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뜀꾼 워크샵
*일시: 5월31~6월1일(토~일)
*장소: 여주 일성콘도
*참가인원: 총 26명
-부부동반: 14명/ 안병택-박명희, 이정만-김금자, 이희한-정영순, 장상용-최진희, 정종수-김영란, 채희묵-김선재, 최종헌-이민숙
-나 홀로: 4명/김유일, 박종성, 정경영, 황민연
-당일귀경: 6명/김종철-주성숙, 장용관-김경순, 강영구, 박복진
-아침귀경: 2명/ 홍승표-윤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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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영정
명성황후 생가
명성황후는 1851년 11월 민치록(閔致祿: 1799~1858)의 딸(자영)로 태어났다. 민치록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1630~87)의 5대손이다. 자영은 안국동의 감고당(感古堂)으로 올라오기 전 8세까지 여주에서 살았다.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책을 많이 읽어 총명하고 행동이 남달랐다고 한다.
3대 왕에 걸쳐 척족 김씨들의 섭정에 질린 대원군은 1866년 친척이 없고 단촐한 자영을 고종의 비로 간택했다. 황후는 춘추에 나와 있는 오랑케는 오랑케로 제압한다는 이이제이 (以夷制夷) 론으로 격동의 구한말 국제 정세속에서 탁월한 정치외교력을 발휘했었다.
그러나 그의 외교력은 일본의 침략 마수에는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도한 ‘여우사냥’이라는 작전 암호하에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자객들이 궁궐에 난입 황후를 살해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시해 2년 후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으며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때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고종이 승하하자 현재의 전곡 홍릉에 합장되었다.
근래 어느 시기보다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요즈음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을 되돌아보며 다시 한번 일본이라는 나라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오늘 현충일, 풍전등화같은 조선을 지켜려다 순국한 황후의 명복을 빕니다.
[참고]명성황후 시해사건 일지[1895년 10월 08일 새벽 5시]
http://blog.daum.net/cjdtks310/14967421
'나 고영근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http://gadian7.blog.me/801423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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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생가 맞은편에 위치한 명성황후 기념관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한 기념관이다. 520㎡의 전시실은 명성황후와 고종의 영정 등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져 봄, 가을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기념관 주변으로 넒은 주차장과 공중화장실, 연못 등을 설치하여 관람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명성황후기념관
김은혜해설사가 우리를 반기고 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어진
세종대왕의 어진은 세종전 안에 있으나 명성황후와 고종황제의 어진은 밖에 있다. 그러나 1300도로 구은 도자기로 돼 있어 햇살을 받아도 퇴색되거나 깨지지 않는다. 고종황제는 사진이 있어 사진을 모사했는데 명성황후는 사진이 없어 들은 얘기를 기초로 추사(抽寫)한 것이다.
명성황후 어진은 영국의 여해작가 이사벨라 비숍, 대사나 선교사들이 접해보고 묘사한 것을 기초로 해서 만들었다. 머리는 검고 윤이 났으며 눈매는 날카롭게 올라갔지만 나이 40 좀 넘긴 모습으로 호리호리했다고 묘사했다. 황후는 또한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 대화에 막힘이 없었고 설득력을 갖춘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되어있다..
명성황후의 어릴때 공부하던 모습(우측 상단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순종을 낳는 모습, 가례 모습, 국장모습을 도판화해놓았다.
일제가 한국 실상을 사진으로 왜곡
사진의 진실은 찍는 사람의 의도대로 나타나는데 일본이 우리의 실상을 알리는데도 그들에게 유리하게 찍어 세상에 알렸다. 인권에 관련된 것으로 큰지게에 어마어마한 짐을 진 어린아이라든가 젖가슴이 나온 여인들 등의 사진은 조선인들의 우매함 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고종 황제의 대한 제국 선포식 때의 복장이나 순종황제의 사진은 전적으로 일본이 의도한데로 나타나 있다. 총칼을 들고 찍게 한 것은 조선이 야만인임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머리를 깎고, 서양식 제복을 입어 백성들에게 황제로서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순종은 또한 근시인데 안경을 끼지 않고 찍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도굴 방지용 부장품
신라시대 왕릉의 부장품들이 금, 은 보석으로 돼 있어 도굴되었던 것을 감안해 조선시대 왕들의 무덤은 실생활에서 쓰던 책, 그릇, 머리빗, 도자기 등을 작게 해 의미만 부여하게 하여 도굴을 방지했었다.
상여가 살곶이다리를 지나간다.
고인이 좋은데로 가라고 대나무를 잘라 종이를 붙인 주간마 죽산마라고 하는 백마 두필, 적마 두필을 상여 앞에 세운다. 다 끝나면 태워 없앤다.
평시 좁은 다리라 임시로 늘려놓았다.
여주 출신 9명의 왕비와 여흥민씨
고려시대의 원종비 순경태후 김씨를 포함하면 고려-조선 양 왕조에서 9명이 여주 출신 왕비였다. 그중 태종비이자 세종의 모친인 원경왕후, 숙종계비 인현왕후, 명성황후, 순종비 순명효황후 등 4명이 여흥(여주)민씨 출신이다. 그 외 4명의 여주 출신 왕비는 영조계비 정순왕후, 순조비 순헌왕후, 헌종비 효현왕후, 철종비 철인왕후 등 모두 김씨 출신이다.
대한제국 탄생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회현동 황구단(圓丘壇)에서 프랑스식제복에 단발을 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519년 27대 임금 나온 시대와 달리 대한제국은 2대 황제,13년으로 끝난다. 사실 일본이 중국과 주종관계를 없애기 위해 나온제도였다. 황구단 조선호텔 안쪽에 있는데 일제는 그런 성스런 자리를 헐어버리고 조선호텔을 지었다. 이날 시해된 황후는 명성으로로 추봉되었다. '대한'(大韓)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다는 뜻을 갖는 것으로 쓴것이라고 한다.
서양 열강과 대등한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전통복장 아닌 프랑스나 러시아 황제복식을 입었으며, 단발령을 몸소 실천했고, 연호도 융희에서 광무로 바꾸었다. 상업화를 위한 노력 등 조선을 부활시켜보려고 온갖 힘을 다 써 보았지만 일제는 계속 목을 조여와 1910년 한일병합으로 정식 식민지 시대로 들어갔다.
일편단충(一片丹忠)
명성황후는 일편단충(一片丹忠)에소 보듯이 서예를 잘 한 것은 아니나 여인으로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황후는 한글 서간체 130편 정도 남겼는데 안부 묻는것 등 다정다감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 과거 급제한 친척이 좋은 자리를 부탁한 청탁 편지에 대한 대답에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부탁하지말라는 대쪽같은 성격을 볼 수도 있다.
오랑케는 오랑케로 제압한다는 이이제이 (以夷制夷) 론으로 격동의 구한말 국제 정세속에서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했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칼의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명성황후 생가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비로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시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이다.
1687년(숙종 13년)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墓幕) 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으며,명성 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다는 방이 있었던 자리에 탄생을 기념해 세운 "명성황후 탄강구리(明成皇后 誕降舊里)"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명성황후 영정이 있는 안채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비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명성황후가 태어난 옛마을)’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고,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음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飮敬書,광무 8년 갑진오월 어느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 새겨놓았다. 글씨를 쓴 이는 알 수 없으나 황태자 시절의 순종이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1904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민유중 묘와 신도비
민유중(1630~1687)은 숙종대의 척신(戚臣)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민광훈(閔光勳, 1595~1659)의 아들이며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의 동생이자 숙종(肅宗)의 계비(繼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의 생부(生父)이다.
묘는 능현리 명성황후생가의 뒤쪽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원형대로 잘 보전되어 있으며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배설석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또한 문인석 뒷면의 후수(後綬)와 폐슬(蔽膝)의 문양이 매우 화려하며, 망주석에는 세호(細虎)를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묘역 아래 명성황후생가의 우측에는 귀부개석(龜趺蓋石)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약 472)가 당당하게 서 있다. 귀부(龜趺)가 매우 사실적이고 역동적이며 머리가 묘가 있는 우측으로 돌아간 것이 특징이다. 용두화(龍頭化)된 머리위에는 “왕(王)”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둘째아들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증영의정(贈領議政) 시문정(諡文貞) 민공신도비(閔公神道碑)”라고 쓴 전액(篆額)을 통해 민유중의 신도비임을 알 수 있다.
회색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높이 245, 폭 106, 두께 46.5)의 사면(四面)에 비문을 각자하였으며, 건립연대는 “숭정기원지팔십년(崇禎紀元之八十年) 정해(丁亥, 1707, 숙종 33) 사월(四月) 일립(日立)”이다.
민유중 묘와 신도비는 숙종의 국구(國舅)라는 그의 신분을 감안할 때, 왕실의 공장(工匠)들이 참여한 당대 최고의 역사(役事)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여주군사에서]
감고당 (感古堂)
인현왕후의 사저이며 명성황후가 8살에 이사하여 왕비 간택 전 까지 머물렀던 곳으로서 영조가 감고당이라 명하였으며 처음에는 안국동에 있었으나 1966년에 쌍문동으로 이전하였다가 효문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2004년에 여주군에서 인수하여 2008년도에 중건을 완료하였다.
감고당의 솟을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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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산 수목원
2010년 4월 1일 무료로 개장한 황학산수목원은 현재 가꾸고 있는 단계다. 경사가 높지 않고 평평해 탐방하기 좋다. 시장이 개장시 무료입장 결정. 나무와 풀꽃에 이름을 붙여 놓아 가까워지는데 좋고 곳곳에 쉬는 곳을 마련해 쉴 수도 있다. 82,600여평에 1335여종(목본 615종, 초본 720종) 식물 보유.
멸종위기의 단양쑥부쟁이가 있고 층층둥글레 군락을 복원하고 있다. 항아리가든, 산열매원, 석정원, 나이테광장 등 14개 테마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항아리정원은 항아리에 수생식물, 소관목, 초본류를 다양하게 심어 주변 장연환경과 어울어진 공간이고 나이테 광장은 화강석을 나이테 모양으로 조성해 여주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시대별로 소개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수목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전망대 2층에서 잡아본 뀜꾼들과 어부인들
매룡리의 유래
매룡리의 유래: 용이 승천할 때 용의 비늘이 매화처럼 떨어져 마을 형세가 매화낙지형이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매룡은 수목원 조성당시 식재항 60년새 소나무 고사목과 알루미늄캔 365개를 이용하여 마치 은빛 비늘 갑웃을 입고 승천하는 형상을 재현한 작품이라고 한다.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매룡지가 나와
앵두가 빨갛게....
꽃중의 꽃 모란
전망대에서 바라본 수목원
키를 낮춘 달맞이꽃
놀이터에 동물들의 나무조각을...
노란 금계국길을 따라서
층층꽃나무라는데 꽃이 피지않아.... 이 수목원에서 복원중이라고....
표정이 환하지요.
부부를 다로 떼어 놓아봤습니다.
타조목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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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에서바라본 동쪽
콘도에서 바라본 서쪽 남한강
13층 일성콘도(오른쪽)와 5층짜리 남강호텔(밝은 빌딩)
남쪽 강변에서 본 북쪽 고층 아파트들 오른쪽 환한 건물은 남강호텔
동쪽 강남변 5성급 13층 썬밸리호텔
채희묵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