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를 찾아서, 찾아가는 양조장
설날 직전, 아버지 심부름으로 노란 주전자를 들고 해질녁 길을 나선 때가 아마 일곱 살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미성년자에게 술심부름을 시키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그때 나는 처음으로 양조장을 찾아갔었다. ‘길은 외줄기/남도 삼백리//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는 박목월의 시를 알았다면, 읊조리기에 딱 어울리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양조장 근처 1백 미터쯤 가까이 갔을 때부터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누룩이 발효된 그 강렬한 냄새는 어린 나에게는 지금까지 알지 못한 전혀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시궁창의 썩은 냄새와는 또 다른, 퀴퀴하지만 그 끝자락 어디선가 조금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한 그 냄새의 첫 느낌은 매우 미묘했다. 양조장 마당의 노란 알전구에서 쏟아지는 불빛과 그 주변에서 웅크리고 있는 더 큰 어둠이 무섭게 다가왔다. 길은 미끄러웠다. 군데군데 얼음이 얼어있었고, 나는 찬바람에 노출된 맨 손으로 술이 가득 들어있는 주전자를 들고 조심조심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 후로 양조장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동네의 양조장들은 언제부턴가 하나씩 사라져 자취를 감췄고, 문학 동호회 문집에 내 시가 처음 실려 출간된 고등학교 3학년 때, 문집을 상위에 쌓아놓고 친구들과 함께 마셨던 것이 막걸리에 대한 첫 경험이었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소주 맥주 와인 위스키 등 온갖 종류의 술을 섭렵하기는 했으나, 내가 직접 양조장에 찾아가 본 적은 없었다. 우리 양조장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던 것은 지난 2010년 죽력고를 마시면서부터였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 3대 명주라고 칭하면서 회자되었던 술이 죽력고, 이강주, 감홍로다. 대나무를 불에 구워서 느리게 한 방울씩 떨어지는 진액을 받아, 생지황, 계심 등의 가루에 꿀을 넣고 찹쌀 누룩 등으로 만드는 술이 죽력고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관군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쓰러졌다가 죽력고 3잔을 마신 뒤 비로소 생기를 찾고, 서울로 압송될 때 수레에서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명약에 가까워서 술 이름에 주(주)자가 아니라, 고(고)를 붙였다. 연한 노란 빛을 띄는 35도의 이 술은 약한 풀냄새와 대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어우러지면서 깊은 맛을 안겨준다. 나는 감동받았다. 그리고 몇 잔을 마시다가 병을 닫았다. 도저히 혼자 마실 술이 아니었다. 이렇게 좋은 술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셔야 제 맛이 날 것 같았다. 한편으로 도대체 누가 이 술을 만들었을까 궁금증이 일어났다.
며칠 뒤 나는, 맥이 끊겼던 죽력고를 다시 재현해낸 무형문화재 송명섭 명인을 찾아 전라북도 태인에 있는 “태인양조장”을 찾아갔다. 태인읍 버스정류장에서 동네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니 담도 없는 아담한 기와집이 나왔다. 소나무 한 그루가 예쁘게 서 있는 그 집은 살림집이고 그 옆에 양조장이 있었다. 양조장에서는 ‘송명섭막걸리’와 ‘죽력고’를 생산한다.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송명섭막걸리’는 택배로 전국으로 우송되고, 동네 마트에도 몇 상자가 납품된다. 마트에 가서 물으니, 술이 화요일 오후 6시쯤 나오는데 주민들이 ‘송명섭막걸리’를 사려고 미리 줄 서 있다가 몇 분만에 다 팔려 나간다는 것이다. 나는 양조장에서 ‘죽력고’를 두 병 샀지만, 막걸리는 사지 못했다. 양조장에도 없고, 마트에도 없었다. 서울 인사동 술집에서 마실 수 있었다.
알코올 40도지만 연한 계피향과 함께 향긋하게 목구멍을 넘어가는 ‘감홍로’는, 자라가 토끼를 용궁으로 데려가기 위해 용궁에 가면 감홍로가 있다고 유혹하는 별주부전, 그리고 한양으로 떠나는 이몽룡과 춘향이 이별하는 밤, 이별주로 감홍로를 꺼내오는 춘향전 등에 등장하는데, 달고 붉은 이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평양에서 평천양조장을 운영하던 고 이경찬씨가 6.25전쟁 때 파주로 내려오면서 맥이 이어졌고 지금은 딸인 이기숙(식품명인 43호)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파주시에 있는 ‘감홍로’ 양조장 한쪽에는 우리 술을 만드는 항아리류 등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다. 옛날에는 누룩을 맷돌로 갈고 멥쌀과 메조를 넣어 고두밥을 짓고 술로 발효시켜 증류를 하고 약재를 넣어 다시 항아리에서 1년 6개월의 숙성기간을 거쳐 감홍로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많은 공정이 기계화가 되어서 양조장의 커다란 스테인레스 통 안에서 숙성된다.
양조장은 이제 단순히 술만 만드는 공장이 아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지난 2013년부터 ‘찾아가는 양조장’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는데, 전통주 생산에서 관광․체험까지 연계된 복합공간으로 양조장을 탈바꿈시켜서 관광활성화와 농산물 사용 확대 등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선정된 양조장에는 8천만원에서 1억원 가까운 정부 예산으로 환경을 개선하고 품질관리, 스토리텔링 등을 제공하여 지역 명소가 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해당 양조장에서는 막걸리 등 술을 빚는 체험이 가능하다. 강원도 홍천의 예술양조장, 경기 포천의 배상면주가, 충북 단양의 대강양조장, 충남 논산의 신평 양조장, 충남 서천의 한산소곡주, 전남 해남의 해창양조장, 전남 진도의 대대로(진도홍주), 전북 정읍의 태인합동양조장(송명섭), 경기 용인의 술샘, 경북 문경의 문경주조, 경북 울진의 울진술도가 등 매년 지금까지 총 30곳이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되었다.
‘찾아가는 양조장’ 사업을 처음 실시할 때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양조장을 찾아가다니! 그것도 문화 체험 프로그램으로. 과연 우리 양조장이 보여줄 콘텐츠가 있을까? 유명 관광지에 양조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평범한 동네에 평범한 주택으로 지어진 양조장에서 뭘 볼 수 있을까? 생산자 측면에서는 술 빚는 것이 문화관광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소비자 측면에서는 양조장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는데 행사 시작 첫 해인 2013년에는 많은 일본인 관광객이 줄을 이었고 이어서 기업, 각 동호회 등에서 ‘찾아가는 양조장’ 프로그램에 신청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 술은 발효의 미학이다. 쌀과 누룩을 주원료로 해서 발효과정을 거치며 숙성되는 것이 핵심이다. 발효과정에서 파생되는 독특한 냄새, 어린 시절 내가 양은 주전자를 들고 술을 받으러 가면서 처음 맡았던 그 냄새를 어떻게 향기롭게 처리할 것인가, 청결 등 위생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 숙제였는데, 지속적인 관심과 주위 환경의 개선으로 지금은 관람객들이 양조장 투어를 위한 할 수 있는 기초여건이 마련되었다.
나는 전국의 양조장 지도에 표시를 해놓고 양조장 투어를 떠났다. 지역으로 구분해서 양조장 투어를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기는 하나, 막걸리, 증류주, 와인 등으로 주종을 구분해서 투어를 해도 좋다. 대부분의 양조장에서는 막걸리를 생산하는 것이 기본이다. 가라앉은 지게미 위의 맑은 부분을 걷어 청주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증류시켜 증류주를 만들기 때문에, 하나의 양조장에서 막걸리, 청주, 증류주, 이렇게 3종류를 만드는 게 일반적이기는 하나, 막걸리만 혹은 증류주만 만드는 곳도 있다. 또 최근 한국산 와인을 만드는 곳이 조금씩 늘어나서 ‘찾아가는 양조장’에도 파주 산머루농원, 예산 사과 와이너리, 충북 청주의 조은술 세종, 경북 영천의 벵꼬레 와인 등 와인 양조장이 여러 군데 포함되어 있다. 전통주를 만드는 대부분의 양조장들은 아직 규모가 영세하고 시설이 빈약하여 가내수공업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되지 못했다고 꼭 좋은 술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술의 기본은 물이기 때문에 물 좋은 곳에서 좋은 술이 생산된다. 지명에 물과 관련된 천, 정 등의 글자가 들어 있으면 예외없이 양조장 여러 곳이 모여 있다. 강원도 홍천, 경기도 포천, 부산 금정산, 충남 아산(도고온천) 등이 그렇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예술양조장은 그 규모 면에서는 기업형으로 대량생산하고 있는 국순당, 배상면주가, 배혜정도가 등을 제외하면 가장 큰 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가면 홍천의 깊은 산속, 산세 좋은 지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백암산 비탈에 주차장이 별도로 넓게 마련된 것만 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지 알 수 있다. 주차장이 있는 곳에 ‘누룩체험관’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는데 그 벽에는 ‘우리 술은 맛있드래요’라고 흰 색 페인트의 정감어린 붓글씨가 쓰여 있다. 술을 사러 간다고 미리 전화를 했지만 주차를 하고 계단 위로 올라가자, 둥근 원형의 커다란 2층 건물 계단에서 개량한복을 입고 내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헌법교수로 재직했던 변호사 출신의 정회철 대표다. 아마 CCTV로 차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것 같았다.
양조장에 직접 찾아가면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유럽이나 미주 대륙의 와이너리 투어처럼, 시음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차장 바로 위쪽에 있는 작은 건물에는 예술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술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양조장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곳이다. 예술의 대표 브랜드인 막걸리 ‘만강에 비친 달’‘홍천강 탁주’ 그리고 청주인 ‘동몽’과 증류주인 ‘무작53’, 작은 플라스틱 용기 10개가 들어있는 ‘이화주’와 막걸리 찌꺼기로 만든 비누, 술잔 등이 같이 판매되고 있었다. 그런데 시음이 가능한 술은 ‘무작53’뿐이었다. 건물 바로 옆 그늘에 파라솔이 여러 개 펴져 있는 테이블에 앉아, 나는 안주도 없이 무작을 한 잔 마셨다. 53도의 강렬하고 짜릿한 알코올이 뜨겁게 목구멍을 넘어갔다. 무작의 술균은 직접 자연접종시킨 천연누룩을 사용하여 빚는다. ‘주찬’‘김승지댁 주방문’ 등 고문헌에 실려 있는 적선소주를 원류로 만들어졌다.
원래 원형 건물은 전통주 체험관으로서 2층 카페에서는 시음도 하면서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데 주말에만 운영된다. 내가 찾아간 날은 평일이었고, 커다란 양조장 건물은 인기척 없이 조용했다. 양조장 안에서 내가 마주친 사람은 정회철씨뿐이었다. 교육장이며 체험장인 1층에는 사람 키보다 더 큰 동고리가 2개 설치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에서 수입해 온 동고리는 장인이 직접 망치로 내려쳐 수작업으로 둥글게 만든 증류용 구리 항아리다. ‘무작53’은 상압식의 증류방식을 이용하여 2차례의 증류 과정을 거친 뒤 다시 영하 20도의 냉동여과를 통해 만들어져서 목을 넘어갈 때 매우 부드럽다.
2층 건물 옆에는 기와집으로 된 양조장이 있다. 내부가 진흙으로 빚어진 숙성실 안으로 들어가면 서늘한 기온이 느껴진다. 수많은 항아리에서는 술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항아리 위에는 각각 술 이름과 날짜가 적힌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인공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은 예술의 모든 술은 5개월 이상 저온으로 발효, 숙성된 후 출고된다. 산 위쪽으로는 온돌방과 침대방으로 구분된 게스트 하우스 2동이 있다. 예술에서는 당일코스, 1박2일 코스, 3박4일 코스 등으로 전통주 빚기나 막걸리 비누 만들기 체험, 누룩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게스트 하우스까지 설치되어 있다.
강원도 홍천까지 갔다면 또 한군데 찾아가야 할 곳이 “미담양조장”이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준 길을 따라가면, 이곳에 양조장이 있나 의심이 들 정도로 비좁은 산길을 지나야 한다. 작은 집 두 채가 나타났다. 하나는 살림집이고 다른 하나가 양조장이다. 미담의 조미담 대표는, 좋은 물을 찾아 홍천읍 태학리까지 왔다고 했다. 양조장 안에는 술 빚는 장비가 설치되어 있는데, 조미담 대표 혼자뿐이었다. 술을 만들 때는 제자들이 찾아와 함께 만든다. 미담주는 4종류가 출시되는데, 석탄주, 연엽주, 송화주, 생강주가 각각 탁주(12도)와 청주(16도)로 만들어진다.
직사각형의 긴 테이블 위로 조대표가 시음용 술을 내왔다. 8종류의 술중에서 5종류만 있었다. 생강주는 탁주와 청주 모두 지금은 없고 송화주는 탁주만 있었다. 미담주는 전통방식에 따라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한다. 재래누룩으로 술을 빚을 때 인공발효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술을 거른 후 필터링을 하는게 아니라 두 달 동안 자연 침전시킨다. 그래서 미담의 술은 가라앉은 부분의 탁주보다는 위에 떠 있는 것을 걸러낸 청주가 훨씬 더 좋았다. 다만 송화주 탁주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강렬한 소나무 향기가 배어있는 밀도 있는 송화주를 마시면, 송화 입자가 알알이 혀끝에서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세련되지는 않고 조금 거칠지만 단맛, 쓴맛, 구수한 맛, 떫은 맛, 신맛의 오미가 풍부하게 느껴지면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정갈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있는 석탄주는 미담주의 기본으로서 술을 마시는 동안 술이 사라지는 것을 한탄하게 될 정도로 맛있다고 해서 지어진 옛 이름이다, 연분홍 빛깔의 연엽주는 고종황제가 즐기던 술로서 연잎의 은은한 향을 느낄 수 있다. 나는 투박하고 거칠지만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송화주를 두 병, 그리고 다른 술들은 각각 1병씩 구입했다. 송화주는 냉장고 속에 넣어두고 두고두고 아끼면서 마시고 싶은 술이었다.
홍천처럼 지명에 천자가 붙은 곳이 경기도에도 있다. 막걸리로 유명한 포천이다. 이동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지인들과 포천 이동을 여러 번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러나 고기 굽는 냄새가 가득한 천변의 그런 술집이 아니라, 산 좋고 물 좋은 포천에는 여기저기 좋은 술을 빚는 양조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포천시 화현면에 있는 배상면주가에서 운영하는 “산사원”은 ‘찾아가는 양조장’의 대표적인 공간이다. 커다란 건물의 양조장 건너편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산사원”은 전통 술 박물관이자 정원이다. “산사원”은 2천원의 입장료를 받지만 내부에는 전국의 중요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한국 전통주를 비롯해서 세계 각국의 술들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있고, 배상면주가에서 만드는 20여 종류의 다양한 술들을 시음할 수 있는데다가 마신 술잔은 가져갈 수도 있다. 쌍화주, 산사춘, 민들레 대포, 봄에 마시는 냉이술, 여름에 좋은 매실미주, 가을에 마시는 들국화술, 겨울에 좋은 도소주 등과 배상면주가의 대표 과실 브랜드인 아락이 다양한 종류로 준비되어 있다. 나주배 아락, 청송사과 아락, 하동녹차 아락, 완주감 아락 등 시음 가능한 수많은 병들이 정렬되어 있다. 세련된 디자인으로 단장된 박물관 내부에는 우리 선조들이 마시던 예전의 주안상 차림이 유리 벽 안에 상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배상면주가를 세운 우곡 배상면 선생의 일대기도 안내되어 있고 그가 술을 빚는 후손들에게 남긴 ‘백번 시도하고 천 번을 고쳐라’라는 말이 크게 적혀 있다.
산사원의 진짜 아름다움은 정원을 걸어봐야 알 수 있다. 200년 이상 되는 산사나무 고목 20그루가 있는 산사정원은 4천여 평의 대지 위에 세월랑, 부안당, 취선각, 우곡루 등 다섯 채의 한옥과 500개가 넘는 술독 항아리들이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다. 산사춘의 원료가 되는 장미과의 산사나무 자생목들은 강원도 다른 지역에서 자생하는 것을 옮겨 조성한 것이다. 곧게 직선으로 뻗은 긴 주랑 양쪽에는 어른 허리 위까지 오는 커다란 술독 항아리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술 익는 냄새로 취할 것만 같다. 마당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바람이 지나가다 머무는 정자도 있다.
농림축산부에서 실시하는 ‘찾아가는 양조장’은 일정 규모 이상을 갖추고 관람객을 맞이하는 기본 시설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아직 규모가 영세해서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되지 못했어도 좋은 술을 빚는 양조장들이 있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봇뜰 양조장”은, 한 두 명이 술을 빚을 정도의 시설이고 초라할 정도로 규모도 작지만 여기서 만드는 술은 매우 인상적이다. 봇뜰에서는 직접 누룩을 디딘다. 그리고 일체의 첨가물을 쓰지 않고 오직 물과 쌀과 누룩만으로 술을 만든다. 최소 100일 이상 항아리에서 발효 숙성시켜 출시하고 있다. 너무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주차하기도 힘들었다. 봇뜰의 권옥련 대표에게 왜 이곳에 양조장을 만들었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쪽 태생이 아닌데 좋은 물을 찾아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그렇다 한국 전통주를 빚는 기본 세 가지, 누룩과 쌀(찹쌀, 멥쌀), 물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물이다. 그런데 대부분 수돗물을 사용한다. 식약처에서는 안전과 위생을 위해 수돗물을 권하기 때문이다. 별도의 물을 재료로 쓰면 비용을 내고 반복적으로 수질 검사를 받아야 한다.
봇뜰에는 별도로 시음할 공간도 없고 앉을 자리도 마땅하지 않을 정도로 좁다. 나는 권옥련 대표가 꺼내오는 몇 종류의 술을 마시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술을 발견했다. ‘백수환동주’다. 마시면 흰 머리가 젊음을 되찾는다는 술인데, 깊고 진한 향과 맛에 반했다. 찹쌀과 녹두를 넣어 만드는 백수환동주는 그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향과 맛을 안겨주었다. 원래 봇뜰의 대표 브랜드는 ‘십칠주’다. 17시간동안 항아리에서 저온 숙성을 거쳐 빚은 17도의 막걸리인데 약간 시큼하지만 가양주 고유의 맛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십칠주’의 맛은 그대로 유지하되 알코올 도수를 10도로 낮춰 만든 ‘봇뜰 막걸리’가 있다. 발효가 끝난후 맑은 술만 채주해서 증류한 증류식 소주인 봇뜰 소주와 홍주도 있는데, 최근에는 조대표의 딸이 대학과 각 기관에서 오랫동안 전통주를 공부하고 어머니의 뒤를 이어 술을 빚고 있다. 현재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술을 계발 중이다.
양조장 투어를 다니는 동안 내가 쓴 땅고 에세이 한 권이 출간되어 파주 출판도시에 있는 출판사를 찾아갔다. 출판사에서 일정을 끝낸 뒤, 마침 가보고 싶은 양조장이 있어서 네비게이션을 찍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파주가 상당히 넓어서 파주 내에서 이동하는데도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네비게이션을 따라 내가 도착한 곳은 인가 드문 어느 한적한 도로변이었다. 분명히 네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양조장이 없었다. 가끔 네비게이션이 틀린 경우도 있으므로 나는 내려서 지번을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지번이 맞는 건물이 있었다. 도로변에 있는 2층 작은 건물이었다. 1층은 셔터문이 내려져 있고, 2층 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그냥 주택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중년의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것이다. 10분쯤 도로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도로변을 따라 안경을 낀 중년여성이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와 셔터문을 열며 ‘많이 기다리셨지요?’라고 인사를 했다. 셔터가 올라가자 작은 사무실 하나가 보였다. 내부로 들어가니 여기저기 술 빚는 도구들이 있고, 병입 장치며 막걸리 병들이 보였다. 이곳이 “최행숙 전통주조”였다. 사실 최행숙 전통주조는 파주 초리골에 커다란 양조장이 있었다. 그런데 2011년 수해를 입어 직접 농사지은 찹쌀과 인삼 등도 버려야 했고 공장을 가동할 수 없었다.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로얄티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까지 된 상황에서 수해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지금의 초라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찾아가는 양조장’은 아니지만, “최행숙 전통주조”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최행숙 대표는 원래 파주 농협에 근무하면서 인삼밭을 짓고 있었는데, 파주시 인삼연구회장을 맡아 파주시에서 주최한 인삼가공교육을 받으며 처음 술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까지 최대표 자신은 술에 관심도 없었고 술을 즐겨 마시지도 않았다. 인삼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인삼주 만드는 것을 배웠고 그러면서 술의 세계로 입문하게 되었다. 교욱 도중 맡게 된 술의 향이 너무 좋아서 교육이 끝나자마자 집에 와서 처음으로 술을 빚은 최대표의 인생은 그때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최행숙 대표의 스승은 한국전통주연구회의 박록담 선생이다. 그 후 5년동안 술을 공부하다가 2007년 농촌진흥청의 ‘농업인 소규모 창업활동지원’을 받아 양조장을 창업했다.
“최행숙 전통주조”의 대표 브랜드는 ‘미인주’와 ‘아황(鴉黃)주’다. 농촌진흥청의 우리술 복원 프로젝트에 따라 2009년 복원된 ‘아황주’는 고문헌 ‘수운잡방’‘산가요록’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진하고 맑은 황색으로 깊은 단맛을 낸다. 최행숙 대표는 2012년 5월 농촌진흥청의 발효식품과로부터 아황주의 제조방법을 기술이전 받았다. 멥쌀 65%, 찹쌀 35%로 익반죽한 밑술에 덧술을 한 이양주다. 술 이름처럼 술잔에 비친 까마귀가 노랗게 비칠 정도로 진한 황색을 띤다. 또 하나의 브랜드인 미인(米人)주는 인삼을 첨가해서 만든 밑술에 덧술을 두 차례 추가해 삼해주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인삼은 발효하기 힘들어 술로 제품화하기 어려운데 파주에서 직접 재배한 질 좋은 인삼으로 만든 미인주는 맑고 순수한 향이 난다.
남도 길을 따라 내려가면 경기도 평택에도 여러 양조장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그중에서 “밝은세상”을 찾아갔다. 경기도 평택이 한반도의 배꼽 부분에 해당된다고 해서 작명된 ‘호랑이배꼽’ 막걸리가 유명한 양조장이다. 문외한이 봐도 풍수가 너무 좋은 언덕배기 밑에 자리한 “밝은세상”(대표 이계송)은 현대식으로 지어진 단아한 1층 카페를 중심으로 좌측에 양조장 시설이 들어있는 건물과 그 아래쪽에 낡은 한옥이 서 있다. 이계송 대표의 생가이기도 한 그 한옥에서는 예전부터 술을 빚었었다고 한다. 사실 “밝은세상”을 찾아갈 때 이계송 대표가 화가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카페에 전시된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국의 수많은 양조장과 술집을 가면 대부분의 주인들이 풍류객들이어서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거나 시를 짓는 분들이 많았다. 아마추어 예술인으로 생각했던 이계송 대표는 대한민국미술전, 경기대전 미술전 심사위원을 역임한 우리나라 화단의 원로 중 한 분이다.
고려시대부터 700년 가까이 평택시 포승읍에 자리를 잡고 살아온 이계송 화백의 그림이 가득 걸려있는 갤러리 주막에서는, 탁주와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을 함께 맛볼 수 있다. 전국 양조장 투어 중에서 카페와 숙박시설까지 갖춘 강원도 홍천의 예술 양조장과 함께, 술과 음식의 조화가 가장 잘된 곳이 평택의 “댓골재 양조장” 호랑이배꼽이다. 양조장의 중앙 건물인 카페는 갤러리로도 이용되고 있는데 아름다운 그림들을 바라보며 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양조장 투어로 최적의 장소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는 100일 동안 숙성시켜 강한 배맛과 단맛이 조화를 이룬 막걸리 ‘호랑이배꼽’과 ‘배 와인’ ‘하우스약주’, 증류주인 ‘웃는 호랑이’ 등을 출하하고 있다. 이계송 화백의 생가 중앙에는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 맛이 아주 좋다. 수돗물로 술을 빚을 때와 우물물로 술을 빚을 때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했다. 식약처의 권고대로 위생검사가 끝난 수돗물을 쓰고는 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충청남도 논산에는 “양촌양조장”이 있다. 이곳은 설립된 지 100년이 넘는다. 현재 전국에서 영업하고 있는 양조장 중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건물을 갖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막걸리를 빚었고, 1931년 한옥식 2층 목조로 건축된 양촌 양조장에서는 지금도 막걸리가 생산되고 있다. 2016년에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되어 관람객들을 맞을 준비를 끝냈는데, 양조장 안으로 들어가면 1층에서는 거대한 통에서 막걸 리가 발효되고 있고, 관람객들이 출입할 수 있는 2층으로 가면 목조 바닥 중간 중간에 설치된 유리를 통해 아래층에서 발효되는 막걸리를 실제로 목격할 수 있다. 2층 벽면에는 양촌 양조장의 역사와 전통 술 빚는 과정이 자세하게 안내되어 있다. 양촌 양조장의 대표 브랜드는 ‘우렁이쌀’이다. 약간 달콤해서 여성들과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레드와, 담백한 맛의 블랙 두 가지 막걸리로 출시되고 있다. 또 생막걸리 ‘양촌’과 동동주 ‘양촌’, ‘우렁이쌀’ 청주가 있다. 막걸리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져 있어서 비교적 저렴하지만 맛은 탁월하다.
양촌양조장을 찾았을 때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양조장 안뜰에는 숙성되고 있는 많은 항아리들이 있었고, 한쪽에는 예전에 막걸리를 빚을 때 썼던 나무기구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강쪽을 향해 카페 건물이 있었는데, 관람객들이 직접 술을 구매해서 음식까지 조리할 수 있게 시설이 되어 있고, 또 막걸리 체험에 참여할 수 있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나는 비오는 날 카페에 앉아 창밖의 강을 바라보며 가방 속에서 육포를 꺼내 놓고 양촌 막걸리를 마셨다. 술을 마시고 나오면서 ‘우렁이쌀’ 막걸리 레드와 블랙 12병 들이 한 박스씩 주문을 했는데, 전라남도까지 양조장 투어를 마친 뒤 집에 돌아왔을 때 문 앞에 이미 ‘우렁이쌀’ 택배상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전주를 거쳐 전남 함평으로 향했다. 전주는 내가 자란 도시다. 아주 오래전 KBS 다큐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직접 봤던 이강주를 만드는 과정도, 전주시내 막걸리 골목들도 사진 찍은 듯 머릿속에 환하게 남아 있다. 나비 축제와 국화로 유명한 전남 함평에는 양조장 투어 중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양조장 “자희자양”이 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대로 함평 한적한 도로를 지나는데 우측에 커다랗게 “자희자양”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바로 이곳이 한국의 프리미엄 막걸리를 선도하는 양조장 “자희자양”(대표 노영희)이었다. 인기척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장화를 신은 20대의 청년이 나왔다. 술을 사러 왔다고 말하자 당황하면서 지금 남아있는 술이 얼마 없고 다음 주 월요일 출시된다고 한다. 탁주는 없고 청주만 있어서 청주 ‘자희향’을 두 병 샀다.
단언컨대 ‘자희향’을 마시지 않고 한국 막걸리의 맛과 실체를 논하지 마라. 전통문헌에 등장하는 석탄주를 기반으로 한 달콤하면서도 국화 향기가 아련하게 감도는 세련된 도회적인 맛의 술이 ‘자희향’(탁주 12도, 청주 15도)이다. ‘자희향’ 탁주와 청주는 누룩향의 부정적인 냄새를 누르고 기품과 우아함을 갖춘 최고의 술 중 하나이다. 상당수의 후발 주자들이 ‘자희향’을 롤 모델로 ‘자희향’의 맛을 넘어서는 막걸리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던 해 생일주로 와인 대신 ‘자희향’이 올라가 일명 ‘이건희만찬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최근 맛이 균질해지면서 초기에 비해 복잡미묘한 향과 맛이 약간 떨어졌다. 대중화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걸 이해하지만, 초기의 미묘한 떨림과 복합적인 섬세한 맛을 잊지 못하는 나 같은 마니아들은 최근의 변화가 조금 아쉽다. 그래도 여전히 ’자희향‘은 ’자희향‘이다.
“자희자양”도 양조장 투어를 다니는 관람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었지만 내가 찾았을 때는 텅 비어 있었다. 앉아서 담소를 나누며 술을 마실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자희자양”에서 생산되는 술이 비치된 선반 등만 비치되어 있었다. 노영희 대표와 아들 두 명 등 거의 세 사람에 의해서 운영되는 “자희자양” 양조장은, 현대식 공장처럼 커다란 건물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 의하면 영업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 애초부터 원가 계산을 잘못했기 때문에 술을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출고가격을 인상하면 되지만 그동안 단골들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
강원도부터 제주까지 전국 곳곳에 위치한 ’찾아가는 양조장‘은 이제 단순히 술만 빚는 곳이 아니라 체험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농수산부에서 운영하는 서울 삼성동 테헤란로의 전통주갤러리(관장 이현주)에서도 매월 한 지역을 정해서 그 지역 특산 전통주를 무료 시음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9월에는 충청남도 지역의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술들을 시음하고 있다. 미리 예약해도 되고 강남역 주변을 걷다가 들어가서 누구나 시음에 참여할 수도 있다. 무료시음으로 선정된 충청남도 지역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술은 모두 5종. 막걸리는 천안의 입장탁주, 약주는 금산 임산주와 공주 계룡백일주, 증류주는 천안 두레앙, 와인은 예산 추사애플와인 등 5종이 무료 시음주로 선정되었다. 전통주를 빚는다는 것은 오랜 인내를 요구하는 제조과정이 필요하고 더구나 수익구조도 안 좋고 유통 과정도 힘들어서 장인정신이 없으면 쉽지 않다. 우리 술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보고 플라스틱 값싼 용기가 아니라 병에 넣어 깊은 맛과 향기를 오래도록 보관하는 좋은 우리 술이 많은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첫댓글 생가보다 많군요.
역시 선생님의 열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