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집 작업에 박차를 가하다.
다섯명으로 본격 진영을 구축한 바크하우스는 2006년 2월까지 활발히 펼쳐오던 일련의 공연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첫 번째 앨범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헌데 뜻을 달리하는 멤버가 있었으니... 2006년 3월, 기타리스트 노진이 팀를 탈퇴한다. 노진과의 작업으로 만들어낸 두곡 For My Crazy Life (바크하우스 1호 공식 자작곡 – 이전에도 얄궂은 곡들이 있긴 있었다)와 두 번째곡 Red One만을 남겨둔채...
네사람의 멤버는 각자 기타리스트를 물색하기로 하고 곡작업에 돌입한다. 이때 앨범을 만들게 된 이유는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자는 의미였다. 밴드가 라이브를 많이 하는것도 당연하지만 결과물이라는 걸 손에 쥔다는 것 또한 밴드에겐 중요했기 때문이다. 거창한 목표를 통해 만들어 낼 앨범이라기 보다는 바크하우스라는 밴드를 통해 우리 스스로의 결과물을 손에 쥐고 만져본다는 의미가 더컸다. 그리고 우리의 라이브를 직접 보지 못하는 분들에게 우리의 음악을 직접 전해 줄 수 있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이에 동요를 만든다는 마음으로(동요를 폄하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거창한 것 보다는 그냥 단순하고 쉽게 가보자.. 뭐 이런 의미) 편안하게 작업 해보자는게 당시의 모토였다. 뭔가 욕심을 부리다 보면 당초 이루고자했던 당초의 목표는 소실되고 멤버 상호간 불화가 생겨 급기야 팀이 해체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녹음실에 들어간 밴드의 8,90%가 녹음 마무리도 못하고 팀에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녹음실에서는 공공연히 얘기한다. 그게 다 각자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정말 마음 비우고 작업에 임했다.
기타리스트의 부재로 우리끼리 모여 곡을 만들어 갔다. 작곡 전공자가 있는것도 아니고 녹음 전문가가 있던것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르는 부분은 물어물어 학습을 통해 하나씩 만들어 갔다. 녹음실에서 하드레코더 플레이에 마이크 걸어 그냥 합주하는 소스를 담아낸다. 이 작업은 ‘의외로’ 웅이가 잘했다. 이러한 과정으로 처음 만든 곡이 ‘젊은 인생’과 ‘Killer’(태○노래방에 등록된 바크하우스의 유일한 곡입니다만 사람이 부를 수는 없습니다)다. 최초라는 의미로 젊은 인생은 나의 첫아이와 같은 마음이 들어 짠하다. 그래서 밴드 멤버들에게 특별한 곡으로 남아 있다. 한국인 특유의 뽕삘이 나면서도 전혀 뽕스럽지 않은 곡이 바로 ‘젊은 인생’이다. 한국형 메탈이라고나 할까. 처음 이곡을 만들때는 기타리스트가 없었지만 뒤에 합류한 배진하의 맛깔스런 기타 토핑이 얹어져 ‘젊은 인생’은 완성된다. 내가 생각하는 진하가 남긴 최고의 기타솔로는 ‘젊은 인생과 ‘Welcome To The Barkhouse’ 이 두곡에서의 플레이이다.
- 기타리스트 배진하 영입
기타리스트 배진하는 2006년 4월 14일 바크하우스에 합류한다. 웅이의 고향친구로 어려서부터 안동에서 웅이와 같이 군고구마 장사, 어묵장사 등을 하면서 우정을 돈독히 쌓아온 친구다. 그 당시 웅이가 하던 밴드와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각자 음악을 해왔던 걸로 알고 있다. 진하는 본조비, U2 등을 좋아했고 바크하우스에 와서 많은 ‘갈굼’(?)을 당했다. 기타 좀 빡세게 칠 수 없냐고. 헤비메탈이 ‘그래선 안돼’ 등. (이 멘트는 영화 ‘바람’ 참고) 하지만 진하는 팀에 잘 적응하여 자기 몫을 해내기 시작한다. 키도 훤칠하니 크고 손이 커서 기타칠 때 손도 잘 돌아가고 게다가 얼굴도 잘생겨서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사람은 더없이 순하고 착했다. 연습하는 날 밤에 울산에서 부산까지 가끔 바이크를 타고 오기도 했다. (아주 멋쟁이임) 당시 울산의 한 직장에서 근무하던 진하를 웅이가 거의 강제로 합류시켜 바크하우스 1집에 참여하게 된다.
- 계속되는 1집 작업, 그리고 고난의 연속
6월부터 시작한 1집 녹음 작업은 10월까지 4개월여 진행되는데 다들 직장을 다니는 터라 시간을 쪼개고 쪼개 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녹음순서는 웅이가 제일 먼저 작업해서 드럼을 깔아놓으면 그 위에 베이스를 얹고 기타, 건반, 보컬의 순서로 차츰차츰 쌓아간다. 이게 그야말로 집중력 싸움이라 엄청난 에너지 소모가 일어난다. 연주중 실수(일명 삑사리)가 생기면 편집을 통해 짜맞출 수도 있으나 ‘헤비메탈이 가오(은어적 표현 죄송합니다)가 있지 한 방에 녹음해야 돼’ 해서 다시 처음부터 재녹음(가오가 여럿 잡습니다).
퇴근후 저녁먹고 녹음실에 들어가면 다음날 어슴프레 여명이 밝아오는 오전5시에 나오는 날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출근하면 하루종일 비몽사몽이다. 웅이는 회사 탈의실 캐비넷에 들어가서 잠시나마 서서 자기도 했단다. 녹음실 스케줄상 무조건 시간을 끌수도 없었기에 무조건 단기간에 자기 파트 몫을 해내야만 했다. 이에 여름 무렵, 웅이는 병가라도 내서 녹음 스케줄 맞춰보자는 심정에 아폴로 눈병에 걸린 직장동료의 눈을 비벼 눈병에 걸리려고 해봤으나 실패, 다른 방법의 하나로 윤활류 묻힌 손으로 눈을 세게 비벼 순간적으로 벌겋게 충혈된 눈을 만든 다음 군의관(군관련 직종에서 근무 했으며 군인은 아닙니다)에게 달려가 ‘눈병 걸린 것 같으니 병가 좀 내주십시오’하여 병가를 얻어 녹음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녹음이 끝난후 뒤늦게 아폴로 눈병에 걸렸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곡한곡 마무리 되어가던 중에 예상했던 마지막 곡이 만들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 막중한 과제를 진하에게 주었는데 어느날 녹음실에서 ‘기타 멜로디 하나 만들어 왔는데 이거 한번 들어봐요’하여 들어보니 그게 ‘Welcome To The Barkhouse’의 인트로 멜로디다. 그 인트로를 바탕으로 잼하듯이 후다닥 만들어 낸 곡이 밴드 타이틀곡이 된다. 1집 앨범의 타이틀곡이 제일 마지막에 만든 곡이 될 줄 멤버들 스스로도 몰랐다. 그리고 끝곡으로 수록된 Black Sabbath의 Heaven And Hell은 바크하우스가 워낙 좋아하는 밴드의 대표곡이라 헌정하는 마음을 담아 스튜디오에서 라이브로 녹음하여 실었다.
1집은 사운드 퀄리티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데 당시 부산의 녹음실 엔지니어가 처음 작업하는 정규 앨범이었고 (그전에는 싱글곡 정도만 작업한 경험이 있었다) 우리 역시 녹음이 처음인지라 그 정도로 마무리 된 것이다. 헌데 의외로 쌍팔년도 메탈 매니아분들이 좋아했다. 음악도 촌스러운데다가(좋은 의미입니다. 그때도 국내 메탈씬에 쌍팔감성의 올드스쿨밴드가 거의 없었기에) 사운드 또한 그 시절의 사운드라고 평했다.
녹음은 마무리 되었는데 앨범쟈켓도 만들어야하고 CD프레싱도 해야하고 해야할 것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홍일이가 그 무렵 디카동호회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출사도 나가고 나름 사진 찍는데 관심과 감각이 있었다.(참고로 3집 앨범 쟈켓사진은 홍일이 작품, 3집 앨범 표지에 등장하는 구조물은 경남 울주군에 실존하는 겁니다) 그래서 동호회 지인들 몇분을 모셔 연습실 인근의 빈공장에 몰래 들어가 사진을 찍는다. (왜 메탈밴드들은 축축하고 음침한 곳에서만 사진 찍고 밝고 화사한 데서는 안찍는 것인가) 1집 앨범의 표지가 바로 그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강아지는 ‘루퍼’라는 이름을 가진 진하의 애완견이다. 야외에서 찍은 사진은 밀양과 창원 주남저수지 등지를 배경으로 했다.
- 드디어 발매된 바크하우스 데뷔앨범 "Welcome To The Barkhouse"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2006년 11월 24일, 멤버들에게 도착한다. 막상 앨범을 손에 쥐니 생각했던 것 만큼의 감흥은 없다. 그래도 좋았다. 총2천장을 만들었는데 아직까지 남아있는걸 보면 엄청난 판매고를 이룬 것 같지는 않다. 멤버들에게 일정량 할당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강매하기도 했던 것 같다. (밴드인지 앵벌이인지) 그리고 그 다음날 서울에서의 첫공연을 떠난다. 장소는 신촌에 위치한 클럽 롤링스톤즈. 다음카페 ‘주혹새(주다스 혹은 사바스)’ 주최로 열린 행사인데 Judas Priest와 Black Sabbath의 곡만을 커버하여 다섯팀이 라이브를 했다. 멀리 부산에서 왔다는 특혜인지 모르겠으나 앵콜이 터져나와 주최측의 승낙을 받아 우리 곡인 Welcome To The Barkhouse를 이 자리에서 초연하게 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분의 표현에 의하면 주다스나 사바스곡과 크게 이질감이 없었다 한다. 이날 공연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사람의 숲이었다. 그리 크지않은 공연장이라 그렇게 느껴진건지 모르겠으나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 공연을 마치고 함께 한 밴드들과 자리를 한 다음 밤12시 부산으로 출발하는데 그야말고 고통의 시간이었다. 너무나 피곤하고 잠이와 어떻게 부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인권보호차원에서 누구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술마셨다고 쓰러져 자는 일부 몰지각한 몇몇 멤버 덕분에 내혼자 말뚝운전한 기억이 남아있다. 해뜰 무렵 부산연습실에 도착하여 장비 내려놓고 해산했다.
1집 발매 쇼케이스 라이브를 이듬해 1월 부산에서 하게되고 이후 밴드는 이런저런 라이브 활동으로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슬슬 더워질 무렵 2007년 제8회 부산국제락페스티벌이 다가온다.
2021.3.12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written by STEELER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3.23 12:1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3.23 1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