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작 5편
1. 국
2. 그해겨울
3. 민달팽이
4. 봄날
5. 점괘
- 이 필 선 -
국
이필선
밥상 앞에만 앉으면 생기는 버릇이 있다. 국만 먼저 먹고 밥은 그대로 남기는 것이다. 남보다 늦지 않게 국을 다 먹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한 그릇의 국을 다 비우고 나면 고된 일을 한 듯 지쳐 버린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도 뜨거운 국을 먹어야 했던 유년기 때의 생긴 트라우마(trauma) 때문이다.
어릴 적, 담을 사이에 둔 옆집의 잔칫날이었다. 어머니는 점심때 꼭 그 집에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마을의 잔치가 있는 날이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그 말이 없다 하더라도 배가 고프면 당연히 어머니가 일하는 곳으로 가야 했다.
어머니는 하얀 천막 아래 음식을 담아내는 곳에서 일을 돕고 있었다. 엄마를 찾아 들어간 장독대 뒤에는 내 친구 정옥이 엄마도 있었다. 정옥이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리 일은 하지 않고 장독대에 걸터앉은 주인 앞에서 맞장구를 치며 놀다가도 집에 돌아갈 때는 음식이 가득 든 함지박을 이고 가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마음 편히 먹을 수 있게 음식을 집으로 이고 가는 정옥이 엄마와 달리 어머니의 손에는 품앗이 음식으로 이고 갔던 단술 항아리나 빈 보자기뿐이라 실망하고는 했다.
그 날도 다른 애들은 누가 뺏어갈세라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지만 나는 양 많고 김이 술술 나는 뜨거운 국이 싫었다. 당연히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까지 국그릇을 안고 있었다. 일손 바쁜 어머니는 식기 전에 어서 먹으라고 곁눈질로 채근했다. 그러다 빈 숟가락만 물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한 어머니는 국그릇을 뺏어 들고 가더니 김이 술술 나는 국을 새로 퍼 왔다. 울컥 화가 났다, 뜨끈뜨끈한 국을 숟가락으로 몇 바퀴 휘휘 젓기만 하다가 어머니의 눈을 피해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혼자 천막을 벗어 나왔다. 돌담 골목길을 따라 누운 큰 가죽나무 그늘을 친구삼아 타달타달 걸어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찬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변변한 반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메주콩을 볶아 만든 콩자반이나 시커먼 무 장아찌가 전부였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께 어김없이 타박을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누가 뭐라거나 말거나 잘도 먹던데 나만 유별을 떤다며 속상해했다. 고기가 흔치 않던 시절, 그날 하루만큼은 고기를 넣어 끓인 육개장으로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의 뜨끈한 사랑이었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복국을 자주 끓였다. 겨울이면 집집의 처마마다 목을 늘이고 매달려 있는 복어를 보는 풍경이 낯설지 않던 때였다. 무를 어슷어슷 빚어 넣고 말갛게 끓여 참기름 방울을 띄운 복국은 그나마 내가 좋아하던 국이었다. 그 중에도 유독 복어의 껍질만 발라먹기를 좋아했다. 복어의 하얀 뱃살 껍질과 까만 등껍질은 쫀득쫀득해서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두레상을 앞에 두고 앉은 언니 오빠의 국그릇 속 두어 점 복어의 껍데기를 탐내곤 했다. 언니 오빠는 껍질을 덜어 주는 대신에 내 몫의 하얀 살코기를 채 갔다. 아버지의 젓가락에 걸친 복어껍질도 슬며시 내 국그릇으로 넘어왔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살코기를 안 먹고 먹을 것도 없는 껍데기만 먹는다고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동생 것을 뺏어 먹었다는 이유로 언니 오빠도 덩달아 쥐어 박혔다. 그래서 내게 있어 국은 한숨이며 눈물이다. 뜨거운 국물만 봐도 한숨부터 나온다. 먹기 싫은 국을 억지로 먹이려 들던 가난한 어머니의 눈물 같은 응결체다.
다 자라서 객지 생활을 하면서도 국만 받으면 뭔지 모를 서러움으로 버거웠다. 알지 못할 상흔 같은 건더기들이 젓가락에 걸려들었다. 복국 껍질을 내 국그릇에 옮겨 주시던 아버지 생각 때문이었다.
아버지 장례식날 비가 억수같이 왔다.
‘어하여 어하여 어하남차 어하여!’
꽃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은 저승 가는 길이 슬프다며 빗줄기 속에서도 발길을 더디 했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선두장단에 맞춰 발장단으로 빗소리를 다지듯 누르며 갔다. 선두에 선 상여꾼의 선창에 맞춰 뒷소리를 따라 하던 출상행렬은 통곡으로 이별을 전했다.
아버지를 묻을 묫자리에 꽃상여를 내려놓고 술을 따랐다. 술을 따르기 바쁘게 반 잔이 한 잔 되고 한 잔은 흘러넘쳤다. 사람들은 예의인 양 고인이 된 아버지 눈물이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라고 했다. 출상행렬을 따르며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뜨거운 쇠고깃국 대접을 했다. 국물 속의 소나기 줄기 같은 건더기를 건져 올리던 사람들은 그날의 폭우를 아버지의 눈물이라며 다시금 입을 모았다. .
삶에 있어 어렸을 때의 기억은 생각만큼 쉬이 지워지지 않는가 보다. 특히 어려웠을 때의 기억일수록 더 두꺼운 벽을 만들어 둔 것인지 쉬이 허물어지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은 나도 모르게 국그릇을 먼저 비우는 습관을 만들어 버렸다. 내가 국에 밥을 말아 먹는다는 것은 체념을 의미한다. 그 양 많고 뜨겁고 맵기까지 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말아 버린다. 그것은 세상에 덤벼들듯한 자세로 자신없는 것에 먼저 도전하는 객기 같은 것이 돼 버렸음을 누가 알까.
식단에서 국은 매일이다시피 상에 오르는 주요메뉴다. 국의 특징은 그 재료가 바짝 말라 여문 것이든 질긴 것이든 국물은 이미 그 속 깊이까지 스며들어 섬유질마저 더 부드럽게 한다.
음식이 성품을 만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간 버겁게 먹어 낸 국그릇 수만큼 나는 매사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다. 국 속에 든 다양한 재료를 국물이 다 포용하듯 누구를 보듬어 안아 다독여 줄 따뜻한 인성을 지니지도 못했다. 행여 부족한 영양소가 있다 하더라도 넉넉한 양으로 포만감을 즐기게 하는 국의 장점을 포용치 못해 안타깝다.
뒤늦게나마 국그릇을 밀어 내듯 밀쳐내며 누구에겐가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뜨거운 국물 한 사발 내 앞에 두고 생각이 많아진다.
그 해 겨울
이필선
학창시절, 우리 집 작은방 벽에는 시 한 편이 걸려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다시 그리움이 되리라.’시화는 나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해 겨울, 담임선생님은 다음날에 있을 학력고사장 안내와 함께 주의사항을 나열했다. 나는 태연한 척 등을 돌려 친구에게 딴죽을 걸었다. 뒤에 앉은 친구는 선생님의 안내사항은 아랑곳않고 전수학교의 화려한 홍보 전단에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일반고교 진학을 거부하고 전수학교를 선택한 그 친구와 달리,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나는 처량했다. 다시 몸을 돌려 정면을 향해 앉았다. 옆을 봐도 앞을 봐도 친구들은 목을 빼서 선생님 말씀을 듣느라 몰두한 모습이 섭섭했다.
그 자리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가방을 들고 슬그머니 교실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양초로 닦아 반질거리는 차가운 복도를 걸어 나오며 그렁대던 눈물을 교복의 소매로 훔쳐 닦았다. 복도 끝에서 실내화를 벗어 속이 헐렁한 가방에 넣고 허리를 세웠다. 맞은편 정구장에서 모래바람이 훅 불어왔다. 날이 추웠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시렸다. 가슴은 내장 빠진 오징어인 양 텅 비어 버린 듯했다. 정구장 옆, 나목 사이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며 자학을 하고 싶었다, 어디로든 도망을 가 버리고 싶었다, 그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막상 교정을 벗어났지만, 딱히 갈 데가 없었다. 학교 아래 다릿걸 빵집에는 익숙한 데가 아니라 불쑥 들어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한참을 서성이다 미닫이문을 빼꼼히 열었다. 찐빵 솥에는 김이 풀풀 나고 있었다. 교실에서 빠져나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아이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열었던 문을 도로 닫았다. 그저 화가 나고 불안할 뿐이었다. 쿨렁쿨렁 목울대가 자꾸 떨리는듯했다.
혼자서 다니기에는 무서운 시오 리 산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돌아온 집에는 적막만 차 있었다. 작은방에 들어가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라디오 음량을 최고로 높였다. 온기가 사라진 방에 솜이불을 덮어쓰고는 펑펑 울었다. 종내에는 저녁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기만 했다.
이튿날, 학력고사가 있는 날이라는 아침 뉴스를 듣기 바쁘게 라디오를 밀쳐 버렸다. 옷장과 서랍을 뒤졌다. 같은 신세가 된 친구들과 함께 비뚤어질 작정이라도 한 듯 나기기로 작당을 해 뒀던 터였다. 이른 봄에 아버지가 사 주신 철 지난 나팔바지를 찾아 입고 학교 밑, 읍 소재지로 나갔다.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걸어 이 층의 사진관에 올라갔다. 카메라를 빌리기 위해서였다. 나무문을 열고 사진관 아저씨를 본 순간,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 진열장 유리 밑에 깔아 놓은 본보기 사진으로 얼른 눈길을 옮겼다. 사진관 아저씨의 동생인 친구 S도 학력고사장으로 가고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태연한 척 미소를 지었다. 유리 밑에 여덟 명의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의 내가 웃을 듯 말듯 나를 보고 있었다. 하얀 옷깃을 단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찍은 잘 나온 사진이었다. 사진 속 친구들이 내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것 같았다. 사진 위에 기어이 눈물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몇몇 친구들과 나는 이미 삐뚤어진 아이로 알아 달란 듯, 건들대듯 태연하게 카메라 작동법을 배웠다. 사진관 창문을 열고 반대편의 전봇대 기둥에 초점을 맞춰서 셔터만 누르면 된다고 했다. 흐린 초점은 내 눈물인양 파문이 져서 렌즈에 가 어룽댔다. 초점을 맞춘 상태로 카메라를 내밀어 검사를 받았다. 금방 전봇대가 하나로 맞춰지는 나와는 달리, 다른 친구들은 여러 번 반복했지만 잘 안 된다고 푸념을 했다. 사진관 아저씨는 나더러 초점을 잘 맞춘다며 카메라 끈을 어깨에 걸쳐 줬다. 쑥스러워 카메라 끈을 둘둘 말아 쥐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대송등대로 가는 버스를 탔다.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고 소문난 지금의 간절곶으로 향했다. 버스는 덜컹대며 비포장 길을 달렸다, 동행한 친구들의 수다를 멀리하고 거리를 두고 앉아 고개를 외로 돌렸다. 바다를 향해 가는 한겨울의 들판은 짐승의 골격 같은 두렁만이 구불구불 누워 있었다. 자꾸 시야가 흐려졌다. 더는 울지 않으려 고개를 뒤로 젖혔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 먼저 바다를 향해 탄성을 질렀다, 언제 우울했느냐는 듯 그 탄성에 내 소리를 포개며 달렸다. 등대 아래 언덕에서 해풍을 다 껴안듯 맞서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친구가 들고 간 커다란 카세트 음악에 맞춰 나팔바지를 흔들었다.
둘둘 말고 간 긴 털목도리를 팔목에 걸어 빙빙 휘둘렀다. One way ticket을 외치고 Y·M·C·A를 목청 높여 따라 불렀다. 끽끽대며 튀는 카세트테이프 소리마저 내 마음을 닮아 있었다. 해풍으로 추위에 언 곱은 손가락으로 원망하듯 하늘을 향해 찔러 댔다. 삼각스텝을 밟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마른 잔디를 비벼댔다. 온통 삐뚤어지기 위한 타락의 몸짓을 증명하듯 격하게 몸을 흔들었다.
누군가 가난은 불편할 뿐, 죄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적어도 다 자라지 못한 자식에게는 부모가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참으로 큰 죄이고 악이라고 외쳐대고 싶었다. 자식 눈에서 폭우 같은 수액을 빼내게 하는‘죄’와, 처절하게 망가져 버릴 만큼 몹쓸 에너지를 착취하는‘악’이라고, 우겨대고 싶었다.
겨울 해는 점점 제 갈 곳으로 기울고 있었다. 높아진 파도는 바닷바람이 더 세게 불고 있다는 증거였다. 키 큰 해송군락 뒤로 해가 숨어 버릴 즈음,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한댓바람 묻은 차체에 닿은 왼쪽 어깨가 시렸다, 털목도리의 끝을 접어 왼쪽 어깨 밑에 괴고 내다본 창밖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버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덜컹대는 비포장 길을 따라 노랫소리마저 방황하는 내 마음인 양 흐느적거렸다.
‘방랑자여 방랑자여 기타를 울려라 방랑자여 방랑자여 노래를 불러라.’낭랑한 가수의 목소리는 방랑자의 심장을 툭툭 건드리며 서러움을 더해 줬다. 서러움에 북받쳐 밀리듯 차를 탔던 읍내에 내렸다. 이미 어두워진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서성댔다.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 밭에 겨울 억새가 일렁이듯 그해 겨울의 하루는 길고도 을씨년스러웠다.
모든 것을 부모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여느 부모 못지않게 섬세하고도 자상한 부모였다. 그래도 그날 내가 어디로 휘돌고, 얼마나 더 방황했는지를 다 알지 못했다. 이후로도 그 자식이 어딜 헤매고 다니고, 얼마만큼 분노하며 살았는지는 모른다. 심지어 수많은 후회와 포기를 되풀이하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는지는 알 턱이 없다.
아는지 모르는지 차별 없는 세월은 흘렀고 나는 자식에게 내가 겪은 아픔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았다. 하지만 내 자식인들 딱히 공부를 못 하게해서가 아니더라도 부모를 원망한 적이 없겠는가,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한 나를 탓하고 원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또한 세월이 지나면 슬픔만이 아닌 그리움이 되기도 할 것이다.
바람이 차다, 그해 겨울을 닮은 바람을 껴안고 서서 저 세상 가신 부모 편에 서 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민달팽이
이필선
무언가 손에 잡히는 느낌이 물컹하다. 씻고 있던 배춧속에서 민달팽이가 나왔다. 땅에 떨어져 떡고물 같은 흙가루를 덮어쓴 민달팽이가 힘겨운 듯 기어간다.
애당초 내 인생도 민달팽이와 다를 게 없었다. 저처럼 벗은 몸으로 세상에 나왔다. 다르다면,지금은 비 새지 않는 지붕 아래 산다는 것뿐이다. 민달팽이도 마구 눈비 맞으며 산 건 아니다. 제 몸 숨길 배춧잎이든 땅속이든 동가숙 서가숙하면서도 잘 살아 왔을 터다.
나도 민달팽이처럼 이곳저곳 경계 없이 살았다. 변변한 집 한 칸 마련하기까지 어두운 곳에서 은둔자처럼 기 펴지 못하고 산 세월이 길다. 겉껍질 없이도 밍글밍글 잘 사는 민달팽이와 달리 외투까지 껴입고 살았지만 속내는 엄동설한에 쩍쩍 갈라 진 손등처럼 메마르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울 강어귀, 삭풍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 쓰며 흔들리는 마른 부들잎처럼 날을 벼리듯 살았다.
또래들보다 이르게 결혼을 했다. 번갯불에 콩 튀기듯 급히 한 결혼답게 남편은 올곧은 직장도 없었다. 뒤늦게 직장을 갖게 된 곳이 낯설고 물선 서울이었다. 눈 뜨고 다녀도 코 베어 간다는 서울이고 보니 사는 것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가난한 신랑은 단칸방 하나 구할 돈조차 없었다. 본 적도 없는 반지하방을 구했다. 거대한 관 같은 지하방이었다. 말소리마저 쩡쩡 울려 퍼졌다. 남편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나왔지만 나는 부른 배를 잡고 곧 낳게 될 둘째를 생각하며 태연한 눈빛으로 남편을 설득했다. 적어도 그곳이라면 우리 네 식구가 발 뻗고 잘 정도는 될 성 싶어서였다.
전원주택 화보에나 나올만한 높은 부잣집 주차장옆 작은 방에 우리 보금자리를 틀었다. 주인집 여자가 외출할 때는 딸각대는 구두 굽 소리가 멈춰지고, 듣그럽기 짝이 없는 셧트문 올리는 소리가 차갑게 들렸다. 다시 두어 발짝 또각대는 소리가 멈춰졌나 싶으면 차 문이 열렸다. 이어‘부~릉!’소리와 함께 방문을 향한 배기구로 매연 가득한 꽁무니바람을 남기고 달아났다.
보증금이 조금 더 많은 곳인 반대쪽에는 날마다 전선 꼬는 부업을 하는 중년 아줌마 가족이 살았다. 보증금이 더 적은, 주차장 바닥보다 낮은 자동차의 배기구 방향에 우리가 살았다. 그 방과 우리 방이‘ㄱ’자를 이루고 살면서 코너에 부엌 하나를 칸 질러 두 집이 나눠 쓰고 있었다. 부엌이랄 것도 없는 곳의 경계인 벽에 내 정수리높이만한 곳에 작은 바람구멍 하나가 있었다. 그곳으로 가난한 정이 들락댔다.
그때 생애 처음으로 돼지 뼈로 만든 국을 접했다.‘새댁~’이라고 부르는 소리와 함께 국그릇이 넘어왔다. 두 팔을 높이 들어, 낙타봉 만큼이나 수북한 돼지 뼈 위로 송송 썬 대파를 올린 뚝배기를 받아 내렸다. 받으면서 들던 낯선 음식에 대한 거부감과는 달리 구수한 냄새는 이미 내 후각을 자극했다. 두툼한 살코기를 다 덜어내고 앙상하게 남은 뼈만 우리고 또 우려내기를 반복했을 돼지뼛국이었다. 그 생경한 우윳빛 돼지뼛국 맛으로 집 없는 세입자 민달팽이들은 그렇게 더불어 살게 되었다.
날이 거듭되어 주인의 외출시간을 알아갈 즈음, 낮에는 아기를 업고 가게 앞 볕 바른 곳에서 서성댔다. 주인이 나가고 나면 직접 닫아주는 호의를 마다하고 종일 셧트를 올려놓거나 여자가 돌아와 주차하고 나서야 셧트를 내리고 방으로 들어가고는 했다.
그곳에서 사는 내내 남편은 녹초가 되도록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건조해진 몸에 자신을 지키는 하얀 점액질을 쏟아내어 다시 무장하는 민달팽이처럼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나기를 거듭했다. 밀린 피로를 잠으로 대신하고 태연히 또 이튿날을 맞이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제 몸 지킬 껍데기 하나 없이 알몸으로 기어 다니는 민달팽이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다.
첫돌 지난 딸을 데리고 상경해서 둘째를 그 집에서 낳았다. 출입문이라야 방문 한 짝뿐인 방이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 올 먼지와 매연이 진저리나도록 싫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테이프와 비닐, 얇은 이불 등으로 문바람을 막아내는 게 일과인 듯 살았다.
작은 아이가 6개월 되던 때였다. 문을 열면 해를 바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미끄러지듯 이사를 했다. 그 날,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가느다란 전선 꼬는 부업을 내게 가르쳐 준 돼지 뼈 민달팽이 아줌마가 울었다. 그녀를 적시고 있던 습기를 죄다 잃어버린 양 건조한 모습을 한 채 눈물을 감추느라 등 돌려 우리를 배웅했다.
저퀴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던 어두운 곳에서 벗어 나왔지만, 그곳 역시 단칸방에 곤로 하나 겨우 놓을 수 있는 좁은 부엌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구중궁궐이 부럽지 않았다. 민달팽이가 그릇을 기어 타고 다녀도 잘 모를 만큼 어두컴컴하던 부엌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으니 무엇인들 부러웠을까. 부엌문을 열고 나가 모퉁이에 고추장 항아리를 놓아둔 곳에 햇살이 들었다. 작은 장독을 투과한 따사로운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후로 좀 더 나은 공간을 향한 희망으로 불만 할 겨를조차 없이 살았다. 오직 뼛속 힘까지 다 그러모아 사느라 이를 악물었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죽은 듯 웅크리고 있다가 눈치껏 내 길을 갈 뿐이었다. 남편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호화로운 지붕을 달고 다니는 달팽이 같은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저 주어진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 묵묵히 제 갈 길을 찾는 민달팽이처럼 기어왔다.
얼마만큼 왔을까… 푸른 잎을 갉아먹다 지쳐 땅에 나동그라졌다가도 다시 곧추 기어가는 민달팽이처럼 나도 제법 갖춘 삶을 흉내 내며 살고 있다.
하던 일을 끝내고 민달팽이를 찾는다. 힘겹게 꿈틀대던 모습은 어디 가고 그 새 말간 몸으로 수돗가 옆 장독대를 향해 가고 있다.
길고 어두운 터널같은 시간을 벗어나 무연히 사는 나처럼.
봄날
이필선
아침 설거지통 안에서 달그락대며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봄빛처럼 경쾌하다. 내 안의 생각들이 부산해진다, 날씨가 좋은 탓이다. 햇살 반짝이는 봄날에 굳이 집안일을 하자면 할 일이 왜 없으랴.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청소기를 돌리고 장롱문을 열어 겨우내 닫혔던 묵은 공기를 내보내는 것만으로도 일거리가 된다. 그런데 열린 창문 밖을 자꾸 내다보고, 무심한 스마트폰의 반응을 수시로 살핀다.
햇살이 남향의 거실 안을 점령할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뒤적여본다. 지면 위의 글은 사방으로 날아 흩어져 글자 위의 생각만 산만하다. 글인지 아지랑이인지 머릿속이 신기루같이 어른거리기만 한다. 우윳빛 시폰 소재의 커튼을 흔들며 들어오는 달콤한 바람 탓이다. 일어나 여러 가지 생각을 매단 채 씻고 나왔는데도 나를 찾는 이가 없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감싸고 마당에 나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바람에 머리를 턴다. 바람 향이 달콤하다. 마당으로 들어와 내 몫이 된 햇살과 바람이 목덜미를 간질이며 장난질을 한다. 수생초를 심었던 수돗가 물 항아리에는 겨우내 놀던 흰 구름이 여태도 세 들어 노느라 평화롭기만 하다. 수국의 새잎이 나오고 야위었던 송국이 수분을 머금어 오동통 살이 오르고 있다. 양지바른 베란다의 다육식물 무리는 제철을 맞아 희고 노란 꽃을 앞다퉈 피워 올리는 중이다.
마당에는 할미꽃이 진작에 피었고, 튤립도 파랗게 잎을 올린 지 며칠이 지났다. 현관 앞, 댓돌 밑 꽃잔디는 다홍빛 여린 꽃잎을 매달고 눈인사를 한다. 매의 발톱을 닮은 매발톱꽃도 가녀린 꽃대에 매달려 간들거린다. 화단의 함박꽃과 목단도 붉은 촉을 실하게 올렸고 총탄을 닮은 각시둥굴레 새싹도 삐죽삐죽 땅을 솟구쳐 올리는 중이다. 별 모양의 하얀 지면패랭이꽃은 앉은뱅이처럼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피어있다.
젖은 머리가 바람에 다 말라간다. 집 앞 들판에 있는 나무공방으로 가 볼까, 강변을 걸어 볼까, 강 건너 화원엘 가 볼까, 생각은 저 혼자 여러 길을 미리 가느라 바쁘다. 봄날에 읽는 한 편의 글도 좋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차라리 몸으로 쓰는 봄물 들 나들이를 택한다.
온전한 봄날을 즐기기 위해 시간을 코 꿰는 스마트폰은 소파 위에 던져 버리고 집을 나선다. 집 앞 들판 하우스 속 나무공방에 가서 이 간섭 저 간섭 참견을 보탠다. 공방은 고택을 헐어 구한 원목으로 만든 비싼 가구에서부터 나뭇잎 모양을 조각한 앙증맞은 찻잔 받침까지 온통 내 취향이라 단골로 드나드는 집이다. 꽃샘추위를 못 이겨 피워 놓은 난롯불이 정겹고 따스하다. 가구를 만들고 남은 편백 조각을 난로에 집어넣고 코를 벌름거리며 그 향기를 즐긴다.
공방을 차려보겠다는 일념으로 강습을 받는 젊은 아기엄마의 부츠가 아직은 난로를 피워도 될 이유임을 말해준다. 주인과 강습생한테 자꾸 말 걸기도 방해될 것 같아 칼을 빌려 공방 밖의 논두렁에서 쑥을 캔다. 쑥 이파리의 뒷면이 아가의 귀밑 솜털인 듯 뽀얗다. 저녁상엔 쌀가루와 들깻가루를 빻아 넣고 구수한 쑥국을 올릴 것이다.
쑥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타달타달 걸어 강 건너 화원으로 간다. 다리 난간에 닿은 햇살이 철재 봉에 튕겨 파닥이는 은어 떼처럼 강물 위로 흩어진다. 비단결 같은 강물 위 청둥오리 떼가 V자를 거꾸로 그리며 유영한다. 푸른 산빛을 품어 안고 겨울을 난 강물은 산에서 비롯되어 모였을 터, 물길은 더없이 정한 빛으로 찰랑찰랑 흐른다. 산산하게 부는 강바람을 맞으며 대나무 가로수로 이어진 길을 걷는 마음이 부자다. 강둑길을 걷는 사람의 물결은 초록 냄새나는 봄빛 수채화다.
단골꽃집 앞에 주차된 차량만 보고도 봄맞이 나온 사람들을 맞이한 양 공연히 반갑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앙증맞은 꽃모종 포트를 내려다보며 예사로이 말을 건넨다. 꽃을 좋아하고 봄날을 즐기는 공통점을 가슴에 안고 있는 덕분이다.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커피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향이 화원 가득 퍼진다. 초록의 향연이 펼쳐진 화원은 싱그러움으로 수런대고, 사람들은 봉긋봉긋 입을 여는 꽃들과의 대화로 들뜬 모습이다. 어린아이처럼 회원 여기저기를 들쑤시듯 다닌다, 주인을 돕는답시고 물뿌리개로 물을 준다, 봄바람을 만나 허공에 맞닥뜨리는 물줄기가 파르르 흩날리며 화초 위로 떨어진다.
노란 아기 개나리와 작디작은 별꽃 등 마당에 비어있는 화분을 채워 줄 꽃모종 여러 종류를 고른다. 두세 개씩 같은 종류를 모아 큰 화분에 무리 지어 소담스레 심을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이르게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는 산호수 외에 버젓이 명찰을 달고 있건만 화초 이름조차도 다 모른 체 상자에 담는다. 귀퉁이 깨진 수키왓장에도 심고 네모난 암키왓장에 심으면 멋스러울 것이다. 빈 상자 가득히 오종종한 봄을 담아 양손에 들고 쉬엄쉬엄 갔던 길을 되돌아온다.
옆집 할머니네 담장 위에 걸터앉은 백목련은 이미 꽃잎을 다 열어 더러는 나무 아래 누워 고단함을 달래고 있다. 매화꽃은 바람에 날려가는 풍장이 서럽도록 아름답고, 목련꽃은 등불 켜듯 피어나 말기 암 환자처럼 고통을 다 바치고 펄썩 떨어진다는데… 그 고통이 아름다운 향기였었다니 목련꽃 다 지기 전에 고통으로 승화된 목련꽃차로 오늘, 이 봄날을 접어야 할까 보다.
화초 상자를 내려놓고 거실에 들어서는데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봄날의 대명사 같은 아기 얼굴이 인터폰 화면에 뜬다. 따따부따 알아듣지 못하는 봄빛 언어로 문 열라고 한다, 삼월처럼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돌 지난 손자다. 개미 딸기의 여린 속살을 닮은 내 손주가 다박다박 걸어 들어오는 봄날이다.
점괘
이필선
얼굴만 보고 남의 인생을 다 알아맞힌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했다. 밥을 먹으며 떠들던 수다로는 도저히 양이 덜 차서 끝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왔다. 다섯 명을 실은 차는 그 유명하다는 관상쟁이 점집을 향해갔다. 빛깔 좋은 가을 들판으로부터 불어오는 간들바람은 들뜬 기분을 한층 더 높이 띄웠다. 상기되어 쏟아내던 수다는 달리던 차를 붕붕 띄워 단박에 목적지에 도착하게 했다.
도시를 벗어난 시골의 오래된 아파트였다. 일반 아파트와의 차이는 덥지 않은 날씨에도 활짝 열어 놓은 현관에 즐비한 신발이 말해줬다. 들어서자마자 본 거실풍경이 산만했다. 커다란 나무 함지박을 사이에 두고 앉은 중년의 여자 셋이 수선스런 풍경의 주체였다. 세 여자 모두 물 날린 회색 절옷을 입고 있었다. 그중 한 여자의 길게 생긴 눈을 보았다. 얼굴만 보고 점을 쳐 준다는 관상쟁이는 아마도 저 여자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내가 먼저 점을 쳤다.
어질러진 거실에 우리도 엉덩이를 내빼고 앉았다, 이어서 점집을 안내한 친구가 두 개의 방에 순서대로 들어가 절을 하고 성의껏 시줏돈을 놓으면 된다 했다. 일행 중에 세 번째로 들어간 나도 절을 했다. 몇 번의 절을 해야 할지 몰라 삼보 귀의를 생각하며 삼배를 하고 나왔다.
늘 그렇듯 절을 할 때 첫 절은 아무 생각이 없다. 그러다 이왕이면 뭔가 간절한 마음이어야 할 것 같아 다시 자세를 갖춘다. 바람은 언제나 한 가지다. 지금처럼 마음이 변치 않게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안고 사는 크고 작은 아픔들은 누구나 갖고 사는 것일 터, 그마저 없애 달라면 과욕으로 알고 해결책을 주실 그분이 도리어 화를 줄 것만 같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되든 굳건하게 이겨낼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갖게 해 달라는 편이다.
큰 아이가 수능을 앞둔 고3 때였다. 수험생의 어미로서 바삐 절을 다니고 교회에 가서 두 손을 모으는 이웃 지기들을 보게 됐다. 덩달아 마음이 바빠진 나도 날을 잡아 마음이 가자는 대로 자장암 법당을 찾았다. 칼 돌이 삐죽이 나온 법당에서 몇 번인지 모르게 절을 했다. 절을 하며 내가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내 아이의 수능성적을 위해 평소보다 더 잘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다시 참회의 절을 하듯 무릎을 꿇었다, 늘 하던 대로 할 수 있도록 평정심을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불안한 마음을 거둬 가기를 바라는 겸허한 심정으로 법당 마룻바닥에 엎드렸다. 소원이란 모름지기 타인을 빗대지 않는, 오롯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눈이 긴 여자는 거실 벽에 걸어 뒀던 바지와 같은 색깔의 회색 조끼를 껴입었다. 플라스틱 소재의 초록색과 노란색의 긴 염주 두 줄을 목에 걸고 양팔에도 꼈다. 방에 다 들어가 절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 방을 택해 앉았는지 나오지 않았다. 일행 중 한 명이 주춤거리며 여자가 있는 방을 찾아 들어갔다. 거실에는 고추 함지박을 끼고 앉은 두 여자의 떠드는 소리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표출되지 못한 짜증은 점쟁이한테로 쏟아졌다, 이 산만한 가운데 무슨 수로 고요한 마음을 찾아내서 남의 인생을 점쳐준다는 것일까 싶었다. 재미로 달려간 것이지만 뭔지 모를 기대감이 높았던 까닭일 것이다.
잠시 후, 함께 갔던 두 친구가 점쟁이와 만나고 나왔다. 뒤에 친구는 묘한 표정으로 손나발을 만들어 대기하고 있는 일행에게 귓속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뒤돌아보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도 들어갔다.
서쪽으로 난 창을 등지고 앉은 그녀의 모습은 가을의 서향 빛을 안고 앉은 내게 형체만 보일 뿐, 이목구비조차 보이지 않았다. 성화에서나 본 예수의 등 뒤로부터 비친 빛을 흉내 낼 자리로는 괜찮다 싶은 느닷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늬바람이 희끗희끗한 여자의 귀밑머리를 흔들고 지나갔다. 어린이 장난감 같은 염주를 두 팔에 걸쳐서 늘어뜨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여자는‘흠흠’대며 그녀가 모신다는 할아버지를 모셔오는지 중간중간‘예 예’하며 대답을 하고는 했다. 자꾸만 그녀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내심 갸우뚱하고 있을 때였다.
대뜸 눈을 뜨고는 내 얼굴을 보더니 남쪽에 누가 있느냐며 돌아가신지 오래된 친정엄마가 도와줘서 무난히 산다고 말했다. 점쟁이의 그 한 마디로 좀 전에 의심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마치 그녀를 위하기라도 하듯이 남쪽에 친정과 시댁이 있다는 것까지 알려주고 있었다. 보살집도 절도 다니지 말라 했다, 호사다마라고 공연히 편한 것에 마가 끼게 되고 누군가 상처를 주게 돼 있다고도 했다. 게다가 양손이 그득하고 온 가족이 무사 무탈하다 했다. 기분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그래도 나보다 먼저 들어갔다가 오랫동안 있다 나온 두 친구와 달리 그새 되돌아 그 방을 나온다면 내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다 싶은 본전 생각이 슬며시 났다. 좀 더 구체적인 말을 듣고 싶은 마음으로 얼른 나오지 않고 뭉그적댔다. 점쟁이는 나의 욕구불만을 알아차렸는지 흠흠 거리며 그 여자가 모신다는 할아버지와의 교접을 더 시도했다.
나는 며칠 전에 외손주를 낳은 딸의 사주도 봐 달라고 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더라는 것까지를 가르쳐 주고 말았다. 힌트를 얻은 보살은 또 그렇게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했다. 그것으로 인생의 정답인양 기분이 달떠서 나왔다.
궂이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살아야 할 삶 중에는 숱한 일들이 다양하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건 누구나 스스로 점칠 줄 안다. 그 점집에서의 시간은 내 인생 중 찰나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총체적 인생을 다 본 것인 양 스스로 점을 치고 온 것이 되고 말았다.
잠깐 꿈속인 듯 어렴풋이 내 인생을 남에게 맡겨서 듣고 오기는 했지만 미래의 인생이 궁금하다면 현생을 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혜안을 지니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앞날 또한 여태 살았던 삶의 색깔과 무에 그리 다를 것이 있으랴. 설령 다르다 한들 지금보다 전혀 나을 것 없다면 어쩌겠는가. 여태 산 것보다 더 험난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허망하며 어떻게 감당할 일일까 싶다. 내 인생의 주체는 생을 다할 때까지‘내’가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애면글면 허방을 딛듯 미지에 시간에 휘청거리며 마중 나가 미리 염려하며 살 까닭이 없다.
함께 갔던 우리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각자의 사연이 담긴 문제지를 앞에 놓고 정답을 매기듯 웃음소리로 채점했다. 결론은 비슷한 내용의 중복적인 사용을 남발한 점쟁이라는 것이었다. 어디 가서 수다 내기 한턱거리로는 충분할 이야깃거리를 들고 온 것 외에 특별할 것 없는 점괘였다며 채점을 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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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수필, 울림의 글 쓸 수 있기를
이필선
새벽바람에 창문이 덜컹대면 공연히 바다로 가자며 그를 찾았습니다. 비 내리는 날에는 다짜고짜 솔숲 우거진 곳으로 가자고 보채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기 속살 같은 봄의 향기를 전하기도 하고, 마당에 산수국이 피기 시작했다며 손뼉을 치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습니다. 어느 때는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해 겉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사리 살짝 유치한 거짓말도 하고 앙탈을 섞기도 했습니다.
습자지같이 가벼운 나의 행동에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놔 버릴 수 있도록 여지를 줬습니다. 봄빛에 이끌려 달려간 절간에서, 가라앉은 고요와 다투던 날도 비질 잘된 대웅전 앞마당에다 시비 걸듯 낙서를 해 대던 날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무단히 쏘아보듯 내리꽂는 눈빛으로 그를 원망해도 언제나 담담하게 나를 바라봐 주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내게 타이르기 시작했습니다. 침착하라 했습니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온순하게 숨 쉴 줄 아는 지혜를 배우라 했습니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는 진리를 알고 생활 조건이 어떠하든 품격을 갖추어라 했습니다.
일상의 점과 선 하나도 예사로이 보지 말고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릴 줄 아는 지혜를 가져 사유하라 말했습니다. 우산도 없는데 천둥소리가 들리고 비 쏟아지는 소리가 심사를 어지럽게 할 때는 은유의 기쁨을 즐기며 비 그치길 기다리는 인내심을 키우라 했습니다. 그는 자학의 상처를 지닌 나를 치료하는 주치의 같은 존재였습니다.
회오리 물길 속에서 어지럽게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가벼운 가슴을 눌러 앉혀 봅니다. 담담한 모습의 나를 보이기로 하고, 그에게 내딛는 발걸음을 더디 하면서 그리움만큼의 시간을 제대로 숙성시키려 마음먹었습니다. 비 오는 날에 질척대는 진흙탕에 기분대로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을 어여삐 단장하고 장화를 신고 우산 모델처럼 우아하게 걸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내 삶의 조각들을 깊은 사유로 꿰맬 것입니다. 체험한 일상을 우릴수록 감칠맛 나는 사고와 은유로 더 많이 풀어낼 것입니다. 다소 혼란스럽거나 유치해서 건질 것 없는 몽매한 내 삶일지언정, 진실만을 오롯이 묶어 그의 품 안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것입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낱말 모으기를 합니다. 길을 걸으면서, 일을 하면서, 보이는 낱말을 줍고 들리는 단어를 담습니다. 마음이 둥둥 뜰 만큼 기분 좋은 날에 만난 숲 속 꽃은 문장이 되고, 이슬은 운율이 됩니다. 내가 슬픈 날, 바다는 심장이 되어 펄펄 날뛰는 파도가 되고 강은 눈물이 되어 나를 수필이라는 무대 위에 서게 합니다.
수필의 주인공은 ‘나’입니다. 나다운 수필을 쓰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진솔하되 지루하지 않고, 명랑하되 가볍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 수필은 세상 ‘내다보기’와 나를 ‘들여다보기’로 곧 내 삶을 사색하는 일이라 배웠습니다. 겉모습의 ‘나’와 내 속의 ‘타자’를 꺼내는 작업인 만큼 숨김없이 체험한 사건을 털어 내겠습니다. 나(我)의 욕구를 표출하는 도구라는 수필, 그 도구가 어느 독자에겐가 공감대가 되어 귀한 울림이 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제 글을 선택해주신 심사위원님과 지도해 주신 교수님께 무한한 감사인사 드립니다. 원하던 ‘수필세계’에 등단하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수필세계’에 걸맞은 작가가 되도록 스스로 채찍 하겠습니다.
아울러 쉽지만은 않은 길을 함께 하는 ‘에세이울산’ 문우님과 ‘에세이포럼’ 문우님들과의 인연에 고마움의 인사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든든한 지원군, 우리 가족! 사랑합니다.
첫댓글 부회장님! 당선 소감이 참 특별합니다. 앞으로도 그와 잘 해보셔요.
진솔하되 지루하지 않고, 명랑하되 가볍지 않은 이야기 기대하겠습니다.
어디까지 발전할지 모르는 부회장님의 문학으 장도에 박수를 보냅니다.
거듭 수필세계 신인상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예전부터 부족한 제 글을 칭찬해 주시고 변함없이 응원해 주셔서 큰 힘이 됩니다만 늘 그것에 대한 표현을 못하고 태연한듯 지내네요.
회장님, 두루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