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 두 학교는 3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였으며 교사와 학생들은 항일 민족 해방 교육을 받았다. 일제는 이 두 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 10월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영사 경찰을 동원하여 이 두 학교의 교사들을 체포하자, 학생들은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교에서는 「애국가」「권학가」「학도가」등 가곡과 조선 역사·조선 지리를 열심히 가르쳤다. 일제는 자기들이 펴낸 일본어 등 교과목을 강요하였으나 학교에서는 이를 가르치는 척 하면서 비밀리에 <최신동국사략 最新東國史略>
<월남망국사> <이순신전> <안중근전> <국어국본> 등의 교과를 가르쳤다. 일제는 마침내 1934년 초 두 학교를 합쳐 민성중학교를 만들었으나 강한 반대에 부딪쳐
1년만에 종전대로 분리시켰다. 그 후 일제는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대성중학교 교사 현관의 지붕 모양이 고려 시대 건축물의 특색을 띠었다고 하여 방학중에 허물어 버리고,
일본인에 의한 일본어 교사를 채용하여 감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일본어 시간에 학생들이 벙어리 시늉을 하는 등으로 저항하자 학교의 동쪽 교문밖에 작은 벽돌집을 짓고
일본 총영사관이 분주소(分駐所)를 앉혔다. 그러자 교원과 학생들은 교문을 남쪽으로 옮겼다.
1939
년 일제는 위만주국의 교육령에 의거하여 두 학교를 '용정국민고등학교'로 개편 병합하고 교장에는 형식적으로 조선인을 앉히고, 일체의 권한을 행사하는 부교장에는 일본인을
앉혔으며 일본인 교사들을 배치했다. 합병된 후 학생들은 "밀정을 잡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7일간 동맹 휴학을 했으며, 학생들은 조선인 밀정교사를 잡아 밀정을 않겠다는 서약을 받기도 했다. 1941년에 일제가 다시 이 학교를 '용정 제2국민고등학교'로 개편하자
학생들은 물리적으로 대결하려 했고 교사들은 사표를 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용정중학교가 대성중학교 자리에서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으며,
무수한 인재를 배출해 냈다.
일제치하 시절에 독립운동가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였던
선구자에 나오는용정지역의 강이다.
이 강이 선구자에 나온 이유는
우리 민족이 간도 지방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해란강 주변의 들판이었고,
그 중심 젖줄이 해란강이었기 때문이다.
용정시가 풍경
룽징 [龍井(용정), Longjing]
요약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볜[延邊]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도시.
위치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 자치주 중부
면적
2,593㎢
인구
27만 3000명(1998)
본문
면적 2,593㎢, 인구 27만 3000명(1998)이다.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중부에 위치하며, 주도(州都)인 옌지[延吉]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져 있는 상공업도시이다. 1913년에 옌볜현이 설치되었다가 1983년에 룽징현으로 개칭하였고, 1988년 7월에 시(市)로 승격하였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3·13만세운동의 현장(용정중앙소학교)을 비롯하여 1880년경 한국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하였다는 용정 기원(起源) 우물이 있다. 삼림 및 광산자원이 풍부하여 동·은·납·아연 등이 채굴된다. 공업으로는 기계·화학·제지·야금·피혁 등이 생산된다.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며, 주변의 비옥한 농경지에서는 쌀·콩·수수·옥수수·아마(亞麻)·사과·배 등 농산물을 산출한다. 창투철도[長圖鐵道:長春∼圖們]가 시내로 지나며, 교육기관으로는 3개의 대학원과 146개의 소·중·고등학교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 3·13반일의사의 묘지, 시인 윤동주의 묘지, 한왕산고성(汗王山古城) 유적 등이 있다. 시내는 현대적 도시로 급성장하고 있으며, 백두산 관광기지로도 큰 몫을 한다.
일제하독립운동의근거지용정!
연길에서용정으로가다가야산위에자그마한정자가눈에띄인다.
이것이바로그유명한 '일송정'이다.
전에는늠름한자태의소나무가한그루서 있었다고하지만,
지금은작은소나무한그루와정자가있다. 이소나무밑에서독립운동가들이모여항일의의지를불태우곤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