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알평 (표암공 瓢巖公)
알평은 하늘에서 진한 땅 표암봉에 내려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117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69년 , 6촌장이 알천의 둑 위에 모여 나라를 세울 것을 논하였다.
마침 남쪽 양산 밑의 나정에서 혁거세 거서간을 발견하여 왕으로 삼기로 하고
함께 양육하여 기원전 57년에 왕위에 추대하고
신라이씨(李氏) 성을 사성(賜姓)받았다고 한다.
이알평은 기원전 117년이라 전한다.
혁거세 거서간 때에 개국 좌명공신에 녹훈되고 각간, 아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군무를 주관하였다고 전한다.
알평은 화백회의 의장으로 향년 200세의 향수(享壽)를 누렸다고 한다.
사후 법흥왕23년(서기 535년) 시호를 문선공(文宣公)이라 하였고,
태종 무열왕 3년(서기 656년) 은열왕에 추봉 되었다
배위는 태화공주 기씨(泰華公主 箕氏) 마한 태조(太祖) 기준(箕準)의 딸이다
아들 이유(李侑)이고 손자는 이타(李它)이다
부인 박씨(夫人 朴氏)는 혁거세의 딸로서 개국공신 이알평(李謁平)의 후처로 하가하였다
고려말 목은 이색이 찬한 익재 이제현묘지(墓誌)에
신라말 진골(眞骨) 출신으로 소판(蘇判) 관직에 오른 소판(蘇判)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계보가 밝혀짐으로써
경주이씨의 중시조는 소판(蘇判) 이거명(李居明)이다
이제현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진(李瑱)이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선왕 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上王)인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되었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로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할 때 시종하였다.
1323년(충숙왕 10)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1320년(충숙왕 7)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이제현의 원나라 생활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致仕)하였다.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다.
이제현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철견
자는 연부(鍊夫). 이원보(李元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승(李昇)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연손(李延孫)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윤번(尹璠)의 딸로,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동생이다.
문음으로 헌릉직(獻陵直)을 거쳐 한성부판관 재임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하고,
1466년 등준시(登俊試)에 합격하여 이듬해에 훈련원도정이 되었다.
1468년 예종 즉위 후에 평안도절도사가 되고
1470년 성종 즉위 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경기도관찰사, 형조·호조의 판서를 거쳐
1480년(성종 11)에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경상도관찰사·대사헌을 지냈다.
1484년에 한성부판윤으로 사민안접순찰사(徙民安接巡察使)를 겸하여 사민정책을 주관하였다.
1486년에 좌찬성이 되고, 이어 판의금부사, 평안도·영안도(永安道)의 도체찰사, 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1493년에 척신으로서 탐학하고 사치를 좋아하며 전횡이 심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495년연산군 즉위 후에 지의금부사에 복직되었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이수일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증조할아버지는 주부를 지내고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오(李塢)이고,
할아버지는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생원 이자침(李自琛)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월성부원군 이난(李鸞)이고, 어머니는 참봉을 지낸 우담령(禹聃齡)의 딸 단양우씨이다.
아들은 효종 때 우의정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을 추진했던 이완(李浣)이다.
1554년(명종 9) 충주에서 태어난 이수일(李守一)은 1
583년(선조 16)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북방 지역 근무를 마친 후
1584년 권지훈련원봉사, 1586년 삼수소농보권관,
1590년(선조 23) 선전관을 지냈다. 장기현감으로 부임하여 재직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장기현을 공격하는 왜군과 격전 끝에 후퇴하였으나
왜군을 죽인 공을 인정받아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후 함창(현 상주시 함창읍) 당교(唐橋)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1593년 밀양도호부사로 경상좌도수군첨절제사가 되어
울산에서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593년 회령도호부사 재직 중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이 전라도 쪽으로 진격하자
4도체찰사 이원익의 요청으로 성주목사가 되어 대구의 김응서, 밀양의 이영과 협력하여
왜군에 대항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0년(선조 33) 4월 북병사겸경성도호부사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성채를 불태우고 야인 115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1601년에도 군사 2,500여 명을 동원하여 야인의 토벌에 나서
사살자 229명, 포로 7명의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는 1명도 없었다.
1603년(선조 36) 8월 경상우병사겸진주목사가 되어 우병영을 창원에서 진주의 촉석산성으로 옮기고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고,
1605년에는 길주목사에 임명되어 길주산성을 축조하였다.
1607년(선조 40) 6월 수원부사,
1608년 북병사겸경성도호부사,
1611년(광해군 3) 지중추부사·지훈련포도대장·원유제조,
1612년 평안도병마수군절도사겸영변대도호부사,
1614년 충장위장를 거치고
1615년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어 말 1필과 삼아녹피 1피를 하사받았다.
1616년 9월 역적 이춘기 등을 체포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1617년 다시 북병사겸경성도호부사에 임명되었고 1618년 숭록대부에 올랐다.
1624년 평안병사겸삼도부원수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공신 2등에 올랐으며,
1624년 평안도병마절도사겸영변대도호부사,
1633년 삼도통제사겸경상우수사를 거쳐
1628년 형조판서겸금화제조주사대장에 임명되었다.
1631년(인조 9) 77세의 고령으로 남한산성수어사에 임명되어 남한산성 수축의 감독을 맡았다.
1632년 노령으로 관직을 사직한지 한 달 만에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645년(인조 23) 좌의정겸영경연사에 추증되고,
1686년(숙종 12)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항복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동강(東岡).
고려의 대학자 이세기(李世基)의 후손(後孫)이며, 판관 성무(成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예신(禮臣)이고, 아버지는 참찬 몽량(夢亮)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결성현감 최륜(崔崙)의 딸이다.
1556년 한양에서 출생 1571년(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다.
1575년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 해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綱目)』 강연(講筵)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李珥)에 의해 이덕형 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內藏庫)의 『강목』 한 질씩이 하사되고 옥당에 들어갔다.
1583년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 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 예문관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예조정랑 때 발생한 역모사건에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친국에 참여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 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1594년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다.
1598년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올랐다.
1600년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1602년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 한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 성혼을 공격하였다.
이에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다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 해 8월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죽은 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했으며 1659년(효종 10)에는 화산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46년(영조 22)에는 승지 이종적(李宗迪)을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직에 등용시키는 은전이 있었다.
1832년(순조 32)에는 임진왜란 발발 네 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년(헌종 4)에는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의 요청으로 봉사손(奉祀孫)의 관리 등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奏疏啓議)』 각 2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李舜臣)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세필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이시술(李時術)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다.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 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당하자, 송시열을 적극 옹호하였다.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지만, 분개하면서 선비들을 설득해 상소하여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었다.
적소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퇴계집』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 귀양에서 풀려나오자 학행으로 천거되어
1680년 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 해 동몽교관이 되었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이 되었다가 진위령을 지내고 삭녕군수로 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로부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생활이 매우 곤궁했으나, 개의치 않고 날마다
『대학』·『중용』을 외우며 ‘격물궁리(格物窮理)’ 공부에 전심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김제군수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장악원정을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형조참판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17년 상신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해 그 잘못을 극론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학』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 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 권이 있다.
또한 『악원고사(樂院故事)』 1책이 있는데,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樂章)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해 엮은 것이다.
1722년(경종 2) 아들인 호조판서 이태좌(李台佐)의 추은(推恩)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이듬 해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이 내려졌다.
영광의 백산서원(柏山書院)과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태좌
자는 국언(國彦), 호는 아곡(鵝谷).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현손이며,
이정남(李井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시술(李時術)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세필(李世弼)이며, 어머니는 박세모(朴世模)의 딸이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의 재종형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9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에 올랐다.
이 해 8월 새 예문관원으로 송정명(宋正明) 등 4인을 천거하자
김진구(金鎭龜)가 난색을 나타내 이들의 처리 문제로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이것은 과거 송정명 등이 성균관에 있을 때 윤증(尹拯)의 소환을 청한 상소에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하는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사서를 거쳐 1701년 지평으로서 이세석(李世奭)의 과거시험 부정을 탄핵했으나
왕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의 사사에 적극 반대하다가 파직된
최석정(崔錫鼎)·이명세(李命世)를 신구하다가 도리어 삭탈관직되어 선산으로 유배되었다.
1705년에 풀려나 정언에 등용되고, 사서·부수찬을 거쳐
이듬해 2월에는 문학으로서 필선 유태명(柳泰明)과 함께 경상좌우도의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이어 부교리·이조정랑·부수찬·집의·응교를 거쳐
1708년 12월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영서 3읍(춘천·횡성·홍천)과 영동 9읍에 대한 양전 개변을 실시해
원전대동(元田大同) 2두(斗)를 감해 1결(結) 1년 소납(所納)을 14두로 정하고,
속전대동(續田大同)·삼수량(三手粮)을 모두 감하도록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견은 이듬 해 7월에 가서야 시행되었다.
그 뒤 이조참의·대사성·대사간·승지·강화유수를 역임하고,
1716년 공조판서로 있을 때 윤선거(尹宣擧) 문제를 논하다가
노론 일색인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곧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721년(경종 1) 강화부유수에 재임되고, 동지의금부사, 형조·예조·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22년 비국당상(備局堂上)에서 북방 소요에 대한 국력 강화책으로
공조판서 조태억(趙泰億)의 내수외양(內修外壤)을 공박하고, 자강지도(自强之道)로서
오로지 왕의 일심노력과 억사절재(抑奢節財: 사치를 줄이고 재물을 절약함)·
근정수덕(勤政修德)·인재양성·민심단결 것뿐이라고 강조하였다.
조세·한재·조창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1725년(영조 1) 임인옥사로 삭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호조판서·지경연사(知經筵事)·병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쳤다.
그리고 이듬 해 우의정,
1729년 좌의정·판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가,
1736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이광좌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 이항복(李恒福)의 현손이다.
이성남(李星男)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시현(李時顯)이다.
아버지는 장령(掌令) 이세구(李世龜)이며, 어머니는 박장원(朴長遠)의 딸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697년 부수찬이 되었으며,
1703년 수찬·부교리·교리를 거쳐 사헌부헌납·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08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의가 되었다.
1712년 부제학·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715년에는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숙종이 소론을 배척해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718년에는 예조참판에 등용되었다.
1721년(경종 1) 호조참판을 거쳐 사직(司直)에 있으면서
왕세제인 연잉군 이금(李延礽君 李昑: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적극 반대하여,
경종이 이를 취소하게 하는 등 경종 보호에 명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1721년과 이듬 해에 각각 김일경(金一鏡) 등의 소(疏)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이 벌어진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로써 노론이 제거되고 소론이 정권을 잡자 예조판서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 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을 역임하고, 병조판서로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72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725년(영조 1)에는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노론의 등장으로 파직당하였다.
1728년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다시 등장하자 영의정에 올랐다.
이 때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어 『경종실록』·『숙종실록』 보유편의 편찬을 맡았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노론측에서 김일경의 잔당이 난을 일으킨 것이라고 규탄했지만
영조는 끝내 소론정권으로 난을 평정하였다.
이 난이 평정된 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봉해졌다.
1729년에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영중추부사로 복직하였다.
1730년에는 소론의 거두로서 영조에게 탕평책을 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막도록 건의했다.
이 때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론 민진원(閔鎭遠)과 제휴하여,
노론과 소론의 연립정권을 세웠다.
이로써 재임 기간에는 비교적 격심한 당쟁이 없도록 하는 데 힘썼다.
1733년에는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1737년에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740년 영의정으로 재직하던 중, 박동준(朴東俊) 등이 중심이 되어
삼사의 합계(合啓)로 호역(護逆)한 죄를 들어 탄핵을 해오자 울분 끝에 단식하다가 죽었다.
1755년 나주벽서사건으로 소론의 준소계열이 무너질 때 관직이 추탈되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정조 12년 (1788)복권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는《운곡실기(雲谷實記)가 있다
이종성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이항복(李恒福)의 5세손이며,
이시술(李時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세필(李世弼)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이태좌(李台佐)이며, 어머니는 홍득우(洪得禹)의 딸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3일 만에 예문관설서가 되었다.
이듬 해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시독관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 200년의 폐를 논하였다.
그 해 경상도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했으며,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부당함을 상소해 석방하게 하였다.
그 뒤 부수찬·헌납·수찬·교리 등을 거쳐
1729년(영조 5) 불법 수령 적발의 사명을 띠고 다시 영남어사로 파견되었고,
함경남도에 이어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史)로 다녀와 응교가 되었다.
1731년(영조 7) 관서어사로 파견되어 양덕현감 남윤관(南胤寬)을 파직시키고,
개천군수 홍태평(洪泰平), 맹산현감 이희하(李喜夏),
황주목사 이성제(李誠躋)에게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3년(영조 9) 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 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양역(良役)의 폐를 상소하였다.
1735년(영조 11) 다시 이조참의가 되어 화폐 사용의 편리함을 논하고,
이듬 해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1738년(영조 14) 이조참판,
1741년(영조 17) 부사직,
1742년(영조 18) 충청도관찰사,
1744년(영조 20)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 예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개성부유수,
1749년(영조 25)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우빈객(右賓客),
1752년(영조 28)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53년(영조 29)에 평소 세자와 마찰을 빚었던
김상로(金尙魯)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753년 판중추부사을 거쳐
1757년(영조 33) 내의원봉상시도제조(內醫院奉常寺都提調) 때
인원대비(仁元大妃: 숙종계비 김씨)의 상을 당해 의례의구조(疑禮儀九條)와
종묘 혼전(魂殿)의 예의칠조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58년(영조 34) 영중추부사가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다.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오천집(梧川集)』이 있다.
시호는 효강(孝剛), 뒤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이경일
자는 원회(元會), 호는 청헌(聽軒). 이항복(李恒福)의 6대손이며,
이세장(李世章)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문좌(李文佐)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종열(李宗說)이며, 어머니는 강석창(姜碩昌)의 딸이다.
도사 이종악(李宗岳)에게 입양되었다.
1768년(영조 44) 음덕으로 관직에 나와 온릉참봉·덕산현감을 지내고,
1775년 문과정시에 을과로 급제, 예조좌랑·사간원정언·홍문관부수찬·대사간·
대사성·이조참의·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00년(정조 24) 공조판서에 오른 다음, 이어
대사헌·우참찬·형조판서·한성부판윤·좌참찬 등을 지냈다.
1804년(순조 4)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 성학(聖學)에 힘쓰고
정치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 제반시책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으며,
1808년 나이 75세에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오은군(鰲恩君)에 피봉되었다.
저서에는 시문을 모은 『청헌유고』가 있다. 시호는 효정(孝定)이다.
이유승
자는 경선(景先).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9대손으로, 아버지는 이계선(李啓善)이다.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인 이시영(李始榮)의 아버지이다.
1864년(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를 거쳐
1866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다음해에는 조만화(趙晩和)를 대신해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일본의 사신을 접대했고,
1868년에는 평안남도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규찰하였다.
1869년 상호도감(上號都監)에서 도제조 이하를 시상할 때 우통례(右通禮)로 참가해 가자(加資)되었으며,
이듬해 승지를 지냈다.
1878년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881년 좌부승지로서 좌승지 박정양(朴定陽) 등과 함께 고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려던
이재선(李載先)을 제주도로 유배보내는 데 반대하고 극형을 주장하는 계(啓)를 올렸다.
1883년 이조참판,
1887년 시강원 겸 보덕을 지내고
18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89년에는 영조대왕옥책문(英祖大王玉冊文) 작성시 서사관(書寫官)으로 참여하였다.
이듬해 대왕대비가 사망하자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예조판서에 임명되어 국장을 수행하다가
전례(典禮)의 절차에 대한 착오로 파직되었으나 곧 왕명에 의해 연임되었다.
다시 대호군으로서 중국의 사신을 호송하는 반송사(伴送使)를 맡았고,
이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91년 한성부판윤에 재임명되고,
다음 해에는 선조대왕옥책문(宣祖大王玉冊文)의 서사관이 되었다.
1883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4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 해 국정을 개혁하기 위해 교정청을 설치했을 때 대호군으로 어윤중(魚允中) 등과 함께 교정청당상에 임명되고,
곧 이조판서·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으로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되었고,
1898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어 칙임관 2등이 주어졌다.
이듬해 장례원경(掌禮院卿)에 보직되어 왕실의 의례(儀禮)와 관련해 여러 차례 상주하였다.
다시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으며,
1900년에는 창덕궁선원전제1실상량문(昌德宮璿源殿第一室上樑文)의 서사관으로도 활약하였다.
1904년 태의원경(太醫院卿)을 지내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조약 반대의 소를 올려 매국노 박제순(朴齊純)이
의정서리(議政署理)가 되는 것은 불가(不可)하며,
조약을 배척해야만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10년 정헌(靖憲)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가 다시 효정(孝貞)으로 시호가 고쳐졌다.
이유원
1814년(순조 14년)~1888년(고종 25년)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橘山) 묵농(墨農) 시호는 충문(忠文),
백사(白沙) 항복(恒福)의 8代孫이다,
조부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석규(錫奎),
이조판서(吏曹判書) 계조(啓朝)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승지(承志) 종신(宗臣)의 딸 반남박씨(潘南朴氏) 이다
1841년(헌종 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845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壯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의주 부윤(義州府尹)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865년(고종 2년) 수원 유수(水原留守)로
좌천 되었다가 이해 영중추 부사(嶺中樞府事)로
전임되어「대전회통(大典會通)」편찬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영의정이 되었다.
1875년 2월 일본의 외무대승 모리야마[森山茂]가 조선에 도착하여 서계를 제출하자 서계 내에
대일본'·'황상'(皇上)이란 용어가 있었으나 이를 수리하게 했다.
1875년 왕세자 척(拓:뒤의 순종)의 책봉을 청하기 위해 진주(陣奏) 겸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9년 6월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인천항과 원산항의 개항을 요구하자 원산항만 개항하게 했다.
1880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882년 6월 임오군란으로 민비의 생사(生死)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대원군이 장례를 강행하자 극력 반대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저서로 〈가오고략 嘉梧藁略〉· 〈귤산문고 橘山文稿〉·〈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이건영
음서(蔭敍)로 관계에 진출,
1883년(고종 20) 일본인과 공동명의로 경상남도 창원의 금광채취허가를 받았으나
갑신정변으로 폐기되었다. 또한, 장기·경주에서도 채광하였다.
1885년에는 광무사(鑛務司)에서 삭주·벽동의 금광을 채광하였는데
사용(司勇)인 이건영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장하도록 하였다.
1895년에 군무아문주사가 되었다가 부위(副尉)로 군부 군무국 마정과원(馬政課員)·
일등군사(一等軍司)·경리국과원을 지냈다.
1898년에는 담양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의원면직되었다.
법무회계국장·탁지부회계국장·군부경리국장·탁지부사세국장·
중앙은행병설사무위원·토지소관법기초위원·전기철도사무사판위원 등
정령(正領)까지 진급한 군인으로서 재정방면에 임용되었다.
1907년에는 충청남도관찰사가 되었고, 곧 중추원찬의에 임명되었다.
이석영
(李石榮, 1855년 ~ 1934년)
호 : 영석(潁石)
백사·이항복(李恒福)의 10세손이며 판서 유승(李裕承)의 6형제 중 둘째 아들로서
조선 말기의 문신 귤산 이유원(李裕元, 1814년 ∼ 1888년)양자로 입양되어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임하려(林下廬)에서 살았다.
21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장례원소경을 거쳐 종2품 가선대부에 까지 오른다
친동생 이회영(李會榮, 1867년 ~ 1932년)의 권유로
이유원에게 물려받은 남양주 가곡리의 모든 땅과 재산을 처분하여
전답 6,000석 토지를 매각하여 현금 40만원(당시 쌀 1석은 3원이었음)
6형제는 제일 먼저 한인 자치 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국내에서 모여든 청년들에게 구국의 이념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켜
조국 광복의 중견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 강습소를 개소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흥 무관 학교의 전신이다.
1911년 4월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하니 변영태, 성준용, 김련 등 40명이다.
신흥 강습소의 본관과 사옥을 준공하고,
1913년 신흥 중학교로 개칭하고 군사반을 두었다.
1919년 중학교를 폐지하고 신흥 무관 학교
신흥 무관 학교의 실질적 설립자 이석영은 가난에 지쳐 두부 비지로 연명하다가 굶어서 별세하였다.
1991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철영
(李哲榮, 1863년 ~ 1925년 )
판서 이유승(裕升)의 삼남이다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던 셋째 이철영도 병사하였다.
이회영
호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呂準)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8년 헤이그에서 돌아 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우선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그 해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시영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서울 출신.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유승(李礻+谷承)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첫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는 박승문(朴勝文)의 딸이다.
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 서간도(西間島)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였고,
합니하의 교사는 분교역할을 하는 등
1910년대 서간도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항일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하였다.
1913년 9월 북경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정부와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도모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중단되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고종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북경에서 이동녕·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이회영 등과
국내 3·1운동에 호응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상해(上海)로부터 북경에 온 여운형(呂運亨)·현순(玄楯)과 논의하고,
이회영·이동녕·이광 등과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초대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재무총장을 거쳐
1926년 무렵까지 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재임하였다.
그 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거 때에는 미리 항저우[抗州]로 가서 임시정부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1933년 중엽 자싱[嘉興]에서 김구(金九)·이동녕·송병조(宋秉祚)·차리석(車利錫)·조완구(趙琬九)
·김붕준(金朋濬) 등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34년 『감시만어(感時漫語)』를 저술하여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1935년 10월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인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하여 사교교질(司敎敎秩)·원로원장·
사교(司敎)·도형(道兄)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한편, 1947년 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정부를 떠났다.
이어 1952년 8월 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국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 현 묘소로 이장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이호영
(李護榮, 1875년 ~ 1933)
판서 이유승(裕升)의
6형제 중 막내로 1875년 태어났다.
1918년 중국 통화현 합니하에서 이유승 가 형제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 재무로 활동하였다
1924년 중국 베이징의 북경한교동지회를 조직하였으며,
1925년 다물단원으로 친일 조선인 처단의거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 중국 국민군으로부터 받은 다액의 자금과 폭탄을 다물단에 지원하기도 하였다.
2012년, 제93주년 삼일절을 맞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철영
자는 계형(季衡), 호는 성암(醒菴)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의 9대손이다.
아버지는 이홍제(李弘濟), 어머니는 상산박씨(商山朴氏)로 통덕랑(通德郞) 박용원(朴龍遠)의 딸이다.
1904년 일본 사람들이 철도 부설을 위하여 공주에 있는 선영(先塋)을 침범하자,
유림의 진정서를 갖고 관계자를 찾아가 항의하였다.
1905년 이유태의 『사서답문(四書答問)』을 교정 발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기의려문(起義旅文)」을 지어 거사하려다 실패하였고,
1908년 돈암서원과 부여향교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로 부당함을 전하였다.
1909년 일본이 고종의 칙명이라며 국민의 호적을 만들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본 정부에 그들의 간상을 낱낱이 지적한 장서를 보냈다 홍산경찰서에 이송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14년 부여 순사주재소에 잡혀가 70여 일간 구금되었고,
1918년 호적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부여 일경주재소에 잡혀갔다가 석방되었다.
또한 왜인들의 정령(政令)을 모두 거부하여 온갖 고초를 겪었고 산판(山坂)을 수탈당하기도 하였다.
1919년 향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종합 절충론인 ‘사상강설(四上講說)’을 지어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성암집(醒菴集)』과 『내범요람(內範要覽)』, 옥중 일기인 『부풍일기(扶風日記)』가 있다.
선생은 잦은 옥고의 후유증으로 1919년 순국하였으며, 공주시 상왕동 중동골의 숭의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성암집’ ‘내범요람’과 옥중일기인 ‘부풍일기’가 있다.
선생은 항일운동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1977년 대통령 표창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규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