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림사 제 16장 호불범(胡不凡)의 운명(運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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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丁慧)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안색은 크게 변했다. 빈청 안에는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삼십육 명의 혈의장한, 즉 혈의삼십육궁(血衣三
十六弓)이 휘장을 찢고 두 눈이 충혈된 채 망사의를 날리며 춤추
는 백화미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광포한 욕정으로 이글거리는 그들의 눈은 백화미의 육체 구석구석
을 핥듯이 노려보았다. 그들은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목불인견으로, 그것은 천안통수 마운로도 예외는 아니었
다.
다만 그들과 다른 게 있다면 그의 입가에 유독 선혈이 낭자했는데
이는 그가 정신력의 한계를 넘어선 욕정을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혀를 깨문 탓이었다.
공손패와 금악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심력이 초인적인
호불범조차도 안색이 백지장같이 창백한 채 두 눈이 찢어질 듯 부
릅떠져 있었다.
그래도 중인들 중에서 사정이 조금 나은 것은 역시 호불범과 청수
자, 그리고 정운, 정료였다. 그러나 그들도 이미 인내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혜는 내심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아아... 이대로 가면 끝장이다. 부처님이시여!'
그런데 이때 불현듯 정혜의 귓전을 가늘게 파고 드는 전음술이 있
었다.
(정혜, 범자대비공(梵慈大悲功)을 끌어올려 천룡선창(天龍禪唱)을
울리시오. 저 여인이 사용하는 것은 이백 년 전 육대천마의 천마
무(天魔舞)와 섭혼요마음(攝魂妖魔音)이오.)
정혜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소사숙!'
그의 심신이 크게 진동했다. 전음의 임자는 바로 그의 소사숙이었
던 현수(玄修), 즉 하후성의 음성이 아니던가?
'소사숙이 여기 계시다니! 아미타불... 천운(天運)이다.'
마치 사막에서 비를 만난 듯한 심정이 된 정혜는 내면 깊은 곳에
서 커다란 용기가 우러나는 것을 느끼며 즉시 하후성이 시키는 대
로 범자대비공을 운공했다.
그는 드디어 두 손을 합장한 채 경문(經文)을 외우며 천룡선창을
불렀다.
순간 천하의 요녀 백화미는 심후하고 광명정대한 천룡선창이 들려
오자 그만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곧 그녀도 섭혼요마음
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더욱더 뜨겁고 자극적인 탕가를 불렀다.
그녀는 내심 이를 갈고 있었다.
'저 젊은 중놈은 보통이 아니구나! 과연 소림은 상상도 할 수 없
이 무서운 곳이다.'
천룡선창과 섭혼요마음의 대결, 이것은 실로 극과 극의 부딪침이
었다. 그러나 백화미는 섭혼요마음에서 만족하지 않고 천마무(天
魔舞)의 다음 단계를 시전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망사의가 흘러내리며 백옥같이 희고 탐스러운 풍
만한 두 육봉이 그대로 드러났다.
'천마살염무(天魔殺艶舞)에서도 안 된다면.'
아찔한 광경이었다.
천하우물(天下尤物)인 요녀 백화미의 젖가슴은 수만 명 사내들의
혼백을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녀의 육봉이 드러나자 제일 먼저 혈의삼십육궁이 타오르는 욕화
를 다스리지 못하고 칠 공(七孔)에서 피를 쏟으며 거꾸러지기 시
작했다.
"으악!"
차례로 혈의삼십육궁은 전신혈맥이 터져 쓰러져 갔다. 그녀의 귓
전에 한 줄기 담담하고도 조용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
다.
"백소저, 그만 두시오."
백화미의 뇌쇄적인 몸이 얼어붙은 듯 굳었다. 그녀의 두 눈은 경
악으로 크게 떠지고 있었다.
'이, 이 음성은... 이... 음성은!'
휘익!
혼란으로 치닫는 그녀의 눈앞에 떨어져 내리는 한 백영, 그는 바
로 선풍옥골과 같은 모습의 하후성이었다.
그는 얼마 전 분명 마검정(魔劍井)에 빠졌다. 그런데 어찌 다시
중인들 앞에 그것도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실상 하후성.
놀라운 혜지는 이미 좌삼방(左三方)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불문최고의
신법인 천불현현보(千佛玄玄步)를 펼쳤다.
천불현현보가 극성으로 펼쳐지면 실상(實像)은 사라지고 허상(虛
像)만 남게 되므로 함정으로 떨어진 것은 그의 허상에 불과했다.
하후성은 이미 연기처럼 날아 천정에 붙어버린 것이었다.
다만 그의 동작이 너무도 빨라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뿐
하후성은 이후로 줄곧 천정의 대들보 위에서 장내의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 당신은?"
백화미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경악성을 발
했다.
"백소저, 오랜만이오."
하후성은 담담히 인사했다. 백화미는 멍하니 긴 머리를 등 뒤로
묶어 내린 영준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수(玄修)... 환, 환속했군요."
하후성은 담담히 웃었다.
"그렇소이다."
백화미는 갑자기 양 손으로 자신의 노출된 젖가슴을 가렸다. 왠지
수치심이 밀려들어 하후성에게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후성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나 백화미는 서둘러 바닥
에 떨어진 옷을 걸쳐 입었다.
어느새 탕기가 흐르던 요녀였던 그녀의 얼굴은 차분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달라보이는 모습으로 완전히 옷
을 입고 돌아선 백화미의 자태는 순식간에 청초하고 유약하며 순
결한 소녀의 모습으로 화해 있었다.
백화미는 폭포수같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생긋 미소 지었다.
"당신이 나타나다니 정말 뜻밖이에요."
청아한 음성이었다. 하후성은 담담히 대꾸했다.
"소저가 수라궁의 인물이라니 소생 역시 뜻밖이요."
백화미는 아름답고 현숙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래도 아직 중의 때를 벗지 못한 것 같군요."
말하는 도중 그녀는 힐끗 금악비를 응시했는데 그는 여전히 바닥
에 정좌한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백화미는 다시 하후성을 향했다.
"현수, 당신의 속명(俗名)은 어떻게 되나요?"
하후성은 침묵했다.
"풋! 물어본 내가 바보 같군요."
백화미는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후성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백화미는 과거 현수를 유
혹했다가 성사(成事) 직전 실패한 광경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현수의 뒷모습에서 무엇을 느꼈던가?
'산(山)! 그래 산이었어.'
백화미는 내심 처량하게 부르짖으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금악비를 옆구리에 끼더니 말했다.
"계속 현수라고 부르죠. 현수, 앞으로는 당신과 내가 만나지 않았
으면 좋겠어요."
백화미의 말에 하후성은 웬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유약해
진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약하게 하고 있었다.
"그럼... 현수!"
백화미는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모습은 금새 빈청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후성은 결국 한 마디도 못했으나 내심 탄식하고 있었다.
'기이한 여인이다. 음탕함과 청순함을 한 몸에 타고 났다니 진정
요녀(妖女)인지 성녀(聖女)인지 모르겠구나.'
비로소 주위에서 중인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공손패
가 벌떡 일어나며 분노성을 터뜨렸다.
"요녀! 어디로 갔느냐?"
그는 사방을 둘러보다 하후성을 발견하고는 대경했다.
"아, 아니! 네 놈이 어떻게 마검정에서 나왔느냐?"
득달같이 앞으로 나서며 그는 수중의 혈검을 펼쳤다.
"이 놈! 그 계집과 네 한 패는 어디 갔느냐?"
하후성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담담히 말했다.
"그들은 갔소이다."
"갔다고?"
공손패는 어리둥절하다기 곧 이를 부드득 갈며 외쳤다.
"그렇다면 네 놈이라도 잡아 그들을 대신하겠다."
공손패는 말을 마치자마자 혈검을 날렸다. 그때 정혜의 불호가 그
를 막았다.
"아미타불.... 손속을 거두십시오, 시주."
정혜의 소매가 펄럭이자 웅후한 경기가 혈검을 막았다.
펑! 하는 폭음이 일어났다.
"아니?"
공손패는 대경한 채 어깨를 다급히 흔들며 두 걸음 밀려났다.
"당신들이 감히?"
그는 소림을 두려워한 적도 그렇다고 무시한 적도 없었다. 다만
타고난 성격 때문에 그는 노성을 터뜨렸다.
"소화상! 왜 가로 막는 것이오? 저 놈은 수라궁과 한 패가 아니
오?"
정혜는 공손히 합장 불호했다.
"아미타불.... 노시주께서는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오해라니? 노부는 확신하오!"
정혜는 엄숙히 말했다.
"아미타불.... 노시주께선 저 분과 우리의 관계를 아십니까?"
공손패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분은 바로 소승의 사숙입니다."
"뭣?"
정혜의 말에 중인들은 모두 대경하고 말았다. 심지어는 침착하기
그지없던 호불범마저도 안색이 변했다. 공손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사, 사숙이라고?"
정혜는 여전히 엄숙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중인들은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도대체 그들의 상식으로서는 이
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어찌 정혜보다도 어린 자가 사숙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아연해 하자 정혜는 하후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소림 삼성승이 마지막으로 거둔 제자임을 밝히는 한편 수개
월 전 파계(破戒)한 것까지 감추지 않았다.
하후성은 정혜가 말을 마치자 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처음 만경
루의 주루에서 처음 금악비를 만난 일, 그리고 그와 함께 만사각
에 조문 오게 된 일 등을 털어 놓았다.
그제서야 중인들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커다란 오해를 했음을 알고 그들은 하후성에게 사과했
다.
청수자가 두 눈에 이채를 띄며 나섰다.
"무량수불.... 혹시 시주의 성함은 하후성이 아니신지요?"
하후성은 담담히 시인했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천안통수 마운로가 놀라 외쳤다.
"환영신룡(幻影神龍) 하후성!"
그 말에 중인들은 모두 안색이 크게 변했다.
환영신룡 하후성이라면 근래 들어 엄청난 명성을 떨치는 신비의
청년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북방(北方)으로부터 무위를 크게 떨쳤
을 뿐만 아니라 천풍보(天風堡)에서 수라궁의 사자(使者)들을 격
퇴시킴으로써 크게 주목을 받은 환영신룡 하후성. 그의 이름은 무
림천하를 진동시킨 지 오래였다.
중인들은 모두 놀라움에 찬 눈으로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오직 정
혜와 정운, 정료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소림사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강호의 소식을 거의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칸의 조용한 정실(淨室).
방 안에는 여섯 명의 인물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하후성을 비롯하여 이제는 만경루의 주인이 된 호불범, 혈의마검
공손패, 천안통수 마운로, 무당의 청수자, 마지막으로 소림의 정
혜였다.
좌중의 분위기는 침중했다. 하후성이 줄곧 담담한 음성으로 얘기
하고 있었다.
그는 남창으로 오는 도중 옥면가람 남궁수를 만난 일부터 이곳까
지 오게 된 일, 그리고 수라궁의 음모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차분
히 얘기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조금도 막힘없이 마치 물흐르듯 유창한 언변이었다. 뿐
만 아니라 조리 있고 논리가 정연했다.
중인들은 모두 숙연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특히 하후성이 최근
에 벌어진 의문의 연속 살인사건에 대해 언급하자 모두 안색이 대
변했다.
"결국 칠인(七人)의 모사지인(謀師智人)들을 시해한 흉수는 수라
궁으로 밝혀졌소이다. 그로 미루어 수라궁주는 실로 무서운 계략
(計略)을 지닌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후성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병법(兵法)에, 적을 이기려면 장수를 베라고 했듯이, 그 자는 전
중원의 모사들을 제거함으로써 머리(首)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실
로 수라궁주의 지계나 흉심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높고 악랄한 수
준입니다."
하후성의 계속되는 말에 중인들은 더욱더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
러나 호불범만은 이미 짐작했다는 듯 두 눈을 스르르 감고 있었다.
공손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주먹을 움켜쥐더니 탁자를 내려치며
말했다.
"앞으로 수라궁의 개파대전은 십 일(十日)밖에 남지 않았소. 반드
시 그곳으로 가서 수라궁주가 어떤 놈인지 똑똑히 봐야겠소!"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수라궁주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이번 개파대전도 어쩌
면 그가 꾸민 무서운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호불범이 눈을 뜨며 냉소를 날렸다.
"흥! 물론 그 자가 이번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겠지요. 그러
나 예로부터 호랑이를 잡으려면 굴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말이 있
습니다. 놈들이 함정을 파놓았다면 소생은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
하여 반드시 조부님의 복수를 하고야 말 것입니다."
호불범은 하후성을 응시하며 물었다.
"하후형도 수라궁에 가실 생각이십니까?"
하후성은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청수자가 말
했다.
"빈도의 장무사형께서는 이미 빈도와 화룡자(火龍子) 사형을 수라
궁으로 파견했습니다."
하후성은 정혜에게 물었다.
"소림에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이오? 정혜."
정혜는 공손히 대답했다.
"이미 장문인의 명으로 현광(玄光) 사숙님과 십팔나한이 출동했습
니다."
"현광사형께서?"
현광대사는 바로 소림 선좌원(禪座院)의 원주로서 현(玄)자 항렬
중에서 내공(內功) 면과 수양에서 가장 심오한 고수였다. 또한 그
는 침착하고 지혜가 충만했다.
하후성은 짧은 순간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미 도화선에 불은 붙었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이 일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있다. 이번 수라궁의 개파대전에서 자칫하면 중
원무림의 태반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하후성의 가슴은 점차 무거워져 가고 있었다.
만사각(萬事閣)의 한 방 안.
그곳은 과거 만사귀재 호불귀가 쓰던 거실이었다.
태사의. 무척 낡은 의자였으나 품격 높아 보이는 태사의는 과거
호불귀가 늘상 이용하던 물건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주인은 호불
범이었다.
그는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맞은 편 서탁 위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왠지 여인같이 아름다운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쓸쓸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품 속에서 오죽(烏竹)으로 된 한 자 길이의 퉁소를 꺼내더니
소중한 듯이 어루만졌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비감의 빛이 어렸다.
'십 일(十日) 전만 해도 이 자리에는 할아버님이 앉아 계셨는데...
지금은 오직 이 퉁소만 남아 있으니 슬픔만 더해 주는구나.'
호불범의 신비한 눈에 반짝 이슬이 어렸다.
'이제는 천애고아(天涯孤兒)로구나.'
문득 그의 눈에는 무서운 살심(殺心)이 어렸다.
'수라궁 놈들, 두고 보아라! 원한에 사무친 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호불범은 마치 여인의 손같이 희고 가냘픈 옥수(玉手)로 퉁소를
꽉 움켜쥐었다.
'이제 수라궁 개파대전까지는 구 일(九日) 남았다. 구 일 후면 모
든 것이 판가름 난다.'
호불범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안색이 붉어
지더니 그는 연달아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우욱!"
놀랍게도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시커먼 피가 토해지고 있었다.
호불범은 바닥에 점점이 흩어진 혈화(血花)를 보며 두 눈에 절망
을 담았다.
"아!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몸은 갈수록 쇠약해지니......."
호불범은 수건을 꺼내 파리해진 입술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탄식해마지 않았다.
"앞으로 일 년(一年)을 넘기기가 힘들겠구나. 그 안에 모든 것을
끝낼 수만 있다면 한이 없겠거늘."
호불범은 안타까운 듯이 수중의 오죽 퉁소를 어루만졌다. 촛불빛
에 그의 얼굴은 더욱더 수척하게 보였다.
이때 방문 밖에서 담담하고도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형(胡兄),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호불범은 움찔했다.
'이 음성은?'
곧 그는 급히 수건으로 바닥에 흩어진 핏자국을 닦고는 몸을 일으
키며 말했다.
"하후형이십니까?"
"그렇소이다."
방 밖의 음성은 과연 하후성이었다.
"들어오십시오, 하후형."
하후성이 들어서자 호불범은 그 모습에 잠깐 넋을 잃은 듯한 표정
을 지었다. 하후성의 영준한 모습이 마치 선계(仙界)의 인물같았
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실로 천하의 선골(仙骨)이요 귀인(貴人)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호불범의 눈빛이 어떤 동요로 미묘하게 흔들렸
다. 그러나 그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후형께서 웬일이십니까?"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호형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소이다."
호불범은 탁자로 걸어갔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후형."
"고맙소이다."
두 사람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이 깊은 밤에 소제를 찾아온 것으로 보아 매우 급한 일인 것 같
군요?"
하후성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어떤?"
하후성은 품 속에서 마지막 남은 한 개의 고전(古錢)을 꺼내 넘겨
주었다.
"이것을 혹시 아시는지?"
고전을 받아 든 호불범의 안색이 급변했다.
"천불(天佛)... 고전(古錢)!"
그는 뒤이어 급히 물었다.
"하후형! 외람된 말입니다만 어떻게 고전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오."
호불범의 안색이 심한 동요를 일으켰다. 그는 격동하는 눈빛으로
고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음. 조부님으로부터 이 천불고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거
팔십 년 전 조부님께서 큰 위난을 당하셨을 때 한 분 대사께 구함
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으음."
"조부님은 대사에게 간청하여 은혜를 갚을 방도를 물었고, 그때
그 대사께서는 이 천불고전을 보이며 이것을 훗날 가지고 오는 자
가 있으면 그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습니다."
하후성의 준미한 눈썹 끝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이제 보니 그 분 대사께서는 바로 소림의 성승이셨군요."
호불범은 고전을 품속에 넣은 후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후형, 무엇을 원하십니까? 조부님의 빚은 곧 소제의 빚입니다.
어떤 부탁이라도 힘 닿는 데까지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후성은 담담히 웃으며 물었다.
"어떤 부탁이라도 말이오?"
두 사람의 눈길이 서로 부딪쳤다. 그러나 호불범은 그 순간 엄청
난 위압감을 느끼고는 당황하고 말았다.
하후성은 단지 담담한 기색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호불범은
그에게서 태산같은 기상을 엿본 것이었다. 더욱이 한없이 깊은 하
후성의 눈을 대하자 호불범은 마치 자신이 그 속으로 빨려드는 듯
한 느낌마저 들었다.
호불범의 눈꼬리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내 평생 처음 보는 기인(奇人)이다. 이 사람의 내심과 능력은 도
저히 추측할 길이 없구나. 마치... 산과도 같다!'
호불범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 드리겠습니다."
하후성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사귀재 호불귀 노선배님과 똑같은 능력을 갖고 싶소이다."
호불범의 안색은 그만 홱 변하고 말았다.
"하후형의 그 뜻은?"
"소생은 만사무불통지(萬事無不通知)의 능력을 배우고 싶소이다."
호불범은 멍해진 채 한참 동안이나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상대방은 자신의 요구가 얼마나 허황된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호불범은 마침내 몸을 일으키며 설득하듯이 말했다.
"하후형, 조부님이 만사귀재라는 별호를 얻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결코 한 순간에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호불범은 탁자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은 조부님이 평생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하후성은 조금도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거나 번복할 뜻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호불범은 순간적으로 눈빛이 기이해졌다.
'대체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눈이 한 차례 신비한 신광을 발했다. 그
리고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후형, 소제를 따라오십시오."
호불범은 몸을 움직여 다른 방으로 갔는데 그곳은 아담한 정실이
었다.
호불범은 한 쪽 벽에 걸려 있는 족자를 걷어 올렸다. 족자 밑에는
매화(梅花) 모양의 도형으로 여러 개의 돌출된 부분이 있었다.
호불범은 손가락으로 매화도형의 중심부를 연속 일곱 번 눌렀다.
쿠르르르릉!
낮고 묵직한 굉음이 울리며 왼쪽에 한 쪽 벽을 메우다시피 설치된
서가(書架)가 한 쪽으로 이동했고 그 속에 암문(暗門)이 하나 나
타났다.
"따라오십시오."
호불범은 앞장서서 암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암문 안에는 아
래로 향한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삼 장(三丈) 가량 내려가자 곧 거대한 서고(書庫)가 나타
났다.
실히 방원 수십 장은 되는 넓은 공간에 수없이 많은 책(冊)이 꽂
힌 서가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줄잡아도 서책은 수십만 권
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하후성은 아연했다. 호불범은 그의 표정을 살펴보며 신비로운 미
소를 지었다.
"하후형, 이곳의 책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면 조부님의 능력과
똑같이 됩니다."
하후성의 안색이 굳어지자 호불범은 진지하게 말하였다.
"저로서는 이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을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후성은 수많은 서책들을 둘러보며 침중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
다.
'으음, 실로 엄청난 책이다. 이것을 모두 읽으려면 나의 능력으로
도 최소한 십 년(十年)은 걸릴 것이다.'
그는 낙심한 듯 한숨을 쉬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나마 하
후성이 아닌 일반 사람이라면 수백 년을 읽어도 다 읽지 못할 것
이 분명했다.
하후성은 호불범을 응시하며 물었다.
"호형은 이것을 모두 읽었소이까?"
호불범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단지 담담히 웃기만 했다. 하후
성은 다시 시선을 돌려 서책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뇌리에 과거 천기선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 현수, 장경각 안에는 근 수십만 권의 책이 있다. 노납은 그것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너는 그럴 필요가 없다. 노납이 백수십 년
간을 살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으니 어차피 지(智)란 것도 따
지고 보면 도(道)로 이르는 수만가지의 지로(支路)중 하나일 뿐이
다. 단지 하나의 점(點)에서 시작되면서 수많은 지류(支流)를 거
느렸을 뿐 귀일(歸一)하는 것은 원초의 점이다. 너는 그 점 만을
배우면 된다.
하후성의 신색은 담담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기이한 표정을 지으
며 입을 열었다.
"호형."
"네, 하후형."
"내일 이 시간까지만 이곳에 있겠소이다."
호불범은 그만 멍청해지고 말았다.
'이 사람이 지금 무얼 생각하는가? 포기를 했단 말인가, 아니면
너무나 자신을 과신하는 것일까?'
하후성은 이미 몸을 돌려 서책들을 살피고 있었다. 호불범은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한히 넓게 보이는 그의 등, 그것은 대해(大海), 아니 태
산과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무한대의 우주(宇宙)를 보는 듯도
했다.
호불범은 자신이 하후성이라는 인간에게 한없이 끌려드는 것을 느
꼈다.
'대체 이 분은.......'
그러나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욱! 콜록! 콜록! 콜......록."
갑자기 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호불범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
을 꿇고 말았다. 그의 기침은 거의 발작적인 것으로써 통제가 불
가능했다. 하후성은 흠칫하여 돌아다보았다.
하후성은 바닥에 쏟아진 피를 보고는 크게 놀랐다.
"아니...... 호형."
그는 급히 호불범을 부축했으나 호불범은 이미 두 눈을 꼭 감은
채 안색이 밀랍같이 창백해져 있었다. 의식을 잃고 만 것이었다.
"호형! 호형!"
하후성은 계속 그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자 눈썹을 모으며 그의 맥
문을 짚어 보았다. 그는 과거 천기선사로부터 의술(醫術)을 배운
적이 있었다.
맥(脈)이 끊어질 듯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하후성의 안색은 크게
변하였다.
"이, 이것은 절음폐혈증(絶陰閉血症)!"
하후성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르짖었다.
"이럴 수가! 절음폐혈증을 이 사람이 갖고 있다니. 그것은 오직
여인(女人) 만이 걸리는 것이거늘?"
그는 마치 무엇으로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하후성은 손을 뗀 채 아연한 눈으로 호불범의 핏기없는 얼굴을 내
려다 보았다.
'비록 여인같이 생겼다고는 생각했으나 줄곧 남자라고 믿어 의심
치 않았는데.'
하후성은 안색이 매우 흔들리더니 멈칫거리며 손을 들어 호불범의
가슴에 갖다 대보았다.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는 가슴이었으나 물
컹한 감촉이 전해졌다.
'이런, 가슴을 천으로 묶었구나. 그러나 분명 여인의 가슴이다.'
하후성은 확신했다.
'과연, 이 자는... 여인이었구나.'
하후성은 정신이 띵하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고 멍하니 호불
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안색에는 죽음이 가까이 깃들어 있었다.
'천고의 절증인 절음폐혈증. 이것은 바로 천풍보의 종리유향(鐘里
有香)과 똑같은 병이다. 결국 이십 세에 죽는다. 그렇다면 이 호
소저는 앞으로.......'
하후성은 가슴 속에 연민의 정이 치밀어 올라 한 동안 호불범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그는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음, 단지 초절한 심력(心力)을 지닌 인물이라고만 생각했거늘...'
하후성은 비로소 얼마 전 빈청에서 백화미의 섭혼술에 호불범이
태연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으음."
호불범은 한 차례 신음을 발하더니 감았던 눈을 힘겹게 떴다.
그녀는 자신이 바닥에 누워있음을 느끼자 급히 몸을 일으키며 하
후성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러나 하후성은 평소의 담담한 신색 그
대로였다. 호불범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다행이구나. 내가 여자라는 것을 눈치 채진 못했구나.'
호불범은 하후성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하후형께 추태를 보여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하후성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별 말씀을. 그런데 호형께선 몸이 몹시 불편하신 모양이오?"
호불범은 짐짓 활발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단지 원래 몸이 허약하여 신경을 좀 쓰면 가끔 이렇습
니다."
하후성이 묵묵히 자신을 응시하자 호불범은 웬지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림을 느끼며 포권했다.
"자, 그럼 하후형.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그 동안 많은 것을 얻
으시기 바라겠습니다."
하후성은 정중히 말했다.
"감사하오, 호... 형."
호불범은 의아하여 하후성을 바라보았다. 하후성의 말투가 끝부분
에서 이상해진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후성은 곧 몸을 돌려 서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호불
범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기색을 지었다.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반드시 하루 동안 무엇인가를 이룰 것이다.'
그녀는 굳게 믿었으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호불
범 또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고 서가를 통해 방으로 올라선 순간 그녀는 다
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 죽음의 사자가 차츰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는구나.'
그녀는 비틀거리며 처음의 방으로 돌아와 태사의에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한편 지하서고 안에 혼자 남게 된 하후성은 마음이 산란해져 있었
다. 차라리 호불범을 진맥하지 않았을 때가 좋았다.
그에게 절증이 있고 또 생명이 앞으로 불과 일 년(一年)밖에 남지
않음을 알게 되자 하후성의 마음은 안정을 잃었다. 더구나 호불범
이 여인이었음에랴.
'호불범.......'
하후성은 내심 되뇌이며 즐비한 서가를 향해 걸어갔다.
하후성과 호불범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하후형, 하루 동안 얻으신 바는 어떻습니까?"
호불범은 궁금한 듯이 물었다. 하후성은 미소지으며 담담히 말했
다.
"약간 있었소, 모두가 호형의 덕분이오."
호불범은 의아했다.
"그 안의 책을 모두 읽었단 말입니까?"
하후성은 피식 웃었다.
"아니오, 나는 단지 그 중 백 권(百卷)만 읽었을 뿐이오."
"백 권?"
"그러나 그 백 권이 내게 준 소득은 정말 커다란 것이오, 진정으
로 만사귀재 호불귀 노선배님께 감사드리는 바이오."
호불범의 안색이 변했다.
'그, 그럼 바로 그 책들을? 아아! 그것을 어떻게 이 사람이 찾았
단 말인가? 할아버님이 직접 지은 그 책들은 나조차 찾지 못했는
데.'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이곳에 온 뜻을 이루어 기쁜 마음이오, 호형께 언젠가 그 보답을
드리고 싶소이다."
호불범은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이 사람은 정말 기인(奇人)이다. 정말... 추측할 수도 없이 뛰어
난 능력을 지닌. 더구나 어제와 오늘의 눈빛이 다르다. 그것은 바
로 그 백 권의 책을 읽은 후 무엇인가를 얻었다는 뜻이다.'
호불범은 곧 하후성에게 말했다.
"아무튼 하후형의 깨달음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하오, 호형."
호불범은 문득 생각이 떠오른 듯 물었다.
"하후형께선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수라궁으로 갈 생각이오."
"그럼... 무당의 청수자 도인과 소림의 대사들과 함께?"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혼자 갈 예정이오."
호불범은 내심 중얼거렸다.
'무엇인가 뜻이 있구나.'
하후성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정혜에게 전해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일이 있어 먼저 간다고."
"아니? 그럼 지금 갈 예정이십니까?"
호불범은 놀라 따라 일어섰다.
"그렇소이다. 수라궁으로 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입
니다."
호불범은 왠지 아쉬웠으나 하후성 쪽에서 먼저 그에게 포권하고
있었다.
"그럼 호형, 수라궁에서 만납시다."
호불범은 그를 응시하며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쓸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하후성은 그를 잠시 응시하다 밖으로 나갔다.
밖은 밤(夜)이었다.
달빛이 요요하게 만경루 경내를 비추고 있었다. 달빛 속으로 한
줄기 백영이 뿌연 선을 환영(幻影)처럼 남기며 사라져 갔다.
호불범은 난간을 잡고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두 뺨에 흐르는 그의 눈물
은 이슬처럼 맑았다.
'아아! 조부님의 뜻을 이으려 평생을 남자같이 살아왔다. 짧은 생
명이기에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조금은
살고 싶다. 아아! 왜일까? 이 마음의 변화는?'
남장여인 호불범, 그녀의 가슴에 뜨거운 감정이 퍼져 오르고 있었
다.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예전에 없이 타오르는 이 불같은 마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아
아... 그를 만난 후부터... 나는 살고 싶어졌어.'
천하의 기녀이자 지녀(智女)인 호불범.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계속 달
만 바라보았다. 그 달 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후성이라는 이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