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9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루가 11,5-13)
I tell you, ask and you will receive;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and the one who seeks, finds;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성령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어서 받게 되는 것이라고 절절하게 강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는 간절함과 꾸준함이 중요하다는 점을 벗에게 먹을 것을 청하러 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청하면 받을 것이고, 찾으면 얻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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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성숙한 신앙을 위해서는 성찰과 반성, 새로운 깨달음이 늘 필요합니다. 그러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무조건적으로 절대자를 향하고 청하며 의지하는 ‘원초적 종교심’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동 문학가 마해송 프란치스코 선생이 세례를 받게 된 과정을 자신의 인생사와 함께 들려주는 『아름다운 새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과 교회를 모를 때조차도 정성껏 ‘빌 줄’ 알았던 종교적 심성이 얼마나 오묘하게 명시적 신앙 고백을 준비시켜 주는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오랜 세월, 나는 많이도 빌며 살아왔다. 하늘에도 빌었다. 땅에도 빌었다. 달님에게도 빌었고 별님에게도 빌었다. 바윗돌에도 빌었고 대감님에게도 빌었다. 빌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살 때였을까?” 그는 천주교 신앙에 눈을 뜨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체험하던 종교성이 이제야 비로소 그 본디 대상을 발견하게 되는 사실에 감동합니다. “‘천주님이 모든 근원?’ 그렇다면 내 평생 여태까지 급할 때면 손 모아 빌던 그이가 천주님이었단 말인가?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저 1년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빌던 그 대상이 천주님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어제오늘도 마음속으로 빈 그 대상이? 소름이 끼치고 그것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사실 아침저녁 비는 마음 없이 지낸 날이 거의 없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참화로 말미암은 고단한 삶 속에서 비는 마음이 간절했던 마해송 선생의 시대와는 달리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비는 마음을 많이 잃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 또한 머리가 앞선 나머지 마음으로 간절히 비는 법을 익히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께 아낌없이 청하라고 하십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매달리고 간구하는 신앙심을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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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에게는 다섯 단계의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첫 단계가 의식주와 같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생리적 욕구’입니다. 이 욕구가 충족되면 두 번째 단계는 신체적 감정적 위험에서 보호받고 안전하기를 바라는 욕구가 생기고, 이것이 충족되면 그 다음 단계로 진행되는데,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 단계처럼 기도에도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기초 단계는 기복적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는 자신의 건강이나 재산을 지켜 주고 지금보다 현세적으로 좀 더 나은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고 성숙해질수록 기도의 내용도 바뀌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바치게 되며, 나아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알폰소 성인이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청하는 은총은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물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현세적 욕구와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청하는 것은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기도는 사탕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처럼 눈앞의 욕구만 채우려는 것보다 영원성에 가닿는 단계로 성숙해야 합니다. 인간 욕구의 단계가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나아갔듯이, 우리의 기도도 기복적인 것에서 영성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 성숙해 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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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문을 두드리는데 열어 주지 않을 아버지는 없습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의 간청을 모른 체할는지요? 다만 기도의 내용이 황당하거나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 서간’에는 엘리야의 기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이 소출을 냈습니다”(야고 5,17-18). 엘리야 역시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가뭄이 들었습니다. 무려 ‘삼 년 육 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시 ‘비’를 청하자, 주님께서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엘리야의 청을 들어주시어, 당신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열리지 않는 문은 없습니다.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자꾸만 두드리면 답을 주십니다. 주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면’ 결국은 열어 주십니다. 옳지 못한 일이라면 ‘옳은 일이 되도록’ 사건을 일으켜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청원을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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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기록보다도 가깝고 생생하게 하느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선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라 했을 때는 느낌을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가르침은 어떤 신학 이론보다도 설득력 있고 친근감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생선을 청하는 아들에게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어디 있겠느냐?’ 이렇듯 오늘 복음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벌주는 하느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어린이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것이 됩니다. 죄의식 때문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뻔뻔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위축도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부모 앞에서 벌벌 떠는 자녀를 좋아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를 짓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주님의 자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두드리면 아버지는 반드시 열어 주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두드리다 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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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간절히 청하면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 절실하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희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에 포로가 된 미군이 이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열악한 상황을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쟁이 끝나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살아서 돌아간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풀려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희망은 삶에 힘과 용기를 줍니다.
성실하신 하느님
-한상우 신부-
하느님께 이르는 가장 아름다운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하느님을 믿기에 사랑의 힘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는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열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온 마음으로 얻은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두드리는 이에게 문을 열어 주시는 하느님을 알기에 이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관계의 단절을 체험한 것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교만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려 했을 뿐 하느님 자비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을 나눌 때입니다. 철저히 혼자라고 여겼던 우리가 하느님과 마음을 나누게 되면 우리가 걸어온 모든 시간이 하느님과 함께 걸어 온 은총의 시간이 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당신의 자녀가 문을 두드리는데 열어 주지 않겠습니까. 가장 좋은 하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실 것입니다.
끝이라 생각이 들 때 한 번 더 기도하십시오
-김대한 신부-
집에 가 보니 한참 뜸을 뜨고 계신 어머니께 외삼촌이 “효과도 없는데 뭐 그렇게 열심히 뜨냐?”며 핀잔을 주셨습니다. 효과가 왜 없냐고 반문하시는 어머니께 외삼촌은 지난번에 두어 번 떠봤는데 별로 효과를 못 봤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고작 두 번 뜨고 말았으니 효과가 없지! 한동안 꾸준히 해봐. 분명 효과가 있을 테니까!”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기도를 해도 효과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처럼 올바른 지향을 두지 않은 경우이거나 몇 번 기도하고 말았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오늘 복음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청하라고 말합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100퍼센트의 기도 성공률을 자랑하는데, 그 이유는 기우제를 시작하면 비가 올 때까지 계속 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벽을 부수는데 몇 번 치다가 금방 포기해 버리는 것도, 딱 한 번만 더 치면 되는데 그 앞에서 그만두어 버리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한두 번에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주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열릴 때까지 두드린다면 분명 열릴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마지막이라고 느꼈을 때 한 번만 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김찬선신부-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냐?”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왜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 탓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사탕을 달라는 아이에게 우유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사탕을 달라고 할 때마다 부모가 사탕은 이빨을 썩게 할 뿐이라고 하며 우유를 주면, 아이는 그 다음부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근원적인 불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달라는 대로 주지 않으신다는 불신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신은 사실은 불신이 아닙니다. 미성숙할 때는 좋은 것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좀 크고 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뿐 부모는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청원기도를 하고, 그래서 우리의 청원이 가납되려면 우리의 청원내용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육적인 것이 아니고 성령이어야 합니다. 남이 잘못 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성공이나 부귀영화도 아닙니다. 사랑을 달라고 청하고 성령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듯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고 청해야 합니다.
저는 며칠 전 미사 중 강론 시간에 깜짝 놀랄만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그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강론을 하기 위해 새벽에 썼던 강론 원고를 펼쳤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원고를 잘못 가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그날의 원고가 아닌, 일주일 전에 했던 강론 원고가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더군요.
사실 한번 했던 강론 원고는 곧바로 휴지통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원고는 휴지통 속에 들어가지 않고 책상 위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나중에 버려야지 라고 마음먹었다가 깜빡 잊고 버리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버리지 못하고 남아있던 원고를 그날의 강론 원고인줄 알고 미사 때 가지고 올라간 것이지요.
만약 강론 원고를 곧바로 휴지통에 버렸다면 그럴 일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나중에 버려야지’라는 안일하고 뒤로 미루는 행동으로 인해 미사 중에 당황한 일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연연하는 모습이 왜 잘못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과거의 강론 원고를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지금 해야 할 강론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과거에 연연함으로 인해서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 충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의 일로 인해서 교훈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랬더라면...’ 식의 아쉬움으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기를 할 때 뒤를 돌아보면서 달리면 어떨까요? 절대로 빨리 달릴 수 없으며, 제대로 달릴 수도 없습니다. 목표점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달려야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으며, 그 목표점을 향해 제대로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의 목표라고 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우리는 어떻게 달리고 있었을까요? 바로 지금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달려야 하는데, 혹시 과거만을 계속 뒤돌아보면서 엉뚱한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느님 앞에 다가가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주님께 청하고, 주님을 찾고, 주님의 문을 두드리는 행동은 바로 지금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과거에 연연하면서 행하는 행동이 아닌,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써 살아갔는지를 다시금 반성하면서, 이제 과거에 연연하기보다는 지금이라는 현재에 충실하면서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과거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오늘의 당신의 모습을 보라. 내일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오늘의 당신을 보아라. 그것이 바로 미래의 당신이다.(삼세인과경)
<기도 중의 기도>
-양승국신부-
‘무엇을 청할 것인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것들을 청하기만 해왔습니다. 때로 그 청하는 바가 너무나 허무맹랑한 것이어서 송구스러웠습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청해서 하느님을 곤혹스럽게 해드린 것이 아닌가, 반성이 되었습니다. 어떤 청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너무나 이기적인 청이어서 슬펐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하느님께 청하는 내용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우선 내 가족, 내 자녀, 내 부모의 안녕을 청하는 것,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내 학업, 내 사업의 번창을 청하는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입니다. 내 앞길, 내 건강, 내 계획을 보살펴달라는 청,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너무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청원은 너무나도 황당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 입니다. 어떤 청원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이어서 터무니없습니다. 어떤 청원은 슈퍼맨 할아버지라도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정확한 의미로 기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기도라기보다는 하느님을 힘들게 하는 억지요 강요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어김없이 들어주실 청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강조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한 가운데 성령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과 기꺼이 직면할 당당함을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청원기도가 한 차원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는 당신 스스로 하느님의 손수건이 되기를 원하셨고, 후배 살레시안들에게도 장상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손수건같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접든 펴든, 더러운 손을 닦든 코를 풀든, 그저 주인의 손아귀에 든 손수건처럼 하느님의 손수건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야 말로 기도 중의 기도입니다.
성모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의 외침을 생각해보십시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도 역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느님의 뜻, 우리의 구원
- 이요한 신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그 뜻을 우리는 청하고 찾고 간직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고 의지와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분명 그 의지와 뜻은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우리의 해방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나 신앙생활이 의무나 책임, 두려움에서 비롯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 정말 좋은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듯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에 대한 잘못된 희망이 파괴와 소외를 가지고 왔듯이 올바른 자유에 대한 갈망이 완성과 일치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청해야 합니다, 올바른 희망을.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참된 자유를. 그리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십시다. 주님을 모실 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류 보편의 꿈과 희망인 완전한 자유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유산입니다. 주님께 달려갑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겠다고 가득히 넘치도록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주십사고 간절히 원하는 것뿐입니다. 주님께 조릅시다. 간절히 청합시다.
끈질기게!
-김찬선신부-
어제에 이어 주님께서는 오늘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은 기도를 하되 끈질기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들어주시지만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 편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하는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하는가? 두 가지의 경웁니다.
하나는 절실하지가 않아서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좋으심을 확고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실하지가 않으면 안 들어주셔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있기에 사실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청하지 않습니다. 한 번 툭 던져봐서 ‘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태도의 사람에게 기도를 들어주심은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이 은총을 허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은총이 허비되는 것은 하느님으로서도 마음 아프시지만 무엇보다 인간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베푸시는 것이 사람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도록 우리의 갈망을 키우시고 간절히 그리고 정성껏 기도하게 하십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좋으심을 확고히 믿지 못하면 한두 번 기도해보곤 ‘역시 안 들어주시는구먼!’ 하고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선하심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이 선하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하지 않다면 악마이지 그게 무슨 하느님이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라면 선하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가능합니다. 하느님이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믿지만 자기에게 좋으신 하느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일생에 한 번도 좋으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하느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나와는 상관없고 좋은 분으로 어디에 처박혀 계시는 하느님이시거나 다른 사람에게만 좋은 분이신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었던 좋은 일은 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있었던 불행한 일만을 봅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는 좋은 일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좋은 일만 봅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참으로 딱합니다. 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나쁜 것만 봅니까? 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남의 좋은 것만 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그것도 크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좋은 일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눈에 띄지 않지만 싫은 것은 좋은 것만 있기를 바라기에 특별히 의식이 되고 그런 기억만 남을 것이고 일상의 소소한 좋은 일은 눈에 차지 않고 자기에게 과한 욕심을 부리며 거기에 미달하는 악만을 보고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사람의 문제는 자기가 보기에 나쁜 일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선한 의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기에 자기에게 나쁜 일이 사실은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에 주신 것임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실상 이런 깨달음과 믿음은 쉽지 않은 것이고 인생의 많은 경험을 통해서 힘들게 그리고 드물게 주어지는 은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은총 많이 받는 방법
-전삼용신부-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는데 동네에 집이 일곱 채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구멍가게도 없어서 군것질이란 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유일한 군것질이 가끔 오는 엿장수 리어카 아저씨에게 집에 있는 쇠붙이며 병 등을 팔아 받아먹는 뻥튀기 과자가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은 사은 대잔치를 한다고 동네 아이들에게 뻥튀기를 공짜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얼른 달려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각자 그릇들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 그릇의 크기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저는 내심 ‘그래도 공평하게 나눠주겠지!’라고 생각하고 두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저씨는 두 손에 쏟아질 만큼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에게는 각자 가져온 그릇에 가득가득 주는 것이었습니다. 세숫대야를 들고 나온 아이도 거기에 가득 채워갔습니다. 저는 가장 많이 받아간 아이에게 비굴하게 붙어서 얻어먹어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치 큰 공을 세운 사람이 큰 상을 받는 것처럼, 각자의 크기를 따지지 않고 똑 같이 나누어주는 것이 공평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그릇의 크기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어떤 그릇을 가지고 왔느냐에 따라 그만큼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은총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의 그릇을 지니고 있어야 은총을 충만히 받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는 먼저 은총을 주시는 분이 매우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위에 한 이야기에서 제가 가장 뻥튀기를 적게 받은 이유는 그 아저씨가 인심이 그렇게 후할 것이라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그 아저씨를 후한 분으로 판단했고 본인들이 판단한 만큼 받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은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풍부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는 자비로운 분임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두 번째는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한 임금이 귀한 진주 두 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크기가 감자크기만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 가치를 아는 백성에게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하에게 그것을 주면서 세상에 돌아다니며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하인은 과일 가게에 갔습니다. 그 과일 가게 주인은 사과 두 개를 줄 테니 그것과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야채 가게에 갔습니다. 그 주인은 감자 두 개를 줄 테니 바꾸자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보석상에 갔습니다. 보석상 주인은 너무 놀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줄 테니 그것을 줄 수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신하는 그것을 보석상에게 거저 주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먼저 청해야 하는 은총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사랑, 평화, 기쁨 등의 온갖 열매를 맺게 하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청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청하는 것이고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것들도 덤으로 얻게 될 터인데 성령의 은총보다 세상 것들을 더 청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은총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진정으로 원해야 합니다.
만약 오늘 복음에서 친구가 빵을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을 때 그냥 포기했다면 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친구가 빵을 줄 것을 믿고 끈질기게 청했기 때문에 그것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청하다가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그것은 진정으로 원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죽기까지 청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시고 금방 들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청하려고 할 때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청하려는 마음을 지녀야합니다.
기도는 마치 활을 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냥 허황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과녁이 확실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쏘아서 맞지 않는다면 맞을 때 까지 줄기차게 쏘아야 합니다. 그래도 잘 맞지 않는다면 하느님 스스로 그 과녁을 우리 코앞에 놓아주실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백>
-양승국신부-
요즘은 계절을 타서 그런지 나이에 맞지 않게 자주 지난 시절을 회상하곤 합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내 생애 안에서 가장 절실히, 가장 간절히 기도했던 때가 언제였던가?"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습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지 10년 정도 된 시기로 기억합니다. 제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많이 노력했었지만 노력만큼이나 방황이나 좌절이 많았던 시기,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하던 시기, 더구나 최종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종신서원을 앞둔 시기였습니다.
여러 측면에서의 다가오던 스트레스들, 거기다 지극히 소심했던 제 성격은 제 영육을 완전히 다운시켰습니다. "이렇게 소화가 안되고, 통증은 계속되고 혹시라도 큰 병은 아닐까? 아직은 좀 더 살아야 되는데..."하는 걱정에 내시경까지 해봤지만 아무런 이상은 없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다보니 몸이 맛이 가고, 몸이 맛이 가다보니 정신도 약간씩 맛이 간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보니 공동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그로 인한 죄책감으로 또 스트레스를 받고...아무튼 그런 악순환이 거듭되다보니 삶을 완전히 포기할 지경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소문을 통해서 제 근황을 알게된 어머니께서 하루는 큰 가방을 들고 수도원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애야, 수도생활도 좋지만 일단 살고 봐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이제 수도생활도 할만큼 했으니, 그만 됐다. 원장 신부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이젠 시마이하고 집으로 가자!"
당시 너무도 심신이 지쳐있던 저는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만큼이나 노력했는데, 시대가 나를 안 받쳐주니 할 수 없지"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귀향열차를 탔습니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집에 와서 투병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래,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몸이 안 따라주니 어쩔 수 없지"하고 완전히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는 제게 어느 순간 "그래도 내 청춘을 바쳤는데, 너무 억울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가는데 까지 한번 가봐야 되지 않겠나?"하는 오기가 은근히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난 저는 집 가까운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정말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고 수도자로서 봉헌된 삶, 봉사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이렇게 협조 안하시냐"고 인정사정 없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당시 제 안에 남아 있는 에너지 전부를 기도에만 다 쏟아 부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도 기도가 지나쳤던지 탈진할 상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간절히, 참으로 절실히 기도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기력이 다 소진되었다고 느껴지던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제게 건네셨습니다.
"애야, 이제야 알겠느냐? 네게 고통을 보낸 이유를. 정화가 단련이, 거듭남이 네게 필요했었단다. 이제 걱정말로 다시 한번 새출발해 보거라."
이런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그때 당시의 고통을 가장 큰 선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보내시는 이유는 보다 절실한 기도, 보다 처절한 기도를 통한 새 삶을 준비하시기 위함입니다.
당시 제가 틈만 나면 밥먹듯이 되풀이하던 기도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하느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물론 여전히 하느님을 "왕실망"시켜드리지만 간절한 기도는 하늘에 닿는다는 확신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 한 차원 도약을 위한 것, 영적인 삶을 위한 것,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을 위한 것일 때 하느님께서는 100%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하루, 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두드리시는 하루, 다시 한번 좌절을 딛고 힘차게 일어서시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기도 안하는 변명들
-이인옥-
연일 기도에 관한 말씀이다. 얼마 전에 기도에 관한 나의 안이한 생각을 뒤엎어주는 책을 만났다. 안토니 블룸이라는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쓴 ’기도의 체험’, ’살아있는 기도’를 읽고 난 충격은 그 동안의 내 게으른 기도생활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평소에 기도란 호흡처럼 숨쉬듯 가볍고 편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건성으로 하는 염경기도 백 번보다 정성껏 드리는 화살기도 한번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도는 자세를 단정히 하고 정중히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라 봉사를 하는 것으로, 성서를 읽는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으며 기도를 너무 ’나’ 중심적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어쩌면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위로해왔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곧잘 말한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인격의 만남이며 관계라는 것, 곧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어떤 교수에게 졸업한 제자가 찾아와 주례를 부탁했다. 한 시간 동안의 면담 도중 핸드폰이 네 번 울렸는데 그때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문자를 날리고 통화를 하는 모양을 보고 주례를 거절했다고 한다.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의 주례를 청탁하는 자리에서 단 한시간도 눈을 마주하고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없는 산만한 사람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어서라는 것이 이유였다.
혹시 교수는 하느님이시고 제자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기도가 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있게 의식하고 나누는 대화라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안토니 블룸은 기도란 하느님의 인격적인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느님 면전에 선다는, 마치 최후의 심판정에 임하는 것처럼 두렵고도 떨리는 자세로 그분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매번 그럴 수 있냐고 한숨 쉬기 전에 하루에 단 한 번 아니 일주일에 단 한번이라도 그토록 진실하게 주님과 만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일하면서, 온갖 분심 속에서, 길을 가면서, 아무 때나 틈새에 잠시 불렀다가, 힘들고 바쁘다고 다시 구석으로 밀쳐놓는 분이 소위 나의 <주님>이다. 이렇게 소홀히 대하면서도 내가 원할 때 즉각 달려오지 않는다고, 침묵한다고 주님을 원망한다.
또한 마음을 다해서 드리는 화살기도도 좋지만, 교회와 신앙의 선배들이 고심 끝에 마련한 기도문은 옛 선조와 내가 공동으로 드릴 수 있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기도라는 것도 재인식했다. 더구나 사랑이 언제나 달콤함만 있지 않듯이, 무덤덤한 기도의 때도 있는 것이어서 그 때를 위하여 염경 기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 역시 그런 때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기도했다는 안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올 감미로운 기도의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실 너무 쉽고 편한 기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태한 기도생활로 이어져 이런 저런 핑계로 변명하다가 다른 활동이나 영적 독서로 대체시켜버렸던 때도 많았었다. 다시 기도가 필요하다는 열망이 끓어오를 때면 그동안 주님과의 거리를 의식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얼마동안 다시 기도를 하다가 또다시 반복되는 나태한 생활에서 신앙은 늘 제자리를 답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적독서, 봉사활동이 기도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도를 <안하면서> 그것을 기도로 핑계 삼을 수는 없다.
우리는 정말 하루 몇 분을 쪼개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분의 현존과 마주하지 못할 만큼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정말 아무 때나 그분을 불러내고 아무 때나 그분을 뒤로 물리칠 만큼 그분을 아무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불러낼 때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그분의 침묵-하느님의 자율권-에 그렇게나 도전할 만큼 그분을 종처럼 취급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정말 기도를 부담으로 느낄 만큼 그분과의 관계가 소원한 것은 아닐까?
새벽을 열며
지난 8월 달에 원고 청탁을 하나 받았습니다. 12월에 나갈 잡지에 낼 글로 12월 한 달 동안의 묵상 글을 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허락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 홍보실에 근무할 때, 원고청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짐한 것이 있거든요. 즉, 저는 누구에게든 원고청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요.
아무튼 저는 한 달 동안의 묵상 글을 쓰겠다고 약속을 했고, 더군다나 10월 20일까지만 써서 보내주면 된다고 하니 별로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그마치 두 달이나 남았으니까요. 그리고 이번에는 시간을 두고서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이틀에 하나의 묵상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바쁜 일정들이 하나 둘씩 생기면서 그 결심을 지키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이유로 쓰지 않고 뒤로만 미루게 되더군요.
9월 20일. 원고 마감까지 딱 한 달 남았습니다. 이제 이틀에 하나의 묵상 글이 아니라, 하루에 하나의 묵상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하루에 하나. 그것도 A4용지 13줄 정도의 분량이니 별로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결심도 또 지켜지지 않더군요. 왜 이렇게 새로운 일정들이 생기는지……. 더군다나 하루에 한 개의 묵상 글은 별로 부담되지 않기에 또 뒤로 미룹니다.
10월 5일. 이제 보름 남았습니다. 이제는 하루에 두 개의 묵상 글을 써야 합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별로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10월 11일. 이제는 미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하루에 세 개의 묵상 글을 써야지만 원고마감을 간신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일부터 하지 뭐.’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미루다보니, 이제는 써야 하는 묵상 글들이 점점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부담되는 원고청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으로 미루는 저의 모습이 바로 부담되는 원고청탁으로 만들었던 것이지요.
주님께 대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결코 뒤로 미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는 특별히 시간이 더 많이 있는 줄로 아는지 계속해서 뒤로 미룹니다. ‘내일’이라는 시간. 그 시간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는 것인데, 오직 하느님만이 아는 시간인데도 당연히 자신에게 돌아올 시간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지금 당장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시간 날 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요? 혹시 계속해서 뒤로 미루다가 저처럼 별 것도 아닌 것을 큰 부담꺼리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내가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하느님의 괴롭혀드리는 기도>
가끔씩 우리는 하느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기도를 바칩니다. 그런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의 머릿속을 아주 복잡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기도가 그렇습니까?
월드컵 8강 경기가 벌어지기 직전입니다. 우리나라와 이탈리아가 맞붙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승리를 기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철야기도까지 하면서 간절히 승리를 기원합니다. 지구 반대편 이탈리아에서는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습니다. 수많은 성당에서 승리 기원 미사가 봉헌됩니다.
이럴 때 하느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시겠습니까? 이런 스타일의 기도는 기도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괴롭혀드리는 일이며, 하느님을 기적의 요술방망이로 전락시키는 장난일 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즘 로또 복권을 많이들 사시지요. 로또 복권을 한 장 손에 든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느님, 이번 딱 한번만 신경 좀 써주세요. 큰 걸로 당첨되면 제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반을 뚝 잘라 하느님께 봉헌하겠습니다.”
그리고는 9일기도를 바친다, 철야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런 기도가 허락되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라는 하늘에 내리치는 날벼락 맞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고교 내신 성적이 거의 바닥입니다. 수능도 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런 학생이 내놓으라는 유수대학, 그것도 제일 잘 나가는 학과에 응시했습니다. 그리고는 백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가 결코 드리지 말아야 할 기도입니다.
우리가 성심껏 기도바치지만 하느님께서 절대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반드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기도, 허무맹랑한 기도, 우리를 위험과 악, 죽음으로 몰고 가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영혼의 유익을 바라시는 분입니다. 우리 눈앞의 작은 이익, 우리의 끝도 없는 사리사욕, 이기적인 바람의 지속적인 충족을 위해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기도가 그럴듯해 보입니다. 이유가 타당합니다. 아주 내용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실 때 위험천만한 기도가 많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것은 무엇입니까?
눈앞의 작은 것이 아니라 보다 멀리 있는 큰 것입니다. 육체적인 것을 건너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보다 영원한 것입니다.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영속적인 것, 말초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것, 결국 영혼의 구원, 공동선, 가난한 이들의 행복, 하느님 나라의 도래, 이런 것들이 우리 기도의 주 대상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지금 잘 모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결국 우리가 취할 자세는 기도의 결과가 어떠하든 항상 감사하는 일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일입니다. 항상 하느님의 뜻이 내게,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보다 이타적인 기도, 보다 영성적인 기도, 보다 수준 높은 기도, 결국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탄력
-이수철 신부-
어느 손님이 수도원을 찾아 노수도자에게 “수도원에서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수도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일어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아주 예전에 공감하며 읽었던 일화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누군가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포자기나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더 큰 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고…. 바로 이게 우리 일상의 삶이요, ‘십자가의 길’이 뜻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적극적이고 항구한 좋은 기도의 자세를, 믿음의 자세를, 삶의 자세를 말해줍니다. 한 번만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부단히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집요한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자세입니다.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청할 때, 찾을 때, 문을 두드릴 때, 하느님은 우리 생각이 아닌 당신 생각대로 최고, 최선의 방법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어려워 마, 두려워 마!
-안성철 신부-
우리는 대부분 저 사람은 내가 부탁하면 귀찮아하고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미리 단정해 버린다. 이렇게 나름대로 생각하고 나서는 아예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내가 아주 어렵사리 부탁한 것을 상대방이 의외로 기쁘게 들어주는 것을 종종 체험하게 된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 같다. 우리는 하느님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면서 내가 먼저 해결하려고 하고, 다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하고, 그래도 안 되면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한다. 그분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면서 언제든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외롭고 힘들어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언제든지 달려와 주는 분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늘 가까이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망각한다. 하느님은 나를 늘 첫자리에 두시는데, 정작 나는 그분을 맨 끝자리에 놓고 한참을 헤맨 뒤에야 찾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제발 아버지 하느님을 좀 귀찮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구하지도 찾지도 두드리지도 않는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종용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늘 의식하면서 순간순간 그분께 도움을 청한다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시면서 우리가 청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부모를 어렵게 대하는 것을 바라겠는가? 우리 모두 그분을 너무 어렵게 대하지 않고 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박성태 신부-
동물들의 달리기 대회가 열렸는데 뜻밖의 경기결과가 나왔습니다. 우승자는 사자나 치타 표범도 아니었고 작은 개미였습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이변을 취재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연습을 했기에 이런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개미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그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답답해진 기자들은 고성능 최첨단 장비를 마련하여 개미의 대답을 듣기로 했습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개미씨, 오늘 우승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과연, 개미가 뭐라고 말했을까요? 스피커를 타고 크게 들려온 개미의 대답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유머이긴하지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할 부분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수능이나 취업을 위해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좋은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운동 선수들은 좋은 기록과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정치인들은 모든 국민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정책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한 가정의 가장은 가족들의 생계부양을 위해, 주부들은 가족의 건강과 편리한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가만히 둘러보면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이유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고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먼 길에 지친 한 여행자가 기후 특성상 한낮의 더위를 피해 한밤중에 친구 집에 도착했는데 문제는 피곤과 굶주림에 지친 여행자를 대접할 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의 천사를 대하듯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후하게 음식을 차려 대접을 하는 것을 그들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분의 빵이 하나도 없었던 주인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이었지만 염치불구하고 친구에게 빵을 빌리려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찾아간 친구 집은 벌써 문이 닫혀있었고 빵을 꾸어달라는 말에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귀찮게 굴지말게. 벌써 문들 닫아 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하는 거절하는 대답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문을 계속 두드리며 빵을 꾸어달라고 하면 마침내는 귀찮아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청을 들어줄 것이며 원하던 빵을 얻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빵을 구하러간 친구가 건성으로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했다면 "귀찮게 굴지 말게...."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심지어는 배신감까지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길에 지치고 배고픈 친구를 진정으로 위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빵을 얻을 때까지 문을 두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나 기도할 때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라도 해봐야지' 하는 얄팍한 기대 심리로는 온전한 기도를 바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마음이며 성령은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까? 어떤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그 간절한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또한 나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친구는 없는지 부족하지만 나의 작은 손길을 아쉬워하는 이웃은 없는지 생각하고 살펴보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함께하시어 이 세상이 태초의 모습처럼 아름답게 되기를 바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이정희 -
“예수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분께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있다면 그에게서 눈길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기도는 많은 사랑을 담고 있는 기도이다. 영혼의 눈길이 더 많은 사랑으로 차 있을수록 또 영혼이 그의 하느님 앞에서 더 상냥하고 애정 깊게 머물수록 그만큼 더 좋은 기도가 된다.”(샤를 드 푸코)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다. 나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알 것 같은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 푸코의 묵상이 이런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언제나 같이 있고 싶고, 그를 찾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자체가 좋고 기쁘고 힘이 난다. 어느 책에선가 기도는 사랑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도와 하느님 사랑은 순환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하느님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 모임에서 만난 자매는 아이의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구하지 못해 애태우다가 마지막 순간 꼭 그만큼의 돈을 마련하게 됐을 때 구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라는 말이 무엇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노라고 했다.
오늘 복음은 한 걸음 나아가 성령을 주신다고 한다. 가스파리노 신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목표는 언제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승낙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사랑의 풍요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물을 긷는 사람이 없어도 샘물은 솟아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물을 길어야 비로소 그 샘물은 ‘우리를 위한 것’이 된다.” 오늘 그 샘물이 나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기를. 그래서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도록 주님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친구와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자네가 애완용 새를 구입하면 나에게 만원을 주게나. 만약 구입하지 않으면 내가 자네에게 만원을 주지.”
이 친구는 평소에 새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또 기르지도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승리가 분명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며칠 뒤 이 친구에게 비싸고 아름다운 새장을 선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메모가 적혀 있었지요.
“친구, 이 새장은 자네가 새를 살 것이기에 미리 선물로 보내는 것이네. 물론 새를 사고 안사고는 자네의 마음이네. 하지만 이 새장만은 자네 거실 한가운데에 걸어주게나.”
이 친구는 ‘그런다고 내가 새를 살 것 같은가? 나는 절대로 새를 사지 않을 거야. 내기에서 지면 안 되니까.’ 그러면서 그 멋진 새장을 거실 한가운데에 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이 비어 있는 새장을 보고는 그에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새가 언제 죽었어요?”
손님들의 질문이 계속되자 친구는 그 내기를 일일이 설명하는 일이 귀찮아졌고, 결국 비어 있는 새장을 채울 작은 새를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만원 때문에 사람들의 귀찮은 질문을 계속 받기는 힘들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의 귀찮은 질문 때문에 이 사람은 내기에 지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새를 좋아하지 않았고, 내기에 일부러 지기 위해서 새를 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계속되는 질문에 결국 자신의 의지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특히 이러한 변화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도 가능하지만, 다른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귀찮을 정도로 말하고, 마음의 감동을 일으킬만한 외적인 행동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노력을 강조하십니다. 어떠한 청도 바로 이런 노력을 계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쉽게 포기하는 우리들의 나약한 마음입니다. 물론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말하지요. 그러나 정말로 최선을 다했을까요? 하늘을 움직일 만큼의 노력을 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밤을 새워 기도하셨고, 3년의 공생활을 위해서 자그마치 30년을 나자렛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밤을 새워 기도하였고, 그 잠깐의 기도가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했던 것은 아닌가요?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 희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신앙인은 바로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심어 주셨으니까요. 바로 이 희망을 간직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오늘도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세요.
빠다킹 신부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 의지, 청원, 인간적인 노력, 성령
-이성우 -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아빠, 아버지이십니까?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이 있습니까? 내가 하느님과 아빠와 자녀의 관계에 있다면, 나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기에, 내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가장 유익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청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주신다는 것에 대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으며, 또 지금 당장 주시지 않을 때는, 지금 주시지 않는 것이 나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빠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청하면 받고, 찾으면 얻으며, 두드리면 열린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인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노력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 전에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하느님이시지만, 나의 노력이 있어야 주실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주를 진주로 알아보지 못하고, 보물을 보물처럼 사용하지 못합니다. 있는 힘을 다해 갈망하고 노력할 때, 하느님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실 때, 나는 무엇을 청하고 무엇을 찾으며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 가장 효과적으로 알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갖고 성령을 청하며 성령과 함께 인간적인 노력을 다할 때, 나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고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 깊은 곳의 갈망
-김정대 신부-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좇아가면 하느님을 만난다. 부제서품을 앞두고 나는 호주 사막 한가운데서 8일 피정을 했다. 멜버른에서 사막까지는 기차로 꼬박 29시간이 걸렸다. 아침 여명이 밝아오면서 드러나는 벌건 사막엔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바싹 말라 있었다. 나는 사막이 주는 위압감에 눌렸고 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원주민들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도 편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피정을 지도해 주실 수녀님께 멜버른을 떠나 이 사막에 오기까지의 여정과 내 마음의 움직임을 이야기하였더니 수녀님은 간단히 “두려움이군요. 피정 동안 이 사막의 환경에 자신을 열어보는 연습을 하세요”라고 하셨다. 피정 첫날, 나는 피곤해서 낮잠을 잤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찾아가듯 나는 소리나는 곳을 찾아갔다. 그 소리가 나는 곳은 마을회관이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혹시 나를 거부하면 어쩌나 싶어 망설이다 내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내 이야기를 들은 수녀님은 나에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수녀님은 위축되어 있는 나에게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좇아가세요. 그러면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주셨다. 내가 그 회관에 편안히 들어가는데는 약 4일이 걸렸다. 첫째 날은 문에서 1미터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날은 주변 의자에 앉아서 10여 분을 있었다. 그 다음날 갔더니 어린아이들이 먼저 와서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놀았다. 경계의 대상이었던 원주민들에게 환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강영구신부-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그대에게
이렇게 기도해보시겠습니까?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영원에 전급할 수 있는 기회이니까요.”(참 삶의 길 중에서 ‘감사의 기도’)
감사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이미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진정으로 구하고 찾아야 할 것은 감사할 줄 아는 것이고 두드려야 할 문은 감사의 문입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모자라서 허덕이게 되는 이유는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바르게 기도하지 못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바르게 사랑하지 못하고 소유하려고 덤빕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미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행복을 손에 쥐고도 불행해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환희와 기쁨마저도 고통으로, 성공도 실패로 느끼게 됩니다.
당신은 이미 은총과 축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매사에 감사하는 기도를 바치시기 바랍니다.(一明)
상처와 용서
-최영균 신부 -
사목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한숨을 잘 쉰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허무하고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러냐고 물으면, 정말 어려울 때 찾아갈 친구가 없다고, 또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 외모가 못나서 자신이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이들이 하는 일은 그저 한숨을 쉬는 일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세상이 젊은이들을 움츠리게 만드는 외적인 원인도 제공하지만, 사실 이런 한숨 속에 배어 있는 대책 없는 허무주의는 예부터 늘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사주카페에 가서 점을 보기도 하고, 점쟁이가 좋은 이야기를 해주면 거기에 기분이 좋아져 잠시나마 자신의 어려운 처지에 위안감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점집에 가는 것이 이 모든 허무함으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허무함에 위축되어 있는 우리들의 어깨를 잡고 일으키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운명론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 은총의 자유로운 개입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할 때 우리는 해방을 맛볼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는 자는 가능한 꿈도 이루지 못합니다. 지금의 모습에 한숨을 쉬기보다 꿈을 꾸고 그 꿈을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우리를 살려줄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는 하느님
-박상대신부-
기도 중의 기도요, 가장 완벽한 기도이며,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일용할 양식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청할 것을 허락하신다. 아니, 청할 것을 서둘러 권고하신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청원기도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다. 첫째는 청원기도를 드리는 태도에 관한 것으로서 기도의 항구함과 인내와 끈기이다.(5-10절) 둘째는 청원기도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고 있다.(11-13절)
우선 루가복음이 독자적으로 보도하는 예화가 바로 기도에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예화는 한밤중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은 다른 친구가 내놓을 빵이 없어서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가 빵을 청하는 다소 극단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예화의 결론은 사람이 우정만으로는 빵을 얻지 못하지만,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졸라대면 결국 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청원기도에는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찾는 사람에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그 청을 거절하지 않고 꼭 들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니 청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청원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아보자. 예수께서는 일단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이 청하는 것을 다 들어줄 줄 아는 이 악한 세대의 아버지들과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비교하는 대비논법(對比論法)을 통하여, 세상의 아버지들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더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심을 암시하신다. 나아가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이던,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뜻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며, 결국에는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이란 바로 하느님을 자신을 가리킨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 자녀들이 생선을 청하면 생선을 주고, 달걀을 청하면 달걀을 주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보다 더 좋은 "하느님 당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사와 찬양으로만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깡그리 비운 두 손을 믿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림으로써 그분을 경배할 수도 있다. 나에게 없는 것을,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겸손되이 청하는 것도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 청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느님께 하느님 당신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청한 바로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 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기도를 바칠 수 있다면 어떨까? "당신께서 가난하셨는데 내가 어찌 부자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거짓 예언자를 높이고 참 예언자를 돌로 쳐죽인 자들의 후손들이 당신을 거부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내가 어찌 사람들 눈에 유명하고 권세 있는 자 되기를 애써 바라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겠다는 희망을, 그 희망이 결국은 절망을 가져다 줄 뿐인데, 내가 어찌 그런 희망을 가슴속에 품어 기르겠습니까?"
청하여라(루가 11,5-13)
-유 광수신부-
내가 너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항구하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신다. 무엇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청하고 찾고 두드린다. 그러나 각자 다를 것이다. 내가 늘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무엇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가? 재물, 권력, 명예, 쾌락????
우리는 매일 청하고 찾고 두드리지만 한번도 만족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얻었다 싶으면 또 다른 것을 갖고 싶고, 찾았다 싶으면 무엇인가 부족해서 또 다른 것을 찾고, 두드려서 열린 것 같은데 열어보면 더 오리무중이다. 매일 매일 물을 길러 우물가에 나가야 하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인간은 매일 찾고 청하고 두드리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부족하고, 늘 허전하고, 늘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럼, 무엇으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가? 무엇을 얻고 찾고 열리면 더 이상 청하지 않고, 찾지 않고 두드리지 않는가?
시편에 이런 노래가 있다.
" 주여, 잘난 체 하는 마음 내게 없삽고, 눈만 높은 이 몸도 아니오이다.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아니하고, 내게 겨운 일들은 하지도 않나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131)
시편의 전반부를 보면 얼마나 잘난 척을 많이 했고, 콧대가 높았고, 자기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다녔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즉 잘난 척 하는 마음도, 눈이 높지도, 한다한 일들을 좇지도, 내게 겨운 일들도 모두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이제는 고스란히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인 듯 젖 떨어진 아기처럼 얌전하게 있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젊었을 때 안 해 본 것 없고, 안 가 본 데 없고, 안 나서 본 데가 없이 다 해 보고, 다 가 보고, 다 가져 보았지만 그런 것들로 마음이 편안해져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것에 행복이 없었다는 것이다. 늦게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런 것들로 바쁘게 살지 않고 "차라리 마음을 다스리고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처럼 지내겠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띠노가 "주여, 당신을 떠나서는 내 마음이 늘 불안했나이다."라고 고백했듯이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늘 불안하고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은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을 만났을 때만이 행복을 느끼고 평화로울 수 있다.
인간이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은 어떤 일도 아니고, 어떤 사람도 아니고, 어떤 장소나 재물도 아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한 사랑이다. 즉 나를 영원히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을 만났을 때만이 행복할 수 있고 더 이상 이것저것을 청하거나 찾거나 두드리지 않는다.
"너희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뱀도 전갈도 아니라 성령 즉 사랑이시다. 성령은 하느님이시오, 사랑이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때만이 채워질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즉 성령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성령은 우리 안에 올 수 없으면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지만 전혀 느낄 수 없고 활동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미 하느님은 내 안에 와 계시고 성령은 세례성사 때에 오셨다. 이마 와 계신 성령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다른 것을 청하고 구하고 얻으려고 밖에서 찾으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정말 행복한 사람은 " 행복한 사람이여 불신자들이 꾀하는 말을 그는 아니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망나니들 모임에 자리하지 않나니 차라리 그의낙은 야훼의 법에 있어 밤낮으로 주님의 법 묵상하도다."(시편 1)라고 노래한 것처럼 조용히 복음을 묵상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말씀을 더 잘 묵상하려고 성령께 도움을 청하면서 밤낮으로 야훼의 법을 묵상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없으리라. 더 잘 묵상하기 위해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그러면 젖떨어진 아이처럼 어미 품에 안겨서 평화스럽고 행복함을 느끼고 맛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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