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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묵상글 들 ( 부활 5주 월요일-계명을 초월하여 원하는 것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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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5주 월요일-계명을 초월하여 원하는 것을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 말씀을 묵상하다가 '받아'라는 말에 눈이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저 '계명을 지키는 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라고 하시는데
주님 사랑과 계명 준수 사이에 어떤 단계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차치하고
받는 것조차 아예 거부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겁니다.
가끔 사고 싶지 않은 것을 사지 않아도 좋으니 한번 보시기라도 하라며
억지로 보내겠다고 하면 저는 아예 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받아 보고 좋으면 사고 안 좋으면 안 살 것이 아닌,
결코 사고 싶지 않고 결국 사지 않을 것을 괜히 받았다가
돌려보내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도 지킬 생각이 아예 없으면 계명을 아예 받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아예 받지도 않는 사람은 주님을 조금도 사랑치 않는 사람일 겁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다른 백성들이 자기들의 신을 만들고는 그 신에게
경배하였는데 바로 그런 꼴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신명기 4장에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모세는 잡신이나 우상이 아니라 하느님같이 위대하신 분이
법 나부랭이가 아니라 진짜 위대한 법규를 다른 민족에게는 주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것은 대단한 영광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위대하신 분이 다른 사람에겐 주지 않고 내게만 주신다면 대단한 영광이고,
또 주신 것이 대단한 것이라면 더 대단한 영광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하느님을 위대한 분으로 생각지도 않고
법규도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니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차버리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주님도 사랑하는 것이고 계명도 고마운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계명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받아놓기는 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만큼 덜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계명이라고 하면 어쩐지 거부감이 있습니다.
의무나 강제와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주님의 계명이 의무나 강제로
느껴지는 것인데 그렇기에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 마음에 들고 싶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주님의 계명을 기꺼이 실천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도 초월할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계명을 주시지 않을 텐데
그것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계명을 주시기 전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먼저 알아서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알고서도 그 원하는 것을 스스로 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치 않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저는 사랑치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한다고 하기
어려운 저임을 성찰케 되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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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봅니다.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과, 주님을 모르고, 모르기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이스카리옷이 아닌 유다가 예수님께 여쭙니다. 구세주가 세상에 오셨지만 모두가 다 그분을 맞아들인 것은 아니지요. 아예 관심이 없는 부류도 있고, 출신과 배경을 들어 거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분을 긍정하는 제자들 안에서도 진정한 앎과 믿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고 하십니다. 사랑한다는 증거는 계명의 준수로 드러나지요. 그런데 그 계명의 골자가 곧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다니, 결국 그가 사랑의 수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얼마나 아름답고 충만한 약속입니까? 사랑하는 이에게 성 삼위 하느님께서 친히 임하시고 거하십니다. 사랑의 발걸음을 시작한 이들, 사랑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이들은 그래서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성 삼위 하느님과 함께이니 홀로면서 홀로가 아닌 존재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선교 여정이 극적으로 펼쳐집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사도 14,15).
바오로가 일으킨 치유 기적을 보고 리스트라 사람들이 두 사도를 신으로 여겨 경배하려 하자 그들이 만류하며 외칩니다. 모든 일에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사도들은 잘 알고 있기에 영광을 제 것으로 편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 ... 다만 복음을 전할 따름"
맞습니다! 리스트라 사람들이나 두 사도는 생물학적으로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의 차이는 오직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지요.
복음, 곧 사도들이 먼저 만나고 전하는 기쁜 소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사도 14,11)는 리스트라 사람들의 외침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어느 정도 시사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비와 절기와 양식과 마음의 기쁨으로 당신을 드러내신 주님께서 이제 두 사도를 통해 당신 이름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경배해온 신이 이제 이름과 얼굴을 보이는 겁니다. 그 신의 이름이 곧 사랑입니다.
이제 리스트라 사람들 중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부류에서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부류로 건너갈 것입니다. 이 사건 뒤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펼쳐지지만, 훗날 바오로가 리스트라에 갔을 때 그곳에 있는 제자로 티모테오가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리스트라에 복음의 꽃이 피었으리라고 짐작해 봅니다(사도 16,1-5 참조).
다시 유다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아버지는 이스라엘에 먼저 아드님을 드러내셨지만 그것으로 구원의 문을 닫아 걸고 종료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민족에게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무신론, 회의주의, 불가지론, 물신주의, 이기주의, 신앙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으로 점철된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더 이상 공허하고 위선적인 말만으로는 복음이 타인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 삼위 하느님과 더불어 사랑이 될 때 기쁜 소식이 전달되고 퍼져나갑니다.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은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게 됨으로써 모두 함께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완성됩니다. 모두 사랑으로 이어지고 엮어져 하나의 사랑이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그 사랑이 완성되기를 희망하며 오늘도 힘껏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누군가라도 우리 작은 사랑으로 위로 받고 쳐진 어깨를 추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아니, 훌륭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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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보호자이신 성령!'
'동반자이신 성령!'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말씀을 우리는 어제 부활 제5주일 복음(요한14,1-12)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내 힘 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분명 나의 힘과 노력이 크게 작용하지만, 그 외 다른 것들의 도움도 필요로 합니다.
그 도움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의 도움이고, 보이는 나의 형제 자매들의 도움입니다.
우리의 보호자이시고,
우리의 동반자이시고,
우리의 도우미이신 성령!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참으로 값진 선물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이 이 큰 선물을 주시는 분께로 향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참으로 고마우신 보호자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께로 향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삶의 여정과 영적 여정 안에서 함께 하는 나의 동반자요 도우미를 기억하고 그들에게 감사드리고, 참 좋은 동반자와 도우미들을 보내달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청합시다!
저에게는 매일 복음 묵상글을 통해 만나는 형제자매들과 영산공동체에서 만나는 형제자매들이 참으로 소중한 나의 동반자들이며, 도우미들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오늘 철쭉의 향연을 이루고 있을 합천 황매산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그곳에서 아름다우신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이 여정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기억하겠습니다.
오늘도 화이팅~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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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부활 제5주간 월요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의 묵상
사랑과 계명은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를 떠올려 봅니다.
자신은 아파도 상대가 건강하기를, 자신은 슬퍼도 상대가 웃기를 바라는 일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위하여 더 움직이고, 더 살피고, 더 챙기게 됩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나고, 사랑은 그렇게 애틋한 습관으로 서로에게 남습니다.
계명은 지켜야 할 의무 규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일구어진 습관입니다.
거창한 이벤트를 준비해서 사랑을 일구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의 습관적 체험 안에서 사랑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분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노력을 통한 자기 계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의 연습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켜 냅니다.
삶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계명을 지키는 일이 됩니다.
주위 환경이 달라도, 서로의 관점과 사상이 엇갈려도, 어쨌든 살아 내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모두들 마음 편히 살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고 그 터가 때로는 우리 집일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하루를 살아갑니다. 참 외로운 일이지요. 참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1세기 말엽, 기다리던 메시아께서는 오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증언하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죽어 가고, 의지할 데 없어 헤매는 신앙인이 나약해졌을 때 요한 복음 저자는 예수님과, 어쨌든 살아 낼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으로 성령을 소개합니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오로지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히 들려주시는 역할을 도맡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쨌든 살아 내기’였습니다.
어쨌든 오늘 하루 살아 내었으면 그만큼 사랑한 것이고 계명을 지킨 것입니다. 참 고생하셨습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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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새벽을 열며.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빠다킹신부님.
신학생 시절, 중고등부 학생들과 방학 때 캠프 갔던 기억을 해봅니다. 그때는 식사를 다 직접 해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로 밥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버너를 이용해 코펠에 밥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밥물을 자기 생각보다 더 넣어야 맛있는 밥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집의 밥솥을 생각해서인지 물이 적어 설익거나 태울 때가 많았습니다. 또 많이 먹겠다는 욕심에 코펠 가득 쌀을 넣고서 밥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익지 않은 밥이 코펠 밖으로 넘치고 맙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밥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관계가 틀어지고, 때로는 가슴을 새까맣게 태우기도 합니다. 제대로 된 관계를 위해서는 알기 위해 노력해서 관계를 잘 지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뜸 들이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고, 생각보다 물을 더 넣는 ‘조금 더’의 노력도 있어야 합니다. 즉, 내 마음의 크기도 알맞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맞을 때 최고의 주님을 내 안에서 만날 수가 있게 됩니다.
무조건 알아서 해달라는 식의 무책임한 떠넘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다면 불평불만을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십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는 사랑의 일치를 통해서 함께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을 떠나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라서 그분과 아버지께 사랑받는 이들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예를 우리는 많은 성인성녀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의 집에서 죄의 더러움을 씻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호자, 곧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더 두텁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진리의 영이기도 한 성령을 받아들여서 주님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노력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줘서, 내 삶을 최고의 삶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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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품고 무엇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과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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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이 더 멋진가?
17년 전, 세 번째 책을 출판할 때 출판사에서 이번 책에는 사진을 좀 넣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냥 텍스트만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좋다고 했지요. 그런데 사진작가가 제 모습을 많이 찍는 것입니다. 사진 찍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유명인도 아닌 평범한 사제인 저로서는 너무나도 부담이 되어서 사진작가에게 “저를 안 찍으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진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믿으세요. 그래야 사진이 잘 나옵니다.”
사진작가인데 어떻게 믿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저 자신을 믿지 못해서이지요. 자연스러운 것이 제일 좋다고 말하지만, 사진을 찍으려는 낌새만 보여도 곧바로 경직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사진이 훨씬 나은데요?”라고도 말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같지가 않습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제 모습을 찍어서 SNS에 올렸나 봅니다. 그 사진을 보신 분이 실제의 저를 보고 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실물이 훨씬 나은데요?”
사진을 보고 실망했는데 실제로 보니 괜찮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듣고 나서 사진이 엉망이어도 괜찮다 싶었습니다. 실제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자신 있게 포즈를 취합니다. 엉망으로 나오라는 마음으로 말이지요.
사진은 사진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 모습이고, 겉모습보다는 속마음이 아닐까요? 겉으로만 멋진 모습이 아니라, 사진에 찍히지 않는 멋진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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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이영근 신부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은 이를 답해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그렇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이가 아니라, 설령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말을 받아들이는 이가 그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넘어 그를(그의 인격을) 받아들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그 말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받아들인 그 말을 지키는 이, 곧 실행하는 이가 진정 그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버리고 그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곧 그를 믿고 신뢰하고 마음으로 결속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는 말씀은 뒤에 나오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기에서, “말씀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과 신의로 맺어진 예수님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지키다”라는 동사는 “간직하다” “새기다” 혹은 “신경 써서 돌보다”라는 뜻으로, 마음이 담긴 행동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과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전제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곧 내적 일치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이 전제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형제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혹은 그 말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표현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저 자신보다 주님을 앞세울 것입니다. 설령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킬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빛이 되어 오소서. 저를 사르는 빛으로 오소서.
함께 살며, 불살라 태우소서. 저를 태워 세상을 밝히소서.제가 빛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주님!
말씀이 되어 오소서. 살아있는 쌍날칼로 오소서.
함께 살며, 저의 살과 뼈를 가르고, 생각과 속셈을 가르소서.
진정 당신께서는 제 안에 계시고 제 곁에 머무시고 저와 함께 사시오니
제가 말씀이 되고,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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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부활 5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유를 주는 사랑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구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 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내 것을 강요하고 있다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만 남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내적 일치의 사랑,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박병규).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원하는 바를 분별있게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사랑은 온기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야 하며 형제들의 온갖 필요에 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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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송영진 신부님.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3-24).”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과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고......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은 당신의 계명을 우리가 잘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잘 머무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뒤의 1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났든지 못났든지, 의인이든지 죄인이든지 간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 쪽에서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잘 받아서 누리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일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인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계명은 따로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따라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동시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잘 머무르는 방법입니다.
<가르치는 예수님 입장에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천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웃을(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저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는데, 왜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가?”
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가 먼저’ 하는 것이고,
끝끝내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특별히 강조하셨으니
이 계명만 잘 지키면, 즉 이웃 사랑 실천만 잘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되는가?”
만일에 가장 중요한 계명 하나만 실천하고, 다른 계명들은 모두 무시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모든 계명과 모든 가르침’을 전부 다 잘 지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사랑이란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부 다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을 ‘율법주의’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율법주의는 계명들과 율법들을 ‘사랑 없이’ 겉으로만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 지키는 것이고,
속마음으로는 지키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니까, 사랑으로 지킵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는 일은 큰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라는 말씀과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만(신자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다른 사람들은 못 만난 이유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신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있는데(1코린 15,6),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거나 보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박해자들과 안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면, 그 효과는 대단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참된 믿음’을 갖게 만들지 못합니다.
사랑 없이, 어떤 놀라운 일에 압도되는 것만으로 갖는 믿음은
오래 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참된 신앙생활로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믿음’은 ‘사랑’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무덤에서 천사를 보았던 경비병들과 여자들이 좋은 예입니다.
마태오복음 28장을 보면, 경비병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고,
사제들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천사를 보았을 때 두려워하긴 했지만 까무러치지는 않았고,
천사가 전해 주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 만일에 경비병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더라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고, 혹시 알아보았어도 ‘예수님처럼 생긴 사람’을 보았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사랑이 사랑을 알아보게 한다. 믿음이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한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음이 없으면 언제나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한다.”입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들이 스스로 주님과의 연결 통로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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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부활 제5주간 월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걸 즐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 먹는 걸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먹을 것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나누기 전에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처음으로 보여주신 표징도 혼인잔치에서였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회의를 하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꼭 마련하였습니다. 술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하면 고민도 함께 나눌 수 있었고, 새로운 대안을 찾기도 했고, 서운한 감정이 풀리기도 했습니다. 주일 미사가 끝나면 신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구역에서 봉사하기도 했고, 성모회에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수익금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신문사에서도 가끔 직원들과 회식을 합니다. 축일이라서, 휴가를 다녀와서, 성탄이라, 부활이라서 회식을 합니다. 이번 부활은 회식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식당이 문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나친 음주와 늦은 시간까지의 회식은 사목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10시 이전에는 모임을 끝냈습니다. 다음날 업무에도 지장이 없고, 자매님들도 좋아하였습니다. 시골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신자 분들은 전방에서 두릅을 따오기도 했습니다. 유정란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아오기도 했습니다. 먹는데서 인심 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가 계속되면서 소소한 일상이 멈추고 있습니다. 주일 점심이면 신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던 친교실이 텅 비었습니다. 모임과 식사 약속으로 채워졌던 일정표도 텅 비었습니다. 닭갈비가 구워지던 탁자 위에는 의자가 올라가 있습니다. 족발과 삼겹살이 맛있던 소나무집도 벨을 누르면 준비된 음식을 가져갈 수 있을 뿐입니다. 싱싱한 광어가 맛있던 독도야 횟집도 주문한 음식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던 플러싱의 노던대로가 조용합니다. 우리는 식당에서 단순히 음식만 먹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풀었습니다.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정보를 나누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코로나19가 빨리 가고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나누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화려한 성전, 찬란한 문화, 완벽한 교리, 역사와 전통, 체계적인 조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나와 다른 신앙은 없애거나,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무죄한 이를 심판하기도 했고,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지금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배고픈 이의 서러움을 이해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신앙은 강도당한 이웃에게 다가갔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고, 생활이며 실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받은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서 아프리카 국가의 채무를 면제해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공동체에서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지시한 일을 겨우 하는 사람, 지시한 일을 성심껏 하는 사람, 지시한 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더 많은 성과를 내는 사람과 일을 하고 싶어집니다. 시간이 흘러서 함께 일했던 분들의 자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지시한 일을 겨우 하는 사람은 늘 그 자리이고, 눈에도 힘이 없는 것을 봅니다. 성심껏 했던 사람은 새로운 자리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봅니다. 지시한 일은 물론이고 더 많은 성과를 내던 사람은 이제 지시를 하는 자리에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많은 분들이 세례를 받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머리로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지만, 가슴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과 공기는 우리가 너무 쉽게 접하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과 공기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 물과 공기처럼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곳을 보기 때문에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은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자주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 탐욕과 교만’은 우리의 가슴에서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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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주님을 사랑하여 알고 닮아 하나되어 가기 -무지에서의 해방과 자유-
영성생활의 성패成敗는 주님 사랑에 달렸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거의 200년에 걸친 클뤼니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성인 아빠스들 또한 주님 사랑에 탁월한 영적 전사들이었습니다.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우리의 영원한 평생 숙제입니다. 결국은 내가 문제입니다. 나로부터의 내적변화가 우선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영어 말마디가 있습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너 정도만큼의 세상이다)”, 내가 변할 때 주변도 변합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 닮아 하나되어 갈 때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요, 자연스런 내적변화에 참나眞我의 실현입니다.
영성생활은 반복의 습관입니다. 반복의 습관을 통해 제2의 천성이 될 때 비로소 덕德이 됩니다. 하여 끊임없는 사랑의 반복이, 고백이 제일입니다. 저는 하루 7회 성무일도를 위해 성전에 들어가자 마자 무릎을 꿇고 ‘행복기도’를 바친후 잠시 멈췄다 시편 공동전례기도를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 역시 주님께 대한 신망애의 고백입니다. 다시 행복기도, 일명 ‘예닮기도’를 다시 나눕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줄 몰라 불행이요, 살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이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자 기도입니다. 주님을 닮아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참 자유롭고 행복한 참나의 성인聖人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바로 이 행복기도가 오늘 복음과 제1독서에 대한 답을 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마련입니다. 삶-사랑-계명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아버지께 사랑을 받고 만납니다. 참으로 행복기도의 사랑 고백을 통해 주님 사랑을 날로 깊이할 때 저절로 계명 준수요 날로 깊어져 가는 주님과의 사랑입니다. 다시 반복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성자 아드님과 성부 아버지께서 오시어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약속입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시는 분이 우리 영성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인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실 것이다.”
바로 무지에 대한 답은 보호자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말씀을 지킬 때 그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평생 스승이신 보호자 성령께서 부단히 우리를 가르치시고 주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심으로 비로소 한결같은 영성생활임을 깨닫습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선교활동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선교활동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 주님을 알아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있습니다. 이코니온선교에 이어 리스트라에서 두 사도를 신으로 착각하여 제물을 바치려는 무지의 리스트라 사람들에 대한 두 사도의 즉각적 반응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주님이 아닌 세상 헛된 것들에서 행복을 찾기에 삶의 ‘허기虛氣(속이 비어 허전한 기운)’요, 헛된 삶에 여전히 갈증에 허덕이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무지의 인간현실입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만이 우리 모두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합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주님께 대한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가슴의 무한한 허기는 밥이 아닌 주님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무지의 어둠을 밝혀 주시고, 삶의 허기를 채워주시며, 당신을 항구히 사랑하여 알아 닮아 하나 되어 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사랑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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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14,5-18
요한 14,21-26
꽃피는 봄이 오면
최민식 주연의 ‘꽃피는 봄이 오면’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가 끝나니 마치도 한권의 서정적인 시집을 읽고 난 것 같이 머릿속이 환해져오고, 또 길고도 잔잔한 여운이 남더군요.
트럼펫을 전공한 현우는 관현악단 오디션에서 거듭 고배를 마실 뿐 아니라, 떠나가는 사랑도 잡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접은 현우는 강원도 산골 한 중학교 악대부 임시 교사로 가게 됩니다.
낡은 악기, 찢어진 악보, 색 바랜 트로피와 상장들, 전국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하면 강제 해산해야만 악대부, 그러나 현우는 시골 아이들 마음속에서 싹트고 있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제자들을 위해 손수 라면을 끓이는 스승, 그 아이들과 함께 머리 맞대고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라면을 먹는 스승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제자를 돕기 위해 그렇게 강하던 자존심마저 내팽개치고 카바레 밤무대까지 뛰는 스승, 가슴 아픈 제자와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스승, 가끔은 엄격함을 버리고 친구처럼 다가갈 줄 아는 센스를 지닌 스승의 모습,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또 다시 스승의 날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지난 세월 제가 만났던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제가 종사했던 일의 성격상 잘 풀린 아이들보다는 주로 늘 뭔가 꼬인 아이들, 노
력해보지만 안타깝게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방황을 거듭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어제도 최근 가까운 소년원에 오게 된 한 아이가 ‘스승의 날’이라고 편지 한통을 보내왔더군요.
화가 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신부님,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이런 곳에서 편지를 드리니 정말 창피하네요.
신부님과 함께 했던 살레시오...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네요.
신부님, 보고 싶어요. 예전에 함께 외출하던 기억, 등산가서 한잔 하던 기억, 싸우면서 운동하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많이 창피해하는 아이에게 빨리 답장을 써야겠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미안해할 것 하나도 없다. 다 네가 시대를 잘못타고 난 때문이다.
지난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란다.
널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 잊지 말거라...”
스승의 날에는 고마우신 모든 선생님들,
잊지 못할 은사님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 바쳐야 하겠습니다.
열악한 교육 풍토 안에서 우리 선생님들 정말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꼬이고 꼬인 교육제도 아래에서도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선생님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아이들에게 좀 더 다가서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들도 많으시더군요.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춤을 배우는 선생님들, 아이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학습을 제공하기 위해 불철주야 교안작성에 여념 없는 선생님들, 아이들이 너무 좋아 결혼조차 포기하신 선생님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장학금을 내어놓는 선생님들...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은 제자들이 나중에 자라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스승으로부터 듬뿍 영양분을 제공받은 그 제자들은 언젠가 반드시 그 사랑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더 풍성히 나누어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스승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듯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라는 예수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의 소리 없는 눈물 앞에 함께 눈물 흘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 안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많은 결실을 맺도록 지지해주고
격려해주시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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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사도행전 14,5-18
요한 14,21-26
그 사람에게 이르는 길은 그 사람이 나에게 바라는 뜻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동방으로의 여행」 줄거리입니다.
이 소설은 동방국가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순례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순례자 집단은 동방으로 여행을 함께 떠납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레오라는 사람은 순례자 집단의 서번트 즉, 하인으로서 그들을 따라
함께 여행합니다. 레오는 여행길에서 순례자들의 모든 일을 보살핍니다.
그는 하찮은 일을 도맡아 할 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의 지친 영혼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불평이나 하소연을 마다치 않고 들어주며, 순례자들이 이상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줍니다.
레오는 드높은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소설에서 레오는 순례자들이 여행에 차질이 없도록 헌신적으로 봉사합니다.
그래서 레오와 함께하는 동방으로의 여행은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 레오가 순례집단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동안 레오는 한낱 하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그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레오가 사라진 순간부터 순례자들은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동방으로의 여행은 엉망이 되어 버렸으며, 순례자들은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레오는 그들에게 있어서 공기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레오는 순례자들의 여행 과정에서 필요한 욕구를 채워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친 영혼이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 주었고,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순례자들은 레오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순례자 중의 한 사람이 어느 교단의 후원을 받아 자신들의 하인이었던 레오를 찾아 나섭니다.
그는 몇 년을 헤매던 끝에 드디어 레오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색작업을 후원했던 교단으로 인도됩니다.
그 교단에서 그는 순례집단의 봉사자였던 레오가 실제로는 교단의 최고 책임자이자
정신적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출처: 헤르만 헤세, 「동방으로의 여행」, 김종민 시인 블로그]
레오는 순례자 집단에서 공기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교단의 정신적 지도자가 순례자들을 맞으려 찾아온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상대의 욕구를 채워주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 누군가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밥을 먹고 싶은데 물만 주면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만 강요하는 그 사람을
밀쳐내고 말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순례자 중에서 레오를 만나러 온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람이 레오의 욕구를 채워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레오를 만나러 가는 길은 레오의 욕구를 채워주는 길입니다.
즉, 자신도 다른 사람들에게 공기와도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레오의 욕구를 채우는 공동체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이것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욕구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공기요, 양식이 되어 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분의 봉사를 원치 않았습니다.
인간들이 그분을 만나려면 그분의 뜻을 따라주어야 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만나러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산 것처럼 사는 것이 끔찍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계명의 길로 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면 당신을 만날 것이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뜻을 따르지 않으며 자기 뜻만 따르기를 강요한다면 그 사람을 떠나십시오.
여러분은 이용만 당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뜻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누군가를 만날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진정으로 만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바로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아서 부모가 원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아기 때는 부모를 만나고 있지만, 진정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원하는 어른이 되어 부모가 원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진정으로 부모를 만납니다.
예수님도 그분의 뜻을 완전히 따라주기 전에는 그분을 온전히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 행복입니다.
참 행복 자체이신 분을 만나는 행복을 원한다면 그분의 계명인 사랑부터 자신 안에서 완성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그분께서 보내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랑의 열매가 맺히고 그렇게 주님을 만날 길이 열립니다.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제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연피정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토요일까지 복음 묵상이 없겠습니다.
다녀와서 주일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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