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전시하는 ‘한국 근대 회화’ 전시회를 관람하러 갔다. 간혹 미술 전문지에서나 보았던 명작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화가인 아들에게는 유명 작가의 그림이 또 다른 창작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제1전시장에 들어선다. 오랜 옛사랑을 만난 듯 그림앞에 선 나는 흥분되기 시작했다. 다른 작가들에 비해 유달리 모작(模作)에 휩싸였던 여류 화가 천경자가 거기 있었다. 꽃과 영혼의 화가, 꽃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작가를 닮은 듯한 ‘길례 언니’ 작품이 걸려 있다. 열정의 화가 이중섭, 그가 즐겨 그렸던 것은 일본에 두고 온 가족과 우직한 환우였다. 가장 한국적인 화가 박수근 그림을 감상한다는 건 진정 감동이다. 더구나 남편의 우상(偶像)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고 있는 ‘빨래터’에서 촌부들의 소박한 삶을 만난다.
200호 그림 앞에서 숨이 멎었다. 거대한 화폭 가득 무수히 많은 점이 마치 모래를 흩뿌린 듯 촘촘히 퍼져 있다. 그림은 모더니즘 화가 김환기 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점화다. 짙은 푸른색에 작은 점들은 결코, 차갑지도 않다. 별빛이 부유하는 밤하늘의 풍경이다. 화면 안에 희미한 하얀 곡선은 신비로운 작은 우주 같기도 하다. 작가의 전면 점화를 보고 있노라니 독창적인 저 그림을 그리기까지 화가의 고통이 느껴져 외면할 수 없는 아픔이 아련하게 사무쳐온다. 그림은 고요하다. 작품이 감동을 주고 나아가 화단에서 높은 평가로 인정받는 것에 화가 가족을 둔 나에게는 부러움이 앞선다.
예전에는 추상화를 관람하면서 건성으로 지나쳤다. 관점에 따라 평가도 다를뿐더러, 짧은 식견으로 도무지 해독 불능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달랐다. 색채를 단순화시킴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김기환 화백이 70년대 전국 미술 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반복적으로 찍은 점 하나, 하나는 사물의 형상을 지우고 미세한 점들로 빛의 울림을 강조한 추상화이다. 맛으로 치면 담백하다고나 할까. 하늘과 바다, 영롱한 별들이 화면 전체를 채웠다. 푸른 단색의 점화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안온하게 느껴진다. 자유로운 평면에 은은한 그림이다. 뉴욕에서 활동을 하던 그는 도시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며 고향의 바다와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화폭에 하나의 점과 그리움을 그려 넣었을 것이다. 영혼에 불을 지피고 인고의 세월로 다져낸 작품은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옛날이나 현재에도 예술가들의 생활고는 대부분 고달프기만 하다. 그 역시 다르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분신 같은 그림이 최고의 예술 작품을 인정받으며 최고의 경매가로 낙찰된 사실을 저승에서 접했다면 그는 매우 행복해할까? 아니면 살아서 예술의 가치를 누려보지 못한 아쉬움에 헛헛해 할까?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으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언이 실감 나게 한다.
그림에는 내 어린 시절의 밤하늘 풍경이 보인다. 섬에서 자란 나는 여름밤 평상에 누워 하늘 가득 무수히 펼쳐진 별들 속에서 내 별 하나를 만들어보곤 했다. 그래서인지 김환기 그림이 더욱 가슴 안으로 파고든다. 작품 대부분이 암청색과 엷은 쪽빛을 많이 띤다. 풍경은 시어처럼 절제된 느낌이다. 그의 그림은 그리움을 담고 있다. 전면에 퍼져 있는 십만 개의 점 중 내 그리운 점 하나를 찾아본다. 그것은 떠나버린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한다. 그림 앞에서 마음은 끝없이 아련해진다.
작가가 점화에서 즐겨 사용한 푸른색은 그의 고향 푸른 하늘과 바다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투영된 것이라 짐작된다. 그런 영향 탓인지 빛을 발하고 있는 저 별의 처절한 고독은 바로 김환기의 모습으로 보인다. 먼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만나고 또 만나는 생의 인연을 그렸나 보다.
한때 ‘유심초’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 가사이기도 하다. 노랫말이 너무 좋아 즐겨 부르기도 했다. 그림은 절친인 김광섭의 〈저녁에〉란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의 詩 〈저녁에〉
시는 사람의 인연을 노래하는 듯하다. 불교에서는 인연이란 멈추지 않고 어떤 모습이라도 계속 윤회 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하는 인연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될까. 그리움으로 그려진 그림 속에서 내 별 하나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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