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어야 할 편협성
임종찬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가령, 이스라엘에 가서 유대교를 비판하고 이슬람교를 전파하려 한다든가, 거꾸로 아랍에 가서 마호메트를 비판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받들어야 한다고 외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떤 사람이 광주에 가서 김대중은 형편없는 사기꾼이고, 박정희는 민족의 영웅이라 칭송하는 말을 한다 합시다. 대구에 가서 김대중이야 말로 민족의 영웅이라 칭송하고, 박정희야말로 나라를 도적질한 역적이라 폄하하는 말을 한다 합시다. 어찌 될까요. “그건 지나친 비난이고 억측이다.” 이 정도를 훨씬 초과하는 반응이 나올 겁니다.
이런 나라, 이런 지역은 특정한 사고, 이를테면 전체주의적 사고가 살아있기 때문에 개인주의의 사상이 활개칠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 종교적 정치적 국면에서 보면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타와 다른 개체이고 따라서 내가 행사할 어떤 것이 타인에게 금전적, 육체적 손해 끼칠 일이 아니고, 법률에 위배되지 않다면 나의 사상의 전개나 행동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것이 개인주의고, 민주주의입니다.
향우회, 동창회, 종친회, 종교단체 이런 모임은 그들끼리의 연대조직이고, 힘의 행사이고, 친목도모, 다른 목적의 달성을 위한 모임입니다. 여기에 동참하는 것은 그 조직의 보호 또는 공동의 목표 달성 그리고 나의 귀속감의 확보를 위함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집단과의 동일화를 추구하는 연대감, 일체감, 소속감은 한 개체로서 분리되었을 때의 불안 혹은 공포로부터 벗어나려하기 때문입니다.
축구경기에서 선수들은 혼연일체로 수비와 공격을 하고, 거기다 편드는 응원단 역시 일사불란한 응원 구호를 외칩니다. 이것은 다만 운동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국민이 똘똘 뭉쳐 전쟁을 일으켰던 과거 인간 역사는 매우 우매한 짓이고 참혹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전체주의(全體主義, totalitarianism)가 위험하다는 겁니다. 무솔리니 주장이 틀렸다는 겁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정부나 지도자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주장이 전체주의라면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주장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란 책에서 이런 경우를 콕 찔러 말하더군요. 일체감을 느끼는 데서 자기 안위를 보호받는다는 것으로 착각하여 집단의 요구에 자기 이념과 감정을 포기한 채, 집단이 표방하는 주장에 복종하는 것은 동물이 무리 짓는 습성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 겁니다. 이걸 퇴행적 해결법이라 하더군요. 그러면 이 모순의 해결법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프롬은 자기 내면의 인간성을 발휘하여 새로운 조화를 찾아야 한다. 개인의 자유, 긍지, 존엄이 행사되는 인간다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동물적 근성을 포기해야 인간이라는 심한 말을 한 셈입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사회와 격리해 살았던 코로나 사태, 그때의 고립감은 나의 구제책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 억압에 의해 내 자유를 유린당한다면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을 속박하는 굴레가 있습니다. 주위 환경의 학습효과, 암묵적 억압 등이 존재합니다. 여기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일신에 좋다는 생각에 압제당한 채 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편견, 인습의 옥죄임의 모순을 알지 못하거나 안다 해도 탈출할 생각을 엄두내지 못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현대사회의 한 모퉁이에서는 집단의 단합된 의견만이 무조건 옳다는 편협성이 행사됩니다. 이 견고성의 유지는 역사발전에 지장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크고 작은 사회 속의 존재로 삽니다. 이사를 가서 이웃을 새로 만나기도 하고, 학교에 입학하여 많은 친구들과 만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애초의 내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화학용어에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란 말이 있습니다. 뚜껑이 없는 그릇 속에 들어 있는 물은 증발하므로 그 양이 서서히 줄어들지만 닫힌 그릇 속에 들어 있는 물은 그 양이 일정하게 유지됩니다. 그러나 닫힌 그릇 속에서도 물은 증발합니다. 물의 증발 속도와 수증기의 응축 속도가 같기 때문에 물의 양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뿐입니다. 이 때문에 닫힌 그릇 속에서는 물이 증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밀폐된 공간에서도 물이 증발하듯이 사회 구성원 속에 존재하는 응고된 편협성, 이것은 녹지 않을 수 없지요. 어느 지역이든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제한 또는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 때문입니다.
북한이 아무리 밀폐된 공간, 억압된 사회라 해도 인권과 자유를 위한 투쟁이 암암리에 전개되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해야 할 당위성은 어떠한 압제 아래서도 살아있어 왔습니다. 이것이 변화를 유도하였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공개되지 않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