회적으로 확대돼 자리 잡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무주상보시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님의 지역사회 활동은 하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장학금만 해도 한 해에 2000만원이 넘었는데 활동 폭이 넓어지고 있다. 신도 이영임 씨의 보시로 종단의 공익법인 아름다운 동행에 3000만원을 기탁해 군포교와 국제구호활동, 복지 불사의 기금으로 사용하게 했다.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과 협약을 맺어 매달 독거노인들의 생일잔치 비용을 지원하는가 하면 올 초부터는 (북한이탈주민의 생활터) 하나원을 나가 새 삶을 시작하는 새터민들의 이불지원을 위해 전용계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는 열심히 절에 다니는 신도들에게도 선물을 주고 싶어 대학입학 축하금을 100만원씩 주기 시작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빠트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작년 다례재 때 신도 자녀 중 대학생을 선발해 축하금을 줬더니 모두들 너무너무 좋아했다. “어머니는 물론 자식들까지 생각이 달라지는 것 같았어요. 나중에 장학회를 만들테니 그 때는 다른 사람에게 회향하는 마음을 가져달라 당부하니 학생들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부모가 절에 다닌다고 해서 자식이 반드시 절에 다닌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어린 시절 집안 형편으로 스님은 외가 생활을 했는데 거기도 여의치 않아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그러던 중 이모 집에서 <팔상록>을 대하는 순간 눈이 번쩍 띄었다. ‘가야할 길’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그 길 또한 순탄치 않았다. 가는 곳마다 자꾸 안 좋은 것만 보여 여기저기 옮겨 다니길 10여 년 곡성 태안사에서 청화스님을 친견하면서 진정한 출가의 길에 들어섰다.
박문수 백일장 지역초월 전국규모 축제로 발돋움 “상대 얘기 들어주려 노력”
“자기 허물은 보지 않고 어찌 남의 허물만 보느냐?” 청화스님의 이 한 말씀에 10여 년의 행자생활을 마무리하고 가수계를 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폐결핵으로 요양원에 들어가 1년 이상을 살아야 했다. 그 곳이 삶을 정리하는 곳으로 느껴지는 순간 스님은 일어서 탁발을 나섰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이렇게는 안 살겠다”는 생각에 은사 스님에게 용돈을 얻어 부산으로 향했다. “부처님께서도 결국 길에서 열반하시지 않았는가” 50kg도 안 되는 야윈 몸으로 숨이 차서 걷기 조차 힘들었지만 탁발하여 생긴 보시는 가장 가까운 요양원 같은 곳을 찾아 전하곤 했다. 한 번은 지나는 길에 제사가 있는 집에 들렀더니 내치지 않았다. 염불을 하는 데 모두가 하나가 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 이제 더 살 수 있으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자, 고통 받다 쓰러져간 이들의 극락왕생을 빌어주자”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런 마음으로 힘겹게 다니기를 6개월쯤 됐을 때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스스로 나왔던 요양원에 다시 찾아갔더니 다들 놀랐다. “당연히 죽었을 줄 알았던” 스님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지금도 “어렵다”는 말, 아니 생각조차 안한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말하면 긍정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지 압니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 더 어려워질 뿐입니다. 어려운 것은 베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까요? 오히려 내려놓아야 행복합니다. 보시 받아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려면 어렵지 않느냐고 걱정하는 데 저는 ‘어렵다’는 소리 절대 안합니다. 저는 은행에 넣어 둔 돈을 죽은 돈이라고 합니다. 결국 죽고 나서 자식들에게 물려주거나 나에게 꼭 필요한 곳에 쓸 것 아닙니까? 청화스님이 열반하고 나서 보니 돈 한 푼이 없었습니다. ‘신발 하나 제대로 놓는 것도 반공부가 된다’던 스님이 기억에 남습니다. 나중에 죽고 나서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으면 잘 산 삶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의 돈 많은 사람들, 생명 없는 무정물(돈)을 부처님 점안하듯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는 세상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죠?” 보시 들어오면 장부에 적어놓기 무섭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고 마는 스님에게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입시기도로 들어온 보시는 학생들을 위해, 기도비는 지역사회를 위해, 제사비용은 스님들의 수행과 복지, 대중공양비로 사용한다. 도량정비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건축불사는 최소한에 그치고 미래의 스님들이 수행과 복지시설을 마련할 수 있도록 부지 매입에 주력하기로 했다. 그런 가운데 힘이 좀 부친다싶어도 ‘무료급식소’와 ‘장학회’ 운영은 꼭 성취하려 한다. 칠장사가 존재하는 이유, 혜소국사의 유지를 잇는 또 하나의 불사일수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도량에 상주하는 한 도량석과 작은 제사는 직접 챙기고 하루 세 번 예불 때마다 <금강경> 한두 편은 빠트리지 않고 독송한다. 매월 넷째 주 목요일에 하는 포살법회는 절차를 갖춰서 한 지는 1년여 됐지만 108회는 할 계획이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則見如來)라. - 무릇 상 있는바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금강경>을 독송하는 스님의 모습이 스쳐지나 간다. 곧 저녁예불시간이다.
지강스님은 … 1975년 남양주 봉선사로 입산했던 지강(志剛)스님은 10여년만인 1987년 구례 화엄사에서 종원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다시 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곡성 태안사와 성륜사, 화성 용주사 중앙선원 등에서 수선 안거했으며 최근 칠장사 주지로 재임명 받았다. 안성불교사암연합회 부회장을 맡아 북한이탈주민(새터민)들의 생활터전인 하나원의 법당운영 등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지난 2월에는 하나원을 퇴소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새터민들을 위해 이불 후원계좌(농협: 351-0303-0852-33 예금주: 칠장사, 이불 한 채 2만4000원)를 개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