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미 총독의 글씨로 새긴 목포근대역사관(2관)의 ‘팔굉일우비(1940년)’
‘팔굉일우’라는 용어의 본격 등장은 중일전쟁 직후의 시점
불은 하나나/ 밝음은 가득하외다./ 한 낱의 생각이/ 억만의 마음을 감기고/ 구원할 것입니다.//
종은 집속에 우나/ 온 땅에 퍼집니다./ 한 낱의 곡조가/ 만 나라의 걸음을/ 어우를 것입니다.//
한 낱의 생각이/ 예부터 있고/ 한 낱의 이상이/ 기어코 올 것입니다./ 그 깊이를 모릅니다./ 그 넓이를 모릅니다,/ 그 높이를 모릅니다,/ 그 멀기를 모릅니다./ 모르도록 그 나타남이 어수선하외다.//
시방 우리는 총을 들고/ 시방 우리는 칼을 잡고/ 시방 우리는 싸우고/ 시방 우리는 문흡니다./ 그러나 나중은 총을 거두리라./ 칼을 꽂으리라./ 사랑이 다스리리라.//
혹은 웃을 것이고/ 혹은 뮐 것이고/ 혹은 막을 것입니다./ 마는 웃는 이는 놀랄 날이,/ 뮈는 이는 반길 날이,/ 막는 이는 업델 날이/ 머지 안하외다.//
불은 하나나/ 억만 등을 켭니다./ 생각은 하나나/ 억만 구원을 이룹니다.//
한 낱의 생각이/ 예부터 있고/ 기어코 올 것이외다./ 음을 새기지 못합니다./ 뜻을 풀지 못합니다./ 아직 우리는 알기보다도/ 바랄 뿐이외다./ 우리의 아들들은 알 것이외다./ 우리의 손자들은 누릴 것이외다.//
아직 우리는 바랄 뿐이외다./ 한 낱의 생각을./ 한 낱의 광명을.//
이것은 『삼천리』 1941년 1월호에 게재된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제목의 친일시이다. 여기에 나오는 ‘한 낱의 생각’이나 ‘한 낱의 이상’, 그리고 ‘한 낱의 곡조’와 ‘한 낱의 광명’은 모두 언젠가는 기어코 달성되기를 기원하고 또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는 팔굉일우의 이상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글의 작자는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이며 그의 창씨명인 마츠무라 코이치(松村紘一)는 ‘팔굉일우’에서 그대로 따온 흔적이 역력하다.
이 용어는 일본의 조국정신(肇國精神, 건국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팔방(온 세상)이 하나의 집을 이뤄 천황의 치세에 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출처는 『일본서기(日本書紀)』 권제3(卷第三) ‘신무천황(神武天皇; 진무천황)’ 기미년(己未年, 기원전 662년) 3월 정묘조(丁卯條)에 나오는 이른바 ‘카시하라(橿原) 전도(奠都; 도읍을 정하는 것)의 대조(大詔)’이다.
여기에는 “兼六合以開都, 掩八紘而爲宇 不亦可乎”라는 구절이 있으며, 이는 “육합(六合, 천지사방)을 아울러 도읍(都邑)을 열고, 팔굉(八紘, 사방팔방)을 덮어 집으로 삼으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정도의 뜻으로 풀이된다. 바로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 ‘팔굉위우(八紘爲宇, 핫코이우)’이며, 다시 1904년에 이르러 일련종(日蓮宗) 계통의 재가불교운동가인 타나카 치가쿠(田中智學)에 의해 ‘팔굉일우(八紘一宇, 핫코이치우)’라는 표현이 창안되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팔굉일우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널리 보급된 때는 1937년에 일어난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직후의 시점이었다. 식민통치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시체제기의 도래와 함께 이러한 시국(時局)의 변화에 대처할 각오와 결심을 단단하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뒷받침할 표어(標語)나 구호(口號) 같은 것이 매우 긴요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매일신보』 1938년 3월 15일자에 수록된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성지(聖旨), 보급철저(普及徹底)에 주력(注力), 본부(本府)에서 통첩발송(通牒發送)」 제하의 기사에는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운동(國民精神總動員運動)’의 확산과 맞물려 이 시기에 ‘팔굉일우’의 관념이 전면에 부각되게 되는 배경이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총독부(總督府)에서는 내(來) 4월 3일의 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를 기(機)로 정부(政府)와 상호응(相互應)하여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을 실시(實施)하기로 되었는데 시(時) 마침 반도시정사상(半島施政史上) 획기적 시조(劃期的 施措)인 개정 조선교육령(改正 朝鮮敎育令) 병(並) 육군특별지원병제도(陸軍特別志願兵制度)의 실시기념축하회(實施記念祝賀會)가 전선(全鮮) 일제(一齊)히 거행(擧行)될 일(日)임에 감(鑑)하여 차일(此日)을 기(期)하여 신무천황 즉위건국(神武天皇 卽位建國)의 대조중(大詔中)의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성지(聖旨)를 천명(闡明)하여써 반도(半島) 이천삼백만(二千三百萬) 민중(民衆)에게 아 제국 조국(我帝國 肇國)의 대이상(大理想)을 보급철저(普及徹底)케 함은 견인지구(堅忍持久), 장기대전(長期對戰)의 시국(時局)에 처(處)할 국민(國民)의 각오(覺悟)와 결심(決心)을 더욱 강고(强固)케 하는 데에 또 가장 유의의(有意義)함으로 좌(左)의 신무천황 조칙중(神武天皇 詔勅中)의 성지(聖旨)를 보급철저(普及徹底)케 하기로 되어 14일 제1차(第一次) 소속관서(所屬官署) 각공사립전문학교(各公私立專門學校) 병(並) 관계 각 방면(關係 各方面)에 각각(各各) 통첩(通牒)을 발(發)하였다.
부(夫, 무릇) 대인(大人)의 제(制)를 입(立)함에 의(義)이 필(必)히 시(時)에 수(隨)한다. 구(苟, 만약)히 민(民)에 이(利)이 유(有)하면 무엇이 성조(聖造)에 방(妨)하리요, 차(且) 당(當, 마땅)히 산림(山林)을 피불(披拂)하여 궁실(宮室)을 경영(經營)하고 공(恭, 공손)히 보위(寶位)에 임(臨)하여써 원원(元元, 백성)을 진(鎭)할지니라. 상(上)은 즉(則) 건령(乾靈, 하늘의 신)의 국(國)을 수(授)하옵신 덕(德)에 답(答)하고 하(下)는 즉(則) 황손(皇孫)의 정(正, 바른 길)을 양(養)하옵신 심(心)을 홍(弘)할지라. 연후(然後)에 육합(六合, 천지사방)을 겸(兼)하여써 도(都)를 개(開)하고 팔굉(八紘, 사방팔방)을 엄(掩)하여 우(宇)를 삼음이 또한 가(可)치 않으냐.
그리고 우(右) 성지(聖旨)는 금차(今次) 지나사변(支那事變)의 의의(意義)와 관련(關聯)시키어 평이(平易)히 해설(解說)하여 혹(或)은 학생(學生) 생도(生徒) 아동(兒童)에 대(對)한 훈화(訓話) 혹(或)은 각종 인쇄물(各種 印刷物)과 라디오 혹(或)은 각종단체(各種團體) 등의 활동(活動)을 촉(促)하여 다만 4월 3일의 1일(日)만에 지(止)치 아니하고 애국일(愛國日) 기타(其他) 모든 시설(施設)을 이용(利用)하여 차(此) 주지철저(周知徹底)를 기(期)하려는 것으로 본부 당국(本府 當局)에서는 목하(目下) 예의(銳意) 우 자료(右資料)를 작성중(作成中)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 당시는 때마침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 교육방침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제3차 조선교육령(개정)이 막 시행되려 했고, 더구나 침략전쟁의 와중에 부족해진 병력자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긴급 조달하기 위한 응급조치의 하나로 육군지원병제도가 강요되던 찰나였다. 특히 「육군특별지원병령」의 경우에 그 시행일자가 1938년 4월 3일에 맞춰져 있었는데, 이날은 곧 ‘초대 천황’인 신무천황의 제일(祭日)에 해당하며 그러기에 건국정신으로서 팔굉일우의 취지가 더욱 강하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중일전쟁 1주년 기념일에 해당하는 1938년 7월 7일에 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 朝鮮聯盟) 발회식(發會式)에서도 팔굉일우의 구호를 외친 흔적이 확인된다. 곧이어 7월 24일에 경성부민관 중강당에서 개최된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 全鮮思想報國聯盟, 전향자단체)의 결성식에서도 역시 팔굉일우의 기치를 내건 장면이 연출된 바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몇 년 이후인 1940년에 맞이하게 되는 이른바 ‘황기(皇紀, 기원) 2600년’을 앞두고 팔굉일우란 말의 사용빈도는 다시 한 번 크게 높아지게 된다. 이에 관한 갖가지 봉축행사와 기념사업이 각처에서 추진되면서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팔굉일우를 상징하는 기념물들이 곳곳에서 속출하게 되었는데, 일본 미야자키현(宮崎縣)에 건립된 ‘팔굉지기주(八紘之基柱, 아메츠치노모토하시라; 天地基柱)’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은 ‘기원 2600년’ 봉축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었으며, 120척(尺; 36.4미터) 높이의 돌기둥 전면에는 치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秩父宮雍仁親王, 천황의 동생)의 휘호로 ‘팔굉일우’의 큰 글씨가 새겨졌다. 이러한 거대 기념물의 바닥에는 1,789개의 절석(切石)으로 이뤄진 초석(礎石)이 깔렸는데, 이것들은 일본 전역의 각처와 일본군의 점령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남미(南美)와 독일(獨逸)에서 보내온 돌로 — 팔굉일우의 뜻을 상징하듯이 — 한 데 엮어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서도 각 지역마다 이곳에 사용될 기석(基石)의 헌납이 잇따랐으며, 예를 들어 『조선신문』 1939년 5월 17일자에 수록된 「팔굉지기주(八紘之基柱), 충남(忠南)에서 화강석 기증(花崗石 寄贈)」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모집과정의 한 사례가 다음과 같이 채록되어 있다.
[대전(大田)] 기원 2600년 기념사업으로 야마자키현봉축회(宮崎縣奉祝會)에서는 금회(今回) ‘팔굉지기주’를 건설하기로 되어 동 사업의 찬동방(贊同方)을 총독부(總督府)에 신출(申出)함에 따라 총독부로부터 각도(各道)에의 통첩(通牒)에 근거하여 충남도(忠南道)에서도 좌(左)의 9단체(團體)에서 동 용재(同用材)로서 화강석(花崗石) 각(各) 1본완(本宛, 본씩)을 기증(寄贈)하는 것으로 되었다.
1. 충청남도(忠淸南道)
2. 동 교육회(同敎育會)
3. 국정총(國精總; 국민정신총동원) 충남연맹(忠南聯盟)
4. 조선사회사업협회(朝鮮社會事業協會)
5. 조선산림회 충남지부(朝鮮山林會 忠南支部)
6. 충남도농회(忠南道農會)
7. 충남도수산회(忠南道水産會)
8. 일적 조선본부(日赤 朝鮮本部;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충남지부(忠南支部)
그리고 『경성일보』 1939년 6월 28일자에 수록된 「팔굉기주(八紘基柱) 건설에 충북(忠北)도 석재 기부(石材 寄附)」 제하의 기사에도 추풍령에서 채취한 화강석을 헌납한다는 소식이 들어있다.
[청주(淸州)] 충북도(忠北道)에서는 기원 2600년 봉축기념사업으로서 야마자키현봉축회(宮崎縣奉祝會)에서 건설하는 팔굉(八紘)의 기주(基柱) 재석(材石)으로 영동군 황금면 추풍령(永同郡 黃金面 秋風嶺)의 스에나가 타카키(末永宜基) 씨 소유인 추풍령석재채취장산(秋風嶺石材採取場産) 화강암(花崗岩; 크기 세로 약 1척 5촌, 가로 약 2척, 폭 약 5촌)을 기증(寄贈)하기로 되었다.
한편, 저 멀리 목포근대역사관 2관(옛 동양척식 목포지점)의 진열공간에도 기원 2600년 봉축행사가 남겨놓은 기념물 하나가 남아 있다. 지난 2011년 11월 12일에 목포여자중학교 운동장의 토취공사를 하던 도중에 국기게양대 앞에서 노출된 사각기둥 형태의 ‘팔굉일우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비석의 앞쪽에는 조선총독이자 육군대장의 신분이던 미나미 지로가 쓴 글씨라는 표시가 또렷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목포여자중학교에는 이 비석의 대석(臺石, 받침돌)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지금은 ‘진선미(眞善美;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라는 내용을 새긴 ‘교훈비(校訓碑)’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이 돌의 전면에도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목포공립(木浦公立; 나머지 부분은 ‘목포공립고등여학교’로 추정)”, “직원(職員)”, “생도(生徒)” 등 머리 부분 쪽의 글씨 일부만 판독이 가능하고 그 아래 매몰된 부위에 새겨진 내용은 직접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다.
팔굉일우비(목포근대역사관 2관)의 비문 내용 팔굉일우비(목포근대역사관 2관)의 비문 내용
(전면) 八紘一宇/ 陸軍大將 南次郞書[팔굉일우/ 육군대장 미나미 지로 씀] (후면) 皇紀二千六百年 昭和十五年十月二十七日 建設[황기 2600년 소화 15년(1940년) 10월 27일 건설] |
(*) 목포여자중학교에 잔존한 대석(臺石)의 전면에는 “목포공립(木浦公立)”, “직원(職員)”, “생도(生徒)” 등의 글씨만 노출(매몰 부위는 판독 불능) |
이밖에 전라남도 해남의 마산초등학교 구내에 팔굉일우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지난 2017년에 확인된 바 있다. 이 비석의 후면에 ‘마산공립국민학교동창회(馬山公立國民學校同窓會)’라는 표시가 남아 있는데, 일제가 ‘소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일괄 변경한 때가 1941년 4월 1일이었으므로 이것은 그 이후 시기에 제작된 비석이라는 점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경기도 용인의 친일상징물전시관(용인중앙시장)에 배치되어 있는 ‘팔굉일우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사례의 하나이다. 이 비석은 양지공립보통학교(1911년 9월 1일 공립학교 개편)의 개교 3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코자 1941년 9월에 동창회 후원회가 만들어 세운 것이며, 글씨는 친일귀족 송종헌(宋鐘憲, 1876~1949) 백작[창씨명은 노다 쇼켄(野田鐘憲)]이 썼다.
팔굉일우비(실물)의 잔존 사례
명칭 | 건립시기 | 현 소재지 |
(목포) 목포공립고등여학교 팔굉일우비 | 1940.10 | 목포근대역사관(2관) |
(칠곡) 가산공립심상소학교 팔굉일우비 | 1940 | 가산초등학교 |
(용인) 양지공립국민학교 팔굉일우비 | 1941.9 | 용인 친일상징물전시관 |
(해남) 마산공립국민학교 팔굉일우비 | 1941.4(이후) | 마산초등학교 |
이밖에 실물자료의 잔존 여부는 미확인 상태이지만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釜山港公立高等女學校; 옛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의 제14회 졸업기념사진첩(1944년 3월)인 『추상(追想) 2604』(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를 통해 이 학교의 구내에도 팔굉일우비(1941년 1월 1일 제막)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비석의 전면 양쪽에는 “황기 2600년”을 맞이하여 “카시하라신궁건국봉사대(橿原神宮建國奉仕隊) 참가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는 표시가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부산일보』 1940년 3월 3일자에 수록된 「카시하라신궁(橿原神宮) 봉사근로(奉仕勤勞)의 기념비(記念碑), 부산항고녀교(釜山港高女校)에 건립, 영구(永久)히 적성(赤誠)을 전하는 팔굉일우(八紘一宇)」 제하의 기사에는 이 비석의 건립경위가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기원(紀元) 2600년을 봉축하는 일억민초(一億民草)의 적성(赤誠)은 불타올라 성역(聖域) 카시하라신궁 외원 그라운드(橿原神宮 外苑 グラウンド) 건설공사에 즈음하여 전국학생근로봉사대(全國學生勤勞奉仕隊)가 참가(參加)했는데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釜山港公立高等女學校) 3년생(年生, 현 4년생) 81명(名)은 작년(昨年) 4월 18일 여기에 참가(參加) 토운(土運) 및 기타 한(汗, 땀)의 봉사를 행하여 훌륭한 반도여성(半島女性)의 의기(意氣)를 앙양(昂揚)했다. 동교(同校)에서는 이 쾌거(快擧)를 영구히 후배(後輩)에 대한 지침(指針)으로 하는 의미(意味)에서 기념비(記念碑)를 건립중(建立中)이던 바 작년(昨年) 12월 22일 준성(竣成)을 보았으며, 빛나는 황기(皇紀) 2600년의 정월(正月) 1일, 전교생(全校生) 참렬하(參列下)에 성대한 제막식(除幕式)을 행하였다. 기념비는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새긴 천연석(天然石)으로 교정(校庭)에 삼엄(森嚴)한 공기(空氣)를 빚으며 조석(朝夕)으로 생도(生徒)의 경건(敬虔)한 배례(拜禮)의 자세가 눈에 띄고 있다. [사진은 기념비 = 진해만요새사령부 검열제(鎭海灣要塞司令部 檢閱濟)]
이와는 별도로 전주고등여학교(全州高等女學校)의 교정에도 역시 기원 2600년 기념사업으로 미나미 총독의 글씨를 새긴 ‘팔굉일우비’가 건립되어 1940년 12월 4일에 제막식이 거행된 사실이 신문기사로 확인된다. 또한 인천송림공립심상고등소학교(仁川松林公立尋常高等小學校)에서도 국민총력 조선연맹(國民總力 朝鮮聯盟)의 사무총장이자 20사단장 출신의 육군중장인 카와기시 분자부로(川岸文三郞)의 휘호를 받아 새긴 ‘팔굉일우비’가 1940년 12월 21일에 제막되었다는 보도내용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열거한 사례들이 해방 이후에 어떻게 처리 — 파쇄되었다거나 혹은 매몰되었다거나 하는 —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목포여자중학교나 양지초등학교의 매몰 처리된 팔굉일우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 학교에서도 어느 날 홀연히 폐기된 비석의 잔편들이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팔굉일우’의 뜻풀이와 관련하여 이것의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적당한 ‘영어표현’이 없다고 하여 한때 논란이 된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40년 2월 16일자에 수록된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자의(字義), 적당(適當)히 영역불능(英譯不能)」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등장한다.
[도쿄전화(東京電話)] 기원 이천육백년(紀元 二千六百年)과 함께 급(急)짝스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팔굉일우(八紘一宇)란 말은 아 건국정신(我 建國精神)을 표시(表示)하는 자(者)로서 여러 가지 경우에 사용(使用)되지만 해석(解釋)이 구구(區區)하여 의회(議會)에서도 누누(屢屢)히 문제(問題)가 되었고 13일 예산총회(豫算總會)에서는 마츠우라 문상(松浦文相)이, 또 14일에는 츠츠미 야스지로(堤康次郞) 씨의 질문(質問)에 답(答)하여 요나이 수상(米內首相)이 “굉대무변(宏大無邊)의 어신덕(御神德)을 편(遍)히 천하(天下)에 홍포(弘布)하려는 대어심(大御心)이라”고 명확(明確)히 하여 자(玆)에 자의(字義)의 고정해석(固定解釋)이 나왔는데 여하간(如何間) 의장(議場)에서 이 문제(問題)가 나온 것은 철도성 관광국(鐵道省 觀光局) ‘팜푸렛트’에 ‘싸 ― 유니바스 원 파미리이 프린시풀(The Universe One Family Principle)’이라고 영역(英譯)된 데서 발단(發端)된 것이다.
금후(今後) 이 문구(文句)를 외국역(外國譯)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 터인가? 관광국(觀光局)에서는 카타오카 국장(片岡局長)이 “그런 번역(飜譯)은 사실(事實)로 적당(適當)치 않을는지 모르나 팔굉일우(八紘一宇)란 말에 그대로 적당(適當)한 영어(英語)가 없으므로 우선(于先) 그렇게 역(譯)한 것이니 역어(譯語)는 그대로 사용(使用)할 경우에 오해(誤解) 없도록 주석(註釋)을 부(附)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 동대 명예교수(東大 名譽敎授) 이치카와 산키(市河三喜) 박사(博士)도 팔굉일우(八紘一宇)란 말을 간단(簡單)히 표현(表現)할 역어(譯語)는 발견(發見)되지 않는다고 영어학계(英語學界)의 태두(泰斗)도 수긍(首肯)하는 터인데 여하간(如何間) 심원(深遠)한 우리네 이상(理想)을 외국인(外國人)에게 알리기는 번역(飜譯)으로는 좀처럼 어려운 문제(問題)이다.
여기에 나오는 “굉대무변의 어신덕을 편히 천하에 홍포하려는 대어심이라 …… 운운”하는 구절은 결국 “세상 전부를 천황의 치세에 들게 만든다”는 소리로 들릴 따름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일제가 침략전쟁 시기에 그토록 강조했던 ‘팔굉일우’의 정신에 입각한 세계평화확립이라는 말은 — “위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 우리는 하나)”라거나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와 같은 개념이 아니라 — 그야말로 그들이 전쟁에 승리하여 모두가 일본천황의 지배 하에 들어있는 그러한 세상을 가리킨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 이 글은 『민족사랑』 2024년 11월호에 게재하였던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각주 01) 이 시의 내용은 1943년에 박문서관에서 묶어져 나온 마츠무라 코이치(松村紘一, 주요한)의 시집 『手に手を(손에 손을)』, 21~27쪽에 일본어로 번역된 것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살펴보면, 이 글에 나오는 “문흡니다”는 “무너트리다(찢어버리다)”의 뜻이고, “뮐”과 “뮈는”이라는 것은 “미울”과 “미운”을 나타내는 표현인 듯하다. 또한 “업델”은 “기뻐 맞이하는”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주 02)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③』(돌베개, 1993)에 수록된 ‘주요한’ 항목(집필자는 김윤태 민족문학사연구소 연구원)을 보면, “(44쪽) 주요한의 창씨명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이다. 여기서 고이치(紘一)란 일본의 조국(肇國)이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이름조차도 일본 정신에 철두철미하게 따르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일까?”라는 구절이 나온다.
각주 03) 원래 『일본서기』에는 ‘팔굉일우’라는 표현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이 말은 타나카 치가쿠(田中智學, 1861~1939) [본명은 타나카 하노스케(田中巴之助)]가 러일전쟁 당시에 출정병사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제작간행한 『世界統一の天業(세계통일의 천업)』(1904)이라는 책자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카시하라(橿原) 전도(奠都; 도읍을 정하는 것)의 대조(大詔)’에 나오는 “…… 兼六合以開都, 掩八紘而爲宇”라는 구절을 원래의 뜻에 가장 부합하도록 고쳐 ‘팔굉일우(八紘一宇)’와 ‘육합일도(六合一都)’라는 신조어(新造語)를 탄생시켰다.
각주 04) 『매일신보』 1938년 7월 8일자에 수록된 「총후신민(銃後臣民) 의기백배(意氣百倍), 정신총동원연맹 발회식 장엄」 제하의 기사를 보면, 발회식 당일에 만장일치로 “동양평화를 확보하여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을 세계에 앙양함은 제국 부동의 국시(國是)이다. 우리는 이에 일치단결 국민정신을 총동원하여 내선일체 전능력을 발향하여 국책의 수행에 협력하여써 성전궁극의 목적을 관철하기를 기함.”이라는 내용의 연맹선언문(聯盟宣言文)의 채택된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각주 05) 『매일신보』 1938년 7월 25일자에 수록된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기하(大旗下) 사상보국(思想報國)의 대진군(大進軍), 시국대응 전조선 전향자(時局對應 全朝鮮 轉向者) 육탄(肉彈)으로 참가(參加), 금일 연맹 결성 “총동원(總動員)”에 가입(加入)」 제하의 기사에는 이날 채택된 선언문의 요지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우리 일본제국 두 개의 세계사적 임무에 당면하였다. 그 하나는 파괴적인 구미사상(歐米思想)으로부터 전동양의 민중을 해방 또는 방위하는 것, 또 하나는 일본, 만주, 지나를 한 덩어리로 묶어가지고 아세아(亞細亞)에 대한 열강의 침략적 쟁탈전을 근절케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세계 영원의 평화를 건설하는 것이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도정신(皇道精神)의 이상이 일청(日淸), 일로(日露)의 전쟁을 비롯하여 이번 지나사변도 이 정신의 나타남이다. …… (하략)”
각주 06) 일본 미야자기현 팔굉대(八紘臺)에 건립된 ‘팔굉지기주(八紘之基柱)’는 1939년 5월 20일에 기공식, 1940년 4월 3일(신무천황제일)에 제막식 및 정초식, 그리고 그해 11월 25일에 낙성식이 거행되는 과정을 거쳐 준공되었다. 이 거대기념물의 설계자는 히나고 지츠조(日名子實三, 1892~1945)이며, 공사청부(工事請負)는 오바야시구미(大林組)가 맡아 수행하였다.
각주 07) 목포여자중학교 교훈비의 받침돌과 관련하여 『(전라남도교육청) 학교 내 친일잔재청산 최종보고서』(2019년 12월), 20쪽을 보면 “받침돌에는 교직원과 학도, 학부형이 뜻을 모아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정리한 구절이 나와 있다.
각주 08) 기존의 ‘소학교령’이 ‘국민학교령(國民學校令)’으로 대체되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제국관보』 1941년 3월 1일자에 게재된 칙령 제148호 「소학교령 개정(국민학교령 전환)」(1941년 2월 28일 공포, 1941년 4월 1일 시행)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은 그대로 다시 『조선총독부관보』 1941년 3월 31일자에 게재된 칙령 제254호 「조선교육령(개정)」(1941년 3월 25일 공포, 1941년 4월 1일 시행)에 반영되어 있다.
각주 09) 지난 2008년에 양지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발견되어 그 존재가 드러난 이 비석의 전면에는 “八紘一宇/ 從三位伯爵野田鐘憲 謹書(팔굉일우/ 종3위 백작 노다 쇼켄 삼가 씀)”이라는 내용이 있고, 우측면에는 “開校三十周年紀念/ 昭和十六年九月一日/ 同窓會 後援會 謹呈(개교 30주년 기념/ 소화 16년 9월 1일/ 동창회 후원회 삼가 드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각주 10)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카시하라신궁(橿原神宮)은 초대 진무천황(神武天皇)과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황후(媛蹈韛五十鈴媛皇后)를 제신(祭神)으로 삼는 곳이며, 기원(紀元) 2600년이 되는 때를 한 해 앞두고 1939년에 이곳의 신역 확장(神域 擴張)과 외원정지사업(外苑整地事業)을 벌일 때 이 작업에 자원하여 참여한 이들을 일컬어 ‘카시하라신궁건국봉사대(橿原神宮建國奉仕隊)’라고 하였다. 『조선신문』 1939년 12월 1일자에 수록된 건국봉사대의 해산식 관련 기사에는 이 당시 일본 전역에서 몰려든 봉사단체가 7,184곳에, 총인원이 1,312,716인에 달했다고 적고 있다.
각주 11) 이에 관한 기록으로는 『매일신보』 1940년 12월 6일자에 수록된 「2600년 기념비(記念碑), 전주고녀(全州高女)에서 제막(除幕)」 제하의 기사가 남아 있다.
각주 12) 이에 관한 내용은 『경성일보』 1940년 12월 24일자, 「팔굉일우탑(八紘一宇塔) 제막(除幕), 인천송림교(仁川松林校)를 장식하다」 제하의 기사와 『조선신문』 1940년 12월 24일자, 「팔굉일우 기념탑(八紘一宇 記念塔), 인천송림교(仁川松林校)에서 제막식(除幕式)」 제하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각주 13) 실제로 1940년 7월 22일에 출범한 제2차 코노에 내각(第二次 近衛內閣)은 “황국(皇國)의 대이상(大理想)인 팔굉일우의 대정신(大精神)에 투철하며 대동아건설(大東亞建設)에 의해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기본국책(基本國策)의 근본방침으로 내세웠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경성일보』 1940년 7월 25일자,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大精神)기 기초하여 세계평화확립(世界平和確立)에 기여(寄與), 코노에 신내각(近衛新內閣) 기본국책(基本國策)의 요점(要點)」 제하의 기사와 『조선신문』 1940년 7월 27일자, 「기본국책(基本國策) 대강(大綱) 완성,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大精神)으로 대동아(大東亞)의 건설(建設)에 매진(邁進), 일독이 추축(日獨伊 樞軸)을 더욱더 강화(强化)」 제하의 기사를 각각 참조할 수 있다.
01 『경성일보』 1938년 3월 15일자에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실시에 즈음하여 조선총독부가 통첩(通牒)을 내려 이른바 ‘신무천황’의 건국정신인 ‘팔굉일우’의 성지를 ‘지나사변(즉, 중일전쟁)’의 의의와 관련시켜 보급철저에 주력하리라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02 1938년 7월 24일에 경성부민관 중강당에서 개최된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연맹(전향자단체)의 결성식 장면이 소개된 『매일신보』 1938년 7월 25일자의 보도 사진이다. 단상의 양쪽에는 ‘사상보국(思想報國)’과 ‘팔굉일우(八紘一宇)’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의 모습이 또렷이 포착되어 있다.
03 기원 2600년 봉축사업의 하나로 일본 미야자키현에 건립된 ‘팔굉지기주(八紘之基柱, 아메츠치노모토하시라; 天地基柱)’의 전경 사진이다. 기단부의 초석(礎石)은 팔굉일우의 이상을 상징하듯이 전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일본인들이 헌납한 1,789개의 석재를 끌어 모아 쌓아 올렸다. [『久留島武彦(쿠로시마 타케히코), 『神武天皇の御東征(신무천황의 어동정)』, 1943]
04 『경성일보』 1939년 7월 31일자에는 애국부인회 전남지부에서 ‘팔굉지기주’에 사용될 기석(基石)을 헌납하기에 앞서 광주신사에서 수불식(修祓式)을 거행하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이 당시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애국부인회 이외에도 전라남도, 도농회, 도교육회, 연합청년단, 교화단체연합회, 방공협회 등에서도 1개씩의 돌을 헌납하기로 되어 있었다.
05 지난 2011년에 목포여자중학교 운동장에서 발굴 수습되어 목포근대역사관(2관)에 진열되어 있는 ‘팔굉일우비’의 모습이다. 1940년 10월 27일 당시 목포공립고등여학교 교정에 세워졌던 것으로, 전면의 글씨는 미나미 총독이 썼다.
06 양지공립국민학교의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조성된 ‘팔굉일우비’(1941년 9월 1일 건립)의 모습이다. 지난 2008년에 양지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발견되어 그 존재가 드러난 이 비석은 현재 경기도 용인의 친일상징물전시관에 배치되어 있으며, 전면 글씨는 친일귀족 송종헌이 휘호한 것이다.
07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의 졸업앨범인 『추상(追想) 2604』에 수록된 ‘팔굉일우비’의 모습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황기 2600년을 맞이하기에 앞서 카시하라신궁건국봉사대(橿原神宮建國奉仕隊)에 참가한 기념으로 세워졌다는 표시가 남아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08 『경성일보』 1940년 12월 24일자에 소개된 인천송림공립심상고등소학교의 ‘팔굉일우비’ 제막 당시의 모습이다. 이것 역시 기원 2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건립되었으며, 전면의 글씨는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사무총장이던 카와기시 분자부로(川岸文三郞)가 썼다. 현재 이 비석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