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강세황(1713~1791)이 40세때인 1751년 10월에 도산서원의 실경을 그린 작품이다.
보물 제 522호 57.7 0*138.5cm 이며 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예안(禮安)의 도산 (陶山)과 퇴계(退溪)일대의 전경을 부감법(府瞰法)으로 그렸다.
뛰어난 화취(畵趣)로 원근 개념과 현장감을 잘 살렸으며,지명들을 삽입해 지도적 성격도 갖추었다. 작자의 제발부분(題跋部分)내용은 성호 이익(1681~1763)이 병중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도산도를 그리도록 특별히 당부함과 퇴계의 업적,세상에 있는 도산도에 관한 논의, 자신의 소감, 현지답사 내용 등이다.
문화재청(도산서원도)
종 목 보물
지정번호 0522-00-00-00
문화재명 도산서원도 (陶山書院圖)
분류 시대화
수량 1폭
지정일 1970.08.27
소재지 대구시 수성구 황금1동 산41 국립대구박물관
시대 조선 영조 33년(1757)
재료,재질 지류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대구박물관
관리사무소(도산서원도)
화가명 : 李徵
작품년대 : 17세기
규격 : 130 * 29.5
소장처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내용 : 본 채색화는 조선조 유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이 학문을 강론하였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소재의 도산서원 일대를 나타낸 그림이다.
이 도산서원도는 17세기경에 화가 이징이 당시 전해오는 도산도를 보고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전래 경위를 살펴보면, 18세기 초 경상도 안동에 거주하였던 延安人 李萬寧(字:和國 1690-1729)이 1716년(肅宗42) 이징의 그림을 畵帖으로 만들어서 후대에 전하였다.
본 대학에서 1982년 6월에 이 그림을 입수하여 童山圖書館에 소장하고 있다.
퇴계 이황 선생은 연산군 7년(1501)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여 선조 3년(1570)에 돌아가셨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만대의 정신적 사표(사표)가 되었다.
선생은 명종 16년(1561)에 도산서당을 세웠고 사후 4년만인 선조 7년(1574)에 문인과 유림이 서원을 세웠으며 선조 임금은 한석봉 친필인 도산서원의 현판을 사액(사액)하였다. 1970년에 정부에서는 서원을 보수 정화하여 성역화하였다.
주요 저서로 계몽전의, 성학십도,도산십이곡, 주자서절요, 심경후론, 활인심방, 예안향약, 자성록 등이 있다.
1. 해동의 유종(儒宗)
퇴계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조선왕조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율곡(栗谷, 1536-1584)은 퇴계를 가리켜, "선생은 세상의 유종(儒宗)으로서, 조정암 뒤로는 서로 비견할 사람이 없다. 그 재주와 기국(器局)은 혹 정암에 못 미칠지 모르겠으나, 의리(義理)를 탐구하여 정미한 것까지 드러내는 데서는 정암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 일찍이 중종 당시 "지치주의(至治主義)", 즉 왕도 정치의 이상을 누구보다도 갈구하고, 그 실현을 위해 목숨가지 바침으로써 조선 왕조 "사림(士林)정치"의 대표자로 손꼽히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도 경세(經世)의 측면에서는 몰라도 학문의 측면에서는 퇴계에 미치지 못한다 는 것이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언행총록(言行總錄)],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실기(實記)], 문봉(文峰) 정유일(鄭惟一)의 [언행통술(言行通述)] 등에서도 한결같이 퇴계를 가리켜 "동방의 일인(一人)"이라 했다. 물론 이들의 평은 제자로서 스승의 학덕을 기리려는 뜻이 첨가 된 것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려운 만큼 그 객관적 신빙성이 약할 수도 있으나. 퇴계와 그의 학문을 이와 같이 칭송하고 평가한 기록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한말 개화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위암(偉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처음으로 한국의 유학사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퇴계에 대하여 "그 정학(正學)을 천명하고 후생을 개도함으로서 '공맹 정주(孔孟程朱)의 도'를 환히 우리 동방에 다시 밝힌 사람은 오직 선생 한 분뿐이라"고 했고,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역시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여 "불교 사상에 원효가 대표자라면 유교 사상에 퇴계가 대표자일 것은 거의 이의가 없는 바이다. 말하자면 퇴계 이전까지는 유교가 오히려 정치나 사장(詞章)의 여습(餘習)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것이, 퇴계의 출현을 기다려 완전한 철학의 성립을 보게 되었으며, 예론의 발달도 또한 퇴계 이후에 있었은즉 퇴계로써 반도 유종(儒宗)을 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라 하여 한국유학에서 퇴계가 차지하는 위치를 불교에서 원효가 차지하는 위치에 비교하고 있다.
퇴계 및 그의 학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한국인의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 점은 많은 일본 학자들의 견해 속에서도 발견된다. 일찍이 수고산은
"공자의 도는.......송의 정주 두분에 이르러 깊이 탐구됨에 다라 비로소 찾아졌다. 그 학은 조선의 이 퇴계에게 전하여진 다음, 다시 (퇴계로부터) 우리나라(日本)의 산기암재에게 전하여졌다."
고 퇴계를 정주에 이어 유학의 정통을 잇는 한국 유학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면서, 일본의 유학이 이러한 퇴계에 의하여 발달하였음을 밝힌 일이 있다. 도변예재는 "퇴계의 학식의 조예야 말로 원/명의 제유(諸儒)와도 비교되지 않는 것"이라 하여, 평가의 범위를 한/중/일 3국으로 확대하더라도 당시로서는 퇴계가 제 1인자임을 역설하였다.
퇴계일화
1. 선생의 글 읽는 자세
선생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무척 좋아하여 신변에서 책을 멀리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온갖 정성을 모두 기울였다.
아무리 피로해도 책을 누워서 읽거나 혹은 흐트러진 자세로 읽은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처럼 근엄한 독서 자세는 어려서부터 70세에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퇴계는 책을 남달리 정독(精讀)하는 편이어서 무슨 책이나 읽기 시작하면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다시 읽어, 그 책 속에 담겨 있는 참된 뜻을 완전히 터득하기 전에는 그 책을 결코 놓지 않았다. 공자(孔子)는 주역(周易)을 삼천 번이나 읽느라고 가죽으로 묶은 끈이 세 번씩이나 끊어졌다는 고사(故事)가 있거니와 선생의 독서법도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다.
일찍이 선생은 서울에서 유학하는 중에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처음으로 읽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방문을 굳게 닫고 방안에 조용히 들어앉아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 하루에 세 번씩 끼니 때 이외에는 일체 외출을 안하고 그 책 한 질만을 수 없이 되풀이하여 읽었다. 때마침 그 해 여름은 몹시 무더워서 보통 사람들은 독서는커녕 서늘한 나무 그늘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지경이었건만 선생은 그와 같은 폭서(暴署)도 아랑곳 없이 방문을 굳게 닫은 채 줄곧 독서만 했던 것이다.
어느 친구가 선생의 건강을 걱정한 나머지 찾아 와서 "이 사람아! 독서가 아무리 중요하기로 건강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닌가. 요새같은 무더위에 방문을 닫고 앉아 독서만 전념하다가는 반드시 건강을 해치게 될걸세. 독서는 생량(生凉) 후에 하기로 하고, 이 여름에는 산수 좋은 곳으로 척서(滌署)라도 다녀오도록 하세!" 하고 충고한 말이 있었다. 그러자 선생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속에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듯한 깨달음이 느껴져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 이 책에는 무한한 진리가 담겨져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정신이 상쾌해 지며 마음에 기쁨이 솟아 오를 뿐이네!" 그리고 선생은 이어서 이렇게도 말하였다. "이 책의 원주(原註)를 읽어보고 나는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방법을 알고 나니 이 책을 읽는데 더욱 흥이 일어나네. 이 책을 충분히 터득하고 나서 사서(四書)를 다시 읽어보니 성현들의 한 말씀 한 말씀에 새로운 깨달음이 느껴져서 나는 이제야 학문하는 길을 제대로 알 게 된 것 같으이."
선생은 주자학(朱子學)에 그만큼 심취했었고, 주자학을 연구하므로써 새로운 경지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고 광범위하고 산만하기만 하던 주자학을 근본적으로 발전시키고 체계화하여 마침내는 '퇴계학(退溪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수립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선생은 책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 남달리 정밀하게 읽었으니 그것은 선생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제자 한 사람이 글을 올바르게 읽는 법을 물었더니. 선생은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글이란 정신을 차려서 수없이 반복해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한 두 번 읽어보고 뜻을 대충 알았다고 해서 그 책을 그냥 내 버리면 그것이 자기 몸에 충분히 배지 못해서 마음에 간직할 수가 없게 된다.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것을 자기몸에 베도록 공부를 더해야만 비로소 마음속에 길이 간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학문의 참된 뜻을 체험하여 마음에 흐뭇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 독서에 대해 이렇게도 말했다. "글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반드시 성현들의 말씀과 행동을 본받아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서둘러 읽어서 그냥 넘겨 버리면 그 책을 읽기는 했어도 별로 소득은 없게 되는 것이다."
실로 독서의 진수를 정확하게 지적한 금언(金言)이라 하겠다
2. 영의정에 대한 충고
쌍취헌(雙翠軒) 권철(權轍)은 선생과 동시대의 대학자로서, 명종(明宗) 때에 영의정(領議政) 벼슬까지 지낸 명현(名賢)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여 만고명장(萬古名將)의 이름을 떨친 권율 장군의 아버지이다.
권철은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남달리 투철하여, 이항복의 사람됨을 알아보아서 온 문중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우겨서 그를 사위로 삼은 유명한 일화를 지닌 분이다. 그처럼 식견이 탁월한 권철이 선생에 대해 추앙심이 없을리가 없었다.
권철은 영의정으로 재직시에 평소에 추앙해 오던 선생을 만나보고자 몸소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 당시의 관례로서는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권철은 관계(官階)를 초월하여 대학자이신 선생을 친히 방문했던 것이다.
선생이 예의를 갖추어 영의정 권철을 영접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그 다음 식사 때가 큰 문제였다. 끼니 때가 되자 저녁상이 나왔는데 밥은 보리밥에다가 반찬이라고는 콩나물국과 가지잎 무친 것과 산채뿐으로 고기부치라고는 북어 무친 것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선생은 평소에도 제자들과 똑같이 그런 식사를 해왔는데, 상대방 손님이 영의정 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식사를 내왔던 것이다.
평소에 진수성찬만 먹어 오던 영의정 권철에게는 보리밥과 소찬이 입에 맞을 리가 없었다. 권철은 도저히 그 밥을 먹어낼 수가 없었는지 몇 숟갈 뜨는 척 하다가 그대로 상을 물려 버렸다. 그러나 선생은 모르는 척 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그와 똑같은 음식을 내 놓았다.
권철은 이 날 아침에도 그 밥을 먹어낼 수가 없어서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몇 숟갈 떠먹고 나서 상을 그냥 물려 버렸다.
주인이 선생이 아니라면 밥투정이라도 했겠지만, 상대가 워낙 스승처럼 추앙해 오는 이퇴계고 보니 음식이 아무리 마땅치 않아도 감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태가 그렇게 되고 보니 권철은 더 묵어가고 싶어도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 더 묵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정을 앞당겨 다음 날은 부랴부랴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권철은 작별에 앞서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찾아 뵙고 떠나게 되니 매우 반갑소이다. 우리가 만났던 것을 깊이 기념하고자 하니 선생은 좋은 말씀을 한마디만 남겨 주시지요.
" "촌부(村夫)가 대감전에 무슨 말씀을 여쭐 것이 있겠나이까. 대감께서 모처럼 말씀하시니 제가 느낀 점을 한 말씀만 솔직히 여쭙겠나이다."
선생은 그렇게 전제하고 옷깃을 바로 잡으려 다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감께서 원로에 누지(陋地)를 찾아 오셨는데, 제가 융숭한 식사대접을 못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감전에 올린 식사는 일반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기면 더할 나위없는 성찬이었고, 백성들이 먹는 음식은 깡보리밥에 된장찌게가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께서는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스럽습니다. 무릇 정치의 요체(要諦)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사온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행정에 심열성복(心悅誠服)하겠나이까?"
그 말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충언이었다. 선생이 아니고서는 영의정에게 감히 말할 수 없는 직간(直諫)이었던 것이다.
권철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렸다.
"참으로 선생이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들어볼 수 없는 좋은 말씀입니다. 나는 이번 행차에서 깨달은 바가 많아 돌아가면 선생의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영의정 권철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선생의 충고를 거듭 고마워하였다. 그리고 권철은 돌아오자 만조백관들은 불러놓고 선생의 말을 전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그날부터 생활을 일신하여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한다.
3. 생활속의 청빈
선생이 서울에 계실 때, 지금의 서소문(西小門)인 '학다리'에 살았는데 옆집과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옆집 담장 안에는 수십 년 묵은 밤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여름철이면 그 밤나무 가지가 선생댁 마당에 뻗어서 좋은 그늘이 되어 주었다. 따라서 가을철에 밤이 영글면 그 밤알이 선생댁 마당에 수없이 떨어졌다.
선생은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가는 버릇이 있었는데, 뜰에 남의 집 밤이 떨어진 것을 보면 한 알도 남기지 아니하고 모조리 주워서 담장 너머로 주인 집에 던져주곤 하였다. 어떤 때에는 밤을 손수 주워 주인에게 돌려 주느라고 아침 산책을 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옆집 주인으로 보면 미안하기 짝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옆집 사람은 어느날 약간의 밤을 선물로 가지고 찾아와서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 아침마다 밤을 주워 저의 집에 보내 주셔서 고맙고도 미안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실상인즉 저의 집에서는 저의 집 마당에 떨어진 밤만 가지고도 온 식구가 충분히 먹고도 남으니, 내일부터는 선생댁 마당에 떨어진 밤은 저의 집에 보내지 마시고, 댁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주도록 하시옵소서.
" 이웃간의 인정으로서는 족히 있을 법 한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말씀하신 뜻은 대단히 고맙소이다만은, 남의 집 과실을 어찌 함부로 먹을 수 있겠소이까."
"내 소유가 아닌 물건은 비록 내 마당에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주인에게 돌려드려야 옳은 것이오. 노형께서 그런 말씀을 했다고 해서 내 마당에 떨어진 남의 집 밤을 아이들에게 함부로 나눠 먹이면 아이들은 그런 일에 습성이 생겨서 나중에는 어떤 잘못을 범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오."
그렇게 일단 공손히 거절하고 나서 선생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우리집 식구들은 그 밤나무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오. 그런데다가 그 밤나무의 열매까지 우리가 얻어 먹는다면 너무도 염치없는 일일 것이오." 옆집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며 반문한다. "선생댁에서 저의 집 밤나무의 신세를 진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집 식구들에게는 그 밤나무의 신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오. 그 밤나무가 여름의 우리집 마당에 그늘이 되어 주어서 오뉴월 삼복더위에도 우리집 식구들은 더위를 모르고 시원하게 지낼 수 있으니 그것이 첫째 신세요, 둘째는 내가 아침마다 뜰에 나가 밤을 주워 담장 너머로 던져드리느라고 허리를 폈다 굽혔다 하다보니 운동이 되어서 몸이 건강하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고마운 신세요."
선생은 물론 옆집 사람에게 미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꾸며낸 농담이기는 하였다.
선생은 그런 익살스러운 농담을 하는 바람에 옆집 사람은 크게 웃으며 선생의 대쪽같은 성품에 다시 한번 머리를 수그렸다.
4. 신하로서의 마음가짐
선생이 69세에 병이 악화되어 우찬성(右贊成)의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하자 선조대왕은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제수하여 선생을 끝까지 측근에 붙잡아 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벼슬을 사양하며 기어이 낙향할 것을 고집하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선생을 찾아 뵙고 이렇게 말했다.
「어린 임금께서 즉위하신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보필해 드려야 할 일이 허다하오니, 이런 시기에 선생님께서 물러 가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선생이 대답한다.「신하된 도리를 보면 물러가서는 안될 것이나, 내 일신상으로 보면 몸에 병도 중하거니와 재주가 또한 중책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니 마땅히 물러가는 것이 옳은 줄 아오.」
율곡은 다시「선생께서 맡아주셔야 할 일은 선생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지극히 중요한 일인 것이옵니다. 벼슬이란 본디 임금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일이오니 선생께서는 부디 조정에 남아 계셔 주시옵소서.」「율곡 말씀대로 벼슬이라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임금과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는 나도 동감이오. 따라서 임금과 나라에 이익이 되지 못하고 또 우환으로 목숨이 절박하면 마땅히 물러가야 옳을 것이오.」「아니옵니다. 선생께서 조정에 남아 계신다면 설사 아무일도 아니 하시더라도 다만 조정에 선생이 계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가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율곡의 말씀은 나에게는 너무도 과분한 말씀이오. 아무 직책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조정에 그냥 머물러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직무 태만의 기풍을 조장하는 결과밖에 되지를 않을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소.」
이리하여 선생은 기어이 낙향을 하기로 했는데 선생이 고향으로 떠나려고 하자, 임금은 역관(驛官)을 시켜 선생을 정중히 모시게 하였고 우상 홍섬(右相 洪暹)은 한강 나루터까지 전송을 나와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은 고별시(故別時)를 읊었다.
白鷗波浩상 넓고 넓은 물결위에 날아가는 저 갈매기
萬里誰能馴 누가 감히 저를 잡아 길들일 수 있으랴.
선생은 그 시를 듣고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尙憐終南山 그래도 종남산에 미련이 남아
回首淸謂濱 위수가를 떠나가며 머리 돌리오.
몸에 병이 위중하여 부득이 임금의 곁을 떠나기는 해도 마음만은 여전히 임금의 곁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었다.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나 도산으로 돌아오자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가 매우 다른 듯하다. 젊었을 때에는 임금의 부르심을 받으면 곧 달려갔었는데 늙어서는 부르심을 받을 때마다 사양하였고, 부득이 나아가더라도 구태여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리가 낮으면 책임이 가벼워 한번 나가볼 수도 있었지만, 벼슬이 높아질수록 책임이 무거워 머물러 있기가 매우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옛날 어떤 사람은 벼슬을 받으면 곧 달려나가 『임금의 은혜가 지극히 무거운데 어찌 물러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했다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나아가고 물러가는 데 있어서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한낱 임금의 사랑만 중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을 예의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벼슬과 봉록(俸祿)으로써 하는 것이니, 그러한 충성을 어찌 분의(分義)에 의한 충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5. 사제간의 정리
그 당시 젊은 학자로서 명성을 세상이 널리 떨치고 있던 율곡이 선생의 학문과 덕망이 높음을 우러러 보고 처가(성주)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천리길을 멀다 않고 예안의 계상서당(溪上書堂)에 퇴계 선생을 찾아 내려온 것은 그의 나이가 23세요, 선생의 나이가 58세때의 일이었다.
율곡은 선생에게 초면 인사를 올리고 나서 그의 학덕(學德)을 찬탄하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어 바쳤다.
溪分洙泗派 시냇물은 수사에서 한갈래 나뉘고
峯秀武夷山 드높은 봉우리는 무이처럼 빼어났소
恬計經千卷 천권 경서속에 보람있게 살아가니
行藏屋數閒 고요한 뒷방이 한가하기만 하도다
襟懷開霽月 회포를 푸니 맑은 하늘에 달이 떠오르는 듯
談笑止狂簡 웃으며 나누는 얘기에 거친 물결 잠자오
小子求聞道 소자가 뵈온 것은 도를 듣고자 함이니
非偸半日閑 반나절 헛되이 보냈다 생각지 마옵소서.
이상과 같은 율곡의 헌시(獻時)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화답하였다.
病我로關不見春 내 병들어 문닫고 봄빛을 못보더니
公來披豁醒心神 그대 만나 얘기를 나누니 심신이 상쾌하다
已知名下無虛士 선비의 높은 이름 헛되지 않음을 알았으니
堪愧年前闕敬身 지난 날 사귀지 못했음이 적이 부끄럽소
嘉穀莫容梯熟美 깨끗한 곡식에 가라지 자라지 말 게 하오
纖塵猶害鏡磨新 새로 닦는 거울에는 티끌도 해가 되오
過情時語須刪去 부질없는 이야기는 모두 제쳐 놓고
努力工夫各日親 힘써 공부하여 우리 서로 친해보세.
자세히 읽어보면, 주고 받는 시에 사제지간의 무한한 존경과 애정이 넘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율곡은 예를 갖추어 사제의 의를 맺은 뒤에 계상서당에서 학문을 닦다가 예안을 떠났다.
율곡은 떠남에 즈음하여 선생에게 이런 부탁을 올렸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곳을 떠나기는 하오나, 소자의 마음은 항상 선생님 그늘에 있사옵니다. 선생님께서는 소자가 한평생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을 잠언(箴言)을 한 말씀만 내려 주시옵소서."
선생은 제자들에게조차 항상 겸허한 어른인지라, 그는 율곡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가 워낙 총명한 사람이니 내가 그대에게 무슨 잠언을 들려줄 수 있으리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간절히 부탁하오니 잠언을 꼭 내려 주시옵소서."
"그대가 그토록 소망이라면 내가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만 하겠네."
선생은 그렇게 말하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잠언을 율곡에게 주었다.
持心貴在不欺 마음 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立朝當戒喜事 벼슬자리에 올라서는 일을 좋아하기를 경계하라.
얼른 보기에는 대단치 않은 말씀 같지만, 율곡을 위해서는 가장 적절한 잠언이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선생은 유학(儒學)의 본도를 '입언수후(立言垂後)'에 두고 있었는데, 율곡은 유학의 본령을 '출세행도(出世行道)'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소신(所信)대로 정치(政治)를 펴지 못할 바에는 학문을 정성스럽게 닦아서 세인들에게 정도(正道)를 널리 알려주려고 했던 반면에, 율곡은 자신의 포부를 펴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이 선생과 율곡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기도 했는데, 선생은 젊은 율곡에게 그와 같은 농후함을 이미 꿰뚫어 보고 "벼슬자리에 오르더라도 부질없이 일을 일으키려고 하지 말라."는 지상의 훈계를 해두었던 것이다.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선생이 사람을 꿰뚫어 보는 선견지명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잠언에 대해서는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 속에서 제자 구봉령(具鳳齡)은 "선생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뜻이 그처럼 깊고 간절하신데, 그와 같은 잠언은 어찌 율곡만이 받들어 행할 것인가. 나도 또한 마땅히 그 잠언대로 살아가도록 힘써야 하겠기에 그 잠언을 나 자신도 바람벽에 써붙이고 그대로 실천하기를 노력하겠노라."하였다.
선생이 율곡에게 남겨준 그 잠언은 어찌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일일 수 있으랴. 그 잠언이야말로 천고에 빛나는 영원불변의 대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율곡은 먼 훗날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곡퇴계선생(哭退溪先生)의 만사(輓飼)를 지었으며 흰 띠를 메고 심상(心喪)을 하였다.
그의 제문[만사]은 아래와 같다.
"아아 슬프도다! 나라의 원로를 잃으니 부모가 돌아가신 것 같고, 용과 범이 망했으며 경성(景星)이 빛을 거두었도다. 소자, 일찍이 배움을 잃고서 할 일없이 방황할 때, 마치 저 사나운 말이 가로뛰며 가시밭 길이 무성할 때 나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아 주신 것은 실로 선생께서 열어 주심이었습니다."
율곡은 경연(經筵)에서 퇴계의 문묘종사를 극력 주장하여 실현시켰고 시호를 내릴 때도 적극 힘썼다
6. 선물받을 때의 법도
선생은 남에게 선물을 받을 때에는 수사(受辭)의 법도가 지극히 엄격하여 의리에 벗어나는 선물은 한번도 받아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자기 고을의 관가에게 보내는 선물은 교제의 뜻으로 알고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만약 관가에서 그런 선물을 받았을 경우에는 맨 먼저 형님댁에 일부를 나눠 보내고, 그 다음에는 이웃과 친척과 제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어서 한번도 집에 쌓아두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서울에 계실 때에는 나라에서 주는 봉록으로 살림이 넉넉했기 때문에 선물이 들어오기만 하면 반드시 친구들에게 두루두루 나눠주되 친소(親疎)와 빈부(貧富)를 헤아려 한번도 정리(情理)에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의성(義城)사람이 마른 고기와 필묵(筆墨)을 선물로 가져왔는데, 선생은 필묵만 받고 마른 고기는 그냥 돌려보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제자가 매우 의아스러워서 「선생님, 외롭지 않은 물건이라면 모두 거절해 버려야 옳을 건인데, 작은 선물만 받고 큰 물건을 돌려보내는 것은 무슨 뜻이옵니까?」하고 물었다. 선생은 웃으며 대답한다.
"내 일찍이 옛 성현의 글에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었다. 조자직이라는 사람이 주자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많이 가져왔는데 주자는 그 중에서 인삼과 부자(附子)만 받고 돈은 그냥 돌려보냈고, 또 어떤 사람한테는 게만 받고 포(布)는 돌려보낸 것을 보았다. 그 경우엔 조자직으로서는 선물을 보내는데 잘못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허물은 절교(絶交)를 할 정도로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작은 선물은 받고 큰 선물은 돌려보낸 것이다. 가져온 선물을 송두리채 돌려보내면 절교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벼운 선물은 받아서 절교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고, 큰 물건은 돌려보내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잘못을 깨달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선물하나 주고받는데도 그처럼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생이 도산에 왔을 때 김이정이라는 사람이 노새를 선물로 보내온 일이 있었다. 이미 연로했으므로 나들이를 다닐 때에 타고 다니라고 보내준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 노새를 받지 않고 주인에게 도로 돌려보냈다.
제자 이덕홍(李德弘)이 선생을 보고 물었다. 「그 옛날 공자(孔子)는 친구가 보낸 거마(車馬)를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노새를 돌려보내셨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옵니까?」선생은 대답했다. 「공자는 의로운 선물이었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받은 것이다.」「그러면 선생은 어찌하여 김이정의 노새를 돌려보내셨습니까. 연만하신 선생님께서 타고 다니시라고 보내온 노새는 의로운 선물이 아니라는 말씀이시옵니까?」「나는 그 선물이 의롭지 않은 선물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남의 선물을 받는데는 법도가 있는 법이다.」「그 법도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옛날 사람들은 집에 부모가 생존해 계시면 남에게 거마를 선물로 주는 법이 없었다. 김이정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법도를 몰라서 단순한 호의로 나에게 노새를 보내 주었겠지만, 그 법도를 알고 있는 나로서야 어찌 그 노새를 받을 수 있겠느냐」이덕홍은 그 대답을 듣고 선생에게 새삼스러이 머리를 수그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악법도 법이다.
선생 50세때 살고 있던 곳은 도산면(陶山面) 하명리(霞明里)이었다. 지금은 안동댐이 생긴 관계로 폐교(廢校)가 되어 버린 도산초등학교가 있던 곳이 바로 선생이 살고 있었던 옛 집터였다.
그 집 앞에는 낙동강(洛東江)이 흐르고 있는데, 예로부터 낙동강에는 은어(銀魚)가 많았다. 은어는 맛이 좋은 물고기여서, 낙동강의 은어는 임금님에게 진상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백성들은 은어를 잡아먹으면 안된다는 것을 법으로 정해 두었다. 그러나 철없는 아이들은 국법을 알 리가 없어서, 강에 멱을 감으로 나가면 저마다 법을 어겨가며 은어를 잡았다. 그 아이들 중에는 선생의 자제들도 있었다. 선생은 아이들이 은어 잡아오는 광경을 볼 때마다 "국법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꾸짖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촌로(村老) 한 분이 선생을 보고 이렇게 나무랐다.
"여름철에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물 속에서 멱을 감다보면 물고기도 잡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아이들이 은어를 잡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말씀이요. 나쁘다면 아이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부자연스러운 법을 만들어 놓은 나라가 나쁘다고 나는 생각하오."
선생은 그 항의에 솔직히 수긍을 하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노인장의 말씀은 지극히 옳으신 말씀입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제재를 가하는 그런 법은 확실히 잘못된 국법입니다. 그러나 악법(惡法)도 법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나라에서 일단 법으로 제정한 이상에는 백성된 자 마땅히 그 법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법이라고 해서 지켜 나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준법정신이 해이해져서 좋은 법도 지키지 않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나라의 안녕질서를 무엇으로 유지해 나가겠습니까. 아무리 악법이라도 나라에서 법으로 제정한 이상에는 누구나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천금같이 귀한 말이었다.
일찍이 회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갈파하면서 악법에 의하여 사약을 마시고 조용히 세상을 떠난 일이 있거니와, 준법사상이 준열한 점에 있어서 퇴계는 소크라테스와 완전히 일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타일러도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아니하고 여전히 낙동강에서 은어를 잡고 있었다.
선생은 집안 아이들이 날마다 국법 어기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죽동으로 집을 옮겨 버리고 말았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거니와, 어린 아이들이 국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려고 집을 옮긴 것만 보아도 선생이 철저한 학행일치의 대학자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퇴계선생 연보(年譜)
"*note "연대의 끝 두자리가 선생의 나이와 같음 예)1533년 -33세
연 대
沿 革
1501년(연산군7년) 11월25일 진시 경상도 예안현 (현 도산면) 온혜리에서 탄생
1502년 6월 부친께서 별세
1512년(중종7년) 숙부에게 논어를 배움
1515년 숙부를 모시고 청량산에 가서 독서
1520년 주역을 연구하시느라 거의 침식을 잊다시피함 -병이 생김
1521년 진사 허찬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함
1523년 처음으로 태학에 유학. 장남 준이 출생
1527년 10월에 차남 채가 출생. 경상도 향시에서 진사 1등, 생원2등에 합격. 11월에 허씨 부인 별세
1528년 진사회시에 2등으로 합격
1530년 봉사 권질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함
1532년 문과초시에 2등으로 합격
1533년 성균관에 유학
1534년 문과에 급제. 4월 승문원 권지부정자.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12월에 무공랑으로 박사 에 오름
1537년 4월에 선교랑.5월에 승훈랑. 9월에 승의랑. 10월에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함
1539년 홍문관 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
1540년 정월에 사간원 정언. 3월에 승문원 검교. 9월에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11월에 통선랑
1542년 어사로 충청도 강원도 검찰. 5월 통덕랑 승문원 교감. 시강원문학
1545년 전한. 승문원 참교. 통훈대부
1546년(명종1년) 7월에 부인 권씨 별세. 퇴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지음. 토계의 지명을 퇴계로 고치고 아호로 삼음
1547년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음
1548년 청송을 원했으나 단양군수가 되고 10월에 풍기군수로 옮김
1549년 12월에 소수서원에 사액과 서적을 하사할 것을 청함
1550년 2월에 계상의 서안에 주거를 정함. 한서암과 광영당(현 종택자리)을 이룩함
1552년 7월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
1553년 4월에 다시 대사성에 임명. 10월 추만 정지운 천명도설을 개정
1554년 대보잠을 써서 사정전에 게시함. 경복궁 중수기를 제진
1556년 주자서절요를 편차하고 서문을 지음. 12월에 향약을 초정
1557년 도산서당의 기지를 정하여 영건에 착수
1558년 12월에 어필로 가선대부 공조참판을 제수
1559년 2월 휴가로 귀향하여 병으로 환조 못하고 사표를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함. 동지중추부사로 옮김. 12월에 송계원명이학통록이 시편됨.
1560년 11월 기고봉의 편지에 답하여 사단칠정을 변론, 소산서당이 낙성. 완락재에 기거하며 연구와 사색. 제자 교육에 힘씀
1561년 3월 절우사를 쌓음. 11월 도산기를 지음.
1564년 조정암 선생의 행장을 지음. 4월에 제생들과 함께 청량산에 산유
1565년 8월에 제생에게 계몽 강의, 특명으로 다시 동지중추부사.
1566년 공조판서 겸 예문제학을 제수했으나 병으로 상경 못하고 귀향. 10월에 회재 선생의 행장을 짓 고 그 문집 교정
1567년 7월에 명종왕의 행장을 씀. 예조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1568년(선조1년) 우찬성. 판중추부사. 양관 대제학. 무진육조소를 올림. 12월에 성학십도를 올리니 왕 은 가납하시고 병풍을 만들어 대내에 두게함.
1569년 정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을 고사하고 귀향토록 간청하니 귀향만 허락하고 치사는 윤허 치 않음.
1570년 5월에 계몽 강의. 9월에 심경을 강의. 11월에 기고봉의 격물치지설을 개정 12월에 선생께서 병드시어 장자에게 사직하고 올 것을 명하고 유계하시다. 8일 유시초에 앉으신채 서거.
1571년 3월 예안의 건지산 남록 자좌오향에 안장함.
1573년 이산서원에 위판을 봉안하고 석채례를 봉행함.
1574년 도산서원 창건. 익년 을해년에 낙성과 함께 사액
1576년 문순공의 시호를 내림.
1610년(광해2년) 문묘에 배향.
퇴계의 학문사상
1. 해동의 유종(儒宗)
퇴계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조선왕조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율곡(栗谷, 1536-1584)은 퇴계를 가리켜, "선생은 세상의 유종(儒宗)으로서, 조정암 뒤로는 서로 비견할 사람이 없다. 그 재주와 기국(器局)은 혹 정암에 못 미칠지 모르겠으나, 의리(義理)를 탐구하여 정미한 것까지 드러내는 데서는 정암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 일찍이 중종 당시 "지치주의(至治主義)", 즉 왕도 정치의 이상을 누구보다도 갈구하고, 그 실현을 위해 목숨가지 바침으로써 조선 왕조 "사림(士林)정치"의 대표자로 손꼽히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도 경세(經世)의 측면에서는 몰라도 학문의 측면에서는 퇴계에 미치지 못한다 는 것이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언행총록(言行總錄)],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실기(實記)], 문봉(文峰) 정유일(鄭惟一)의 [언행통술(言行通述)] 등에서도 한결같이 퇴계를 가리켜 "동방의 일인(一人)"이라 했다. 물론 이들의 평은 제자로서 스승의 학덕을 기리려는 뜻이 첨가 된 것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려운 만큼 그 객관적 신빙성이 약할 수도 있으나. 퇴계와 그의 학문을 이와 같이 칭송하고 평가한 기록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한말 개화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위암(偉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처음으로 한국의 유학사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퇴계에 대하여 "그 정학(正學)을 천명하고 후생을 개도함으로서 '공맹 정주(孔孟程朱)의 도'를 환히 우리 동방에 다시 밝힌 사람은 오직 선생 한 분뿐이라"고 했고,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역시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여 "불교 사상에 원효가 대표자라면 유교 사상에 퇴계가 대표자일 것은 거의 이의가 없는 바이다. 말하자면 퇴계 이전까지는 유교가 오히려 정치나 사장(詞章)의 여습(餘習)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것이, 퇴계의 출현을 기다려 완전한 철학의 성립을 보게 되었으며, 예론의 발달도 또한 퇴계 이후에 있었은즉 퇴계로써 반도 유종(儒宗)을 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라 하여 한국유학에서 퇴계가 차지하는 위치를 불교에서 원효가 차지하는 위치에 비교하고 있다.
퇴계 및 그의 학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한국인의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 점은 많은 일본 학자들의 견해 속에서도 발견된다. 일찍이 수고산은
"공자의 도는.......송의 정주 두분에 이르러 깊이 탐구됨에 다라 비로소 찾아졌다. 그 학은 조선의 이 퇴계에게 전하여진 다음, 다시 (퇴계로부터) 우리나라(日本)의 산기암재에게 전하여졌다."
고 퇴계를 정주에 이어 유학의 정통을 잇는 한국 유학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면서, 일본의 유학이 이러한 퇴계에 의하여 발달하였음을 밝힌 일이 있다. 도변예재는 "퇴계의 학식의 조예야 말로 원/명의 제유(諸儒)와도 비교되지 않는 것"이라 하여, 평가의 범위를 한/중/일 3국으로 확대하더라도 당시로서는 퇴계가 제 1인자임을 역설하였다.
2. 출생과 유년기
퇴계 선생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이다. 진보(眞寶) 또는 진성이 선생의 관향(貫鄕)이며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옹(陶翁)이라 하고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다.
선생은 연산군 7년(1501년) 11월 25일에 현재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 종택에서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춘천 박씨(朴氏)이다.
어머니 박씨 부인이 "공자가 대문안에 들어오시는 꿈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하여 그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태실(胎室)과 성림문(聖臨門)이 보존되어 있다. 퇴계종택 퇴계태실 아버지께서는 진사에 합격한 해에 퇴계를 두었으니 선생이 태어난지 7개월만인 40세에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 혼자서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며, 8남매의 자녀들을 학업에 열중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여 키웠다.
어머니는 기회있을 때마다 자식을 앞에 놓고 "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므로 남의 집 아이들과는 달라서 공부만 잘 해도 안된다. 공부도 남 보다 잘 해야 하겠지만 행실을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면 애비가 없어서 교육을 옳게 받지 못해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테니 그 점을 특별히 명심하여 조상들을 욕먹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하고 늘 자식들에게 자애롭게 타일렀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이 어머니"라고 할 만큼 어머니의 가르침이 대단하였으며, "과부의 자식은 몇 백 배 더 조신(操身)하여야 한다."는 엄한 가법(家法)을 세워 교육하였고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가정을 일으켰다. 그러한 교육을 받은 선생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봉양하는 마음이 매우 극진하였으며 어머니에게는 언제든지 기쁜 얼굴로 대하였고. 또 어머니의 말씀이라면 한번도 거역해 본 일 없이 효도하며 생활했다.
6세 때에는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게 되었는데, 아침에 글을 배우러 갈 때는 반드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깨끗이 빗었으며, 스승의 집 울타리밖에 이르러서는 전날 배운 글을 두어 번 외어본 후에 글방에 들어가 스승에게는 반드시 큰절을 올리는 등 스승을 대하는 공경심이 어른 같았으며, 또한 어른들 앞에서는 게으른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2세 때에는 숙부인 송재(松齎)공에게 논어(論語)를 배웠다. 하루는 '이(理)'자를 가지고 숙부에게 묻기를 '모든 일에 옳은 그것이 이(理) 옵니까?"하고 물었다. 송재공은 퇴계의 총명한 질문을 받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젊은이들은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이웃 사람을 공경하며, 행동을 조심하고 널리 여러 사람을 사귀되, 어진이와 가까이 하여야 한다."라는 대목을 익히고 나서는 "사람된 도리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며 12세때 이미 깨우쳤다 한다.
그 이후로는 가정 형편이 워낙 어려워 스승을 뫼시고 공부를 할 수가 없어 혼자 절에 가서 밥도 거의 먹지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으면서, 몸에 고질병이 나도록 학업에 정진했다. 이처럼 선생께서는 어머니와 스승의 올바른 가르침을 그대로 본받아 몸소 실천하려고 꾸준히 공부하여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대학자가 되었다.
퇴계는 어릴 때부터 시문(時文)에도 능하여 15세때 이미 시를 지었는데, 게를 보고 지은 시가 이러하다.
負石穿沙自有家 돌로 지고 모래를 파니 집이 절로 되고
前行각走足偏多 앞으로 가고 뒤로도 가니 발이 많기도 하다
生涯一국山泉裏 한평생을 한 웅큼의 샘물속에서 살아 갈 수 있으니
不問江湖水幾何 세상에 물이 얼마이건 물어 무엇 하리오.
게가 구멍을 파고 들어가는 광경을 보고 읊은 천진난만한 노래지만 내용을 보면 주제의식이 확립되었고, 인생관도 확고해졌음을 알 수 있고, 특히 "한 평생 한 웅큼의 샘물속에 살아 갈 수 있으니, 이 세상에 물이 얼마이건 물어 무엇하리오"했으니 어릴적부터 선생은 과욕없이 청렴하게 살아갈려는 뜻[立志]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공 직 관
선생은 27세 되던 해에는 향시(鄕試)의 진사시(進士試)에 수석으로, 생원시(生員試)에는 2등으로 합격했고, 이듬해에는 진사회시(進士會試)에도 2등으로 합격했다. 선생은 자주 병에 시달리는 몸인데다가 천성이 호학(好學)하여 독서와 사색에 잠기는 생활을 즐겨하여, 오직 어머니를 섬기면서 집안일이나 착실히 다스려 나가려고 생각했을뿐, 벼슬하여 출세라도 해 볼 뜻은 별로 없었다.
3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후 140여 직종의 벼슬이 내렸으나, 79회나 사임하고, 단양군수, 풍기군수, 충청도·강원도 어사(御史)등은 마지못해 역임하였다. 그나마도 높은 벼슬자리는 마다하고,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주로 원했다. 선생이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부임해 간 것은 명종 3년 48세 때의 일이었다.
그 당시 단양 고을은 군정(郡政)이 매우 어지러웠다. 삼년동안이나 연달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기아(饑餓)에 허덕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제하는 일인데, 온 고을 백성들을 공평하고도 과감하게 구제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촌락의 기아 상태를 상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와 같은 조사는 부하들에게 맡겨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직접 확인행정(確認行政)을 하기 위해 약한 몸을 무릅쓰고 매일같이 촌락을 탐방했었는데, 그 근본 목적은 관(館)과 민(民)의 마음과 마음을 하나로 융합시킴으로써 기아를 정신적으로 극복해 나가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선생은 단순히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제하는 데만 목적을 두지 않았다. 오늘의 기아를 구제함과 동시에, 백성들을 생산적인 방면으로 이끌어 나갈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단양 고을은 어디를 가나 물이 많은 고장이었다. 그러나 장마철에는 홍수가 나서 흉년이 들고, 가물 때에는 물이 없어 흉년이 든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선생은 그 점에 착안하여 장마철에 내린 빗물을 저장해 두었다가 가물 때에 농사물로 사용하면 흉년을 얼마든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몸소 보(洑)라는 것을 만들어 보이며, 백성들에게도 보를 많이 만들기를 권장하였다. 소위 '보'라는 것은 현대말로 바꿔 말하면 저수지(貯水池)이다. 지금도 단양 마을에 흐르고 있는 단양천(丹陽川)에 복도소(複道沼)라는 저수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복도소'는 선생이 백성들에게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만들어 놓았던 저수지인 것이다.
퇴계가 10달만에 풍기군수(49세)로 전근이 되었다. 그는 감사[도지사]에게 청하여 그 전에 주세붕(周世鵬)이 순흥(順興) 안유(安裕)의 고향인 백운동(白雲洞)에 건립한 서원을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 노력이 결실하여 백운동서원은 전토(田土)와 서적과 더불어 '소수수원(紹修書院)'이라는 사호(賜號)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백운동서원은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를 이루게 되었다.
뒷날 조선조의 유학이 수많은 서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그 중에도 특히 사액서원이 일반 서원들의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던 점을 상기한다면 퇴계의 이 업적은 결코 과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의 관심의 초점이 어디까지나 문치(文治)의 방향으로 쏠리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몸에 병이 나도록 그렇게 공부하여 과거 시험을 볼 때는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과 금력을 한손에 쥐고, 허세를 부릴려고 하는 것이 현실인데 어찌하여 남들이 근무하기 싫어하는 외직을 원했고, 높은 자리는 마다하고, 79회나 벼슬을 사양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선생은 학문하는 목적을 벼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첫째 목적은 몸과 마음을 닦고 수양하여 덕을 쌓는 것이고, 둘째는 지식을 많이 넓히고, 마지막은 행동이라고 했다.
수양되지 않고 지식도 많이 쌓지 않은 내가 벼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의 녹[월급]을 축내고, 또한 국가의 세금을 도적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사양했다.
관리는 마음이 청렴하고, 정의와 도의심으로 모든 일에 항상 조심하고 경계해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했다.
권력이나 이권이나 명예를 탐하는게 세상의 변함없는 인심인데, 이런 것들을 과감히 저 버리고 조촐한 인격을 꿋꿋이 지켜나간 점은 오늘날 사람이 특히 배워야 할 점이요, 그의 거룩한 선비정신을 우러러 받들어야 할 것이다.
嗟爾世上人 아아! 세상 사람들아!
愼勿愛高官 부디 높은 벼슬일랑 좋아 말아라
富貴等浮煙 부귀는 뜬 구름과 같고
名譽如飛蠅 명예는 나는 파리와 같더라.
선생이 49세 때 풍기군수를 사임한 뒤에도 몇 번이나 관직에 나아간 것을 보아도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 할 수 없으며, 또 관직에 있을 당시에 행한 업적이나 임금께 올린 글들을 보면 선생이 얼마나 정치에 대한 경륜과 능력이 뛰어났던가를 알 수가 있다.
선생은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늙어갈수록 더하여 만일 나라 일을 말하게 될 때는 가끔 의기(義氣)가 복받치어 원통하고 슬퍼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또 그의 평소의 꿋꿋한 절개와 관직에 있었을 때의 강직하게 처사한 도리를 보면 저으이 실현과 사회 개혁에 대한 그의 의지와 정열이 어떠했던가를 잘 알 수가 있다.
선생이 42세 때에는 어사(御史)가 되어 충청도 지방의 민정을 검찰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임무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온 그는 임금께 와서 보고 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3년을 지탱할 저축이 없으면 나라 꼴이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제 한 해 흉년이 들어 공사간에 모두 궁색하고 결핍함이 이러하니 올해에도 만일 농사일이 실패하면 형편이 없을 것입니다. 보통 때에 경비를 절약하여 저축해 둔 뒤에야 불의의 재해가 있더라고 궁색하고 급히 서두를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했고, 또 "공주(公州)의 판관(判官)은 성미가 원래 고약하여, 청렴하고 근실한 목사(牧使) 이명(李冥)의 명을 어기어 하는 일이 상반 모순될 뿐만 아니라, 관의 물건을 말에 실어 가까이 있는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가곤 하는 바, 그 탐욕의 더러운 꼴이란 형언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흉년이 들어 괴로워 하는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이때에 먼저 그러한 탐관오리를 징계한 뒤에라야 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여 도와주는 일도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그대로 그를 처벌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탐관오리의 숙청에 단호한 태도를 보인 선생은 결코 나약한 문사(文士)나 사색에 빠져 행동을 못하는 우유부단한, 초초한 선비가 아니었으니 참으로 그의 기상과 기백과 지조는 매섭기 한량 없었다.
선생은 임금의 부름이 극진하여 마지못해 많은 벼슬을 하였지만 현재 도산서원에 선생의 유물 유품이 보관된 옥진각(玉振閣)에는 산책할 때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청려장], 공부하시던 책, 공부를 하시다 마음이 산만할 때 정신집중을 위해 사용하신 투호, 빗자루, 벼루 등 일용품인 문방구와 실내 비품으로 하나같이 소박하고 검소하며 외면적인 꾸밈과 사치를 떠나 오직 청빈에 만족하신 도학자다운 생활상을 느낄 수 있다
4. 교 육
퇴계 선생은 후학(後學)을 가르침에 있어 싫증을 내거나 귀찮아 하지 않았으며, 친구처럼 대하여 끝내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멀리서 찾아와서 묻고 또 물으면, 그들의 정도의 깊이를 따라 일러주었으며, 반드시 뜻을 세우는 것[立志]으로 우선을 삼고 주경(主敬)과 궁리(窮理)를 공부의 바탕으로 삼아서, 다정스럽고 친절하게 인도하여 끝내 깨우쳐 주고야 말았다.
선생은 의(義)와 이(利)의 구별에 엄하였고, 가지거나 버리는 것을 자세히 분간하였으며, 의심을 따지고 숨은 것을 밝혀서 털끝만한 일이라도 그저 예사롭게 지나치지 않았다. 진실로 의가 아니면 녹이 아무리 많아도 받지 않았고, 지푸라기만한 것이 생겨도 취하지 않았다.
착함을 좋아하고 악함을 미워하는 것은 그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남의 착한 행실을 보면 몇 번이라도 칭찬하고 격려하여 그것을 반드시 성공하게 하였고, 남의 잘못된 행실을 들으면 되풀이하여 탄식하고 아껴서 반드시 그것을 고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이거나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간에 모두 그에게서 유익함을 입어 누구나 그를 사모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착하지 못하다는 이름이 그에게 들릴까 두려워하였다.
선생은 도산서당에서 연구와 후진양성에 정성을 쏟았다. 그는 옛 사람들이 전하지 못한 묘리[古人不傳之妙]를 스스로 찾아 보고자 한 것이었다.
끈기있는 노력으로서 성리학자, 철학자로서의 탁월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며 인간으로서의 심성수양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흔히 세상사람들은 정서에 결여된 면이 많으나 선생은 그러한 면을 완전히 탈피하였으며 후진을 가르칠 때도 자상하게 그리고 예의를 갖추어 지도하였다.
서양에서도 많은 교육자가 있었지만 퇴계는 동서 고금을 통해서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산에 은거하면서 많은 저술과 후진들을 양성하는데 일심전력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국립대학 총장에 비견되는 성균관 대사성의 책무를 맡으면서 선생은 관료적 교육자의 입장에서 그의 교육관을 밝힌 일이 있다.
"선비란 예의의 원천이며 원기(元氣)의 본거이다. 지금부터 제군들은 모든 일상생활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여 지도록 하라. 모름지기 서로 칙려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윗사람을 섬기는 예로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겸손하게 행동함으로서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 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충신의 마음가짐과 겸손한 행실로서 예의를 실천하고 경세의 기운을 잃지 않는 선비를 길러야겠다고 생각하였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국가의 교육 목적에 부응하는 길이라 믿었다. 이것이 곧 퇴계의 교육관이다. 그리고 퇴계가 지향하는 교육자의 상이란 바로 이와 같은 '선비의 육성자'가 되는 것이었다.
선생은 단순 지식만 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차원에서 인격형성에 감화를 줄 수 있는 이른 바 '진정한 스승'이었다. 선생이 이러한 '스승의 상'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여러 경우를 통해서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제자들의 회고에 의하면 선생은 제자에 대하는 것을 마치 벗처럼 하였다. 비록 어린 제자라 하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으며 보내고 맞이할 때는 항상 공손히 경(敬)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늘 드나들며 배우는 제자일망정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받았으며 제자가 자리에 앉으면 의례 부형의 안부부터 물었다고 한다. 평일의 경우에도 제자가 먼 길을 떠나면 반드시 음식을 대접하여 보냈다는 것이다.
수업에 있어서는 각 제자의 학문 정도에 따라 각기 알맞게 가르쳤고 반복하여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그러한 가르침에 조금의 염증도 느끼지 않았다. 비록 병으로 아파도 강론(講論)을 쉬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는 이미 중환이었는데도 강론은 평소와 다름이 없어 제자들이 뒤늦게 깨달을 정도였다.
선생의 강론은 숨을 거두기 며칠 전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다한 것을 직감한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4일전에 자제들이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죽는 마당에 제자들을 아니 볼 수 없다."하며 제자들을 불러놓고 "평소에 올바르지 못한 견해를 가지고 종일토록 강론한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마지막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이와같이 제자에 대한 정중한 예의와 성실한 강론은 높은 인격과 제자에 대한 깊고 뜨거운 애정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선생이야말로 무한한 애정을 쏟을 줄 아는 동시에 강한 인격의 감화를 줄 수 있는 '성실한 스승의 상'을 남겨 주고 있는 것이다.
퇴계의 문인은 참으로 많아 유명한 사람만도 360여명이나 되니, 우리나라 교육사상(敎育史上)에서 최고요, 실로 경이적인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비롯하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월천(月川) 조목(趙穆), 한강(寒岡) 정구(鄭逑),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사암(思菴) 박순(朴淳) 등 당대를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제자가 쏟아져 나온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선생이 글이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준 교육에 관한 '잠언(箴言)'
-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아니다.
- 배우는 사람의 공부 가운데 심신을 닦는 것보다 절실한 일은 없다.
- 심신을 함부로 굴리지 말고, 제 잘난 체하지 말고 말은 함부로 하지 말라.
- 몸가짐을 공손히, 일을 맡으면 공경히, 남과의 사귐은 정성스레 하라.
-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어 동요하지 않음이 마음의 근본이다.
- 진리가 가까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 스스로의 힘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자포자기와 같다.
- 일상생활에서의 언동은 보편타당성이 있으면 잘못이 없다.
- 바른 것을 지키자니 어려움이 많고 무리를 따르자니 자신을 잃는다. 이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다.
- 비록 귀한 손님이 와도 성찬으로 대접하지 않았으며. 낮고 어린 손님이라도 소홀히 대접하지 아니 하였다.
- 나아갈 때 나아갈 수 있어야 진실로 의이고, 나아가서 안될 때 나아가지 않은 것 또한 의이다.
- 도의 큰 근본은 하늘에서 나왔으나 이는 사람의 마음속에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 부부는 인륜의 시초며 만복의 근원이다. 비록 지극히 친밀한 사이지만 또한 지극히 바르고 삼가야 할 자리이다.
- 단 한번의 사특한 생각이 곧 소인의 성질로 이끌게 되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으랴.
- 빼앗을 수 없는 뜻과, 꺾이지 않는 기상과 흐리지 않을 앎을 늘 지니도록 하라.
- 자기 힘으로 하되 사견을 고집하는 사람은 진리를 해치는 자와 같다.
- 언제나 도의심을 길러 선비를 키워야 한다. 이것이 오늘의 급선무이다.
- 의리가 무궁하기 때문에 학문의 길 또한 무궁하다. 인심은 악에 물들기 쉬우므로 반성하고 고치는 것이 급선무이다.
5. 학 문
선생은 향시를 비롯한 대과(大科)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에 있어서도 수석 아니면 차석의 성적을 올린 것만 보더라도 그의 재질이 결코 남에게 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학(太學)에서 함께 생활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그를 영남의 수재라 한 것은 결코 과장만은 아닌 듯하다.
비록 재질이 뛰어난다 하더라도 열의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선생은 대단한 학구열의 소유자였다.
이미 14세 때부터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조용히 생각할 정도'로 학문을 좋아하였고, 그것이 20세 경에는 침식을 거의 잊어가며 독서와 사색에 잠길 정도여서 마침내 일생동안 그를 괴롭히던 '몸이 야위는, 일종의 소화 불량증'을 일으켰다. 심지어 안질로 오랫동안 고생할 경우에도 독서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제자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군수직을 버리고 귀향할 때만 하더라도 그의 짐꾸러미는 오직 몇 상자의 책 뿐이었다고 한다.
퇴계는 '지식(知識)' 그것에 목적을 두지 않았으며, 가장 중요시한 것은 '실천(實踐)'이다. 학자가 날마다 공부하는 것은 몸을 닦아 체험하는 것이지, 어찌 입으로 세상살이를 함부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위험한 학문이라며 손과 몸으로 그날 공부한대로 모두 실천해 보는 것이 참된 학문이라도 제자를 깨우쳤다.
지금 우리의 지적(知的) 수준은 얼마나 높은가? 모두 고등 교육, 대학 교육을 다 받아 머리속에는 많은 지식이 있는데, 행동은 차라리 배우지 못했던 옛날사람보다 못하다고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가.
'지행병진(知行竝進)'은 알면 그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배움도 없이 허식을 부려 남에게 알리는데 힘쓰고, 이름과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배우고, 수양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학문이라 했다. 좀 깊게 이야기하면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해서 군자는 깊은 골짜기의 난초처럼 남모르게 향기를 풍기는 것이라며 겸손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이란 지(知)·덕(德)·행(行)의 심덕이 없고 밖으로 허식을 부려 남에게 알리는데 힘쓰고 이름과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선생은 과거 급제 이후로 벼슬살이 십여 넌이 지난 뒤로부터 '위인지학'을 버리고 '위기지학'을 해야겠다는 각성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52세 되는 해에 조식(曺植)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쓴 일이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옛 사람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고 친구들이 강권하기 때문에 과거로써 녹리(祿利)를 취하는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때에는 실로 아는 것이 없어서 그 말에 곧 마음이 동하여 우연히 벼슬길에 오르게 되면서부터 티끌 세상에 빠져들어가 날마다 분주히 지내다 보니 다른 것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뒤로 병이 더욱 심해지고 또 스스로 헤아려 보니 세상에서 아무 한 일도 없는 것을 느끼게 되자 비로소 머리를 돌리고 발을 멈추고 옛 성현의 글을 더욱 많이 얻어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늦게 나마 길을 고쳐잡고 방향을 돌이켜서 느즉이 볕이나 거두어 볼까하여 벼슬 자리를 사양하고 책을 메고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것을 더욱 구하여 혹 하늘의 신령이 도와서 한 알 두알, 한치 두치 쌓고 쌓아가는 도중에 만분의 일이라도 얻는 것이 있게 되면 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이 만년에 벼슬을 사양한 것은 물론 병과 노쇠 때문도 있지만 주로 학문에 전력하기 위해서 벼슬을 그만두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도학을 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도의 체득, 실천이 다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 선생 만년에 이르러 도학 정신을 받아들여 성학(聖學)과 자기 완성의 학문의 길로 매진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사상은 이(理)와 경(敬)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학문적으로는 '이(理)'를 높이는 일이요, 인간적으로 일생은 경(敬)으로 살아간 일이 선생의 참모습이다.
선생은 거듭 말한다. "학문하는 데는 고귀하고 현묘한 생각을 지닐 것이 아니라, 마땅히 본분 명리에 의하여 아주 가깝고 평범하며 명백한 공부를 하여 연구와 체험을 오래 쌓으면, 날이 갈수록 고심(高深)하고 원대하여 끝이 없는 곳을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리해야만 옳게 얻을 것이다."
무릇 선비가 세상에 나서 벼슬을 하거나 집에 있거나 혹은 때를 만났거나 때를 만나지 못하거나를 막론하고 그 목적은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옳게 행하는 일 뿐이니 화와 복은 노할 것이 몬된다. 그러나 일찍부터 이상스레 여기는 바는 우리 동방의 선비로서 조금 뜻이 있고 도의를 사모하는 사람은 화를 당하는 이가 많으니 비록 땅이 좁고 인심이 박한 까닭이라 할지라도 역시 그 스스로 미진한 곳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미진하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은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서 너무 높이 자처하며 때를 헤아리지 못하고 세상을 경륜하겠다고 용감히 날뛰기 때문이니 이것이 그 실패를 가져오는 길이다.
오랜 시일을 두고 공부하기로 기약하고 나아가거나 물러감에 있어서도 학문을 주로 삼지 아니함이 없어서 의리의 무궁함을 깊이 알게 되면 항상 부족함을 느낄 것이며, 내 허물 듣기를 기뻐하고 착한 것을 취하기를 즐기어서 참다운 노력을 오래 하게 되면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쌓이게 되어 공(功)이 저절로 높아지고 업(業)이 저절로 넓어지게 될 것이니 이 경지에 이르러서야 위에서 말한 세상을 경륜하고 도(道)를 행하는 책임을 비로소 맡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인품에 대하여 문인(門人)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까다롭지 않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공명정대한 것은 선생의 도(道)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상서로운 구름과 같은 것은 선생의 덕(德)이요, 베나 무명처럼 절박하고 콩이나 수수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다. 가슴 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맑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연해서 정금미옥(精金美玉)과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과 같고 깊기는 연못과 같았으나 바라보면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선생은 천성이 호화스러운 것보다는 검소하고, 잘난 척하기보다는 항상 겸손하였으며, 세상에 나아가서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청아하게 살기를 좋아했으며, 나라를 위한 정치적 경륜이 없는 바 아니었지만 어지러운 정국에 뛰어들어 권력(權力)을 휘두르거나 당파싸움에 휩쓸려 들어가서 정쟁(政爭)을 일삼기보다는 수기(修己)에 더욱 힘쓰면서 성인(聖人)의 학문에 전념함으로써 도통(道統)을 이어나가는 동시에, 후진을 교육함에 전력을 기울여서 인재양성을 도모함으로써 인간사회의 영원하고도 근본적인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移草居於溪西 名曰 寒樓庵』, 50세(1550)작
茅茨移構澗巖中 초가집을 옮겨 시내 바위 사이에 지으니
正値巖花發亂紅 바위 틈의 붉은 꽃은 활짝 피어났어라.
古往今來時已晩 그럭저럭 때는 이미 늦었으나마
朝耕夜讀樂無窮 아침에 갈고 저녁에 읽으니 즐거움 끝없어라.
『正月二日 立春』 其二, 52세(1552)작
黃卷中間對聖賢 누런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여
虛明一室坐超然 반 밝은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문에서 봄소식을 또 보나니
莫向瑤琴嘆絶絃 문고야 줄 끊어졌다 한탄을 말라.
柴荊澹無事 아늑한 오막살이 일이 없는데
圖書盈四壁 도서만 네 벽에 가득하도다.
古人不在玆 옛 사람은 여기에 있지 않으나
其言有餘馥 그 말의 남은 향기 그윽도 해라.
歸來舊書室 옛날의 그 서재로 돌아들 와서
靜對香煙浮 고요히 향피우고 앉았노라니
猶堪作山人 산속의 늙은이는 되었건만은
幸無塵世憂 티끌세상 근심없이 다행이라네.
이런 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선생이 관계(官界)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와 고요한 산 속에서 그간의 모든 분요하고 괴로운 심정을 잊어 버리고 오직 독서와 사색에 잠기게 된 심정을 능히 알 수가 있다.
6. 사 상
선생은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 심성(心性)에 관한 이론(理論,理說)이 아무리 복잡다단(複雜多端)하더라도 그 목적은 단 하나 '알인욕(알人慾) 존천리(存天理)' 하려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즉, 감성적(感性的)인 욕구인 인욕(人慾)을 막고 이성(理性)인 천리(天理)에 따라 행위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알인욕 존천리'는 경(敬)의 태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성(誠)은 하늘의 도(道)요 경(敬)은 인사의 근본이니 경(敬)은 곧 성(誠)이다. 성과 경은 표리(表裏)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성을 주로 하는 것이 경이며, 경에 의해서 성은 나타나고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은 실천적 의미를 가진다.
선생은 마음을 산만(散漫)하지 말고 항상 정신을 통일 집중된 상태로 지니고 모든 기거 동작을 가볍게 가지지 말고 조심하고 삼가는데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말할 때도 경(敬)해야 하고 움직일 때도 경(敬)해야 할 것이며 앉아 있을 때도 경(敬)해야 한다. 이는 일부러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심신이 숙연해지고 표리가 하나로 되는 경지가 경(敬)이다. 이 경(敬)의 태도를 취하면 천리(天理)가 무엇인지 마음 속으로 스스로 알게되기 때문이다. 선생이 항상 경(敬)을 위주로 학문을 한 이유가 여기에서 밝혀진다.
그런데 존천리(存天理)의 구체적 실현이란 일상 생활에서 찾는다면 때에 따라 적절하고 변화에 따라 알맞게 예(禮)를 실현하는 것이다. 합례적(合禮的) 행위 즉 윤리의 실현이 곧 존천리의 구체적 내용이 된다.
당시 사회에 대한 선생의 합리화는 심성설(心性說)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자신이 심성설을 포괄하는 만년의 대표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그 결실을 맺는다. 그는 성학십도를 통하여 군주(君主)의 심성수양(心性修養)에 의한 덕치(德治)가 궁극적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는 우주 자연 질서와의 일치 현상까지 가져올 수 있음을 과거 자신의 성리설(性理說)로 밝힌다.
다시 말하면 군주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자질을 갖춤으로서 덕치에 의한 백성을 위한 왕도정치가 가능하다는 종래의 유가관념을 다시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기설적 존재론의 근거 위에서 총체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유가류(儒家類)의 체제에 대한 새로운 합리화를 성학십도를 통하여 의도한다.
이것이 일본의 모토다 에이후(元田永孚)에 의한 이른 바 일본 명치(明治)의 교육칙어(敎育勅語)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을 함께 타고 태어났다.
◈이(理)는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본성으로 사단(四端)의 성격이다.
이(理)=이성(理性)
◇ 측은지심(惻隱之心) : 불쌍함을 앎
◇ 수오지심(羞惡之心) : 부끄러움을 앎
◇ 사양지심(辭讓之心) : 양보하는 마음
◇ 시비지심(是非之心) : 옳고 그름을 판단
이성(理性)을 거꾸로 하면 성리(性理) 즉 성리학(性理學)이 된다.
퇴계 선생은 이성과 칠정이 사이좋게 성장할 수 있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고 이성(理性)과 기성(氣性)을 구분함으로써 이성을 키우기 위해 칠정을 억제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노하지마라,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理貴氣賤) 등. 퇴계는 그 방법으로 거경(居敬)과 신독(愼獨)을 택했으니, 제자들과 함께하는 자리는 공경의 독서이며 혼자일 때는 흐트러짐을 경계하는 신독의 독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기(氣)는 무조건 멀리하고 이(理)만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理)로서 기(氣)를 다시려 모든 사물을 냉철하게 운영해 나아가야 한다는 조화의 원리를 극력 강조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사에 있어서도 감성(感性)을 무시하고 이성(理性)일변도로 살아간다면 인간생활은 인정도 애정도 없는 삭막하고 냉혹해질 것이며 그 반대로 이성을 전연 무시한 채 감성(感性)만으로 살아간다면 도덕 윤리가 피폐하여 인간생활이 동물생활로 전락해 버릴 것이기 때문에 이(理)와 기(氣)의 조화를 통해서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理) 자의 뜻에 대하여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배를 만들어 물 위를 다니고 수레를 만들어 땅 위를 다닌다'는 말을 자세히 생각해 본다면 나머지는 모두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배는 당연히 물 위를 가야하며, 수레는 당연히 땅 위를 가야한다. 이것이 이(理)이다. 배이면서 땅 위를 가고 수레이면서 물 위를 간다면 그것은 이가 아니다. 임금은 어질어야 하며, 신하는 공경하여야 하며, 아비는 사랑하여야 하며, 자식은 효도하여야 한다. 이것이 이(理)이다. 임금이면서 어질지 않으며, 신하이면서 공경하지 않으며, 자식이면서 효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理)가 아니다. 천하에 당연히 행해야 하는 것이 이(理)이며, 당연히 행해서는 안되는 것이 비리(非理)이다. 이런 방식으로 추리해 나가면 이(理)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이(理)는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며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능히 참됨을 쌓고 힘쓰기가 더욱 어려운 것"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사물에는 대소(大小)의 차이가 있지만, 이(理)에는 대소(大小)라는 개념이 없다. 아무리 밖으로 나가 보아도, 그 바깥이 없는 것[無外]이 이(理)이며, 아무리 안으로 들어가 보아도 그 안이 없는 것[無內]이 이(理)이다. 방향도 없고 장소도 없고 형체도 없으면서 어디에서나 충족하여, 거기마다 하나씩 태극을 갖추고 있어서 남거나 모자라는 일을 볼 수 없다." 하였다.
제자가 묻기를 "생각이 복잡해지는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씀하기를 "사람은 이(理)와 기(氣)가 합하여 마음(心)이 되었다. 그래서 이(理)가 주재(主宰)가 되어 기(氣)를 거느리면, 마음이 고요하여 지고 생각이 통일되어 자연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지만 이(理)가 주재 노릇을 못하고 기(氣)한테 눌리면, 마음이 흔들리어 어지러워져서 그 끝이 없다. 그리하여 온갖 못된 생각들이 자꾸만 몰려들어서, 마치 무자위가 빙글빙글 돌 듯이 잠시도 가만히 붙어있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사람이란 잡념이 없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잡념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단지 공경[敬]하는 일에 불과하다. 공경하면 곧 마음이 통일되고, 마음이 통일되면 잡념은 저절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7. 문 필
선생은 학문적 사상적으로 큰 업적을 남겨 동방 성리학의 거벽(巨擘)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時)와 문장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필법도 뛰어난 명필이기도 했다. 특히 선생의 편지글은 우리나라 제일이라 평가되고 있다. 선생은 오직 도학에 정진하는 학자의 전형이었으면서도 문장과 시가(時歌)를 결코 경시하지 않아 이 방면에도 매우 뛰어난 재주와 솜씨를 발휘했다.
선생은 말하기를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학자는 문장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문장을 알지 못하면 비록 글을 약간 안다 할지라도 그 뜻을 말로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학자, 아니 모든 인간에게 문장에 대한 수련이 없이는 자기의 사상, 감정이나 의사 표시를 명확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은 본래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정이 섬세하며 기상이 청정고일(淸靜高逸)하고 운치가 있어 자연을 사랑하고 전원(田園)을 즐기어 때때로 사시풍물의 변화와 사물과 인정에 접하여 감회가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시를 읊었다. 이렇게 하여 모인 시는 그의 문집에 모두 9권, 2천여 수나 되는 분량이 남아있을 정도로 많다. 다음에 몇 수의 시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시냇가에서 산을 넘어 걸어가 서당에 이르다.
化發巖崖春寂寂 바위에 꽃이 피어 봄날은 적적하고
鳥鳴澗樹水潺潺 나무에 새가 울고 시냇소리 잔잔해라
偶從山後携童冠 우연히 아이들 데리고 산을 돌아거닐다가
閒到山前問考槃 매 앞에 한가히 와서 선경을 보노라.
봄 날 시냇가에서
雪消氷泮록生溪 눈 녹고 얼음 풀려 푸른 물 흐르는데
淡淡和風양柳堤 살랑살랑 실바람에 버들가지 휘날린다
病起來看幽興足 앓다가 일어나 보매 그윽한 흥이 넘치노니
更憐芳草欲抽荑 꽃다운 풀 새싹트니 귀 더욱 어여뻐라.
춘일한거 (春日閒居)
不禁山花亂 산꽃의 어지러움은 싫지 않으며
還憐徑草多 길섶의 풀 우거짐은 사랑스러라
可人期不至 다정한 사람은 끝내 오지 않으니
柰此綠尊何 이 푸른빛 술두루미를 어찌 할거나.
綠染千條柳 푸르게 물든 것은 천 가지 버들이요
紅燃萬朶花 붉게 타는 것은 송이 꽃이로다
雄豪山稚性 웅장하고 호탕한 것은 산꿩의 성질이요
奢麗野人家 사치하고 고운 것은 들 사랑의 집일러라.
기상과 기백과 지조에 관한 시
生當絶壑臨無底 말없는 깊은 골, 벼랑에 사는 노송나무!
氣拂層소壓峻峰 기개는 하늘을 떨치고 메뿌리를 위압한다.
不願靑紅장本性 울긋불긋한 게 본성 해침 원치 않아
肯隨桃李媚芳蓉 복숭아 오얏따라 어찌 아양피우랴!
도산십이곡
(其二)
연하(煙霞)로 지붕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늙어가네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其三)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봐
고인(古人)을 못 봐도 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녀고 엇절고.
(其五)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긋디 아니 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8. 언 행 록
선생은 소년 때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관조하는 철학적인 천품이 남달랐다. 18세 봄에 연곡(燕谷)에 있는 야당(野塘)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슬 머금은 풀잎 싱그러이 물가에 우거지고
작은 연못의 물 티없이 맑고 깨끗하도다.
떠가는 구름과 나는 저 새도 본래의 연관이 서로 있는 것
다만 때때로 제비의 차고 가는 발길에 물결 일까 저어되도다
선생은 여러 달을 두고 연구를 하다가 혹시 모르는 곳이 있더라도 억지로 알려고 하지 않고, 한쪽에 미루어 두었다가 뒤에 차근히 음미하여 뜻을 통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학문의 길에 너무 무리를 하면 도리어 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제자 이덕홍(李德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 학문에 뜻을 두어 낮에는 쉬지 않고 밤에도 잠을 자지 않으면서 공부를 하다가 결국에는 고치기 어려운 병을 얻게 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이 기력을 살피고 마음씀을 정도에 맞게 하여야 한다. 몸을 돌보지 않고 공부하여 병까지 나게 할 것은 없다."
선생은 나이가 점점 많아지고 병은 깊어 갔지만 학문을 진전시키기에 더욱 힘쓰고 도를 지키기에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엄숙하고 공경하여 혼자일 때 더욱 엄격하였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을 쓰고는 온종일 책을 보며, 혹은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그 마음 살피기를 해가 처음 솟아오르는 때와 같이 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를 함께 지니고 지(知)와 행(行)이 아울러 나아가서 겉과 속이 일치하고 본(本)과 말(末)을 겸비하였으므로 큰 근원을 밝게 보고 큰 근본을 굳게 세웠다. 그 지극한 정도를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동방에 퇴계 한 사람뿐일 것이다.
- 정유일의 기록
"내가 일찍이 금난수(襟蘭秀)의 집에 간 일이 있었는데 산길이 몹시 험했다. 그래서 갈 때에는 말 고삐를 잔뜩 잡고 조심하는 마음을 풀지 아니하였는데, 돌아올 때에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갈 때의 길 험한 것을 잊고 마치 탄탄한 큰길을 가듯 하였은즉, 마음을 잡고 놓음이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라고 하였다.
- 김성일의 기록
우성전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 들어온지 오래 되었지만, 혼자 조용히 계실 때나 남과 더불어 이야기 할 때에 한번도 일부러 자랑하려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또한 게으르고 거만한 모습도 본적이 없었다.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선생의 학문은 성현으로 근본을 하면서 스스로 얻은 바의 진실을 참고 하였다. 남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사람의 윤리를 주된 것으로 하면서 이치[理]를 밝히는 공부를 첫째로 삼았다. 몸가짐은 바르게 하여 구차스레 남다른 행동을 취하지 아니 하였다.
스스로의 몸 닦기를 채근하면서도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아니하였다. 남을 따르는데 힘 썼으나 자신의 모자람은 숨기지 아니하였다. 남을 따르는데 힘 썼으나 자신의 모자람은 숨기지 아니하였다. 사람을 대하기를 화기로써 하니 사람들이 저절로 존경하였고 아랫 사람을 대하기를 너그러움으로써 하니 그들이 절로 조심하였다. 한갓 절조와 선행으로써 이름을 이루려고 하지 아니하였으니, 학문과 사람됨의 올바름을 동방에서 그와 겨눌 사람이 없을 것이다.
후학을 가르치는데 싫어하지도 않고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이들을 친구처럼 대접하여 끝까지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멀리서 찾아와 질의와 가르침을 청하면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가르치되 반드시 먼저 입지(立志)토록 하고 주경(主敬)과 궁리에 힘쓰도록 하여 순순히 계발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조목(趙穆)과 선생이 나눈 말씀이다
"학문이란 한갓 책을 읽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천하를 두루 다녀 견문을 넓혀야 하고, 의리 또한 혼자서 얻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스승과 벗의 도움과 깨우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의 말이 매우 옳다. 그대의 뜻한 바를 들으니 매우 가상하다"하고 "아무개는 글 재주는 매우 좋지마는 사람됨이 아주 소홀하니 한스럽다. 문학만 힘쓸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긴요하니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문학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학을 배우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하라. 학문이라 마음을 바르게 하는 방법인데" 라고 하였다. 잠시뒤 절하고 하직하니 선생이 일어나 전송하면서 "그대는 힘쓰라"하였다.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를 줄 모르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큰 폐단이다. 천하의 의리가 무궁한데 어찌 자신만이 옳고 남은 그르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여러 사람과 말을 나눌 때는 부드러운 말로 하여 다투지 않았다. 그러나 높은 벼슬아치[大夫]들과 말할 때에는 정색하여 철저히 시비를 가리려고 하였다.
남의 허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혹 나쁜 소문이 들리면 반드시 가엽게 여겨 애석해 하는 뜻이 있었고 당시의 정치의 잘못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혹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면 반드시 근심하는 기색을 나타내었다.
"형제간에 잘못이 있으면 서로 말해 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다만 나의 성의를 다하여 깨우치게 하여야만 비로소 의리가 상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성의가 따르지 않고 한갓 말로써 바로 꾸짖으면 대개는 그 사이가 멀어지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그러므로 옛말에 "형제이이(兄第怡怡 : 서로 온화하고 화기로운 모습)"이라 한 것은 실로 이러한 까닭이다 하였다.
선생은 검소한 것을 숭상하였다. 세숫대야는 질그릇을 썼고 앉는데는 부들자리를 깔았다. 베옷에 실띠를 매고 짚신과 대막대기를 썼는데 생활이 이렇게 담백하였다. 계상의 집은 심한 추위나 더위나 비에, 남들은 견딜 수 없을 지경이지만 선생은 넉넉한 듯이 여겼다. 영천(永川)군수 허시(許時)가 지나다가 선생을 뵙고는 "이렇게 비좁고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견디십니까?"하니 선생은 천천히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어려운 것을 모릅니다." 하였다.
아들 준(寯)에게 주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책을 읽는데 어찌 장소를 가릴 것인가. 서울에 있거나 시골에 있거나 오직 《입지》가 어떠한가에 있을 뿐이니 모름지기 십분 힘써 노력하여 날로 부지런히 공부하고 유유히 함부로 세월을 보내지 않도록 하여라."
가난하고 궁한 것은 선비의 예삿일인데 어찌 개의할 것인가. 너의 아비도 이 일로 남의 웃음거리가 된 일이 많았다. 다만 마땅히 굳게 참고 순리대로 처세하고 수양하여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선생은 남에게 물건을 받을 때 진실로 의가 아니면 비록 조그마한 것이라도 받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고을 원이 교제의 예의로 보내는 것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공자의 말씀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친구라 삼지 말라" 하였으니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는 일체 사귀지 않아야 하겠습니까?"하고 덕홍이 물으니, 선생은 "예사 사람의 정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기를 좋아하고 나은 사람과는 벗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공자는 이러한 사람을 위해서 한 말이요, 일체 벗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 말은 아니다. 만일 한결같이 착한 사람만 가려서 벗한다면 이 또한 편벽(偏僻)된 일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귀다가 그 속에 휩쓸리면 어찌 되겠습니까"하니 "착하면 따르고 악하면 고칠 것이니 착함과 악함이 모두 다 나의 스승이며 만일 악에 휩쓸린다면 학문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하였다.
선생을 모시고 도산서당에 앉아 있었더니 들 앞에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서당의 일을 맡아보는 스님이 "그 사람의 행동이 과합니다. 나으리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도 않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말탄 사람이 그림 속의 사람처럼 좋은 경치를 더해 주는데 무슨 허물이겠는가?" 하였다.
9. 백세의 사표
퇴계가 관리의 상으로 부각되거나 교육자 혹은 학자의 상으로 부각되거나 간에 그가 성실하고 진지한 "인간의 참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 점이 또한 남보다 뛰어났음을 간과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한국 성리학사에 끼친 그의 영향 이외에 그의 "참다운 인간상"이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고매한 인격의 승화된 기품을 한국 유학자 중 누구보다 뚜렷이 보여 줌으로써 뒷사람들을 끝없이 매료시키는 까닭에 우리는 그를 한국 성리학자 중에서 첫 번째로 손꼽게 된다고 하겠다.
그밖에 외국의 학자들이 퇴계와 그의 학문을 찬탄한 사실은 바로 그가 지닌 학문의 깊이와 인격의 진가가 결코 국내 성리학의 영역에서만 평가될 성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의 근대 유학이란 임란을 통하여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과 같이 퇴계를 사숙(私淑)한 우계(牛溪) 성혼(成渾, 1635-1698)의 문인 등의 영향을 받고 발달된 만큼, 일본 유학에 대한 퇴계의 영향이란 실로 막대하다. 예를 들면 근세 일본 유학의 대표자(三大儒宗)중의 하나인 산기암재(山崎闇齋)는 퇴계 저서 중의 중요한 것을 다보고 퇴계를 존숭하여 퇴계 학문을 강론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이루었던 것이다.
A. 운 영 대 (雲 影 臺)
서원을 중심으로 강을 임해 양쪽 산록의 절벽을 이루었는데, 서쪽에 운영대가 있다. 이곳은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며 조망이 아름다워 선생이 평소 산책하시던 장소이다.
운영(雲影): (天光雲影共排徊) 햇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돈다.
B. 천 연 대 (天 淵 臺)
서원을 중심으로 강을 임해 양쪽 산록의 절벽을 이루었는데, 동쪽에 운영대가 있다. 이곳은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며 조망이 아름다워 선생이 평소 산책하시던 장소이다.
천연(天淵):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
임술년 가을달밤에 천연대에 올라 읊은 시
밤중에 신선이 되어 놀다가 꿈을 깨어서
일어나 친구를 불러 강위의 언덕에 올랐다네
맑은 바람은 생각이 있는 듯 앞가슴을 헤치고
밝은 달은 정이 유달라 술잔은 권하네.
C. 시 사 단 (試 士 壇)
도산(陶山)물 양양(洋洋)히 흘러 그 위에 단(壇)이로다
단(壇)에 계급(階級)이 있고 물엔 연원(淵源)이 있나니
단에 오르고 물에 임함에 류(類)를 따라 뜻을 펴노니
선생(先生)의 덕화(德化)요 임금님의 은혜이다
서원의 맞은편 강 건너 석축 위에 있는 건물이다. 정조16년(1792년)에 정조께서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과시(科試)를 보인 곳이다. 정조 임금께서는 선생을 추모하는 뜻에서 제문을 친히 지어 서원에 제사를 올렸다. 아울러 영남일대의 선비를 장려하고 가상하는 뜻으로 이곳 도산서원에서 어명으로 서원 앞 강변에서 이만수가 주관하여 별시를 보았다.
서원에서는 임금의 제문으로 제사를 올리는 식전(式典)이 있었는데 7,228명의 선비가 의관을 정제하고 엄숙히 지냈다. 강변에 설치된 시험장에 과시를 보이니 답안지를 낸 사람이 3,632명 이었다. 시험지는 한양으로 봉상하여 왕이 친히 급제(及第)2명, 진사(進士)2명, 초시(初試)7명을 뽑아 각기 시상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웠는데 근래 안동댐으로 인해 물이 차서 단을 올려 지금에 이르고 있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다.
1. 상 덕 사 (尙 德 祠)
서원 가장 뒤쪽에 있는 건물로 보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으로 퇴계 선생의 위패와 제자인 월천 (月川) 조목 (趙穆)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월천은 선생 곁에서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선생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서원에서 제자들을 훈육하였으며 특히 청렴 강직함이 돋보인 수재이다. 매년 음력 2, 8월 중정 (中丁)일에 향사 (享祀)를 지낸다. 주향위 (主享位)로 정면 중앙에서 남항으로 '퇴도이선생 (退陶 李先生)'을 모시고 종향위 (從享位)로 동쪽벽에서 서향으로 '월천 조공 (月川 趙公) '을 모시고 있다. 전국 각지에 퇴계선생을 봉안하는 서원이 30여개소에 이른다 하니 후학들의 퇴계에 대한 존모 (尊慕)를 짐작할 수 있다. 평소에는 개방되지 않는다.
2. 전 사 청 (典 祀 廳)
상덕사 서편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건물로 향사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여 두던 곳으로, 평소에는 사당(祀堂)지기가 수직(守直)하는 곳이며 제수청(祭需廳)과 주고(酒庫)가 있다. 왼쪽에 보이는 작은 문이 상덕사로 제물을 나르는 통로가 된다.
3. 삼 문 (三 門)
상덕사(尙德祠)로 들어가는 입구로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소에는 개방이 되지 않으며 중앙에 계단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4. 장 판 각 (藏 板 閣)
전교당 동편에 위치한 출판소로서 서원에서 찍어낸 각종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퇴계선생의 문집, 유묵, 언행록, 도산십이곡, 선조어필 등 2790여장의 병서(屛書), 액자(額字), 책(冊)의 판각(板刻)이 소장되어 있다.
5. 전 교 당 (典 敎 堂)
진도문 (進道門)안 정면에 위치하며 도산서원의 중심되는 건물로 선조7년(1574)에 건립, 보물 210호로 지정되었으며, 각종 행사시 강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원규(院規), 백록동규(白鹿洞規), 사물잠(四勿箴), 경재잠(敬齋箴), 국기안(國忌案), 정조왕의 사제문(賜祭文) 등의 현판이 게시되어 있다.
정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은 선조 임금이 사액한 것으로 글씨는 명필 한석봉(韓石峯)이 어전에서 쓴 친필이다.
전교당은 팔작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크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이며 총 건평이 49.6m2이다
6. 상 고 직 사(上 庫直舍)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守護人)이 거처하던 건물로 일반 민가주택 양식을 따라 "ㅁ"자형으로,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다. 상 고직사, 하 고직사의 두 건물이 있다.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주사(廚舍)이기도 하다.
13. 하 고 직 사(下 庫直舍)
상고직사와 기능은 동일하다.
7. 서 재 (西 齋)
전교당 앞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똑같은 건물로 동쪽이 박약재(博約齎)이고 서쪽이 홍의재(弘毅齎)이다. 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홍의(弘毅): '넓고 의연한 마음을 갖자'
8. 동 재 (東 齋)
전교당 앞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똑같은 건물로 동쪽이 박약재(博約齎)이고 서쪽이 홍의재(弘毅齎)이다. 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박약(博約): '학문을 넓히고 예를 지키라'
9. 서 광 명 실 (西 光明室)
진도문을 중심으로 서쪽에 배치된 서원의 장서고 이다. 서광명실은 1930년 (경오년)에 증건(增建)된 건물로 문도를 비롯한 국내 유학자의 문집등 근래에 발간된 각종 책등이 있다. 이곳에는 일본 유학자인 손시교쿠수이가 편찬한 '퇴계서초 (退溪書抄)'가 있어 퇴계학이 일본 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도 알 수 있다. 1217종에 4917권이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 전국 서원 가운데에서 장서로는 고서와 진본이 가장 많다.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 (樓閣式)으로 건축되었다. 광명실 현판 글씨는 선생의 친필이다.
광명(光明): '만권서적 (萬卷書籍) 혜아광명 (惠我光明)' 즉 수 많은 책이 나에게 광명을 준다.
11. 동 광 명 실 (東 光明室)
진도문을 중심으로 동쪽에 배치된 서원의 장서고 이다. 동광명실은 1819 (순조19년)에 세운 건물로 역대와의 내사서적 (內賜書籍)과 선생이 친히 보시던 수택본 (手澤本)이 있다. 1217종에 4917권이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 전국 서원 가운데에서 장서로는 고서와 진본이 가장 많다.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 (樓閣式)으로 건축되었다. 광명실 현판 글씨는 선생의 친필이다.
광명(光明): '만권서적 (萬卷書籍) 혜아광명 (惠我光明)' 즉 수 많은 책이 나에게 광명을 준다
10. 진 도 문 (進 道 門)
동,서광명실 한가운데 자리한 이 문은 도산서원에 출입하는 정문으로 이곳으로 올라오는 계단이 운치가 있다.
진도(進道): 도(道)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12. 옥 진 각 (玉 振 閣)
옥진각 실내전경
성학십도 병풍
등경
서기
청려장
매화등
혼천의
투 호
성학십도
사문수간과 어제발문
도산12곡과 매화시
퇴계선생의 중요한 유물을 보관하기 위하여 1970년 도산서원 보수 정화공사시 신축한 건물로 외부는 한식, 내부는 현대식이다. "금성옥진(金聲玉振)의 줄임말로 "글을 읽는 소리는 금과 같고 글을 떨치것은 구슬과 같다."는 뜻이다.
이곳에 진열된 유품은 모두가 선생이 사용하시던 일용품인 문방구와 실내 비품으로 하나같이 소박하고 검소하며 외면적인 꾸밈과 사치를 떠나 오직 청빈에 만족하신 도학자다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 실내비품
완석(莞席): 왕골로 딴 자리 3개가 전해져 내려 온다.그중 한 개의 배면에는 "이첨지댁 퇴계(李僉知宅 退溪)"라는 자필 글씨가 있다.
안석(案席): 가는 왕골로 짠 기대는 방석.
장추: 의이미로 만든 빗자루.
등경: 등잔을 얹어 놓던 등잔걸이.
백자타호: 선생께서 사용 하시던 그릇. 받침 접시 밑에는 "산(山)"자가 묵서(墨書)되어 있다.
2) 문방구
매화연: 벼루에 매화와 대나무를 조각하여 의장이 고상하고 기법이 매우 정교한 것이 일품으로 문인 김북애(金北厓)가 선생께 선사한 것이다.
옥서진: 매화벼루에 따른 것인데 옥으로 만들어 졌으며 글씨를 쓸 때 종이에 양쪽을 누르는 것이다.
흑단연: 단계산 흑색 목제갑이다.
서 기: 오색으로 된 목조 책상이다.
3) 청려장 : 선생이 평소에 사용하시던 일년초인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다.
4) 매화등 : 밑면의 지름이 28.5cm, 높이 47.5cm의 중국식도기제로서 중간부에 매화 무늬를 투각한 것이 특이하며 용도는 명확치 않다.
5) 투호 : 병을 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청,홍의 죽시(竹矢)를 병 가운데 구멍이나 귀구멍에 던져 넣는 기구. 놀이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6) 혼천의 : 선생이 설계하신 것을 문인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으로 하여금 제작케 한 것인데 천체의 운행과 성좌의 위치를 측정하는 기구이다.
7) 서적류
성학십도 : 유교철학을 알기 쉽게 10가지 도식으로 나타낸 것으로 선생 68세때 17세의 어린 선조 에게 올린 거이다. 선조 임금께서 병풍을 만들어 두고 학문과 덕을 쌓았다. 임금께서는 안으로 성인이 되고 난후에 임금이 되어서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하는 성왕이 되는 학 문이다.
사문수간과 어제발문 : 선생이 제자 조월천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과 정조께서 열람하고 느끼신 소 감을 적은 어필이다.
이퇴계서초 : 선생의 학문을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퇴계학파가 형성되었다. 일본의 손시쿄쿠수 이가 선생의 서를 뽑아 엮은 것으로 선생 8대손 초초암공이 복사한 것이다.
자성록 : 선생이 평소에 친구나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손수 초록해 두고 훗일의 참고와 반성의 자료로 삼아오던 것이다.
도산십이곡 : 선생은 도산의 산수를 예찬하는 연작시조를 12편이나 읊었는데, 이 책은 바로 그 시 조집이다. 전 6곡을 언지라 부르고 후 6곡을 언학이라고 불렀는데, 모두가 학문과 지 상을 읊은 것으로서, 우리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의 하나다.
기 타 : 퇴계선생문집, 심경후론, 계몽전의 등 다수가 있다.
14. 도 산 서 당 (陶 山 書 堂)
세 칸밖에 안되는 작은 건물인데 그나마 재력이 부족하여 4년이나 걸렸던 건물로 1557년에 착공하여 1561년에 완공하였다. 퇴계 선생께서 학문을 연구하고 많은 제자를 교육하였던 곳으로 선생께서 49세 말엽에 풍기군수를 사임하고 지금 도산서원에서 3km 정도 떨어진 종가 건너편에 달팽이 집 같이 조그마한 계상서당 (係上書堂)을 지어 후학을 시작했는데, 선생의 학문이 거울을 보듯 깨끗해 많은 제자들이 입문하여 장소가 협소해 이곳으로 옮겼다.
사색과 연구를 계속하며 제자를 교육하던 단칸방이 "완락재 (玩樂齎)"라 하였으니 뜻은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였다. 제자를 가르치며 휴식을 취하던 마루는 "암서헌 (巖栖軒)"이라고 하는데,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기대서라도 조그마한 효험을 바란다"라는 겸손의 뜻이다.
15. 농 운 정 사
도산서당 서쪽에 있는 8칸의 건물로 도산서당과 함께 선생께서 세운 건물로 당시 문도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제자들이 자율적으로 심체공부 (心體工夫)에 전념하기를 바라던 선생의 정신을 반영하여 "工"자형으로 건축했다. 공부하는데 밝게 하기 위하여 사방에 창문을 많이 내어 채광을 살리고 맑은 공기가 들어오도록 해서 정신을 맑게 하였다.
공부한 마루를 "시습재 (時習齎)"라 하고 뜻은 "학이시습 (學而時習) 불역열호 (不亦說乎)" 즉 "때때로 익히고 학문하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다. 나이든 제자들은 동쪽방, 젊은 제자들은 서쪽방에 기거토록 하여 제자들간에 서로 부담이 없도록 하였다. 제자들이 쉬는 마루를 "관란헌 (觀瀾軒)"이라고 하는데 흐르는 낙동강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흐르는 물의 순리를 터득케 하였다
16. 정 우 당 (淨 友 塘)
서당 앞마당의 연못으로 연(蓮)을 심어 더러운 흙과 물에 자라면서도 때묻지 않는 연꽃을 벗으로 삼아 청빈하게 생활하셨단 선생의 모습을 다소나마 엿볼 수 있다.
17. 절 우 사 (節 友 社)
동쪽 산기슭에 있는 화단으로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 등을 심어 자연과 더불어 벗하며 생활한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18. 정 문 (正 門)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앞에는 넓고 아름다운 정원에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20. 열 정
돌로 된 우물로 물이 맑고 맛이 좋아 선생께서 식수로 사용하셨던 우물이다. 지금도 바로 옆 식수대에서 물맛을 볼 수 있다.
퇴계주요저서
- 自省錄 -
퇴계가 스스로 자기 반성의 지표로 삼았던 자찬 서한집으로 학문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사색, 그리고 성실하고 겸손한 인생관이 문맥과 행간에 감동적으로 점철된 명저!
- 論四端七情書 -
奇高峰과 8년 여에 걸쳐 전개한 논변적 토론의 소산으로 한국화된 성리학의 기념비적인 역작이며 조선조 유학의 학풍을 전환케 한 퇴계 철학의 대표작!
- 人心道心辯 -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한 心法인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의 人心과 道心에 관하여 논한 것으로 爲己之學으로서 보다 심화된 성리학의 대표적 心性說의 하나!
- 聖學十圖 -
만년의 퇴계가 학문적 온축을 기울여 편술한 것으로 圖解를 통해 중심적이고 간명하게 정리한 성리학적 우주론, 심성설, 수양론의 집약서!
- 戊辰六條疏 -
퇴계가 68세(선조2년) 되던 무진(戊辰)년에 올린 시무봉소(時務封疎)로 당시 성리학의 노대가였던 퇴계의 경세관(經世觀)을 담은 성리학적 통치이념의 결정판!
- 義利之辨 -
사리(私利)를 버리고 공의(公義)에 충실하도록 하는 유학의 기본 가르침을 더욱 정미하게 밝힌 성리학적 처세술!
- 天命圖說 後敍 -
정추만(鄭秋巒)이 지은 [天命圖]와 그 설에 대한 퇴계의 견해와 사단칠정의 해석을 정정하게 된 이유를 해명한 퇴계의 성리학적 온축이 여지없이 드러난 명저!
- 心經後論 -
퇴계 자신의 성리학에 임한 태도와 성리학적 위기의 열매를 맺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을 알려주는 퇴계의 인물됨과 학구정신이 담긴 자료!
- 心無體用辯 -
화담(花潭)의 문인 이연방(李蓮坊)이 주장한 [心無體用]을 반박한 것으로 동(動)과 상(象)이 없는 심(心)과 이(理)에도 체용(體用)을 적용할 수 있음을 밝힌 변론!
- 非理氣爲一物辯證 -
같은 정주(程朱)계통이지만 주기(主氣)로 흐르는 서화담(徐花潭)과 나정암(羅整庵)의 이기설을 변박하여 "理/氣"가 실제로 분리되지는 않으나 이론적으로는 구분되는 것이라는 것을 밝힌 변증!
- 傳習錄 論辯 -
왕양명(王陽明)의 [전습록(傳習錄)]을 논박한 것으로 특히 "知行合一說"을 정주사상(程朱思想)에 입각하여 반박하여 양명학의 오류를 지적한 명저!
-------------------------------------------------------------------------------
Copyright 1999 by JongHa Kim All Rights Reserved realtour@hanmir.com
퇴계주요저서2
格物/物格論-
[大學]의 條目에 나오는 "格物"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밝힌다"라는 뜻으로 그 해석상에서 많은 논란이 있는 대목으로 이에 대한 퇴계의 입장을 밝히는 논변!
- 異學辯 -
정학(正學)이 아닌 이단(異端)의 학문에 대한 퇴계의 비판서!
- 腔子外是甚底 -
나와 만물은 서로 다른 것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萬物一體論"을 경(敬)을 위주로 하여 해설한 퇴계의 논저!
- 陶山十二曲 -
퇴계가 65세 때에 지은 전 6곡, 후 6곡으로 이루어진 12수의 단가(短歌)로 六經 중 詩經의 氣風을 이은 퇴계의 대표적 저작 중 하나!
유난(幽蘭)5)이 재곡(在谷)하니 자연이 듣기 좋아
백운(白雲)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기 좋다.
이중에 저 한 미인(美人)을 더욱 잊지 못하여라.
다섯째[其五]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여섯째[其六]
우부(愚夫)도 알며 하거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못 다 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하는 중에 늙는 줄을 몰라라.
1) 산림에 묻혀있는 어리석은 사람
2) 불치의 병. 여기서는 퇴계선생이 자연을 사랑하는 것을 지칭한다
3) 연기 끼인 듯한 저녁 노을
4) 백성의 순박한 풍속. 중국의 선인 이순풍의 이름이기도 하다.
5) 향기 그윽한 난꽃.
二. 도산육곡(陶山六曲) 둘째
첫 째[其一]
천운대(天雲臺) 돌아들어 완락재(玩樂齋) 소쇄(簫쇄) 한대
만권생애(萬券生涯)로 즐거운 일 무궁(無窮)하여라
이 중에 오가는 풍류(風流)를 일러 무엇하리오.
둘 째[其二]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귀머거리는 못 듣나니
백일(白日)이 중천(中天)하여도 맹인은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총명(耳目聰明) 남자(男子)로 농인/맹인같지 말리라.
셋 째[其三]
고인(古人)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보지만
고인(古人)을 못 봐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가고 어이하리
넷 째[其四]
당시(當時)에 예던 길을 몇해를 버려두고
어디가 다니다가 이제사 돌아온고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마음 먹지 말리라.
다섯째[其五]
산앞에 유대(有臺)하고 대 아래에 유수(流水)로다
때 만난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거든
어찌하여 교교백구(皎皎白駒)6)는 멀리 뜻을 두는고
여섯째[其六]
츤풍(春風)에 꽃이 만산(滿山)하고 추야(秋夜)에 달이 만대(滿臺)라
네 계절 가흥(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물며 어약연비(魚躍鳶飛)7) 운영천광(雲影天光)8)이야 어찌 끝이 있을까.
6) 하이얀 망아지 한 필.[詩經] (小雅)편에 보임.
7) 솔개는 하늘을 날고 고기는 연못에 뛰네. [詩經] (小雅)편에 보임.
8) 초당에 구름사이로 비치는 하늘 빛이란 뜻으로, 주자의 시에 나오는 말이다.
活 人 心 方
[中 和 湯]
[和 氣 丸]
[養 生 之 法]
[治 心]
[去病延壽六字訣]
성인은 병들기 전에 다스리고 의원은 병이 난 후에 고치는 것이니 前者를 活心또는 修養이라 하고 後者를 樂餌라 한다. 다스리는 법이 이와 같이 두 가지이나 병의 근원은 하나이니 모두가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마음의 정신은 主가 되고 고요하거나 바쁜 것이 모두 마음에 따르는 것이다." 하였으니, 마음은 道의 근본도 되고 禍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면 모든 일에 태연하고 맥박이 활발하나 고요치 못하면 氣血의 흐름이 고르지 못하고 탁하여 百病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성품이 고요하면 情은 평안해지고 마음이 산란하면 정신이 피로하나니 참됨을 지키면 뜻이 만족한다. 여러 가지 복잡하게 추구하면 생각이 복잡하여 정신이 산란하고 정신이 산란하면 氣가 흩어져 병이 들고 죽게 되는 것이다. 이는 평범한 말인 듯 싶으나 道의 깊은 뜻에 합치되는 일이다.
《活人心方》은 항상 모든 사람을 구하고 사람의 생활을 건강케하여 오래 살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다.
1. 중화탕(中和湯)
약이라고 하니 몇 봉지이고 몇 알인줄 아는데 그런 물질적인 약이 아니고, 만병의 근원인 마음을 잘 다스려 사기(邪氣)를 막아 원기를 회복하여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치료법으로 중화탕(中和湯)은 신선하고 깨끗한 30가지 약재를 골고루 조제한 후 서서히 달여 수시로 따뜻하게 데워서 들면 정신이 맑아져 의사가 못 고치는 병도 고친다고 했다.
事 無 邪(사무사) : 생각을 간사하게 갖지 말 것
行 好 事(행호사) : 좋은 일을 행할 것
莫 欺 心(막기심) : 마음에 속임이 없을 것
行 方 便(행방편) : 필요한 방법을 잘 선택할 것
守 本 分(수본분) : 자신의 직분에 맞게 할 것
莫 嫉 妬(막질투) : 시기하고 샘내지 말 것
除 狡 詐(제교사) : 간사하고 교활하지 말 것
務 誠 實(무성실) : 성실히 행할 것
順 天 道(순천도) : 하늘의 이치에 따를 것
知 命 限(지명한) : 타고 난 命의 한계를 알 것
淸 心(청 심) : 마음을 맑게, 깨끗이 할 것
寡 慾(과 욕) : 욕심을 줄일 것
忍 耐(인 내) : 잘 참고 견딜 것
柔 順(유 순) : 부드럽고 할 것
謙 和(겸 화) : 겸손하고 화목할 것
知 足(지 족) : 주어진 조건에 만족할 줄 아는 것
廉 謹(염 근) : 청렴하고 조심할 것
存 仁(존 인) : 마음이 항상 어질 것
節 儉(절 검) : 아끼고 검소할 것
處 中(처 중) :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조화할 것
戒 殺(계 살) : 살생을 경계할 것
戒 努(계 노) : 성냄을 경계할 것
戒 暴(계 폭) : 거칠게 행하지 말 것
戒 貪(계 탐) : 탐욕을 경계할 것
愼 獨(신 독) : 홀로 있을 때 더욱 삼갈 것
知 機(지 기) : 사물의 기틀을 알 것
保 愛(보 애) : 사랑을 견지할 것
염 退(염 퇴) : 물러서야 할 때 담담이 물러날 것
守 靜(수 정) : 고요함을 지닐 것
陰 즐(음 즐) : 은연중에 덕이나 은혜를 쌓을 것
이렇게 신선하고 깨끗한 30가지 약재를 골고루 조제해서 서서히 달여 수시로 따뜻하게 들면 정신이 맑아져 건강해진다
2. 화기환(和氣丸)
중화탕은 요즘 같으면 한약으로 몸 깊숙히 파고들어 오랜 시간 복용하므로 치료되는 처방약이고, 양약(良藥)은 화기환(和氣丸)이라 해서 아주 급히 필요할 때 한 알씩 먹는 약으로 약재는 참을 '인(忍)'자이다. 말이 필요없고 입을 꾹다물고 침으로 참을 '인(忍)'자를 녹여 천천히 씹어 삼키면 즉효가 있어 병을 낫게 한다.
마음위에 칼이 놓였으니 군자(君子)는 이로써 함용(含容)하여 덕(德)을 이루는 것이다. 분한 것을 참지 못하면 자신이 몸을 병들 게 한다. 싸움을 하고 싶고, 남의 물건이 탐나고, 나쁜 행동을 하고 싶을 때는 바로 이 화기환을 한 알 입안에 넣고 입을 다물고 침으로 녹여 천천히 씹어 삼켜 보면, 분하고, 노하고, 탐하던 마음이 사라진다.
"내가 잘 참았지, 내가 잘 참았어!" 바로 이 참음이 마음과 몸을 상하지 않게 하여 건강을 유지하는데 아주 좋다
3. 양생지법(養生之法)
일상생활 중에서 행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결과는 대단이 큰 것들이다.
비장(脾藏)은 음악을 좋아한다.
비장은 음악을 좋아하며 음악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활동을 시작하며 소리는 비장에서부터 나온다. 비장은 소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주례(周禮)에 의하면 음악으로 식사를 한다고 했다. 즉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를 하는 것이 소화에 좋으며 밤이 짧은 여름같은 때 밤늦게 먹거나 잘 씹지 않는 것은 비장에 무리가 생기며 소화가 잘 안된다.
술을 바르게 마시는 法
술을 마시면 성정(性情)이 즐거워지고 혈맥(血脈)을 잘 통하게 하는 좋은 점이 있으나 과하면 몸에 풍(風)을 일으키고 신장(腎臟)을 상하게 하고 장(腸)의 기능을 나쁘게 한다. 특히 배불리 먹은 뒤의 음주는 아주 나쁘다. 또 술을 급하게 많이 먹으면 폐(肺)를 상하게 된다.
차를 바르게 마시는 法
차(茶)는 언제든지 많이 마셔서는 안되며 하초(下焦)를 허(虛)하고 냉(冷)하게 한다. 공복의 차는 아주 좋지 않으며 배부를 때 한, 두잔 마시는 것이 좋다. 바람은 좋지 않다. 앉은 자리나 누운 자리에 바람이 통하면 그냥 견디고 있으면 아니된다. 특히 노인들은 몸이 약하고 속이 허해서 풍사(風邪)가 들기 쉬우며 처음에는 못 느끼나 결국 몸을 해치게 되니 덥다하여 바람맞이에서 몸을 식히거나 취했을 때 부채질은 좋지 않다
오미(五味)를 적게 쓰면 장수한다.
맵고, 짜고, 달고, 쓴 맛을 적게 쓰면 심신(心神)이 상쾌하게 되며 많이 쓰면 각 장부에 해가 있다. 신 맛이 지나치면 비장을 상하고, 매운 맛이 지나치면 간(肝)을 상하게 되고, 짠맛이 지나치면 심(心)을 상하게 되고, 쓴 맛이 지나치면 폐(肺)를 상하게 되고, 단 맛이 지나치면 신(腎)을 상하게 된다. 맛이 지나쳐 생기는 것을 처음에는 잘 못 느끼나 길게 되면 큰 병을 얻게 된다.
한가지를 오래 지속하면 좋지 않다.
어느 한가지를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심(心)을 상(傷)하고 혈(血)을 손(損)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에 정신을 오래 쏟거나 몸을 고정시키지 말고 변화를 주어야 한다.
할 일 없는 것도 병이다.
사람이 나태해지고 몸이 나른해지는 것도 오래면 병이 된다. 항상 힘을 적당히 써서 생기(生氣)가 잘 소통하고 혈맥(血脈)이 조창(調暢)토록 해야 하는 것이니 예를 들어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바르게 자는 법
잠을 잘 때 말하는 것이 좋지 않고 불을 켜놓지 말고 누워 잘 때의 좋은 자세는 몸을 옆으로 하고 무릎을 굽히는 것인데 그렇게 하여야 심기(心氣)가 평안(平安)하기 때문이다. 몸을 쭉펴서 자면 악귀를 불러 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머리는 자주 빗되 목욕은 가끔하라.
머리를 많이 빗으면 풍(風)을 예방할 수 있고 눈이 밝아진다. 목욕(沐浴)은 자주하면 심복(心腹))을 손상(損傷)해서 권태로움을 느끼게 된다.
여름에 더운 음식이 좋다.
여름에도 노소(老少)불문코 더운 음식을 먹어야 건강에 좋고 뱃속은 따뜻해야 좋은데 그러면 배의 병이 생기지 않으면 혈기가 장성해진다.
여름철 건강법
한여름 더운 때라 하여 찬물로 세수하면 오장(五藏)이 메마르고 진액(津液)이 적어진다. 찬 것을 많이 먹으면 시력을 상하며 냉(冷)한 채소는 기(氣)를 다스리기는 하나 눈이나 귀의 기능을 떨어뜨린다.
기후에 따른 양생(養生)
길을 가다가 갑자기 도는 바람이나 번개, 우레를 만나거나 날이 어두워지면 집안으로 피하여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신(心身)을 상(傷)하게 되나니 당시는 몰라도 오래되면 병을 얻게 된다.
혀밑의 옥천(玉泉)
혀 밑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어 신(腎)과 통하였으니 혀를 입천장에 대고 잠깐 있으면 진액(津液)이 저절로 나와 입 안에 가득할 것이니 천천히 삼키면 오장으로 들어가게 되고 기(氣)로 변하여 단전(丹田)으로 들어가게 된다. 머리는 자주 빗어야 하고, 손으로는 얼굴을 문지르고 이[齒]는 자주 마주쳐야 하고, 침은 항상 삼켜야 하고, 기(氣)는 마땅히 정련(精鍊)하여야 한다.
4. 치 심(治 心)
말씀하기를 "마음은 신명(神明)의 집이니 속은 비었고 직경은 한 치에 불과하나 신명이 이에 깃들어 사물을 다스리는데 난분(亂분)을 가려내는 것 같고 급한 물은 건너는 것도 같아 두려워 하기도 하고 슬퍼 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하여 하루에도 수시로 바뀐다. 그러므로 신(神)이 머물지 않으면 좀먹고 밝지 못하면 소모되어 버린다. 도(道)는 깨우치려 해도 스스로 깨치기 어려웁다."
그 누가 말하기를 "선(善)을 항상 행(行)하더라도 한번 욕심이 동하면 곧 선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으니 얼른 착함으로 되돌려 분하고 원통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을 적으로 알라. 내가 선한 마음으로 분한 마음을 다루면 풀릴 것이나 풀리지 않으면 삶을 해칠 것이니라.
무릇 칠정(七情)과 육욕(六慾)이 모두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마음을 고요히 하면 신명에 통하여 미리 앞일을 내다 볼 수 있으며 집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고 하늘의 이치를 절로 알 게 된다. 대게 마음은 물과 같아서 흔들리지 않으면 자연히 맑아져서 그 밑바닥까지 환히 보이는 것이니 이를 영명(靈明)이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해서 원기(元氣)를 키우면 모든 병을 물리쳐 장생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생각이 들면 신(神)은 밖으로 들고 기(氣)는 흩어지고 피도 이를 따르매 생기(生氣)가 혼란해져서 백병(百病)이 생겨나니 이는 모두 마음을 고요치 못함에서 이름이라 무릇 마음을 고요하고 평안케 하는 것이 바로 마음 다스리는 법(法)이다
5. 거병연수육자결(去病延壽六字訣)
이 장에서는 간단한 여섯 글자를 소리냄으로서 병을 치료하고 오래 살 수 있는 건강법을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대게의 종교나 수도법에 있어서 입으로 소리내는 것이 많이 있다. 주문 이라고도 하고 법문 이라고도 하며, 기도, 음선(音禪), 찬송 등 이라고도 하나 그 원리는 모두 입으로 소리냄으로써 기혈순환이 촉진되고 마음이 안정되며 영이 맑아져서 종교나 수도의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먼저 총결(總訣)로서 간(肝), 폐(肺), 심(心), 신(腎), 비(脾), 삼초(三焦)가 각각 약할 때 나타나는 증세를 설명하였으니,
첫 째 : 간(肝)이 허(虛)하면 눈이 흐려지고
둘 째 : 폐(肺)가 약해지면 숨쉴 때 두 손을 마주 비비는 것같은 거친 소리가 나고
셋 째 : 심(心)이 약해지면 기지개를 자주 켜개 된다.
넷 째 : 신(腎)이 약해지면 기지개를 자주 켜게 된다.
다섯째 : 비(脾)에 병이 생기면 입이 마르고,
여섯째 : 삼초(三焦)에 열이 있으면 누워서 잘 앓게 된다.
이어서 육자 하나 하나에 대한 설명이다.
신기(腎氣) : "취-"하면 신장의 기운을 키운다. 신장의 병은 물 기운으로 인하니 신장은 생문(生門)의 주(主)가 되며 병이 들면 파리해 지고 기색(氣色)이 검어지고 눈썹이 성기고 귀가 울게 된다. "취-"하므로써 사기(邪氣)를 내 보내 장수할 수 있다.
심기(心氣) : "훠-"하면 심장의 기운을 돕는다. 마음이 산란하거나 초로하면 빠르게 "훠-" 할지니 대단이 신통(神通)한 효험을 볼 수 있으며 목이나 입에 염증이 생기며 열이 나고 아픈 데에도 "훠-"를 하면 좋다.
간기(肝氣) : "허-" 하면 간의 기운을 돕는다. 간은 병이 들면 시거나 쓴 맛을 좋아하는데 눈도 붉어지고 눈물도 많이 난다. 그럴 때 "허-"를 해주면 잘 낫는다.
폐기(肺氣) : "스-"하면 폐의 기운을 돕는다. 폐에 이상이 있어 숨쉴 때 "스스" 소리가 나는 사람은 침이나 가래가 많다. 가슴이 답답하고 번거러움도 상초(上焦)에 가래가 많은 때문이니 날마다 "스-", "스-" 하면 매일 매일 좋아진다.
비기(脾氣) : "호-" 하면 비의 기운을 돕는다. 비장은 토(土)에 속해 태창(太倉) 이라고도 하는데 병이 들면 그 처방이 쉽지 않다. 설사하고 장이 끓고 물을 토하면 "호-" 하여 속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좋다.
삼초(三焦) : "히-" 하면 삼초(三焦)의 기(氣)를 돕는다. 삼초(三焦)에 이상이 생기면 "히-" 해주면 좋다. 옛 성인 말씀에 "이것이 가장 좋은 의원이다. 막힘을 통하게 하려 할 때 이법을 안쓰고 어디서 다시 구(求)할가" 하셨다.
사계절에 부르는 건강노래 : 봄에는 "휴-" 하면 눈이 밝아지고 肝이 좋아지며 여름에 "하-" 하면 心火가 절로 가라 앉는다. 가을에 "스-"하면 기를 거두어 들이기 때문에 肝기능이 좋아지고 겨울에 "취-"하면 平安하다. 三焦가 약할 때는 "히-" 하여 헐떡임을 없애고 사계절에 항상 "호-"하면 脾의 기능이 좋아 지는데 소리내지 않고 해야 한다. 그러면 보다 더 좋다.
"성학(聖學)"이란 곧 "유학(儒學)"을 의미하고, 그 유학 중에도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의미한다. 유학 또는 성리학을 성학(聖學)이라 일컫는 까닭은 이 학문이 곧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갖춘 학문"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특히 임금에 대하여는 "성왕(聖王)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갖춘 학문"임을 나타낸다.
퇴계가 50세 이후 고향인 도산(陶山)으로 퇴거하여 연구와 저술과 강학에만 전념하던 끝에 68세 때 [성학십도]를 지었다. 그의 별세한 나이가 70이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만년작으로 그의 학문의 온축(蘊蓄)을 남김없이 쏟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담겨진 내용으로써 충분히 증명된다.-(1) 太極圖 (2) 西銘圖 (3) 小學圖 (4) 大學圖 (5) 白鹿洞規圖 (6) 心統性情圖 (7) 第七仁說圖 (8) 心學圖 (9) 敬齋箴圖 (10) 夙興夜寐箴圖-이 목차만 보아도 당시 정주계(程朱系) 성리학의 총 결산서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퇴계는 이 책에서 당시까지의 정주계의 우주설과 심성설 및 수양설을 도해와 해설의 방법으로 총괄적이면서도 중점적으로 요령있게 정리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퇴계 자신의 학문의 규모와 성격과 깊이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만년의 퇴계가 이것을 그 해(1568)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선조에게 "차문(箚文)"과 함게 만들어 올린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점을 상기하면 성리학을 통한 "성인"이 되는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뜻과 함께, 어린 임금으로 하여금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조건을 갖추는 "제왕학(帝王學)"의 길을 가르치려는 퇴계의 뜻이 담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또한 은퇴한 퇴계로서 국가에 바친 만년 충절(忠節)의 일단이기도 하다.
[聖學十圖箚]
성학십도를 올리는 차(箚)와 도(圖)
판중추부사(判中抽府事) 신(臣) 이황(李滉)은 삼가 재배(再排)하고 아룁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도는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습니다. 하도 낙서(河圖洛書)가 나옴에, 성인이 이것을 근거로 "괘효(卦爻)를 지은 뒤로부터 도가 비로소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도는 넓고 넓으니 어디서부터 착수하여야 하며, 옛 교훈(古訓)은 천만 가지나 되니 어디서부터 따라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성학에는 큰 실마리가 있고, 심법에는 지극한 요령이 있습니다. 이것을 드러내어 도(圖)를 만들고, 이것을 지적하여 설(說)을 만들어, 사람에게 "도를 들어가는 문"(入道之文)과 "덕을 쌓는 기틀(積德之基)을 보여 주는 것은 역시 후현(後賢)들이 부득이 하여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임금된 분의 한마음(一心)은 온갖 정무(萬幾)가 나오게 되는 자리이며 온갖 책임(百責)이 모이는 곳이며 뭇 욕심이 갈마들며 침공하고, 뭇 간사함이 갈마들며 침해하는 곳입니다. 그 마음이 만일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지면서 방종하여 간다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과 같아서, 그 누구도 이것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옛날의 성스럽고 현명한 황제(聖帝)나 군왕(明王)은 이러한 점을 걱정하여,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로 하루하루를 삼가 지내면서도 오히려 미흡하다고 여긴 나머지, 스승이 되는 관원(師傳之官)을 세우는 한편 바른 말을 간하는 직책을 두었고, 전후좌우에 의승(疑丞) 보필(補弼)이 있게 하였습니다. 수레를 탈 때는 여분(旅賁)의 규(規)가 있었고, 조회 때에는 관사(官師)의 법이 있었으며, 안석에는 훈송(訓誦)의 간(諫)이 있었습니다. 침실에는 근시(近侍)의 잠언(箴言)이 있었고, 일을 처리할 때는 고사의 인도함이 있었으며, 한가로이 있을 때는 공사(工師)의 송(誦)이 있었습니다. 소반이라든가 밥그룻,책상, 지팡이, 칼, 들창문에 이르기까지 무릇 눈길이 닿는 곳과 몸이 처하는 곳에는 어디나 명(銘)과 계'(戒)가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 마음을 유지하고 몸을 방범(防範)하게끔 하는 것이 이토록 지긋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덕이 날로 새롭고 업(業)이 날로 번창하여, 티끌 만한 허물도 없게 되고, 나아가 큰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
후세의 군주들이란 하늘의 명을 받고 왕위에 오른 만큼 그 책임이 지극히 크고 무겁건만 어떻게 되어서인지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닦게끔 하는 것은 하나도 이같이 엄정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면서도 불손한 태도로 스스로 성자인 체하는가 하면 오만한 태도로 왕공과 수많은 백성들의 위에서 방자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결국 괴멸하게 되는 것이야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남의 신하가 되어 임금을 도에 합당하도록 인도하려는 사람이라면 진실로 그 마음을 여러 모로 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장구령(長九齡)이 [금감록](金鑑錄)을 올린 것과 송경(宋璟)이 [무일도](無逸圖)를 드린 것과 이덕유(李德裕)가 [단의육잠]을 바친 것, 진덕수(眞德秀)가 [빈풍칠월도]를 올린 것 등은 모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금심하여 마지않는 갗은 충정과 선을 베풀고 가르침을 드리는 간곡한 뜻이므로, 임금이 마음에 깊이 새겨 경복(敬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추한 몸으로 여러 대의 임금님께 받은 은혜를 저버린 채, 병든 몸으로 농촌에 틀어박혀 초목과 함께 썩어 가길 기약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헛된 이름이 잘못 전하여져 강연(講筵)의 중임(重任)을 주어 부르시니 떨리고 황송하옵니다. 사양하고 피할 길이 없는데다 이미 이 자리를 면하지 못하고 욕되게 한 이상, 성학을 권도"(權導)하고 신덕(宸德)을 보양하여 요순 시대의 융성을 이룩하려는 일만은 비록 사양하려 하여도 할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신은 학술이 거칠고 성기며 언변이 서투른데다 질병까지 잇달아 시강(入侍)조차 드물게 하였는데, 겨울철 이후로는 그것마저 완전히 그만두었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여 보니, 처음에 글을 올려 학문을 논한 것들이 이미 전하의 뜻을 감동 분발시킬수 없었으며, 나중에 직접 대하여 여러차례 아뢴 말씀 또한 전하의 슬기에 도움을 드릴수 없었으므로, 보잘 것 없는 신의 정성으로는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옛 현인과 군자들이 "성학'을 밝히고 "심법"을 파악하여 "도"와 "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문"(入道之門)과 "덕을 쌓는 기초"(積德之基)를 보여주는 것이 마치 해와 별같이 밝게 세상에 돌아다니고 있으므로, 이에 감히 이것들을 가지고 나아가 아룀으로써 옛 대왕들의 공송(工誦)과 기명(器銘)이 남긴 뜻에 대신하고자 하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마도 과거를 본받아 장래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하옵니다.
이에 옛것 중에서 삼가 더욱더 두드러진 것을 가려 뽑은 것이 일곱 가지 도(圖)입니다. 그 중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는 "정씨도"(정씨도)를 토대로 신이 만든 두가지 작은 도(小圖)를 덧붙인 것입니다. 그밖에 세 개의 도는 비록 신이 만들었지만, 그 글(文)과 뜻(志)의 조목과 규획은 한결같이 예 성현들께서 한 것이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합하여 [성학십도](聖學十圖)로 만들었는데, 각 그림 밑에는 외람되나마 저의 설을 붙여 보았습니다. 삼가 정서하여 사람 편에 올리옵니다.
하온대 신이 추위와 질병에 묶인 채 몸소 이것을 하려 하니 눈이 어둡고 손이 떨려 글씨가 단정하지 못하며 글의 줄과 글 크기가 모두 규격에 맞지 않습니다 다행히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이것을 경연관(經筵官)에게 내리시어 바로잡을 논의를 더 많이 하게 하는 동시에 틀린 곳을 고치고 보충하게 하신 다음,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정본(正本)을 정사(精寫)토록 하시기 바라옵니다. 그리하여 그 정본을 해당관서에 의뢰하여 병풍 한 벌을 만드셔서 평소 한가롭게 지내시는 곳에 펼쳐 두시도록 하거나 또는 따로 조그마한 수첩을 하나 만들어 항상 궤안에 놓아 두고 기거 동작하실 때 언제나 보고 살피셔서 경계하신다면 충성을 바치려 하는 신의 뜻은 다행스럽기 이를 데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 뜻 중에 다 드러내지 못한 것을 신이 지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찍이 듣건데 맹자는 "마음의 기능(心官)은 생각(思)하는 것이니, 생각하면 이해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홍범](洪範)을 진술할 때에도, "생각하는 것을 예(睿)라 하는데, 예는 성인을 이룩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마음이란 방촌(方寸)에 있는데 지극히 허(虛)하고 영(靈)한 것입니다. 이(理)야말로, 도서(圖書)에 드러나 있지만, 지극히 허령한 마음으로 지극히 확실하고 알찬 이"(理)를 구하면 틀림없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면 이해되고", "예(睿)가 성인을 이룩한다"는 것이 어찌 오늘날이라 하여 증명될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의 허령도 만일 마음의 주재하는 능력이 없으면 일을 앞에 당하여 놓고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이(理)의 드러남이 확실하더라도 만일 찾아서 처리하려는 생각이 없으면, 항상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또한 도해를 토대로 생각하는 것도 소홀히 하여서는 아니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듣건대, 공자는 "배우기만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두워지고, 생각만하면서 배우지 않는다면 위태로워진다."고 하였습니다. 배움(學)이란 그 일들을 익혀(習事) 참되게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 유학(聖門之學)이란 마음을 떠나서는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생각하여 그 미묘한 점에까지 통하여야 하며, 그렇게 하고서도 그 일을 익히지 않으면 위태로워 불안하므로 반드시 배워가지고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생각(思)과 배움(學)은 서로 계발(相發)하고 서로 도움(相益)을 주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이치를 깊이 살피시고, 모름지기 먼저 뜻(志)을 세워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我)는 어떤 사람인가, 노력이 순과 같이 되게 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분발하여 생각과 배움의 두 가지 공부에 힘을 쓰셔야겠습니다. 그런데 "지경"(持敬), 즉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곧 생각과 배움을 겸하고 동과 정을 일관하고 안(마음)과 밖(행동)을 합치시키고, 드러난 것(顯)과 숨겨진 것(微)을 한가지 되게 하는 도리입니다.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방법은 반드시 이 마음을 제장정일(齊莊靜一)한 속에서 보존하고, 이에 대한 이치를 학문 사변(學問思辨) 하는 사이에 궁리하며, 남이 보지도 듣지도 않는 곳에서 "계구", 즉 자신을 경계하며 두러워하는 것을 더욱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하며, 혼자만 있는 은밀한 곳(隱微幽獨之處)에서는 "성찰", 즉 자신을 되돌아보고 살피는 일을 더욱더 정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도해(圖)에 입각하여 생각할 때에는 그 도해에만 집중적으로 전념하여 마치 다른 도해가 있다는 것은 모르는 듯이 하여야 하며, 어느 한 일을 익을 때는 그 일에만 전념하여 마치 다른 일이 있는 것은 모르는 듯이 해야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변함없이 그렇게 하여야 하고 오늘과 내일 매일매일 계속하여야 합니다. 혹은 새벽녘 정신이 맑을 때(夜氣淸明時)에 되풀이하여 그 뜻을 음미하여 보기도 하고, 혹은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들과 응대할 경우에도 그것들을 경험하면서 키워가셔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처음에는 혹 부자유스럽고 모순되는 난점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거나, 때로는 극히 고통스럽고 불쾌한 일들도 없지 않겠으나, 이러한 것은 바로 옛 사람들의 이른바 "장차 크게 나아갈 기미(大進之幾)이며 또한 "좋은 소식의 징조(好消息之端)이니, 절대로 이로 인하여 그만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더욱더 자신을 가지고 힘을 기울이게 되면, 자연히 마음과 이(理)가 서로 영향을 미쳐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을 환히 꿰뚫듯 이해하게 되고, 익히는 것(習)과 그 익혀진 일이 서로 익숙하여져서 점차로 순탄하고 순조롭게 행하여지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각각 그 한가지에만 전념하던 것이 끝내는 모두 일치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맹자가 말한 "학문을 깊이 파고들어 스스로(자기에게) 깨닫는 경지"(深造自得之境)이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만두지 못할 경험입니다. 또 이에 따라서 부지런히 힘써 나의 재능(吾才)을 다하면 안자(顔子)의 인을 어기지 않는 마음과 나라를 위하는 사업(爲邦之業)이 다 그 속에 있게 될 것이며, 증자(曾子)의 일관된 충서(忠恕)와 전도의 책임이 그 몸 자신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외경"(畏敬)의 태도가 일상 생활 중에서 떠나지 않으면 "중화"(中和)에 의한 만물의 "위육"(位育)의 공(功)을 이룩할 수 있으며, "덕행"이 이륜(人倫)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천인 합일"의 묘한 경지도 마침내 이룰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도라 하여 만들고 설이라 하여 지은 것이 겨우 열폭의 종이에 늘어놓은 데 불과하며, 생각하시고 익히시는 것이 단지 평소 한가로운 곳(燕處)에서 하는 공부에 지나지 않지만 도(道)를 깨달아 성인을 이루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베푸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오직 전하께서 이에 시종 유의하시어 하찮다고 소홀히 하신다거나 귀찮고 번거롭다고 치워 버리지 않으신다면, 나라(宗社)의 다행이며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신이 초야에 묻힌 야인으로서 근폭(芹曝)을 올리는 정성으로 전하의 위엄을 모독하는 것임을 무릅쓰고 바치나이다. 황송하옵고 송구하올 뿐입니다.
[第一太極圖]
태극도설(太極圖說)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는데, 동의 상태가 지극하면 정(靜)하여지고, 정하여지면 "음(陰)"을 낳는다. 정의 상태가 지극하면 다시 동하게 된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가 맞선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를 낳는데, 이 다섯 가지 기(五氣)가 순차로 퍼지어 네 계절(四時)이 돌아가게 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의 생성시에 각각 그 성(性)을 하나씩 가져서, "무극의 진(眞)과 이(二)·오(五)의 정(精)"이 묘하게 합하여 응결되면 "건도(乾道)"는 남성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을 이룬다. 두 가지 기(二氣)가 서로 감화하여 만물을 낳고, 만물이 계속 생성함으로써 "변화"가 무궁하게 된다.
오직 인간만이 그 빼어난 것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 형체(形)가 이미 생기자 정신(神)이 지(知)를 발하고, 오성(五性)이 감동하매 "선악"이 나뉘고 "만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에 성인이 "중정(中正)"과 "인의(人義)"로써 이것을 정하고, 정을 주로하여 "인극(人極)"을 세웠다. 그러한 까닭에 "성인(聖人)"은 그 덕성이 천지와 합치하며, 그 밝음이 일월과 합치하며, 그 질서가 네 계절과 합치하며, 그 길흉이 귀신과 합치한다. 군자는 이것을 닦으므로 길하게 되고, 소인은 이것을 어기므로 흉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의 도를 세워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워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를 세워 인과 의라 한다"과 하며, 또 이르기를 "원시반종(原始反終)하면 사생(死生)의 설(說)을 안다"고 한 것이니, 위대하도다 '역(易)'이여! 이것이야말로 그 지극한 것이로다.
주자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도설(圖說)의 머리 부분에서는 음양에 의한 변화의 근원을 말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곧 인간의 타고난 것을 밝혔다. 여기 "오직 인간만이 그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영특하다" 한 것은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성(性)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태극이다. "형체가 생기자 정신이 발하였다"는 것은 음이 동하고 음이 정하여 이루는 것이다. "다섯 가지 성(五性)이 감동한다"함은 양과 음이 변하고 합하여 수·화·목·금·토의 성을 낳는 것을 말한다. "선악이 나누인다"는 것은 만물이 화생하는 상(象)이다. "성인이 중정(中正)·인의(仁義)로 정(靜)하고, 정을 주로 하여 인극(人極)을 세웠다" 한 것에 이르러서는, 태극의 전체를 얻어서 천지와 더불어 간격없게 합치토록 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아래 글에서 다시 천지·일월·사시·귀신이라는 네 가지와 합치되지 않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는 또 말하였다. 성인은 힘써 닦아 가지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여 몸을 닦는 것은 곧 군자가 길하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도리를 거스르는 것은 소인이 흉하게 되는 까닭이다. 닦는 것과 거스르는 것은 역시 "경(敬)"과 "사(肆)"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경의 태도를 가지면 욕심이 적어지고 사리는 밝아진다. 욕심을 적게 하고 또 적게 하여 아예 없게 하면, 정할 때에는 허하고 동할 때에는 곧게 나아가게 되어 성인을 배울 수 있다.
위의 것은 염계 주자(走者)가 스스로 만든 도와 설입니다. 평암(平巖)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이 그림은 [계사(繫辭)]에서 '역(易)에 태극이 있었다.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았다'고 한 뜻을 미루어 밝힌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역]에서는 괘효(卦爻)를 가지고 말하였는데, 이 그림에서는 조화(造化)를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도리의 큰 두뇌가 되는 것이며 백세 도술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이 그림을 머리에 내세우는 것은 역시 [근사록(近思錄)]에서 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첫머리에 둔 의도와 같은 것입니다. 무릇 성인을 배우는 사람은 근본을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아 [소학], [대학]등에 힘을 기울이다가 그 보람을 거두는 때에 이르러 하나의 근원을 끝가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것이 이른바 "이(理)를 궁구하고 성(性)을 다하여 명(命)에 이른다"는 것이고, 이른바 "신묘(神)를 다하고 조화를 알아서 덕이 성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第二西銘圖]
서 명(西 銘)
건(乾)을 부(父)라 하며, 곤(坤)을 모(母)라 한다. 나는 매우 작은 존재로서, 혼연히 그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지사이에 들어찬 것은 나의 몸이며, 천지를 이끄는 원리는 나의 본서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의 동포이며, 모든 사물이 나와 같은 족속이다. 임금은 내 부모의 종자(宗子)이며, 대신은 그 종자의 가상(家相)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는 것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근본이며, 외롭고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어린이를 어린이로 보살피는 근본이다. 성인이란 그 덕이 천지와 더불어 합치되는 사람이며, 현인이란 빼어난 사람이다.
무릇 천하의 늙어 허약한 사람이라든가, 병들어 고통을 받는 사람이라든가, 형제가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홀아비나 과부와 같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다 나의 형제가 심히 곤란한 처지를 당하고서도 호소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다. 때로 하늘의 뜻을 보존하는 것이 내가 천지의 아들로서 천지를 공경하는 것이며, 일상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는 것이 효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천명을 어기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하고, 인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악한 일을 더하는 자는 부재(不才)이고, 천지로부터 받은 천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오로지 부모를 닮는 자이다.
천지의 조화를 알면 그 천지 부모의 사업을 잘 계속하며, 그 조화 속의 신묘함을 다 궁구하면 그 천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방 구석에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며,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데 게으르지 않음이다. 맛 좋은 술을 싫어하는 것은 우가 어버이를 돌보는 것이며, 영재를 기르는 것은 영봉인이 그 효자의 동류를 길이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고생되어도 효성의 마음을 게을리하지 않아 마침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순의 공이며, 도망할 곳 없는 듯이 죽이기를 기다리는 것은 신생의 공경함이다. 주신 몸을 온전하게 가지고 살다가 돌아간 사람은 증삼이며, 따르는 데 용감하여 명령에 순종하기로 손꼽힐 사람은 백기이다.부귀와 복택은 장차 나의 삶을 두텁게 할 것이며, 빈천과 우척(優戚)은 너를 옥성(玉成)시키는 것이다.살아서는 천지와 부모를 순하게 섬기다가 죽게 된면 나는 편안히 돌아갈 것이다.
주자는 말하였다."[서명]이란 정자에 의하면 하나의 이가 다양하게 나누어짐을 밝힌 것이다. 대체로 건으로 아비를 삼고, 곤 즉 땅으로 어미를 삼는 것은 생물이라면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이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및 동물 등 혈맥을 가진 생명체의 무리들은 각각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고 그 자식을 자식으로 키우고 있으므로, 그 분별됨에 있어서는 어찌 서로 다르지 않겠는가! 하나로 통일되면서도 만 가지로 각기 다른 까닭에, 비록 천하가 한 집안이고 중국이 한 사람과 같다고 하더라도 겸애의 패단에 흐르지 않는 것이다. 만 가지로 각기 다르면서도 또한 하나로 관통되므로, 비록 친하고 소원한 정의 차이가 있고 귀하고 천한 등차가 있다 하더라도 "위아"의 사사로움에 막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서명]의 대의이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씨를 미루어 무아의 공덕을 기르고,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을 바타으로 하늘 섬기는 길을 밝힌 것을 본다면, 무룻 어디를 가든지 이른바 "분계에 서서 이가 하나임을 미루는 것"이 아님이 없다" 했으며, 또 주자는 말하기를 "[서명]의 앞부분은 바둑판과 같고, 뒷부분은 그 판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귀산 양씨는 말하기를, "[서명]은 하나인 이가 다양하게 나뉘는 것을 말한 내용의 것이다. 그 이가 하나임을 아는 것은 "인"을 실행하게 하는 까닭이며, 그 이가 다르게 나뉨을 아는 것은 "의"를 행하게 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마치 맹자가 "어버이를 사랑한 다음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남들을 사랑한 다음에 사물을 사랑한다"고 한 것과 같다. 그 분수가 같지 않기 때문에, "내가 베푸는 것에도 차등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다.
쌍봉 요씨는 "[서명]의 앞 일절은 사람이 천지의 아들임을 밝힌 것이며, 뒤 일절은 사람이 천지를 섬기는 것을 마치 자식이 부모 섬기듯 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고 하였다.
위의 명은 횡거 장자가 지은 것입니다. 처음에 "정완"이라 이름하였는데, 정자가 이름을 바꿔 [서명]이라 하였고, 거기에 임은 정씨가 이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성학의 목적은 "인"을 찾는데 있습니다. 모름지기. 인의 뜻을 깊이 체득해야만 바야흐로 내가 천지 만물과 한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은 경우라야 인에 대한 공부가 비로소 친절 유미하여 져서, 광대 무변함에 손댈 바를 모르게 되고 걱정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물을 곧 나인 줄 잘못 아는 병통이 없어 심덕이 온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자는 "[서명]이야말로 그 뜻이 지극히 완비되었으니, 이것이 곧 인의 체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 인이 남김없이 충만될 때 성인이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第三小學圖]
소학제사(小學題辭)
.원(元)·형(亨)·이(利)·정(貞)은 천도의 상, 즉 하늘의 불변의 법칙이고, 인(仁)·의(義)·예(禮)·지(智)는 인성의 강(綱), 즉 인간의 벼리가 되는 본성이다.
이 인간의 본성들은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네 가지 단서인 "사단"이 풍성히 감동됨에 따라 드러난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께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히 대하는 바로 이것이 "병이(秉彛)"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순리적으로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인만이 그 본성이 자연적으로 실현되어 하늘과 같이 넓어서, 털끝만큼의 힘으로 더 더하지 않아도 "온갖 선함(萬善)"이 다 갖추어진다. 일반 사람들은 어리석어 물욕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그 도리를 무너뜨리고 서슴없이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진다. 성인이 이것을 가엾게 여긴 나머지 학문을 만들고 스승을 두고 가르치어 그 본성의 뿌리를 북돋는 한편 그 가지를 뻗게 하였다.
[소학]의 방법은 쇄소(灑掃)하고 응대(應對)하고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남에게 공경하여 행동이 조금도 법도를 어김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완전히 행하고 난 다음에 힘이 남으면 시를 외고, 글을 읽고, 노래를 읊조리고, 춤을 추며 모든 생각이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 이 법의 궁구와 깊이 생각하여 몸을 닦음이 이 학문의 큰 뜻이며 목적이다.
밝은 명(明命)은 환하여 안팎이 없다. 덕을 높이고 학업을 넓혀야 곧 본래의 본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것이 옛날에 부족하지 않았다고 하여 오늘날 어찌 넉넉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세월이 멀리 흘러왔고, 어진 사람들이 돌아갔는데다 경전들은 피폐되고 교육마저 해이해져, 어린이의 양육이 바르지 못하매, 자란 뒤에는 더욱 부박하고 사치스러워진다. 마을에는 좋은 풍습이 없어지고 세상에는 어진 인재가 없으며, 사리 사욕으로 뒤얽혀 싸우고 이단의 말들이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병이는 하늘에 표준을 둔 것이어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에 옛날에 들어온 말들을 주워 모아 뒷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하노라. 애달프다! 소년들이여! 삼가 이 글을 배우도록 하라. 이것은 늙은 나의 노망한 소리를 적은 것이 아니라 오직 성인의 가르침이니라.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대가 사람에게 [대학]의 도를 말하려 하면서도 또 [소학]의 글을 참고하려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었다.
주자는 그말을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배움의 크고 작음은 확실히 같지 않으나 '도'가 되는 점에 있어서는 한 가지 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릴 때에 [소학]에서 익히는 것이 없으면, 그 방심을 거두고 덕성을 길러서 [대학]의 기본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커서 [대학]을 더 배우지 않는다면 의리를 살피고 그것을 사업에 시행함으로써 [소학]의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어린 학도로 하여금, 반드시 먼저 쇄소응대하든가, 진퇴하는 가운데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학습들에 스스로 진력함으로써, 자라난 뒤에는 '명덕'과 '신민'하는 일에 나아가 '지극히 선한 경지'에 까지 가서 머물게 하려는, 이것이야 말로 순서상 당연한 것이니, 어찌 불가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또 "만일 나이가 이미 자랐는데 공부가 이렇게 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자, 그에 답하여 이렇게 말했다. "세월이 이미 지나간 것은 물론 뒤따라갈 수 없지만, 공부의 차례나 조목은 어찌 다시 보충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듣기로는, '경'이라는 한 글자는 성학의 시초와 종국을 성립시켜 주는 것이라 한다. [소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이것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참으로 본원을 함양하여 쇄소 ·응대·진퇴에 관한 법도 및 육예의 가르침에 마음을 쓰지 못하게 된다. [대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이것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역시 총명을 개발하여 덕을 닦고 학업을 익히어 '명덕', '신민'의 공을 가져오지 못한다. 불행히도 때가 이미 지난 뒤에라도 배우는 사람들이 참으로 이것에 힘을 기울려 큰 것을 닦아 나아가게 되는 동시에 그 작은 것을 겸하여 보충할 수 있다면, 그 나아가게 하는 소이로서는 장차 근본이 없어서 스스로 도달하지 못 할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위의 [소학]은 옛날에는 그림이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본서의 목록에 의거하여 이 그림을 만들어서 대학의 그림과 대조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자가 [대학혹문]에서 [대학],[소학]에 대하여 통론한 것을 인용하여 양자의 공부하는 대강을 나타내었습니다. 원래 [소학]과 [대학]은 서로 상대적으로 기다리면서 성립합니다. 이것들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혹문]에서는 그것들을 통론할 수 있었고, 이 두 그림에서도 겸수상비하여 말할 수 있었습니다
[第四大學圖]
대학경(大學經)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에 있으며, 지극히 선한 경지(至善)에서 머무는 데 있다(止). 머무를 데를 안 뒤에야 정함이 있고, 정한 뒤에야 동요되지 않을 수 있으며(靜), 동요되지 않은 뒤에야 편안할 수 있다(安). 편안한 뒤에야 생각할 수 있고(廉), 생각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得).
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시초와 종결이 있으니, 먼저 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워질 것이다. 옛날 명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바로 잡았고, 그 집안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았고, 그 몸을 닦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였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참되게 했고, 그 뜻을 참되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앎을 투철히 했으니, 앎을 투철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는 데 있다. 사물의 이치가 구명되 뒤에라야 앎이 투철하여지고, 앎이 투철하여진 뒤에라야 뜻이 진실하여지고, 뜻이 진실하여진 뒤에라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라야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뒤에라야 집안이 바로잡히고, 집안이 바로 잡히고 난 뒤에라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라야 천하가 화평하게 된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 몸을 닦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 말단이 다스려지는 법이 없으며, 후하게 해야 할 데에 박하게 하고, 박하게 해야 할 데에 후하게 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경이란 어떻게 힘서야 하는 것인가?" 하였더니, 주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정자는 일찍이 '주일무적', 즉 정신을 통일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라 하기도 하고, 또 '정제엄숙', 즉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마음을 엄숙히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문인인 사씨의 설로는 이른바 "항상 경계하여 깨달으려는 방법"이며, 윤씨의 설로는 "그 마음을 단속하여 한가지의 잡념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 운운하였다.
경이란 한 마음의 주재이며, 만사의 근본인 것이다. 그 힘쓰는 방법을 알면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고서야 시작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며,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고서 시작되는 것임을 알면 [대학]이 이것에 의지하여야만 끝 맺을 수 있는 것도 일관하여 의심하지 않게 된다.
원래 이 마음이 이미 있게 되면, 이 경에 의하여 사물을 밝히고, 앎을 투철히 하여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구하면 이것이 이른바 덕성을 놓이고 학문을 일삼는 것이다. 경에 의하여 뜻을 진실히 하고 마음을 바로잡아 자신의 몸을 닦으면, 이것이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는 것이다. 경에 의하면 집안을 바로잡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에까지 미치면, 이것이 이른바 "자기 자신을 닦아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고, "공손한 태도를 독실히 하여 천하가 화평하여 진다."는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것이 다 하루라도 "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경이라는 한 글자가 성학의 시작과 끝맺음에 걸친 일관된 요건이 아니겠는가!
위의 글은 공자가 남긴 첫 장입니다. 국초의 신하 권근이 근래에 이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장 아래에 인용한 [혹문]의 [대학]과 [소학]을 통론한 설은 [소학도] 아래서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 두 설만 통하여 볼 것이 아니라, 상하의 여덟 그림도 모두 마땅히 이 두 그림과 통하여서 보아야 합니다.
대저 위의 두 그림은 실마리를 구하여 확충하고, 하늘을 본받아 도를 다하는 극치점으로 [소학]과 [대학]의 포준 및 본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래의 여섯 그림은 선을 밝히고, 자신을 참되게 하며, 덕을 높이고 학업을 넓히며, 힘을 기울여야 할 점으로 [소학], [대학]의 근거이자 공효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이란 상하에 다 통하는 것으로서, 공부를 착수하는 데서나 그 공부의 효과를 거두는 데서나 항상 실천하여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이 위와 같았으며, 이제 이 [십도]도 모두 경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태극설]에서는 정만 말하고 경은 말하지 않았는데, 주자가 주해하는 가운데서 경을 말하여 보충하였습니다.>
[第五白鹿洞規圖]
동규후서(洞規後서)
.희(熹)가 가만히 살펴보니, 옛날의 성현이 사람들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뜻은 어느 것이나 다 의리를 강명(講明)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닦은 다음에 그것을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려는 것이지, 한갓 앍은 것을 외는 데 힘쓰고 문장을 일삼음으로써 명성이나 구하고 이록(利祿)이나 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와 반대된다.
그러나 성현이 사람들을 가르치던 법은 경전에 갖추어져 있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숙독(熟讀)하고 깊이 생각하여 묻고 변해하여야 할 것이다. 진실로 이의 당연함을 알아가지고 자신을 책하여 반드시 이에 따르게 한다면, 준칙과 금방(禁防)을 어찌 다른 사람들이 마련하여 준 뒤에 지켜지길 기다리겠는가.
근세 학교에는 규약이 있지만, 학자를 대함이 이미 천박하고, 그 법이 또한 결코 옛 사람들의 뜻에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학당에서는 그것을 되풀이하여 시행하지 않겠으며, 특히 성현들이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큰 근본을 취하여 위와 같이 조목을 지어 처마 현판에 게시한다.
제군이 이것을 서로 강명하고 준수하여 몸소 실행하도록 한다면, 사려·언행에서 그 계근 공구(械謹恐懼)하게 하는 것이 반드시 저 규범보다 더 엄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혹 규칙 밖으로 벗어나는 점이 있다면, 저 이른바 규약이란 반드시 취하여야 할 것이지 참으로 생략할 수 없는 것이다. 제군은 그것을 명심하도록 하라.
위의 규는 주자가 지어 백록동(白鹿洞) 서원의 학도에게 게시한 것입니다. 이 백록동은 남강군 북쪽, 광려산 남쪽에 있는데, 당의 이발이 여기에 은거하여 흰 사슴을 기르며 지냈으므로, 백록이라는 것이 그 동의 이름으로 되었습니다 남당 때에 서원을 세워 국상이라 하였는데, 학도가 항상 수백 명씩 되었습니다. 송태종이 서적을 나누어 주는 한편, 동주에게 관직도 주며 아끼고 권장하였습니다. 중간에 황폐된 일도 있었으나, 주자가 지남강군사로 왔을 때 조정에 청하여 중건하고 학도를 모아 규를 만들어 도학을 앞장서 밝히자 서원의 가르침이 마침내 천하에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제 삼가 규문의 본 조목에 의하여 이 그림을 만드어 보고 살피시기에 편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원래 당우 시대의 가르침은 오품(五品)에 있었고, 삼대의 학문은 모두 인륜을 밝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왕의 학문은 그 준칙과 금지의 조목이 비록 일반 학문과 서로 다 같지 않지만, 이륜(彛倫)에 근본을 두고서 궁리를 하고 역행하면서 저 심법의 절실히 요긴한 점을 구하는 것은 같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 도도 함께 바쳐, 아침 저녁으로 아뢰는 설어(설御)의 잠언에 보태는 것입니다.
이상 다섯 도는 천도에 근본한 것인데, 그 공은 인륜을 밝히고 덕업을 힘쓰는 데 있습니다.
[第六心統性情圖]
심통성정도설(心統性情圖說)
.이른바 마음이 性(성)과 情(정)을 통섭하였다는 것은 사람이 오행의 빼어난 것(秀)을 받아 태어났고, 빼어난 오행에 오성(五性)이 갖추어지고, 그 오성이 동(動)하는 데서 칠정(七情)이 나옴을 말한다. 무릇 성과 정을 통회하게끔 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런 까닭에 그 마음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성"이 되면 "심(心)의 체(體)"이고, 마음이 느끼어 마침내 통하여 "정(情)"이 되면 "심(心)의 용(用)"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마음은 성과 정을 통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적당하다. 마음이 성을 포함하는 까닭에 인·의·예·지를 성이라 하며, 또한 "인의의 마음"이라 하는 말도 있다. 마음이 정을 포함하는 까닭에 측은·수오·사양·시비를 정이라 하며, 또한 측은한 마음이니 "수오·사양·시비의 마음"이라 하는 말도 있다. 마음이 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미발(未發)의 중(中)"을 이루는 일이 없어 성이 무시되기 쉽고, 마음이 정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중절(中節)의 화(和)"를 이루는 일이 없어 정이 방탕하기 쉽다. 배우는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서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서 그 성을 기르고 정을 제약한다면 배움의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신이 삼가 생각하여 보면, 정자의 호학론(好學論)에는"정(情)을 제약한다"는 것이 "마음을 바로잡고, 성(性)을 기른다"는 것의 앞에 두었는데, 여기에서는 그것을 도리어 그 뒤에 두었습니다. 그 까닭은 이것으로 "마음이 성과 정을 다 포함하였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오나 그 이치를 궁구하여 말한다면, 마땅히 정자가 논한 순서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도에 온당하지 못한 곳이 있기에 조금 고쳤습니다.
이상의 삼도중에서 위의 일도(一圖)는 임은 정씨가 그린 것인데, 그 설도 그의 것입니다. 그 가운데의 것과 아래의 도(二圖)는 신이 망령되게도 성현들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뜻의 근원을 추구하여 지은 것입니다.
가운데의 도는 기품 중에서 "본연의 성"이 "기품(氣稟)"과 혼합되지 않음을 가르켜 말한 것입니다. 자사가 말한 "천명의 성", 맹자가 말한 "성선(性善)의 성", 정자가 말한 "성이 곧 이(理)라는 성", 장자가 말한 "천지의 성"이 그것입니다. 그 성을 말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발하여 정(發而爲情)이 되는 것도 모두 그 선한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예를 들면 자사가 말한 "중절(中節)의 정",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의 정", 정자가 말한 "어찌 선하지 않은 것으로 이름지을 수 있겠느냐는 정", 주자가 말한 "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본래 선하기만 한 정"이 이러한 것입니다.
아래의 도(圖)는 이(理)와 기(氣)가 합한 점으로 말한 것입니다. 공자가 말한 "서로 근사하다는 성", 정자가 말한 "성(性)이 곧 기(氣)이며 기가 곧 성이라는 성", 장자가 말한 "기질의 성", 주자가 말한 "비록 기 중에 있지만 기는 어디까지나 기이고 성은 어디까지나 성으로서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성"이 이러한 것입니다. 그 성을 말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 발하여 정이 되는 것 역시 이기가 서로 기다리거나, 혹은 서로 해가 되는 점으로 말한 것입나다. 예를 들면 사단과 칠정 같은 것입니다. 즉 사단은 이가 발하매 기가 따르는 것이어서 본래 순선무악하지만 반드시 이의 발함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에 가리어지면 불선으로 됩니다.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 중절하지 못하여 그 이를 어그러뜨리면 방일하여져 악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정자는 "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불비(不備)하고, 기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불명하다 . 두 가지를 따로 분리하는 것은 옮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나 자사가 이만 가리켜 말한 까닭은 불비하여서가 아니라, 기를 아울러 말하면 성의 본래 선함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운데 도(圖)의 뜻입니다.
요컨데 이와 기를 겸하였으며 성과 정을 포함한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성이 발하여 정이 될 때가 곧 한마음의 기미이고, 온갖 변화의 추요이며, 선악의 분기점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경의 태도를 지니는 데 오로지 하여, 천리와 인욕(人慾)의 분별을 분명히 알 뿐 아니라 더욱 이것들을 몸소 주의함으로써, 마음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존양의 공부(存養之功)가 깊어지고, 마음이 발동하였을 때에는 성찰의 습관이 익숙하여져서 참을 쌓고 오래 힘써 마지 안을 수 있다면, 이른바 "정일(精一)"의 방법으로 중(中)을 포착한다는 성학과, 본체를 보존함으로써 어느 경우에나 응용한다는 심법(心法) 이라는 것이 모두 다른 곳에서 구하여 하기 전에 여기에서 얻어질 것입니다.
[第七仁說圖]
인 설(仁 說)
.仁이란 만물을 낳는 천지의 마음이며, 또한 사람이 이것을 얻어 사람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아직 발하기 저에 마음에 "사덕(四德)"이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인"만이 사덕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인은 함육하여 온전하게 하는 것이며 포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생(生)의 성(性)"이니 "애(愛)의 이(理)"이니 "인(仁)의 체(體)"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미 발동하였을 때에는 사단(四端)이 드러나지만, 오직 "측은(惻隱)"만이 사단에 관통되고 있다. 그러므로 측은이란 두루 흐르면서 관철되는 것이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성(性)의 정(情)"이니 "애(愛)의 발(發)"이니 "인(仁)의 용(用)"이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 즉 "미발(未發)"은 체(體)이고 , 이미 발동한 것, 즉 "이발(已發)"은 용(用)이다. 부분적으로 말한다면 "인"이 체이고, "측은"이 용이다.
"공"이라는 것이 인을 체험하도록 하는 바탕이다. 이를테면 자기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감이 인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개 공하며 인하여지고, 인하면 애하여진다. 효제가 그 실제상의 용이고, "서(恕)"가 그 효제(孝悌)를 펴나가는 것이고, "지각(知覺)"은 그것을 아는 일이다.
천지의 마음은 그 덕을 네 가지 가지고 있다. 원(元)·형(亨)·이(利)·정(貞)이 그것이다. 그런데 원은 이것들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들이 운행하면 춘·하·추·동의 차례로 되는데, 이 중에서도 봄을 생하는 기운이 제 계절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도 네 가지의 덕이 있다. 곧 인·의·예·지가 그것인데, 인은 다른 덕을 모두 포함한다. 네 가지 덕이 발용하면 애(愛)·공(恭)·의(宜)·별(別)이라는 것으로 되는데, 측은의 마음, 즉 애의 정이 다른 정들에 관통된다.
무릇 인이란 도리로서는 천지가 사물을 낳는 마음이 사물에 즉하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 이 인의 본체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정이 발한 뒤에는 그 인의 용이 한정이 없다. 참으로 인을 체험하여 보존할 수만 있다면, 모든 선의 원천과 백 가지 행위의 근본이 다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공문(孔門)의 가르침이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인을 찾는 일"에 급급하도록 하는 까닭이다. 공자의 말씀에 "극기하여 예로 돌아가면 인을 하게 된다."고 한 것이 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면 자기의 사심을 이겨내고 천리에 돌아갈 수 있으면 이 마음의 본체가 다 있게 되며 이마음의 작용이 다 행하여지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
집에 있을 때에는 공의 태도를 가지고 , 일을 볼 때에는 경의 태도를 가지고, 남을 대할 때에는 충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보존하게끔 하는 근거이다.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제(悌)로 형을 섬기고, 서로 사물을 다루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운용하게 하는 근거이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천지에서는 앙연(怏然)히 만물을 낳는 마음이고, 사람에게서는 온연히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니, 사덕을 포함하고 사단을 관통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대의 말고 같다면, 정자의 이른바 애는 정이고 인인 성인 만큼 애로써 인이라 이름할 수 없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인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정자의 이른바 "애의 발로써 인이라 이름하는 것"은 내가 논한 애의 이를 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무릇 정(情)·성(性)이라 하는 것은 비록 그 구분되는 영역은 다르지만, 그 맥락이 통하는 점에서는 각각 속하는 점이 있으니, 어찌 서로 떨어져 상관없는 것이겠는가? 나는 배우는 사람들이 정자의 말씀을 외기만 하면서 그 뜻을 구하지 않아, 마침내 판연히 애를 떼어버리고 인으로 말하는 이르는 것이 걱정이어서, 특히 이것을 논하여 그 남긴 뜻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대가 정자의 설과 다르다고 하니 또한 오해가 아니겠는가?
혹은 말하기를 "정자의 문도들에는 만물이 나와 하나라는 것을 '인의 체'라 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을 가지고 인이라는 말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틀린 것인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답하겠다.
만물과 내가 하나라고 하는 사람은 "인이 애"임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이 "체"가 되는 참된 연유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에 지각이 있음을 말하는 사람은 "인이 지를 포함하는 것"임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는 알찬 연유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공자가 자공의 "박시제중의 물음"에 대답한 것과 정자의 이른바 "지각으로는 인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어찌 이것을 가지고 인을 논할 수 있겠는가?
위의 인설은 주자가 지은 것으로서, 또한 스스로 도(圖)까지 만들어, 인의 도리를 남김없이 밝힌 것입니다. [대학]에 말하기를 "임금된 사람은 인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옛 제왕의 마음을 전하고 인을 체험한 묘리(妙理)를 구하려 한다면 어찌 여기에 뜻을 남김없이 쏟지 않겠습니까?
[第八心學圖]
심학도설(心學圖說)
.적자(赤子)의 마음은 인욕(人慾)이 물들지 않은 양심이지만, 인심(人心)은 욕구에 눈뜬 것이다. 대인의 마음이란 의리가 다 갖추어진 본마음이고, 도시이란 곧 의리(義理)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두 l가지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은 형기에서 발생되면 모두 인심이 없을 수 없게 되고, 성명에 근원하면 도심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정일(精一)과 택집(擇執) 이하의 것은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게 하는 공부 아닌 것이 없다. 신독 이하의 것은 "인욕을 막는 점"에 관한 공부인데, 반드시 "부동심(不動心)"에까지 이르러야 부귀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며 위무(威武)가 마음을 꺽지 못하게 되어, 그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수이하의 것은 "천리를 보존하는 점"에 관한 공부인데, 반드시 "종심(從心)"에까지 이르러야 심(心)이 곧 체(體)이고 욕(欲)이 곧 용(用)이며, 체(體)는 또한 도(道)이고 용(用)은 또한 의(義)의 관계를 가지면서, 언행이 법도에 맞아서, 생각하지 않고서도 이해하게 되고 힘쓰지 않고서도 절도에 맞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공부하는 요령은 어디까지나 한결같이 경의 태도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이다.
무릇 마음이란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이고, 경이란 또한 "한 마음을 주재"하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들이 "주일(主一)무적(無敵)"의 설이라든가, "정제엄숙(整齊嚴肅)"의 설과 저 "마음을 수렴하고 항상 또렷한 정신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설을 깊이 궁구한다면 그 공부가 더할 나위 없게 되어, 성인의 경지에 충분히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위의 것은 임은 정씨가 성현들이 심학을 논한 유명한 말씀들을 주워 모은 것입니다. 이 도를 만드는 데서는, 그 성현들의 말씀을 분류 대치시키기를 많이 하여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함으로써 , 성학의 심법이 역시 일단에 그치지 않는 것이므로 전체에 다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위로부터 아래로 배열한 것은 다만 깊고 얕은 점과 생소하고 익숙한 점을 들어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이와 같다는 것 일뿐, 그 공부하는 과정에 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과 같이 선후의 절차가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의심하여, 이와 대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라면 "방심을 구함"이 공부에 있어 첫째의 일이므로 "심재(心在)"의 뒤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방심을 구함"이란 얕은 정도로 말하면 진실로 제일 먼저 착수 입각해야 하는 점이지만, 깊은 정도로 지극하게 말한다면 순식간이라도 일념이 조금만 어그러지면 역시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안자 같은 분일지라도 3개월 이상이면 어기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어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곧 방의 상태에 들어선 것입니다. 다만 안자는 잘못 어그러져도 곧 그것을 알 수 있는데, 알면 곧 다시는 싹트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역시 방심을 구하는 종류일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정씨도의 서술이 이와 같습니다. 정씨의 자는 자견(子見)인데 신안 사람입니다. 은거 생활을 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고 , 그 생실에는 의리에 맞는 점이 매우 많았습니다. 백발이 되어서는 경전의 연구에 깊은 이해가 있어 [사서장도] 3권을 지었습니다. 자견이 원하지 않아 곧 향군 박사로 되었다가 치사하고 돌아갔습니다. 그의 사람됨이 이와 같사오니, 어찌 일정한 견해 없이 함부로 지었겠습니까?
[第九敬齋箴圖]
경재잠(敬齋箴)
.의관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있기를 마치 상제를 대하듯 하라. 발가짐(足容)은 반드시 무겁게 하 것이며, 손가짐(手容)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여야 하니, 당은 가려서 밟아, 개미집 두덩까지도 (밟지 말고)돌아서 가라. 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뵙듯 해야 하며, 일을 할 때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호기라도 안이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입다물기를 병마개 막듯이 하고, 잡념 막기를 성곽과 같이하여, 성실하고 진실하여 조금도 경솔히 함이 없도록 하라. 동쪽을 가지고 서쪽 가지 말고, 북쪽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지말며, 일을 당하여서는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씀 딴데로 가지 않도록 하라. 두 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직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피도록 하라. 이러한 것을 그치지 않고 일삼아 하는 것을 곧"경을 유지함", 즉 "지경(持敬)"이라 하니, 동할 때나 정할때나 어그러짐이 없고, 겉과 속이 서로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 잠시라도 틈이 벌어지면 사욕이 만 가지나 일어나 불꽃도 없이 뜨거워지고 얼음 없이 차가워지느니라.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꾸고 삼강(三綱)이 멸하여지고 구법(九法) 또한 못 쓰게 될 것이다. 아! 아이들이여! 깊이 마음에 새겨 두고 공경할지어다. 먹을 갈아 경계하는 글을 씀으로써 감히 영대(靈臺)에 고하노라.
주자는 말하였다. "주선(周旋)이 규(規)에 맞는다고 함은 회전처가 그 둥금이 규에 맞는 것처럼 되길 바란다는 것이고, 절선(折선(旋))이 구(矩)에 맞는다 함은 횡전처가 그 모남이구에 맞는 것처럼 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의봉(蟻封)이란 의질(蟻질)이다. 옛말에 "말을 타고 의봉 사이로 굽어서 돌아갔다"고 하는데 그것은 의봉 사이의 길이 꼬부라지고 좁아서, 말을 타고 그 사이를 절도를 잃지 않으며 꼬불꼬불 달려 돌아간다는 것이 바로 어려운 일을 해내는 소이(所以)임을 말한 것이다. 입 다물기를 병마개 막듯이 한다는 것은 말을 망령되게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고, 잡념 막기를 성과 같이 한다는 것은 사악한 것이 들어옴을 막는다는 것이다. 또 "경"이 모름지기 "주일"하는 것임을 말하였다. 본래 한 개의 일이 있던 데에 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고, 원래 한 개 있던 데에 두 개를 더하면 곧 세 개를 이룬다. 잠깐 사이란 때로 말함이고, 터럭 끝만큼의 차이란 일로 말함이다.
임천 오씨는 말하였다. "이 잠(箴)은 대략 10장으로 되었는데, 한 장은 4구씩이다. 첫째 장은 정할 때에 어김이 없을 것을 말한 것이, 둘째 장은 동할 때에 어김이 없을 것을 말한 것이다. 셋째 장은 겉의 바름을 , 넷째 장은 속의 바름을 말한 것이다. 다섯째 장은 마음이 바로잡혀 일에 통달될 것을 말하였으며, 여섯째 장은 일에 주일, 즉 집중하되 마음에 근본 할 것을 말하였다. 일곱째 장은 앞의 여섯째 장은 일에 주일, 즉 집중하되 마음에 근본 할 것을 말하였다. 일곱째 장은 앞의 여섯 장을 총괄한 것이며, 여덟째 장은 마음이 흩어지지 않을 수 없는 병페를 말한 것이다. 아홉째 장은 일에 집중되지 못하는 병폐를 말한 것이며, 열재 장은 이한 편을 총괄적을 결론지은 것이다."
서산 진씨는 말하기를, "경에 대한 뜻은 여기에서 더 이상 남김일 없게 되었다. 성학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것을 잘 되풀이해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위의 잠의 제목 아래에 주자는 자서하여 말하길, "장경부(張敬夫)의 주일잠(主一箴)을 읽고 그 남은 뜻을 주워 모아 경재잠을 지어, 서재의 벽에 써 붙이고 스스로 경계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잠은 경의 조목인데 설에서는 많은 '지두'가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두의 설은 공부하는 데 좋은 근거가 될 것이라 하겠는데, 금화의 왕노재가 지두를 배열하여 이 도(圖)를 만듦으로써, 명백히 정동되고 모두 단락지어짐이 또한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생각하고 눈에 띌 때마다 항상 몸소 체험, 음미하시고 경계삼아 반성하시어 깨닫는 것이 있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경이 성학을 하는 데 시종이 됨을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第十夙興夜寐箴圖]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 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혹은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가다듬은 다음,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엄숙히 정제하고, 마음의 상태를 허명정일(虛明靜一)하게 가질 것이다. 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와 증자가 앞뒤에 계실 것이다. 성현의 말씀을 친절히 경청하고, 제자들의 문변(問辯)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 잡아라.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 천명은 밝고 밝은 것,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일에 응하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대로 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동과 정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펴야 하지만,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려서는 안 된다. 독서하고 남은 틈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성정을 길러야 한다. 날이 저물고 사람이 권태로워지면 흐린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장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되,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으라. 잡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이 돌아와 쉬게 하라. 야기(夜氣)로써 길러 나가라. 이미 정이면 원에 돌아오느니라.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라.
위의 잠(箴)은 남당 진무경(陳茂卿)이 지어 스스로 경계한 것입니다. 금화 왕노재(王魯齋)가 일직이 태주의 상채(上蔡) 서원에서 교육을 맡았을 때, 오로지 이 잠만을 가르쳐, 배우는 사람들마다 모두 외고 익혀서 실행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지금 삼가 노재의 경재잠도를 본떠 이 도를 만들어 그의 도와 상대가 되게 하였습니다. 원래 경재잠에는 공부해야 할 영역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영역에 따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도에는 공부해야 할 때가 많이 적혀 있으므로, 그 때에 따라 배열하여 도를 만들었습니다.
무릇 도의 유행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한 자리도 이가 없는 곳이 없으니, 어느 곳에서 공부를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잠깐 사이라도 정지되는 일이 없으므로 한순간도 이가 없을 때가 없으니, 어느 때인들 공부를 그만두어서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사자(子思子)는 이르기를, "道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삼가 조심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고 하였고, 또 "은밀한 곳보다 잘 드러나는 고시 없고, 세미(細微)한 것보다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활에 있어, 장소와 때를 막론하고 존양(存養)하고 성찰하여 그 공부를 힘쓰게 하는 법입니다. 과연 이와 같이 할 수 있으면, 어느 영역에서나 털끝만큼의 과오마저 없게 될 것이며, 어느 때나 순간의 끊임마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병진해야 합니다. 성인 되는 요결, 그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상의 다섯 도는 심성에 근원을 둔 것인데, 요점은 일상생활에 힘쓰고 경외의 태도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