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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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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심부 |
한반도의 중서부에 위치하는 고도(古都)로서 한국에서 가장 큰, 세계적인 도시이다.
강동구 상일동 산12번지(동경 127°11'06"475)에서 강서구 오곡동 624번지(동경 126°45'55"137)까지 동서간 거리가 36.78km,
서초구 원지동 산4번지 62호(북위 37°25'32"301)에서 도봉구 도봉동 산29번지 1호(북위 37°41'55"237)까지 남북간 거리가 30.30km에 이른다.
사방으로 과천·광명·안양·시흥·성남·구리·남양주·의정부·부천·군포·의왕·의정부 등 위성도시들과 접해 있고, 수원·안산·인천 등과도 사실상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도시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서울특별시와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경기도를 합쳐 수도권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서울의 광역도시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근래에는 자동차 교통의 발달과 더불어 서울의 통근권이 천안·아산·진천 등 충청도 북부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서울은 14세기말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수도로 건설되어 그 이후 지금까지 600년간 줄곧 우리나라의 수도였다.
도읍으로 정한 당시에는 한양(漢陽)·한성(漢城)으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는 경성(京城)으로 개칭되었다.
해방 후 1945년에 지금의 '서울'로 다시 바뀌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다시 수도가 되었다.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옛 경무대)를 비롯하여 3부를 대표하는 국회·대법원 및 정부종합청사(제2정부종합청사는 과천시에 있음)가 자리잡고 있다.
서울이란 신라의 수도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말로, 수도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인 동시에 고유명사로도 사용되고 있다.
즉 '한국의 서울(수도)은 서울(지명)'인 것이다. 서울은 한국의 도시 이름 중 유일하게 순수한 우리말로 이루어진 지명이며, 영문으로는 'Seoul'로 표기한다.
한자 표기의 관례가 없는 가운데 일본측에서 가끔 경성(京城), 중국측에서는 한성(漢城)이라고 쓰고 있으나, 그것은 과거의 일시적인 지명일 뿐이다. 중국과의 국교수립 이후 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한자 표기의 사용 빈도가 높아지면서 '서울'의 음과 훈을 제대로 나타낼 적절한 한자 표기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오늘날의 서울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한국의 최고 중심지이며, 도로·철도·항공 교통의 구심점이다.
따라서 서울은 한국의 공간구조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위치에 있으며, 동시에 세계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여기에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거대한 규모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제와 국력의 성장을 배경으로 지구화, 지역 블록화에 따라 새롭게 부각되는 한반도 및 서울의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향후 통일이 이루어지고 동북아시아 경제권이 형성되면, 서울은 동북 아시아 지역의 최고 중심지 역할을 놓고 도쿄[東京] 및 베이징[北京]과 경쟁하게 될 것이다.
행정구역상 종로구·강남구 등 25개 구, 469개 법정동, 528개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청은 중구 태평로1가동 31번지에 있다.
면적은 전국토의 0.28%에 지나지 않으나, 인구는 남한 인구 4명당 1명이 서울에 사는 셈으로 소수의 도시국가들을 제외하면 세계 최고의 종주율(宗主率 primacy)을 나타내며, 인구밀도 또한 세계에서 가장 높다. 면적 605.78㎢, 인구 10,276,968(2003), 인구밀도 16,975.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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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역의 확장 |
서울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이미선사시대부터이다.
암사동 선사주거지는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한사군(漢四郡)의 진번군(眞番郡) 세력 아래 있었고, 이어 마한(馬韓)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백제가 발상(發祥)한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은 지금의 도봉구 미아동 근처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그곳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지금의 경기도 광주(廣州)이다.
이후 신라·백제·고구려는 한강 하류의 기름진 들판을 낀 이 전략적 요충지를 두고 여러 차례 쟁탈전을 벌였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때 이 지역을 점령했고(392), 장수왕은 다시 백제를 물리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여 위례성을 남평양(南平壤)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475).
551년에는 나제 연합군이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군을 밀어냈으나, 뒤이은 양국간의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이지역을 차지한 후 북한산주(北漢山州) 또는 남천주(南川州)로 삼았다.
신라는 한강 하류 유역을 장악하여 중국과의 해상교통로를 확보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위한 주요한 고지를 점령한 셈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9주 중 한산주(漢山州)에 속했고, 경덕왕 때 한주(漢州)라 개칭하면서 서울 일원을 한양군(漢陽郡)으로 했다.
고려 성종 때는 12목의 하나인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었고, 문종 21년(1067)에는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이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궁궐이 지어지고 주민이 이주하여 도시적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무렵의 일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로 천도했을 때는 잠시 몽골군의 주둔지가 되기도 했고, 충렬왕 때는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가 공민왕 때 3경이 부활되면서 다시 남경의 지위를 회복했다. 이후 몇 번에 걸쳐 한양으로의 천도가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민심을 일신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고자 천도를 결심했다.
처음에는 계룡산이 수도로 거론되었으나 하륜(河崙)과 정도전(鄭道傳), 무학대사(無學大師)의 건의를 받아들여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했다.
한양을 새 왕조의 수도로 정하는 데는 한양이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한강과 같은 큰 강을 끼고 있어 교통상 편리한 곳이라는 점이 고려되었다.
또한 당시 풍수설(風水說)도 큰 몫을 했다. 백악(白岳)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낙산(駱山:左靑龍)과 인왕산(仁王山:右白虎)이 좌우로 둘러 에워싸고, 남산(南山:또는 木覓山, 案山)이 알맞게 앞에 놓여 있으며, 굽이쳐 흐르는 한강 너머로 멀리 관악산(冠岳山:朝山)이 조아리는 한양이야말로 능히 왕도가 자리잡을 만한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도성·궁궐·종묘·문묘·사직단·조정청사·주거지 및 시전의 배치와 가로의 건설 등 도시 내부구조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395년에는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도성을 중심으로 성저 10리에 이르는 5부(東部·西部·南部·北部·中部) 52방(坊)의 행정구역을 확정했다.
옛 남경의 이궁(離宮) 터에 새 궁궐 경복궁(景福宮)을 짓고 많은 전각을 배치했다.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고 궁궐 남쪽으로 대로(지금의 세종로)를 내어 양쪽에 육조와 중추부·사헌부 등 주요관청을 배치했다.
1396년에는 백악산-인왕산-목멱산-낙산을 잇는, 길이 5만 9,500자(약 17km)의 도성이 축조되었고,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4대문과 4소문이 뚫렸다.
동대문과 남대문은 1396년에 각각 준공되었다. 지금까지도 '4대문안', 또는 '문안'(城內)이라는 말이 도심을 가리키는 구어로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서울의 공간적 골격은 수도 건설 초기에 계획된 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하겠다.
종로를 중심으로 행랑과 시전이 배치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상업지역이 형성되어갔다.
종로에서 북쪽, 즉 궁궐·종묘·사직이 자리한 '명당'과 그 부근에는 양반계급의 주거지역인 북촌(北村)이, 그리고 상업지역을 지나 남산 기슭 쪽에는 하급관리와 세도가 없는 양반들이 모여 사는 남촌(南村)이 이루어졌다. 그에 비해 중인·상인·천민들의 주거지역 분화는 뚜렷하지 않았다.
1399년(정종 1)에는 수도를 개성으로 옮겼다가 6년후인 1405년(태종 5)에 한성으로 환도한 일이 있고, 1592년(선조 25)에는 임진왜란으로 의주에 파천했다가 그 이듬해에 환도하기도 했다.
개국 후 약 2세기 동안 태평성대가 지속되던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 등 한동안 끊임없이 전화(戰禍)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수도 한성부는 거의 모든 시설물이 파괴·소실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궁궐의 건축물 중에 온전히 남은 것은 남대문·돈화문과 창경궁의 홍화문·명정전·명정문 정도였고, 경복궁에서는 경회루의 돌기둥만 남았다고 한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조선왕조는 전화를 딛고 재도약하게 된다. 18세기 이후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도시의 기능과 형태도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19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열강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해지면서 한성부는 격변의 현장이 되었다.
임오군란·갑신정변을 거치면서 한편으로는 개화의 거센 물결이 쇄도해 들어왔고, 철도·전신·전화·학교·병원·상수도 등 서양의 근대적 시설들이 도입되어 소위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지방제도 개편으로 1895년 한성부는 한성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896년 다시 한성부로 개칭되었고, 1906년에는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어 통감부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명칭이 바뀌면서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바뀌고, 성내를 5부, 성외를 8면으로 하는 행정구역을 갖게 되었다.
경성부에는 조선총독부 이외에도 조선군사령부·조선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의 앞잡이 기관들이 들어섰다.
경인선·경부선·경의선·경원선·중앙선 등 철도가 부설되면서 용산·영등포·청량리 등 철도역을 중심으로 도시발달이 이루어졌다.
영등포 일대에 약간의 소비재 공업이 행해졌고,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해 각종 전문학교가 설립되었지만, 남산 중턱의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상징되는 강제 신사(神社) 참배가 그러했듯이, 이러한 시설들은 조선인의 복지와는 관계없는 제국주의적 식민통치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한 관계는 무엇보다도 경복궁을 가로막아 선 조선총독부와 남산 아래 용산 일대를 차지했던 조선군사령부(옛 미8군사령부 자리)의 방자한 위치가 잘 말해준다.
수도의 얼굴을 가리고 심장부를 도려낸 것이다. 경성부의 한인들은 주로 북촌을 중심으로 종로·청계천 이북에 살았고, 남촌과 용산의 군사시설 주위에는 일인들이 모여 살았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일제가 물러가고, 경성은 '서울'이 되어 미군정 치하에 들어갔다.
1946년 9월 '서울시'로 되어 경기도에서 분리되었고, 10월에는 일본식 지명을 우리 것으로 바꾸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수도로 결정되었고, 1949년 '서울특별시'로 되면서 136.06㎢였던 시역을 268.35㎢로 확장하고 성북구를 신설, 9개구를 가진 대도시로 새출발했다.
6·25전쟁 때는 임시 수도가 부산으로 이전했고, 1953년 환도했을 때의 서울은 그야말로 전쟁이 남긴 폐허였다. 곧 복구사업에 착수하여 제모습을 갖출 무렵에 군사쿠테타가 일어났다. 군사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하여 대도시 중심의 불균형 성장전략을 밀어부쳤다. 이때부터 서울은 거대도시를 향해 가속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는 내무부장관의 감독을 벗어나 국무총리에 직속됨으로써, 다른 지방행정구역과 구별되는 특별시가 되었다.
1963년에는 주로 한강 이남과 동북부에서 시역이 2배나 될 만큼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10년 뒤인 1973년에는 도봉구와 관악구가 신설되어 모두 11개구가 되었고, 경기도 지역의 일부가 편입되어 시역이 다시 늘어났다.
이 무렵 한강 이남 지역의 개발이 급속히 진전되어 1975년에 강남구, 1977년에 강서구, 1979년에 은평구·강동구·동작구·구로구가 신설되었다.
이어 1988년에는 송파구·중랑구·노원구·서초구·양천구를 신설하여 관할구가 22개에 이르렀다. 1991년에는 지방의회가 구성되었고, 1995년에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가 비로소 이루어져 지방자치의 시대를 열었다.
선거를 앞두고 성동구에서 광진구, 도봉구에서 강북구, 구로구에서 금천구가 분구되어 관할구가 25개로 늘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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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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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일대의 경관, 서울 중구 회현동 | 서울의 지반은 주로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뚝섬-한남동-남산서사면-북아현동-신촌을 잇는 선을 경계로 하여, 남서부는 화강편마암, 동북부와 관악산 일대는 화강암이 분포한다.
천도 당시에 서울은 북으로 북악산(342m), 동으로 낙산, 서로 인왕산, 그리고 남으로 목멱산(또는 남산, 262m)의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았고, 이들 내사산의 능선을 연결하는 도성을 축조했다.
지금은 도시가 평면적으로 확대되어 이웃한 위성도시들과 시가지가 서로 맞닿게 되었으나, 대체적인 시역은 북으로 북한산(837m), 동으로 용마봉(龍馬峰:348m), 서로 덕양산(德陽山:125m), 그리고 남으로 관악산(629m)의 외사산(外四山)에 둘러싸여 옛날에는 외침을 방어하는 데 유리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의 산들이 도시민에게 자연을 느끼게 하는 훌륭한 여가공간이 되고 있는 반면, 지형 자체는 대기의 순환을 어렵게 하여 도시 미기후에 영향을 미친다.
전체적인 지세를 보면, 북쪽으로 광주산맥의 줄기인 도봉산(717m)·남장대(716m)·인수봉(811m) 등 높은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동쪽으로는 불암산(佛岩山)·수락산(水落山:638m) 등이 경기도와 자연적 경계를 이룬다. 따라서 동북부가 대체로 높고 서남부는 구릉지와 평야로 연결되는데, 이러한 지세는 1970년대 이후 도시발달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시의 한가운데를 한강이 동에서 서로 관류하면서 인구 1,000만 명이 넘는 거대도시에 각종 용수를 공급하고 하수를 배출해낸다.
하운이 성했던 예전에는 뚝섬과 삼개(지금의 麻浦)에 하항이 있어 곡물을 비롯, 생선과 소금 등 해산물을 실어 나르며 번창했으나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곧 쇠퇴했고, 그나마 국토의 분단으로 강어귀의 소통이 막히자 하운은 완전히 끊어졌다.
광나루를 비롯해 노량·양화·한남·송파 나루터가 있었으나 다리가 여럿 놓이면서 역시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은 정기유람선이 여의도-잠실 간을 운행할 뿐이다.
청계천(淸溪川)·중랑천(中浪川)·탄천(炭川)·양재천(良才川)·안양천(安養川) 등의 지류가 시가지를 통해 한강으로 흘러들지만, 용수를 공급하지는 못하고 빗물과 하수를 배출해내는 통로의 역할만 하고 있다. 시가지 중심부에서는 대부분 복개된 후 상가나 도로·주차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어 지금은 그 유로를 알아보기조차 어렵다.
한강은 팔당 하류부터 자유사행을 하면서 하천 양안에 다양한 지형을 펼친다. 워커힐·옥수동·노량진·절두산 부근에는 깎아지른 절벽을, 미사·토평·신사·반포·행주 등지에는 범람원을, 그리고 뚝섬·잠실·여의도·난지도 등에는 하중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강남 개발과 더불어 범람원과 모래사장은 대부분 아파트 단지로 변했고, 1980년대 후반의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강 양안이 도로로 정비되었으며 고수부지는 시민의 여가공간으로 개발되었다.
뚝섬·잠실·여의도는 모두 주거지 또는 상업지대로 개발되었으며, 난지도는 20년간 서울시 쓰레기매립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이제는 재활용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밤섬이 하중도 중 유일하게 철새도래지로 옛 모습을 보전하고 있다.
기후는 남부지방의 난대성기후와 북부지방의 한랭한 기후의 중간형으로 전형적인 온대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1.8℃이며, 1월평균기온은 -3.4℃ 내외, 7월평균기온은 24.6℃ 내외로 같은 위도상의 다른 나라 도시들에 비해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다. 연평균강수량은 1,369.8㎜로 많은 편이며, 6, 7, 8월의 강수량이 전체의 58%를 차지할 정도로 여름철에 집중된다.
특히 장마전선이 북상하는 7, 8월에는 많은 비가 내려 홍수의 피해를 입기도 한다.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건물이 밀집하면서, 장마·홍수 등 기상재해는 방재대책에 힘입어 횟수가 줄어드는 대신 대형화하는 경향이 있다.
근래에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주택 및 건물의 매연으로 열섬(heat island) 현상이 나타나고 대기의 오염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수년 전부터는 한강에서 1급수의 취수가 어려워졌다. 노량진의 생물학적 산소요구량(BOD)은 3.40ppm으로 기준치의 몇 배에 달하고 있다.
대기의 아황산가스 농도에 있어서도 서울은 세계적으로 높은 도시 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테면 SO2의 연평균농도는 0.051ppm으로 기준치 0.05ppm을 이미 초과하고 있다.
이른봄 건조기에는 중국 내륙으로부터 오는 황사현상의 피해가 크다.
그리고 최근에는 강수의 산도가 높게 측정되어 산성비가 우려되고 있는데, 서울과 인근 공업지대의 매연 탓도 있겠지만 중국 황해안의 공업화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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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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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 1, 2지구 주택개발개량사업(1987), 서울 성동구 응봉동 |
조선조 초기 한성부의 인구는 약 10만 명(1428년에 도성 안쪽만 10만 3,328명)으로, 궁궐과 관청에 종사하는 정치인과 관리·군인·노비가 대부분이었다.
인구수의 변동이 작지 않았지만, 후기에는 20만 명 남짓으로(1835년에 20만 3,901명) 초기의 2배 정도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 구성에 있어서도 초기와는 달리 상공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1920년 국세조사 결과 서울의 인구는 25만 208명이었고, 이후 증가 추세가 계속되어 1935년에는 40만 4,202명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936년에는 시역의 확장으로 갑자기 72만 7,000명으로 늘어났다.
1942년에는 111만 4,004명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으나 1944년에는 다시 94만 7,630명까지 줄어들었으며,
8·15해방 당시 90만 1,371명에 인구밀도는 6,628명/㎢였다.
해방 후 해외동포가 돌아오고 북한 월남민이 서울로 집중했으며, 지방도시와 농어촌으로부터의 인구집중이 일어나 서울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났다.
그결과 1946년의 서울 인구는 126만 6,057명, 6·25전쟁 직전의 1949년에는 141만 8.025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6·25전쟁중에는 인구가 100만 명이나 줄었으나, 1955년에는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고도 더 늘어나서 157만 4,868명에 이르렀다. 이때의 인구밀도는 5,284명/㎢였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거듭하면서 산업과 인구는 도시로 집중해갔다.
거점개발이 사회경제개발의 기본전략으로 채택되어 대도시 중심의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었으며, 특히 서울의 성장은 폭발적이었다.
전통적인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그에 기초한 개발독재, 그리고 각종 기반시설로 인한 산업입지의 우위가 인구와 기능의 집중을 가속화시켰다.
산업의 중심이 농업에서 공업과 서비스업으로 넘어가면서 이농·이촌 인구의 대부분이 대도시로 향했고, 서울은 이처럼 농촌으로부터 유입되는 인구들로 끊임없이 비대해져가고 있다. 1960년에 244만 5,402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10년 뒤인 1970년에 2배가 넘는 544만 3,298명이 되었고, 1980년에는 836만 4,379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1990년에는 1,061만 2,577명에 이르러 드디어 1,000만 명을 넘어섰다.
1991년말 서울 인구는 1,090만 4,527명, 1995년 현재 1,054만 3,993명으로 1,100만 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로써 인구 1,000만 명을 막연하게 도시규모의 한계로 생각했던 일반의 통념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 입증되고 말았다.
서울의 인구가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1960년에 9.7%였던 것이 1970년에는 17.6%, 1980년에는 21.9%, 그리고 1990년에는 24.4%로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서울의 인구는 절대적으로 뿐만 아니라 총인구에 대한 비율에 있어서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1960년대에는 남한 인구 10명 중에 1명이 채 되지 못했으나 이제는 서울 인구가 남한 인구 4명 중에 1명의 비율로 증가했다.
서울로의 인구 및 기능 집중을 완화하기 위하여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많은 정책적 시도가 있었다.
그 중에는 서울의 공장 이전 및 신축 억제, 수도권 개발제한구역 설정, 서울시내 대학의 입학정원 동결 및 대학 신설 억제 등 상당히 실효를 거둔 것도 있지만, 정치권력의 집중과 경제의 불균형 성장전략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이러한 억제책이 거둘 효과는 처음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실 그동안 서울의 인구증가는 항상 예측과 계획을 앞질렀다.
1930년의 '한성도시계획'은 1959년의 서울 인구를 70만 명으로 계획했으나, 실제 1959년의 인구는 209만 3,969명이었다.
1966년에 만들어진 '서울시 도시계획'은 1985년의 서울 인구를 500만 명 정도로 잡았는데, 1970년 7월에 서울 인구는 이미 계획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1972년의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서는 1981년의 서울 인구를 760만 명으로, 그리고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서는 1991년의 서울 인구를 960만 명으로 각각 예측했다.
그러나 1980년의 서울 인구가 이미 836만 4,379명이었고 1995년 현재의 서울 인구는 1,100만 명에 가깝다.
인구증가가 예측을 앞지른다는 것은 인구가 도시의 수용능력을 넘어 늘어난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제3세계 도시화의 특징으로, 서울의 경우 그 전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인구의 집중을 막고 분산시키기 위한 각종 정책에도 불구하고 도시 경제와 시설의 수용능력을 넘는 인구증가가 일어나고, 그에 부수되는 문제를 뒤쫓아 해결하려다 보니 결국 분산책을 무색하게 하는 집중 유인이 발생되는 식의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그밖에 1986년의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나 1988년의 서울 올림픽 대회 개최와 같은 국가적 규모의 큰 행사들이 명시적 분산책들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상쇄한 측면도 없지 않다.
서울의 인구증가율은 1960년대에 연평균 8.2%였던 것이 1970년대에는 4.4%로, 그리고 1980년대에는 2.6%로 점차 줄어들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서울시의 인구가 감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서울 집중의 완화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 대신 외곽 수도권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구역상 시역의 바깥으로 되어 있는 위성도시들은 실은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의 외연적 연장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서울과 연접된 수도권지역의 인구성장은 결국 서울 자체의 성장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의 인구증가율을 보면, 1960년대에는 연평균 1.8%에 지나지 않던 것이 1970년대에는 4.1%로 당시 서울 수준에 거의 육박했고, 1980년대에는 4.6%로 서울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앞에 언급한 대로 이 둘을 합쳐 서울 대도시권의 인구성장으로 파악하면, 서울로의 집중과 그에 따른 서울의 비대화는 지금도 지속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연평균성장률이 전체적으로 둔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엄청난 인구규모를 생각하면 그렇게만도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을 향한 집중은 지속되고 있으며, 따라서 서울의 과대 과밀화는 지금도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주택부족은 서울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도시문제 중의 하나이다.
도시인구의 증가가 워낙 급속했기 때문에 주택건설능력이 인구증가를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 근본적 원인이지만, 그동안 경제의 양적 성장에 매달려 주택공급에 대한 투자가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1980~94년 서울의 인구는 29.1%가 증가한 데 비해 주택은 90%가 증가하여 주택증가율이 인구증가율과 같은 기간의 가구수 증가율(87%)을 앞지르고 있지만 서울의 주택난은 크게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인구의 증가가 오히려 시역 바깥의 수도권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어 이 지표만으로는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1980년 4.5명이던 가구당 인구수가 1996년에는 3.3명으로 줄어들었는데, 이러한 핵가족화 추세는 인구의 증가에 더하여 주택수요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택공급률(가구수에 대한 주택수의 백분율)은 1980년에 52.6%였던 것이 1990년에는 50.8%로 오히려 낮아졌으나, 1994년에는 53.5%로 증가했다. 서울의 주택공급 확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교외지역에서의 구획정리사업 외에는 주로 수도권에서의 신도시건설과 도시재개발에 의한 고층화·고밀도화에 의존하고 있다.
성남·과천에 이어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된 분당과 일산 신도시 및 평촌·중동 지구의 아파트 건설이 완료되어 서울의 주택사정은 다소 완화되었다.
주택의 형태로 보면 아파트·연립주택·다세대주택의 구성비가 계속 높아지고 있고, 단독주택은 1980년의 70.7%에서 1994년에는 44.3%로 줄어들었다.
세입자 가구의 비율이 크게 늘어나면서 자가 거주자의 비율이 74%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도 주택난이 심각함을 입증한다.
서울 사람들의 절반쯤은 '내집 마련의 꿈'을 갖고 산다.
그것은 꿈이라기보다 참으로 기본적인 수요일 뿐이다. 투기를 근절하고, 주택가격을 안정시키며, 중소형·공공·임대 주택의 건설 물량을 획기적으로 늘려나가야 할 것이다. 인구를 분산시켜 수요 자체를 줄일 수 있다면 이러한 공급정책은 더 효과적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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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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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는 증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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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기업 밀집지역인 테헤란밸리,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서 강남구 ... |
서울은 한국 정치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의 중심이다.
서울에는 한국 경제의 중추관리기능이 집중되어 있으며, 따라서 생산력과 담세율도 높다.
1994년을 기준으로 서울이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인구는 28.5%, 취업인구는 24.7%이며, 광업체·제조업체 수에 있어서는 28.6%를 차지한다.
그러나 도·소매업체 수에 있어서는 28.5%, 은행점포수에 있어서는 23.5%를 점하고, 대학이 17.8%, 의사 수 39%를 점하여, 특히 사회간접자본과 서비스 부문에서 서울의 집중률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경제력 집중 현상은 담세액의 비중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서울은 전국 내국세의 42.7%를 점한다. 이처럼 서울에 대한 집중도는 인구의 경우에 이미 심각하지만, 경제력·정치력 등 실질적인 기회와 힘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서울의 15세 이상 인구는 839만 3,792명으로 전체의 78%이며, 그중 경제활동인구는 503만 3,000명(62.9%)이다. 그리고 경제활동인구에서 13만 8,000명(2.7%)의 실업인구를 제외한 489만 5,000명이 실제로 취업하고 있다.
이들 취업인구의 산업별 구성을 통해 서울의 산업구조를 보면, 농림어업이 0.4%(전국의 0.85%), 광공업이 24.5%(전국의 25.3%), 그리고 상업·서비스업이 75.1%(전국의 30%)로 1차산업이 매우 낮은 반면, 2차산업과 특히 3차산업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1차산업 종사자는 거의 전부가 원예·채소재배·양계·양돈·낙농 등 도시주변의 근교농업 인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가지화가 진전되면서 그나마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산업화가 성숙하면서, 그리고 도시가 복합적 기능을 가진 현대적 거대도시로 발달해가면서 1차산업이 2·3차 산업으로 대체되어왔으며, 최근에는 공공 및 민간 부문의 서비스 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3차산업 구성비가 더욱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2차산업의 입지도 도시 내부에서 지가앙등·교통체증·환경규제 등 입지여건이 불리해지고 분산정책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 차츰 도시 바깥의 수도권지역으로 이전해가고 있다. 안산시의 반월공업단지는 서울 공장의 수도권 이전계획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취업자를 직업별로 구분해보면, 0.4%에 지나지 않는 농림수산업 종사자를 제외하면 전문기술직·행정직·관리직·사무관련직 종사자(41.3%), 판매직 및 서비스직 종사자(24.3%), 생산직·운수장비운전직·단순노무직 종사자(34.0%)의 세 집단이 일자리를 3분하고 있어 중산층이 두터워진다는 도시 사회계층 구조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광공업 센서스(1994)에 의하면, 서울의 종업원수 5명 이상인 광업 및 제조업 부문 사업체는 2만 532개소이다. 규모별로는 종업원 5~49명의 소규모 업체가 1만 9,481개소(94.8%)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50~499명의 중규모 업체가 994개소(4.8%), 그리고 500명 이상의 대규모 업체는 57개소(2.7%)에 불과하다. 이를 다시 종업원수로 보면, 광공업체의 총종업원수 41만 4,073명 중 24만 849명(58.2%)이 소규모 업체에, 11만 2,776명(27.2%)이 중규모 업체에, 그리고 6만 448명(14.6%)이 대규모 업체에 종사하고 있어 여전히 중·소 업체의 비중이 높은 대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제조업체가 집중된 지역은 구로·영등포구, 성동구, 중구의 세 지역이다. 그중 구로·영등포구가 전체 사업체수의 약 40%를 점하며, 구로수출공단을 중심으로 부천·인천의 공업지대가 연계되어 경인공업지대의 한 핵을 이룬다. 구로·영등포구는 특히 금속·기계·화학 공업의 비중이 크고, 성동구는 섬유·식품·가구 공업 등이 발달해 있다. 그리고 중구에는 근접성을 중시하는 전통적 도심 산업으로 인쇄업·출판업이 집중되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서울은 한국 도시체계의 최고위 중심지로 한국의 상업과 서비스업의 지배적 중심지이다.
도시 자체가 부양하는 인구가 이미 1,100만 명에 이르고 있어 내수 중심의 비기반활동도 크지만, 가깝게는 수도권의 전 인구가, 그리고 멀리는 전국의 모든 인구가 고차 상품과 서비스의 급양을 서울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서울에는 한국 최고, 최대의 도·소매 시장들이 발달해 있다.
1994년 현재 서울에는 일반 소매시장 407개소, 백화점 및 쇼핑 센터 45개소, 도매 센터 2개소, 연쇄점 69개 본부가 분포해 있다. 1990년과 비교해 보면 일반 소매시장의 경우 39개가 늘어났고, 시장의 규모 또한 한층 대규모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백화점 및 쇼핑 센터는 80년대 후반 이후부터 급속히 늘어 소비행태와 유통기구의 형태가 급속히 현대화·고급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의 백화점 매출액은 지방 백화점의 두 배에 달하며 백화점 종사자 수는 전국 백화점 종사자 수의 51%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도심뿐만 아니라 부심, 주변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위성도시에까지 백화점, 쇼핑 센터 등 대형 유통기구 또는 그 분점 형태의 매장이 개설되고 있어, 소비시장의 공간적인 분산입지 추세가 뚜렷하다.
그밖에 유명한 전통 재래시장 및 상가들도 시설의 현대화는 물론 기능의 특화와 전문화를 통해 급변하는 소비행태와 여건에 적응하고 있다. 도심의 남대문시장은 의류 및 잡화, 수입품의 전문 도·소매 시장으로, 동대문시장·평화시장 및 인근의 상가들은 섬유 및 의류 도·소매 시장으로, 그리고 경동시장은 한약재 및 청과물 시장으로, 중앙시장은 건어물시장으로 특화하면서 연관 상업 및 서비스 기능들을 집적시켜가고 있다.
그밖에도 가락동농수산물도매시장·노량진수산시장·용두동청과시장 등이 특화된 도·소매 시장이고, 구로기계공구상가·용산전자상가·세운상가 등 전문상가도 꾸준히 발달하고 있다.
서울에는 2,282개의 금융기관 점포가 집중되어 있어 전국 예금액과 대출 금액의 절반이 넘는 액수를 유통시키고 있으며, 전국의 23.3%에 해당하는 9만 5,026개나 되는 숙박 및 음식업소가 있다.
1980년대 이후 여의도에 증권거래소를 중심으로 증권가가 형성되고, 강남에 금융기관, 사무 빌딩, 호텔, 백화점 등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고 있으나, 명동·소공동·남대문로·서소문 일원의 중심업무지구(CBD)는 여전히 서울의 지배적인 도심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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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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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 제1청사, 서울 강서구 과해동 |
서울은 전국 교통망체계에서 핵심 결절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통팔달로 뻗은 국도는 물론 경부선·경인선·경의선·경춘선·경원선·중앙선 등 철도 노선과 경부·경인·영동·중부 고속도로가 서울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펼쳐져 있다.
뿐만 아니라 김포공항은 국내 항공 교통망의 중심공항으로서 제주·부산·대구·광주·목포·여수·진주·울산·포항·강릉 등 전국의 주요도시들을 서울과 1시간 이내의 거리로 수렴시켜가고 있다. 1992년말에 기공된 경부고속전철이 건설되고 나면 이러한 서울의 교통 중심지적 위치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최근에는 서울의 교통 위치가 이러한 국내적 중심위치를 넘어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김포공항의 뒤를 이어 서울의 관문으로 자리잡은 인천국제공항은 동북아시아 교통의 중계지에 위치한 허브공항(중추공항)으로서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어 인접한 서울의 역할과 기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서울의 가로망이 골격을 잡기 시작한 것은 물론 조선초 수도로서의 도시건설과 때를 같이한다. 당시에는 종로·광화문·남대문을 잇는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궁궐과 종묘, 사직을 잇는 길을 내는 것이 기본이었다. 도시건설 자체가 길(線)보다는 구역(面)을 중시했고, 거기다가 풍수설에 따라 주요건물의 위치와 좌향을 정하고 차츰 빈 곳을 채워넣는 식이었으므로 지선 도로는 자연 골목길의 형태가 되었다. 유럽의 도시들이 일찍이 수레 교통에 적응해 도로체계를 갖추었던 데 비하면, 지역간 물자의 교역이 비교적 적었고 소달구지 정도를 사용했던 한국 도시에 있어 도로의 정비가 늦은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서울에 자동차가 등장한 것은 1903년이고, 일반 교통수단으로 이용된 것은 그보다 10여 년 뒤의 일이다. 이리하여 서울의 도로 개수공사는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36년의 '경성시가지계획령'은 그때까지 주로 부분적인 개수에 머물렀던 도로공사가 법적 뒷받침을 받으며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계획에 의해 노폭 12m 이상의 도로총길이가 220개 노선에 7.72km로 늘어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시가지 도로망의 기초가 되었다. 1928년부터 버스가 운행되다가 시외노선에 투입되면서 1932년부터 서울 시내교통의 주역은 전차로 바뀌었다. 1968년에 시내 대중교통 수단의 역할을 완전히 버스에 내주고 사라질 때까지 한 세대가 넘는 기간 동안 전차는 서울의 가파른 역사와 시민들의 애환을 함께 실어날랐다.
서울의 교통망은 1970년대 강남지역이 개발되면서 크게 확대되었다. 6·25전쟁 때는 한강철교를 빼고는 하나밖에 없었던 한강인도교가 일찍 폭파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피난길을 막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강의 남북을 잇는 다리가 서울 올림픽 대회를 기념하여 건설된 올림픽 대교를 포함하여 무려 21개에 이른다. 남산에 3개의 터널이 뚫렸고, 청계천을 따라 고가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서울역 앞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입체교차로와 육교가 생겨났다. 한강 양안을 따라 강변도로가 개통되어 동서를 잇는 대동맥의 역할을 담당하고 3겹의 순환도로와 외곽순환도로가 도로교통망을 입체화시켜놓고 있다. 최근에 서울특별시는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지하도로의 건설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서울의 교통체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1970년대에 도입되기 시작한 지하철이다. 1971년 4월에 착공하여 1974년 8월에 개통된 청량리-서울역 간 지하철 제1호선에 이어, 시청-신촌-강남-뚝섬 간을 순환연결하는 2호선, 수서-지축 간 3호선, 남태령-당고개 간의 4호선, 상일동·마천-방화 간의 5호선이 경부선·경인선·경의선·경춘선·일산선·안산선·분당선 국철과 연계되어 도심과 외곽을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6호선(역촌-봉화산)과 7호선(장암-온수), 8호선(암사-모란)이 완공, 운행되면서 서울은 지하철노선망에 의해 위성도시들과도 원활히 연계되어 있다.
1999년 현재 교통수단별 여객운송분담률은 버스 28.8%, 지하철 33.8%, 택시 9.2%, 승용차 19.6%, 기타 8.6%로 지하철의 운송분담률이 버스보다 높다. 현재로는 버스·지하철·택시 등 대중교통의 비율이 더 높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승용차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도시구조·도로체계·도로건설비·가용재원 등을 고려할 때 대중교통 수단의 비중을 떨어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999년 현재 서울시에 등록된 자동차는 모두 229만 7,726대로, 전국 자동차 대수의 20.8%를 차지한다. 그중 승용차가 176만 2,927대(76.7%)로 1/4을 넘고, 승합차는 20만 4,638(8.9%), 화물차 32만 8,018대(14.3%), 특장차는 2,143대(0.09%)이다. 주요 이용시설로는 반포와 자양동에 고속 버스 터미널, 용산에 관광 버스 터미널, 지방노선별로 동서울·서부·상봉 시외 버스 터미널이 있고, 서초동에 서울 남부 터미널, 여의도와 잠실에 페리선 부두가 있다.
서울은 교통 혼잡 이외에도 교통사고가 많은 도시이다. 1999년 한 해 동안 모두 5만 47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566명이 목숨을 잃고, 6만 9,456명이 부상당했다. 교통사고가 이처럼 많은 것은 자동차의 역사가 짧아 아직 운전문화가 정착하지 못했고, 도로에 비해 통행량이 많으며, 도로와 신호체계에 불합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도시교통과 관련하여 서울은 그밖에도 무단주차·뺑소니·택시횡포 등 몇 가지 좋지 못한 점이 알려져 있다. 서울의 교통난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은 도시기능의 분산, 과밀의 해소, 도심기능의 다핵화 등 공간구조적 차원에서 교통수요를 줄이고 분산시키는 쪽으로 모색되어야겠지만, 교통로의 확충과 교통수단 및 운행의 체계화·합리화라는 공급 측면의 양적 확충과 질적 개선 및 교통행태의 선진화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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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선사시대 주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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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대학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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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과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진 서울 시청 앞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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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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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에 있는 인사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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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필동 일대에 있는 한옥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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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신촌 번화가 | 서울에는 국립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고려대학교·서강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한양대학교 등 사립대학들이 집중되어 있다. 1995년 현재 서울에는 55개 대학(교)에 68만 679명의 대학생이 재학하고 있으며, 이들 대학에 부설된 특수대학원들을 포함하여 169개 대학원에 6만 49명이 등록되어 있다. 이러한 숫자는 1980년대 초반 이후 서울의 인구 및 기능 집중 억제시책에 의거한 서울 시내 대학신설 및 정원동결책에 따라 10여 년 간 묶여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수도권에 수많은 대학과 분교가 생겨났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보다도 교육기관간의 질적 격차에 있다.
인구가 서울로 집중하는 원인이 지방과 서울 간 기회의 격차에 있다고 할 때, 많은 한국인들은 그 기회의 내용을 현실적 취업 또는 소득과 함께 교육의 기회, 특히 이른바 일류대학에 입학할 기회로 인식하고 있다. 즉 일류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서울로 이주하여 서울의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고정관념이며, 일종의 사회심리적 강박관념이기도 하다. 그 밑바탕에는 일류대학을 나와야 '출세'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잘 가르치므로 일류대학 합격률이 높으며, 그런 고등학교에 배정되기 위해서는 명문 학군에 있는 중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이른바 '8학군병'은 여기서 나왔고, 그것이 1980년대에 강남 일대의 땅값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한 원인이 되었다.
서울에는 일반고등학교 200개교와 실업계고등학교 75개교에 모두 54만 3,575명, 중학교는 335개교에 52만 6,294명, 초등학교는 519개교에 78만 709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거기에 유치원, 각종 학교(중학교·고등학교 과정), 고등공민학교, 고등기술학교 및 특수학교를 합치면 서울에는 모두 2,478개 학교에 280만 8,738명의 학생이 있는 셈이다(1996).
서울은 한국 문화의 중심도시이다. 조선시대부터 오늘에 이르는 600년 동안 서울은 한국 문화와 예술의 중심이 되어왔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문화 시설과 행사 및 매체 등이 집중되어 있다. 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서울시립도서관·공공도서관 및 각 대학도서관 등 200여 개소에 이르고, 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국립과학관·전쟁박물관 및 각 대학 부설박물관 등이 20여 개소에 이르며, 세종대왕기념관·절두산순교기념관·유관순기념관·안중근의사기념관 등 기념관도 여러 개 있다.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호암 아트 홀 등이 예술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고, 최근에 준공된 예술의 전당은 한국 예술의 메카가 될 것이 분명하다. 공연장은 모두 258개소에 수용인원은 7만 3,780명이다. 서울에 있는 문화재로는 국보 131점, 보물 377점, 사적 61점, 천연기념물 11점이 있다.
언론기관으로는 연합통신사와 한국방송공사(KBS)·문화방송(MBC)·서울방송(SBS)·교육방송(EBS) 등 텔레비전 방송국들과 KBS·MBC·SBS·EBS·기독교방송(CBS)·불교방송(BBS)·교통방송(TBS)·극동방송(FBS) 등 AM 및 FM 라디오 방송국들이 모두 서울에 있으며,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한국일보〉·〈경향신문〉·〈한겨레〉·〈대한매일〉·〈국민일보〉·〈세계일보〉와 〈코리아 헤럴드 Korea Herald〉·〈코리아 타임스 Korea Times〉 등 주요 일간지 및 주간지의 본사들이 있고, 외국 유수의 언론사들의 지부가 모두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포츠 시설로는 서울종합운동장을 비롯해 동대문운동장, 효창운동장, 장충체육관, 올림픽 공원 내의 각종 경기장, 태릉선수촌, 서울경마장, 태릉 컨트리 클럽, 동서울 컨트리 클럽 등이 있다.
서울의 관광자원으로는 무엇보다도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으뜸이 될 것이다. 오래된 도시로서 역사의 다채로운 현장이 도시의 구석구석에 살아 숨쉬고 있으며, 현대적인 도시로서의 면모도 손색이 없다. 수려한 자연과 독특한 조형물들, 옛 것과 새 것이 한데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경관과 곳곳에 숨어 있는 일제의 잔재와 전쟁의 상흔, 그 폐허 위에 새로 건설한 도시의 다양한 프로필은 한국인의 영광과 수난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그와 더불어 부지런히 일하고 복잡한 거리를 활기차게 걷는 시민들의 삶의 모습은 다른 나라의 대도시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는 광경이다.
개별적인 관광 대상으로는 암사동 선사유적과 몽촌토성·풍납토성을 비롯한 한강 연안의 백제시대 유적, 그리고 조선시대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고색이 창연한 경복궁·창경궁·창덕궁·덕수궁 등 궁궐들과 종묘·문묘·능·사직단과 도성·대문·소문들이 도시의 각처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은행 본점이나 서울역사 양식, 지금은 공원이 된 서울구치소와 독립문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고적이고, 한국 불교계를 앞장서서 이끄는 조계사와 초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은 절두산성지, 명동성당도 명소이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다가 순국한 선열들의 정기가 서린 동작동 국립묘지와 독재에 맞서 항쟁한 젊은이들의 넋이 잠든 수유동 4·19국립묘지는 관광지라기보다 서울의 성지이다. 남산 타워, 북악 스카이웨이, 63빌딩과 한강의 뱃길은 도시의 겉모양을 전망할 수 있는 곳이고, 가회동 일대의 한옥보전지구와 인사동 거리,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신촌과 홍대입구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서울의 모습이다. 쇼핑을 즐기는 관광객들에게 동대문시장·남대문시장·경동시장은 물건을 사는 것 이상의 진한 삶의 체취를 체험하게 해준다. 고급제품을 모조한 상품들과 값싼 보세품이 즐비한 이태원 거리에서는 외래문화가 한국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들 외에도 시내 곳곳에는 사직공원, 효창공원, 탑골 공원, 종묘 앞 공원, 장충단공원, 삼청공원, 보라매공원, 올림픽 공원 등이 저마다 절실한 유래와 사연을 안고 있으며, 한강시민공원·어린이대공원·서울대공원은 현대적 위락시설을 갖춘 대규모 여가공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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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는 여의도 공원 | 서울시에 현대적인 도시계획이 최초로 수립된 것은 형식적으로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이었다. 그 ' 한성도시계획'은 1930년을 기준연도, 1959년을 목표연도로 한 30년에 걸친 장기계획이었다. 계획구역은 당시의 경성부에 주변 9개면을 더한 108.8㎢로 시역의 약 3배에 달했고, 목표연도의 인구규모를 70만 명으로 잡았다. 이 계획은 노폭 53m의 광로 하나와 노폭 11m 이상의 중로와 대로를 합하여 192개 노선, 총연장 284.947km에 이르는 가로를 계획했다. 그리고 용도지역계획에서는 계획지역 내의 토지를 주거가능지(77.8㎢, 71.5%)와 주거불가능지(31.0㎢, 28.5%)로 나누고, 주거가능지를 다시 주거지역·상업지역·공업지역·미지정지역으로 구분하여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채 1936년의 ' 경성부시가지계획'으로 대치되었다. 이 계획은 1934년에 제정·공포된 '조선시가지계획령'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테면 법적 뒷받침을 받은 최초의 서울시 도시계획이었다. 이 역시 목표연도를 1965년으로 잡은 장기계획이었다. 목표연도의 인구를 110만 명으로 책정했고, 계획지역의 면적은 이전의 계획보다 약간 추가된 135.4㎢였다. 계획의 내용은 1930년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다만 220개 노선에 달하는 획기적 가로계획을 담고 있었다. 이 가로계획은 이후 다소의 변경을 거쳤으나 해방 후의 서울시 간선도로망계획의 기초가 되었다.
8·15해방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서울의 인구를 수용하고 수도로서의 기능을 감당하기 위해서 1949년 8월 서울시 도시계획을 실시했다. 이 계획에서는 은평·뚝섬·구로·숭인의 4개 지구를 도시계획구역으로 편입시켜 경성부 면적의 약 2배에 달하는 269.8㎢를 계획지역으로 확정했다. 이 계획은 일제강점기에 수립된 1936년 계획을 시정하여 독립국의 수도다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의욕적으로 시도되었으나, 뒤이은 6·25전쟁으로 용도지역계획과 가로계획 등 세부계획을 성안하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환도한 1953년에 1949년의 계획을 골간으로 하는 도시계획이 수립되었는데, 대체로 가로의 변경과 토지구획정리지구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
1963년 8월에는 양주군·부천군·시흥군 일부 지역의 관할을 변경하여 총면적을 595.6㎢로 늘렸고, 이어 9월에는 경기도 신도면·과천면·오정면·서면 일부를 추가하여 도시계획구역을 713.2㎢로 재확장했다. 1962년 제정된 도시계획법에 따라 1964년에는 은평·뚝섬·구로·숭인 지구를 포함한 넓은 구역에 대해 용도지역을 지정했고, 1966년에는 1985년도를 목표연도로 하는 '서울도시기본계획'을 수립했다.
1960년대 경제개발과 함께 서울의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1970년에는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을 다시 확대하여 지금과 같은 720.9㎢가 되었고, 1966년에 제정된 도시기본계획을 수정하여 용도지역을 재정비했다. 1966년의 계획에서 설정한 1985년도의 계획인구 500만 명이 1970년에 이미 돌파되자, 1991년을 목표연도로 하여 계획인구를 760만 명으로 다시 조정했다. 1971년에 마련된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2~81)은 목표연도의 서울 인구를 630만 명으로 책정하고 도시의 성장을 억제하도록 했다. 이어 1971년 7월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방지하고 도시주변의 자연환경을 보전하여 도시민의 생활환경을 확보하는 동시에, 보안상 도시개발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는 도시주변지역에 대하여 개발제한구역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는 도시계획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서울 주변에 총 68.6㎢에 달하는 개발제한구역(green belt)이 설정되었다. 1970년에 개정된 '도시기본계획'(1972~91)은 용도지역계획에서 계획구역을 시가지화구역(502.87㎢)·비시가지화구역(218.01㎢)으로 나누고, 시가지화구역을 다시 주거지역(381.21㎢)·상업지역(32.02㎢)·공원(38.23㎢)·준공업지역(51.43㎢)으로, 그리고 비시가지화구역을 다시 생산녹지(48.94㎢)·산림녹지·기타(169.07㎢)로 세분했다. 가로간선망계획에서는 도심에서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13개의 방사선과 그것을 순환하며 연결하는 3겹의 순환선을 설정해 전체적으로 순환방사형의 골격을 제시했다.
1979년에는 1979~2000년을 계획기간으로 잡은 '도시계획기본구상'이 작성되었다. 계획구역은 종전과 같이 720.9㎢이고, 목표연도의 계획인구는 945만 명으로 잡았다. 이 계획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울의 도시계획을 국토균형개발의 차원에서 접근한 점과 서울의 도시구조를 이제까지의 도심 중심의 단핵적 구조에서 부심과 위성도시·신도시 개발을 전제로 다핵적 구조로 개편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82~91)의 하나로 마련된 ' 수도권정비기본계획'(1982~91)은 서울의 도시계획에 하나의 큰 틀이 되었다. 이 계획은 과밀한 수도권의 인구와 산업시설을 지방의 성장거점도시들로 분산시키는 것을 대강(大綱)으로 하고, 한강 이북지역의 산업입지를 제한하는 대신 이들을 한강 이남지역으로 적극 유도하여 다핵적 광역도시권으로 개발하고, 한강의 수질오염을 방지하며 자연녹지를 최대한 확보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수도권을 이전촉진권역·제한정비권역·개발유도권역·자연보전권역·개발유보권역의 5대 정비권역으로 구획하고, 이를 다시 12개 지구생활권으로 나누어 투자계획 및 관리단위로 활용하게 했다. 이로써 서울은 이전촉진권역에 포함되어 서울강북지구생활권과 서울강남지구생활권으로 나누어졌다. 강북지구는 서울 인구분산의 주요대상지구로 국제적·전국적 중추관리기능만 입지시키고, 그밖의 산업과 기능은 강남지역으로의 분산과 이전을 유도하여 강남지구는 강북지구에서 분산되는 비공해성 생산, 유통, 교육 및 관리기능을 수용하게 했다. 그러나 수도권에 인구 및 산업의 집중과 과밀화에 따른 도시문제가 계속적으로 심화되고, 세계화에 대응할 국제도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여건조성이 미흡하여 1996년 수도권정비 계획법을 재정립했다. 즉 서울·인천은 국제기능을 수행하는 핵심축으로 정비하여 무역·금융·정보·통신·국제교류 등에 있어서 동북아와 세계 중심도시로 발전시키며, 서울·인천지역을 과밀억제권역으로, 경기도 북부지역과 남부지역은 성장관리권역, 경기도 동부지역은 자연보존권역으로 설정했다. 이로써 서울의 과밀기능을 분산시키고 주변도시와의 기능적 연계체계를 강화할 계획이다.
1996년 현재 서울시의 용도지역 현황을 보면, 도시계획면적 606.0㎢는 주거지역 301.3㎢(42.8%), 상업지역 22.6㎢(3.1%), 공업지역 29.0㎢(4.1%), 녹지 253.1㎢(50.1%)로 구성되어 있다. 주거지역에는 일반주거지역(291.1㎢) 외에 주거전용지역(4.8㎢)과 준주거지역(5.4㎢)이 포함되며, 공업지역은 분류상 공업지역·준공업지역으로 세분되나 서울시의 경우에는 전부가 준공업지역이다. 그리고 녹지는 대부분이 자연녹지(249.4㎢)이고, 약간의 생산녹지(3.6㎢)를 포함한다. 1994년 현재 녹지에는 166.82㎢의 개발제한구역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지목은 대지(7.27㎢)·임야(108.96㎢)·농경지(23.21㎢)·잡종지(8.65㎢)·기타(18.73㎢)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의 도시계획은 집중억제와 과밀해소라는 1970년대 이래의 과제를 여전히 안고 있으며, 그 기조는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국내외 여건의 변화와 도시 자체가 발전과정에서 새로이 직면하게 되는 과제들이 역시 주요현안으로 대두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첫째, 통일 및 동북아시아 경제권의 형성에 대비하여 서울을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로 기능하게 하기 위한 정보·금융·운송·업무 등 국제적 중추관리기능의 보강은 국가 경영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둘째, 지금까지 주로 생산 및 유통이라는 공급 측면에 치중함으로써 소홀히 했던 환경 및 소비, 수거(收去) 측면의 도시기능을 보강해야 한다. 특히 상수원의 수질보호, 대기오염 방지, 녹지보호 및 여가공간의 확보, 하수와 폐기물의 수거 및 처리, 묘지문제 등은 모두 시급한 대책을 필요로 하고 있다. 셋째, 서울 시계를 넘어 방만하고 무질서하게 팽창하고 있는 교외 시가지와 위성도시의 도시문제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는 개별 위성도시 또는 신도시·신시가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수도권 전체의 광역구조를 관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기능의 연계와 특화가 아마도 해결의 기본방향이 될 것이다. 넷째, 그동안 강남개발과 신도시개발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났던 강북지역의 개발, 특히 도심지역의 재개발을 체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끝으로 도시계획의 전통적이고 본질적인 임무이지만, 서울의 주택난과 교통난을 완화·해소하기 위한 개발 및 재개발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일시적이고 기발한 처방보다는 종합적인 정책의 지속적 추진에 의해서만 문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지금까지의 서울이 반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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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 시의 동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언주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동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신설되었으며, 1979년에 강동구가, 1988년에 서초구가 분구되어 나갔다. 북쪽은 한강의 침식을 받아 대체로 낮은 기복을 이루며, 한강 연안에는 충적층이 발달되었다. 남쪽으로는 대모산(290m)·구룡산(283m)이 솟아 있고, 탄천(炭川)과 양재천(良才川)이 대치동에서 합류하여 한강에 유입한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기 이전까지 신사동을 중심으로 양잠이 성했고, 채소 및 화훼 재배가 활발한 서울 근교농업의 중심지였으나 1968년부터 실시된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따라 도시개발이 시작되었다. 1971년 논현동에 공무원 아파트가 건립된 이래 1976년 강남단지가 조성되었고, 1976년 이후 개포동·압구정동·청담동·도곡동에 수많은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섰다. 강남대로 연변을 중심으로 상가가 형성되었으며, 주요 아파트 단지에는 대형 쇼핑 센터들이 들어서 있다. 특히 압구정동 일대에는 강남의 고급상권이 분포하고 있다. 업무지구는 한남대교에서 강남대로로 이어지는 도로 연변을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역삼동 일대가 그 중심을 이룬다. 최근에는 삼성동 일대에 한국 종합무역 센터와 종합전시관을 비롯하여 대한주택공사·한국전력공사 등 주요기관이 들어서 새로운 업무중심지구를 형성하고 있다. 1969년 한남대교와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이래 영동대교·성수대교·동호대교가 건설되어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며, 남부순환도로, 올림픽 대로와 강남대로·영동대로·선릉로 등의 주요간선도로가 직교(直交) 형식을 이루고, 지하철 2·3호선이 구내외를 연결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삼성동에 선정릉(宣靖陵:사적 제199호), 수서동에 광평대군묘역(廣平大君墓域: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삼성동 봉은사(奉恩寺) 내에 선불당(選佛堂: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4호)이 있고, 역삼동에 무문토기주거지(無紋土器住居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49개소, 초등학교 30개교, 중학교 23개교, 고등학교 16개교 등이 있다. 역삼(驛三)·신사(新沙)·논현(論峴)·압구정(狎鷗亭)·청담(淸潭)·삼성(三成)·대치(大峙)·개포(開浦)·일원(逸院)·포이(浦二)·율현(栗峴)·자곡(紫谷)·도곡(道谷)·수서(水西)·세곡(細谷) 등 15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역삼동이다. 면적 39.55㎢, 인구 553,913, 인구밀도 14,005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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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 | 시의 동부 외곽지역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에 속했으나 1963년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성동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5년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구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1979년 강동구로 분리·신설되었으며, 1988년 송파구가 분구되었다. 한강으로 북류하는 고덕천 연안에 넓은 충적지가 발달하여 예로부터 벼농사와 근교농업이 발달했다. 또한 흙을 이용한 산업이 일찍부터 발달해 암사동의 점촌은 백제시대 궁궐에서 쓰일 그릇을 구워냈던 곳으로 유명하다. 8·15해방을 전후하여 성내동을 중심으로 제일연와공장·광성요업사·한일연와공장 등이 옹기·기와·토관·화분 등을 만들면서 1970년대 초반까지 호황을 누렸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준공업지역이었던 성내동에 강동구청·강동경찰서 등 공공시설이 들어서면서 업무 및 주택 지역으로 바뀌었고, 섬유·직물·화공약품 및 벽돌 공장이 상일동·하일동 등으로 이전해갔다. 원예농업도 발달하여 규모가 큰 화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의 주택부족문제 해결과 도시기반시설 확충을 위한 대단위 주택단지조성사업은 1972년에 천호토지구획정리사업(천호동·길동·성내동·둔촌동·명일동 일부)을 필두로 하여 1976~80년에 암사지구, 1981~84년에 강동구청 주변정비, 1982~85년에 고덕지구에서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 주택보급률은 70.8%이며, 전체 주택수 중 아파트가 4만 4,653동으로 전체의 50.6%를 차지하고 있다(1996). 광진교는 심한 파손으로 1996년 철거되기까지 서울의 도심지역과 천호동지구를 연결하는 주요교통로로 이용되었으며, 1976년 천호대교를 가설함에 따라 이 지역의 발전이 가속되었다. 특히 천호동 4거리는 천호대로·선사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1996년 지하철 5호선 건설 공사가 완공되었다. 문화유적으로 암사동 선사주거지(사적 제267호)가 있으며, 1984년 선사유적공원 조성계획에 따라 재발굴이 이루어진 결과 3개의 문화층에서 25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는데, 이 주거지들을 그대로 복원시키고 전시관을 건립하여 도심 속의 문화공간을 조성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80개소, 초등학교 24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7개교 등이 있다. 성내(城內)·하일(下一)·상일(上一)·명일(明逸)·고덕(高德)·암사(巖寺)·천호(千戶)·길(吉)·둔촌(遁村) 등 9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성내동이다. 면적 24.58㎢, 인구 505,341, 인구밀도 20,559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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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북구 | 시의 동북부에 있는 구. 원래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에 속했다가 1924년 노원면과 병합되어 노해면이 되었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북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3년 도봉구로 분리·신설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수유동·미아동·번동·우이동과 쌍문동 일부지역이 강북구로 분리·신설되었다. 시의 서부는 북한산(837m)이, 동북부는 도봉산의 지맥이 둘러싸고 구의 동쪽 경계를 따라 중랑천의 지류인 우이천이 남동류하여 흐르고 있다. 시가지는 비교적 저평한 남동부지역에 발달했다. 수유동·우이동 일대는 고급 주택지로 알려져 있지만 서울에서 관악구와 함께 영세민이 많은 지역 중의 하나로 꼽힌다. 전철 4호선이 도봉로를 따라 남북으로 통과하고 있으며, 미아역과 수유역 등의 지하철역 주변에는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해 있다. 이밖에도 우이동길·삼양로를 따라 상가와 주택지가 발달해 있다. 우이동 일대에는 북한산국립공원이 위치하며, 노적봉(780m)·백운대(837m)·인수봉(811m) 등이 가깝다. 북한산국립공원내에는 만경대·용암문·대동문·북한산장·우이동유원지 등이 있어 서울시민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수유동에는 4·19국립묘지와 선열묘소, 아카데미유스호스텔이 있으며, 화계사·청룡사·통천사·영락기도원 등이 있다. 행정동별로 볼 때 미아동에 전체 구 인구의 약 절반 정도가 거주하며, 번동의 상주인구가 다른 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116개소, 초등학교 36개교, 중학교 24개교, 고등학교 11개교가 있다. 미아(彌阿)·번(樊)·수유(水踰)·우이(牛耳) 등 4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수유3동이다. 면적 23.61㎢, 인구 394,264, 인구밀도 16,699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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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 시의 서부에 있는 구.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양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7년 강서구로 분리·신설되었으며, 1988년 양천구가 분구되었다. 구의 북서쪽은 한강의 범람원지대이며, 남동쪽으로는 편마암이 오랜 침식을 받아 이루어진 파랑상의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릉지 위에 개화산(開花山:131m)·매봉산(118m)·우장산(雨裝山:94m) 등의 낮은 잔구(殘丘)가 곳곳에 산재한다. 가양천(加陽川)·방화천(傍花川)이 북류하여 한강으로 유입하며, 특히 방화천은 한강의 역조수위(逆潮水位)를 이용한 관개수로가 발달해 있다.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으나, 1968년 화곡동에 택지조성사업이 실시되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고, 도시적인 토지이용 패턴을 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임야와 농경지 및 개발제한구역이 많아 김포평야 주변의 가양동·방화동·외발산동 일대에서는 농촌경관이 나타난다. 주택지역은 화곡동 전지역과 내발산동 전지역에 형성되어 있다. 특히 화곡동은 영등포구와 김포공항의 중간에 있는 지역으로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의 개통과 더불어 도심과의 거리가 단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김포공항·부천공업단지·영등포지역과의 접근성이 좋아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전문상가는 화곡동의 대로변에 분포하고, 대규모 상가는 화곡동 아파트 간선도로 연변, 공항로와 남부순환도로가 만나는 공항동과 방화동 주택가 중심지에 형성되어 있다. 1965년에 개통된 제2한강교를 효시로 경인고속도로와 남부순환도로가 구를 통과하게 되었고, 1979년에 개통된 성산로는 공항로와 직접 연결되어 출퇴근 시간을 단축시켰다. 또한 남부순환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강서로의 완공과, 1983년 공항로와 경인고속도로가 직결하는 까치산 터널의 개통 및 1986년 올림픽 대로의 완공으로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으로는 개화동에 있는 약사사(藥師寺) 경내에 3층석탑(三層石塔: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호)과 석불(石佛: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호)이 있다. 가양동에는 1411년에 창건한 양천향교지(陽川鄕校址: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67개소, 초등학교 30개교, 중학교 18개교, 고등학교 14개교, 그리스도신학대학 등이 있다. 화곡(禾谷)·염창(鹽倉)·등촌(登村)·가양(加陽)·마곡(麻谷)·내발산(內鉢山)·외발산(外鉢山)·공항(空港)·방화(傍花)·개화(開花)·과해(果海)·오곡(五谷)·오쇠(五釗) 등 13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화곡동이다. 면적 41.41㎢, 인구 522,088, 인구밀도 12,608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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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 | 시의 남서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3년 관악구로 분리·신설되었으며, 1980년 동작구가 분구되었다. 관악산을 주봉으로 하여 서쪽으로 호압산(虎壓山), 동쪽으로 우면산(牛眠山)이 연결되어 있어 과천시·안양시와 경계를 이룬다. 남태령은 서울과 과천을 잇는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관악산에서 발원한 도림천은 대부분이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1965년 이후 서울시의 도시재개발사업에 따라 봉천동·신림동을 중심으로 철거민 정착촌이 형성되었고, 그후 다시 재개발사업이 실시되었다. 1975년 관악산 기슭으로 서울대학교가 옮겨옴에 따라 철거민에 의해 심어진 어두운 이미지는 점차 대학가의 활기찬 이미지로 변모했다. 구면적의 38%를 차지하는 관악산 일대는 대부분 개발제한구역이다. 서울대학교와 연계하여 봉천동 4거리와 신림동 4거리가 상업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이 지역이 짧은 기간에 서울의 신흥주택지역으로 변모한 것은 도심부와의 거리가 가깝고, 교통수단이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즉 장승백이에서 동작구 상도동 고개에 이르는 도로의 확장과 남부순환도로 및 지하철 2호선의 개통을 비롯해 관악로·신림로·은천길·쑥고개길·난곡길·낙성대길·신대방길 등이 주요교통로이다. 문화유적으로는 봉천동에 낙성대(落星垈: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가 있으며, 관악산을 중심으로 자운암(慈雲庵)·관음사(觀音寺)·약수암(藥水庵) 등의 암자가 곳곳에 위치한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34개소,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10개교가 있으며, 국립서울대학교가 관악산 기슭에 있다. 봉천(奉天)·남현(南峴)·신림(新林) 등 3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봉천동이다. 면적 29.57㎢, 인구 577,164, 인구밀도 19,519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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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 | 시의 동부에 있는 구. 원래 경성부에 속했던 지역으로 1936년 동부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43년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뉘었다. 이후 고양군의 뚝도면과 광주군의 4개 면지역이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1975년 한강이남지역이 강남구로 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행정구역개편으로 자양동·화양동·모진동·군자동·능동·중곡동·구의동·광장동 등이 광진구로 분리·신설되었다. 구의 북동부에 용마봉(348m)·아차산(316m) 등이 솟아 있으며, 이곳에서 남동부지역으로 가면서 지세가 낮고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 광나루와 뚝섬나루가 있던 곳으로 중앙선 개통과 청평댐 건설 전까지는 서울 동부지역의 주요하항으로 이용되었다. 한강의 범람지역이던 성수동·자양동 일대의 뚝섬은 제방이 축조되면서 근교농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1970년대초부터 신흥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현재는 주택과 상업시설, 공장들이 혼재되어 있다. 중곡동·광장동·능동에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쾌적한 고급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건국대학교·세종대학교가 있는 화양동 일대에는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아차산성·광진나루·어린이대공원·뚝섬유원지 등이 있다. 지하철 2호선이 지나며, 강변로·천호대로·자양로·구의로 등이 사방으로 놓여 있다. 잠실대교·올림픽대교·광진교, 보수공사중인 천호대교 등이 강남-강북 간의 교통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82개소, 초등학교 18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 9개교, 세종대학교·건국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이 있다. 자양·노유(老遊)·화양(華陽)·모진(毛陳)·군자(君子)·능(陵)·중곡(中谷)·구의(九宜)·광장(廣壯) 등 9개동이 있다. 구청소재지는 자양동이다. 면적 17.05㎢, 인구 389,608, 인구밀도 22,851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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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 | 시의 남서부에 있는 구. 경기도 시흥군 동면 구로리·도림리·가산리·시흥리에 속했던 지역으로 1949년 구로리와 도림리가, 1963년 가산리, 시흥리가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구로구로 분리·신설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행정구역개편으로 시흥동·독산동과 가리봉동 중 140~153, 234~239번지가 금천구로 신설되어 분구되었다. 구의 서쪽지역은 낮은 구릉지를 이루며, 안양천이 흐르는 동부지역은 경인선·경수선 지하철 제2호선이 개통되면서 구로역·신도림역·개봉역·오류역 주변에 큰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궁동·온수동 등은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거지역은 구로동과 개봉동의 일부지역에 형성되어 있으며, 특히 개봉동은 구내에서 비교적 잘 정돈된 주거지역이다.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가 들어선 구로동·가리봉동 주변과 영등포공업지역에 연결되어 가장 먼저 공업지대로 자리잡은 신도림동·고척동 주변지역에는 공장지대가 형성되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1965년부터 조성된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의 제1·2·3단지는 공업용지의 취득, 안양천과 도림천으로부터의 공업용수 공급, 경부선·경인선 및 국도와의 접근, 영등포공업지대의 기존시설 이용, 구로지역의 풍부한 노동력 수용 등의 용이한 이점을 바탕으로 입지했다. 1967년에 완공된 한국수출산업 제1공업단지는 구로동을 중심으로 섬유와 전자제품업체들이, 1972년에 완공된 제2단지와 1976년에 완공된 제3단지는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봉제와 전자제품업체들이 각각 입주해 있다. 경인선과 경부선이 분기하는 구로역은 한국의 철도가 한곳에 모이는 지역이며, 경인가도와 중부·남부 지방의 국도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또한 남부순환도로, 지하철 2호선, 공단로 등과 연계되어 구내외를 원활히 연결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46개소, 초등학교 19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 구로(九老)·신도림(新道林)·고척(高尺)·개봉(開峰)·오류(梧柳)·궁(宮)·온수(溫水)·가리봉(加里峰) 등 8개동이 있다. 면적 20.15㎢, 인구 381,955, 인구밀도 18,956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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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 시의 남부에 있는 구.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 가산리·시흥리가 영등포구에 편입되었고, 1980년 구로구로 분리·신설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구로구의 시흥동·독산동과 가리봉동 중 일부가 금천구로 분리·신설되었다. 구의 남동쪽에는 관악산의 지맥인 호압산(341m)과 목골산(163m)이 솟아 있고, 서쪽으로 광명시와의 경계를 따라 안양천이 흐른다. 경수선이 개통되면서 독산동과 시흥역 주변에 큰 시가지와 주거지역이 형성되었다. 가리봉동의 공업단지는 1976년에 완공되어 주로 봉제와 전자제품업체들이 입주했다. 현재에도 LG정보통신·LG전자·삼성물산·경인산업기계·경남화학·롯데파이오니아·맥슨전자·금성출판사 등의 전자·기계·출판·섬유공장이 많다. 인구는 행정동별로 볼 때 독산동과 시흥동에 거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반면 한국수출산업공단이 입지한 가산동의 상주인구는 구 전체인구의 약 0.7%에 불과하다. 시흥동과 독산동의 주거지역은 서울의 변두리 주거지역의 전형을 이루고 있으며, 시흥대로와 독산동길을 중심으로 위락 및 중심상업기능이 밀집되었다. 남부순환도로가 구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시흥대로와 독산동길이 구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난다. 이밖에도 안양천로·문성골길·구로동길 등이 있어 구내리를 원활히 연결하고 있다. 최근에는 관악산의 지맥인 호압산에 산복터널이 완공되어 관악구와의 교통시간을 단축했으며, 이 일대의 불량주택지역이 재개발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29개소, 초등학교 15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5개교가 있다. 시흥(始興)·가산(加山)·독산(禿山) 등 3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시흥본동이다. 면적 13.08㎢, 인구 282,848, 인구밀도 21,624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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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 | 시의 동북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속했으며,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북구에 속했다. 1973년에 성북구에서 분리된 도봉구에 속했다가 1988년 도봉구와 노원구로 분리됨에 따라 노원구가 되었다. 북쪽 경계에는 수락산(638m), 동쪽 경계에는 불암산이 솟아 있으며, 그밖의 지역은 대체로 100m 내외의 저평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구의 서부에는 중랑천이 남북방향으로 흐르며, 그 연안에는 시가지로 조성된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원래 중랑천 연안을 중심으로 비닐 하우스재배가 활발한 근교농업지역으로 중·소 규모의 공장이 혼재되어 있는 준공업지역이었다. 1960년대 도심지 재개발로 철거된 주민들이 상계·중계 등지에 정착하여 불량주택지역을 형성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도시재개발사업이 시작되고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었으며, 1985년말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됨에 따라 도시지역으로 급격히 변모했다. 대부분의 구민들이 도시중심부와 그밖의 여러 지역에 생업기반을 두고 출퇴근하는 베드타운(bed town)의 기능이 강하다. 아직까지도 구의 주변지역에는 근교농업지역이 남아 있으나 점차 주택지구 및 상업지구로 변화하고 있다. 재래시장은 거의 없는 실정이며, 한신코아·건영옴니·미도파 백화점 등의 대규모 상업시설이 이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관광지로는 수락산과 불암산을 비롯하여 국제사격장과 공원시설을 갖춘 태릉푸른동산, 태릉 골프장, 태릉 스케이트장이 있으며, 그 주변에는 대형음식점과 배밭 등이 있어 서울 시민들의 주말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공릉동에는 태릉선수촌과 육군사관학교가 있고, 유적으로 태강릉(泰康陵:사적 제201호) 등이 있다. 경원선과 경춘선이 성북역에서 분기하며, 지하철 4호선이 지난다. 그밖에 시 중심부 방면의 도로와 의정부·남양주 등 시외방면의 도로가 놓여 있으며, 동부도시고속화도로의 건설로 강남지역과의 교통이 보다 원활해졌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와 지하철 7호선이 건설중에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86개소, 초등학교 36개교, 중학교 23개교, 고등학교 13개교, 전문대학 2개교와 광운대학교·삼육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서울산업대학·육군사관학교 등이 있다. 상계(上溪)·중계(中溪)·하계(下溪)·월계(月溪)·공릉(孔陵) 등 5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상계동이다. 면적 35.49㎢, 인구 598,240, 인구밀도 16,857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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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 시의 동북부에 있는 구. 원래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에 속했으며, 1924년 노원면과 병합되어 노해면이 되었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북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3년 성북구에서 분리되어 도봉구가 되었다. 1988년에 노원구가 분구되었으며,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행정구역 개편으로 방학동·도봉동·창동·쌍문동 일부를 제외한 수유동·미아동·번동·우이동이 강북구로 분리·신설되었다. 시의 북서부에는 도봉산(717m)·우이암(542m) 등이 솟아 있으며 남동쪽으로 가면서 지세가 점차 낮아진다. 구의 동서쪽 경계를 따라 한천과 우이천이 흘러 중랑천에 유입한다. 시가지는 방학동·창동·쌍문동 일대에 발달했다. 또한 도봉동과 방학동 일대에는 식품·제지·의류·제약업체들이 입지하고 있으며 쌍문·창동·방학 등의 지하철역 일대는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경원선과 지하철 1·4호선이 지나며 시내 중심부를 연결하는 도봉로가 남북으로 구를 통과한다. 구의 북쪽 도봉동을 동·서 방향으로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가 지날 예정이다. 인구는 행정동별로 볼 때 창동에 전체인구의 33%(12만 4,724명)가 거주하며, 도봉동에 15.4%(5만 7,693명)가 거주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63개소, 초등학교 19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3개교가 있으며, 덕성여자대학교가 있다. 방학(放鶴)·도봉(道峰)·창(倉)·쌍문(雙門) 등 4개동이 있다. 면적 20.86㎢, 인구 373,214, 인구밀도 17,891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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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구 | 시의 동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성부와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1936년 경성부의 구역확장에 따라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43년 구제(區制)가 실시됨에 따라 동부출장소가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누어졌다. 1949년에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1988년에는 중랑구가 분구했다. 동부와 북부에 1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솟아 있으며, 그밖의 지역은 대체로 저평하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각각 구의 동쪽과 서남쪽 경계를 흐르며, 중랑천 연안의 장안동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1985년에는 상주인구가 94만 명으로 서울시 전체인구의 10%를 차지했었으나 중랑구가 분리됨에 따라 1996년 현재 약 4%에 불과한 40만 명 정도이다. 서울의 주요부도심 중의 하나이며, 서울시와 경기도·강원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1899년에 전차가 부설되었고, 최초의 고가도로인 삼일고가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신설동-성수 간 국철, 성북-용산 간 국철 등이 통과하여 시내교통이 편리하다. 또한 경원선·경춘선·중앙선·교외선이 청량리역을 시·종점으로 하고, 경기도의 구리시·남양주시를 연결하는 버스들이 청량리 로터리를 중심으로 왕래하고 있다. 또한 경동시장·청량리시장 등의 재래시장과 롯데·미도파 백화점 등의 현대식 상가가 발달했다. 청량리동에 한국개발연구원·산업연구원·산림청 등의 연구기관이 있으며, 휘경동에 국립건설시험소·건설공무원교육원 등이 있다. 유물·유적으로 선농단(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5호)·보제원(普濟院)·영휘원(永徽園)·휘경원(徽慶園) 등이 있으며, 용두동의 옛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자리에 향나무(천연기념물 제240호)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77개소,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6개교, 전문대학 3개교, 경희대학교·서울시립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 등이 있다. 신설(新設)·용두(龍頭)·제기(祭基)·전농(典農)·답십리(踏十里)·장안(長安)·청량리(淸凉里)·회기(回基)·휘경(徽慶)·이문(里門) 등 10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신설동이다. 면적 14.20㎢, 인구 418,715, 인구밀도 29,487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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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 | 시의 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하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후에 시흥군 동면·신동면·북면으로 분할되었다.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하에 있다가 1963년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다. 1973년 관악구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 관악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구의 북쪽은 국립묘지 뒷산인 덕박굴산과 장승백이 고개가 연결되었으며, 한강변에는 침식애(浸蝕崖)가 발달했고, 여의도와의 사이에 샛강이 흐른다. 한강의 남쪽 나루 중 교통량이 가장 많았던 노량진(鷺梁津:노들나루)의 영향으로 한강 이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과거 이 지역은 노량진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계선장(繫船場)·선구상(船具商)·주막과 같은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또한 도자기를 만드는 흙의 질이 좋아 예로부터 오지그릇과 질그릇을 구워내던 독막과 기와공장이 입지했다. 도시화의 물결에 따라 동작동 국립묘지와 그 주변의 공원지대 및 노량진동의 사육신묘(死六臣墓)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일찍부터 시가지화되었고, 평지나 고지대를 막론하고 주거지역이 형성되었다. 1968년 용산구 이촌동과 중구 양동(남대문로 5가동 일대)의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민이 이주해 형성한 사당동 일대의 불량주택은 재개발되어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신대방동과 대방동을 중심으로 화학·제약·방직·전기·전자기계 공장이 밀집해 있다. 그밖에 국정교과서주식회사를 비롯한 인쇄공장이 있다. 노량진동에 위치한 노량진수산시장은 수도권지역의 생선공급을 위한 판매·저장·가공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1일 13만 2,491t의 수산물이 거래되고 있다(1995). 1900년에 한강철교가, 1917년에 한강인도교가 가설되었고, 1981년에 한강인도교(지금의 한강대교)의 확장공사와 함께 실시된 상도 터널의 건설과 1984년 동작대교의 건설로 강북지역과의 교통소통이 원활해졌다. 또한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이 지나고 올림픽 대로, 동작대로, 사당로, 대방로, 현충로, 상도동길 등의 도로가 연계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노량진동에 사육신묘(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상도동에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가 있고, 동작동 국립묘지 내에는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昌嬪安氏)의 묘소와 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가 있다. 동작동에는 국립묘지가 있으며, 신대방동의 보라매공원은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45개소, 초등학교 18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7개교, 숭실대학교·중앙대학교·총신대학교 등이 있다. 노량진(鷺梁津)·상도제1(上道第1)·상도(上道)·본(本)·흑석(黑石)·동작(銅雀)·사당(舍堂)·대방(大方)·신대방(新大方) 등 9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노량진동이다. 면적 16.35㎢, 인구 435,521, 인구밀도 26,637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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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 시의 중서부에 있는 구. 조선시대에는 한성부에 속했으며, 1911년에 잠시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다가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었다. 1944년 서대문구역소에서 분리되어 마포구역소가 되었으며, 1945년 마포구로 개칭되었다. 구의 중부와 동부에 와우산(102m)·노고산(105m) 등이 솟아 있으며, 그밖의 지역은 대체로 100m 이하의 낮고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한강이 구의 남쪽을 흐르며, 불광천과 사천천이 한강으로 유입한다. 한강수운이 성했던 당시에는 마포나루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강수운이 쇠퇴한 후에는 주거지역으로 발달했으나 국회의사당이 자리한 여의도를 잇는 마포대교가 완공되고, 마포로·용마로·서강로 등이 정비됨에 따라 공덕동 일대는 새로운 업무지구로 변모했다. 동교동에는 호텔·예식장·고급음식점 등이 많으며, 홍익대학교와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상수동과 신수동은 서대문구의 신촌 일대와 더불어 대학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한강의 하중도였던 난지도 일대는 쓰레기매립장으로 이용되었으나 현재 폐쇄되었다. 앞으로 지반이 안정되면 대규모 환경생태공원과 첨단 정보단지로 조성될 계획이다. 상암동 일부지역에서는 아직도 채소·화훼 등을 재배하는 근교농업이 행해지기도 한다. 유적으로 절두산순교지가 있으며, 한국 유일의 정교회 건물이 있다. 지하철 2호선이 지나며, 성산대교·양화대교·마포대교 등이 강남지역과의 교통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41개,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5개교, 서강대학교·홍익대학교 등이 있다. 성산(城山)·아현(阿峴)·공덕(孔德)·신공덕(新孔德)·도화(桃花)·용강(龍江)·토정(土亭)·마포(麻浦)·대흥(大興)·염리(鹽里)·노고산(老姑山)·신수(新水)·구수(舊水)·현석(玄石)·창전(倉前)·상수(上水)·신정(新井)·하중(賀中)·하수(下水)·당인(唐人)·서교(西橋)·동교(東橋)·합정(合井)·망원(望遠)·연남(延南)·상암(上巖)·중(中) 등 27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성산동이다. 면적 23.87㎢, 인구 398,020, 인구밀도 16,674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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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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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일대 | 시의 중서부에 있는 구. 조선시대에는 한성부에 속했으며, 1914년에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다가 1936년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1940년 서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43년 구제(區制)의 실시로 서대문구역소가 되었다. 1944년에 마포구역소가 분리되었으며, 1945년에 서대문구역소가 서대문구로 개칭되었다. 1979년에는 은평구가 분리되었다. 북쪽에는 북한산 줄기가 뻗어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는 인왕산·안산(296m)·백련산(226m) 등이 솟아 있다. 사천천이 구의 서부를 서남류하여 한강에 흘러든다. 조선 도읍지 천도 때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나, 장소가 협소하여 지금의 경복궁 자리로 정해졌다. 중구와 은평구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지역으로 신촌은 일찍부터 서울의 주요 부심지역으로 발전했다. 공장은 거의 없고, 대부분 주거지와 상업지역이 분포한다. 1920년대에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가 들어서면서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이들 대학이 있는 신촌동과 대현동은 젊은이들의 휴식·오락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홍제동·홍은동 일대의 불량주택지구는 최근 도시재개발사업으로 점차 개선되고 있다. 연희동 일부지역과 남가좌동 등지는 신흥 고급주택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지하철 신촌역과 이대입구역에는 그레이스 백화점을 비롯하여 각종 상가가 형성되어 있으며, 대현동과 충정로 가로변에는 의상실과 가구점 등의 전문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유적으로 독립문(사적 제32호)·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사적 제33호) 등이 있으며, 현저동에 있던 서울구치소 자리는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경의선과 지하철 2호선이 지나며, 의주로·가좌로·모래내길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34개소, 초등학교 18개교, 중학교 14개교, 고등학교 8개교, 전문대학 2개교, 경기대학교·명지대학교·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감리교신학대학 등이 있다. 연희(延禧)·충정로2가(忠正路二街)·충정로3가·합(蛤)·미근(渼芹)·천연(天然)·냉천(冷泉)·옥천(玉川)·영천(靈泉)·현저(峴底)·북아현(北阿峴)·대신(大新)·대현(大峴)·신촌(新村)·봉원(奉元)·창천(滄川)·홍제(弘濟)·홍은(弘恩)·남가좌(南加佐)·북가좌(北加佐) 등 20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연희동이다. 면적 17.60㎢, 인구 367,061, 인구밀도 20,856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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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 | 시의 동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과천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시흥군 신동면으로 개편되었고, 1963년에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5년 신설된 강남구에 속했으며, 1988년 강남구로부터 분리·신설되었다. 구의 남쪽으로는 청계산(淸溪山)을 주봉으로 인릉산(仁陵山)·대모산(大母山)·구룡산(九龍山)·우면산(牛眠山) 등이 자연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의 한강 연안에는 충적층이 발달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반포천(盤浦川)이 동작구와 경계를 이루며 북류하고, 양재천(良才川)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탄천(炭川)에 합류하여 한강에 유입한다.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까지 양잠업이 성했고, 근교농업의 중심지로 채소 및 화훼 재배가 활발했다. 서초동과 원지동 일대의 꽃시장은 오늘날에도 유명한 화훼재배 중심지로 남아 있으며, 양재동에는 꽃과 관상수를 전문 판매하는 현대식 화훼유통단지가 문을 열었다. 양재동·내곡동·신원동·우면동 일대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젖소·사슴·돼지 등의 사육과 근교농업이 이루어지는 농촌경관이 나타난다. 이 구는 1965년 서울특별시의 부도심으로 계획되어 1968년에 토지구획사업이 시행됨에 따라 개발이 시작되었다. 1967~82년에 반포동·잠원동·서초동·양재동·염곡동·우면동의 일부를 포함한 영동제1토지구획정리사업이, 1971~82년에 서초동을 포함한 영동제2토지구획사업이, 1972~82년에 방배동·서초동의 일부가 포함된 영동제2추가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1973년에 반포주택단지가 조성되어 반포동을 중심으로 방배동·서초동·잠원동 등지에 많은 현대식 아파트가 건립되었다. 상업지역은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주변과 지하상가, 서울남부터미널 주변, 강남대로 연변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주요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쇼핑 센터와 백화점이 발달해 있다. 업무지역은 강남대로의 연변을 따라 서초로와 교차하는 지하철 강남역 4거리가 중심을 이루며, 우면로의 개통으로 그 주변이 신흥업무지구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서초동 일대에 법원·검찰청이 들어서 한국의 중심 법조단지를 이룰 뿐만 아니라 건너편에 서초경찰서·조달청·학술원·예술원·국립중앙도서관 등도 자리잡고 있다. 또한 양재동 4거리를 중심으로 남부순환도로를 따라 서초구청·외교안보연구원·우면산배수지·서울특별시공무원교육원·한국산업개발연구원 및 예술의 전당 등이 들어서 공공업무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1960년대까지 사평나루를 이용한 도강(渡江)만이 강북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말죽거리를 지나 과천을 통과하던 옛 경부가도(京釜街道:지금의 선암로)가 간선도로의 역할을 했으나 영동의 개발이 진행되면서 반포대교·동작대교 등이 가설되어 도심과 직접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고, 반포동에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서초동에 서울남부터미널, 양재동에 한국트럭터미널이 위치해 있어 한국 최대의 교통량을 처리하고 있다. 지하철 2·3·4호선과 남부순환도로·강남대로·우면로·반포로·방배로·동작대로 등의 주요간선도로가 연계되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내곡동에 헌인릉(獻仁陵:사적 제194호), 방배동에 청권사부묘소(淸權祠附墓所: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 서초동에 성안상공신도비(成安尙公神道碑: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0호), 대성사목불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2호)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43개소,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0개교,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서울교육대학 등이 있다. 서초(瑞草)·잠원(蠶院)·반포(盤浦)·방배(方背)·양재(良才)·원지(院趾)·우면(牛眠)·염곡(廉谷)·내곡(內谷)·신원(新院) 등 10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서초동이다. 면적 47.19㎢, 인구 404,654, 인구밀도 8,575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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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구 | 시의 중동부에 있는 구. 원래는 한성부의 인창방과 두모방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경성부를 축소시킬 때에는 고양군에 속하기도 했다. 1936년 다시 경성부로 편입되어 동부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43년 구제(區制)의 실시로 동대문과 성동구로 나누어졌다. 이후 고양군의 뚝도면과 광주군의 4개 면이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나, 1975년 한강이남 지역은 강남구로 분리되어 나갔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행정구역개편으로 자양동·화양동·모진동·군자동·능동·중곡동·구의동·광장동 등이 광진구로 분리·신설되었다. 구의 남쪽은 한강에 접해 있으며, 중랑천과 청계천이 한강에 흘러든다. 대부분의 지역은 낮고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일제강점기에는 각종 공장들이 입지했고, 1970년대 초부터는 신흥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현재는 공장과 주택, 상업시설들이 혼재해 있다. 금호동·옥수동·상왕십리동·하왕십리동·행당동 등은 불량주택이 많은 지역으로 현재 대대적인 재개발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성수동 일대에는 전자·기계·제약·화학공장 등이 밀집해 있으며, 한양대학교가 있는 행당동 일대에는 상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마장동은 말을 사육했던 곳이라는 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지하철 3호선과 성북-용산 간 국철이 지나며, 동호대교·성수대교·영동대교를 통하여 강남·북이 연결되고 있다. 인구는 행정동별로 볼 때 성수동(7만 7,821명)과 금호동(6만 6,270명)에 많이 분포하며, 도선동(1만 580명)의 인구가 적다. 유치원 45개소, 초등학교 15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 4개교와 한양대학교 등이 있다. 하왕십리(下往十里)·상왕십리(上往十里)·도선(道詵)·홍익(弘益)·마장(馬場)·사근(沙斤)·행당(杏堂)·응봉(鷹峰)·금호동1가(金湖洞一街)·금호동2가·금호동3가·금호동4가·옥수(玉水)·성수동1가(聖水洞一街)·성수동2가·송정(松亭)·용답(龍踏) 등 17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마장동이다. 면적 16.84㎢, 인구 341,328, 인구밀도 20,269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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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 시의 중북부에 있는 구. 원래는 한성부의 일부였으며, 1914년 3월 고양군 숭신면에 속했다가 그해 4월 경성부 동부출장소가 되었다. 1949년 고양군 숭인면의 일부지역과 동대문구의 일부지역이 합쳐져 성북구로 신설되었다. 1973년에 도봉구가 분리되어 나갔다. 구의 서북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1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정릉천이 동부를 흐른다. 서울의 도심에 비교적 가까우나 주로 주거지로 이용되어왔다. 특히 성북동에는 고급단독주택들이 많고 돈암동·삼선동·동소문동 등지에는 개조된 한옥들이 많다. 돈암동 일부와 도봉구 미아동 일대는 불량주택지구였으나 도시재개발사업으로 점차 쾌적한 주거지로 변모해가고 있다. 성신여대입구역을 비롯한 지하철역 주변에는 젊은 학생층을 겨냥한 각종 상가가 즐비하며, 길음동에 신세계백화점이 있다. 유적으로 정릉(사적 제208호)·의릉·선잠단터 등이 있으며, 성북동의 고택(古宅)들이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 봉국사·경국사·신흥사·보문사·개운사 등 유서깊은 절들이 많다. 지하철 4호선이 지나며, 미아로·화랑로 등의 도로가 나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69개소, 초등학교 24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0개교, 전문대학 1개교, 고려대학교·국민대학교·동덕여자대학교·성신여자대학교·한성대학교·서경대학교 등 구릉성 산지를 끼고 많은 대학들이 자리잡고 있다. 삼선동1가(三仙洞一街)·삼선동2가·삼선동3가·삼선동4가·삼선동5가·성북(城北)·성북동1가(城北洞一街)·돈암(敦巖)·동소문동1가(東小門洞一街)·동소문동2가·동소문동3가·동소문동4가·동소문동5가·동소문동6가·동소문동7가·동선동1가(東仙洞一街)·동선동2가·동선동3가·동선동4가·동선동5가·안암동1가(安巖洞一街)·안암동2가·안암동3가·안암동4가·안암동5가·보문동1가(普門洞一街)·보문동2가·보문동3가·보문동4가·보문동5가·보문동6가·보문동7가·정릉(貞陵)·길음(吉音)·종암(鍾巖)·하월곡(下月谷)·상월곡(上月谷)·장위(長位)·석관(石串) 등 39개동이 있다. 구청소재지는 삼선동5가이다. 면적 24.55㎢, 인구 495,431, 인구밀도 20,180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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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구 | 시의 동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편입되어 성동구 관할하에 있다가, 1975년에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게 되었고, 1979년에는 신설된 강동구에 속해 있다가 1988년 분리·신설되었다. 구의 북쪽에는 한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충적층이 넓게 분포하며, 서쪽과 동쪽에는 탄천과 성내천이 각각 북류하여 한강에 유입한다. 서울시에 편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교외지역으로 탄천 연안과 거여동 일대에서는 근교농업이 활발했다. 특히 범람이 잦았던 한강 연안의 풍납동·신천동·잠실동 일대에서는 예로부터 논농사와 함께 원예농업이 성했고, 진흙으로 그릇과 벽돌을 굽는 일이 번성했다. 1960~70년대에 서울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잠실 일대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조성함에 따라 변화되었다. 1974~82년에 잠실지구(잠실동·신천동·송파동)에, 1982년에 가락지구(가락동·문정동·방이동·오금동·거여동·마천동·둔촌동·성내동)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되어 일대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1980년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된 이래 구내의 도로망과 각종 도시기반시설이 확충되면서 인구는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1985년에 개장한 가락동농수산물도매시장은 농수산물의 유통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세워진 종합도매시장으로 1996년 기준으로 1일 취급물량은 7,566t에 해당한다. 잠실은 호텔, 백화점, 쇼핑 센터 및 대형 슈퍼마켓이 밀집한 상업 중심지를 이루며, 석촌호숫가에 있는 롯데월드는 대규모 종합 관광·유통·레저 단지를 이룬다. 잠실대교, 잠실철교, 올림픽대교는 강북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수단이며, 올림픽대로, 올림픽로, 송파대로, 풍납로, 가락로 등이 연계되어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석촌동 백제 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과 방이동 고분군이 있으며, 백제시대 초기의 토성인 몽촌토성이 1986년에 복원되었다. 천호대교 동쪽에는 풍납리토성(사적 제11호)이 있다. 그밖에 송파동에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사적 제101호), 가락동에 선사시대유적이 있다. 잠실동에는 서울 올림픽대회를 개최한 주경기장과 실내체육관·실내수영장·야구장·학생체육관이 있으며, 방이동 일대에는 사이클·역도·펜싱·체조 경기장과 올림픽공원이 1986년에 개장되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각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97개소, 초등학교 31개교, 중학교 24개교, 고등학교 13개교, 한국체육대학 등이 있다. 송파(松坡)·풍납(風納)·거여(巨餘)·마천(馬川)·방이(芳荑)·오금(梧琴)·석촌(石村)·삼전(三田)·가락(可樂)·문정(文井)·장지(長旨)·잠실(蠶室)·신천(新川) 등 13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송파동이다. 면적 33.89㎢, 인구 666,319, 인구밀도 19,661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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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구 | 시의 서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63년에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관할하에 있다가 1968년 양서출장소에 속하게 되었다. 1977년 신설된 강서구에 속했으며, 1988년 강서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구의 동쪽으로는 안양천이 북류하여 한강에 유입하고, 연안에 배후습지가 넓게 분포한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기반암의 오랜 침식으로 형성된 낮은 구릉지가 펼쳐진다. 시가지는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 중반에 걸쳐 철거민들이 대규모로 집단 이주한 목동·신정동·신월동 지역과 1979년부터 계획이 수립되어 조성된 목동신시가지 아파트 단지로 구분된다. 목동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동부지역은 주거 환경이 비교적 양호하며, 안양천변의 고수부지에는 시민들을 위한 체육시설이 있다. 반면에 부천시와 인접한 서부지역은 저산성 구릉지와 소규모의 농경지가 혼재하고, 아파트 보다는 단독주택과 연립주택의 주거 형태가 많다. 목동 신시가지에는 1988년에 신시가지의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열병합발전소를 설립했고, 1989년에 목동종합운동장을 건립했으며, 아파트 단지 내에 약 4만㎡의 메밀꽃 단지를 조성했다. 그밖에 용왕산에 신정제1우수배제펌프장, 신월동에 김포수원지, 신정동에 신정제2우수배제펌프장과 지하철차량기지가 있다. 구의 동서를 경인고속도로가 지나고, 신월로·오목로·신정로·남부순환도로가 있으나 병목현상으로 교통체증이 극심하다. 그러나 1992년에 지하철 2호선이 양천구청까지 지선으로 연결되었고, 1996년 12월에 지하철 5호선이 완전 개통되어 심각한 교통체증 현상이 완화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69개소, 초등학교 23개교, 중학교 18개교, 고등학교 11개교 등이 있다. 신정(新亭)·목(木)·신월(新月) 등 3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신정동이다. 면적 17.40㎢, 인구 485,580, 인구밀도 27,907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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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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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있는 여의도 공원 | 시의 서남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31년 영등포읍으로 승격했고, 1936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시흥군 북면·동면의 일부지역과 함께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 관할하에 있었다. 1946년 영등포구로 개칭되었고,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시흥군·부천군·김포군의 일부지역이 편입되었으나 1973년에 관악구가, 1977년에 강서구가, 1980년에 동작구와 구로구가 각각 분구되었다. 구의 북쪽과 서쪽으로는 한강과 안양천이 흘러 저평한 범람원과 여의도, 제2중지도 등 하천퇴적지형을 발달시켰으며, 동남쪽으로는 해발고도 60m 미만의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부설된 경인선과 경부선이 구를 통과하면서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1912년 조선피혁주식회사의 공장이 설립된 이래 일본 자본에 의한 맥주·피혁·방직·주정(酒精) 공장들이 들어서 서울의 공업지대로 발전했다. 특히 1928년 영등포동·도림동·양평동·당산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공업지대로 지정되었고, 1931년 이후 기계·제련·염색 등 중화학계열의 공장이 증가되면서 영등포지역은 공장과 함께 군소상점가와 근로자의 주거지역으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는 섬유·식품·음료 공장 등 노동집약적인 공업이 입지해 있다. 한강의 하중도인 여의도는 환상(環狀)의 제방 내에 주택과 채소밭이 있었으나 1970년대 초반부터 개발이 실시되어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와 신흥 업무지구로 변모했다. 현재 여의도 내에는 국회의사당·한국방송공사(KBS)·문화방송(MBC)·서울방송(SBS)·대한결핵협회·증권거래소 등 주요기관이 밀집해 있다. 과거 신길동에서 샛강을 지나 마포로 건너던 방학호진(放鶴湖津:방아곶이나루)은 1900년 한강철교가 가설됨에 따라 그 기능을 마감했고, 그후 한강인도교·양화대교·마포대교·원효대교가 차례로 가설되어 강북과의 연결이 원활해졌다. 시흥대로·노량진로·경인로·영등포로·당산로·양평로·신길로·의사당길·여의서로·여의동로 등의 도로가 연계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50개소, 초등학교 20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7개교 등이 있다. 당산(堂山)·영등포(永登浦)·영등포동1가(永登浦洞一街)·영등포동2가·영등포동3가·영등포동4가·영등포동5가·영등포동6가·영등포동7가·영등포동8가·여의도(汝矣島)·당산동1가(堂山洞一街)·당산동2가·당산동3가·당산동4가·당산동5가·당산동6가·도림(道林)·문래동1가(文來洞1街)·문래동2가·문래동3가·문래동4가·문래동5가·문래동6가·양평동1가(楊平洞一街)·양평동2가·양평동3가·양평동4가·양평동5가·양평동6가·양화(楊花)·신길(新吉)·대림(大林) 등 33개동이 있으며, 구청소재지는 당산동이다. 면적 24.56㎢, 인구 415,785, 인구밀도 16,929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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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 시의 중부에 있는 구. 원래는 한성부의 용산방에 속했으며, 1911년에 경성부 용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1913년 경성부 용산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43년 구제의 실시로 용산구역소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 용산구가 되었다. 북쪽은 남산(262m) 줄기로 가로막혀 있으며, 동쪽에는 응봉(175m)이 솟아 있다. 한강이 동쪽 경계를 따라 곡류한다. 도심지와 가깝고, 대체로 전망이 좋을 뿐만 아니라 한강수운을 이용한 인천과의 교통이 편리하여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8·15해방 후에는 한국과 미국의 주요 군사기지가 주둔하여 주한 외국인과 그들을 대상으로 한 상업이 발달하여 이색적인 도시경관을 이루었다. 그러나 미군기지와 육군본부가 모두 이전하고, 그 자리에 도시공원과 전쟁기념관이 조성되고 있다. 구의 서부는 원효로를 경계로 구용산과 신용산으로 구분되는데, 구용산에 해당하는 원효로 서쪽의 청파동·효창동·용문동 등지에는 지금까지도 곳곳에 일본식 가옥이 남아 있다. 원효로 동쪽의 신용산은 교통의 요지이며, 한강변을 따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동빙고동·서빙고동·한남동 등지에는 고급주택들이 많고, 이태원동 일대의 상가는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한남동·이태원동에는 하얏트 리젠시·캐피탈·크라운 호텔 등과 각종 위락시설이 있다. 한강로2가동의 옛 청과물시장자리에는 현대식 건물의 용산전자상가가 있으며, 그밖의 주요시설로 남산도서관·철도도서관·효창공원·효창운동장 등이 있다. 유적으로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사적 제255호)이 있다. 경부선과 서울교외선, 지하철 1·4호선, 용산-성북 간 국철 등이 지나며, 남산 제1·2·3호 터널과 원효대교·한강대교·동작대교·반포대교·한남대교 등이 도심지와 강남지역의 도로교통을 원활하게 해준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29개소, 초등학교 15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9개교, 단국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 등이 있다. 원효로1가(元曉路一街)·원효로2가·원효로3가·원효로4가·후암(厚巖)·도동1가(桃洞一街)·도동2가·신창(新倉)·용산동1가(龍山洞1街)·용산동2가·용산동3가·용산동4가·용산동5가·용산동6가·갈월(葛月)·남영(南營)·동자(東子)·서계(西界)·청파동1가(靑坡洞一街)·청파동2가·청파동3가·청암(淸巖)·산천(山泉)·효창(孝昌)·용문(龍門)·도원(桃園)·신계(新契)·문배(文培)·한강로1가(漢江路一街)·한강로2가·한강로3가·이촌(二村)·이태원(梨泰院)·한남(漢南)·서빙고(西氷庫)·동빙고(東氷庫)·주성(鑄城)·보광(普光) 등 38개동이 있다. 구청소재지는 원효로1가동이다. 면적 21.87㎢, 인구 254,411, 인구밀도 11,633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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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 시의 서북부에 있는 구. 원래는 한성부의 연은방과 상평방에 속했으며, 1914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면서 은평면이 되었다. 서울시역의 확대로 1949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서대문구의 은평출장소가 되었고, 1979년 서대문구에서 분리되어 은평구로 독립·승격되었다. 서남쪽을 제외한 대부분이 백련산(216m)·비봉(560m)·응봉(236m)과 북한산 줄기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북동부의 북한산 일대에서 발원한 창릉천과 불광천이 한강에 유입한다. 평지는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었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 불광동에 집단주택지역이 들어서면서 주거지로 변모했다. 특히 불광동·갈현동·역촌동 등은 깨끗하고 조용한 주거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지가가 비교적 저렴하고 주변에 녹지공간이 많아 은평화사원·희망소년원·선덕원 등과 같은 복지시설과 보건연구원·기독교수양관 등이 많다. 상업과 서비스 기능은 불광동·연신내 등의 전철역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에서 행해지는 근교농업은 점차 그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도로가 정비되고 구기 터널과 지하철 3호선이 개통됨에 따라 도심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백련사와 삼천사지마애여래입상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56개소, 초등학교 23개교, 중학교 16개교, 고등학교 11개교 등이 있다. 녹번(碌磻)·불광(佛光)·갈현(葛峴)·구산(龜山)·대조(大棗)·응암(鷹巖)·역촌(驛村)·신사(新寺)·증산(繒山)·수색(水色)·진관내(津寬內)·구파발(舊把撥)·진관외(津寬外) 등 13개동이 있다. 구청소재지는 녹번동이다. 면적 29.71㎢, 인구 502,173, 인구밀도 16,902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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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 시의 중북부에 있는 구. 원래는 한양부에 속했으며, 1910년 경성부로 바뀌었다. 1943년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종로구가 설치되었다. 조선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오랫동안 한국의 정치·행정·경제·교육·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서울시역이 확대되고 기능이 복잡·다양해짐에 따라 중심기능의 상당부분을 점차 인접구로 넘겨주었다. 그러나 지금도 종로구는 한국의 정치1번지로 불린다. 북한산을 배후로 북쪽에는 북악산(342m), 동쪽과 서쪽에는 낙산과 인왕산이 솟아 있으며, 남쪽 경계를 따라 청계천이 흐른다. 이 구는 기능에 따라 크게 행정언론지구·상업지구·주택지구·문화지구로 나눌 수 있다. 세종로동에는 청와대와 정부제1종합청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언론기관으로 세종로동에 동아일보사(광화문 사옥), 중학동에는 한국일보사가 있다. 세종로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종로변은 일찍부터 육의전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전국적인 상권을 가지고 있는 동대문시장을 비롯하여 각종 상가와 유흥시설이 많다. 가회동·당주동 등지에는 전통한옥들이 남아 있고, 구기동·부암동·평창동 등에는 신흥고급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문화시설로는 세종로변에 세종문화회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동숭동에 문예회관을 비롯한 각종 문화 센터들이 모여 있으며, 사간동에 화랑가, 인사동·관훈동에 골동품점들이 있다. 유물·유적으로 흥인지문(보물 제1호)·경복궁(사적 제117호)·창덕궁(사적 제122호)·창경궁(사적 제123호)·종묘(사적 제125호) 등이 있으며, 탑골공원, 삼청공원, 사직공원 등이 있다. 지하철 1·3·4·5호선이 지나며, 종로·율곡로·세종로·북악로·청계로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22개소, 초등학교 14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13개교, 전문대학 2개교, 가톨릭대학교(신학대학)·상명여자대학교·성균관대학교·한국방송통신대학교 등이 있다. 수송(壽松)·청운(淸雲)·신교(新橋)·궁정(宮井)·세종로(世宗路)·효자(孝子)·창성(昌成)·통인(通仁)·누상(樓上)·누하(樓下)·옥인(玉仁)·사직(社稷)·체부(體府)·필운(弼雲)·내자(內資)·통의(通義)·적선(積善)·삼청(三淸)·팔판(八判)·안국(安國)·소격(昭格)·화(花)·사간(司諫)·송현(松峴)·부암(付巖)·신영(新營)·홍지(弘智)·평창(平倉)·구기(舊基)·교남(橋南)·평(平)·송월(松月)·홍파(紅把)·교북(橋北)·행촌(杏村)·도렴(都染)·당주(唐珠)·내수(內需)·신문로1가(新門路一街)·신문로2가·가회(嘉會)·재(齋)·계(桂)·원서(苑西)·인사(仁寺)·청진(淸進)·서린(瑞麟)·중학(中學)·종로1가(鐘路一街)·종로2가·종로3가·종로4가·종로5가·종로6가·공평(公平)·관훈(寬勳)·견지(堅志)·와룡(臥龍)·권농(勸農)·운니(雲泥)·익선(益善)·경운(慶雲)·관철(貫鐵)·낙원(樂園)·묘(廟)·훈정(薰井)·봉익(鳳翼)·돈의(敦義)·장사(長沙)·관수(觀水)·인의(仁義)·예지(禮智)·원남(苑南)·효제(孝悌)·연지(蓮池)·충신(忠信)·이화(梨花)·연건(蓮建)·동숭(東崇)·혜화(惠化)·명륜동1가(明倫洞一街)·명륜동2가·명륜동3가·명륜동4가·창신(昌新)·숭인(崇仁)·무악(毋岳) 등 87개동이 있다. 구청소재지는 수송동이다. 면적 23.91㎢, 인구 202,993, 인구밀도 8,490명/㎢(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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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 시의 중앙부에 있는 구. 1934년 4월 경성부 중앙사무소가 발족되었으며, 그해 6월 중구직할구역소로 개편되었다. 1943년 4월 구제(區制)를 실시함에 따라 중구가 되었다. 남쪽의 남산(262m)·응봉(175m)을 비롯하여 동쪽·서쪽·남쪽은 대체로 1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은 복개된 청계천이 종로구와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매년 상주인구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상주인구보다 유동인구가 많아 야간에는 인구 공동화현상을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양반이나 하급관리·중인·평민 등 주로 가난한 서민들이 거주했으며, 청일전쟁 이후 소공동에는 화교촌이, 남대문·명동·충무로 일대에는 일본인 상가들이 들어섰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각종 현대식 건물과 상가를 짓고 퇴계로 등의 길을 정비하는 등 중심 시가지로의 토대를 마련했다. 소공동·을지로 등지에는 대규모 백화점, 시장, 호텔 등의 상업·유흥 기능과 금융·언론·관청·기업체본사 등의 중심업무기능이 밀집해 있다. 을지로변에는 인쇄·출판·가구·목재업이, 청계로변에는 기계·공구·의류업 등이 발달했으며, 남대문·동대문·평화 시장 등의 도매시장은 전국적인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남산공원·장충단공원과 유물·유적으로 숭례문(국보 제1호)·덕수궁(사적 제124호)·대한문·광희문, 고건축물로 명동성당(사적 제258호), 옛 러시아 공관(사적 제253호),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 등이 있다. 봉래동에 서울역이 자리하며, 지하철 1·2·3·4호선이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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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구 | 시의 북동부에 있는 구. 원래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 속했으며, 1963년 서울시 동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88년 동대문구에서 분리·신설되었다. 구의 동부와 동남부는 용마봉(348m)·아차산(316m) 줄기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부에는 봉화산(160m)이 솟아 있다. 중랑천이 서쪽 경계를 따라 남류한다. 원래 중랑천 연안의 충적지는 농경지로, 동북부의 구릉지는 배밭으로 이용되던 농업지역이었으나, 1970년대초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주거지로 변모했다. 한독약품·삼성신약·크라운제과 등을 비롯한 각종 제조업체가 입지하고 있으며, 서울 근교의 남양주시·양주군 등지에서 생산된 우유를 가공하는 유제품가공공장이 있다. 또한 중앙선으로 운반된 석탄을 이용한 연탄제조공장과 묘비·석탑 등을 만드는 석재가공공장 등이 있다. 유물·유적으로 상봉동에 5층석탑(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4호)·석등(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6호), 신내동에 봉수지석단(烽燧址石壇)·산신각(山神閣) 등이 있으며, 위락시설로 용마자연공원·용마폭포공원이 있다. 망우동에는 1933년부터 조성된 망우리공동묘지가 있으며, 이곳에 한용운·안창호·방정환 등의 무덤이 있다. 상봉 시외버스 터미널은 경기도 동북부와 강원도 일대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이며, 중앙선이 구의 북부를 가로지른다. 시내 중심부와 춘천 방면을 연결하는 도로, 의정부·강남 방면의 도로 등이 나 있으며, 동부도시고속화도로가 건설되어 강남지역과의 교통이 더욱 원활해졌다. 교육기관으로 유치원 92개소, 초등학교 16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 7개교, 전문대학 1개교 등이 있다. 면목(面牧)·상봉(上鳳)·중화(中和)·묵(墨)·망우(忘憂)·신내(新內) 등 6개동이 있다. 구청소재지는 면목동이다. 면적 18.52㎢, 인구 10,276,968(2003), 인구밀도 16,975.2/㎢(2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