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보내면서
이흥근
올해는 코로나로 외부 활동과 자주 나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요양원과 요양병원에 계시다 올 7월에 돌아가셨다. 코로나 환자가 점점 늘어나 형제가 마련한 가족묘에 안장하였다. 요양병원에 계실 때 자주 가 뵙지는 못했지만, 점점 기력이 쇠하여 나중에는 죽을 도깨비방망이로 과일과 같이 갈아서 이틀에 한 번 네 남매가 번갈아 가며 요양병원에 갔다. 형과 동생들은 카톡으로 어머니의 건강 상태를 서로 교환하고 알려주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외삼촌도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칠 남매 중 여섯째로 우리 집과 인근에 있는 인천 서구 한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육 남매를 두었다. 둘째는 3살 때 홍역으로 이승을 떠났다. 넷째는 초등학교 때 동네 아이들과 인근에 있는 연못에서 물놀이하다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파밭을 매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뛰어오며 동생이 물에 빠졌다고 하여 어머니가 맨발로 뛰어갔던 일이 생각난다. 자식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나와 같이 어머니는 인근 앞산에 동생 묘지에 매일 같이 갔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당하리 신기 마을은 종친이 80%로 집성촌이다. 어려운 가운데 서로 도와가며 살았다. 어머니는 12 반상의 제사와 농사를 지으며 가족을 위하여 헌신하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어머니는 십여 년 전 김포에 살 때 인근에서 음식점 하는 종친 영이네와 친척 집에서 밥 푸는 일을 도와주었다. 시간이 나면 마을회관에 가서 동네 어르신들과 이야기 를 나누고는 했다.
그래도 남은 배추, 열무, 감자, 고구마, 채소 등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내가 오이와 열무를 지게로 천주교 공동묘지 언덕을 넘을 때는 숨이 차고 힘이 들었다. 백석 정류장까지는 10리를 가야 하는데 몇 번을 쉬고 갔다.
백석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어머니를 따라 인천 동인천 시장에 갔다. 점심때라 배가 고프다. 채소를 다 팔고 난 뒤 어머니와 시장 골목을 한참 지나서 허름한 상인들이 즐겨 찾는 우동 식당에 들어갔다. 오후 2시가 넘어 배가 고프지만, 가격이 저렴하며 맛도 좋았다. 맛있게 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어머니 일기
오늘도 이른 아침 정화수를 장독대에 떠 놓고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
집 주변 한 바퀴 돌아보고 빨래하고 목간하고
집 청소와 화분도 드려놓고 경로당 갈 준비를 한다
개가 새끼를 낳으려고 해서 산실을 만들어 주고
사다 놓은 미역을 담가 놓았다
그리고 경로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강아지는 4마리를 낳았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주니 홀쭉한 몸으로 먹는다
짐승도 제 새끼 건드릴까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뜨거운 모성애는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다.
아침 운동으로 수도권 제일순환고속도로 교각 밑으로 간다. 나는 어머니에게 삭막한 철조망 이었는데 어머니는 철조망을 감마주는 나팔꽃 이었다. 어제는 군데군데 몇 송이 나팔꽃이 피었는데, 오늘은 여러 송이가 피었다.
파란 나팔꽃이 트럼펫을 불며 환영한다. 바람에 리듬을 맞춰 덩굴손을 흔들며 춤 추며 트럼펫을 분다. 철조망 끝까지 올라가 덩굴손을 뻗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춘다. 어떤 놈은 연인처럼 얼싸안고 허공에 대고 손짓한다. 계속해 트럼펫을 불어댄다. 나를 환영하는 것 같다는 것은 착각일까 , 그래도 하늘을 올라가는 기분이다.
삭막하고 무뚝뚝한 철조망이 나팔꽃 잎 파리와 꽃에 덮여 어느새 환해졌다. 걸어가는 내 발자국이 트럼펫 소리에 맞추어 신이 나고 가볍다. 봄에 삭막한 철조망이 살아나는 것 같다. 바람이 부니 나팔꽃이 시원한가보다 잎사귀를 흔든다.
김포 가족묘에 어머니를 아버지 옆으로 모시는 날 종친과 가족들이 국화를 뿌리며 저세상에 서는 편안히 계시기를 기원하였다.
원각사에서 49재를 지냈지만 허전하다. 어머니가 남긴 일기를 보며 좀 더 살아 계실 때 잘 해드렸을 것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는 내가 어머니의 편안을 위하여 어머니가 자식에 한 것처럼 나도 어머니를 위하여 빌겠다.
늘 자녀들에게 우애를 말하고, '참는 것인 인생이다.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