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1
- 차례 -
제 1 장 고독한 승부사(勝負士)
제 2 장 반역(叛逆)의 칼
제 3 장 혈로행(血路行)
제 4 장 지옥(地獄)
제 5 장 도산검림(刀山劍林)
제 6 장 지옥찬가(地獄讚歌)
제 7 장 살인묵시록(殺人默示錄)
제 8 장 여난(女難)
제 9 장 피, 피, 피……
제 1 장 고독한 승부사(勝負士)
(1)
황도(皇都) 자금성(紫禁城)……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자금성을 향해 삼배(三拜)를 올리고 명멸(明滅)을 고한다고 했던가.
과연 그 천년(千年)의 명성(名聲)만큼이나 자금성의 모습은 웅장 화려했다.
늦은 오후……
자금성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관도(官道) 위에는 일백여 명의 궁중 무사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을 하고 있었다.
푸드득……!
기마무사(騎馬武士)의 손에 하늘 높이 세워진 깃발은 찢겨질 듯 몸부림을 쳐댔다.
"물렀거라!"
"조(趙) 공공(公公)님의 행차시다! 길을 비켜라."
앞장 선 무사들이 호령을 했고, 행인들은 황송한 표정으로 길 양옆으로 물러났다.
행렬의 중앙에는 화려한 가마가 무사들의 호위에 둘러싸여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바로 조정 대신, 조공공임을 알아봤다.
천하가 당대(當代)에 이르러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구가하는 데 가장 큰 힘을 보탠 사람이 바로 조공공.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길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가마 앞을 가린 주렴 속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 멈춰라!"
말을 타고 가마 옆에 바싹 붙어 따르는 호위장군이 그의 말을 받아 외쳤다.
"행렬을 멈추랍신다!"
궁중 무사들은 즉시 걸음을 멈췄다.
차르륵!
앙상하고 메마른 손 하나가 주렴을 옆으로 걷어냈다.
무사 하나가 달려 나와 가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턱!
가마 안에서 발이 나와 무사의 등을 밟았다.
황룡이 수 놓여진 화려한 관복을 입고 섭선을 활짝 펼친 노인이 가마에서 걸어 나왔다.
노인의 얼굴은 검버섯이 가득 피어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얇은 입술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어딘지 모르게 꺾이지 않는 고집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이 노인이 바로 당금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조공공이다.
그는 땅바닥에 내려서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공공의 눈동자 속에는 하늘 높이 떠 있는 수십 개의 연이 들어와 있었다.
연 가운데 룡(龍)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쓰였을 뿐 자금성 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연이었으나 조공공의 눈길은 오래도록 그 연에 머물렀다.
마치 공중에 떠있는 연에 어떤 추억이 담겨져 있는 듯 그의 눈은 아득한 세월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눈치 빠르게 장군복장을 한 사내가 옆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들어라, 방곡!"
장군은 황망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명하소서. 조공공!"
그는 조공공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의 얼굴에 스치는 기묘한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조공공이 입을 열었다.
"저 연을 만들어 판 인물이 누군지 즉시 조사하도록."
방곡은 고개를 꺾어 하늘을 쳐다봤다.
'연이라…… 무슨 문제가?'
하지만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공공이 시키는 일이라면 마누라의 목이라도 베어 와야 했다.
"존명(尊命)!"
두 손을 맞잡고 예를 올린 다음, 몸을 홱 돌렸다.
"이럇!"
방곡은 즉시 부하 다섯 명을 이끌고 연이 날리는 방향을 향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수하 다섯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두두두!
조공공은 그들이 바람처럼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 있는 연을 올려다봤다.
"진정 그가 돌아온 것인가?"
그의 목소리는 회한에 가득 차 있었지만 너무나 작아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 * *
자금성의 변두리……
개 두 마리가 맞붙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옆에서 와와! 소리를 질러댔다.
허나 석비룡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구경을 하고 있었다.
싸움이란 본디 잔혹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마찬가지다.
이기는 자는 영광과 명예와 그 밖의 모든 것을 차지하지만 지는 자에겐 곧 죽음보다 더한 수치를 맛보게 된다.
"잘한다!"
"해치워버려!"
"이런 젠장! 피하란 말이다!"
검은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몸집이 큰 개와 비루먹은 것처럼 옹색한 누렁개였다.
얼핏 보기에도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누렁개는 금방이라도 꼬리를 말고 도망칠 듯하면서도 주위를 맴돌며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크엉!
마침내 검정개가 누렁개의 목을 콱 물었다.
이쯤이면 대략 싸움은 끝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누렁개는 지독했다.
목이 물리고서도 발로 검정개의 안면을 후려쳤다. 그 일격은 공교롭게도 검정개의 한쪽 눈을 긁었다.
검정개는 누렁개의 목을 놓치고 비틀비틀 물러섰다. 이어 누렁개의 이빨이 검정개의 목을 파고들었다.
깨깽깽깽깽!
검정개는 도망을 쳤고 누렁개는 자신이 승자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크아앙! 포효했다.
"우와!"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우르르 달려들어 누렁개를 쓰다듬고 먹을 것을 주었다.
이 거리에서 그 개싸움을 구경한 사람들 가운데 아마 석비룡이 유일한 어른이었을 것이다.
"그래!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지 않고서 이기기를 바라기란 힘들겠지."
누렁개의 승리로 끝난 싸움을 보고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그렇지. 그 얘기는 틀리지 않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석비룡의 얼굴은 경직됐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도록 내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건……?'
상대가 자신과 비교해 그 능력이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는 고수라는 증거다.
"하하하! 어떤 귀한 분이 절 보러 왕림하셨……."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의 눈앞에는 눈이 번쩍 뜨이도록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오만한 것이 흠이지만 그녀의 얼굴은 화사하게 빛났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녀가 황녀(皇女)처럼 사치스런 옷을 입고 있었으며, 백황적녹흑자옥(百黃赤綠黑紫玉)의 일곱 색의 채대를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는 점이다.
여인은 세상이 다 환해질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벌써 날 잊은 건 아니겠지?"
'칠채월화 벽소운……!'
석비룡의 입가에는 쓰디쓴 미소가 그려졌다.
"정말 오랜만이야. 신수궁에서 헤어진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가 지나가고 있잖아?"
벽소운은 계속 샐샐 웃으며 접근했다.
석비룡은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쏘아보며 냉소(冷笑)를 지었다.
"후후……! 정말 대단한 뱃심이로군. 내가 경고한 걸 벌써 잊을 만큼 머리가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말야."
벽소운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응? 무슨 말이지? 경고가 뭐 어쨌다고?"
정말 그녀는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는 걸까?
벽소운, 이 여자 때문에 석비룡은 신수궁의 감옥에 잡혀 몇 십일 동안 끔찍한 시달림을 받지 않았던가.
"비겁하게 뒤에서 날 암습해 신수궁의 뇌옥에 가둔 일이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야."
석비룡이 다그치자, 벽소운은 손가락으로 턱을 간지럽히며 짐짓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이다.
"가만? 그런 일이 있었나……?"
그러나 그것도 잠깐,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석비룡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아! 사내대장부가 겨우 그까짓 일을 지금까지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니 실망이야."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까짓 일이라고? 까닥했으면 거기서 인생 종칠 뻔한 나야!"
벽소운은 귀엽게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아."
그녀는 목소리가 어여쁜데다 하는 행동마다 교태가 어려 정신을 놓고 있다가는 꼼짝없이 가슴이 흠뻑 녹아들 것 같았다.
석비룡은 흥! 코웃음을 쳤다.
"수작 부리지 마! 여우같은 계집!"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몸을 날렸다.
쉐에엑……!
주먹을 뻗어 공격을 가했다. 벽소운을 짓뭉개버릴 것처럼 맹렬한 기세였다.
"어멋!"
그녀는 놀란 듯 뾰족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치 주먹이 일으키는 바람에 밀리기라도 한 듯 가볍게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뭘 모르는군. 당신은 오히려 내게 감사해야 해. 난 운가려가 금쇄삭을 풀어주는 걸 봤어. 내가 방해했으면 당신은 지금도 신수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걸?"
"뭐? 그런 말을 내가 믿을 줄 알아!"
석비룡은 움찔했으나 주먹을 멈추지 않고 재차 공격을 가했다.
그의 주먹이 얼굴에 닿는 순간, 벽소운은 몸을 빙글 돌려 옆으로 피했다.
"흥! 정신을 못 차리는 군. 날 적으로 만들면 몹시 피곤할 텐데?"
석비룡의 공세는 거침없었다.
"돼먹지 않은 소리…… 어차피 우린 적이야!"
그의 공세는 점점 빨라져 벽소운도 계속 피할 수만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벽소운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 유명한 천리무영이 자금성 변두리에서 보름간이나 숨어있는 걸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말할지 생각해 봤어?"
석비룡의 주먹은 그녀의 얼굴 한 치 앞에서 멈춰버렸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 눈빛은 '그건 무슨 말이지?' 라고 묻고 있었다.
벽소운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당신이 보름 전 자금성으로 들어올 때부터 난 계속 미행을 했어. 결론부터 말하면 난 당신이 무슨 속셈으로 이곳에 왔는지 다 알고 있어."
석비룡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설마……?'
그녀의 입술이 경멸하듯 비뚤어졌다.
"당신이 계속 날 적으로 간주한다면 그 모든 걸 강호 사람들이 알게 하는 수가 있지."
석비룡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허나 벽소운의 얼굴 앞에서 힘없이 주먹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2)
방곡은 허리를 굽히고 보고를 올렸다.
"연을 팔고있는 자는 온고(溫故)라는 늙은이로 뒷골목에서 날품팔이를 하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늙은이가 연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조공공은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방곡은 당황하며 황망히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자가 직접 만든 건 아니옵고, 누군가에게서 연 백 개를 공짜로 넘겨받아 아이들에게 팔아 온 걸로 조사되었습니다."
조공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분이……!'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어떤 자에게서 연을 넘겨받았다고 하던가?"
"창졸간에 어둠 속에서 넘겨받았는지라 얼굴은 모른다고 하옵니다. 단지 그 자가 백 개의 연을 넘겨주면서 남겼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만……."
조공공은 입을 열지 않고 눈빛으로 그를 재촉했다.
방곡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구름은 갈 곳을 정하지 않고 흐르지만 언제고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법이라고……."
조공공의 얼굴이 침중하게 변했다.
그는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물러가도 좋다."
드르륵!
쿵!
방곡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조공공은 어둠이 깊어가는 창밖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벌써 삼 년이 흘렀는가……!"
삼 년 전, 조공공과 석비룡……
두 사람은 며칠 전까지는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자금성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단지 거대한 쓰레기 더미일 뿐인 등룡왕부 위에 서 있었다.
조공공은 사뭇 놀라는 표정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진정 떠나실 작정이십니까?"
석비룡은 무심하게 뒷짐을 진 채 허물어진 등룡왕부의 터를 찬찬히 건너다보았다.
"이제 더 이상 내가 북경성에 머무를 이유는 없어졌소."
맺음이 분명한 그의 목소리는 모든 결정이 끝났음을, 이미 자신의 마음이 자금성에서 멀리 떠났음을 알려주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자신의 마음을 확인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뿌리내렸던 내 모든 정리(情理)와 추억은…… 등룡왕부의 멸망과 함께 재처럼 소멸되었소."
조공공은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이런 난감할 데가……."
대체 무슨 말을 하여야 한단 말인가.
무슨 말로써 소군의 결정을 되돌릴 수 있는가.
조공공은 절망감을 느꼈으나 이대로 소군을 단념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군! 부디 심기를 가라앉히소서. 등룡왕부의 멸망에 대해선 황제폐하께서 황명을 내려 조사하고 계시옵니다."
석비룡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이 세상 누구도 믿지 않소. 조공공은 내 말의 의미를 아시오?"
조공공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세상의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그 말은……
결국 황제폐하까지 믿지 못하겠다는……
'그렇다. 소군은 세상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석비룡은 이제 자신의 얘기는 모두 끝난다는 듯 휙 몸을 돌렸다.
조공공은 황급히 그 앞을 막아섰다.
"소군! 영원히 돌아오시지 않을 셈이십니까?"
그의 가슴속에는 견딜 수 없는 연민의 정이 시린 새벽의 서릿발처럼 하얗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석비룡은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마치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는 듯 무심한 표정.
"구름은 갈 곳을 정하지 않고 흐르지만 언제고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법이오."
조공공이 긴장하며 물었다.
"그때가 언제쯤이오리까?"
"하하하!"
석비룡은 맑게 웃고는 등을 보이며 걸어갔다.
"가끔 하늘을 보시오. 백 개의 용연(龍鳶)이 하늘을 날 때면 내가 자금성에 있을 거요."
그렇게 쓸쓸히 자금성을 떠났던 소군이었다.
등룡왕부의 후손으로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던 그가 배웅 나온 사람 하나 없이 그렇게 강호의 거친 바람 속으로 들어갔다.
조공공의 촛점 없는 시선이 어두운 밤하늘로 던져졌다.
소군!
소군……!
진정으로 돌아오신 겁니까?
대답이 있을 리 없는 깊은 밤하늘 속 왜소하게 뜬 달에게 그는 묻고 또 물었다.
* * *
비슷한 시각, 벽소운 역시 조공공이 보고 있는 초승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금성 외곽, 석비룡과 벽소운이 처음 만났던 그 골목 어귀의 허술한 객잔 뒤였다.
그녀는 달그림자 속에 몸을 감춘 채, 본래 어둠의 한쪽이었던 것처럼 몸을 작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벽소운은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자시(子時)…… 이제 시간이 됐어. 오늘도 그 인간은 저 골목을 빠져나와 이곳을 경유해서 어디론가 사라질 거야."
어김이 없었다.
항상 자시가 되고 일각의 시간이 지나면 석비룡은 저 골목 어귀에서 한 마리 비조처럼 나타났다.
쉐엑……!
신기루처럼 그녀의 머리 위를 스쳐 아득히 사라져 갔다.
그녀는 초승달에게 투정이라도 부리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짐짓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칫! 빨라도 어느 정도 빨라야 따라 잡을 거 아냐? 누가 천리무영 아니랄까 봐……."
그렇게 불평을 터뜨릴 만도 한 것이, 벽소운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보름 동안이나 석비룡의 뒤를 미행하는데 실패했다.
대체 그가 자금성에 머무는 이유는……?
그의 목적은 무엇일까?
당신이 보름 전 자금성으로 들어올 때부터 난 계속 미행을 했어. 결론부터 말하면 난 당신이 무슨 속셈으로 이곳에 왔는지 다 알고 있어.
처음 석비룡을 만났을 때 했던 말은 순전히 그녀가 지어낸 거짓말이다.
벽소운은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투덜거렸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걸까?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일단 다 아는 척 밀어부처 봤지만 그 교활한 인간이 어디 헛점을 보여줘야 말이지."
찌르르……
찌르르……
조용한 어둠 속에서 울어대는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여간 구슬프게 들리지 않았다.
벽소운은 그 소리를 듣자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울적해졌으며 공연히 뭔가 실수를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풀벌레 소리 한 번 처량하네."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놓고 보니 더욱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벽소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한심하군. 그 인간이 어느 곳에서 뒹굴건 말건, 밤마다 어딜 쏘다니던 간에 왜 상관하려 하지?"
일순 그녀의 눈빛이 또렷해지며 갑자기 겁먹은 소리를 했다.
"설마…… 내가 그 음흉하고 뻔뻔한 색마에게 이상한 관심을……?"
전신에 싸늘한 소름이 돋았다.
벽소운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극구 부정을 했으나 가슴이 답답한 것은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가만……?"
갑자기 벽소운은 허리를 곧추 펴며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발소리가 느껴져. 그 작자가 오고 있어.'
그녀는 운기조식이라도 하듯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그녀는 한탄과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전율스러울 만큼 빠르군! 십 리 밖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분간할 수 있다는 만청신이(萬廳神耳)의 수법으로도 위치조차 감지하기 힘들 정도라니…….'
벽소운의 눈이 점점 동그랗게 변했다.
육리(六里) 밖……
사리(四里)……
이리(二里)……
'이……인간이 이렇게 빨라도 되는 거야?'
벽소운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을 때였다.
"나타났어!"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슈와아아아……악!
한 줄기 유성이 골목 어귀에서 나타났다 싶은 순간 벽소운 앞의 나무와 뒤쪽의 객잔 지붕 위를 지나갔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가공할 속도였다.
'근래 며칠 동안 볼 때마다 느낀 거지만 저 인간의 만리표풍은 정말 걸작이야!'
하지만 벽소운도 놀라고만 있지는 않았다.
"좋아! 오늘은 정말 누가 빠른지 끝장을 내보자!"
그녀는 냉소(冷笑)를 터뜨리며 발끝으로 탁!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파아아아아……!
막 시위에서 퉁겨 낸 화살 같다고나 할까?
아니 그보다 더 빨랐다. 차라리 섬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사람이 사라졌어!'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혼절했으리라.
벽소운이 이 순간 펼치는 경공술은 너무 빨라 그녀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묻혀 버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영광으로 알아라, 석비룡! 내 평생 한 번도 시전한 적이 없는 신행제종(神行蹄踪)의 경공술로 상대해 줄 테니!'
신행제종!
내공의 소모가 너무 극심해서 잘못될 경우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경공술이다.
사백 년 전, 신행제종을 창시한 인뢰화(人雷火)라고 불리던 장손추(張蓀推)조차 평생 단 세 번을 사용한 경공술.
벽소운은 자신만만했다.
"네가 아무리 천하에서 가장 빠르다는 천리무영이라 할지라도 소용없어!"
허나 그 자신감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쉐에엑……!
벽소운은 전력으로 신행제종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석비룡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석비룡 앞에는 깎아지른 듯 높은 절벽이 나타났다.
벽소운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흥! 아무리 네 경공술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저 절벽 앞에서는…….'
이번에도 그녀의 기대는 무참히 꺾였다.
석비룡은 절벽에 부딪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속도를 줄이지 않더니, 크게 한 번 숨을 몰아쉬고는 곧바로 절벽 아래에서 위를 향해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이런……!'
벽소운이 혀를 찼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마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녀의 몰골은 처참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으며 얼굴에는 방금 세수를 마친 듯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화려한 의복 역시 소나기라도 맞은 듯 땀에 후줄근하게 젖어있었다.
벽소운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이를 바드득! 갈았다.
"장손추……! 신행제종을 수련하면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고 했어?"
애꿎은 인뢰화 장손추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헌데 고작 열 번의 호흡도 끝나기 전에 까마득히 상대를 놓쳐? 겨우 이따위 쓸모 없는 무공을 만들어 놓고 사백 년 간이나 폼을 잡았다는 거야?"
그녀의 기세는 독오른 암고양이처럼 매서웠다.
"지금이 사백 년 전이고 네놈이 살아 있었다면…… 넌 내 손에 뼈도 못 추렸을 거야!"
벽소운은 탈진한 모습으로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절벽 위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멀리 떠난 님을 그리워하는 듯 안쓰럽게 느껴졌다.
벽소운은 나직이 소리를 내어 불러본다.
"비룡…… 석비룡……."
잡히지 않는 한 남자의 이름을……
(3)
폐허 위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게 타 버린 서까래, 반쪽만 남은 대웅전과 목이 달아난 불상, 세찬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주저앉을 것 같은 누각들.
뎅, 뎅, 뎅……!
언젠가 이곳에 절이 있었던 것을 알려주는 것은 이 종소리 뿐이리라.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무겁게 울리는 그 소리는 끊일 듯 끊이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쉐에엑……!
바람 속에 바람이 불었다.
산 아래에서 바람을 거슬러 온 한 줄기 바람은 가파른 절벽을 수직 상승했고, 절벽 위에 올라와서는 한 호흡도 쉬지 않고 그대로 암자를 향해 쏜살같이 불어왔다.
석비룡의 신형은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이제는 바람 소리만 들릴 뿐 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은 경공술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대부분 경공술을 발휘하는 무림인들도 방향을 바꿀 때면 속도를 떨어뜨리기 마련인데, 석비룡은 불 탄 불당 사이를 구비돌면서도 조금도 속도가 줄지 않았다는 점이다.
콰쾅!
제 속력을 못 이긴 듯 석비룡은 숯덩이로 변한 전각의 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그곳은 종각이었다.
비록 볼썽 사납게 그을리긴 했지만 엄청난 화재 속에서도 용케 버텨 낸 녹슬은 종이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다.
여기가 목적지인가?
석비룡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후우욱!
제자리에서 허리를 굽힌 채 경공술을 펼치는 동안 한 번도 쉬지 않았던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뎅! 종소리가 울렸다.
석비룡은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것은, 종 부근에는 종을 때리는 사람도, 그럴만한 도구도 없는데 종이 저절로 울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아흔 아홉 번째 종소리…….'
석비룡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종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백 번째 종소리는 울리지 않았습니다. 노야(老爺)!"
벽에서 벽을 타고 정정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구나.…… 정확히 구십구 번째 타종이었다.…… 정확히 삼 년 만에 해냈음이니, 그만하면 천리무영이라는 명호가 부끄럽지 않겠구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마치 네 면의 벽 뒤에서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네 사람이 동시에 말한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석비룡은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빙긋이 웃을 따름이다.
"후후……! 노야의 가르침 덕분이지요."
"가르침이 있어도…… 그것을 담을 그릇이 좋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지."
석비룡은 오른쪽 벽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약조하신 대로 이젠 노야를 뵐 수 있겠지요?"
그의 눈이 정확했던가?
더 이상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석비룡은 스윽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육신이 마치 빨려 들기라도 할 듯 벽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벽을 통과한 석비룡은 자욱한 안개 속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일찍이 그가 펼친 적이 있던 진법이었다.
신수궁의 장수옥과 일양파 문주 제천혈랑 백충산이 빠졌던 환상진과 같은 종류였다.
오른쪽에 수십 길 절벽이, 왼쪽에 웅장한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좀 더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나타났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꽃밭과 좋은 향기가 나는 연못들, 형형색색의 날개로 하늘거리는 나비, 학은 고고한 자태로 하늘을 날고, 여기저기서 선남선녀(善男善女)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석비룡은 그 가운데를 가로질렀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잠시 후 그의 전면에는 속세의 것이 아닌 신비스런 암자가 나타났다.
석비룡은 걸음을 멈추고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삼 년 만에 뵙습니다, 노야!"
고개를 들기 전에 노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어, 삼 년 만에 네 기도(氣道)가 일취월장했구나! 장담컨대 향후 백 년 이래로 너 정도의 실력자는 절대 열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고마우신 말씀이오나…… 지금 전 오갈 데 없어 노야께 의지하러 온 어린아이나 다름없습니다."
석비룡의 얼굴과 목소리에서는 평소와 다른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삼 년 전 제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신다면 문을 열어 주십시오."
덜컹!
암자 좌우 문이 활짝 열렸다.
석비룡은 고개를 드는 순간 흠칫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암자 안에는 흰 수염을 가슴 앞까지 길게 드리운 신선풍의 노인이 있었다.
그는 매우 온화해 보였고 다정한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 고귀한 기품이 이미 세상에 누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석비룡이 놀란 까닭은, 노인은 좌정(坐定)한 채 공중에 떠 있었는데 전신에서 수천수만의 하얀 실 같은 기류가 뻗어 나와 암자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뜩하면서도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그 실 하나하나는 실제로는 몸에서 뻗어 나오는 기(氣)로서 그것이 눈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이 노인의 무공이 얼마나 높은지 알려주는 증표와 같았다.
'노야의 만공모사(萬空毛絲)가 이미 완성되었단 말인가!'
노야는 따스함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석비룡을 내려다보았다.
"아느냐? 내가 널 볼 때마다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네가 발전하는 모습은 훌륭하다 못해 완벽할 지경이야. 널 통해서 내 생명이 너의 몸속에서 살아 숨 쉬는 걸 확인할 수 있음이니…… 넌 내 생애의 가장 위대한 작품인 게야."
석비룡은 거듭 허리를 숙였다.
"노야께선 절 키워주신 은인입니다. 무영비록도 노야의 도움이 없었으면 터득하기 힘들었을 터! 제가 어찌 촌각이라도 노야의 보살핌을 잊겠습니까?"
노야는 빙그레 웃었다.
"네 진심은 아니겠지만 듣기에 과히 나쁘진 않구나."
"노야……."
석비룡은 뭔가 곤혹스러운 듯 망설였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삼 년 전 노야께선 제게 범천불음으로 타종을 백 번하기 전에 자금성의 백석로에서 여기까지 당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껄껄껄껄!"
석비룡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야는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너의 호승심을 격발시키기 위해서였지! 최소 육 년은 소요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노야는 흡족한 듯 고개를 크게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좋아! 기꺼이 약속을 지킬 준비가 되어있다. 소원을 말해보아라."
석비룡은 분위기에 압도되는 듯했으나 마음을 단단히 틀어쥐고 입을 열었다.
"노야, 저를 세상에 태어나도록 만들어 주신 아버님은 누구입니까?"
노야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석비룡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어린 시절 등룡왕부에서 성장하면서…… 전 황족(皇族)이신 어머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만을 알았을 뿐, 부친의 신분에 대해선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엔 아버님에 대해 묻는 것 자체가 금기였고…… 차후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등룡왕부가 멸망한 후엔 누구도 그 대답을 해줄 인물이 없었으니까요."
순간 노야의 볼이 푸르르 떨린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은 석비룡의 착각이었을까?
노야는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석비룡의 강렬한 시선을 외면했다.
"노야, 말해주십시요."
석비룡은 마른침을 꿀꺽하고 목젖 아래로 내리눌렀다. 목 안이 갑갑했다. 무릎 위에 얹은 그의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노야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넌 나와 여러 가지 내기를 했었지…… 네가 이길 때마다 내가 지닌 무공을 한 가지 씩 전수해 주었고, 그 결과 넌 내 무공을 대부분 전수받았다. 허나! 넌 아직 진정한 내 무학의 정수인 만공모사를 전수 받지 못했어.…… 내가 너라면 지금이라도 소원을 바꿀 것이다."
석비룡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답했다.
"다시 묻겠습니다. 제 아버님은 누구입니까?"
"어째서 내가 너의 부친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느냐?"
"노야는 제 어머님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신 분입니다.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기도 하지요."
노야는 여전히 석비룡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예전에 난 너에게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넌 지금까지 충실하게 내 뜻을 따라 주었거늘…… 이제 와서 갑자기 뿌리를 찾으려는 까닭이 무엇이냐?"
"전 단 일각도 제 아버님에 대한 의문을 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때가 될 때를 기다려왔을 뿐……."
석비룡은 마치 거대한 적과 싸우기 직전처럼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신선과 같아서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을 듯한 노야의 얼굴에 노여운 표정이 떠올랐다.
"어리석은 놈! 네 모친은 황제의 누이다. 네 몸에 황족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면 되는 것이지, 얼굴도 모르는 부친의 존재에 집착하는 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
석비룡은 고집불통이었다.
"허나 제 성은 주씨(朱氏)가 아닙니다. 또한 등룡왕부가 멸망한 순간부터 제게 황족이란 의미는 소멸되었습니다."
노야의 눈가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어리석은 놈! 기어이 만공모사를 터득할 기회를 영원히 저버리겠다는 것이냐?"
그러나 석비룡의 결심은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았다.
"전 오직 아버님을 찾고 싶을 뿐입니다."
그 순간 노야의 몸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갔던 수만 가닥의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콰콰쾅!
암자가 무너져 내렸다.
잠시 후 암자의 잔해 위, 뿌옇게 날리는 흙먼지 속에 노야가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네 나이 다섯 살 때부터 무공을 가르쳐왔다. 무영비록을 제외한 너의 모든 무공이 바로 내게서 비롯되었음이니…… 이제 나는 네가 지난 삼 년 동안 얼마나 강해졌는지 시험해 볼 터!"
공격을 당하기 전에 이미 석비룡은 가슴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곧이어 노야의 몸에서 강렬한 강기가 자신을 향해 뻗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피할 수 없어! 아니 피해선 안 된다!'
슈슈슈슈……!
석비룡은 양손으로 태산이 무너질 것 같은 강기를 받아냈다.
아무런 폭발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석비룡의 몸이 십여 장 뒤로 주르륵 밀려났을 뿐이다.
'과, 과연 노야의 힘은…….'
쓰러질 듯 비틀거렸지만 이내 발바닥에 힘을 주어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노야를 쳐다보기 위해 얼굴을 들었다.
노야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노야!"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너의 선택으로 인해 네 삶은 일대 혼돈에 휘말릴 것이다. 허나 네가 원한 것이니 가르쳐주마! ……네 부친의 이름은 현영(賢英)……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그 뿐이다. 이후의 모든 것은 네가 직접 알아내거라! ……허나 넌 분명 오늘의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반드시.'
전음이 끝나며 주위를 이루고 있던 무릉도원의 풍경이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석비룡은 망연자실 우두커니 서서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입 속으로 노야로부터 듣게 된 한 사람의 이름을 되뇌는 것이다.
"현영……! 현영! 그것이 내 아버님의 이름……."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