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시에 나타난 선과 시의 힘 고찰
이영숙
1.
시집을 읽는 작업은 대체로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쾌감을 얻기 때문에 우리는 시집을 읽는다. 고통은 시인의 대기권을 통과하느라 생긴 마찰력 때문에, 쾌감은 그것의 극복을 통해 획득한 자유 때문에 발생한다. 미적 가치 외에도 가령 시인이 만약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을까를 시로써 따져보는 일 따위도 독자가 시집과 나누는 치열한 지적 게임의 일종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게임이지만, 화두를 잡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므로 시인은 다만 이 게임에 자신이 원인제공을 한 시와 함께 수동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종교인이 되었을 거라고 주장한대도 그는 시 밖에서 항의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시를 쓰는 종교인이라 했을 때 그의 종교적 세계와 시적 세계의 무게를 달아보고 어느 쪽이 무겁다느니, 가볍다느니 제 멋대로 판단해도 역시 그는 시 밖에서 항의할 수 없다. “스님은 문학이 목적입니까, 종교가 목적입니까.” 신경림이 물었을 때, “저는 문학을 전업으로 하기보다는 불교와 겸업으로 하는 사람이라서 가끔은 혼돈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 굳이 불교와 문학, 훌륭한 수행승과 훌륭한 시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시인보다는 스님을 택할 것 같습니다. 말은 겸업이지만 어디까지나 저의 본업은 수행자란 뜻이지요.”조오현이 대답한다. 이 말의 진위를 따져보는 것은 조오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전적으로 독자인 필자와 조오현의 게임이다. 그가 일방적으로 억울해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이 글은 조오현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또 다른 독자와의 게임이기도 해서 이제부터는 필자가 조오현의 입장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가 무어라 하든, 결과적으로 조오현을 포함하여 그에 연루된 모두가 평등하다. 그러나 게임은 이 글이 끝나도 계속될 것이고 시는 생명이 더 길어, 우리는 고통과 쾌감을 분주히 오가며 게임을 멈출 수 없다. 조오현의 대답은 과연 진실한가.
위 책의 서문에 의하면, 당대 저명한 시인과 승려가 열흘에 걸쳐 나눈 대화 내용을 책으로 엮어내자는 기획을 한 것은 출판사다. 책 속 사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녹음하는 사람, 대화를 이어주고 정리해주는 사람, 사진작가 등이 동석한 상태였다. 대화 내용도 주제별로 나뉘어져 있었을 것이다. 시인과 승려의 성품상 어느 정도는 허심탄회한 이야기가 오갔겠지만, 이러저러한 콘셉트가 잡힌 상태에서 시인은 시인으로서, 스님은 스님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수준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사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설마 스님이 ‘(…) 굳이 불교와 문학, 훌륭한 수행승과 훌륭한 시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스님보다는 시인을 택할 것 같습니다. 말은 겸업이지만 어디까지나 저의 본업은 시인이란 뜻이지요.’라고 선포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서 ‘가끔 혼돈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라는 발언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선사의 길을 걸어오면서 시를 써온 그는 시인보다는 선승(禪僧) 혹은 시승(詩僧)이라고 더 자주 호명된다. 선승과 시인을 합하여 시승이라 할 수도 있으나, ‘시승’이라 했을 때 시의 저울은 선시 쪽으로 기울고 만다. 수행자가 본업이라는 그의 말처럼 선시를 통해 선종의 세계를 설파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시를 선의 잣대로 보는 것은 불교적 환원론에 귀속되기 십상이다. 이 경우 조오현을 시승이라고 하는 것은 괜찮아도, 잠깐이라도 시인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는 선의 수행에 못지않게 시의 수행을 해 왔으며, 선시가 선을 위해 일평생 정진했듯 시도 시를 위해 일평생 정진했다. 선시와 시의 경계가 자로 잰 듯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선시가 선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시조의 형식을 차용했다면 비(非)선시는 조오현 자신을 비롯한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를 형상화하기 위해 자유시의 형식을 차용했다. 자유시에 드러나는 시적 천품으로 하여 선시가 회자되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선시 이전에 조오현의 시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경림과의 대화에서 조오현의 대답은 진심이거나, 진심의 은폐거나, 겸손이거나, 자기 자신을 간과한 것이거나 혹은 다른 그 무엇일 수 있다.
2.
① 비구(比丘)나 시인으로는 경허를 만날 수 없었다. 동대문시장 그 주변 구로동 공단 또는 막노동 판 아니라면 생선 비린내가 물씬 번지는 어촌 주막 그런 곳에 가 있을 때만이 경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곳은 내가 나로부터 무한정 떠나고 떠나는 길목이자 결별의 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비구나 시인이길 원하지 않는다. 항시 나로부터 무한정 떠나고 떠나가고 싶을 뿐이다.
② 내 평생 찾아다닌
것은
선(禪)의 바닥줄
시(詩)의 바닥줄이었다.
오늘 얻은 결론은
시는 나무의 점박이결이요
선은 나무의 곧은결이었다.
①은 조오현의 첫 시집 『심우도(尋牛圖)』(1979)의 「자서(自序)」 부분이고, ②는 『적멸을 위하여』(2012)에 실린 신작시 「나의 삶」 전문이다. 시기적으로 심우도로부터 30여 년 너머 가장 멀리 있는 작품 중 하나로, 말하자면 조오현의 최근작인 셈이다. 시 세계의 첫 자락과 끝자락을 마주잡으면 마치 자루 속을 들여다보듯 한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
먼저 ①을 보자. 시인에게 첫 시집의 「자서(自序)」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시적 세계에 대한 출사표일 수도 있고, 출발선에서의 다짐이거나 미래에 대한 전망 등으로 대부분 시적 욕망과 관계된다. 조오현은 시적 욕망이 아니라 욕망 없음의 욕망에 대하여 운을 떼었다. 1937년에 입산하여 1959년에 조계종 승려가 되었으니 비구(比丘)가 맞고, 1968년 시조시인으로 등단했으니 시인이 맞는 그가 “비구나 시인이길 원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오직 ‘경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동대문시장 그 주변 구로동 공단 또는 막노동판”이나 “어촌 주막”에서라야 만날 수 있는 ‘경허’는 누구인가. 왜 그는 ‘경허’를 만나야만 하는가.
조오현이 사숙한 경허는 1912년에 입적하였으므로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실존인물은 아니다. 경허는 욕망 없음의 욕망을 실현한 선사로, “우주질서와 하나가 되는 무애자재한 해탈의 세계를 유유자적하면서 참다운 자유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저잣거리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경지가 그것인데, 「입전수수(入廛垂手)―무산심우도 10」)은 경허를 모델로 한 것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조오현은 “나”로부터 “항시” 떠나고 “무한정” 떠나는 자기부재를 실천하였다. “나는 비구나 시인이길 원하지 않는다. 항시 나로부터 무한정 떠나고 떠나가고 싶을 뿐이다.”라고 했을 때 앞의 ‘나’는 본래 나인 ‘吾’를, 뒤의 ‘나’는 세상에서 혼탁해진 ‘我’를 가리킨다. 때문에 ‘비구나 시인’인 ‘나[我]’는 ‘비구나 시인’이라는 부동의 허명에 머물지 않고 세속의 밑바닥으로 ‘항시’ ‘무한정’ 떠나야 본래의 ‘나[吾]’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이 ②의 ‘바닥줄’ 찾기다.
표면적으로 ②는 ‘비구나 시인’인 자신으로부터 ‘항시’ ‘무한정’ 떠나고 싶어 했던 서두의 욕망과 상충한다. “평생” “선의 바닥줄”과 “시의 바닥줄”을 찾아다녔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일순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선’이 아니라 ‘선의 바닥줄’이라는 사실과, ‘시’가 아니라 ‘시의 바닥줄’이라는 사실이다. ‘바닥줄’이란 광부가 광맥을 찾을 때 쓰는 줄로, 비유컨대 그것은 ‘나[吾]’를 일컫는다. 본래의 ‘나’가 살아있도록 오염된 ‘나’를 ‘항시’, 그리고 ‘무한정’ 버리기. 그러므로 조오현의 수행법은 비구와 시인에 대한 자기부정이나 자기초월이 아니라 현재진형형인 자기부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연의 “오늘”은 1연의 “평생”과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평생”의 무게를 덜어준다. ‘오늘’은 ‘나의 삶’에 ‘바닥줄’을 대고 탁 튕긴다. “시는 나무의 점박이결이요/ 선은 나무의 곧은결”이라는 “결론”이 바닥에 금을 긋는다. 이 시가 두터운 시라고 할 수 있는 이유인데, ‘나[吾]’의 눈으로 봤을 때, 시와 선은 그 무슨 대단한 게 아니라 줄기도 가지도 잎도 아닌, 하나의 ‘결’에 불과하다는 고백이거니와, 나무’에서 ‘점박이결’과 ‘곧은결’을 분리할 수 없듯 ‘나의 삶’에서도 ‘시’와 ‘선’을 분리할 수 없게 되었노라는 고백으로도 읽히지만, 차마 노골적으로는 아니게 “곧은결”의 “선”보다 “점박이결”의 “시”를 두둔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시인들이 ‘곧은결’과 ‘점박이결’ 중 주로 어떤 이미지에 끌리는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첫 시집 이후로 그는 선(禪) 관련 책과 시집을 여러 권씩 냈고 여전히 비구나 시인으로 살고 있다.
며칠 전 해인사에 계시는 사숙님이 오셔서 “요즘 뭘 해?” 하시기에 위의 시조를 보여드렸더니 “미친놈! 나는 병(病)이 다 없어진 줄 알고 왔더니 병이 더 깊었군. 언제까지나 도(道)는 안 닦고 장구(章句) 따라 다닐 참인가? 또 헛걸음했군!”
―「헛걸음―절간 이야기 28」 부분
시[장구]와 선[도]의 관계가 이럴진대, 시인과 비구의 관계에서도 전자가 후자의 환원론에 종속될 소지가 있다. 조오현의 거개의 시가 선시의 프레임을 통과하면서 일정부분 감수하게 되는 손실의 내역에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자리한다. ‘바닥줄’을 들고 그의 ‘선’과 ‘시’에 동행한 것은 저자거리에 먼저 가 있는 그 자신이었다. 시초부터 그와 함께 한 과정으로서의 부재가 인생의 후반기로 올수록 ‘점박이결’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고 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단서는 「나의 삶」의 행갈이 부분이다. 1연 2행의 “것은”은 1행에 이어 붙어야 자연스러운데, 이를 1행과 분리시킨 것이다. 자유시에서는 흔한 경우이고, 조오현 역시 시조에서조차 형식의 일탈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왔던 터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것은”의 의도성은 자연스럽다기보다 작위성이 더 짙어 보인다. 시조에서 형식의 일탈을 주도하면서도 천의무봉을 꿈꾸던 시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기본적으로 그의 시조는 선시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주로 활용되어 왔다. 「심우도」, 「무자화」, 「일색변」, 「무설설」, 「달마」, 「만인고칙」, 「일색과후」, 「1970년 방문」, 「1980년 방문」, 「견춘삼제」, 「직지사 기행초」, 「산거일기」 등의 연작시들이 대체로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1연 3행, 2연 6행, 3연 9행, 6연 18행 등으로 유형화되어 있지만, 각 행의 글자 수에는 얽매이지 않는 파격 속에서 선의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나의 삶」의 숨은 의도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것은”이 1행으로 붙으면, 2연 6행이 되면서 선적인 분위기로 자연스레 이월되는 관성을 시인은 경계하고자 하였다. 즉 선시가 아니라 시로 보아달라는 주문이 ‘것은’을 행갈이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음력(吟力)도 없으면서 장구(章句)에 미친 일이 있었”던 시인의 기질 쪽을 자꾸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3.
「나의 삶」과 비슷한 시기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작시의 특징을 좀 더 살펴보자.
③ 밤늦도록 이야기했던 시우(詩友)가 돌아가면서
일흔을 살아도 산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산일(山日」 부분
④ 내 나이 일흔둘에 반은 빈집뿐인 산마을을 지날 때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부분
⑤ 내 나이 예순에는
일흔이라는 이를 만나면
이제 죽을 일만 남은 노인이라고
어른대접을 해주었는데
내 나이 여든이 된 요즈막
일흔이라는 이를 보면
아이 같아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 같아
―「노망기(老妄記」 전문
자유시의 형식과, 이전의 시에서는 흔치 않았던 나이의 반복되는 언급이 눈에 띈다. 밤늦도록 시우와 얘기도 하고, 오래 전에 겪은 일을 반추도 하고, 여든이 된 자신의 나이를 객관화해보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선승보다는 인간의 체취가 더 강하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시우의 걸음걸이로/ 휘적휘적 걸어보”는 나(③). 산마을의 아이에게 감자를 받던 기억 속으로 걸어가 보는 나(④), 짐짓 노여움을 가장해보는 나(⑤)의 태도가 그것이다. 「절간 이야기」 연작과 비교해보아도 그 차이점은 뚜렷하다. 물론 「절간 이야기」는 위 ③~⑤와는 다르게 산문시 혹은 이야기체시다. 이를 통칭해서 자유시라고 한다면, 조오현의 자유시는 「절간 이야기」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절간 속 이야기는 현역 선승이 묘사하고 진술하는 형태이지만, 시의 깊이와 넓이와 재미를 담보로 하지 않는다면, 시적 화자가 조오현 자신이 아니고 절에 문외한인 어떤 특출한 시인이 선적 에피소드를 활용하여 쓸 수도 있는 개방된 구성이다. ‘절간 이야기’이므로 불교적 공안이나 도에 관한 선문답, 이심전심이나 불립문자의 형상화된 장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의 툭 터지는 내용이야 당연한 소재라 해도, 절 안팎에 기거하는 가난하고 불쌍한 대중의 대를 이른 불심(「업(業)아, 네 집에 불났다―절간 이야기 1」ㆍ「개살구나무―절간 이야기 15」)나, 말 못하는 짐승에 해를 입힌 업보(「다람쥐 두 마리―절간 이야기 3」)ㆍ「수달과 사냥꾼―절간 이야기 25」), 중생의 삶이 선사를 넘나드는 경지를 보여주는 시(「시님도 하마 산(山)을 버리셨겠네요―절간 이야기 17」ㆍ「몸을 잃어버린 사람―절간 이야기 21」ㆍ「염(殮)장이와 선사―절간 이야기 22」) 등은 특히 그렇다. 이 점이 오히려 시인 조오현의 진면목을 부각시킨다. 시적주체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재주를 타고 났던 것인가. 절간의 승려로서 온 힘을 다해 시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시의 저주를 받고 태어난 시인의 운명을 가졌기에 어쩔 수 없이 필을 들어 기록한 것이 「절간 이야기」 연작이 아니던가.
그러나 신작시에 이르러 앞에 인용한 ②ㆍ③ㆍ④ㆍ⑤는 시인=화자의 구조를 갖는다. 시인 조오현의 관점이고, 70줄을 경유하여 나이 80에 이른 인간 조오현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한편, 「절간 이야기」의 스케일과 유머 감각 역시 신작시에 이르러서는 모종의 변화를 겪는다.
⑥ 지난 주말 송수권을 찾아 변산반도까지 갔다가 변산반도도 못 보고
흥심은 남도잡놈의 것이라 파도소리 따라 태평양으로 보내고
수심은 내 것이라 물새 잎으로나마 오래오래 살게 하고
허영허영 찾아간 주막
‘왠매 세상살기 요로코롬 심든디 그 높은 설악산에서 오라범 송선생 뫼시로 우리집까지 오셨소잉 오라범 소식이야 물 썬 다음 뻘자국으로 낭자히 나타날 것이구만요 고때 동서사방 어디로 가셨나요 찾아보소 잉’
주모는 술상인지 무슨 수작인지 한 상 보아왔는데
보아하니 전라도 땅 반은 들어 있더라 전라도 땅 반은 송수권의 것이더라
송수권이 바라보아야
노을도 변산반도 노을은 그림이 되고
송수권이 팔을 들어 흔들어야
기러기도 변산반도 기러기는 시가 되고
송수권이 집적거려야
꽃도 변산반도 꽃은
한자(恨紫)
수홍(愁紅)
팔자타령으로 피었다가 팔자타령으로 대성통곡하고
송수권이 있어야
변산반도도 나그네 눈에 변산반도로 보이고
누가 뭐라 해도
전라도 땅 반은 송수권 대형(大兄)의 것이더라
―「음송(吟誦)―송수권 대형의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을 배독하고」 전문
리듬은 리듬대로 살아 어깨를 들썩이고, “흥심”은 흥심대로, “수심”은 수심대로 제 생겨먹은 대로 갈무리되며, 주모는 주모대로 “오라범 소식이야 물 썬 다음 뻘자국으로 낭자히 나타날 것”이라고 시를 읊고, 술집색시(“한자(恨紫)”ㆍ“수홍(愁紅)”)는 술집색시대로 “팔자타령”으로 한바탕 피었다 지고, 스케일은 스케일대로 커져 전라도 땅을 들었다 놓으면서 태평양으로까지 뻗어나간다. 「절간 이야기」 연작이 절간의 시공간을 시적으로 극대화시켰다면, ⑥은 변산반도 술집 하나의 시공간을 시적으로 극대화시키고 있다. 전자가 선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시조 형식과 무관하게 이를 성공시켰다면, 후자는 송수권의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이란 시를 배독하고 저잣거리를 완성시켰다.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부처―무자화 6」)의 해제라고나 할까. ⑥이 저 ①의 ‘생선 비린내가 물씬 번지는’ 자갈치 시장을 배경으로 한 「자갈치 아즈매―절간 이야기 19」와도 다른 이유는, 같은 저잣거리라 해도 “설봉스님 장례식 때는 부산 앞바다 그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이 모여”들도록 해 시를 “선화(禪話)”로 만든 시적 주체의 개입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선의 힘이야 이미 입증된 바이지만, ⑥의 힘의 출처는 어디일까.
4.
조오현이 선승으로 ‘선의 바닥줄’을 찾아다녔듯, 시인으로 “시의 바닥줄”을 찾아다닌 정황은 시의 제목과 관련해서도 자주 목격된다. 시제는 집의 문패처럼 집주인이 바뀌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단행본으로 시집이 발간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의 시들은 주로 선시에서 제목이 여러 번 바뀌고 있다. 여기에도 유형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⑦ 「죽은 男子」(『심우도』) → 「화두」(『산에 사는 날에』) → 「빛의 파문」(『아득한 성자』) → 「빛의 파문―몰살량의 서설」(『적멸을 위하여』)
⑧ 「살갗만 살았더라」(『심우도』) → 「1970년 방문(榜文) 2」(『만악가타집』) → 「살갗만 살았더라―1970년 방문 2」(『적멸을 위하여』)
⑨ 「만인고칙 1」 보수개당/ 동산삼근/ 암두도자/ 조주대사/ 북두장신/ 현사과환/ 명성견성/ 백장야호/ 착어(『산에 사는 날에』) → 보수개당―만인고칙 1/ (…)/ 백장야호―만인고칙 9/ 착어―만인고칙 18(『적멸을 위하여』)⑩ 「죄와 벌」(아득한 성자) → 「산일 1」(『적멸을 위하여』)
⑪ 「견춘 3제」 1. 봄의 불식/ 2. 봄의 역사/ 3. 봄의 소요(『산에 사는 날에』) → 「봄의 불식―견춘삼제 1」/ 「봄의 불식―견춘삼제 2」/ 「봄의 불식―견춘삼제 3」(『적멸을 위하여』)
⑫ 「저물어가는 풍경」ㆍ「어스름이 내릴 때」ㆍ「숲」(『아득한 성자』) → 「그곳에 가면」 1. 가을 하늘, 2. 내 오늘, 3. 숲
⑬ 「절간 이야기 1」(절간 이야기) → 「업(業)아, 네 집에 불났다」(『아득한 성자』) → 「업(業)아, 네 집에 불났다―절간 이야기 1」(『적멸을 위하여』)
⑦은 제목 자체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경우로, 「禪話」(절간 이야기)가 「오누이」(적멸을 위하여)로 바뀌는 유형과 같다. ⑧이 가장 흔한 경우인데, 「일색변」이나 「무자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개별 제목이 「1970년 방문(榜文)」 연작에서 일렬순서 만으로 표기되었다가 원래의 개별 제목 아래 일렬순서가 부제로 붙었다. ⑨는 「만인고칙 1」에 각각 부제로 달린 9편의 시와 「만인고칙 2」에 부제로 달린 9편의 시가 최종적으로는 「만인고칙 1―보수개당」ㆍ「만인고칙 2―동산삼근」과 같은 방식으로 변형되었고, 이때 ‘착어’는 「만인고칙 18―착어」로 맨 뒤로 밀렸다. ⑩은 개별 제목 세 편이 연작으로 묶인 경우이며, ⑪은 하나의 제목 속에 포함되어 있던 세 편의 소품들이 보는 바와 같이 3편으로 분화한 것이다. 「심우도」와 「달마」ㆍ「직지사 기행 초」와 「산거일기」 연작시 등이 이 경우로, 열흘간의 만남(2004)에서 “시조 100수, 시 30편이 될까 말까 하니 시승이라 할 수도 없지요.”라고 했을 때의 편수가 적멸을 위하여(2012)에서 212편으로 크게 늘게 된 것은 신작시가 추가된 외에 이런 편집을 거친 것도 한 요인으로 보인다. 이와는 반대로 세 편의 시가 한 편의 작품 속에 1, 2, 3으로 편입된 ⑫도 있지만, 이는 빈도수 면에서 편수 감소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한편, ⑧과 반대의 양상을 보이는 ⑬은 일렬번호만으로 시작해 개별제목을 거쳐 개별제목 밑에 일렬번호가 매겨졌다. 이 연작시가 『절간 이야기』에서는 32편이었다가 』적멸을 위하여』에서 31편으로 마감된 것은 전자에 실린 「절간 이야기 24」와 「절간 이야기 30」을 빼서 각각 「산일ㆍ2」와 「산일ㆍ3」이라고 개별 작품으로 독립시킨 것과, 「설법―절간 이야기 31」을 추가한 결과다.
『심우도』 이후 기존의 시집 속 작품들을 재수록하는 시선집 성격의 책을 발간할 때에도 제목을 놓고 다툰 흔적에서 알 수 있듯 주로 선시, 곧 시조에 대한 제목의 부침이 잦았던 것은 물론 대중에게 선시를 보다 일목요연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런저런 변화를 꾀한 결과이겠지만, 선가에서 달을 가리켰으면 가리킨 손가락은 잊으라는 전언을 생각하면 다소 의아하다. 독자의 입장에서 추적하기도 쉽지 않은 이와 같은 변이 현상은 역으로 조오현이 시를 대하는 태도의 일면을 부각시킨다. 이 복잡한 셈법은 시에 대한 염결한 애정이 아니라면 감당하기 어려운 시적 태도다. 그가 신경림의 질문에 “저의 본업은 수행자”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사실이다. 혹시 ‘저의 본업은 시인입니다.’라고 답했어도 그것은 사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혼돈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라는 말은 진실이다. 선에 정진하는 만큼 시에 정진하는 자기 자신을 간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조오현을 논할 때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선승으로서의 조오현’이다. 간간이 ‘시인으로서의 조오현’을 대상으로 하나 대체로 시승이라는 개념에 얽매임으로써 온전한 시인의 위상은 가려지고 만다. 더더욱 고려되지 않는 것은 ‘인간 조오현’에 관한 것이다. 선의 경계를 넘어 저잣거리로 내려가는 것은 이미 선승도 시인도 벗어버린 ‘인간’이다. “항시” “무한정” ‘나’로부터 떠났을 때 만날 수 있는 ‘나’는 인간 본연의 ‘나(吾)’인 것이다. 이러한 ‘나’의 본질로 ‘나’는 다시 선승이고 시인이 된다. 그러나 조오현은 선승이기 이전에 이미 시인이었다. 실제로는 법력(法歷)이 시력(詩歷)을 9년 남짓 앞서지만, 이는 시간 순으로 따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한 시인에게 시적 자의식이란 그가 이룬, 혹은 장차 이룰 시세계의 맹아다. 그것은 사물과 현상을 시적으로 포착하는 시선이며, 해석하는 머리이고, 수용하는 가슴이다. 그것은 잠재의식이며, 축적된 경험과 꿈의 반영이다. 시적 자아의 반성과 발화의 체계이며 또한 그것은 시인 자체다. 시인이 확보한, 혹은 확보할 시공간의 넓이와 깊이이기도 하다. 시[poetry]라는 큰 틀에서 보았을 때 그에게는 선시든 비(非)선시든 모든 시[poem]가 자신이다. 따라서 그의 선시는 선승 쪽으로 기운다기보다 시인 쪽으로 기운다.
그에게 수행자와 시인은 둘이 아니고[不二], 선과 시는 다른 세계가 아니다[不異]. 비록 삶의 목적이 종교와 문학 중 그 어느 한 가지로 귀결될 수 없는 이유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라 해도 선승 조오현과 시인 조오현을 잇는 것이 인간 조오현이라는 사실에는 방점이 찍힌다. 그의 선과 시를 고양시키는 힘은 인간이라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현한다. 시조시인으로 등단해서 선의 내용과 시조의 형식을 합하여 새로운 선시의 장을 연 그가 드문드문 자유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왜일까. 선승으로서가 아닌, 인간 조오현의 거처는 자유시였다. 여기에서 자유시는 다시 한 번 시인 쪽으로 기운다.
그는 ‘훌륭한 인간’이므로 ‘훌륭한 시인’이 되었고, ‘훌륭한 시인’이고 ‘훌륭한 선사’여서 ‘조사(祖師)’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조오현 법력의 현주소이며, 선의 힘과 시의 힘이 만나 생동하는 지점이다.
-《시와세계》 2017년 가을호
[출처] 조오현 시에 나타난 선과 시의 힘 고찰|작성자 이영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