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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조사의 진전(眞傳)을 얻다
1
"삼가 천패문 삼십대 손 용해린이 십 육 대 선조님을 뵈옵니다."
그의 목소리는 사뭇 떨리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나의 후예여!〉
선조의 유해가 안치된 곳에서 유일하게 볼 수 없었던 분.
천패문 사상 최강의 인물이라는 선조를 뵙는 것은 천황패력공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 수 있다는 기쁨 이전에 경건함이 먼저였다.
〈아마도 그대는 지금쯤 큰 난관에 부딪혔고 내 종적을 찾기 위해 많은 애를 썼으리라.
나 또한 그 같은 결함을 없애려고 천하를 주유하며 방법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천황패력공보다 뛰어난 무공이 없었다.
그러나 노부는 혈마의 발호를 알게 됐고, 선조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이 중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중략)… 본문으로 돌아오는 도중 천뢰권황이란 인물을 만났고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이 동굴에서 죽기 전까지 비무와 토론을 하며 지내게 된 것이다.
결국 나는 그와의 생활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연환(連環)의 묘(妙)와 힘의 분배(分配)라 할 수 있었다.〉
"연환과 힘의 분배……!"
그 자신도 그 문제 때문에 몇 달 전부터 고뇌하고 있었지 않은가?
기대감을 갖고 그는 계속해서 글을 읽어 내려갔다.
〈난 천황패력공을 적절히 분배하며 연환으로 격발해 칠성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 천황패력공을 구성까지 익히게 되었으며 그 가공할 공력을 연달아 세 번 내치는 방법을 알아냈다……〉
"구성까지……!"
용해린은 부지중 탄성을 발하며 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천황패력공은 칠성이 넘어서면서 전 단계의 두 배 이상의 위력을 보였다. 팔 성은 칠성의 두 배, 구성은 팔성의 두 배의 위력이다.
그 방법을 책자에 기록해 놓았다.
……중략……
본래 본문으로 돌아가 죽어야 하지만 나는 친구가 좌화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을 것이다.
천황패력공은 가히 고금제일이다.
당부하건대, 구성에 이른 것에 안주하지 말고 끝을 보아라. 그것은 일맥으로 내려오는 천패문주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끝없이 발전하고 있을 혈마를 견제하는 힘이 되리라.
후예에게 무운이 깃들기를 지하에서나마 기원한다.
천패문 십 육 대 문주 천문선생 절필.〉
용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그의 시신에 절을 올렸다.
이어 앞에 놓인 책자를 집어 들었다.
〈천문유고(天文遺稿).〉
책의 두께는 아주 얇고 가벼웠다. 그러나 용해린에게는 그 얇은 책자가 세상 그 무엇보다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벅찬 감흥에 사로잡히며 그는 책을 펼쳤다.
서책 안에는 한 가지의 구결만이 적혀 있었다.
〈천황패력보결(天荒覇力補訣).〉
무수한 글들이 용해린의 눈으로 들어왔다.
천문서생이 천뢰권황과의 비무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천황패력공의 내공심법을 보완한 구결이었다.
용해린은 차분히 글을 읽어 내려가며 무아지경에 빠져갔다.
이 각 정도 지났을까?
"아, 이러한 방법이 있었다니……."
용해린은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꿈틀대던 안개들은 일시에 사라지고 마치 죽었던 살들이 떨어져 나가고 새 살이 돋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껏 그를 눌러 왔던 칠성의 벽.
아니 역대 천패문의 숙원이었던 칠성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어 용해린은 천문유고를 품안에 넣고는 이내 십 육 대 선조에게 머리를 숙였다.
"천패문 삼십대 손 용해린, 선조님의 유고를 받들어 무공의 완성과 혈마를 뿌리뽑을 것을 약속합니다. 부디 지켜 봐 주십시오!"
한 번 더 절을 한 용해린은 신형을 돌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에는 만년금구가 남궁운령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듯이 엎드려 있었다.
꾸우우……!
만년금구는 꼬리와 머리를 흔들어대며 낮게 울었다.
아마도 성취를 축하함이리라.
"후훗! 고맙네!"
이어 용해린은 남궁운령을 안아들었다.
"먼저 이 여인을 대륙의 해안가에 데려다 놓아야겠군."
용해린은 만년금구의 등에 올라타고 두어 번 등을 두드렸다.
"자, 가자!"
* * *
"여긴…… 어디지?"
남궁운령은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신형을 벌떡 일으켰다.
"앗! 마라천환검은?"
그녀는 황급히 자신의 품을 뒤져 보았다.
다행히 마라천환검은 그녀의 품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틀린 것이 있다면 금갑은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마라천환검과 요결이 적인 금판만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찌된 일이지?"
분명 한령빙마의 일장을 맞고 의식을 잃었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물건은 틀림없는 진품인데…… 음,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 누군가가 나를 구해 주었었지……."
한령빙마의 일장을 맞고 모래사장으로 곤두박질칠 때 자신을 받아준 강인한 팔의 느낌.
아직도 그 느낌이 가슴에 남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급히 자신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아니? 내상이 치유됐다! 다른 상처들까지……."
급히 내력을 운용시켜 본 남궁운령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이, 이럴 수가! 내력이 일 갑자 이상 상승되었다.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몸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분이?"
한령빙마의 손에서 구해 주었던 그가 자신의 내상을 치유하면서 무언가 영약 같은 것을 복용시켜 주었던 것이 분명했다.
문득 그녀의 시선에 찢어진 의복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반으로 줄어든 천년하수오가 보였고, 기이한 빛을 발하는 자신의 단전 부위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설마…… 천, 천년하수오? 그럼 내가 천년하수오를 복용했단 말인가?"
분명 천년하수오였다.
또한 천년하수오를 복용하게 되면 아무리 씻고 닦아내도 그 향기가 삼 일 동안 지속되며 한동안 단전 부위가 빛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남궁운령의 눈가에 물기가 스몄다. 동시에 그녀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타깝게도 은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무림인들이라면 천년하수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에 혈육도 내버릴 정도였다. 하물며 생면부지인 자신에게 주었다는 것은 평생 동안 절을 한다고 해도 못 갚을 대은(大恩)이었다.
남궁운령의 눈이 반짝였다.
"찾으리라! 평생이 걸리더라도 내 기필코 은인을 찾아 보답하리라!"
한동안을 치솟는 격정에 몸을 떨던 그녀는 문득 마라천환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돌변하며 살기가 흘러 넘쳤다.
"아버님을 돌아가시게 한 자들! 하나도 남김없이 혈채(血債)를 받아낼 것이다!"
당장이라도 서리를 뿌려 낼 것 같은 그녀의 두 눈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지금쯤 집에 어떤 변고가 생겼을지 모른다. 동생 무하는 무사한지 모르겠다."
휘익―!
그녀의 모습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 주시하는 한 쌍의 눈이 있었다.
용해린이었다.
"됐다. 이제 나도 폭풍군도로 돌아가야겠구나."
그는 이내 신형을 날려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수평선 너머 바다 한가운데 하나의 거대한 황금 거북이가 물 위에 떠서 용해린을 맞이했다.
"금구씨! 이제 돌아갑시다!"
금구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흠…… 아버님과의 십년지약(十年之約)이 이제 이 개월밖에 남지 않았군. 그 안에 선조께서 남기신 요결을 바탕으로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3
비가 온 후라서인지 장강(長江)의 물결은 평소보다 사나웠다.
노도처럼 격랑 치는 장강의 물줄기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가에 두 사람이 나란히 강물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친 신선풍의 동안학발의 노인과 패기가 넘쳐흐르는 사십대 후반의 흑의 중년인이었다.
패기만 따진다면 천하의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천하의 이런 인물은 오직 하나였다.
그는 천패대공 용잠이었다.
십 년 전 혈마천의 천 명의 혈왕마인을 쓰러뜨리고 혈마천주 만마혈황에 의해 절벽으로 떨어졌던 용잠이었다.
십 년이 지난 동안 그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용잠의 옆에 선 동안학발의 노인.
비록 마의를 걸치고 있었으나 전신에서 흐르는 부드럽고 강인한 기운은 무림의 절대자에게서 느껴지는 절대적인 위엄이었다.
두 사람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지켜보며 말이 없었다.
문득 마의노인이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깨며 열렸다.
"노제(老弟)! 린아와의 십년지약이 내일로 다가왔는데 가서 만나 봐야 하지 않겠는가?"
열릴 것 같지 않던 용잠의 입도 열렸다.
"십 년의 시간이 길긴 했습니다. 하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구만……."
마의노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마의노인의 허리에는 작은 활이 매달려 있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반투명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활이었다. 겉에 뇌전(雷電)문양이 새겨진 작은 활. 자세히 본다면 기이하게도 활의 전신으로 미미한 번쩍임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벼락이라도 머문 듯한 모습이었다.
궁의 몸체에는 흐릿하게나마 전자체(篆字體)로 된 글이 보였다.
천궁(天弓).
활의 이름인 듯했다.
번개 문양이 새겨져 있고 천궁이라는 이름의 활은 천하에서 한 사람을 나타내 주는 신물이었다.
천하십대고수 중 천하 제일인으로 불려지는 일황 천궁황(天弓皇), 그밖에 없었다.
마의노인이 바로 천궁황이었다.
그런 그가 천패대공 용잠과 같이 있었다.
용잠이 조용히 입을 열렸다.
"노형님,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전 이 년 전 남해에 가서 그 아이를 보고 왔었습니다."
"정말인가? 자네가? 허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때 그 아이가 연공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린아는 천황패력공의 성취가 육성을 넘어서고 있더군요."
십여 년 동안 용잠은 혈마천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혈마천의 힘이 더욱 가공함을 안 용잠은 아들의 무공 성취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그는 조용히 아들을 보고 왔던 것이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머지않아 해린이가 노형님을 찾아갈 것입니다. 아직 모자란 아이이니 형님께서 많이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허헛, 걱정 말게나."
이어 천궁황이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노제, 혈마천 쪽의 움직임은 어떤가?"
대답을 하는 용잠의 얼굴도 진중해졌다.
"그들의 중원 진군의 시간이 머지않았습니다."
잠시 침음하던 용잠은 다시 말을 이었다.
"변황오지에서 십지마군(十地魔軍)의 연무도 육 개월 정도 남았을 뿐이고 일천의 혈왕마군의 회복도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흠, 변황십지마군(邊荒十地魔軍)이 연무하는 곳은 알아내지 못했는가?"
"예, 그러나 조만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혈마천주의 연공은 얼마나 남았는가?"
"이백 여일 정도……."
잠시 동안 대화가 끊겼다.
하나 이내 용잠의 입에서 결의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노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막강한 패(牌)를 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해린이 그 아이는 앞으로 무림의 대세를 가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네."
천궁황은 흡족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용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형님이 진행하고 계신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정천맹의 일 말인가? 그 일은 아주 잘 되고 있다. 구파일방의 수뇌들이 전적으로 밀고 있기 때문이지."
"다행이군요."
"모두가 자네 덕분이지. 정도의 비밀연합체인 정천맹이 이만큼 자리를 잡은 것이 모두 자네의 공이지."
용잠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헌데 그들의 말은 실로 의미심장했다. 혈마천이 주시하고 있는 정천맹이 그들 두 사람이 만들었단 얘기였으니.
용잠의 시선은 저 멀리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궁황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다시 혈마천의 총단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예! 아직 저들의 모든 전력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으음, 자네에게만 어려운 일을 맡기는군."
"별말씀을…… 중원에 노형님이 계시니 제가 마음 놓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지요."
"중원 일은 내가 잘 알아서 하겠네. 걱정 말게나."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몸조심하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용잠의 신형은 어느새 강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천궁황의 안광이 강렬해졌다.
"중원은 실로 너무도 오랫동안 저들 천패의 가문에게 빚을 져왔다. 수백 년 동안 혈마천을 상대하며 천패는 무수히 많은 피를 중원을 위해 흘려주었지. 하나 이제는 중원도 혈마천을 상대해야만 한다."
천궁황의 신형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칙칙한 기운이 도는 지하대전(地下大殿)이다.
수백 장도 더 되는 아주 거대한 대전, 대전 전체에는 기이한 핏빛 안개[血霧]가 가득했다.
마치 피를 뿌려 놓은 듯한 안개로 인해 대전은 괴기스런 분위기를 물씬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물건이 대전에 가득했다.
그것은 관(棺)이다.
죽은 시신을 넣는 검은 색 관이 대전 곳곳에 셀 수도 없이 널려 있었다. 족히 천은 헤아릴 정도였다.
기이하게도 그 많은 관들은 하나같이 덮개가 열려 있었고, 관 안에는 시신들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하나같이 혈의(血衣)를 걸치고 있는 시신들.
죽은 시신들이라면 당연히 수의(壽衣)를 입고 있어야 하는데, 관 속에 든 시신들은 하나같이 핏빛 혈의를 걸치고 있다.
혈의인들은 죽은 시신들이 아니었다. 죽은 듯이 관 속에 누워 있는 혈의인들은 코로 미세하게 숨을 내쉬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을 휘도는 핏빛 안개가 혈의인들의 콧속으로 들락거리고 있다. 관 속에 든 혈의인들은 그 핏빛 안개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핏빛 안개, 그것은 대전의 한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나의 혈석(血石), 그곳에서 안개는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람의 피보다도 붉은 혈석 위, 십여 명의 인물들이 잠자듯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 실로 섬칫하고 기괴한 일이 혈석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스르르르…… 스으으읏……!
혈석 위에 누운 사람들의 신체가 점점 쪼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피가 혈석에 빨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머리가 사람의 피를 빨 듯 혈석도 사람들의 피를 빨아들이고 있으니.
츠으으으으……!
피를 머금은 혈석은 핏빛 수증기를 피워올리며 괴기스러움으로 대전을 가득 메웠다.
대전에 가득한 핏빛 안개는 바로 이것이었다.
핏빛 안개가 더욱 짙어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바싹 말라 들어가며 나중에는 뼈에 가죽만 씌워 놓은 괴기한 형상만 남았다.
전설은 말한다.
세상 어딘가에 생명체의 정혈을 빨아들이는 괴이한 핏빛 돌이 있음을 말이다. 그 이름은 흡정마혈석(吸精魔血石)이라 했다.
흡정마혈석은 마도인들이 꿈에도 바라지 않는 꿈의 돌이다.
이 기이한 혈석에 생명체가 닿으면 그냥 붙어 버려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기이한 흡인력을 벗어나지 못하며 닿는 순간 혈석은 삽시에 생명체의 정혈을 빨아들인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이한 것은 혈석이 빨아들인 정혈은 안개 같은 수증기로 피어오르고 마혈단무(魔血丹霧)라 부르는 그 기운은 마공(魔功)을 익힌 자들의 마공을 급속도로 증진시켜 준다고 했다.
그 마혈단무를 내뿜는 흡정마혈석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괴이한 것은 혈석 위에 누운 사람들이다. 혈석에 피를 빨리면 그 고통은 실로 엄청나다고 했다. 하나 혈석에 누운 열 명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신음조차 흘리지 않은 것이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되어 가도 표정은 물론 한 마디의 신음도 흘리지 않는 사람들.
결론은 하나였다. 누군가가 강제로 그들의 이지를 상실케 해 혈석 위에 뉘여 놓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순간 대전의 한 귀퉁이에서 여러 명의 인영들이 나타나며 혈석 위에 뼈만 앙상히 남아 바싹 마른 시신들을 치워 갔다.
그들의 표정은 덤덤했다. 이런 일에 이골이 난 듯한 표정들로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들은 쇠로 만든 가는 철판으로 뼈만 남은 시신들을 들어 냈다. 그리고는 그 시신들을 하나의 커다란 웅덩이에 던져 버렸다.
타다닥! 타닥!
뼈가 부숴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시신들이 내던져진 곳. 아아! 너무도 많았다. 그곳은 하나의 해골 무덤이었다.
수백 구도 훨씬 넘는 엄청난 해골들과 뼈들, 그들이 모두 흡정마혈석에 당해 그리 됐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진정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자들이었다.
도대체 어느 집단이 이러한 천인공노할 짓을 한단 말인가?
대전의 입구 쪽.
두 명의 인물이 관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핏빛 혈의를 걸친 인물과 갈의를 걸친 노인.
혈의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심지어 허리에 찬 검(劍)까지도 핏빛 일색이었다.
붉은 머리카락 아래 꿈에 볼까 두려운 혈안(血眼)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전신을 휘도는 핏빛 기운[血雲]은 절대적인 마기(魔氣)를 내포한 내가강기(內家疆氣)의 일종으로 그의 무공이 조화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만마혈황, 바로 그였다.
그런 그의 옆에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는 갈의노인.
세 가닥으로 난 수염이 특색 있는 갈의노인, 그는 바로 마종사뇌였다. 그는 만마혈황의 이 보 뒤에서 지극한 자세로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대전의 흑색관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아수라혈면인의 입이 열렸다.
"마종사뇌, 혈왕마인들은 언제쯤 깨어나겠는가?"
지극히 낮은 음성이다.
그 음성을 듣는 마종사뇌의 전신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지극한 두려움에서 오는 떨림이었다.
마종사뇌의 얼굴이 조금 들려졌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혼탁했다.
그는 다시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혈황(血皇)이시여―! 일천의 혈왕마인은 지금의 상태로 백 일 간 더 있으면 완벽한 힘을 얻어 깨어날 것이옵니다."
"백 일이라?"
만마혈황은 나직이 뇌까렸다.
관 속에 누운 혈왕마인들의 단전(丹田) 부위는 모두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번갯불에 탄 듯한 형상이었다.
만마혈황의 눈빛이 일순 파르르 흔들렸다. 그 순간에 잠깐 보인 그의 눈빛 속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천패대공―!"
끊어 뱉듯 말하는 그의 말 속에는 천패대공 용잠을 향한 분노가 녹아 있었다.
"십 년 전, 천패대공의 의해 본 천의 천하군림대계(天下君臨大計)가 틀어졌었다. 오직 천패대공 그 한 명 때문에……."
그의 혈안이 관들을 한 번 훑었다.
관 속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혈왕마인들은 천패대공에 의해 깨진 마공을 지금 흡정마혈석의 힘을 빌어 회복하고 있었다.
마종사뇌는 더욱 허리를 숙여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만마혈황이시여! 흡정마혈석의 마혈단정으로 회복된 혈왕마인의 마공은 과거보다 두 배의 능력을 지니게 되옵니다."
"좋아!"
만마혈황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종사뇌가 하는 일이니 잘 알아서 했겠지."
"감읍하옵니다."
마종사뇌는 황망히 허리를 숙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만마혈황은 화제를 돌렸다.
"해왕맹을 이용한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計)는?"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해왕맹의 이십만 무사가 중원으로 진군하게 될 것입니다. 해왕맹과 중원이 충돌하게 되면 별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천하를 접수하게 될 것이고, 본 천의 천년염원(千年念願)은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만마혈황의 시선이 혈왕마인이 든 관을 주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천맹의 움직임은?"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이미 정천맹 내에 확고한 간자(間者)를 심어 놨기에 그들의 움직임을 능히 파악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좋아. 확실하게 일을 처리하는군. 군사를 믿겠다."
이어 만마혈황은 대전을 나가려 신형을 틀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그는 마종사뇌에게 물었다.
"마천은…… 아직 막북에 있는가?"
"그렇습니다. 아직 살기가 모자란다 하시며……."
"흠."
만마혈황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천은 그의 아들이며 차기 혈마천의 주인이 될 인물이다. 하나 마천은 이곳에 없었다. 막북에 전쟁터에 가 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고금십병에서도 최고라는 역천쌍병(逆天雙兵)의 하나인 아수라혈을 쥐기 위해서였다.
아수라혈의 주인이 되는 자는 고금제일인에 등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만마혈황도 아수라혈을 쥐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는 아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쓴다.
극마(極魔)가 아닌 극마(克魔)의 방법으로 아수라혈을 쥐는 방법을.
만마혈황은 걸음을 옮겼다.
"난 다시 폐관에 들 테니 모든 것은 군사가 알아서 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만마혈황의 신형이 물 흐르듯 흐르며 대전을 떠났고, 그 뒤를 마종사뇌가 따랐다.
두 사람의 신형은 대전에서 사라졌다.
대전에는 괴기한 핏빛 안개만이 미미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 * *
―해왕맹이 중원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소문은 삽시에 천하에 퍼져갔고 무림인들의 가슴을 된서리로 후려쳤다.
해왕맹이 어찌해 중원을 침공하려는 것인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확실한 것은 그들이 중원을 공격한다면 가공할 혈풍이 분다는 사실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했다.
구파일방에서는 연일 긴급회의가 열려 그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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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