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책)/ 노거수이야기 · 29
감분마을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바라볼 때마다 선조先祖 정신 되새기며......
노거수이야기 · 29 감분마을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사람은 대자연 속에서 자연을 다스리며 살아간다. 한 덩이 돌, 한 그루의 나무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정정한 저 행목杏木, 낙락落落한 저 홰나무는 얼마나 이 마을의 운치를 돋구었으며 바라보는 그 마음 얼마나 푸르게 하였을까.······ 행목의 고향은 단성丹城 배양촌培養村이요, 삼우당三憂堂 문선생文先生께서 수습收拾하신 나무의 핏줄인데, 거금 2백여 년 전 선생의 후손이신 화산華山 문경현文景賢웅이 모선유후慕先裕後의 뜻으로 묘목을 옮겨와 아우 경희景熙웅이 심었던 유서 깊은 정자이다.······“ 단성은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이요, 삼우당 문선생은 이 땅에 목화씨를 처음 덜여온 고려 말기 문신文臣 문익점文益漸(1329~1398) 선생을 말한다. 공민왕 12년(서기 1363)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나라에 갔다가 붓대롱 속에 목화씨를 넣어 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시험재배에 성공, 일부 양반들만 수입해 쓰던 목면 목면을 서민층까지 보급한 주인공이다. 요약하면, 2백여 년 전 문경현이란 노인이 선조인 문익점 선생의 손길이 서린 은행나무의 묘목을 옮겨와 동생 경희로 아여금 심게 했다는 내용이다. 삼계동 감분마을(甘分)마을의 정자나무 아래 건립된 ‘행단송비杏壇頌碑’의 글이다. 선조의 효성과 애민정신愛民精神 상징하는 은행나무 종가宗家에 다녀오는 길이었는지 일부러 걸음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문경현이란 분이 산청 단성면까지 가서 묘목을 파 온 뜻은 ‘모선유후慕先裕後’라는 말 속에 들어있다. 예로부터 은행나무는 학문을 상징하는 데다 효자孝子로 유명했던 문익점 선생이니, 후손들이 귀감으로 삼으라는 뜻이었으리라. “맞습니다. 우리 문중은 충선공忠宣公(문익점 선생의 시효) 할아버지 셋째 아드님인 증贈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실中實공을 파조派祖로 모신 남평 문씨 의안공파毅安公派입니다. 저의 8대조 할아버지께서 단성에서 감분마을로 처음 입향入鄕하셨죠. 손자 네 분을 두어 첫째 익瀷과 둘째인 순淳 할아버지가 감분마을에 뿌리를 내렸고, 셋째 학㶅, 넷째 설說 두 할아버지가 지금의 부산 강서구 가락동으로 분가해 후손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김해문중의 종가인 감분마을에 선조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표상表象을 물려주고자 하는 뜻에서 5대조 형제분이 은행나무를 옮겨 오신 거죠.”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문대식(56 · 경기도 성남시)씨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비문碑文을 읽고 좀 더 자세한 사연을 알아보려 마을의 후손들을 수소문하다 만난 문원식(48)씨의 형님이다. 족보를 형님인 대식씨가 가지고 있다는 말에, 멀리 성남으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육군 대위로 예편한 후 향토예비군 중대장을 오래 지내고 지난 6월 퇴임했다는 그는, 가훈과 선조들의 묘소 위치도位置圖, 관혼상제 가법家法 등을 정리해 친지들에게 나눠주는 등 남다른 숭조정신을 갖고 있다. 고향 풍경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은행나무라며, 멀리 떠나 살다보니 새록새록 옛 생각에 젖을 때가 많다고 했다. 은행나무 옆의 ‘행단송비’는 30여 년 전인 지난 73년 문씨 문중 후손들과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 당시만 해도 주민 대부분이 문씨들이었다는 점을 대변하는 정황이다. “마을 주변의 문씨 문중 선영先塋이 8대조에 이르는 것과 달리, 우리 집안은 위로 올라가도 5대조의 묘소까지만 근처에 있습니다. 으리가 마을에 들어온 지는 문씨들보다 백 년쯤 늦었다는 뜻이지요. 그 후로 분성 배씨와 청주 송씨들이 들어와 어울려 살았습니다.” 마을 주민 허형석(55)씨는 주민들이 감분마을로 옮겨 온 시기를 설명하며 “그러나 이제는 그저 옛 이야기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현재는 문씨가 대여섯 집 남았을 뿐 토박이 문중의 후손들 대부분이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부산, 서울 등으로 멀리 떠난 집들도 있고, 더러는 인근에 조성된 북구 신도시의 아파트로 옮겨 갔다고 한다. 대신 골장들이 하나 둘 들어와 마을을 차지해, 현재는 마을이라기보다 공단工團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은행나무가 선 곳도, 도로변이라 옹색해 보이지는 않지만 사방은 이미 공장으로 둘러싸인 지 오래다. “참 신통神通한 나뭅니다. 열핏 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은행나무 밑자리가 너무 좁아요. 주변이 모두 아스팔트길이고. 옆에는 회화나무까지 서 있고요. 그런데도 가을에 열매가 익으면 나무 전체가 빨개요. 토종土種이라서 열매 크기가 작은 대신 엄청나게 달리거든요. 은행은 익으면 노랗게 되는데, 이 나무 열매는 붉은 색이 도는 노란색이라서 멀리서 보면 붉게 보이지요. 아마도 좀 특이한 종자가 아닌가 싶어요.” 허씨는 주변에 ‘신랑’ 구실을 할 숫나무도 없고 영양 흡수가 불충분한데도 가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를 신기해했다. 은행나무는 키가 20m, 가슴높이의 직경은 110cm이다. 수관폭은 동서 15m 남북 17m로, 나무 크기에 비해서는 넓지 않은 편이다. 키가 훤칠하게 솟다 보니 바람의 피해를 많이 입어, 끝이 온전한 가지가 별로 없는 탓이다. 지상 1,5m 높이에 마치 뿔처럼 양쪽으로 마주 난 두 깨의 가지가 있고 그 위로 군데군데 분지分枝가 이루어져,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수형樹形을 보인다. “당산나무는 따로 있었다 카이끼네요.” 은행나무 동쪽에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나란히 섰다. ‘누웠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기우뚱한 자세다. 걸어서도 나무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지면과의 각도가 40도도 채 안 된다. 따라서 나무의 높이는 실제 키보다 훨씬 낮은 10m, 가슴높이의 직경은 70cm 정도이다. 나무를 심을 때 간혹 한 그루는 세우고 한 그루는 눞혀 심어 암수(雌雄자웅)를 상징하기도 했다지만, 이곳의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는 그런 경우는 아니라고 한다. “옛날에는 기울기가 심하지 않았지요. 아이들이 오르내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쓰러져 저렇게 변했습니다. 밑을 받쳐주지 않았다면 벌써 넘어져 죽었을 겁니다.” 허씨의 말처럼, 회화나무 둥치는 커다란 쇠기둥에 의지하고 있다. 은행나무와 달리, 회화나무에 대해서는 별다른 내력도 전해2지지 않는다. 굵기로 보아 은행나무보다는 수령이 낮아 보인다고 하자, 늦게 자리를 함께 한 문원식씨까지 나서서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회화나무는 어느 정도 굵어지고 나면 성장 속도가 느려져서 그렇지, 실제 나이는 은행나무와 비슷할 거라는 의견이다. “원래 이곳에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더 있었습니다. 약 30년 전에 죽었지요. 길가 쪽에 있다 보니 지나가는 차량에 시달려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때만 해도 주민들이 이런 나무에 대한 인식認識이 부족해 애써 보살피지 않은 탓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였고······.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죠.” 이들이 회화나무와 은행나무를 ‘동갑내기’로 짐작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죽은 회화나무를 포합한 세 그루가 공간空間에 알맞게 배치됐던 것으로 미루어, 애당초 자리를 정해 함께 심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지역의 노거수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안타까운 경우가 더러 있다. 어느 고택古宅의 안마당에 섰거나 집성촌의 동구에 선 나무들은, 대부분 이른바 ‘명목名木’들이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요즘 말로 ‘기념식수’ 격이다. 심을 당시에는 틀림없이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사연은 잊히고 나무만 남아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감분마을 회화나무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은행나무라도 연원이 분명히 전해지고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사라진 회화나무를 기억해 낸 문씨는 뜬금없이 “그래도 이 나무들은 당산나무는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유가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고사한 또 다른 노거수가 떠오른 것이었다. “마을 뒷산에 당산나무가 있었다 카이끼네요. 소나문데, ‘당산 할배’라고 불렀습니다. 책에도 나오는 유명한 ‘정이품송’을 닮았는데, 그보다 더 잘생겼어요. 그런데 태풍에 쓰러져 죽고 말았지요.” 허씨도 맞장구를 쳤지만, ‘당산 할배’가 고사한 시기에 대해서는 말이 서로 어긋났다. 허씨는 ‘40년 쯤’, 문씨는 ‘30년 쯤’ 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할배’가 ‘할매’되고 우물도 있었다는데 “아무튼, 30년에서 40년 전인 것은 틀림없고, 우리야 어릴 때지만, 새로 당산나무를 정할라고 어른들이 의논을 많이 했지요. 결국 동네 안골짝(안 골짜기)에 있는 포구나무(팽나무의 속칭)로 정해졌는데, 포구나무는 열매를 맺으니까 할배라고 하기는 좀 뭣하지. 그래서 ‘당산할매’로 모셨습니다. 지금도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자정子正에 당산제를 지냅니다. 당산제는 마을이 생기고부터 아마 한 해도 빼먹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정성精誠은 옛날보다 못하지요.” 허씨의 말을, 문씨가 받았다. “맞습니다. 형님. 예전에는 제관祭官이 되면 반드시 웅동샘에서 목욕제계하고 나서 당산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안하지 않습니까? 며칠 전에 웅동샘에 한 번 가봤습니다. 새미는 자꾸 퍼서 써야 되는데, 벌써 얼쭈 몬쓰게 됐습디다.” 대동면 괴정리 회화나무나 한림면 신천리 이팝나무처럼, 마을의 수호목과 우물이 함께 신성시神聖視되는 곳이 적지 않다. 이곳 감분마을도 예전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웅동샘은 ‘웅덩이’ 혹은 ‘옹달샘’이 변해서 굳은 말로 보인다. 샘은 14호 국도 건너편 산기슭에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바로 산길을 올랐겠지만 지금은 마을 앞으로 나가 삼계삼거리(지금은 삼계사거리가 되었다.)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차량들이 과속過速하는 국도변을 한참 걸어야 하는데, 그것도 한 겨울에 찬물 목욕이라니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겠다. “어렵지 않으면, 그것을 어찌 정성精誠이라 하겠습니까. 민속신앙에 대한 관념이 달라진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특히 우리 마을은 70년대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호응이 높았던 곳입니다. ‘미신迷信’을 다른 마을보다 일찍 타파한 셈이지만, 당산제는 굳이 미신이랄 것도 없어요. 당산을 믿는다기보다 ‘올 한 해도 무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마음속의 부정不淨을 씻어낸다’는 의례儀禮로 봐야지요.” 문대식씨는, 그런 점에서 마을의 은행나무 관리에 더 정성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당산나무에 손 모으며 막연히 발복發福을 빌고 액막이를 바라는 대신, 선조의 손길이 묻은 노거수를 바라보며 그 속에 담긴 가르침과 기대를 되새길 때 더 큰 복을 지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산청군 단성면의 문익점 선생 생가터 옆에는, 감분마을 은행나무의 모근母根을 지닌 6백여 년된 은행나무 노거수가 살아 있다고 한다. 선생의 생존시기와 비슷한 수령樹齡이다. 공민왕 9년(서기 1360년) 문과에 급제한 문익점 선생은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으로 공직에 나왔으니, 문씨 문중의 후손이 아니라도 감분마을 은행나무와 김해의 인연은 각별하다할 만하다.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 (2008년 8월 발행. 김해시) |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책)/ 노거수이야기 · 29 감분마을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바라볼 때마다 선조先祖 정신 되새기며...... 2020.1.20. 노거수 탐사 15차/김해시 삼계동 은행나무와 회화나무(1차) 2023.11.29. 노거수 탐사 2차/은행나무와 회화나무 겨울나무로 만나다.(2차) |
2023.11.29 경남 김해(2차)
야탐 노트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를 보러 갑분마을로 가다.
은행나무 잎은 거의 떨어져 바닥에 가득이고 회화나무는 잎을 약간 달고 있지만 겨울나무로 만나다.
마을 뒤쪽엔 길이 생겼고,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서 환경이 완전 변했다.
내년엔 은행잎이 노랗게 달렸을 때 만나기를 빌어본다.
개발하다보면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만 남게 되겠지.
새집이 아니고 아마도 나무가 힘들어 생기는 괴목이 아닌가 한다.
‘행단송비杏壇頌碑’
앞면에는 한자로' 杏壇頌碑'라 새기고 뒷면에는 은행나무에 관한 사연을 담았다.
작고한 지역 한학자 오천吾泉 김정식 선생의 글과 글씨이다.
회화나무↓
마을주변
마을 뒤쪽에 길이 생겼다.
오른편으로 아파트가 들어섰다.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책)/ 노거수이야기 · 29
감분마을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바라볼 때마다 선조先祖 정신 되새기며......
노거수이야기 · 29 감분마을 ‘은행나무’와 ‘회화나무’
바라볼 때마다 선조先祖 정신 되새기며...... |
“사람은 대자연 속에서 자연을 다스리며 살아간다. 한 덩이 돌, 한 그루의 나무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정정한 저 행목杏木, 낙락落落한 저 홰나무는 얼마나 이 마을의 운치를 돋구었으며 바라보는 그 마음 얼마나 푸르게 하였을까.······ 행목의 고향은 단성丹城 배양촌培養村이요, 삼우당三憂堂 문선생文先生께서 수습收拾하신 나무의 핏줄인데, 거금 2백여 년 전 선생의 후손이신 화산華山 문경현文景賢웅이 모선유후慕先裕後의 뜻으로 묘목을 옮겨와 아우 경희景熙웅이 심었던 유서 깊은 정자이다.······“ 단성은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이요, 삼우당 문선생은 이 땅에 목화씨를 처음 덜여온 고려 말기 문신文臣 문익점文益漸(1329~1398) 선생을 말한다. 공민왕 12년(서기 1363)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나라에 갔다가 붓대롱 속에 목화씨를 넣어 와서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시험재배에 성공, 일부 양반들만 수입해 쓰던 목면 목면을 서민층까지 보급한 주인공이다. 요약하면, 2백여 년 전 문경현이란 노인이 선조인 문익점 선생의 손길이 서린 은행나무의 묘목을 옮겨와 동생 경희로 아여금 심게 했다는 내용이다. 삼계동 감분마을(甘分)마을의 정자나무 아래 건립된 ‘행단송비杏壇頌碑’의 글이다. 선조의 효성과 애민정신愛民精神 상징하는 은행나무 종가宗家에 다녀오는 길이었는지 일부러 걸음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문경현이란 분이 산청 단성면까지 가서 묘목을 파 온 뜻은 ‘모선유후慕先裕後’라는 말 속에 들어있다. 예로부터 은행나무는 학문을 상징하는 데다 효자孝子로 유명했던 문익점 선생이니, 후손들이 귀감으로 삼으라는 뜻이었으리라. “맞습니다. 우리 문중은 충선공忠宣公(문익점 선생의 시효) 할아버지 셋째 아드님인 증贈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실中實공을 파조派祖로 모신 남평 문씨 의안공파毅安公派입니다. 저의 8대조 할아버지께서 단성에서 감분마을로 처음 입향入鄕하셨죠. 손자 네 분을 두어 첫째 익瀷과 둘째인 순淳 할아버지가 감분마을에 뿌리를 내렸고, 셋째 학㶅, 넷째 설說 두 할아버지가 지금의 부산 강서구 가락동으로 분가해 후손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김해문중의 종가인 감분마을에 선조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표상表象을 물려주고자 하는 뜻에서 5대조 형제분이 은행나무를 옮겨 오신 거죠.”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문대식(56 · 경기도 성남시)씨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비문碑文을 읽고 좀 더 자세한 사연을 알아보려 마을의 후손들을 수소문하다 만난 문원식(48)씨의 형님이다. 족보를 형님인 대식씨가 가지고 있다는 말에, 멀리 성남으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육군 대위로 예편한 후 향토예비군 중대장을 오래 지내고 지난 6월 퇴임했다는 그는, 가훈과 선조들의 묘소 위치도位置圖, 관혼상제 가법家法 등을 정리해 친지들에게 나눠주는 등 남다른 숭조정신을 갖고 있다. 고향 풍경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은행나무라며, 멀리 떠나 살다보니 새록새록 옛 생각에 젖을 때가 많다고 했다. 은행나무 옆의 ‘행단송비’는 30여 년 전인 지난 73년 문씨 문중 후손들과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 당시만 해도 주민 대부분이 문씨들이었다는 점을 대변하는 정황이다. “마을 주변의 문씨 문중 선영先塋이 8대조에 이르는 것과 달리, 우리 집안은 위로 올라가도 5대조의 묘소까지만 근처에 있습니다. 으리가 마을에 들어온 지는 문씨들보다 백 년쯤 늦었다는 뜻이지요. 그 후로 분성 배씨와 청주 송씨들이 들어와 어울려 살았습니다.” 마을 주민 허형석(55)씨는 주민들이 감분마을로 옮겨 온 시기를 설명하며 “그러나 이제는 그저 옛 이야기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현재는 문씨가 대여섯 집 남았을 뿐 토박이 문중의 후손들 대부분이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부산, 서울 등으로 멀리 떠난 집들도 있고, 더러는 인근에 조성된 북구 신도시의 아파트로 옮겨 갔다고 한다. 대신 골장들이 하나 둘 들어와 마을을 차지해, 현재는 마을이라기보다 공단工團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은행나무가 선 곳도, 도로변이라 옹색해 보이지는 않지만 사방은 이미 공장으로 둘러싸인 지 오래다. “참 신통神通한 나뭅니다. 열핏 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은행나무 밑자리가 너무 좁아요. 주변이 모두 아스팔트길이고. 옆에는 회화나무까지 서 있고요. 그런데도 가을에 열매가 익으면 나무 전체가 빨개요. 토종土種이라서 열매 크기가 작은 대신 엄청나게 달리거든요. 은행은 익으면 노랗게 되는데, 이 나무 열매는 붉은 색이 도는 노란색이라서 멀리서 보면 붉게 보이지요. 아마도 좀 특이한 종자가 아닌가 싶어요.” 허씨는 주변에 ‘신랑’ 구실을 할 숫나무도 없고 영양 흡수가 불충분한데도 가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를 신기해했다. 은행나무는 키가 20m, 가슴높이의 직경은 110cm이다. 수관폭은 동서 15m 남북 17m로, 나무 크기에 비해서는 넓지 않은 편이다. 키가 훤칠하게 솟다 보니 바람의 피해를 많이 입어, 끝이 온전한 가지가 별로 없는 탓이다. 지상 1,5m 높이에 마치 뿔처럼 양쪽으로 마주 난 두 깨의 가지가 있고 그 위로 군데군데 분지分枝가 이루어져,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수형樹形을 보인다. “당산나무는 따로 있었다 카이끼네요.” 은행나무 동쪽에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나란히 섰다. ‘누웠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기우뚱한 자세다. 걸어서도 나무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지면과의 각도가 40도도 채 안 된다. 따라서 나무의 높이는 실제 키보다 훨씬 낮은 10m, 가슴높이의 직경은 70cm 정도이다. 나무를 심을 때 간혹 한 그루는 세우고 한 그루는 눞혀 심어 암수(雌雄자웅)를 상징하기도 했다지만, 이곳의 은행나무와 회화나무는 그런 경우는 아니라고 한다. “옛날에는 기울기가 심하지 않았지요. 아이들이 오르내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쓰러져 저렇게 변했습니다. 밑을 받쳐주지 않았다면 벌써 넘어져 죽었을 겁니다.” 허씨의 말처럼, 회화나무 둥치는 커다란 쇠기둥에 의지하고 있다. 은행나무와 달리, 회화나무에 대해서는 별다른 내력도 전해2지지 않는다. 굵기로 보아 은행나무보다는 수령이 낮아 보인다고 하자, 늦게 자리를 함께 한 문원식씨까지 나서서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회화나무는 어느 정도 굵어지고 나면 성장 속도가 느려져서 그렇지, 실제 나이는 은행나무와 비슷할 거라는 의견이다. “원래 이곳에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더 있었습니다. 약 30년 전에 죽었지요. 길가 쪽에 있다 보니 지나가는 차량에 시달려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때만 해도 주민들이 이런 나무에 대한 인식認識이 부족해 애써 보살피지 않은 탓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였고······.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죠.” 이들이 회화나무와 은행나무를 ‘동갑내기’로 짐작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죽은 회화나무를 포합한 세 그루가 공간空間에 알맞게 배치됐던 것으로 미루어, 애당초 자리를 정해 함께 심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지역의 노거수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안타까운 경우가 더러 있다. 어느 고택古宅의 안마당에 섰거나 집성촌의 동구에 선 나무들은, 대부분 이른바 ‘명목名木’들이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요즘 말로 ‘기념식수’ 격이다. 심을 당시에는 틀림없이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사연은 잊히고 나무만 남아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감분마을 회화나무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은행나무라도 연원이 분명히 전해지고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사라진 회화나무를 기억해 낸 문씨는 뜬금없이 “그래도 이 나무들은 당산나무는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유가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고사한 또 다른 노거수가 떠오른 것이었다. “마을 뒷산에 당산나무가 있었다 카이끼네요. 소나문데, ‘당산 할배’라고 불렀습니다. 책에도 나오는 유명한 ‘정이품송’을 닮았는데, 그보다 더 잘생겼어요. 그런데 태풍에 쓰러져 죽고 말았지요.” 허씨도 맞장구를 쳤지만, ‘당산 할배’가 고사한 시기에 대해서는 말이 서로 어긋났다. 허씨는 ‘40년 쯤’, 문씨는 ‘30년 쯤’ 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할배’가 ‘할매’되고 우물도 있었다는데 “아무튼, 30년에서 40년 전인 것은 틀림없고, 우리야 어릴 때지만, 새로 당산나무를 정할라고 어른들이 의논을 많이 했지요. 결국 동네 안골짝(안 골짜기)에 있는 포구나무(팽나무의 속칭)로 정해졌는데, 포구나무는 열매를 맺으니까 할배라고 하기는 좀 뭣하지. 그래서 ‘당산할매’로 모셨습니다. 지금도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자정子正에 당산제를 지냅니다. 당산제는 마을이 생기고부터 아마 한 해도 빼먹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정성精誠은 옛날보다 못하지요.” 허씨의 말을, 문씨가 받았다. “맞습니다. 형님. 예전에는 제관祭官이 되면 반드시 웅동샘에서 목욕제계하고 나서 당산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안하지 않습니까? 며칠 전에 웅동샘에 한 번 가봤습니다. 새미는 자꾸 퍼서 써야 되는데, 벌써 얼쭈 몬쓰게 됐습디다.” 대동면 괴정리 회화나무나 한림면 신천리 이팝나무처럼, 마을의 수호목과 우물이 함께 신성시神聖視되는 곳이 적지 않다. 이곳 감분마을도 예전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웅동샘은 ‘웅덩이’ 혹은 ‘옹달샘’이 변해서 굳은 말로 보인다. 샘은 14호 국도 건너편 산기슭에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바로 산길을 올랐겠지만 지금은 마을 앞으로 나가 삼계삼거리(지금은 삼계사거리가 되었다.)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차량들이 과속過速하는 국도변을 한참 걸어야 하는데, 그것도 한 겨울에 찬물 목욕이라니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겠다. “어렵지 않으면, 그것을 어찌 정성精誠이라 하겠습니까. 민속신앙에 대한 관념이 달라진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특히 우리 마을은 70년대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호응이 높았던 곳입니다. ‘미신迷信’을 다른 마을보다 일찍 타파한 셈이지만, 당산제는 굳이 미신이랄 것도 없어요. 당산을 믿는다기보다 ‘올 한 해도 무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마음속의 부정不淨을 씻어낸다’는 의례儀禮로 봐야지요.” 문대식씨는, 그런 점에서 마을의 은행나무 관리에 더 정성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당산나무에 손 모으며 막연히 발복發福을 빌고 액막이를 바라는 대신, 선조의 손길이 묻은 노거수를 바라보며 그 속에 담긴 가르침과 기대를 되새길 때 더 큰 복을 지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산청군 단성면의 문익점 선생 생가터 옆에는, 감분마을 은행나무의 모근母根을 지닌 6백여 년된 은행나무 노거수가 살아 있다고 한다. 선생의 생존시기와 비슷한 수령樹齡이다. 공민왕 9년(서기 1360년) 문과에 급제한 문익점 선생은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으로 공직에 나왔으니, 문씨 문중의 후손이 아니라도 감분마을 은행나무와 김해의 인연은 각별하다할 만하다.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 (2008년 8월 발행. 김해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