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흑자경영,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2009/07/27 23:55 http://blog.naver.com/plht/90061474504 |
▲ 모범학생의 그후 "대학생 때 배운 대로 했지요" 정석주 전 양지실업 회장
ⓒ 오마이뉴스 이중현
최선을 다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학교에서 배운 것을 사회에서 제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평생의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 있다. 정석주(鄭錫周)씨. 올해 일흔 한 살인 그는 2년 전 은퇴한 중소기업인이다. 봉제완구 제조회사인 양지실업을 창업해 30년간(1977-2007) 흑자 경영했다.
온몸으로 쓴 경영학 교과서의 저자
정석주 전 양지실업 회장을 만나러 그의 방배동(서울 서초구) 사무실을 찾아가는 길에 나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1년 전 그를 간접적으로 얼핏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 그를 직접 만나기 전에 작년에 그의 책을 먼저 만났다. 한 서점의 경영학코너에 올려진 그의 책이 내 눈길을 잡은 것은 제목 때문이었다. <30년 흑자경영>(생각의 나무).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오마이뉴스>를 경영하고 있는 나는 9년 동안 단 3년밖에 흑자를 내지 못했는데 30년 연속 흑자경영이라니?
그때 나는 그의 책을 사지 않았다. 봉제완구라는 특수 분야니까 그게 가능했겠지, 곰 인형 제조업과 인터넷언론사 경영은 너무 다르잖아!
그로부터 1년 후 나는 이제 책이 아닌 그를 직접 만나러 가는 것이다. 왜? 그의 책이 회사 양지실업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378쪽에 달하는 그의 책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이런 부제를 붙여주고 싶었다. 온몸으로 쓴 경영학 교과서.
학자는 책을 머리로 쓰고, 시인은 가슴으로 쓰고, 기자는 발로 쓴다. 정석주 전 회장의 <30년 흑자경영>은 그 모두를 합쳐, 온몸으로 쓴 책이다. 그래서 그의 책에는 사람의 향기가 물씬 난다. 인생의 한 길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의 향기.
정석주 전 회장이 얼마나 '지독하게' 최선을 다해 자신의 회사와 인생을 경영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30년 흑자경영을 달성한 그 이후다. 그는 2007년 양지실업을 자신의 손으로 정리했다. 왜 그랬을까? 남들은 경영일선에서 은퇴를 하면 2세에게 상속하거나, 후계자에게 맡기거나, 제3자에게 파는데 그는 왜 스스로 30년 흑자경영 회사의 장례식을 치렀을까? 그는 "회사를 창업할 때부터 회사의 죽음까지 설계를 했다." 독하다.
인간 정석주의 향기를 직접 맡기 위해 방배동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을 찾았을 때, 우리 취재팀을 맞은 이는 여비서였는데 그는 20대가 아니었다. CEO 정석주와 30년 동안 양지실업에서 일했던 이였다. 30여 평 크기의 사무실에는 양지실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곰 인형들의 사진이 진열돼 있었다. 그 중에는 양지실업의 최대 히트작 산타베어(Santa Bear)도 자리했다. 1985년에 개발된 이 인형은 22년간 주로 미국에서 400만 개가 팔렸다. 30년 흑자경영을 가능케 한 핵심 상품이었다.
"어서 오세요, 은퇴한 사람에게 뭐 들을 게 있다고…."
정겹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하는 정석주 전 회장은 산타베어를 닮아보였다. 그는 책에서 그가 만든 효자상품의 캐릭터를 이렇게 묘사했다.
"산타베어의 얼굴 모양은 한눈에 시선을 끌어당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고, 일견 평범해 보이면서도 순하고 귀엽게 생긴, 볼수록 애정이 가는 얼굴이었다."(202쪽)
▲ 정석주 전 회장의 모습은 산타베어를 닮아보였다.
ⓒ 오마이뉴스 이중현
30년간 단 3일 결근, 아플 새가 없었다
- 30년간 흑자경영을 했는데, CEO로서 자기관리가 철저했겠네요.
"정도를 이탈할 수가 없었지요. 어디 가서 여자 손목잡고 술 한 번 못 먹어봤어요. CEO인 나는 우리 기업의 인격입니다. CEO의 인격은 바로 우리가 생산한 제품의 퀄리티지요. 나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믿음과 신뢰를 받기 위해."
- 그렇게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다보면 신경쇠약에 걸릴 수도 있을 텐데요?
"나는 사장, 회장을 하면서도 30년 동안 개발부장을 겸임했어요. 매일 아침 출근하면 가장 먼저 개발실을 방문해 개발회의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지요. 30년간 결근한 것은 아주 몸살이 났을 때 3번 정도였을까? 내가 너무 바쁘게 일해서 내 머리, 내 육체에 병균이 침입할 기회가 없었나봐요."
CEO가 30년간이나 개발부장을 겸임하다니, 그것은 언론사로 따지면 사장이 편집국장을 겸임한다는 말이다. 경영부터 기사 하나 하나의 오탈자까지 신경 써야 한다. 그런 일을 한두 해가 아닌 30년을 했다니….
- 이러다간 과로사할 날이 오겠다, 그런 생각 들 때 없었나요?
"시내 한 호텔에 가면 손으로 밀치고 들어가야 하는 육중한 문이 있습니다. 내가 마흔 두 살 때인데 그것을 한 손으로 못 밀치겠더라고요. 그래서 두 손으로 힘겹게 밀쳤습니다. 과로를 하다보니 몸이 그렇게 됐지요. 더 안 좋아질 때도 있었어요. 회사건물이 3층이었는데 한번에 1층에서 3층까지 못 올라가고 중간에 쉬면서 심호흡하고 나서야 다시 올라가던 때도 있었지요."
양지실업의 사훈은 <회사는 내 집같이, 직원은 형제같이, 제품은 내 몸같이>였다. 정석주 회장은 양지실업에서 생산한 곰 인형을 전량 미국 등 해외에 수출했다. 그래서 "외국에서 바이어들이 몰려올 때는 저녁밥을 두 번 먹어야 할 때도 있었다." 미국 출장 갔을 때는 바이어를 만나고 나서 시간이 남으면 "시장 조사를 위해 이 백화점 저 백화점 돌아다녔기 때문에 항상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내 노력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말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실천했다. "나는 어떤 뭐가 중요하다고 딱 정하면 다른 것은 다 포기했어요. 일단 그거를 이뤄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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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을 듣고 보니 참으로 '지독하게' 하셨네요.
"양지실업은 기업인이 되고 싶었던 나의 꿈과 바람, 그리고 내 모든 역량을 투사한 나의 분신입니다. 다시 내가 젊어져 기업경영에 복귀한다고 해도 결단코 그때 이상으로 할 수 없음을 단언할 정도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경영했던 겁니다."
최선을 다했다! 다시 젊어져서 일한다 해도 그때 이상으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자신있는 선언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이 세상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인간 정석주는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오죽하면 "하루가 48시간이 아니라 24시간뿐인 것을 아쉬워"했을까?
21일간 산속에서 <국부론> 독파한 집요한 학생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 정석주를 그토록 철저하게 최선을 다하는 경영자로 만들었을까? 30년 흑자경영 신화는 창업 이전의 아픔과 실패, 배움과 각오를 밑거름 삼아 이뤄진 것이 아닐까?
그가 1977년에 재봉틀 20대, 직원 90명으로 양지실업을 창업한 때에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커피 잔이 거의 비워지고 그의 여비서가 배를 깎아왔을 때 인터뷰는 청년 정석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이건 책에 안 쓴 이야기인데… 우리 가족이 이북에서 쫓겨왔습니다."
- 그럼 어린 시절 고생을 많이 했겠네요.
"11살 때 월남 했으니… 어렸을 때 일제징용, 8.15해방, 6.25전쟁 다 보고… 북한에서 논에서 올챙이 잡고 논 것 등등이 다 선명하게 생각나요… 북한에서 토지개혁 할 때 추방된 가구들이 있었는데 우리 식구가 그 중 한 가구였어요. 남한에서의 역경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누이, 큰형님도 죽고. 나는 그런 과정에 굴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어요. 나는 인생을 두 번 살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신의 축복 없이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정석주의 인생은 그렇게 소년시대부터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로부터 주어진 역경이었다. 그런데 그는 청년시대에 접어들자 이번엔 고난을 스스로 선택한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면서 취직 대신 창업의 길을 택한 것이다.
- 왜 처음부터 창업을 선택했나요?
"대학 3학년 때 경영학 수업을 듣는데 한 교수님이 제조업의 중요성을 말씀하더군요. 국가경제가 튼튼하려면 건실한 제조업이 필수라고. 그때 제조업에 내가 직접 뛰어들어야겠구나 생각했지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교수님의 강의가 때 묻지 않고 순수했던 나의 마음에 영향을 준 것 같아요."
- 그 교수님 때문에 인생이 바뀐 거군요.
"그런 셈이죠. 지금도 그 교수님을 잊지 못하고 있어요. 정종진 교수님이신데 아직 살아계십니다. 내가 <30년 흑자경영> 책을 냈을 때 그 교수님께 제일 먼저 보내드렸어요."
대학생 정석주는 그러나 교수님 말씀 한마디만으로 제조업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교수님의 가르침을 내 가슴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집요함과 끈기가 있었다. 그 한 사례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자기 것으로 만든 것.
"경영학 수업에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내가 제조업에 마음을 둔 것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많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독점자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 전체의 안정을 해치는 '자연적 자유(natural liberty)'는 제한되어야 하며, 국부는 금과 은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노동생산물로 구성된다는 데에 감명을 받았지요.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제조업의 '창조정신'이 좋았습니다. 그것이 나라의 부를 만드는데 기여한다고 보았던 거지요."
그래서 그는 <국부론>을 제대로 독파하기 위해 산 속에서 21일간이나 보낸다.
"원서로 제대로, <국부론>을 독파해야겠다고 작심했어요. 영어로 된 원서는 두께가 한 뼘만한데 그것과 영어사전만 달랑 들고 친구랑 둘이서 설악산 근처 산속으로 들어갔어요. '우리가 진정으로 국부론을 다 읽고 내 것으로 만들 때까지 이 산속을 나가지 말자.' 그래서 21일 만에야 나왔습니다."
"미국 경제위기는 교과서를 제대로 공부 안한 탓"
대학생 정석주는 그렇게 집요하게 배우고 독하게 실천한 학생이었다.
"<국부론>은 개인이 이윤추구 행위를 하면 보이지 않은 손(invisible hand)에 의해 그것이 사회와 국가의 이익증진을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젊었을 때는 원서를 읽으면서도 이게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알지 못했는데 사업을 하다 보니 점차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함께 막스 베버의 청교도적인 자본주의 윤리 정신, 이 두 가지가 내가 사업하면서 늘 복습했던 경영학도 시절의 중요한 배움이었지요."
- 학생때 배운 것을 사업하면서 실천하는, 말 그대로 모범학생인 셈이네요.
"나는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실천하려고 했어요. 지난해부터 계속되고 있는 미국 경제위기는 교과서대로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겁니다. <국부론>은 어떤 개인의 이익추구도 국가사회의 이익과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미국 금융상품의 생산자-유통자들은 그러지 못했죠, 목전의 이익만 추구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를 왜곡하여 불량금융 파생상품을 만들었지요. 자본주의 정신이 청교도주의 윤리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도 그렇게 도덕적 해이가 심하지 않았을 겁니다."
정석주 전 회장은 "그런 점에서 미국 MBA도 문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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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추구했지 인간이 빠졌어요. 흔한 예로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요? 그런 점에서 경영자도 인문사회과학 공부가 중요합니다. 경영학계에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하면 나는 '공장' 이야기 대신 인문사회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그 친구들이 그래요, '너는 회사 경영하다 온 사람 같지가 않다'."
그는 인문학 등 사회과학을 제대로 배워야 입체적 사고력이 생기고, 거기에서 창조적이면서도 도덕적인 경영마인드가 생긴다고 했다. 또 기업가가 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은 '인간으로서의 도덕성과 양심'이라고 했다.
"기업가란 기업을 하는 '사람'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별종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도 옳고 기업 경영자로서도 옳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입니다. 시대가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과 양심입니다. 이것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지요. 그것을 빼면 인간의 무게는 1g도 안 나갈 겁니다."
그에게도 쓰라린 실패가 있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대부분 안정된 직장을 선호한다. 그러나 제조업 창업을 결심한 대학생 정석주는 의도적으로 '안정된 취직' 유혹과 결별했다고 한다.
"안정된 봉급을 받기 시작하면 사업을 하겠다는 의지와 결심이 흔들려 현실에 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금융기관이나 국영기업, 대기업, 공인회계사 등 일체의 입사시험을 치르지 않기로 결심했지요.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한번도 시험을 안쳤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고지식했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첫 성공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몇 년간 중견기업 몇 군데를 전전하면서 실무를 익히고 경영수업을 받다가 30대 초반에 작은 사업체를 시작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인쇄자영업을 직원 6, 7명으로 시작했지요. 그러나 빚만 지고 실패했어요. 사업을 정리하고 새 직장에 들어갔는데 받은 월급의 3분의 1을 그 전 사업에서 진 빚을 갚는 데 써야 했습니다. 얼마나 쓰렸겠어요."
- 이 30대 초반의 실패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겠네요.
"내 열정만 믿고, 내가 선택한 길이 완벽하다고 믿고 일을 저지른 것이 당시의 내 단점이었지요. 그때의 쓰라린 경험이 있어서 내가 우리 아들한테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항상 한발자국 뒤에서 걸어가라. 그리고 항상 겸손하고 반성하면서 살아라.'"
정석주 전 회장은 그의 책에서 그 실패의 시절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동안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았구나, 이때가 내 나이 삼십대 초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반성을 많이 했던 시기였다. 이때 흘렸던 쓰디쓴 마음의 눈물이 결국 재기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난과 역경 없이는 성공을 바랄 수 없다."(32쪽)
이 사업 실패 후 30대 중반의 정석주는 때를 기다리며 경험을 쌓는다. 수출용 원단을 생산하는 중견 섬유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했고 봉제완구 회사에서도 일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수출기업과 완구업의 특성을 파악했다. 봉제완구를 생산해 100% 해외수출한다는 양지실업의 사업구상과 30년 흑자경영은 그런 경험 속에서 나왔다.
청년 정석주는 1964년 대학을 졸업해 1977년 양지실업을 창업했다. 그러니까 사회진출 13년간 회사경험 외에는 객관적으로 내세울 게 없는 시절을 보낸 것이다. 대학동기들은 교수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대기업 간부가 되어있는데. 그 서러움을 거름으로 양지실업의 꽃이 피었다. 양지실업은 30년간 단 한번도 적자를 기록하지 않았고, 은행차입도 없었다. 월급이 밀리지도 않았고, 노사분규도 없었다.
어떻게 그런 완벽한 경영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책 <30년 흑자경영>은 조직관리, 인사관리, 품질관리 등 양지실업의 전반의 경영 전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은 CEO 정석주의 경영철학인 '경영 합리화'로 통합된다.
"흔히들 기업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이윤추구라고 하는데 나는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가 아니라 경영의 합리화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기업이 구성원 모두에게 만족감을 주면서 모든 생산요소가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결합, 운영됨으로써 계획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경영의 합리화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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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주의자 혹은 완벽주의자... '회사 장례식'도 자기 손으로
CEO 정석주는 최선을 다하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런 그의 모습의 하이라이트는 30년 흑자경영해온 양지실업을 그의 손으로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 오랫동안 튼실하게 운영해온 회사를 정리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요?
답은 뜻밖에도 "처음부터"였다.
"나는 처음부터, 회사를 창립할 때부터 내 손으로 ?彫?가는 회사를 정리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왜? 나는 돈을 벌려고 회사를 만들지 않았거든요. 나는 아름다운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학교에서 배운 대로 모범적인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다행인 것은 창립 5년 후부터 회사가 자리가 잡히고 나니 교과서적으로, 낭만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지 않았다고 하셨죠, 방금.
"믿기지 않을 수 있어요, 그 말은. 내가 돈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친구들이 거짓말이다, 이율배반적이라고 그래요. 그럼 왜 그렇게 고생하면서 사업을 하느냐고…. 저는 요, 돈을 벌기 보다는 중소기업 분야에게 완벽한 모범케이스를 하나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완벽한 모범케이스 만들기… 그래서 그는 양지실업의 죽음까지도 관리했다.
"나는 내가 만들어낸 존재가 남의 손에서 변형되고 망가지면서까지 그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는 가장 아름다울 때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그 아름다움을 영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마감을 결단했고 지금도 후회는 없습니다."
- 그래도 문을 닫으려할 때 아쉬움이 있었지요?
"아쉬웠죠, 슬프기도 하고. 반평생 내 꿈을 수놓았던 회사의 문을 닫는 거니까. 허전함과 해방감이 함께하는 착잡한 심정을 느꼈습니다."
- 아들이 있는데 왜 물려줄 생각 안했나요?
"사업 체질이 아니었어요.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둘 정도였거든요. 왜 그만두었냐고 했더니 폭탄주 문화가 싫다고 뛰쳐나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공부를 더 해보고 싶데요. 그런 아이에게 어떻게 사업을 하라고 합니까?"
정석주 전 회장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인간에게는 생명의 본능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 타나토스가 공존한다고 했던 것처럼 모든 태어남 속에는 죽음이 있는 법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도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탄생-성숙-노화-소멸의 사이클을 거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기업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더구나 중소수출기업의 운명은 반드시 창업자와 함께한다고 믿으며 창업자를 떠나서는 2,3년 이상 연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357-358)"
그는 약 3년 6개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양지실업 장례식을 준비했다. 공장종업원들에게는 2년 전부터 생산중단 예고를 했고, 사무직 직원들은 새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했다. 마침내 2007년 회사의 문을 닫았다. 김기영 연세대학교 명예교수(학술원 회원)는 "세계 어디에도 이런 예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30년간 흑자낸 경영인에게 물었다, 돈이란?
두 마리 토끼 잡기. 쉽지 않은 일이다. 회사를 경영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의미 있는 사업을 하면서 돈까지 번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경영인 정석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모범적 중소기업 만들기를 이뤄냈고, 돈도 벌었다.
- 그래도 남는 아쉬움이 혹 있을까요?
"동문 선후배 중에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그들이 종종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당신은 중소기업 하기엔 아깝다. 더 큰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게 당신의 팔자인가보다.' 나를 그렇게 위로할 때가 있었어요. 사람이 욕심을 버려야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조금 아쉬움이 들더군요."
정석주 전 회장과의 만남은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 세 시간째 계속됐다. 나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충전을 받고 있음을 느꼈다. 잔챙이 나무뿐인 척박한 산등선을 오르던 이가 풍성하게 자란 거목을 발견하고 그 그늘에 앉아 그의 내음을 맡을 때 찾아오는 그런 기운 같은 것이었다.
-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는 듯 했는데요, 인생이란?
그는 이 답을 할 때 가장 긴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대답 못하겠네요…."
그의 목은 메여 있었다. 눈시울도 붉어졌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뭐라고 이야기할지 참 담담해요. 뭐라고 할지…."
답을 기다리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은퇴한 사장의 화려하지 않은 사무실에 전시된 직원단합대회 사진, 수출역군 표창장, 산타베어 곰 인형들도 말을 잊지 못하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나이 되어서 돌아보니 인생이 별거던가… 내 양심대로 산다면 천만다행 아닌가."
그다운 답이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이 양심을 빼면 1g도 채 나가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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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도 많이 버셨을 텐데요, 돈이란?
"다 소용없는 것이지요. 돈은 많이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래야 정상적인 사람으로 가까워집니다. 돈을 선호하고 앞세우면 정당한 사람이 안돼요. 더 벌려고 집착하면 항상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돈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부패에 대한 불감증'에 걸려있어요. 나라 장래가 걱정입니다."
정석주 전 회장은 지난해 지식경제부가 주최한 건국60주년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특별한 상을 받았다. 4명의 기업인에게 특별유공자상이 주어졌는데 그중 그가 유일한 은퇴기업인이었다. 양지실업은 비록 이 세상에 없지만 그 회사의 경영정신이 현존하는 기업들에 모범이 되고 있다는 것을 국가가 인정해준 것이다.
-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한 달에 네다섯 차례 대학 경영학과 등에 특강을 나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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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후에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년에 책 <30년 흑자경영>을 펴낼 때 표지 디자인도 스스로 구상하고 심지어는 종이 질, 활자 폰트까지도 결정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만든 책을 전국의 경영학과 교수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무려 57개 대학 1218명의 교수들에게. 그의 책은 회고록이 아닌 경영학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 교수들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여기저기서 고맙다고들 전화 옵니다. 특강 요청도 오고…. 그런데 제일 인색한 것이 일류대학 교수들이던데요, 하하."
왜 일류대 교수들이 인색할까? 그들은 도저히 쓸 수 없는, 이론과 현장을 겸비한, 30년에 걸쳐 온몸으로 쓰여진 훌륭한 토종 경영학 교과서가 나온 것에 대한 질투일까?
정석주 전 회장은 자신이 낸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수고했네, 양지실업이여."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사무실을 떠나면서 나는 취재팀으로 동행한 대학생 인턴에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 수고한 인생이 여기 있네."
[출처] 오마이뉴스
[출처] 30년 흑자경영,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작성자 너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