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지역 전적지
10년도 더 전에 작성한 답사 자료인데 참고삼아 보세요.
철원 지역과『철(鐵)의 삼각지(三角地)』전투
철원 일대는 지리적으로는 우리나라 X축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요충지이다. 이러 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9세기 후반 후삼국시대 태봉국의 도읍지로 정해 지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남북을 잇는 주요 간선도로의 발달과 함께 경원선이 경유하고, 금강산 전철이 분기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기도 하였다. 6·25전쟁 중 피아 간 공방의 격전장이 된 철의 삼각지 전투는 상당 부분 이러한 지리적 요인에 기인한다. 『철의 삼각지』란 6·25전쟁 당시 중부전선의 심장부로서 그 지리적 중요성이 매우 큰 평강-철원-김화를 잇는 삼각축선(三角軸線)을 말하는데 당시 피아간 전황으로 볼 때 이 지역의 확보 없이는 중부전선을 장악하기 어려웠으므로 6·25전쟁 전 기간을 통하여 피나는 쟁탈전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철의 삼각지 일대는 아군이 공격하기에 는 불리하고 적이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지형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철의 삼각지』란 말이 생긴 것은 당시 미8군 사령관이던 팸프리트(James. A. Famfleet) 대장이“적이 전 전선의 생명선으로 사수하려는 이 Iron Triangle(철의 삼 각지)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말한데서 이러한 호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휴전회담으로 인한 정치적 제약 등으로 평강 공략은 실패하였지만 백마고지 전 투로 대변되는 철의 삼각지 좌변(左邊) 지역과 저격능선 전투 등으로 유명한 철의 삼 각지 우변(右邊) 김화지구 전투는 6·25전사 중 가장 처절하였고 충용무쌍(忠勇無雙) 한 전례(戰例)를 역사에 남겼다.
■ 백마고지(白馬高地) 전투
백마고지(395m) 전투는 6·25전쟁 기간인 1952년 10월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3km 북방에 위치한 무명의 한 작은 고지를 놓고 한국군 보병 제9 사단(사단장 김종오)과 중공군 제38 군 3개 사단이 전력을 기울여 쟁탈전 을 벌인 끝에 한국군의 승리로 매듭지 어진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이 고지를 빼앗기 위해 피아간 2만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전투기 간 중 발사한 포탄은 아군측 22만여발, 적군측 5만5 천여발이나 되었으며, 피아간 12차례의 공방전으로 24회나 주인이 바뀌기도 하였다. 전투가 끝난 뒤 처 절하게 변모한 산 정상부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 다고 한다.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군이 방수(防守)능력을 높이 평가받은 일전으로서 보(步), 전(戰), 포(砲), 공(空)의 협공이 긴밀하게 이루어진 고지 공방의 범례(範例)가 되는 결전이었다.
■ 저격능선 전투
저격능선은 적이 전략적으로 중요 시하던 김화 오성산(1062m)의 남쪽 에 위치한 높이 590m, 면적 약 1㎢의 장방형 능선으로, 저격능선 전투가 있 기 1년여 전 1951년 10월 미 25사단 이 이 능선을 확보할 무렵 이 능선에 서 중공군 저격병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고 Sniper Ridge(저격능선)라 부르 면서 붙은 명칭이다.
저격능선 전투는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1년여, 전선은 진지전으로 변하 여 교착되었던 상태에서 군사분계선 설정에 보다 유리한 지역을 확보코자 중공군이 아군의 주요 진지에 공격을 가하자, 한국군 제2사단(사단장 정일권)과 연합군이 적이 점령하고 있던 저격능선을 선제공격함으로써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42일간의 계속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쌍방간 42회의 공방으로 정상의 주인이 10여 차례 이상 바뀌었으나 결국 전투가 끝난 11월 24일에는 아군이 이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2개 연대의 병력을 잃고 오성산 북쪽으로 철수하였고, 아군도 1 개 연대 병력을 잃어 백마고지전투와 함께 6·25사상 2대 격전으로 불린다. 그러나 아쉽게도 휴전을 바로 앞 두고 이 고지를 다시 적에게 빼앗겨 현재 저격능선 은 군사분계선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 승일교(承日橋)
철원군 동송읍과 갈말읍의 경계인 한탄강 중류 지점에 놓여 있는 높이 35m, 길이 120m, 폭 6m의 다리이다. 북한은 공산치하인 1948년 8월부터 이 도로를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하고 자, 철원 및 김화 지역 주민들을 5일 간 교대제로『노력공작대』라는 명목아래 동원하여 장흥리쪽부터 공사를 하던 중, 다리의 절반 정도를 추진한 상태에서 6· 25전란으로 중단되었다. 수복 이후 우리 정부에서 약간 다른 공법으로 나머지 구간 공 사를 마치고 1958년 12월 3일 준공하면서“승일교”라 명명하였다.
승일교의 명칭에 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남북합작으로 완성 한 다리라 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합친 승일교(承日橋)이 며, 다른 하나는 군부에서 주장하는 승일교(昇日橋)인데, 이는 당시 한탄강을 건너 북 진중 전사한 고 박승일(朴昇日) 대령을 기리기 위하여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99년 8월 11일 승일교 바로 옆 남쪽에 현대식 공법에 의한 아치형 철근구조로 교 량을 개설하여“한탄대교”라 명명하였으며, 종래의 승일교는 등록문화재로 제26호로 지정(2002. 5. 27.)하여 현재는 통행을 금지시키고 있다.
■제2땅굴
제2땅굴의 발견은 우연으로 보기에는 참 으로 기적같은 일이었다. 이 땅굴 굴착음 을 처음 감지한 우리 초병은 입대전 탄광 에서 폭파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경계근무 를 서던 1973년 11월 20일 새벽 4시“탁 탁”하는 아주 미세한 미상음(未詳音)이 경 계근무 서는 땅 밑에서 들려왔다. 입대전 의 경험으로 보아 그 소리가 직감적으로 폭약을 터트리는 소리임을 감지하고 이 사 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미 북한군의 땅 굴 굴착을 확신하여 예하 부대에 특별경계 근무를 지시해 놓고 있던 당시 6사단장 정 명환 소장은 보고를 받은 즉시 상급부대에 보고하고 땅굴 시추를 건의했으나 당시 상 급부대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러나 정 사단장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별 도의 청음(聽音)부대를 운용하는 등 땅굴 발견 노력을 계속하였고 드디어 1975년 3월 19일 땅굴을 발견했다.
땅굴이 있는 지점은 견고한 화강암층으로 지하 50~160m지점에 있는 이 땅굴의 총 연장은 3.5km인데 그 중 군사분계선 님쪽으로 1.1km까지 파내려왔고 그 규모는 높 이 2m의 아치형 터널로서 시간 당 중무장한 3만여명의 병력과 야포 등의 대규모 침투 가 가능하도록 굴착되었다.
제2땅굴이 제1땅굴과 다른 점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훨씬 커서 짧은 시간내에 많은 병력과 전투장비를 통과시킬수 있어서 아군측에 훨씬 위협적이었다는 것이다. 북한 김일성은 1972년 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우리를 안심시킨 직후부터 이 남침용 땅굴을 파 내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재 이 땅굴은 철의삼각전적지 개발계획에 따라 전 국민의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안 보관광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 철원평화전망대
철원평화전망대는 2007년 8월 준공하였 으며, 전망대에서는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하여 6·25 주요전적지·궁예의 도성 터·평강고원·북한선전마을을 조망할 수 있으며, 망원경 시설과 첨단기술로 제작된 지형모형도가 있어 민족분단의 현실을 생 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다. 전망대를 왕복 하는 모노레일카가 운행되고 있다.
■ 월정리역(月井里驛)
경원선의 간이역이었던 월정리역은 남방한계선의 최근접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객차 잔해 일부만 남아 있는데,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강렬한 팻말과 함께 분단된 민족의 한을 여실히 증명하여 주고 있다.
원래 경원선은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동원하고 당시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을 고용하여, 1914년 8월 강원도내에서 가장 먼저 부설되었는데 서울-원산 간 221.4㎞를 연결한 산업 철도로서 철원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원산의 해산물 등을 수송하는 간선철도 역할을 했다.
현재의 월정리 역사(驛舍)는 철원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