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질문지 -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6-17)
1. 한 주간 살며 하나님과 동행한 증거가 있습니까? 당신은 언약백성입니까?
2. 말씀을 듣고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자기 말로 줄거리를 말해봅시다.
-> 16절.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 이사야가 왜 이의를 말이 났을 때 받아들여 두었는가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즉, 이는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믿음이 뒤이어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아무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사야가 53장 1절의 하반부에서, “여호와의 손이 뉘게 나타났느뇨?”라고 덧붙여 말함으로써 그 이유를 밝혀 놓고 있다. 그가 한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빛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 비춰 주실 때만이 말씀에서 유익을 얻는 다는 것이다. 이같이 내적 소명-이 내적 소명만이 선택받은 자들에게 유효하고 특유하다-은 사람들이 육성으로 부르는 소명과 구별된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건대, 구원에 대한 교훈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별 없이 자신에게로 초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구별 없이 선택받는다고 주장하는 어떤 해석자들의 논증이 어리석다는 것이 분명하게 입증된다. 약속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성질 그것만으로 저절로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특별계시에 의할 것 같으면, 구원은 선택된 자에게 국한된다.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우리는 이 결론에서 바울이 그의 수사학적 점층법을 진행함에 있어서 심중에 무엇을 두고 있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의 결론은 믿음이 있는 곳은 아디에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택의 표적을 이미 주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어지고 그리고 또한 그렇게 됨으로서 그의 이름-이를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의 사역에 의하여 그의 축복을 부어주셨다. 이같이 그는 이방인들이 영원한 기업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이 구절의 말씀은 말씀 전파의 효능에 관한 주목할 만한 구절인데, 이는 믿음이 복음 전파에 의하여 생겨난다고 바울이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방금 진술하기를 복음 전파는 그것만으로 무익하나 주께서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그것은 그의 능력의 도구라고 했다. 확실히 인간의 육성은 그것 자체의 힘으로는 영혼 깊숙이 파고 들 수가 없다. 만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우리를 중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고 할 것 같으면 지나친 명예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의 빛은 너무나도 고상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의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의 연약성들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육성을 빌어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실 수 없다거나 우리 안에서 인간의 봉사로 말미암아 믿음을 창조하실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더 유의해 두어야 할 것은, 믿음에 유의한 기초는 하나님의 교훈뿐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믿음이 어떤 종류의 교훈에서든지 생겨난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생겨난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만일 믿음이 인간들의 판단들에 근거하여 생겨날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바울의 이 같은 진술은 터무니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확실성에 대해 논할 때 모든 인간적인 허구들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신앙을 말씀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의 맹신의 망령이 파괴되게,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말씀이 지지를 받을 때까지는 말씀에 대한 신앙이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고 하는 가증스런 불경한 교리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 칼빈주석, 성서원, 2001, 339-341
16절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 문자적으로는 "그러나 모두가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이다. 이 두 번째 이의 제기는 좋은 소식을 "듣는" 문제를 강조한다. 바울은 헬라어 동사 ’휘파쿠에인‘을 사용하는데, 이 동사는 "귀를 기울이고 복종하다"를 의미한다. 1:5의 "믿음의 헌신"을 참조하라. 바울은 10:3에서 말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그의 표현 "모두가 ... 않았다"에 나오는 완서법[litotes]에 대해서는 Rehkopf, "Grammatisches," 224-25를 보라).
"이사야가 이르되" - 바울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가 오래 전에 제기한 이의를 반복함으로써, 이 이의 제기에 대답한다(9:27-28; 10:20;15:2을 보라)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 문자적으로는 "우리의 보고”이다. 바울은 퀴리에를 첨가하는 것 외에는 마소라 본문과 일치하는 70인역을 따라 이사야53:1을 인용한다. 사실상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다음이다. (유대인들 중에서) 모두 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복음이 그들에게 선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지 않는 (이와 비교할 만한) 거부가 이사야에 의해 그의 사역에서 이미 예견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명사 ’아코에‘를 사용하는데, 이 명사는 듣는 능력(고전12:7), 듣는 행위, "귀를 기울이는 것," 또는 "들은 것, 보고, 설명," 따라서 "선포"를 의미할 수 있다. 제2이사야의 말을 사용하여, 바울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지가 언제나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심지어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에 관한 메시지조차도 그렇다(역시 사 53:1을 인용하는 요 12:38을 참조하라).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 문자적으로는 "믿음은 듣는 행위로부터 온다"이다(갈3:2, 5; 살전2:13을 보라).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예를 들어 "예수가 주이다"(10:9)는 제시에 귀 기울이는 것과 그것을 "선포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 수용은 ’휘파코에 피스테오스‘(개인적인 믿음의 헌신[1:5; 16:26])으로 이어지고, 그런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며(갈5;6) 신뢰와 소망을 낳는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문자적으로는 "보고는 그리스도의 언급을 통하여 (온다)"이다. 그러나 케제만이 인식하듯이 이 애매한 표현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바울은 이것을 더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가져온 메시지를 통하여"(기원, of origin의 속격)를 의미할 수도 있다(Lagrange, Romains,261) 또는 샌데이와 헤드람(Romans, 298)이 취했듯이 이 문맥에서는'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통하여" 또는 이사야에 대한 메시지를 통하여"(목적격적[objective] 속격)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10:8을 보라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사자들의 입을 통하여 그의 메시지를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Rickards, "Vie Translation"을 보라). 이것이 그리스도가 로마서의 이 부분(9-11장)에서 언급되는 마지막 경우이다. 그는 12:5에서 다시 나타날 것이다. 10-11장의 나머지에서는 "예수"도 "주"(부활한 그리스도)도 사용되지 않는다. 이 침묵의 의미를 위해서는 11:26에 대한 주석을 보라. 일부 사본들은 ’크리스투‘를 ’테우‘로 바꾼다. 이것은 필사자가 바울의 본문을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 나오는(예를 들어 눅3:2; 요3:34; 엡6:17; 히6:5; 11:3) ’레마 테우‘와 조화시킨 것이다.
- 조셉 A. 피츠마이어, 앵커바이블, CLC, 2015, 975-976
->16절. 이 절에서 바울은 구원에 이르는 필요조건의 연결고리를 확인한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고 있는 것인데, 바로 믿음이 그것이다(14절 참조). 바울은 15절에서 모든 사람에 관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필시 유대인에게 특히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이 절은 바울이 14-21절에서 하는 논의에 중심이 되며, 실로 9:30-10:21에서도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유대인 형제들에 대한 비난을 재천명하고 있다(9:32와 10:3도 보라). "다 ... 아니다"는 "소수만이 ... 이다"를 뜻하는 완서법(litotes)이다. 바울이 문제를 이렇게 처리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9:6b에서(9:27도 참조) 소개한 "이스라엘에 속하는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는 "남은 자" 신학을 선포 확산(echo) 시키려는 것이다. 바울이 14-15a절에서 연결고리가 끊기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은 다소 시기상조인 것 같다. 18-21절에서 그가 그 연결의 적절한 고리들을 확인하여, 15b절에서 시작한 것을 속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좋은 소식의 전파 사실(15절)과 그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극적인 반응 사이의 자연적인 대조를 말하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바울은 이 반응을 믿지 않음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바울은 편지의 맨 앞에서부터 믿음과 순종을 연결시켰으며(1:5의 "믿음의 순종을 보라), 이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의 상황이 상대적으로 수동적으로 믿지 않음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운 발의에 대한 명확하고 괘씸한 응답 거부의 결과라는 것을 밝히는 데 특히 관심을 갖는다(10:3과 21절을 보라).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믿지 않음을 한 동전의 양면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그가 16b절에서 이사야53:1을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라고 인용하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로마서 9-11장의 다른 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9:27, 29; 10:2을 보라) 바울은 성경의 저자로 이사야의 이름을 지명한다.
17절. 이 절은 부자연스럽게 놓인 것 같다. 머리말의 "그러므로“와 이 절의 내용을 볼 때, 이것이 14-15절에서 언급된 구원의 요건들의 연결고리로부터 도출된 결론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이 절이 자리를 잘못 잡고 있다고, 또는 로마서의 본문에 나중에 추가된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무리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그 연결고리에서 이스라엘이 미치지 못한 한 가지 점을 16절에서 확인한 것은 시기상조로, 그로 인해 충족된 것으로 발견된 점들에 대한 바울의 천명이 중단되었다. 따라서 바울이 17절에서 말하는 것은 이 화제로의 필요한 복귀다. 이 절은 이사야 53:1을 l6b절에서 인용할 때 당연시하는 "믿음"과 "들음/ 전함" 사이의 연락을 바로 이어받아 구원의 요건 시리즈에서의 두 번째 단계, 즉 신앙은 "들음"의 결과로 생긴다는 것을 고쳐 말한다(14b 참조). 그러므로 17절의 마지막 부분은 그 연쇄에서의 세 번째 단계(14c절)를 고쳐 말하고 부연 설명한다. 들음, 즉 신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종류의 들음은 명확히 공포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있는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이제 종말론적 구원이 주어졌음을 공포하고 계시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일깨울 수 있는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 즉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며 부활하셨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메시지다(10:8을 보라).
- 더글라스 J. 무, NICNT 로마서, 솔로몬, 2015, 898-899
-> 10: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 많은 이들이 귀환자들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사야는 깊이 고민했다(사 53:1). 그들이 거부한 이유는 구원이 임했다는 진리에 대한 불신앙과 고난 받는 종을 알아보지 못한 불순종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바벨론의 안정적인 삶을 떠나길 꺼렸다. 그들은 곤경에 처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민족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바벨론 왕의 통치(headship) 아래 머물길 선호했다. 쉽지 않은 순례의 길을 거쳐 많은 문제들이 산재한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것보다 바벨론에 머무는 것이 훨씬 더 편안했을 것이다. 16절은 앞 구절에 나온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바울은 이사야53:1을 인용하며, 믿지 않는 이스라엘, 즉 새 언약이 주는 고난보다 옛 언약의 안전보장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적용한다. 이사야 원문에서 고난 받는 종은 나라의 왕들이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존재였다(사52:15). 이는 여호와의 종을 분별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왕족들은 평민들의 고난을 보고 별로 감동받지 않지만, 같은 왕족들이 고난 받을 때 놀라게 된다. 볼셰비키 혁명 당시, 러시아 왕가의 일부가 암살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유럽의 모든 왕가에 공포가 퍼졌는데, 이 역시 비슷한 사례이다. 사람들은 왕족이 암살당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사야 53장도 유사한 경우이다. 여호와의 종은 이스라엘의 왕이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구원자로 기다렸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가 일반 범죄자 같은 취급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의 죽음(즉 왕의 죽음)을, 반역한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제물로 본다. 그리고 이사야는 종의 고난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다윗의 확실한 은혜가 주어진다고 이어서 말한다(사55:3). 이사야 53장을 원문의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죽음을 해석하는 핵심 본문이 되었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분은 바로 그들의 왕, 유대인들의 메시아였다. 이는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초대 교회의 복음 선포와도 연결된다. 제자들은 예수를 다윗 혈통을 잇는 약속된 왕이라고 선포했다. 행2:25-36; 5:29, 32, 13:32-39)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사도행전 및 복음서에 묘사된 그리스도론은 바울의 그리스도론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론은 하나이고 구약의 주제와 예수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바울은 자기 백성들의 손에서 고난을 받은 메시아가 동일한 거부를 당했다고 서술한다. 사람들은 메시아 왕, 즉 하나님의 대리자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울은 귀환자들의 사역을 로마에 사는 기독교 공동체의 사역에 적용한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순례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선포하기에 그 전하는 메시지가 훨씬 더 위대하다. 그리스도는 백성들을 마지막 유업으로 인도하는 다윗의 자손이며, 자기 생명을 바쳐 사탄의 권세를 끊은 희생 제물이었다. 바울은 구약에 나온 언약 백성의 본을 따르는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기독교 공동체는 이스라엘이 수행하지 못했던 임무를 달성해야 한다(렘5:11; 31:22; 겔39:23; 호4:12).그리스도의 말씀은 믿음을 낳기에 바울은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복음 선포로 인해 생명의 위험이 따른다고 해도 말이다. 바울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로부터 위협을 받았다기보다 유대인들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들의 전통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아연 실색했다. 공동체가 순결과 특권을 주장할 때 종교적인 증오심은 종종 폭력과 불의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이 모든 특권이 그리스도 없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 톰 홀랜드, 로마서주석, CLC, 2012016, 584-586
3. 16절을 읽고, 은혜의 방편과 관련해 도르트신조 3.4장 17항과 서로 비교해보세요.
->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 17항: 하나님께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심
우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 생명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일하심은 수단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수단을 반드시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지혜와 선하심을 따라 그 수단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권능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이처럼 앞에서 말한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일하심은 복음의 사용을 배제하거나 무효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크신 지혜로 복음을 중생의 씨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과 사도들을 이어 가르치는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은혜에 관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들의 모든 교만을 낮추도록 경건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사도들과 교사들은 복음의 거룩한 권고를 따라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시행 아래서 사람들을 지키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신 기쁨 안에서 함께 밀접하게 결합하기 원하신 것을 나눔으로써 감히 주제넘게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은혜는 권고를 통해 주어지며,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더욱 기쁘고 즐겁게 행할수록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이 더욱 빛나고, 하나님의 일하심도 더욱 더 진전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을 주시고, 그 수단을 통해 구원하는 열매와 효과도 주시는 하나님 홀로 영원히 모든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
-> 도르트 신조 제3장의 결말에는 ’믿음에 이르기 위해‘ 또는 ’믿음의 생명을 위해‘ 은혜의 방편을 사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다시금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방편을 사용하셔서 ”우리 육의 생명을 낳으시고 붙드시는“ 것처럼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행하실 때도“ 그러한 방편들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 방편은 바로 ”중생의 씨와 영혼의 음식으로 세우신“ 복음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신 기쁘심으로 짝지으려 하신 것을 나눔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권면을 통해 은혜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더욱 기꺼이 행할수록 하나님의 은택이 더욱 우리 안에서 빛을 발하며, 그분의 사역이 더욱 곧게 전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편들과 그 방편을 통해 구원하는 열매와 효과로 인하여 모든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원 세세토록 있을 것입니다. 아멘. (17항) - 코르넬리우스 프롱크, 도르트신조강해, 마르투스, 2016, 76-77
-> 제58문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혜택의 참여자가 되는가?
답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혜택의 참여자가 되는 길은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인데, 이는 특별히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1) 관련성구
. 요 1:11-12: 그리스도의 유익들이 우리에게 적용된다.
· 딛 3:5-6: 요 3:1-10: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이 구원에 본질적 요소이다.
2) 해설
(1)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구속을 성취하셨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실제로 그 구속의 유익을 경험하도록 그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2)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이 왜 필요한가?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약하고 죄악적이어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절대로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유익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 마음을 바꾸시고 우리를 회개케 하며 믿음을 주시는 성령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를 통해서만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사역의 유익을 수여받을 수 있다.
(3)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고 거절함을 통해 발생하는 즉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은 사실인가?
이러한 종류의 진술은 올바로 이해될 때만 사실이 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①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복음을 영접하는지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
② 복음을 영접하고 거절함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자유의지를 따라서 행동한다.
③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우리의 자유의지는 언제나 복음을 거절하게 될 것이다.
④ 우리의 마음이 성랑을 통해 변화될 때 우리 자유의지가 복음을 영접하게 된다.
⑤ 따라서 결국 구원은 우리 마음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달린 것이다.
(4)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결정에 좌우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시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며 우리는 토기에 불과하다. 그의 사역은 우리의 결정에 종속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59문 누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참여자가 되는가?
답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그것을 사신 모든 사람에게 확실히 적용되며 유효하게 전달되는데, 그들은 때가 이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된다.
1) 관련성구
. 엡 1:13-14; 요 6:37, 39; 10:15-16: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사신자들에게 유효적이다.
. 엡 2:8; 고후 4:13: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여 주신 자들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다.
. 요 17:9: 그리스도는 그가 구속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 행 2:47: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백성들은 때가 차면 교회에 인도된다.
. 행 16:14: 복음으로 구원받을 자는 주님에 의해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된다.
. 행 18:9-11: 하나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택자인지 정확히 아시며, 누구를 구속하셨고 언제 그 구속을 적용하실 지 정확히 아시는 분이시다.
2) 해설
(1)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 구속을 성취하셨는가?
'그의 백성", '그의 양, '그의 교회", '그의 몸', ‘택자들', '그가 미리 아신 자들'이란 용어로 성경에 정의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이다.
(2)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백성들은 얼마나 되는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이다(계7:9). 성경은 택자들을 이렇게 정의한다. 첫째, 전 인류가 아니라 인류의 일부분 즉 특별한 백성의 특정한 숫자들이다. 둘째, 인간의 능력으로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다. 셋째,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창세전에 결정된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숫자이다.
(3)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구속하시지 않는가?
이것이 오늘날 유행하는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성경의 교훈과는 모순되는 진술이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은 모두 이러한 사상을 배격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 "자기 양“, "자기 사람들'을 위해 구속을 성취하셨다고 선언한다.
(4)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죽었다고 말하는 성경 본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은 인류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 전체 또는 택자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일련의 본문들도 그리스도께서 인종을 뛰어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 짓는 국적을 뛰어넘어 모든 종류의 지인을 위하여 돌아가셨음을 의미한다(요일 2:2). 성경에서 "모든' 또는 "세상”이라는 단어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각 개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참조하라. 누가복음 2:1; 사도행전 19:27; 마가복음 1:32; 사도행전 4:21; 요한복음 12:19.
(5) "하나님께서 모든 이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취할 수도 있으며 거부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갓은 올바른 것인가?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기회란 말은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확실하고도 유효적으로 구원받기로 작정된 모든 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6) 그리스도는 당신의 구속을 어떻게 택자들에게 적용하시는가?
그들 생애 가운데 특정한 시간에 복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신다.
60문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이성의 빛에 따라 살아감으로서 구원받을 수 있는가?
답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사람들은 결코 본성의 빛이나 자기들이 믿는 종교의 계율도 부지런히 준수하며 살지 않았으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의 몸 된 교회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밖에는 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다.
1) 관련성구
· 롬 10:14: 복음 메시지는 구원에 필수적이다.
· 살후 1:8-9; 엡 2:12; 요 1:10-12: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정죄 아래 처한다.
· 요 8:24; 막 16:1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에 필수적이다.
. 고전 1:20-24: 그리스도의 십자가 설교 없이는 참되고 실재하는 구원의지식이 없다.
. 요 4:22; 롬 9:31-32; 빌 3:4-9: 본성의 빛에 따른 세심한 삶 또는 그 어떤 종교적 체계도 구원에 충분하지 않다.
· 행 4:12: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
· 엡 5:23: 그리스도는 오직 그의 몸 된 교회의 구주이시다.
2) 해설
(1)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방인들이 왜 마지막 심판의 날에 정죄를 당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들의 죄 때문이다. 로마서 2:12을 읽으라.
(2) 왜 이방인들은 본성의 빛에 따라 충살하게 살아감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전 인류가 범죄했고, 그 결과 모든 개인이 죄악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인류가 죄에 빠졌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의 빛을 (207) 가지고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 모든 자들은 사망 선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3) 왜 이방인들은 그들이 믿는 종교의 계명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감으로 구완을 얻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이방종교들은 모두 다 그릇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부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체계와 방식에 있어서 이방종교들은 하나같이 다 거짓된 종교이다. 그들은 죄인들에게 필요한 진리의 요소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죄로부터의 구원의 길에 대한 유일한 진리는 신-인의 중보자이다. 따라서 이방 종교들이 그 어떤 도덕적인 의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해도 이것이 그들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만일 바리새인으로서의 사도 바울의 열심이 그를 구원할 수 없었다면, 이방 종교는 얼마나 더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인가?
(4)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이방 종교심에 신실하다면 그 신실함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는가? 현대인들의 정서는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과 완전히 배치된다. 사도행전 4:12을 읽어보라. 성실함은 진리와 함께하지 않는 한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이방 종교에 신실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더 멸망에 빠질 뿐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제2차 세계대전시의 일본인들은 그들의 황제를 신실하게 신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그것이 황제를 신으로 만들지 못했고 그들을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도 못했다.
(5)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자들을 정죄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 아닌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야 할 빛이 있다면, 아니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자들을 정죄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그러한 빚을 지신 일이 없으시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구원을 제공하거나 공급할 아무런 의무도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구원하시고 다른 이는 그냥 지나쳐 버리시는 일에는 그 어떤 불의도 관계할 수 없는 것이다.
(6) 만일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자들을 정죄하신다면 인류를 불공평하게 다루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확실히 하나님은 인류 중 일부를 어느 정도 특별히 더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않는 것을 어떤 이들에게는 주시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건강과 지성과 번영 등과 같이 인생의 일반적인 복락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금하시는 것을 어떤 이들에게는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대우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는 결코 불의나 불공평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어떤 자에게도 복을 베푸셔야 할 빛을 지신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람에 관계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행위의 이유는 구원을 받는 사람들의 성격이나 의에 기초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택자들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은 순전히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7) 그렇다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소망은 무엇인가?
오직 선교사들에 의해 전 세계에 선포된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이 구원의 메시지는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복음이다.
(8) 복음 메시지의 믿음 이외에 이방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소망이 있는가?
성경에서 완전히 증명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많은 정통 신학자들은 유아 때 죽은 많은 어린이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견해를 견지해 왔다. 이와 관련해도 독자들은 신앙고백서 제10장 3절 첫 번째 문장을 참조해야 한다. 그러나 신앙고백서가 택함 받지 못하고 유아 때 죽는 자들이 있는지 없는지 언급하지 않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신앙고백서는 오직 "유아 때 죽는 택함 받은 유아들'만 언급하고 있다. 이 대조가 암시하는 바는 "유아 때 죽는 택함 받지 못한 유아들'이 아니라 "유아 때 죽지 않는 택함 받은 유아들"을 암시한다. 즉 이 대조에는 유아 때 죽는 택함 받은 유아들과 죽지 않고 분별할 나이 때까지 성장하는 택함 받은 유아들이 암시되어 있다.
(9) 불신앙자가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소망에는 무엇이 있는가?
말씀사역을 통해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을 능력이 없는 다른 택자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0장 3절을 보라. 이는 정신적으로 박약하게 태어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믿을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사실이다.
(10) 우리는 만인 구원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① 많은 성경 구절들은 이것을 확실하게 반대한다.
②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 밖에 아무것도 아니시라는 거짓된 사상에 기초한다.
③ 이는 외국 선교와 전도의 길을 완전히 막아버린다.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에 궁극적으로 다 구원받는다면 국내서나 해외에서 복음을 설교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61문 복음을 듣고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얻겠는가?
답 복음을 듣고 유형교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무형교회의 진정한 회원만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1) 관련성구
. 요 12:38-40; 롬 9:6; 마 7:21; 롬 11:7: 참된 종교를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진정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2) 해설
(1) 왜 복음을 들으며, 유혁 교회의 구성원이 완전히 확보할 수 없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개인적인 믿음을 수단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고백하지 않고서도 복음을 듣고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유형 교회의 구성원에는 몇 가지 부류가 있는가?
①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으로 인해 진정으로 구원받는 자들이 있다.
② 형식적이며 명목적(nominal)인 고백으로 인해 그 영적 능력과 실재를 경험하지 못한 채 참되게 구원 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3) 그렇다면 유형 교회에서 어떤 이들이 참되게 구원받으며 어떤 이들이 형식적으로 기독교를 고백하는지를 확실히 결정하는 자는 누구인가?
오직 하나님만이 확실히 아신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 완전한 확신과 보증을 소유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이의 구원이나 멸망에 대해서는 완전히 단정하거나 확신할 수 없다.
(4) 유형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은 무엇인가?
유형 교회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모든 구성원들이 중생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이상일 뿐이며, 지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 가룟 유다가 있었던 것처럼, 이 세대의 유형 교회에는 언제나 일련의 구원받지 못한 무리들이 있을 것이다. 목사와 장로들은 이것이 그들의 게으름과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면 자신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진리의 무식자와 소문이 나쁜 자들, 즉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고백대로 생활하지 않는 자들 또는 그들의 행실이 도무지 그리스도인다운 행실을 보이지 않을 때 그들을 유형 교회에서 쫓아낼 의무가 있다. 그러나 명백한 무식자와 범죄자가 아닌 이상 온전히 구원받지 않은 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유형 교회의 구성원들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상태이다. 완전히 순수한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항상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더 큰 악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5) 유형 교회의 구성원이 되려 하는 자들은 교회의 감독된 자들에게 자신이 중생 받은 자임을 증명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교회의 감독된 자들은 모든 교우들의 외면적 고백을 수용해야한다. 목사와 장로들의 의무는 그들이 진정으로 거듭난 자인이 아닌지 그들의 마음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다. 유형교회의 구성원은 믿을만한 신앙의 고백과 순종에 기초해야지 중생의 구체적인 증명이어서는 안 된다. 유형교회의 구성원의 조건은 추정이어야지 증명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회심했는지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이 신앙을 고백할 때 그러한 고백이 그릇된 것임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6) 유형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유형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이 유형교회의 구성원일 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어 진정으로 구원받을 자임을 확신하고 보증해야만 한다.
G.I 윌리암슨, 대요리문답강해, 크리스챤, 2007, 203-211
4. 17절을 읽고 벨직신앙고백서 23장, 웨스트민스터 14.1, 20.2에 대해 말씀해보세요.
->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BC 23장.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조건
우리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씻어 주셨음으로 되어짐을 믿는데,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다윗과 사도 바울이 가르쳐 준 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 행위와는 관계없이 의를 심어 주셨다고 선언함과 같은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런 고로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우리 자신을 그 분 앞에서 낮추면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늘 인식하며 이 은혜의 기초를 항상 굳게 붙잡고 나갈 것인데,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서는 그 어떤 신뢰할 만한 요소라든지 자랑거리가 없고, 다만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을 의지하고 따르면서 그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이 진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해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고자 하는 힘을 주기에 충분하며,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이 당황하여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감추려고 했던 사실과는 달리 두려움이나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 인간이 우리 자신이나 보잘 것 없는 다른 피조물들을 의지한 채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는 마땅히 소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과 같이 기도를 해야만 할 것이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것으로서 죄의 용서에 있다는 고백에 관하여, 귀도 드 브레는 23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확신을 주며, 우리의 양심을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기에 충분하므로, 우리는 두려워 떨면서 숨으려 했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 자신을 덮으려 했던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의 모범을 따르지 않게 합니다. "로마 카톨릭이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적용하여 어떤 사람을 도우려 할 때 제기되는 문제를 귀도드 브레는 알았습니다. 로마 카톨릭 신학에 따르면, 만일 어떤 사람이죄를 범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필요하고,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접근합니다.
1) 그 사람은 상한 마음과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합니다.
2) 그 사람은 입으로 자기 죄를 고백해야합니다.
3) 그 사람은 선행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을 고쳐야 합니다.
이런 체제는 죄인들에게 위로를 주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충분히 상하게 하고 죄를 깊이 뉘우쳤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합당하게 고백했는지, 혹은 어떤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고 충분히 선행을 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루터가 로마 카톨릭에서 회심하기 전에 늘 가졌던 생각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로마교의 신학은 많은 불확실성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로마 카톨릭 신학이라고 칭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런 생각들을 확장시킴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에 많은 의문들과 의심들이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내가 정말로 용서받았는가? 나의 죄가 용서받기에는 너무 엄청나지 않는가? 내가 나의 죄를 합당하게 고백했는가? 나의 겸손의 깊이가 충분한가?" 우리는 또한 때때로 하나님께서 멀리 떠나셨다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우리가 용서를 받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귀도 드 브레가 이런 질문들과 열심히 투쟁했다는 것은 23조의 마지막 단락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귀도 드 브레는 칭의가 죄를 덮음과 용서를 위해 충분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이 죄와 허물을 덮어 주셨다고 선언하신 것은 충분했습니다. 이 지식은 확신을 준다고 귀도 드 브레는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조금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난다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들을 신뢰하면서 우리는 소멸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 10:11-12, 18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죄용서의 사역을 말합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일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하게 하심이 나의 죄의 값으로 지불되었고,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불의를 덮었고, 그리스도의 거룩이 나의 부정을 덮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귀도 드 브레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언의결과를 기록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하는 확신, 우리의 양심의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게 함... "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히10:19-22에서 다음과 같이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담대히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언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 수 있고,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칭의의 사역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나의 의를 선언하심은 나 자신에게 있어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죄인인 내가 당신 앞에서 용서를 받았고 의롭게 되었으며 무죄하다고 선언하십니다. 나는 은혜롭게도 사탄의 편에서 하나님의 편으로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나의 계속되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유롭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의롭다 하셨으므로 더 이상 두려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대신에 나는 평강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를 가지고 하나님과 함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 클라렌스 바우만, 벨직신앙고백서 해설, 솔로몬, 2016, 330-333
-> WCF 14.1. 믿음의 은사로 말미암아 선택자들은 믿어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히10:39), 그 믿음의 은사는 그들의 심령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이며(고후4:13; 엡1:17-19; 2:8), 통상적으로 말씀의 증거에 의하여 역사한다(롬10:14,17). 또한 말씀과 성례집행과 기도에 의하여(은혜의 수단) 믿음의 은혜는 증가되고 강화된다(벧전2:2; 행20:32; 롬4:11; 눅17:5; 롬1:16,17).
WCF 20.2. 하나님만이 양심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며(약4:12; 롬14:4), 그는 신앙이나 예배에 관한 일에 있어서(행4:19; 5:29; 고전7:23; 마23:8-10; 고후1:24; 마15:9) 자기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배치되거나 혹은 벗어나는 인간들의 교훈들과 계명들로부터 양심을 해방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그러한 교훈들을 믿는다거나, 또는 양심을 범하여 그러한 계명들에 순종하는 것은 양심의 참 자유를 배반하는 것이다(골2:20,22,23; 갈1:10; 2:4,5; 5:1). 또한 맹신(盲信)과 맹종(盲從)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과 이성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다(롬10:17; 14:23; 사8:20; 행17:11; 요4:22; 호5:11; 계13:12,16,17; 렘8:9).
2항 하나님만이 홀로 양심의 주인이 되신다(약4:12, 롬14:4). 그분은 자신의 말씀에 위배되는 인간의 교리와 명령은 물론 예배나 믿음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행4:19, 5:29, 고전7:23, 마23:8-10, 고후1:24, 마15:9). 따라서 그런 교리를 믿거나 양심상으로 그런 계명에 복종하는 것은 참된 자유와 양심을 배신하는 것이고(골2:20, 22-23, 갈1:10, 2:4-5, 5:1), 무조건적인 신뢰와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는 물론 이성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롬10:17, 14:23, 사8:20, 행17:11, 요4:22, 호5:11,계13:12, 16-17, 렘8:9).
- 해설 -
이 조항은 양심의 자유라는 교리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진술한다. 양심은 믿음과 의무의 문제와 관련해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만 복종할 뿐 인간의 전통과 계명에 복종하지 않을 자유를 누린다. 인간의 권위에 복종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교리를 믿거나 그런 계명에 복종하는 것은 양심의 참된 자유를 배신하는 것이다. 국가 공직자든 성직자든, 남편이든 주인이든 부모든 무조건적인 신뢰와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양심의 권리는 세상의 통치자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자주 침해를 받아왔다. 이 조항은 교리와 실천에 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행을 정면으로 논박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과 주교들이 스스로의 권위로 양심을 속박하는 율령을 집행할 수 있고, 그것을 어길 경우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길 때와 동일한 형벌을 가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실제로 그런 신조를 많이 강요했고, 성경의 근거가 없는 의식과 예전을 수없이 만들어 예배에 적용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령을 절대적으로 믿고, 그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요구한다. 이 조항은 전횡적인 횡포를 일삼아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강하게 비판한다. 양심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지고하신 주님이시요, 입법자이신 하나님에게만 속한 권한을 찬탈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성경은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4:12)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눅 22:25-26)라는 말씀으로 제자들 사이에서 그런 식의 권한 행사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밝히셨다. 사토들도 그런 권한을 인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고후1:24)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조항이 제시하는 원리로부터 신앙 문제에 관한 판단은 개인의 권한에 속해 있고, 모든 신자가 그런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신자는 모든 교리를 무오한 잣대인 성경에 비춰 살피고, 판단해야한다(사8:20,요일4:1).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춰야 한다(벧전3:15). 사람의 교리와 계명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거나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법한 의무라는 확신 없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죄에 해당한다(롬14:23). 아울러 이 조항이 제시하는 원리는 합법적인 권위를 지닌 상급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나 믿음과 예배에 관한 문제에 대해 복종을 강요하더라도 그의 명령이 양심을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성경은합법적인 상급자들, 곧 부모나 남편이나 통치자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지만, 이는 무한정 복종하라는 뜻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복종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의무를 다하는 것에 해당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골3:20)라는 명령은 그들이 부모의 권위를 올바로 행사할 때만 복종하라는 의미일 뿐 맹목적이거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라는 명령도 마찬가지다. 통치자들에게 복종하는 것도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13:1)라는 명령은 그들이 권위를 올바르게 사용할 때만 복종하라는 뜻이다. 사도들은 통치자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쳤지만, 그들의 명령이 그보다 위에 있는 의무와 일치하지 않을 때는 거기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라는 원리만을 인정하고, 그 원리에 따라 행동했다. 유대인들의 공회가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대답했다. 도덕적으로 그룻된 것을 요구하는 명령은 양심을 구속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조항이 제시하는 원리로부터 정부의 권위는 신앙 문제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추론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이조항의 취지를 터무니없이 곡해한 것이다. 신앙고백의 작성자들은 이 장의 4항과 23장에서 정부가 신앙 문제에 합법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조항의 취지는 정부의 권위 행사를 단죄하는 데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조항을 근거로 그런 견해를 내세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맥크리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이 정부의 모든 권위 행사를 단죄한다면 교회의 권위든, 부모의 권위든, 신앙 문제에 관해 인간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모든 행위를 단죄하는 셈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위배되는 인간의 교리와 명령은 물론 예배나 믿음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는 명제는 하나님이 성직자든 국가공직자든, 주인이든 부모든 상관없이 성경에 위배되는 교리와 명령을 내세울 경우에 그것을 거부할 자유를 허락하셨다는 뜻이다. 교회 회의의 결정이든, 의회의 결정이든 '무조건적인 신뢰'와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을 바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의 취지는 특별히 신앙과 예배의 문제와 관련해 모든 인간의 권위가 하나님의 주권과 법률에 종속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 특히 이 말은 교회의 권위를 내세워 그릇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을 논박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듯하다. 잘 아는 대로, 교회의 권위는 지금까지 세속 통치자들 못지않게 신앙문제에 자주 해로운 영향을 끼쳐 왔다. 교회는 교황과 교회 회의와 고위 성직자들과 성직자 회의의 권위를 절대화시켜 새로운 신조를 만들고, 비성경적인 권한과 의식, 즉 '인간의 교리와 명령'을 제정해 강요했다.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전통과 미신을 거룩한 율법에 덧붙였다고 지적하셨다. 세속 통치자들이 그런 행위에 동조하거나 그들이 스스로의 권위를 내세워 그와 비슷한 일을 시도하거나 교회의 수장권을 주장하는 경우 이 교리는 그들의 독재 행위를 단죄할 뿐 아니라 교회든, 국가든 상관없이 오류나 자의적 숭배를 비롯해 그 어떤 종류의 그릇된 신앙을 주장하는 행위가 양심을 주관하게해서는 안 되고,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교리는 인간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복종하며, 말씀 이외의 것은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의 한계를 지키는데도 거기에 복종하지 않고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어떤 권위도 그렇게만 한다면 합법적인 권위가 될 수 있다. - 로버트 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생명의 말씀사, 2017, 360-364
5. 성전을 하나님의 쉴 곳(시132:14), 지성소를 하나님이 거하실 곳(사57:15)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독교강요 4.1.5)
-> 이사야는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별하는 표지를 말했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59: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의 손을 통하여 주시는 영적 양식을 무시하는 사람이 모두 굶주려 멸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만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넣으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바울의 말과 같다(롬10:17).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는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데(롬1:16), (역시 바울이 증거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복음 전파에 의해서 나타내신다(ibid).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옛날에 거룩한 회중이 성소 앞에 모이기를 원하셨으며, 거기서 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믿음의 일치를 얻게 하시려고 하셨다. 성전을 하나님이 "쉴 곳"(시132:14), 지성소를 하나님이 "거하는 곳"과(사57:15)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곳이라고 한다(시80:1). 이런 영광스러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다만 하늘 교리를 전파하는 일이 존경과 사랑과 경의와 위엄을 얻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시를 받는 죽을 인간이 나타남으로써 성전과 성소의 가치가 많이 낮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평가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질그릇인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고후4:7) 우리들에게 알리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며 또 이 질서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곳에 계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그의 백성이 점이나 요술이나 초혼술이나 기타 미신에 빠지는 것을 금하신 후에(신18:10-11, 레19:31) 그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만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즉 그들에게는 항상 예언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신18:15 참조). 옛날에 백성을 천사들에게 맡기시지 않고 땅에 교사들을 세워서 천사의 직책을 신실하게 수행하도록 하신 것과 같이 지금도 인간을 사용하여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신다. 옛날에 율법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제사장들을 해석자로 삼아 사람들이 율법의 참 뜻을 그들의 입을 통해 배우도록 하신 것과 같이(말2:7 참조), 지금도 우리가 율법을 정독하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울 교사들을 임명하신다. (4.1.5)
< 어린이를 위한 질문 >
1. 오늘 말씀을 들으며 깨달은 것을 나눠보세요. 알게 된 교리가 있나요?
2. 16절을 읽고, 은혜의 방편에 대해 말해보세요. (도르트신조 3.4장 17항)
3. 17절을 읽고 양심의 평안에 대해 말해보세요. (벨직 23장, 웨스트민스터 14.1, 20.2)
4.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각자 말해보세요.
< 과제 >
1. 숙제
– 기독교강요 4권 8장 ‘믿음의 항목‘ 읽기
– 성경읽기 : 이사야 28장(주일) - 이사야 34장(토)
2. 6월 추천도서
- 기도하는 즐거움, 마이클 리브스, 송동민, 이레서원, 2020.06.07
-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이광식, CH북스, 2020.06.01
- 언약과 구원론, 마이클 호튼, 김찬영, CLC, 2020.05.30
- 신지식론, 존 M. 프레임, 김진운, P&R, 2020.05.30.(신론, 주권시리즈 마지막 책)
- 간추린 기독론, 도널드 맥클라우드, 우상현, CLC, 2020.05.08
– 직분자반, 안재경, 세움북스, 202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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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분이라도 후원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후원참여는 없습니다
먹을것 쌀과 식재료를 사야되는데 후원으로 도와주시거나
택배로 쌀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카페에 후원을 하신분은 사랑회원(최우수)이 되십니다...
카페지기의 생활이 어렵습니다 매달 정기 후원으로
도와주시면 카페 운영에 큰힘이 됩니다 한달에
몇분만 후원하시는데 공과금과 약값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카페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건강이 않좋아 병원을 다니며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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