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122.
팔만구압자의 절이 있었다는 마을
무안읍 성동5리 대사동 마을
성동리는 조선시대 무안읍성의 동쪽에 위치한다 해서 부르는 지명이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문회, 대천동, 대사동, 마기곡, 용산, 복용동리, 지촌리 등을 합하여 무안읍 성동리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원성동, 여트물, 용산, 복용, 대사동, 동문밖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대사동은 원래 성동1리 였는데 몇 해 전에 분리(分里)되면서 지금은 성동5리에 속한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큰 사찰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는 약사사가 있다.
대사동에 위치하고 있는 약사사는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성명미상의 대사가 창건한 南鶴寺(대사동에 성동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鶴이 많이 찾아 왔었다고 한다. 해서 본래의 이름은 남악사가 아닌 남학사이다)가 폐찰된 자리에 1972년 대우사를 짓고 이어 1983년에 약사사로 개명, 중창한 사찰이다. 大寺洞이란 이름만큼이나 불교와 관련된 설화나 사찰이 많았고 불세(佛勢)가 성했던 곳이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이곳에서는 "버선발 (또는 벗은발)로 남산까지 다녔다"거나 또는 "팔만구암자의 절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사찰이 많았었다고 한다.
문화유적총람에는 약사사 주변의 불교 유적으로 약사여래불과 里人寺址의 5층 석탑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약사여래불 하나뿐이다.
워낙 불교적 인연이 강한 곳이라 남학사가 폐찰 되면서 다시 세워진 절이 '이인사'다. 지금은 없어지고 옛터[寺址]만 희미하게 남아있으며 이인사의 주춧돌이라 여겨지는 큰 돌 1점과 약사사를 세울 시 발견한 석불 나한상으로 여겨지는 20여점의 불상편, 그리고 다수의 청자 파편이 있어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볼 수 있으나 기록이 없어 창건연대나 규모 등을 확인할 수가 없다.
약사사에는 전남유형문화재 제178호(1990년 12월 5일 지정)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있다. 약사사 창건주 경훈스님의 선몽에 나타났다는 이 석불은 왼손에 약항아리[藥壺]를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결인을 취하고 있는 약사여래불이다.
약사사를 포함한 대사동 주변의 땅은 조선조 이래 오랫동안 이 지역의 세도가였던 정참봉(정학정)의 땅이었다. 후손들의 관리가 부실하여 지금은 대부분이 남의 땅이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자기 땅만 밟고 다녀도 한나절을 간다고 할 정도의 넓은 규모의 땅을 소유했다.
특히 절이 있었던 공산(貢山. 현재 성동공원)은 삼학소주에 넘어갔는데 삼학소주 사장은 그때 산 밑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불상, 석등, 5층탑, 사자상, 당간지주 등을 모두 서울로 가져갔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때 이러한 유물들을 가져가는 기간이 한 달이나 걸렸다고 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약사상은 바위에 조각한 것이기 때문에 가져가지 못하고 다른 문화재는 전부 실어갔다고 한다. 삼학소주 측은 지역문화재를 실어간다고 주민들이 반대할까 봐 현재의 노성원에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성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 성동공원인 공산은 무안군의 소유가 되었다.
약사사 주변에는 주목할 만한 나무 세 그루가 있다. 사찰 경내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둘레가 2미터 80이 넘는 나무도 있다. 또한 사찰 뒤에 있는 팽나무는 둘레가 4미터 80이 넘는 아주 오래된 나무로 지금도 신도와 주민들이 매월 초사흘이면 이 나무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있다.
사찰 앞은 예전에는 몽탄과 일로로 가는 큰 길이었다. 해서 행인들이 팽나무 앞을 지날 때는 이 나무를 木神으로 믿고 치성을 드리고 갔으며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침을 세 차례 뱉고 지나갔다고 한다. 또한 단오날에는 주민들이 팽나무 아래에 있던 들독을 들고 힘겨루기 시합을 하기도 했다. 그 팽나무 앞에는 정참봉을 칭송하는 ‘정공학정덕혜기념비’가 있다.
약사사 앞을 흐르고 있는 개울을 月川이라 했으며 대림장 앞에서 낙지골목으로 가는 개울에 월천교가 있었다. 사찰 앞은 사장터(활터)라고 하며 앞의 산은 활 터와 관련이 있는 매듭산이라 한다. 또한 성동저수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저지동골이라 하는데 그곳은 6,25 때 14명의 주민이 인민재판을 받아 한꺼번에 총살당했던 곳이라고 한다.
처음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성씨는 서씨, 고씨, 박씨 등이라 하나 확인할 수 없다.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성종 代 나주 김씨 김수남(나주인, 1487-1540)이 나주 거평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후에 제주 양씨 양의남(호-月軒)이 임진왜란 때 능주 월곡에서 이곳에 옮겨왔다고 한다. 현재 대사동 주변의 웬만한 임야는 나주김씨 소유의 門中 산들이다. 이같은 상황으로 볼 때 1500년대 초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입향조는 나주 김씨로 여겨진다.
무안 읍 성터가 남아 있었다. 원래는 성내리에만 남아 있다고 여겼었는데 성동리에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성동리의 목포식당에서 무학교회 쪽으로 나 있는 흙벽 담과 제일교회 쪽으로 나 있는 흙벽 담이 성터의 흔적 들이다. 성을 쌓았던 큰 돌들은 묻히거나 주민들이 집을 지을 때 대부분 가져가 버렸지만 아직도 성벽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또한 목포식당에서 제일교회 쪽으로 가는 곳에는 구수나무가 있었다 해서 구시낭거리, 평나무가 있었다 해서 평남거리, 그리고 그 사이에 똑다리가 있었다. 똑다리의 다리는 시가지 조성 때 묻혀 졌던 것을 근래의 도로공사 때 파 내어 쓰임새를 찾을 때까지 주민들이 보관하고 있다.
현재의 군청이 있는 곳에 터를 잡을 때 일화가 있다. 군청 뒤에 있는 산이 원당산인데 무안군의 초대군수였던 정시채씨가 산의 이름을 보고 군청의 터 자리를 잡은 것이다. 즉 원당산은 원님이 있는 집이 들어설 자리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원당산에 있는 바위에는 ‘원님이 바위에 서서 읍내를 살펴봤다’는 발자욱이 남아 있다.
군청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 마구실(또는 마기곡)이다. 예전에 이곳에서 말을 기르고 관리했던 곳으로 지형이 일어나는 말의 형국이라고 한다. 또한 성동제 맞은 편에 있는 산이 큰 산인데 원래 그곳에는 나주 김씨 제각이 있었다. 그러다 저수지가 생기면서 현재 버벌산이라 부르는 곳에 그 제각을 옮겨서 지었다. 제각 아래에는 옛날 원님들이 나들이 나와 즐겼던 구시래라는 바위가 있다. 또한 대사동 서쪽에 있는 등성이를 산당이라 하며 용산에서 대사동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삽바웃재라 부른다.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12호인 정득수 가옥이 있다. 조선시대 세도가였던 정참봉의 집인데 현재는 문간채 만 남아 있다. 얼마 전까지 문간채 앞에 문화재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문간채의 구조는 일자형 삼 칸으로 가운데 칸에 대문이 나있고 좌우에 1칸의 방이 들여져 있다. 3량의 간단한 구조로 기단 없이 화강암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부재를 다듬는 치목이 매우 견실하게 되어 있다.
문간채 상량을 보면 대정 4년 을묘(1915년)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채는 1911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민속촌으로 가져가 없고 그 자리에는 일반 민가가 들어서 있다. 안채와 문간채를 구분하는 내부 담장이 있는데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전돌(전돌은 벽돌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데, 벽에 전통성이나 장식성을 강조할 때 쓰이는 벽돌의 또 다른 용어이기도 하다. 고분이나 능에 많이 사용했다. -필자 주)로 여러 가지 문양을 새긴 꽃담이 남아있다.
원성동은 131세대 305명이, 대사동은 151세대 27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첫댓글 감사히 잘 보았슴니다 그런데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리도 방대한 양을 조사 기록하셨는지참으로 대단 하십니다..(꾸벅)
백창석 선생님께서는 탐방 마을이 정해지면, 그 마을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두 보시고 기록하였다가, 마을탐방시 자료들에 대한 확인 및 추가 자료들을 모으시기에 가능한 일이지요^0^ 선생님의 무안에 대한 열정과 애정에 늘 감탐, 감동,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아~ 예.. 암튼 그 수고로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구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