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장 아름다운 人質 -3
"어, 어찌 생각하면… 지존전과 군림전이 다시 화합(化合)한다는
… 천명(天命)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흠……!"
광무군은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지존소야 야극나는 대단한 말재간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수십만 명을 다스려 본 여걸답게, 자신의 의사를 지극히
조리정연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가장 큰 무기라 할 수 있는 눈물까지 흘려 가며.
"지존은 만에 하나, 군림전의 세 사람이 세력을 일으켜 복수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대응책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쉽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
광무군은 그녀를 쏘아봤다.
하나, 야극나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뱅글뱅글 웃기만 했다.
그녀는 광무군을 마도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신의 힘
으로 광무군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저와 함께 지존을 만나러 간다고 약속하신다면… 그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모탁률은… 내 손 아래 죽을 자요."
"호호… 하여간 한 번 배알하십시오. 그분은 뛰어나신 분이시니,
상공의 복수심을 봄눈 녹이듯 녹일 것입니다!"
"……."
"호호… 가장 중요한 것은 칼자루를 쥔 쪽은 지존전이라는 것입니
다. 호호! 군림지존은… 죽지 않았습니다!"
"으으… 음!"
"전륜천왕의 씨앗을 받아 소야를 잉태한 군림지존 아랑(阿娘)은…
지존만이 아는 곳에 갇혀 있습니다."
"그, 그게 사실이냐?"
"제가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다른 분도 아닌 군림소야의 면
전에서. 호호! 성자(聖者) 아달단(阿達단)의 피를 이어받은 천축
제일혈통(天竺第一血統)의 소유자 앞에서!"
"내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것이 정녕 사실이냐?"
"예!"
"좋아. 그럼 가서 구해 드려야지! 하나, 너의 힘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요?"
"너와 함께 가면 오히려 난처해진다. 왜냐하면 모탁률은 네가 살
아 오기를 바라고 있지 않으니까"
"그, 그럴 리가?"
야극나는 몸을 휘청였다.
"훗훗… 내 짐작대로라면 야극나는 이미 사자명부(死者名簿)에 들
었을 것이다!"
"예… 엣?"
"훗훗… 너를 죽이려 한 자의 배후에는 네가 하늘같이 섬기는 모
탁률이 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지존께서 왜 나를……?"
"명분(名分) 때문이지."
"명분이라니요?"
"백도는 복수심마저 숨기고 이십 년 간 숨어 세력을 키웠다. 모탁
률은 그것이 두려워 한 가지 계략을 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자
신이 가장 사랑하는 척한 너를 중원인의 손에 죽게 한다는 것이
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야극나는 악을 써댔다.
"훗훗… 내 짐작이 틀린 것이라면 너를 순순히 풀어 주겠다."
광무군은 웃다가 야극나에게 자신의 겉옷을 던져 주었다.
얼마 후 광무군은 속옷 차림에 소지품을 챙겨 지닌 채, 가슴에 자
신의 겉옷을 헐렁하게 걸친 야극나를 안고 동굴을 나서게 되었다.
해가 이미 중천(中天)에 떠 있었다.
참새 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웠다. 산 속이라 그런지 여름같이 느껴
지지 않았다.
슥-!
광무군은 그늘을 택해 몸을 날렸다. 대기 중에 선이 그어지듯, 광
무군의 신형은 쾌속하게 나아갔다.
야극나는 그 빠름에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그녀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렸다.
'상상 이상의 고수다. 지존전의 적 중 이런 고수가 있다니… 역시
… 피는 무시할 수 없다.'
그녀는 입술을 파랗게 물들였다.
제 26장 아름다운 人質 -4
거대한 분지(盆地), 상복(喪服)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애고… 애고……!"
머리를 풀어 흩트리고 흐느껴 우는 사람들의 수는 이천에 달했다.
그들은 소야가 지존소야 자격으로 강제로 차출해 끌어들인 소야
휘하의 고수들이었다.
패천전(覇天殿)이 망하기 전 패천전을 나선 사람들 사백,
통천교(通天敎)의 고수 오백,
미혼색향림의 정예고수들,
을목마마찰의 마승(魔僧)들.
그들은 관(棺) 하나를 중심으로 무수한 동심원을 만들고 있었다.
관(棺), 수정관(水晶棺)인데… 뚜껑이 열린 상태였다.
관 안에는 시신(屍身)이 없고, 대신 피묻은 의복과 화려한 여인의
장신구가 피 묻은 채 놓여 있었다.
관 뚜껑은 관에 기대어져 있었다.
그 위, 붉은 천이 덮여 있고 먹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천하제일 마녀(天下第一魔女) 지존소야(至尊少爺) 야극나(也剋
那)께서 시신도 남기지 못하고 살해당하셨도다.
철천지한을 꼭 풀리라!>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울 뿐이었다.
눈물도 없이 울부짖는 이유는 하나, 죽었다고 알려진 여인이 그네
들에게 너무나도 악독했기 때문이었다.
지존소야 야극나, 그녀는 지금 단애 꼭대기에 있다.
그녀는 미장부의 품에 안긴 채,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장례식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내, 내가 죽었다고 소문나다니……!"
그녀는 교구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훗훗…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으으, 어… 어서 가서 말해야지!"
야극나가 몸을 뒤튼다.
젖봉우리가 옷섶 밖으로 튀어 나올 때.
"그러지 마라. 훗훗,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음침한 놈이 자라목을
내밀려다가 다시 쏙 들이밀게 된다."
"무… 무슨 말씀이오?"
"모탁률은 네가 살아나기를 바라고 있지 않다. 훗훗……!"
광무군은 시신 없는 장례식이 거행되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짐작대로다.'
그는 대장부의 풍모를 보이며 말했다.
"모탁률은 흉악한 자다."
"그… 그렇지 않아요! 얼마나 내게 잘 대해 주셨는데……."
"핫핫… 물론, 네게는 잘 대해 주었을 것이다."
"으으… 음……!"
"훗훗… 그는… 너를 중원으로 보내며 몇 가지 명령했을 것이다."
"그래요."
"그 중에는 진짜 네가 할 일도 있었을 것이고, 이 일을 만들어 내
기 위한 예비적인 일도 있었을 것이다."
"예비적인 일?"
"훗훗… 너의 행동 중 이상한 것이 많았었다. 그것은 너의 지존차
(至尊車)가 백도인(白道人)들은 절대 다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
광무군의 눈빛은 아주 날카로웠다.
"그, 그건……."
"물론, 그것은 모탁률이 네게 명한 것이었으리라!"
"그래요! 사부님의 엄명이었어요, 무혈중원행(無血中原行)은!"
"훗훗… 그리고… 너는 일단(一壇) 오령(五令) 휘하 사람들에게는
매우 포악하게 굴라고 명령받았을 것이다!"
"으… 으음……."
야극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질끈 문 입술 사이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너는… 일단 오령 휘하의 정예고수들을 너의 휘하로 끌어
들이라는 명을 받았을 것이다!"
"……!"
야극나는 전신이 석상으로 화해 버린 듯 미동도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뚱이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광무군은 눈길을 분지 쪽으로 돌렸다.
울부짖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사존 휘하의 정예고수들이라 할
수 있었다.
패천전이 쉽게 함몰되었던 이유, 그리고 광풍방 사람들이 연승(連
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너무나도 명료했다.
"속은 것이다. 나마저도… 아니, 혈천수사(血天秀士)마저도!"
광무군은 차게 중얼거렸다.
마(魔)는 허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제껏 쓰러진 중원마도의 고
수는 모두 허수아비라고 할 수 있었다.
진짜 고수들은 남아 있었다.
그들은 한 곳에 모여 대마궁(大魔宮) 축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고, 지금 그들은 우는 척하나 몹시 즐거워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