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이 있어 좀 늦게 나갔다.
오늘은 쉬고 내일 갈까 망설이다 그냥 나갔다. 하루하루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간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노선은 선릉 역에 내려서 선릉을 둘러보고 강남길을 따라 걸으면서 동작구 국립 현충원까지 가는 것으로 잡았다. 선릉 역에 내리니 거의 1시였다. 점심식사를 마친 직장인들과 식사를 하러 가는 한 무리의 직장인들로 거리는 북적거리고있었다. 빠리바게트 빵집 앞에도 LG25 편의점 앞에도 잔뜩 쌓아놓은 바구니들과 판매하는 도우미 아가씨들 때문에 거리가 들썩거려 보인다. 색 색깔의 망사같은 걸로 장식을 해놓아서 내용물보다는 포장이 더 요란해 보인다. 국적불명의 화이트 데이에 언제부터 이렇게 난리 버거지 였는지. 그래도 주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난 사탕은 별로고 예쁜 꽃바구니는 받고싶다. 여자이니까. 우리 신랑은 뭐하나? 무슨 날인 줄도 모를 거다 아마.
선릉에 가까워 안을 보니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 것이 웬지 불길한 징조같더니 오늘이 휴일이었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월요일에 쉬는 날인지 잘 아는 사실이었는데 오늘은 깜빡한 것이다. 갑자기 머리가 텅 비는 느낌이었다.
우선 선릉 주변 철책 길을 따라 걸어보기로 한다. 한바퀴를 다 돌아도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역시 국립묘지도 쉬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니 거기까지 가는 것은 포기했다. 그냥 여기거리를 좀 돌아보다가 가기로 했다.
멋진 모양의 높은 건물들이 키 자랑을 하는 듯한 테헤란로로 나가 우선 역삼 역을 향해 걸었다. 좀 걷다보니 내가 아는 건물도 보인다. 상록 회관을 따라 언주로로 가다보면 조니 워커 스쿨이 보인다. 작년에 모 여성지에서 주간하는 칵테일 교실에 참가한 적이 있다. 이쁜 색깔의 여러 가지 칵테일을 만들어서 맛보다보니 은근히 취하더만. 여전히 건재해 있네.
걷다보니 사거리에서 봉은사 길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그럼 강남에서 유명한 봉은사 절에나 가볼까 하는 맘으로 왼쪽으로 턴해서 갔다. 근데 가도 가도 절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웬 호텔들이 잔뜩 줄지어있다. 삼정호텔, 노보텔 엠베스트, 리츠칼턴호텔... 그 외에도 모텔같은 호텔이 참 많다. 이 동네는 또 호텔 길이군 하며 걸어가다 보니 교보문고가 보인다. 광화문 교보와 비슷한 분위기의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걷기고 뭐시고 길도 모르는데 다 접고 책 구경이나 좀 하고 가자고. 지도 코너에 가서 상점이름 하나까지 상세하게 나와있는 서울지도를 펼쳐든다. 내가 와 있는 지점을 펼쳐드니 봉은사는 오던 길에서 반대방향으로 가야했던 것이다. 봉은사는 물 건너갔고 몇몇 공원들만 둘러보기로 했다.
도산 공원, 학동공원, 청담공원. 공원의 위치를 대충 눈짐작으로 머리 속에 집어넣고 강남대로를 따라 걸어 내려갔다.
도심 속의 재래시장이 있어 들어가 보니 논현동 영동시장이다. 시장보기엔 이른 시간이라 한산한 것인지 재래시장이 많이 죽어서 조용한 것인지 시장분위기가 활기차지는 않았다. 시장을 나와 주택가를 따라 걷다보니 또 방향감 상실이었다. 머리 속에 넣어둔 학동공원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정표에도 팻말에도 나와있지도 않다. 모르는 남의 동네를 걷다보니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나? 내가 왜 이러구 다니지? 할 일이 그래 없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들고 나온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 그랬던가? 혼잡하고 복잡한 대도시 번화한 도시 속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남겨진 듯한 고립감이 순간 막 느껴질라 그런다.
그런 생각도 잠시 주택가 좁은 언덕길을 힘들게 올라오는 차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역시 차 운전은 어려운 것 같다. 경사진 곳을 올라오다가 잘 못 올라와서 뒤로 후진이 된다면.... 생각할수록 아찔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신사동.
여기서부터 내가 본격적으로 헤매게 된다. 도산공원의 위치도 엉뚱하게 기억을 해서 한강 둔치로 간다는 팻말을 보고도 왜 거기로 나갔나 싶게 압구정아파트 단지를 이리저리 헤매 다녔다. 그러다 보니 압구정 현대백화점. 역시 월요일 휴일이다. 여기는 여러 번 와본 적이 있는 아는 곳인데 뭐에 홀린 것처럼 헤매고 다닌 것이다. 여기까지 오니 드디어 도산공원의 팻말이 보인다. 동네 가운데 한적하게 위치해있는 도산공원은 그러나 실망이다. 우리동네 근린공원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자그마한 공원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얼이 깃든 곳이 아니라면 그냥 동네 공원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 기념관도 역시 휴관이다. 섭섭했지만 할 수 없지 뭐.
공원을 나와 도산대로를 따라가는데 앞쪽이 시끌한 분위기여서 보니까 낯익은 노인이 보인다. 허연 수염을 기르고 중절모를 쓴 노신사. 영화배우 김희라였다. 한쪽다리를 몹시 절면서 연예인들이 주로 타고 다니는 육중한 밴에 오르고 있었다. 차종은 모르겠고 Starcraft란 글씨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상당히 비싼 차라지 아마. 옆에 부인인 듯한 사람이 운전하고 매니저인가 젊은 남자 세 명 정도가 동승해간다. 활동이 없어도 여전히 저 정도인가?
마지막 코스인 청담공원을 향해서는 그냥 담담하게 나아간다. 시계는 거의 다섯 시를 가리킨다. 다리 종아리가 아파 오지만 그냥 걸어간다. 택시의 유혹에 여기에서 물러날 수는 없지. 청담공원은 언덕길 위에 위치해 있다. 청담공원 주변에 산이었던 곳을 개발해서 주택가로 만들었던 듯 동네가 언덕길에 위치해 있다. 청담공원을 한바퀴 도니 오르막을 오르내려서 꽤 운동이 된다. 낮부터 기온이 오르는 듯 하더니 내 얼굴이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있다. 이 얼굴로 전철을 타면 어디서 낮술을 거나하게 든 줄 알겠다.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말갛게 씻어 본다.
첫댓글 짝짝짝!! 선배님! 정말 멋집니다. 밀려오는 피로를 물리치기가 쉽지 않은데 택시를 거부하고 끝까지 걷기를 완수하신 점...
13대 이원학입니다.지도를 펼쳐 놓고 선배님의 글을 읽어내려가며, 형광펜으로 표시하니 그어럽게 느껴지는 서울지리도 조금은 익숙하게 느겨집니다. 지방 대구에서도 선배님의 구수하면서 삶의 지혜가 녹아있는 글을 재미있게 읽고 있는 독자가 있으니 .... 화이팅
현재 접속자란에서 정명옥선배님 발견하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인사드리고 나가려 했는데 금방 나가시는군요. 흑흑.
명숙후배님 늘 관심있게 봐주서 고마워요. 평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고있다는게 보이는군요. 잘될거예요. 긍정적인 마음이 일단은 제일 큰 치료니까요. 그리고 이원학 후배님 반갑네요. 대구에서 지켜보는 눈들이 있으니 더욱 어깨가 무겁네요. 열심히 할게요. 고마워요.
저도 매일 30분 걷습니다. 조깅트랙 위에서 ㅋㅋ
언니! 운동 중에서 걷기운동이 제일이라던데 전 숨쉬기 운동만 하고 있어요. 반성하고 있고 조만간 무슨운동이라도 해야겠어요. 언니 대단해요.
수연아 시작이 반이라고 손쉽게 할수있는 운동부터 시작해봐~~~가볍게.
역삼동 거리공원, 압구정동 압구정교회앞, 도산공원, 청담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