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드컵이 내게 준 선물
임영희
1960,70년대에는 모두들 입치레도 힘든 때였다. 난 여고에 합격했지만 남동생들에게 양보를 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쳤다. 친정아버지마저 30년 넘게 근무한 국가공무원 퇴직금을 몽땅 친구에게 떼인 까닭에 졸지에 나는 우리집안의 소녀가장이 되었다. 호텔청소부 등 온갖 진일 마른일 마다 않고 열심히 동생들 셋을 뒷바라지하여 겨우 대학을 마치게 했다.
그런 다음 이젠 좀 한숨 돌릴까 하던 차에 친정어머니가 연이어 세 번의 대수술을 받았다. 거기에 고혈압과 중풍으로 인한 아버지 병수발 5년은 참으로 힘든 세월이었다. 의료보험 제도도 없던 그 시절의 소녀가장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인고(忍苦)의 시련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보람도 없이 아버지는 세상마저 떠나셨다.
왜 나에게만 이토록 힘든 일이 끝나지 않는 걸까? 그 이후로도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난 한자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내친김에 중국어까지 열심히 배웠다. 그 실력으로 2002년 월드컵 대회 때는 자원봉사자로 맹활약을 할 수 있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점도 많았다.
그래도 내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긍심에 얼마나 가슴 벅찬 환희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내 생애 두 번 다시 그런 영광의 시간이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20대 때 전주교도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가수는 아니었지만 성가대에서 성가, 가곡, 대중가요, 등을 부른 덕에 그 경험이 씨앗이 되어 봉사라는 의미가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친정 부모님 병수발 하느라 5,6년 세월을 흘러 보내고 7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너무 울적하고 무료한 세월만 흘러 보냈다. 그러다가 이웃에 살고 있는 친구와 더불어 적십자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노인장애시설과 정신병원 등에서 이불세탁도 하고 장애인들의 몸을 씻겨 드리기도 하면서 반찬 만들기도 부지런히 참여했다. 몸은 비록 힘들지라도 어려운 분들을 위해 일하는 게 참으로 행복이었다.
지금은 이웃에 사는 어려운 맞벌이 자녀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내 나이 예순일곱, 어디서 오라는 데는 없을지라도 혼자 터득한 중국어로 내 고장 전북을 위해 노년의 시간을 즐거이 보내고 있다. 전북의 관광도우미로, 때론 민간홍보대사까지 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루할 틈이 없다.
돌아서면 이내 잊어버리는 나이인지라 역사나 연대를 잘 외워야 하는 일이어서 날마다 열심히 공부하고 또 외워야한다. 그런 문화해설사의 일도 어느덧 1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젠 이 지역에선 베테랑이라며 70세까지도 충분히 근무할 수 있을 거라는 격려도 받아가며 즐겁게 일하고 있다.
틈틈이 신문이나 책을 보면서 퀴즈에도 나가 입상도 했고, 시와 수필을 공부하면서 몇 차례 수상을 하기도 했다. 미국은 세계 여러 인종을 받아들여 잘 살아가는 나라다. 그들은 은퇴한 뒤 80% 이상이 봉사활동을 생활화하고 있다고 한다. 월드컵 이후 우리나라도 자원봉사활동이 활성화되어간다고 한다. 하지만 자원봉사가 더욱 적극적으로 생활화되었으면 좋겠다.
지난여름에도 정기교육 차 중국 산동성에 가서 전북의 새만금 등 여러 곳을 홍보하고 왔다. 내년은 전북관광의 해란다. 더욱 열심히 준비하여 우리 고장을 알리는 민간홍보도우미로 이 고장 발전을 위해 밀알이 되련다. 낙후된 내 고장 전북, 우리가 열심히 땀 흘려 가꾸어서 청정전북관광에 힘을 실어야겠다.
내 나이가 벌써 고희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젊은이 못지않은 뜨거운 열정으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나의 삶을 불사르고 싶다. (2011.11.)
2. 아버지와 색소폰
임영희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삼복더위를 이기려고 백숙을 먹던 기억이 새롭다. 닭 한 마리를 잡아 열 식구가 먹어야하니 내 차지는 언제나 모가지뿐이고 아버지께서는 내게 닭 모가지를 먹어라 주시며 “이걸 먹으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단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 미안해하시는 마음 조금은 알 것 같다. 뼈가 많고 먹잘 것 없는 작은 부위니 말이다. 닭 한 마리로 많은 식구가 나누어 먹으려니 어쩔 수 없었던 시절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나는 내가 생각해도 내 노래 솜씨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고 내 노래를 들은 친지들로부터 적지 않은 칭찬을 받기도 했다.
40여 년 전 낯설고 물선 서울생활이 고단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고향역이라는 노랫말을 넣어 편지를 보내 주셨다. “너에게 편지를 쓰는데 나훈아의 고향역이 나오는구나.”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으로 시작하는 나훈아의 노래를 마음속으로 불러보며 아버지의 편지를 음미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또한 그때부터 서울이 몹시 싫어지기 시작했고 부모님과 고향생각이 절로 나고 특히 해 질 녘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나도 모르게 고향집이 그리워 당장 귀향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노래는 나의 벗이 되었다. TV도 없던 시절이어서 FM 라디오방송에서 나오는 노래를 유일한 벗으로 삼았던 시절이니 이는 모두 아버님께서 보내신 편지의 조화 때문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십대부터 색소폰을 불기 시작해서 클라리넷까지 60년을 함께 해 오신 음악의 마니아이시다. 직장이 쉬는 날이면 아침부터 사랑채의 방 하나를 작은 연주실로 만드셨다. 천정을 뚫을 듯 커다란 콘트라베이스와 기타, 그리고 색소폰, 클라리넷, 트럼본, 트럼펫 등 목관악기와 금관악기가 제각기 주인을 찾아 연습에 여념이 없는 부친의 친구 분들로 짜여진 방은 그야말로 작은 연주실을 방불케 했다.
나의 아버님은 본업은 국가공무원이시다. 하지만 워낙 음악연주에 몰두해서 어머님을 매우 힘들게 하셨다. 그 시절 악기 값이 얼마나 비싼지 웬만한 집 한 채 값과 비슷할 정도였으니까 내가 귀향했을 땐 큰 책장 두 개에 음악책과 악보가 가득하였고 LP음반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 였으며, 우스운 사연은 KBS에서 방송국에도 없는 악보와 레코드판을 나의 아버님에게 빌려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미수(米壽)지나 구순에 이르러 작고하셨지만 운명하시기 수 년 전까지 악기와 동무하셨다. 아내와 자녀들이 고생은 되었지만 아버지의 연주에 맞춰 노래할 때는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즐겁고 평온한 가족으로 하나 되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웃음 띤 모습으로 흐뭇해하셨고 가족들은 부친의 영향을 받은 건지 유독 음악을 가까이했다.
좋은 노래가 나오면 먼저 곡을 듣고 나중에 가사를 적어 배우기도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존재의 이유,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편지, 창밖의 여자, 9월의 노래 등은 나의 삶이 힘들 때면 나를 치유해 주는 약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음악이라는 보약은 만병통치약이고 음악이라는 바이러스에 걸리면 나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처지가 되는 모양이다.
청아한 피아노 소리를 좋아해 혼자 배워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을 즐겼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한곡을 제대로 치려면 손톱이 부러지고 손가락이 찢어질 만큼 연습을 해야 하며, 이런 어려움은 나를 혹독한 연습 벌레로 만들었다. 4년간 매일 8시간씩 연습하면서 생활 속의 음악을 즐겼는데 요즘은 하루에 1시간 연습하기도 쉽지 않다. 아마 지금이라면 음악의 달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가족을 돌보기보다는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음악에 심취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싫었고, 아버님의 끈기와 인내를 배워가며 나팔소리를 날마다 몇 시간씩 듣는다는 것은 고역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악기를 공부해 보니 아버지의 속마음을 읽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하루를 쉬면 악기가 알고, 이틀을 쉬면 본인이 알며 사흘을 쉬면 청중이 안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래서 악기 연주는 하루만 쉬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갈고 닦았는가는 음악의 깊이에서 나타난다. 악기를 제대로 연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음악가들은 평생을 쉬지 않고 연마하여 사람들의 정서와 마음을 감동시킨다.
파란하늘에 하얀 구름이 지나가는 날이면 지난 옛 추억이 생각나며 아버지의 색소폰 소리가 그립다. 남은 여정 아버지의 추억을 더듬어 글감으로 사용하여 즐겁게 글을 쓰면서 음악을 가까이하는 삶으로 나를 치유하는 보약으로 삼고 싶다.
3. 엄마의 애창곡 ‘목포의 눈물’
임 영 희
아직 겨울이라고 하기 에는 좀 이르다. 새벽녘에 집 앞길을 걸어 나오는데 장갑을 끼었어도 손끝이 시리다. 산촌이라선지 초겨울 날씨처럼 목도 매캐한 게 불청객 감기손님이라도 올성싶다. 그럼에도 소풍전날 학창시절처럼 약간의 설렘도 있어 즐거운 마음으로 동네 길을 걸어 나왔다.
목포로 문학기행을 가는 날이다. 가을 단풍이 봄의 꽃보다 아름답다고 노래하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버스 밖 산야는 온통 울긋불긋 단풍의 바다다. 시공을 초월해 얼마쯤 갔는지 어느덧 쪽빛바다가 넘실대는 목포에 이르렀다. 맨 먼저 갓바위 문화타운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장편 소설가 박화성문학관을 돌아보면서 사실주의 연극극작가 차범석 등 문학인을 기리는 작품도 둘러보았다.
이들 문학관에 전시된 작품집과 작가의 치열한 삶의 여정을 돌아보니 저절로 숙연한 마음이 든다. 나도 저분들처럼 역사에 남을 그런 문학작품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며 지나가버린 나의 삶을 돌아보아진다.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 지난 세월을 되새김질하고 있는데 벌써 단체 점심시간이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근처 음식점으로 옮겨서 맛있는 회정식 점심에 이강주 한 잔을 들고나니 흥겹다. 식사 후에 남농 미술관으로 갔다. 속기(俗氣)를 벗어난 동양화의 깊은 산수도에 빠졌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도인풍의 선객들이 노니는 강가와 언덕, 그리고 아늑한 산세의 풍경에 젖어들었다.
책과 TV에서 보았던 남농 허건의 작품들을 실제로 보니 인간세상을 뛰어넘는 산수풍경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섬세한 붓의 예술적 선마다 작가의 집념이 깃들어 있는 듯 살아있는 그림들이었다. 때론 바람이 일기도 하고 구름이 흘러가기도 하는 자연 풍경의 경중정(景中情)의 진수다.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질그릇과 청자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고려 적 도자기들을 감상하며 옛 도공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시대를 가로질러 사람들의 탄성과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였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야 어찌하여 우리 한류문화가 세계를 휩쓸게 되었을까도 짐작이 되었다. 한참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목포의 바닷가에 나와 항구에 떠있는 배를 보다가 불현듯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나의 뇌리를 흐르는 민중가요 이난영의‘목포의 눈물’이 푸른 바다위에서 넘실거리며 흘러나오는 듯 했다. 어머니는 걸핏하면 음정도 맞지 않는 소리로 ‘사공의 뱃노래 아물거리고…’로 시작하는 이 국민가요를 가끔씩 흥얼거리셨다.
짧지 않은 기간 고생하여 어머니는 제법 큰 재산을 모으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도박과 여자문제로 그 많은 재산을 다 잃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첩들 자식들까지 우리호적에 올리고 손수 키우고 가르쳐주기까지 했다. 우리는 죽을 먹고 사는데도 그 애들은 입맛 없다고 투정하면 짜장면을 사주기도 했다.
내가 왜 쟤네들에게 저토록 잘 해 주냐고 불평하면 ‘너희는 이 엄마가 있지 않냐’고 다독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어린나이에도 어머니라는 존재가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운지 몰랐다. 그런 탓인지 맛있는 음식보다도 어머니가 내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좋다는 것도 깨달았다.
불을 찾아나서는 부나방처럼 아버지 옆에는 여자들이 득실거렸다. 아버지의 돈을 노렸던 여자들이었다. 아버지의 여자문제로 어머닌 애오라지 속을 태울 때마다 가슴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달래려고 어머니는 오로지 이 노래를 부르셨다.
마음의 분노를 가라앉힐 마땅한 그 어떤 장치도 없는 어머니는 이난영의 이 ‘목포의 눈물’이란 애련한 노래를 부름으로써 가슴에 맺힌 한을 녹이려 했던 게 분명했다. 나중에는 기분이 괜찮을 때도 자주 불렀기 때문에 이 노래만큼은 나도 자연스레 쉽게 배울 정도였다.
‘꿈에 본 내 고향’과 이 노래는 생전에 어머니가 곧잘 부르셨던 애창곡이다. 왜 그렇게 애련한 가락이 흐르는 한과 슬픔이 어린 곡을 좋아했는지 그때는 정말 몰랐었는데, 내 나이가 고희에 다다르다 보니 우리 가요의 애잔한 정조의 가락이 우울한 기분과 한을 푸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걸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특히 이 노래가 발표될 당시에는 전 국민이 다 부를 정도로 대 인기곡이었다는 거였다. 일제강점기 왜놈들 탄압 속에서 민족적 울분이 솟아오를 때마다 이 노랫가락으로 우리민족의 시름을 달랬을 것 같다. 애잔하면서도 여리게 흐르는 가락이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릴 때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박봉의 공무원 월급마저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줬던 아버지가 몹시도 원망스러웠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열 식구 살림을 쌀 한 말 값으로 살아가며 우리 7남매를 무탈하게 키워주신 어머니가 더욱 존경스러워진다. 나만은 어머니처럼 살지 않고 홀로 독신으로 살려했는데, 서른이 다되어 혼인한 나 역시 모전여전 탓인지 순탄한 편이 아니었다.
서글픈 시련이 있을 때마다 유독 ‘목포의 눈물’이 심금을 울리고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듯 나도 몰래 즐겨 부르게 되었다. 어머니의 애잔한 이 노랫가락이 머릿속에 흘러내리며 저절로 내가 좋아하는 애창곡이 되어버린 셈이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서산에 기우는 석양 노을이 나를 붙잡으려한다. 마치 조금만 더 놀다가라고 붙잡듯이. 어찌 활짝 핀 꽃만 아름다우랴. 서산에 걸린 붉은 황혼의 석양 노을 꽃이 너무도 황홀하게 내가슴팍을 헤집고 들어온다.
서산에 기우는 낙조가 황홀하다 못해 몽환적이고 쓸쓸함마저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어머니의 신산(辛酸)스런 삶과 노래에 스민 고락을 생각하면서 ‘목포의 눈물’에 새겨진 정조와 가락이 서산의 노을처럼 가을빛에 물드는 내 인생을 되새김질하며 되돌이표를 매단다.
4. 든든한 막냇동생 영수에게
임영희
영수야! 앞산 단풍이 불타더니 어느새 겨울 초입이다. 사람들이 벌써 점퍼 차림이고, 성급한 사람은 목도리를 둘렀다. 이제 김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배추는 물론 양념거리도 걱정이다. 너희는 배추와 무 농사를 많이 하니 한시름은 덜었겠다. 해마다 시댁 형제들은 몰론 우리 집 까지 신경을 써줘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올해는 고추밭에 탄저병이 돌아 수확량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고추 값이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너희는 고추농사가 잘된 편이라고 하니 참 다행이다.
해마다 음력 2월 추위가 채 가기도 전 아버지 생신 때면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주꾸미와 술을 몽땅 사왔지? 아버지의 귀는 입에 걸리고 어머니는 막내딸이 효녀라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너는 손이 컸지, 내가 좋아하는 딸기를 사도 상자로 사던 너는 꼭 내 언니 같았다.
여고시절에는 미스 코리아 감이라고 선생님들의 칭찬도 많이 들었지! 언니도 샘이 났는데 친구들이야 오죽했겠니. 그래도 내 동생이 예쁘고 날씬해서 미스코리아 감이라는 말이 자랑스러웠단다. 그런 네가 김 서방을 만나 시골에서 살면서 잘 버티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면 용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단다. 장남 며느리도 아닌데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을 보면서 나 같으면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생각하면 영수 네가 장하고 장하다. 특히 많은 제사와 집안 대소사를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잘 치러내니 대견하면서도 자랑스럽다.
한 가지 걱정은 너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잖니? 물론 지금은 많이 건강해졌지만 그래도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 그래야 고등학교 선생님인 딸과 법관을 준비하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할 수 있지,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을 가슴에 품어라. 언니가 막내인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네가 잘 살고 있는 모습을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고 계신 어머니가 제일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 왔을 때 십년이 넘은 TV와 냉장고를 보고 안타까워하던 너를 보고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얼마 후 전자랜드 직원이 네가 보낸 TV와 냉장고를 배달해 왔을 때 너무 고마워 할 말을 잊었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TV와 냉장고를 몇 번이나 쓰다듬어 봤단다.
막내야. 어머니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 너를 낳지 않으려고 했단다. 네가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 집은 웃음을 잃었을 것이다. 정이 많고 이해심이 깊은 너야말로 우리 집의 자랑이자 보배다. 어제도 네가 보내준 쌀을 받았다. 너의 정성과 땀이 베였다고 생각하니 쌀을 아껴 먹어야겠다. 고맙고 고맙다. 막내야.
이제 겨울이 온다. 겨울동안 만이라도 일손을 놓고 편히 쉬어라. 화장도 예쁘게 하고, 예쁜 옷도 입고, 네가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맛있는 것도 먹어라. 그래야 내년에도 논농사 밭농사 잘 짓지. 김 서방이 있잖니? 김 서방과 팔짱을 끼고 우리 집에 놀러 와라. 막내야, 언니가 해줄 것이라고는 사랑한다는 말, 그 말 뿐이다. 사랑한다. 든든한 막냇동생 영수야!
5. 소한에 핀 명자
임영희
지난 12월 초, 뜨락 담 아래 새똥 빠지게 명자나무의 꽃이 두세 송이 살짝 얼굴을 내밀더니, 이번에는 모든 사물들이 몸을 움츠리고 있는 추운 절기인 소한 무렵 검붉은 숭어리에서 대여섯 송이가 활짝 피어 내 눈을 의심케 했다.
춘삼월에 피어야 할 꽃이 동지섣달 매서운 시절에 꽃을 피우다니, 이상의 현실에 난감하면서도 나는 한 겨울에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우리 집 뜨락의 명자나무 꽃과 양지바른 언덕에선 개나리들도 얼굴을 내밀었다. 이런 이상 현상이 모두 제트기류 때문이란다.
그러더니 대한이 당도하자 그 이름값을 하며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1주일 가까이 계속되어 힘들었다. 원래 겨울철 추위는 입동(立冬)에서 시작하여 소한(小寒)으로 갈수록 추워지며 대한에 이르러서 최고에 이른다고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산골짜기와 하천이 있어선지 시내보다 5도 정도 더 낮게 체감한다.
2017년 정유년을 붉은 닭의 해라고 한다. 그동안 수많은 닭들을 보아왔지만 붉은 닭은 생소하다. 그러나 어감 상 ‘붉은 닭’ 하면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좀 더 이해를 돕자면 ‘붉다’는 것은 ‘밝다’는 뜻이기도 해서 정유년을 ‘밝은 닭’의 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밝다’는 것은 사람에게서는 ‘총명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유년을 ‘총명한 닭’의 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듯하다.
상서로운 기운에, 나도 생각지도 않은 꽃을 보니 기분이 좋아 수반에 꽂아 보름 정도 더 감상했다. 향기가 멀리까지 간다는 천리향 작은 철쭉 분을 방안에 들여 한결 코와 눈의 호사도 부려보았다. 방안 가득한 향을 인공 향수와 비하랴. 그 맑고 상큼한 향 때문인지 추운 날인데도 추운 기분은 뒤로 물러서고 나는 그 향기에 취해있다.
어느새 70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달려온 나를 반추해 본다. 풀 한 포기도 자연의 일부로 다 제 길을 가는 게 뭐 나쁠까마는, 꼭 정원의 예쁜 꽃보다는 길가의 풀 한 포기로 만족하면서 욕심 없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
꽃을 대단히 좋아는 나는 올해에는 뜨락에 꽃 양귀비와 수레국화를 심으려 했지만 이름 없는 들풀들도 함께 심어보려 한다. 내가 들풀들을 유독 좋아하는 것은 그 풀들이 저마다 독특한 풀 향기를 내뿜고 있어서가 아니다. 세찬 바람엔 조용히 누워주고 잔바람엔 살짝 일어나 그윽한 향기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무명의 들풀들도 비가 오면 모두가 젖는다. 들풀은 그 속에서 온몸을 적시며 발뒤꿈치를 든다. 누가 알아주랴 그의 이름을, 그래도 그들은 파란 생명의 등불을 켠다. 이름은 없어도 신선한 등불을. 그리고 들풀은 들풀끼리 어울려 산다. 갖가지 모양새, 수수한 차림새로 오가는 길손이야 보든 말든 바람 부는 대로 하느작거리는 몸짓으로 서로 어깨를 비비며 머리를 맞대고 하냥 즐겁다. 거목의 꿈은 아니어도 생명의 빛을 세상에 펼친다. 푸르게 그러나 조용히 설레면서 들풀은 들풀끼리 어울려 산다. 이러한 들풀들을 심약한 가지의 양귀비와 수레국화 사이에 심어 놓으면 서로 의지하며 조화를 이루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화원에서 구입해 피우는 꽃도 좋지만, 들풀과 더불어 마음속에 항상 곱고 알알이 맺힌 작은 송이를 만들며 웃고 살면 일석이조로 건강하고 행복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작년부터 세상이 뒤숭숭한 세월 속에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꽃을 보고 가꾸며 위로하고 그럴수록 자신을 돌아보며 후회 없는 여생을 보내고 싶다.
붉은 닭의 해인 올해는 닭의 오덕 중 여명을 알리는 부지런함과, 여럿이 먹이를 먹는 것에서 배려하는 마음을 올해는 더 배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