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박동조가 뭐라꼬 했는데...
궁금하여
부산홈페이지에 드가볼라케도 회원가입절차가 복잡하여 그만두고
이동순과
유근준의 글을 읽어봐도 정확히 뭐땀시 그러는 줄 잘 모르겠다꼬 하여
아래에
박동조가 부산홈페이지에 3회에 걸쳐 올린 글을
한번에
전재하니 한번들 읽어보시고 간단한 댓글들 달아주시면 고맙겠시유.
참고로
부산동기회 홈페이지에서 검색한 박동조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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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 중 1학년 3반, 2학년 반, 3학년 2반 -출신학교: 청량 초등학교, 청량 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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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역: 울산 - 직장 AT&T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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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高
출신 Complex (1)
나는
학교에 다닐 동안 상고 출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우여곡절 끝에 한국 산업은행에 취직이 되어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상고 출신에 대한 complex가 생기기 시작되었고 지금도 이 complex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산업은행에 입행했을 당시에는 대학 출신과 상고 출신을 거의 동시에 모집했고 은행 연수도 함께 했다. 대학 출신은 대부분 서울대학 출신이었고
지방대학 출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부산지점에서 시작한 나의 은행생활은 대부분의 상고 출신과 마찬가지로 계산담당 (상고 출신들은 한직으로
취급된 출납, 계산, 서무등로 시작한 것으로 기억난다)으로 시작했고 2년여 후에 대부(대출) 부서로 옮겼고 은행을 그만 둘 때까지 같은 일을
계속했다.
그
당시에 산업은행은 대학출신과 고등학교 출신 차이를 공식적으로 6년을 두고 있었다. 숫자상으로는 사실상 2년이다 (대학을 졸업하려면 4년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 그리고 나처럼 야간 대학을 졸업하면 1년 경력을 더 추가시켜주었기 때문에 그 차이는 1년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상고 출신은 입행 후에 공부를 더 해서 학위를 받아도 영원한 상고 출신으로 남게 되는 시기였다. 상고 출신은 승진과 보직에서 항상 설음의
대상이다 (물론 예외가 있지만). 그 당시 국책은행 (특히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에서 상고출신의 서러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이때부터
나는 상고 출신인 나 자신에 대한 complex (열등감이라고 표현해도 무난할 것 같다)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 상고 출신이라서 상고 출신
complex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고졸 출신의 complex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정식(?)으로 대학을
졸업한 동기들은 내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고졸
출신의 서러움 속에 나는 D 대학교 야간 법과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사실 공부다운 공부 한번 하지 못하고 학위를 받은 것이다. 때마침 은행
대출거래처인 K 회사 상무로 있던 고등학교 선배를 만난 것이 내 남은 일생을 고난의 길로 몰고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내게 은행에서 받고
있던 월급보다 훨씬 많은 급여와 경리과장 직책 조건으로 자기 회사로 올 것을 제안했다. 그때 나는 상고 출신이라는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일념
때문에 가족들의 강력한 만류에도 과감히(?) 은행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한 마디로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졸 출신의
딱지(?)는 뗐지만 개인회사의 직장생활은 은행에 비할 수 없이 힘들고 어려웠다.은행에 있을 때에는 명절에 떡값(?) 을 받았는데, 이제는 같이
근무하던 은행 직원들에게 떡값을 전하러 다녀야 했고, 세무서, 구청, 동사무소, 경찰서, 신문기자 등 허리 굳힐 것밖에 없었다. 일요일이고,
밤이고 상무가 지시하면 일을해야만 했다. 처음부터 이 길로 들어섰다면 이것이 별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高 자세(?)의 산업은행에서
수년을 근무한 내게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1년 후 나는 경리과장 겸 총무차장으로 승진했지만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그때 비로소 산업은행이
얼마나 좋은 직장이 었는 지 깨닫고 후회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여기서 나는 간호사인 아내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솔직히
이민의 결심은 현실도피 외에 특별한 계획 없이 하게 된 것이다.
끝까지
은행에 남은 상고 출신 입행 동기들은 비교적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부장까지 승진을 못 하고 명퇴한 동기들도 있지만,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삶을 살아오고 있음을 듣고 보게 된다. 상고 출신에 대한 나의 complex가 결국 나를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오기가 인생을
망친다는 말을 내가 기억했어야 할 것을…..(다음 자유게시판에 계속)
미국
뉴져지에서 박 동조
商高
출신 Complex (2)
현실
도피 생각으로 미국에 이민 온 지 30여 년이 지나고 있다. 미국에 와서도 상고 complex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 30연년간 나는 한번도
부산상고 출신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누가 물으면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답할 뿐이다. 그만큼 나는 상고 출신에 대한 피해 망상증
환자다. 물론 이 complex의 문제의 원인은 학교가 아니고 나 자신이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은행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직장에 들어갔다면 이 complex를 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
와서도 나의 환경이 이 complex를 버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여러 과정을 거처 학교로서는 마지막인 펜실베니아 대학교
(University of Pennsylvania)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 (30년 전)에는 한국학생이 얼마
되지 않을 때다. 한국에서 온 학생들은 거이다 서울대학교 출신이었다. 나이 차이도 있었지만 상고 출신이 탈로(?)날까 봐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학교를
마친 후 가진 직장이 지금 일하고 있는 AT&T 연구소다. 당시에는 130만 직원과 15천 명의 연구소 (AT&T Bell
연구소)직원을 가진 세계 최대의 기업체였다. 연구소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었지만 내가 일하던 건물에 한때 7,500명의 연구소 직원이
있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 이 연구소에는 한국사람이 3명 있었는 데 모두 서울대학교 출신이었고 명문고 출신이다. 내가 상고 출신일 줄은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부산에서 학교를 나왔다고 했더니 당장 부산고냐 경남고냐 물었다. 부산에서 별로 이름없는 고등학교라고 대답하여
위기(?)를 넘겼다. 후에 한국 직원이 40여 명으로 늘었지만 대다수가 명문고 출신이었다. 상고 출신이 들통날까봐 여기서도 가능한 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상고
출신의 complex는 직장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직면하게 되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온지 2년여 후에 이곳에 있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전에는 1시간 반을 운전하여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로 다녔는데 너무 멀고 1주일에 한번 밖에 교회에 갈 수 없어 이곳 교회로 옮기게 된 것이다.
100명 정도의 시골 이민 교회인데 6명의 경기고 출신과 3명의 서울고 출신들이 교회의 주축이었다. 이들 중에는 3명의 의사와 5명의 공학박사가
있었고 훗날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통신(KT) 사장을 거쳐 현역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경남고와 부산고출신도 한명씩 있는 세상적으로
말해 엘리트 집단이다. 여기서도 상고 출신은 설 자리없어 나는 여전히 이름 없는 부산의 3류고 출신으로 남아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 그렇듯이 상고 출신의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당시 뉴욕 동창회에서 신문에 낸 당선 축하
문(광고란) 에 내 이름이 이사로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미리 알았으면 내 이름을 빼라고 했을 텐데.
어떻게
알았는지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동기가 대통령이 된 것을 축하한다”고 했다. 그럴 때도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동기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상고
출신의 complex가 좀 해소되려나 하고 기대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대부분 보수적인 사람들이다)은
만나면 노무현이 욕이다. 듣기 거북한 “상고 출신 병신이 대통령이 되어 빨갱이들이 판을 친다”말도 함부로 했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노무현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 본다. 같은 상고 출신이지만 대학을 나온 MB에게는 아무도 상고 출신을 말하지 않는다.
너무
늦기 전에 상고 출신의 complex에서 해방되고 싶다. 먼저는 교회에서이요 다음으로는 30여 년 만나 온 친구들의 모임에서다. 사실 내가 상고
출신이라 말해도 나를 업신여길 사람은 이제 이곳에는 별로 없다. 교회나 친구들의 모임에서 함부로 내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직장에서도 거의
모든 한국 사람은 감원 때 해고되고 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굳이 학벌로 따져도 별로 밑질 것도 없다. 남은 것은 내가 부산상고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다. 다행히도(?) 학교 이름이 개성고가 되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 complex 는 자존심과 연결되어있고, 도를
넘는 자존심은 성경적으로 보면 교만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교만한 자를 싫어하신다고 말씀하시는 데(계속)
미국
뉴저지 주에서 박 동조
商高
출신 Complex (3)
상고
출신으로 시작한 동문들 중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고 우리 동기들 중에서도 상당히 있다. 그 중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출발하여 성공했고,
이곳(미국)에서 같이 살았거나 가끔 만날 수 있었던 두 후배들의 얘기로 ‘상고 출신 Complex’를 마감하고자 한다.
이
두 후배는 상고 졸업 후에 나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55회 후배인 J는 한국은행에서 출발했고, 57회의 S는 외환은행이 그의 처음 직장이다.
똑 같이 나처럼 D대학교 야간 대학을 나왔고, 적절한 때에 다니던 은행을 그만 두었다. 배경은 다르나 둘다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여기까지는 나와 꼭 같은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공했고 나는 실패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나보다 지혜로웠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정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J는
D대 졸업후 수출입 은행이 생겼을 때, 한국은행을 떠나 대졸자로 수출입 은행에 들어감으로 고졸의 치욕에서 벗어났고, S는 명문 Wharton
School (팬실베니아 대학교 상과 대학) 에서 공부한 후 체이스 은행에 들어감으로 고졸의 설움에서 해방(?)되었다.
내가
J를 이곳에서 만난것은 그가 뉴욕사무소장으로 왔을 때다. 30여년만에 만났지만 J는 금방 “형님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며 나를
반겨주었다. “선배” 보다 “형님”으로 나를 부르는 이유는 그는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후배이고 시골에서 옆 동네에서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후에 그는 수출입은행 이사와 전무를 거쳤고, 지금은 런던에 있는 수출입은행 투자회사의 사장으로 있다. 이사가 된후에 만났을 때 그는 “내가
한국은행에 고졸로 남아 있었다면 이사는 꿈으로 끝났을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S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뉴욕 동창회 모임에서다. 후에 알았지만 그는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의 후배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동문보다 나에게 깍듯이 대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조그마한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가족이 모두 이곳에 살고 있었다. 그는
“노”가 어려울 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것이 계기가 되어 대통령 자문의원 (동북아 위원회?)으로 한국으로 돌아간 후 지금은 세계적인 은행인
독일은행 아시아 지역 회장으로 있다.
두
후배의 성공담을 소개했지만 그들에게도 상고 complex가 남아있는 지도 모른다.
“노”가
대통령이 된후 J는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 (KADO)에 파견 나와있던 외무부 모 국장을 모시고(?) 나와 함께 골프를 친 적이 있다.
그가 나를 “노”의 class mate라고 소개하게 전에 “형님 내가 고등학교 후배라고 말하지 말라”라고 부탁한 것이 기억난다. S는
이곳에서 만나면 깍듯이 예의를 갔추지만 한국에 나가면
(이상
뒷부분이 뚝 잘린 채로 글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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