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방시산제. ♡
일시: 2024.3.16.(토) 08:00 줄발
탐방장소 :
세종대왕역사문화관,명성황후생가,
도자마을등
참석대상 90명(버스2대)
○ 출발장소 : 구의3동 SK아파트앞 및
어린이대공원후문 주차장
○탐방장소 : 세종에서 명성왕후의 생가
여주 도자기마을
탐방제
탐방제는 1년 탐방행을 시작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차리고 한해의 안전탐방행을 기원하며 올리는 제로서, 회원들의 친목과 결속을 다지는 등의 목적이 있다.
정성으로 상차림을 준비하시는 임원진님들~~
회원님들도 모두 한마음으로~~
조선의 제4대 임금 (1397–1450)
태종은 왕권을 탄탄하게 만든 후에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요
태종은 왕 자리에서 물러나며 세종에게 “모든 나쁜 것은 내가 가지고 너는 태평의 시대를 열어라.”.
태종의 희망처럼 세종 시대에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며 정치가 안정되었지요
경제와 문화도 크게 발전하여
우리 역사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전성시대로 꼽히고 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전시실에는
세종대왕과 효종에 관련된
다양한 전시품이 전시되어 있어요
세종대왕릉인 영릉은 당초에는 서울 서초구의 대모산 아래에
부왕인 태종의 헌릉 옆에 있었습니다.
그후 왕실에 흉사가 잦은 이유가 세종릉이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영릉을 여주로 천장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의 영릉은 광주이씨의 이인손의 묘역이었으나, 천장 당시의
임금인 예종이 이인손의 아들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세종의 천장을
시행 하였습니다.(2009.08.18)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국토·언어·문화·민족정신을 공통으로 하는 완전한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대왕은 항상 정치의 중심에 ‘백성’을 두었으며, 모든 정책에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강했다.
요즘시대에 꼭 필요한 임금님이신 듯~~
여주신륵사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여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벼락맞은 나무
사찰은 산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보기 드물게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강변에 세워졌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다.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이 있어 벽절로 불리기도 했다.
명성황후생가
고종황제(1863~1907)의 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왕비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서울에서 생활하다 왕비로 간택되었다.
1873년 성인이 된 고종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척족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협력자로 나서 시아버지 대원군과
대립했다.
'죽어서 대한제국의 황후'가 되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거듭된 국내 정변의 중심에 있었고, 청·일의 간섭으로 인한 혼란 속에 러시아에 의지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위기를 느낀 일본이 살해~ 사후 고종이 황제국으로 대한제국을 선포 하면서 황후로 추숭되었다.
*임오군란
최고의 대우를 받는 별기군과 반대로 기존 군인들은 부당한 처우를 받아 생긴 임오년에. 일어난 군의난
*갑신정변
개화당 주요 인물
박영효, 김옥균, 유길준 등 1884년 . 1884년(고종21) 개화당이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근대화를 추구하여 수행한 정변.
그리 크지 않은 재목을 사용한 아담한 규모이지만 부재의 형태와 결구법 등에서 조선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명성황후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
1851년(철종 2) ~ 1895년(고종 32)
1 평가가 엇갈리는 명성황후
친정 식구들을 끌어들여서 권력을 독점
일제의 침략 앞에 희생된 조선의 국모라는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
2 ‘민비라고 불린 이유
아버지는 민치록이며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이다.
명성황후라는 호칭은 그녀가 죽은 뒤 대한제국 시기에 붙여진 것이다.
3 고종의 정치적 참모이자 동반자
고종이 친정 고종 스스로도 주요한 정치적 사안마다 명성황후의 의견을 청취했음을 밝힌 바 있다.
4 흥선대원군과의 운명적 대결
흥선대원군이 직접 충돌한 큰 사건을 추리면 임오군란갑오개혁, 을미사변을 들
수있다.
우리민족의 아픔을 느끼는 가슴이픈 시간이었다
여주 도자기마을
고려 말부터 도자기 제조를 시작하였으며 조선 초기부터 발달했다. 그 이유는 북내면 싸리산 언저리를 중심으로 점토, 백토나 고령토 등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도자기 재료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중견 작가들은 근래에 전승 도예를 깊이 연구하면서 독특한 수법으로 특이한 신작을 개발하고 있다. 또한 제기, 화분, 식기, 전기부품 등 생활용품을 대량 생산한다.
* 여주도예 단지의 볼거리 *
여주도예 단지 관광의 장점은 도자기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도자기 제조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
도자기색상이 많이 화려해졌으며
쓰임도 다양하여 눈 호강 하는 시간이었다
3월 구자탐방은 탐방제와 함께
뜻깊은 여행이었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갈 수 있는 벗과
함께라면 난 행복합니다~~
4월 구자탐방을 기다립니다~~
첫댓글 위서영 회장님
세종대왕역사 문화관 후기 한번 더 복습 할 수있어 조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