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01오늘의 말씀<역사> : CCCC : O군사관학교
12월 01일
12월
DECEMBER
12월. December. 마지막 달.
24일의 크리스마스 이브와 25
일의 크리스마스.
추운 나라들에서는 화이트크리
스마스.
그리고 곧 1년의 마지막인 뉴
이어즈 이브(제야)의 종소리가
울리고 『Ring out the old, ring
in the new.』(묵은 것을 울려 보
내고, 새 것을 울려맞아 들인다.)
가 된다.
12월을 여는 기도
무엇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 축복으로
한 해의 마침자리에 우리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감사합니다.
키대로 자란 억새풀 언덕에
싸락눈이라도 내리시면
덜 허전한 마음으로 마굿간을 정비하겠나이다.
주여 이 12월에는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지금까지 사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
그 이름위에 하늘빛을 부으시고
하늘의 이름이 되게 하소서
팔아야 하기에
팔려야 하기에
헐값으로 넘긴 예수
이제는 사게 하소서 제야의 종소리 울리기 전에
우리의 송구영신이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2 월
12월
속절없이 또 한 해가 간다.
거리엔 네온 불빛 찬란하고
구세군 종소리 훈훈한 사랑 호소하지만
세모란 언제나
쓸쓸한 사람 더 슬쓸해지고
행복한 사람도 조금은 쓸쓸해지는 것
망년회란 이름으로
만나는 오랜 친구들 얼굴 보며
지난 세월 쓸쓸히 되씹어 보고
송구영신 카드에 실려오는
그래도 잊지않았다는 인사에
잠시 가슴 환해지기도 한다.
희망찬 새 아침이라는 말은
왠지 어색하여
작은 소망 조심스럽게 풀어보는 나이에
12월
12월은 얻은 것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허전한 발걸음이다.
12월: 지월(至月;11월)이 국향 속에 가고 납월(臘月;12월)로 접어
들었다.
며칠이 지나면 대설(大雪), 그리고 다시 동지(冬至)…
「징글벨」을 신호삼아 이 해는 꼴딱 서산으로 넘어가게 되리라.
12월은「섣달」이다.
섣덜은 곧「설달」.
우리 말에서는 설(年)과 살(歲)이 같은 출발을 보여 중세어에서는 현대어의 「몇살」대신 「몇설」이라는 말이 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몇살을 먹었느냐는 말은 설을 몇 개 쇠었느냐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한 살씩 더 먹기 위해, 「설」로 차츰차츰 다가가는 12월이기도 하다.
기원전 2세기 중엽까지의 「로마」력(曆)에 따른다면, 12월은 10월이었다. 그 때는 지금의 3월이 1월로서 Martius.
12월이 10월이라는 사실은 그 이름 December를 보면서 다른 말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게 된다.
「10」을 이르는 「라틴」어 decem에 ber가 붙어서 된 December인 셈인데, 「보카치오」의 Decamelon(10일 이야기)의 deca말고도, decimeter(10분의 1 m)의 deci나, decapod(十脚類甲殼動物)의 deca… 따위가 모두 같은 줄기에서 태어난 말들이다.
세월가는 것이 아깝다면, 실(實)이 아닌 이름으로 나마 「로마」력을 부등켜 안고 있어 볼 법도 한 일같다.
돌이켜 보면서 살아나가는 31일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평생의 축도(縮圖)를 체험해 보는 것이다.
12월의 탄생석 : 터키석(turquoise stone). 주산지인 페르샤에서 터키를 거쳐 유럽에 처음 전하여졌다 하여 「터키석」이라고 부른다.
유럽에서는 짙은 하늘색, 동양에서는 녹색인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것을 가지면 의혹이나 고민이 없이 사랑의 결실을 얻는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청금석(靑金石)을 대용석으로 한다.
⇨ 1월 1일.
12월 1일
오늘의 말씀
① 구약성경 에스겔26장1절(제 십 일년 어느달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② 에스겔32장1절(제 십 이년 십 이월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③ 시편81:3-4 (월삭(月朔)과 월망과 우리의 절일(節日)에 나팔을 불지어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律例)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規例)로다.)
④ 월삭 1) 구약관련 성경(민10 :10, 민28 : 11-15, 대상23:31, 스3:5, 느10:33, 시81:3, 사1:13-14,사66:23, 호5:7, 암8:5)
2) 구약관련 성경(골2:16)
오늘의 역사
① 아악보 편찬(1430) : 우리 나라의 고전 음악인 아악을 다듬고 닦아 국악을 발전시키는데 공이 많았던 박연이 세종 대왕의 명을 받들어 아악의 악보를 편찬한 것.
아악은 옛 중국의 음악으로서 우리 나라에 들어와 궁중에서 널리 쓰이던 음악이다. 처음으로 들여온 사람은 고려 예종 때의 안직승이라는 사람.
1114년 안직승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새로운 악보와 악기를 가지고 옴으로써 우리 나라에 아악이 전하게 된 것이다.
② 센서스(census) : 본래는 인구 조사를 가리키는 호칭이나 근자에는 주택․교통․농업․공업 등 여러 방면에 대한 전체적인 국제 조 사에도 널리 쓰인다.
고대로마에서 인구조사의 조사관을「센소르(censor)」라고 부른 것이 호칭의 유래이다.
우리의 경우, 최초의 것으로는 1970.10.1시행된 인구 주택센서스. 1970.12.1 시작된 농어업 센서스 등이 그것이다.
③ 영동고속도로 1차구간 개통(1971) : 1971년 오늘 !
영동고속도로로 1차 구간이 착공 8개월만에 개통됩니다.
신갈과 새말 사이의 104킬로미터 구간으로 모두 92억여원이 투입됐습니다.
이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4시간 20분이 걸리던 서울 원주사이의 주행시간이 한시간 20분으로 단축됐습니다.
새말에서 강릉구간은 1975년 10월 14일 개통됐습니다.
④ 한․일 정기 여객선 취항(1960) : 해방 뒤 처음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1960년 오늘 취항했습니다.
일본의 하카타 항에서 떠난 유다카마루호가 우리나라의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유타카마루호는 재일동포 6명을 태우고 우리나라에 왔으며 우리나라가 생산한 상품의 견본을 싣고 하카타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⑤ 금모으기 운동 시작(1998) : 오래도록 장롱 속에 간직했던 금을 차자 들고 나온 시민들 !
1998년 오늘 서울지방 검찰청에서 금모으기 운동이 시작됩니다.
IMF 외환위기를 힘모아 극복해 보자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시작된 운동입니다.
한달 뒤 각 은행과 기업이 금모으기에 나서고 시민들은 물론 사회 각층이 참여하면서 구한말의 국채보상운동을 연상시킬 만큼 뜨거운 열기가 전국적으로 이어졌습니다.
3월 중순까지 350만명이 참여해 모은 금은 2백여톤.
금으로는 18억 달러나 됐습니다.
금 수출 운동은 그러나 국제 금값을 폭락시켰고 외환 위기에 대한 응급 처방이었을뿐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습니다.
⑥ 이봉주 후쿠오카 대회 우승(1996) : 1996년 오늘!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이봉주 선수가 우승합니다.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기도 한 이봉주 선수는 스페인의 알베르토 후스타도 선수를 아슬아슬한 접전끝에 2초차로 따롤리며 명승부를 연출합니다.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위에 그쳤던 한을 푸는 순간입니다.
기록은 2시간 10분 48초
이봉주 선수는 세찬 바람에 진눈깨비까지 몰아쳐 한국 최고기록 2시간 8분 9초를 깨는데는 실패했습니다.
⑦ 정부간 해사협의기구 : I.M.C.O
Intergovernment Maritime Consul-tative Organizaion.
1962.12.1 가입.
해상의 안전․해수의 오염방지․선박적하의 계량 단위의 규격화․각국간의 불필요한 차별대우의 배제 등을 목적으로, 1958년에 발족한 유엔의 전문기관이다.
본부는 런던에 있다.
⑧ 규장각 일기(奎章閣日記) : 1907년 비서감(秘書監)을 없애고 그 사무를 규장각으로 옮긴 뒤 비서감 일기(秘書監日記)>에 이어서 쓴 것으로 1907.12.1 - 1910.8.29 한일합방이 되던 날까지의 일기가 쓰여 있다.
⑨ 손병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1905) : ⇨ 12월 24일.
⇨ 3월 10일.
⇨ 4월 5일.
⇨ 5월 19일.
⑩ 총독부 박물관 개관(1915) : 경복궁 내에 1915년 12월 1일 총독부박물관이 개관하였다.
물산공진회를 개최했던 미술관을 중심으로 하여 개관한 총독부 박물관은 주로 고적조사에 의한 수집품, 매장유물 중 국고귀속품, 매입유물 그리고 각 사찰의 기탁품 등을 주축으로 하는 역사, 미술공예품을 위주로 전시하였고, 주변의 전각들을 이용하여 전시분야와 장소를 늘려나갔다.
해방후 설립된 국립박물관은 미술관 기능까지 포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미술분야는 국립박물관의 1개과에서 관장하고 있었다
⑪ 제1 TV 국내 최초의 컬러 시험 방송 개시(1980) : KBS는 1980년 12월 1일 제1TV 저녁방송 뉴스부터 컬러방송을 시작했다(제 17회 수출의 날 기념식 방송).
이보다 앞서 1980년 7월 1일 전파관리국 고시 제505호, 무선설비규칙 제 36조의 규정에 의해 텔레비전 방송에 관한 송신의 표준방식을 NTSC 방 식으로 결정 고시함으로써 그 동안 여러 가지 방식에 관해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우리나라 컬러방송은 미국, 일본 등과 같은 NTSC 방식으로 정 해졌다.
컬러방송 실시에 대해 여론의 시기상조론이 일고 있는 가운데 1개월간의 시험 방송기간을 거쳐 1981년 1월부터 정규 방송으로 드라마를 포함하여 전 프로그램을 컬러로 제작, 방송을 개시했다.
컬러방송을 처음으로 실시할 경우, 대개는 외화필름 프로그램, 쇼 공개프로그램, 그리고 교양프로그램, 드라마, 뉴스 순으로 방송하는 것이 외국에서의 통례로 되어 있으나 KBS는 여의도 방송센터 건설 당시 이미 컬러 제작장비를 도입 하여 그간 컬러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등 컬러기술을 꾸준히 익혀옴으 로써 컬러 정규 방송 프로그램 모두를 제작, 송출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시험 방송 기간이 짧았음에도 별다른 지장없이 컬러방송 을 방영할 수 있었다. 먼저 제1TV부터 컬러방송을 방영하고 이어서 2월 부터는 제2TV도 전면 컬러방송을 실시하여 MBC-TV와 더불어 우리 나라 4대 TV방송 채널이 모두 컬러방송을 실시하게 되었다.
*******컬러 TV 시대 개막(1980) : 1953년 컬러 TV가 발명되고 1954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6년 만인 1980년 12월 1일, 우리나라도 세계에서 81번째로 역사적인 컬러 TV 방송 시대를 열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한국방송공사는 '수출의 날' 기념식을 천연색으로 시험방송함으로써 흑백화면에 길들어져 있던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56년에 흑백 TV 방송을 시작한 우리나라는 1966년에 와서야 금성사(현 LG전자)에서 처음으로 흑백 TV를 생산하였는데, 어느덧 1970년대 중반엔 흑백 TV를 생산하는 업체가 13개사로 늘어나고 연간 생산대수도 100만대를 넘게 되어 흑백 TV의 보급이 한계에 다다랐다.
당시 국내에서는 컬러 TV 방송이 시행되고 있지 않았지만, 컬러 TV는 이미 생산되고 있었다.
1974년 한·일 합작업체인 한국나쇼날이 컬러 TV 29,000대를 생산하여 전량 수출한 이래, 1977년부터는 국내업체인 금성사와 삼성전자도 생산에 뛰어들어 수출물량이 총 11만대에 이르렀으며, 1978년에는 대한전선도 생산에 나섰다.
그러므로 전자업체들은 우리나라도 조속히 컬러 TV를 시판하고 방송도 하자고 요구하였고, 국내 방송사들도 이미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소비를 조장하고 국민계층간의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를 들어 컬러 TV 방송을 금지시켰다.
"흑백 TV도 없는 사람이 많은데 그보다 훨씬 비싼 컬러 TV가 나오면 없는 사람들은 더 비참한 생각을 갖게 될거다.
나도 물론 청계천 다리 밑에 사는 사람들까지 다 잘살게 해 줄 수는 없지만 못사는 사람들에게 더 초라한 생각을 갖게 해주기는 싫다"고 하면서.
그런데 1978년 미국이 한국에서 팔지 않는 컬러 TV를 미국 시장에 수출만 한다면서 수입규제할 움직임을 보이자, 관광호텔 등을 대상으로 시판을 허용하였지만 판매는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뒤를 이은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 정부는 컬러 TV 방송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으나 그 시기와 방법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결국 훗날 제5공화국의 주체가 된 신군부에 의해 컬러 TV 방송이 결정되었고 1980년 8월 1일부터 컬러 TV의 시판이 허용되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컬러 TV 방송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언급되지 않았고, 미군의 AFKN 시청용 TV는 대부분 외제를 수입해 시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초 정부가 기대한 것과는 달리 판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업계에서는 시험 방송이나 부분적인 방송을 조기에 시행해 줄 것을 또다시 건의하여 마침내 12월 1일 역사적인 컬러 TV 방송이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컬러 TV 방송은 당시 많은 전자산업인들이 몇 년만 일찍 이루어졌어도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몇 배 더 발전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빛깔을 안방 화면에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이후 국민의 일상생활은 물론 사회·경제·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초래했고,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포함한 산업전반에 걸쳐 급속한 성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히스피아.2009).
⑫ 덕수궁 석조전 준공(1910) :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안에 있는 석조건물.
기본설계는 영국인 G.D.하딩,
내부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으며, 1900년에 착공하여 10년에 완공되었다.
3층 석조건물로 정면 54.2 m, 측면 31 m이며,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리스식 오더(Doric order)로 기둥을 설치하고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이 건물은 앞에 있는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의 궁전건축양식을 본뜬 것이며, 당시에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이 곳에서 45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6․25전쟁 이후 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사용하고 있다.
1900년 12월에 영국인 브라운의 설계로 석조전이 기공되어 11년 뒤인 1910년 12월 1일에 준공되면서 그와 함께 그 앞 뜰에 분수와 연못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식 정형정원이 꾸며졌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정원이다.
석조전 앞 마당의 중정식 정원에는 중앙에 분수대가 있으며 사방주위에는 관목이나 초화류만 심은 정형식 정원이 만들어 졌다
⑬ 국가보안법 공포(1948) : 정부수립 직후인 1948.10.19. 발발한 여순반란사건이 불과 8일 후인 10. 27.경까지 진압된 직후 국회에서는 11. 20. 전문 5개조항의 국가보안법이 상당수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졸속 통과되었다.
당시의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까지도 국가보안법이 제정될 경우 그것이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시적으로 좌익세력을 척결할 필요가 긴급하다는 제정 찬성론자들의 주장이 득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가보안법은 1948.12.1. 법률 제10호로 공포되었다.
당시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극력 반대한 상당수의 의원들이 주장한 반대론의 논거는
①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고,
② 법의 성격 자체가 반민주악법이며,
③ 법집행기관의 자의에 따라 남용될 가능성이 있고,
④ 남북통일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등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우려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직후부터 모두 하나같이 현실화되었다.
그 밖에도
⑤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더라도 기존의 다른 처벌법규에 의해 대응이 가능할 뿐 아니라,
⑥ 사상은 사상으로 대응하여야 하며 법률에 의하여 사상을 규제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역시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타당한 주장이다.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이듬해인 1949년 한해동안 이 법에 의해 검거 또는 입건된 자가 무려 118,621명에 이르렀다.
그해 9월에서 10월 사이에 132개 정당과 산하단체가 해산되었다. 방첩대 및 군수사기관에서 이 법에 의해 입건 또는 구속되거나 숙청된 군인이 무려 8천명에서 9천명에 이르렀다.
국가보안법의 제정은 한마디로 일제시대에 독립투사들을 투옥, 처벌하는데에 이용되었던 악명높은 "치안유지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 제1조는 "국체변혁을 목적하여 결사를 조직한 자"를 처벌하고 있음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제1조는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를 처벌하고 있어 그 처벌대상이 사실상 동일하다.
이와 같은 일제의 악법이 어찌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에 부활하게 되었는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초기부터 친일 반민족적 세력이 정부와 국회를 장악하여 일제 하에서 치안유지법에 의해 무한한 고초를 겪어야 했던 민족주의세력을 정부와 국회에서 완전히 배제하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 통치수단으로 치안유지법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요구하고 이를 관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8.15 해방에 이은 3년간의 미군정을 거쳐 1948년의 정부수립에 이르기까지 일제 36년동안 구일본제국에 부역하였던 친일 부역자들을 처단하지도 못하였고, 정부수립 직후 설치된 반민특위는 그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 이승만에 의하여 강제해산되어 건국 초기에 친일잔재를 청산할 기회를 상실하였다.
한편 친일부역자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미군정 하에서는 친미파로 변신해 행정, 사법, 치안조직에 기용되었고,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우파집단으로 변신하여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정부수립 당시 창설된 한국 국립경찰 간부의 8할 이상이 일제시대 일본 헌병경찰의 중하위급 간부나 밀정 등으로 일본에 부역한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의 잔재를 실질적으로 청산할 기회를 영원히 상실하였다.
이와 같이 제정된 당초의 국가보안법은 그 후에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권의 유지,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오히려 더욱 개악되었다.
그리고 1948년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려 50여년동안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악법으로서 위력을 떨쳐왔다.
또한 국가보안법은 당초 제정반대론자들이 우려하였던 대로 남북분단을 법제화하여 통일운동에 심대한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⑭ 국군 평시작전통제권 유엔사로부터 환수(1994) ; 국군 전시작전통제권 한미연합사50년 7월 이승만 전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반도에서 적대행위가 없어질 때까지 유엔군 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을 위임한다"며 국군통수권을 넘겨준지 44년만의 일이었다.
평시작전통제권은 유엔군이 갖고 있던 평시, 전시 작전통제권중 하나였다.
⑮ 국산승용차 1호 포니 생산 개시(1975) : 1975년 오늘!
첫 국산 승용차인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생산됐다.
포니의 생산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가 장기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의 일환으로 부품 국산화에 박차를 가면서 가능해졌다.
설계부터 생산까지 우리의 기술로 만들어진 포니의 최고속도 140km ,배기량 1,238cc로 당시 가격은 228만 9,000원이었다.
뒷모양이 날렵한 페스트백 스타일로 이탈리아의 명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해 유명해진 이 차는 오늘날 한국이 자동차 생산국으로 성장하는 디딤돌이 됐다.
1974년 오일쇼크로 인해 연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시점에 나온 포니는 당시 택시시장을 석권했다.
1976년 6월 국산승용차로는 처음으로 에콰도르에 6대가 수출됐고 1986년 1월 20일에는 미국에도 수출하게 됐다.
⑯ 한․일 정기 여객선 취항(1960) : 해방 뒤 처음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1960년 오늘 취항했다.
일본의 하카타 항에서 떠난 유다카마루호가 우리나라의 부산항에 도착했다.
유다카마루호는 재일동포 6명을 태우고 우리나라에 왔으며 우리나라가 생산한 상품의 견본을 싣고 하카타항으로 되돌아갔다.
⑰ 2002 월드컵 본선 조 추첨(2001) : 2002 월드컵 대륙별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한 32팀에 대한 조추첨이 2001년 오늘, 부산전시컨벤션센터(BEXCO)에서 FIFA 미셸 젠 루피넨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의 조 추첨자로는 정몽준 FIFA 부회장, 축구 스타 홍명보, 프로 바둑 기사 조훈현, 산악인 박영석, 탤런트 송혜교 등이었다.
일본과 FIFA에서는 일본축구협회장인 오카노 순이치로, '축구 황제' 펠레 등이 추첨자로 자리를 같이 했다.
추첨방식은 4개의 항아리에 포트별(1~4그룹)로 국가명을 적은 작은 공이 들어 있다.
또 8개의 항아리에는 조별(A~H)로 2,3,4번의 숫자가 적힌 공이 3개씩 들어 있다.
톱시드를 받은 한국, 일본, 브라질 등은 각 조 1번으로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항아리에서 짝을 골라 조편성을 했다.
조별 추첨 결과, 한국은 D조로 폴란드․미국․포르투갈과 한 조가 돼 2002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었다.
⑱ 버스 토큰제 실시(1977) : 오 라이-.
안내양이 문을 닫고 탕탕 두 번 때리면 버스는 출발했다.
손에는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린 토큰(Token)을 쥐고 있던 기억이 난다.
플라스틱 교통카드를 주로 쓰는 요즘 세대야 잘 모르겠지만 버스 토큰은 학생들이 사용했던 회수권(작은 종이로 된 버스 승차권)과 함께 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물건이었다.
1977년 12월 1일은 버스 토큰제가 처음 시행된 날이다.
이 제도는 버스 안내양들에 대한 인권보호 차원에서 마련됐다.
버스회사들이 안내양들의 빼돌리기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몸수색을 하는 바람에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안내양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요금 지불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토큰제를 도입했다.
전국에서 이 제도를 맨 먼저 도입한 서울시는 하루 승차인원을 673만 명으로 잡고 한 사람에 15개씩, 1억95만 개의 토큰을 만들었다.
토큰을 만든 곳은 풍산금속. 제작 단가는 개당 10원30전으로 1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었다.
당시 토큰의 소비자가격은 개당 30원. 하지만 현금승차를 하는 승객들은 10원의 가산금을 더 물어야 했다.
토큰제 촉진을 위한 벌금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버스 안내양과 승객 간에 요금을 놓고 옥신각신하는 해프닝이 자주 벌어졌다.
시민들이 버스요금 인상에 대비해 토큰을 사재기하는 일도 생겼다.
집에 있는 장롱 속에 수천 개를 쌓아 놓고 요금 인상 후에 사용해 교통비를 아끼는 것이다.
이를 되팔아 차액을 챙기기도 했다.
가뜩이나 유통 물량이 적은데 사재기까지 이어지다 보니 토큰 구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 됐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나중에 정부는 황동색에서 구리색으로 토큰을 바꾸는 묘안을 짜내기도 했다.
서울시는 1999년 버스 토큰제를 완전히 폐지했고 현재는 대구 등 일부 지역에서만 통용되고 있다.
대전 광주 등에서는 지하철 토큰제를 도입했지만 이는 칩이 내장된 현대적인 것으로 예전의 구멍 뚫린 추억의 버스 토큰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나마 버스 토큰제를 실시 중인 곳도 교통카드 때문에 명맥을 유지하기 힘든 형편이다.
대구버스운송사업조합에 따르면 하루 평균 시내버스 이용객 73만 명 가운데 지난달 버스 토큰 사용률은 3.5%에 그치고 있다니 팔리지 않고 쌓인 토큰 처리도 골칫거리일 것이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2006)
⑲ 전경련 기업윤리헌장 계획 발표(1995) : 1995년 12월 1일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기업윤리헌장’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선언적 행위로 비치는 것을 염두에 둔 듯 ‘경영풍토쇄신 추진 특별위원회’를 설치한다는 내용도 잊지 않았다.
당시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한국 사회를 휩쓴 때였다.
그해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차명계좌에 예치된 4000억 원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된 사건은 11월 16일 노 전 대통령이 특정 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는 사태로 번졌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등 재벌총수 8명을 포함한 기업인 35명은 뇌물 공여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재계도 뒤숭숭하던 때였다.
그로부터 1년 2개월이 지난 1996년 2월 7일 그해 첫 이사회에서 전경련은 기업윤리헌장을 확정했다.
기업윤리헌장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 공정이윤 획득, 공정 경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협력, 환경친화적 경영, 지역사회 발전 기여 등의 내용을 담았다.
최근 회자되는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기업’의 역할이 대부분 담겼다.
전경련의 기업윤리헌장은 1999년 2월 11일 더욱 강화돼 발표된다. 그해 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뇌물방지협약 발효에 발맞춘 조치였다.
새 기업윤리헌장에는 정치권 및 정부와 건전하고 투명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조항이 명시됐다.
그때까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던 ‘기업윤리위원회’를 매년 4회 이상 개최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건전한 정경관계를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같은 날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이 외화 밀반출 혐의로 긴급 체포돼 재계의 자율 정화 노력은 빛이 바랜다.
전경련의 기업윤리헌장 제정 이후 개별 기업의 윤리헌장 발표가 잇따랐다.
전경련 조사에 따르면 개별 기업의 윤리헌장 보유 비율은 2000년 21.8%에서 2007년 93.5%로 크게 늘었다.
윤리경영 담당 부서를 운영하는 곳도 97.5%(2007년 기준)에 달한다.
하지만 우리 기업의 윤리경영은 ‘앞으로 잘하겠다’는 선언적 이미지가 강하다.
윤리경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경제적 시스템 마련은 상대적으로 더디다.
기업과 개인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려면 윤리경영이 꼭 필요하다.
개인의 삶은 소중한 직장에 크게 의존하기에.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2007)
⑳ 일해재단 설립(1983) : ⇨ 1월 18일.
㉑ 마포아파트 : 1962년 12월1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대규모 아파트단지 준공식이 열렸다.
공급규모가 6층짜리 6개동(棟) 450가구. 유사 이래 최대였다.
자유당 시절 종암동과 충정로에 소규모 아파트가 건립된 적은 있지만 단지형 아파트는 사상 처음이었다.
마포아파트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첫 난관은 부지난. 안양으로 옮겨간 서대문형무소에 딸렸던 채소밭을 공원으로 변경하려던 법무부와 서울시를 건설부와 주공이 설득해 1961년 말 부지를 확보했으나 일반회계 예산이 614억원이던 시절에 2억3,000만원의 공사비가 문제로 떠올랐다.
미국 원조단을 설득해 간신히 자금을 조달한 주공은 엘리베이터로 움직이는 10층 건물에 중앙집중식 난방을 계획했지만 '초호화판'이라는 비판을 받고 규모를 축소시켰다.
준공 후에도 어려움은 여전했다.
연탄가스에 대한 두려움 탓이다.
주공 임직원들이 '숙박실험'을 자청해 문제가 없음을 입증해도 분양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해를 넘겼지만 입주자는 반도 못 채웠다.
5인 도시 가족의 월평균 생활비가 5,000원 남짓하던 무렵에 보증금 2만3,000(8.71평형)~5만2,000원(15.36평형), 월 임대료 1,880~
4,290원이 부담이었다.
양변기에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볼기짝을 맞댈 수 없다'는 인식도 분양을 가로막았다.
단지형 아파트 건설은 와우ㆍ청운ㆍ낙산 등으로 이어졌으나 '빈민용'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아파트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69년 분양된 주공의 한강맨션 이후. 민간업자들도 이때부터 중대평형 공급에 적극 나섰다.
단지형 아파트가 선보인 지 47년이 흐른 오늘날, 대한민국은 거대한 아파트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1991년 재개발로 사라진 마포아파트는 주거문화 변혁과 주택의 재테크 수단화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인터넷한국일보,2009)
㉒ 유고슬라비아 출범(1918) : 유고슬라비아(세르보크로아티아어·슬로베니아어(로마자) : Jugoslavija 유고슬라비야[*]; 세르보크로아티아어(키릴 문자) : Југославија; Yugoslavia 유고슬라비아)는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유럽의 동남부 발칸 반도에 연이어 존재했던 세 개의 나라를 말한다.
유고슬라비아는 ‘남(南) 슬라브인들의 땅’을 뜻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일컫는다.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18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란 이름으로 건국되었으며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명되었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다음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이라는 이름으로 건국되었다.
1946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으로, 다시 1963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1년 여섯개의 구성 공화국 중 넷인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마케도니아 공화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분리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은 1992년 잔류한 세르비아(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자치주 포함)와 몬테네그로 영토에 발족했다. 2003년에는 좀 더 느슨한 연방 체제로 바뀌면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개명, 유고슬라비아라는 명칭은 폐지되었다.
2006년 5월 몬테네그로의 국민투표를 통해 분리가 확정 6월 5일 몬테네그로가 독립하면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합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㉓ 장제스-쑹 메이링 결혼(1948) : 중국의 장제스 장군과 쑹 메이링 여사가 1948년 오늘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시 장제스와 쑹 메이링의 나이는 각각 마흔살과 스물여섯살!
미국에서 교육받은 숭메이링 여사는 장제스 장군의 친서방 반공노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장제스 장군이 일본과 맞서 싸울때 쑹 메이링 여사는 중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의회에서 지원요청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㉔ 론놀 대통령 휴전회담 제의(1974) : 1974년 오늘!
지금의 캄보디아인 쿠메르 공화국의 론놀 대통령이 좌익반군에 대해 휴전 회담을 제의합니다.
4년 전인 1970년 우익 쿠데타로 론놀 정권이 들어선 뒤부터 내전이 시작된 쿠메르 공화국.
론놀 대통령은 5개월 뒤인 1975년 4월 쿠메르 좌익 반군에게 정권에게 내주고 맙니다.
㉕ 이슬람 최초의 여성 총리 탄생(1988) : 아버지 줄피카르 부토의 그림 앞에 서 있는 부토 !
1988년 12월 1일 베나지르 부토가 파키스탄의 총리로 임명됨으로써 최초로 이슬람 국가의 여성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부친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대통령이자 총리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개혁 성향의 통치를 펼쳤으나 1977년 육군참모총장이던 지아 울 하크 장군에 의해 실각되었고, 2년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후 베나지르 부토는 부친이 손수 창설한 '파키스탄 인민당'의 명목상 당수가 되었고, 곧 지아 울 하크에 대항할 수 있는 최대의 정적으로 부상했다.
국민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있던 1988년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핵심 권력에 공백이 초래되었고,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 인민당은 이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베나지르는 친인척의 권력 남용, 독직과 부패 등을 이유로 1990년 8월 군부의 압력에 의해 쫓겨났고, 그녀의 당은 보수파 연합에 패배했다.
㉖ 하늘을 나는 자동차 등장(1972) : 1972년 오늘 미국 미시간주!
마흔아홉살의 듀이 브라이안이 하늘을 나는 기발한 자동차를 선보입니다.
도로 주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한 자동차!
이번에는 자동차의 날개를 펼쳐 비행기로 모습을 바꿉니다.
비행기로 변해버린 자동차는 공중비행에도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㉗ 세계 에이즈(AIDS)의 날 제정(1988) : 에이즈는 영어로 acqu
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후천성 면역 결핍증)의 첫 글자를 모아 만든 akronimo(두[頭]문자어)이다.
우리말 발음도 <에이즈>이다.
비록 영어로부터 형성된 단어이긴 하나 전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말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에스페란토로도 AIDS를 그대로 읽어서 aidoso라고 한다. 매년 12월 1일은 에이즈 예방의 날(Tago por prevento de aidoso)이다.
이날만 에이즈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이날 에이즈에 관한 각종 행사가 열린다.
에스페란티스토들도 조직적 모임(faka organizajxo)을 갖기 위해 준비중이라고 한다.
에이즈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의 감염에 의해 면역기능이 상실되어 사망에 이르는 질병으로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 불리고 있으며 세계보건기구(WHO)는 매년 12월 1일을 <세계 에이즈 예방의 날>로 지정하였다.
에이즈는 법정 제2종 전염병으로 지정되었다.
㉘ 남극조약 조인(1959) : 12월 1일 미국을 위시한 12개국은 과학연구를 위해 남극대륙을 비무장지대로 보존할 것을 규정한 국제조약에 서명했다.
남극에서는 1950년대에 이미 12개국 5,000여 명의 과학자들이 지질학, 기상학, 자기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연구와 탐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57년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몇몇 국가가 남극대륙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자 다른 국가들도 남극에 대해 저마다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다.
결국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1959년 남극조약이 체결되었다.
남극조약은 전체 14개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극의 평화적 이용, 과학적 조사와 교류, 기존의 영유권 유지와 새로운 영유권 주장의 금지, 남극에서의 핵실험 및 핵폐기물 처리의 금지, 남극에서의 활동에 대한 공개적 사찰 등을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86년 11월 28일 33번째로 이 조약에 가입하고 1988년 킹조지 섬에 세종과학기지를 세웠다.
㉙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 보고서 : ‘결핍과 질병ㆍ나태ㆍ무지ㆍ불결.’ 베버리지 보고서가 삶의 질 향상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규정한 5대 악(惡)이다.
보고서의 요점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상호부조를 통한 궁핍 해소.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요약되는 영국 사회보장제도가 여기서 나왔다.
서구식 복지국가 모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1년 반 동안 위원회를 이끈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경의 출신.
골수 보수당원이었음에도 당론과 차이가 많은 사회개혁을 위한 청사진을 만들어냈다.
두번째는 1942년 12월1일이라는 공표시기. 유럽을 휩쓴 나치 독일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런던이 공습으로 두들겨 맞던 시기에 국가의 존망마저 위태롭던 절망적 상황에서도 미래의 희망을 제시한 점이 놀랍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부자들만의 특권이던 ‘빈곤으로부터 경제적 자유’를 영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보장 받는 ‘기본적인 삶(national minimum)’으로 확산시켰다.
가족수당법(1945), 국민보험법(1946), 국민부조법(1947), 아동법(1948)이 잇따라 제정된 것도 보고서의 연장선이다.
세 부담이 늘어난 부유층의 반발이 없지 않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며 형성된 국민 전체의 동류의식이 개혁을 성공시켰다.
햇볕이 바람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베버리지 보고서는 서방진영의 안보에도 기여했다.
동구권을 붉게 물들인 공산주의가 서유럽에 확산되지 않은 것은 군비경쟁보다 사회보장제도 덕분이라는 평가도 있다.
대처 집권 이후 지나친 복지정책이 ‘영국병’을 고착화했다며 사회보장 예산을 대폭 줄였음에도 오늘날 영국의 복지 관련 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22.4%에 이른다.
최근 급증했다는 우리나라보다 세 배가량 높다.
(권홍우 편집위원.2007.서경.한국아이닷컴)
㉚ 포드車 조립라인 도입(1913) :“여기에는 정말 훌륭한 인간이 많구나!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여.”
문명인인 어머니 린다가 여행을 떠났다가 사고로 일행에서 낙오되는 바람에 야만인 거주지인 보존지역에서 태어나 성장한 존. 그는 20세 때 문명 세계의 여행자인 버나드와 레니나를 따라 런던에 와 생전 처음 문명사회를 목격한 뒤 이렇게 감탄한다.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가 1932년에 발표한 소설 ‘멋진 신세계’의 한 대목이다.
멋진 신세계란 말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따온 표현.
소설의 배경은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모델 T’를 생산하기 시작한 1908년을 신기원(新紀元)으로 그로부터 632년 후의 사회다.
서력으로는 2540년.
포드기원 141년(서력 2049년)에 터진 9년 전쟁으로 이전 세계는 붕괴되고, 인류는 세계국가를 만든다.
새롭게 건설된 세계에서 인류는 포드를 신으로 받들게 된다.
십자가의 머리부분을 떼어낸 ‘T’가 이 사회가 믿는 종교의 상징이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이 아닌 유리병 안에서 영양공급을 받으며 생산된다.
수정란 시절부터 산소와 영양 공급의 양을 조절해 사회 최고위층인 알파부터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등으로 나뉘어 지능과 체격, 직업 등이 결정된다.
아이들은 유아기부터 ‘수면 학습’을 통해 자기 삶에 만족하도록 세뇌된다.
특정인과의 결혼이나 과도한 애정은 금지되고 폭넓은 성관계가 보편화된다.
사회의 해악인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부작용 없는 마약인 ‘소마’의 복용이 권장된다.
노화방지 약물을 섭취해 20대의 건강한 신체를 60대까지 유지하다가 사망하면 시신은 소각장에서 비료 등 유용한 원소로 환원된다.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야만인’ 존은 이렇게 이상한 ‘멋진 신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끊는다.
헉슬리가 1908년을 미래사회의 기원으로 정한 것은 대량생산(Mass-Production)의 시대가 이 해에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포드는 모델 T 승용차를 생산하면서 표준화와 어셈블리(조립)라인을 처음 도입했다.
특히 5년 뒤인 1913년 12월 1일 공장에 설치한 컨베이어벨트 조립라인은 생산 효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제조원가를 파격적으로 낮추고 균일한 제품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헉슬리는 이 소설에서 과학의 발달과 그에 따른 위험성을 놀라운 통찰력으로 경고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것은 그의 영역 밖.
이 소설의 연호에 따르면 정확하게 ‘포드기원 100년’인 2008년, 미국 자동차 메이저들이 휘청거리면서 포드 역시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2008)
㉛ 도버 해협 터널 관통(1990) : 영국사람들은 도버해협이라고 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칼레해협이라고 일컫는 영불해협의 정식명칭은 <채널(Channel)>이라 하며, 이 해협을 육로로 연결시키는 터널의 공식명칭은 <채널터널(Channel Tunnel)> 또는 채널과 터널을 합성한 신조어인 <처널(Chunnel)>로 명명된다.
실상 유로 터널(Euro Tunnel)이라는 명칭은 이 터널의 건설과 유지관리를 전담하는 민간회사의 이름이다.
이 회사는 영.불 양국정 부로부터 공사 준공 후 운영, 유지관리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권한을 착공시점부터 55년동안 위임받아 관리한 후, 2042년에 양국 정부에 소유권을 넘겨주게 된다.
유로 터널사는 150억불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를 정부의 자금지원이나 보증 없이 주식공모와 은행융자로 조달했다.
이 공사는 국가간의 초대형 인프라건설을 순수민간자본이 주도한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그러나 1994년 터널의 개통이후,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심각한 경영난으로 인해 파산위기에 직면했었다.
당시 보도에 의하면 건설공사와 관련하여 채무액만 약 750억 프랑(한화 12조원)이고, 한해 지불이자액만 60억 프랑(한화 9600억원)이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1996년 12월에는 터널 내부에서 차량화재사고가 발생하여 승객과 화물량이 격감하는 사태를 맞기도 했었다.
그러나 최근의 외신에 의하면, 1997년도에 이뤄진 유로 터널사의 구조조정에 이어, 최근 들어 승객과 화물량이 갈수록 폭증하여 머지않아 흑자전환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즉, 2004년경이면 이자 지급을 완료하고 2005년부터는 그 동안 체념(?)하고 있었던 주주들에게 이익 배당까지 예상된다고 하니, 가히 지옥에서 천당으로의 위상변화가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나아가서, 제2의 해저터널건설계획이 날로 구체화되고 있다고 한다.
기존의 포크스톤과 칼레를 왕래하는 기차전용의 터널은 2015년이면 포화상태에 이를 전망이다.
제2의 터널은 기존의 터널과 나란히 달리는 자동차 전용터널로 건설되는데, 이 노선의 청사진은 2000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㉜ 유엔 평화 노력 기념일(1949) : 12월 1일은 세계 평화를 위한 유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엔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아끼지 않던 중에, 1949년의 오늘에는 53개 회원국이 유엔 헌장을 수호하여 세계의 평화를 해치는 어떤 요소도 배척하자는 ‘평화의 기본 요소’열 가지 조항을 재확인한 날이다.
㉝ 마이클 잭슨 앨범 '스릴러' 발매(1982)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첫 앨범 '스릴러'가 1982년 12월 1일 출시됐다.
수록곡중 7곡이 Top 10에 올라 1984년까지 무려 4천만장이 팔려 이 부문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불황에 허덕이던 팝계는 '스릴러' 열풍을 업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빌리 진'과 '비트 이트'는 1983년 미국 MTV를 도배했다.
인종은 물론 국가, 성, 세대를 초월해 지구촌 전체가 떠들썩했다. 전세계 젊은이들은 환상적인 '뒷걸음질 춤'을 흉내내느라 열을 올렸다.
잭슨은 스릴러로 세계각국에서 골드 레코드상을 1백50여개나 받았으며 1983년 그래미상에서는 주요상 7개 부문을 휩쓸었다.
잭슨의 등장은 팝계의 오랜 '백인음악 통치'에 조종을 울렸다.
마이클이 처음 각광을 받은 것은 1969년 11세때에 보컬 그룹 '잭슨 파이브'로 활동할 때였다.
형제로 구성된 이 소년밴드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970년대에 솔로로 독립한 그는 1979년에 발매한 디스코풍의 앨범 'Off the Wall'이 대히트를 기록, 2년간 솔로부문 1위를 차지했다.
㉞ 기타 오늘의 역사
1413 중외인민에 호패 사용(태종 13년)
1783 샤르루, 최초 수소기구 샤를리엘 개발
1904 크리스마스 실 발매 : 덴마크에서.
1905 동학, 천도교로 개칭
1911 헤이그 국제아편회의
1915 총독부 박물관 경복궁내 개관
1918 잡지 '유심' 폐간
1920 장덕수 등 조선청년연합회 조직
1921 우측통행(1906년 실시)을 좌측통행으로 변경
1923 진주선(마산-진주간)철도 개통
1925 로카르노조약 조인(독일국경문제)
1927 한강철교 복선 운행 시작
1927 조선일보, 한국 최초의 신춘문예 도입
1932 중국정부 낙양서 남경으로 천도
1937 일본, 재만(在滿)한국인의 치외법권 철폐
1942 전국에서 청년특별연성소 입소식
1943 카이로선언 발표(11.27 서명)
1945 동아일보 복간
1945 일본, 전범 53명에 체포령
1945 역사학회 창립
1947 북한 화폐개혁 발표
1949 사회부 신설
1950 유엔총회 한국재건단(UNKRA)설치 결의안 채택
1950 중국군,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진주
1951 대구 부산을 제외한 남한전역에 비상계엄령 선포
1953 삼남지방에 비상계엄령
1955 서독, 대한민국을 승인.한국-독일, 국교 수립
1955 극장 지정좌석제 실시
1957 이스라엘-요르단 교전
1959 프랑스-소련, 무역협정 조인
1959 서울은행 개점
1960 한일정기해상항로(부산-하카다) 종전후 처음 취항
1962 소련, 라오스 경제원조협정 조인
1964 예총 회관 준공식
1966 빌리 브란트 서독 외상에 취임. 동방정책 시작
1971 영남고속도로, 서울-원주 구간 개통
1972 동서독관계 정상화 기본조약 조인
1975 미국-중국, 정상회담
1976 KBS 여의도 새 방송종합청사 준공식
1978 루마니아, 탈소련 선언
1978 황룡사 터에서 사상최대 크기의 치미 발굴
1980 대구매일, 부산일보, 경남매일, 광주일보 창간
1980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발족
1981 유고 여객기. 프랑스 공항서 추락. 178명 사망
1982 세계 최초 인공심장 이식 수술
1983 이원경 외무장관,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회담
1983 삼성반도체 64KD램 반도체칩 국내개발 양산돌입
1986 미국 레이건 대통령, 이란-콘트라 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특 별검사 설치 결정
1989 필리핀 쿠데타 기도, 실패
1991 도서에 ISSN(국제표준도서번호), POS(점포판매시스템)제도 도 입
1991 우크라이나 첫 대통령에 크라프추크 당선
1992 한국-남아공 국교 수립
1998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인수
1999 영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 250년만에 공개
오늘의 인물
① 금성 대군(金星大君 ; ? - 1457.12.1) : 이조시대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른 단종을 숙부인 수양 대군이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자, 이를 못마땅히 여긴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단종을 다시 왕위로 앉히려는 비밀스런 일을 꾸미다가 발각이 되어, 1457년 오늘 독약으로 사형되었다.
② 조병세(趙秉世 ; 1827 - 1905.12.1) : 조선 후기의 문신․순국열사.
본관 양주(楊州)
호 산재(山齋)
별칭 자 치현(穉顯),
시호 충정(忠正)
***조병세선생묘 : 경기 시흥시 조남동 산121-7.
시흥향토유적 제5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열사인 조병세 선생의 묘.
묘앞에는 상석․향로석이 있으며 봉분의 높이는 1m20㎝, 지름은 5m50㎝에 이른다.
노론파의 명문에서 태어나 음관(蔭官)으로 참봉(參奉)이 되고, 185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1864년 실록청도청낭청(實錄廳都廳郞廳)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을 거쳐 1887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예조․이조의 판서가 되고, 1889년 한성부판윤․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중추원 좌의장(中樞院左議長)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은거하였다.
1896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고, 1898년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과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하기 위하여 고종을 만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거절당하였다. 이어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조약의 무효와 을사5적의 처형 등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다.
곧 풀려났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좌하며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그후 가평 향제로 추방되었으나 다시 상경하여 표훈원에서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③ 장덕수(張德秀 ; 1895 - 1947.12.2) : 한국의 언론인․정치가.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1895년(고종 32) 황해도 재령(載寧)에서 태어났다.
1911년 조선총독부 판임관(判任官) 시험에 합격하고, 같은 해 일본에 유학해 191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8년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 등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이듬해 국내로 잠입하다 체포되어 거주 제한을 당하였으나 여운형의 통역관이 되면서 풀려났다.
1920년 《동아일보》 초대 주필이 되었고,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李承晩)․허정(許政)과 《3․1신보》를 발간하였다.
1928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보성전문 교수를 거쳐, 1936년 동아일보사 부사장이 되었다.
1939년에는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분회 제4분회장,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준비위원, 1945년 7월에는 국민의용대 경성부 연합 간부 등으로 활동하면서 친일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송진우(宋鎭禹)․김병로(金炳魯)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 당 외교부장․정치부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朴光玉)과 배희범(裵熙範)에게 암살당하였다.
④ 김승호(金勝鎬 ; 1918.7.13 - 1968.12.1) : 향년 50세
영화 배우.
본명은 해수(海壽).
보성중학교 중퇴.
동양극장․신협(新協) 등에서 25년 동안 연극 활동을 하였고, 4년 영화「자유 만세」를 시작으로 하여 35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독특한 인간미를 지닌 연기자였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주연 남우상을 받았다.
문교부 주최 우수 영화 주연상(1956), 제1회부일(釜日)영화상 남우주연상(1957),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 남우주연상과 국제영화 남우주연상(이상 1958), 서울특별시 문화상(1959), 제7.8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1967) 등을 수상하고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지내는 등 김승호의 영화 인생은 순탄하고 화려했다.
그의 연기도 명성에 값했다.
6.25 이후 1960년대까지 김승호가 보여준 인간미 넘치는 남편상, 아버지상은 시대의 궁핍함에 주눅든 서민들을 푸근하게 감싸주었다. 스크린 속의 김승호는 가장 한국적인, 그리고 서민적인 너무도 서민적인 남자였다.
그는 남편들의 외도를 그린 로맨스 그레이(1963.신상옥감독) 등 코믹 터치의 통속물에서부터, 1950년대 말의 가난을 그린 박서방(1960.강대진 감독) 등 문예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의작품에서 중후한 연기를 펼치며 그 시대의 대표적인 한국인상을 창조해냈다.
인생차압 로맨스 빠빠 굴비 강화도령 돌무지 등 그가 출연한 영화는 350여편에 이른다.
그 가운데 김승호라는 이름과 가장 밀착돼 있는 영화는 마부(1961.강대진 감독)일 것이다.
고시공부를 하는 큰아들, 싸움질만 하는 작은아들, 벙어리딸 이렇게 3남매를 고달프게 키우는 마부의 삶을 그린 마부는 제11회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했다.
영화배우 김희라씨는 김승호의 아들이다.
이 2세배우의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에 그 아버지의 실루엣이 아련히 겹친다(고종석,2001/11/30).
⇨7월 13일.
⑤ 맬더스(Thomas Robert Malthus ; 1766.2.17 - 1834.12.1) : 영국의 경제학자.
유효 수요(有效需要) 및 과소소비설(過少消費說)의 원리를 최초로 설명하였고, 1798년 유명한 <인구론(人口論)>을 내어 인구의 자연 증가를 억제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⑥ 슈미트 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 ; 1884.12.1 - 1976.8.9) : 슈미트 로틀루프는 표현주의 풍경화와 누드화, 목판화로 유명한 독일의 화가이다.
1905년 드레스덴에서 건축학을 배우기 시작해 그곳에서 동료 건축학도인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에리히 헤켈과 함께 브뤼케파라는 표현주의 미술가 단체를 결성했다.
그는 평면적이고 유형화한 형태의 표현적인 가능성을 담아낸 <모자를 쓴 여인 Woman with Hat>(1905)을 발표한 데 이어, 1910년 초기의 인상주의 화풍에서 상당히 벗어난 작품 <외눈 안경을 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Monocle>을 통해 과감한 색의 부조화를 표현해냈다.
1911년 이후부터는 거친 색조와 투박한 형상들로 강렬한 야수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제작했다.
또한 입체파에 새로이 관심을 보이면서 각이 진 기하학적 형태들과 왜곡된 공간을 다룬 작품들을 내놓기도 했다.
⑦ 벤 구리온(David Ben-Gurion ; 1886.10.16 ~ 1973.12.1) : 이스라엘 정치가.
시오니즘 지도자.
본명은 데이비드 그루엔(David Gruen).
폴란드 프원스크 출생.
근대 시오니즘 창시자 T.헤르츨의 영향을 받았다.
1906년 팔레스타인에 입국하여 팔레스타인노동당의 활동분자가 되었으며, 그 기관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유학하고 있었으나 연합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국외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시오니스트인 I.벤츠비와 함께 유대 군단을 결성하여 영국군과 함께 팔레스타인전쟁에 종군하였다.
전후에 팔레스타인에 머물면서 노동총연합을 조직하고 스스로 서기장이 되었다.
1933년 국제 시오니즘의 최고 감독기관인 시오니즘 집행위원회(Zionist Executive)에 들어가 2년 후에는 위원장이 되었고, 1948년 5월 이스라엘공화국 성립과 함께 총리가 되어 1953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으며, 1955~1963년 다시 총리가 되었다.
저서로 《투쟁》(5권, 1949)이 있다.
⇨10월 16일.
⑧ 로바체프스키(Nikolay Ivanovich Lobachevsky ; 1792.12.1 ~1856.2.24) : 러시아의 수학자.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다.
카잔에서 몰(沒).
로바체프스키는 흔히 기하학의 코페르니쿠스로 불린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이래의 천동설을 뒤집고 새로운 우주관을 수립했듯, 로바체프스키 기하학도 그 이전까지의 유클리드 기하학을 상대화시키며 새로운 공간 개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은 하나밖에 없다고 가정하고 있다.
흔히 평행선의 공리라고 불리는, 기하학 원본의 제5공준이다. 그러나 로바체프스키는 평면 위에서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이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은 수없이 많다는 가정(로바체프스키-보여이 공리) 위에 새로운 기하학을 세웠다.
말 안장처럼 오목한 면(곡률이 음인 곡면) 위에서는 로바체프스키-보여이 공리가 성립한다.
야노스 보여이는 로바체프스키와는 독립적으로 오목한 공간의 기하학을 모색한 헝가리 수학자다.
반면에 지구처럼 볼록한 면(곡률이 양인 곡면) 위에서는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그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지구 위의 경선은 모두 극점에서 만난다.
두 개의 직선은 반드시 두 점에서 교차하며, 따라서 평행선은 없다.
이런 가정 위에 성립된 기하학을 리만 기하학이라고 부른다.
이런 볼록한 공간을 구상한 사람이 독일 수학자 게오르크 리만이기 때문이다.
로바체프스키 기학학은 쌍곡선 기하학이라고도 부르고, 리만 기하학은 타원기하학이라고도 부른다.
그 중간적 존재인 유클리드 기하학은 포물선 기하학이라고도 부른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이지만, 로바체프스키 기하학에서는 그보다 작고, 리만 기하학에서는 그보다 크다(고종석,2003/11/30) .
⇨2월 24일.
⑨ 마르키스 드 사드(Marquis de Sade : 1740.6.2 - 1814.12.1) : 프랑스의 작가.
통칭은「사드」후작(侯爵).
7년 전쟁에 출정.
변태적 성행위(性行爲)로 인하여 여러번 투옥 정신 병원에서 정신 착란으로 사망.
그의 소설 <쥐스틴(Justine ; 1791)>, <줄리엣(Juliette ; 1798)>에서 성욕 도착(性慾倒錯)현상을 묘사, 「새디즘」(Sadism)의 명칭(用語)을 낳게 했다.
⇨6월 2일.
⑩ 레오 10세(Leo X ; 1475 ~ 1521.12.1) : [요약] 로마 교황(1513∼1521).
학예 ·미술을 보호하고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팔았다.
루터를 파문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본명 조반니데 메디치(Giovanni de Medici)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이탈리아 피렌체
[본문]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가(家) 출신으로, 본명은 조반니데 메디치이다.
젊은 시절에 피사에서 인문학자인 피치노 등에게 교육을 받아 학예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1489년 추기경이 된 뒤 정치 ·군사적인 수완을 인정받아 교황청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1513년 율리우스 2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즉위, 학예 ·미술을 보호하고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한 에스파냐와 프랑스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힘써 교황권(敎皇權)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생활로 교황청 재정이 바닥나자 빈번히 사제직(司祭職)을 매매하여 비난을 샀고, 1517년 베드로 대성당 건립자금을 모으려고 이른바 면죄부(免罪符)를 대대적으로 팔았다.
이는 M.루터의 비난의 초점이 되었고, 교황은 1521년 루터를 파문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두산백과사전)
********누구보다 빠르게 고위 성직에 오른 사람이다.
8세에 성직에 입문하자마자 주교 자리를 얻고 16세에는 추기경에 선임됐으니까.
비결은 돈.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메디치 가문이라는 배경 덕분이다.
금융업으로 출발해 수백년 동안 이탈리아 피렌체를 주무른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가장 특출한 인물이라는 ‘위대한 로렌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조반니에게는 운도 따랐다.
농부 출신으로 전쟁에 뛰어들기를 좋아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1513년 사망했을 때 예상을 깨고 새로운 교황으로 뽑혔다.
유력 후보들 간의 상호 견제로 어부지리를 얻은데다 가문의 재력이 뒷받침된 덕분이다.
교황 자리에 오른 뒤 스스로 ‘레오 10세’라는 이름을 고른 그(당시 37세)는 역대 어느 교황보다 부자였다.
메디치 가문의 재산은 물론 근검했던 전임 교황들이 쌓아놓은 교황청 재산까지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문제는 막대한 자금이 금새 동났다는 점.
과도한 낭비 탓이다.
문화ㆍ예술 등에도 지원금이 나갔지만 성대하게 차리고 맛있게 먹는 데 재산이 탕진됐다.
만찬에는 65가지 코스요리가 나왔다.
보위에 오른 지 1년 채 안 지나 교황은 이탈리아 대부분 은행에 빚을 지는 처지로 전락했다.
추기경들도 그의 행각을 따랐다.
돈이 궁해진 교황은 비상수단을 짜냈다.
고유 권한인 ‘사면권’을 대거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면죄부’를 팔기에 이른다.
면죄부 판매는 마틴 루터의 저항을 낳았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 대한 파문령을 내렸던 1521년의 12월 첫째 날 격렬한 진통 끝에 숨을 거뒀다.
향년 45세.
역설적으로 그의 사치가 아니었다면 억압의 역사는 좀더 길게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권홍우ㆍ편집위원.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
⑪ 제임스 아서 볼드윈(James Arthur Baldwin ; 1924.8.2 ~ 1987.12.1) : 흑인들의 종교 체험을 다룬《산에 올라 고하여라》로 유명해진 미국 소설가.
⇨8월 2일.
⑫ 기타 오늘의 인물
1825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사망
1905 전(前)참판 이명재 자결
1977 해태그룹의 창업자 박병규 사망
1991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 스티글러 사망
1995 한국 경제학자 고승제 사망
1998 시사만화의 개척자 '코주부' 김용환씨 별세
1998 영화 '닥터 지바고' 촬영감독 프레디 영 사망
오늘의 세시
오늘의 샘터
① 12월의 인사에 쓰이는 어귀 : o 크리스마스가 있는달.
o 종각 위에 눈이 내리고.
o 이 달이 다 가기 전에.
o 동짓달 바람은 살을 찌르는 듯 하군요.
o 이 해도 황망히 가고 마는가 생각하니 무엇인지 걷잡을 수 없는 뉘우침을 느끼게 됩니다.
o 찬바람이 부니 화롯가가 다시없이 그립구려.
o 축 크리스마스.
o 12월은 눈에 덮인 호수 같습니다.
o 벽에 걸린 달력이 이젠 한 장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o 새벽의 종소리는 내 잠을 깨우고 마음의 안정을 위한 곳으로 나를 부릅니다.
o 눈처럼 하얀 마음이 그리운 오늘.
o 크리스마스날에 내리는 눈은 더욱 하얗습니다.
o 탄일종이 울립니다. 먼 바닷가 외딴 오막집에서도 탄 일종이 울립니다.
② 새디즘(Sadism ; 虐待性淫亂症 ,加虐淫亂症) : 상대편에게 고통․학대를 가함으로써, 성적 흥분․만족을 느끼는 일종의 변태증(性 的 倒錯症).
"욕망의 대상에게는 폭력을 주어야 한다.
그녀가 굴복한 순간 쾌락은 더욱 커진다....."
라고 사드는 말했다.
③「새디즘」의 대립어로 「매저키즘」(Masochism ; 被虐待性淫亂症 被虐淫亂症)도 있다.
오스트리아의 법률가이며 작가인「Sacher Masoch」의 소설에 이런 종류의 사례(事例)를 다룬 장면이 많이 나온데서 유래했다.
④ 맬더스의 인구론 :『인구는 기하 급수(幾何級數)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 급수(算術級數)적으로 증가하므로 인구의 증가 도 항상 식량의 증가에 제약받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식량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에 따르지 못한다는 사 실로부터 인류의 빈곤과 악덕은 숙명적인 것이다.』라고 맬 더스는 「인구론」에서 비관론(悲觀論)을 폈다.
오늘 나의 일기 나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