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10월 1일 대구부 상수서면 대명동이라 부르다가 1970년 7월 1일 대명 1~8동으로 분동되었고, 1975년 10월 1일 대명 1동을 1,9,10동으로 분동, 1979년 1월 1일 대명 1동을 1,11동으로 분동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대구의 최남단에 위치한 행정동이 가장 많은 동이다.
대명동은 대구부 상수서면 지역으로 대명골이라 하였음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암동을 병합하여 대명동이라 했다. 대명동 일부를 1980년 4월 11일, 남산동에 편입시켰다. 1985년 11월 1일에 대명 1동과 대명 6동을 대명 10동과 대명 11동으로 분동, 1980년 4월 11일, 대명 11동을 대명 4동으로, 대명 10동을 대명 6동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대명동이라는 동명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에서 연유된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우리 나라를 도우러 왔다. 그는 이여송의 일급 참모로서 작전 계획 수립에 항상 참여했고, 조선군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도 우리 조선군과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장수였으며 그의 활동과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우리 나라로 왔다. 그 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그에게 대구 시내 경상감영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해 주었다. 그 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그는 자기가 받은 땅을 모두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겨 편안한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누리는 행복이었기에 고향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 생각에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에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 : 현재의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2) 대명동의 자연부락
① 종지골·정자골·종주골 : 현재는 대명 7동 대구대학교 주변 대명 7동 파출소와 놀이터를 중심으로 삼각로타리 부근 일대를 일컫는데 예전에는 지형이 종지(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다하여 종지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다른 설로는 예전에 이 지역에 커다란 정자가 있다 하여 정자골이라 일컬었는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다가 변모되어 종지(종주)골이라 불려진다. 일설에 의하면 종지나무 숲이 울창했다 하여 종지골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 주위에는 새모당 또는 새못(깊이 15m정도 추정)이라고 불리는 저수지가 현 놀이터 부근에 있었는데 이 저수지의 수원은 남구 봉덕동의 용두천의 물이었다고 한다.
② 여시골·야시골·여우골·여의골 : 남구 대명 2동과 5동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현 대구교육대학교와 경상중학교, 남대구 우체국 일대는 해발 85m정도인 그 남쪽 언덕바지의 대구고등학교와 영남대학교 부속병원 쪽을 행하여 몇 개의 톱니바퀴 모양인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다.
약 2벽여년 전의 이 일대는 소나무 등이 우거진 울창한 잡목림을 이루어 여우, 늑대, 토끼들이 많이 살았고, 최근까지 '긴등골'이라 불리고 있었으며, 인근 마을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여기저기에 묻어 애총을 마련했는데 여우들이 이 무덤을 파헤치려고 몰려들어 "야시골(호곡)"이라는 이름도 붙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 살던 한 여자 몽유병 환자가 밤만 되면 나타나 무덤 사이를 여우처럼 헤매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밤에 지나가기를 두려워하였고, 이로써 '야시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일설도 전해지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새못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여우가 살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③ 진밭(장전 : 長田) : 남구 대명 5동으로 진밭은 걸(내) 서쪽의 대명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서괘진(西掛津 : 서꺼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긴 밭이 있었던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서괘진과 진밭 사이에 다른 마을이 없었던 당시 이 마을에는 동서 방향으로 사래가 긴 밭들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그 보리밭은 너무 넓어 아낙네들이 한 사래의 김을 매는데 한나절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서 '진밭'이라 불렀으며 현재 이곳은 대명 5동의 일부로 농토나 공지는 전혀 없는 밀집된 주택지를 이루고 있다.
④ 서괘진(西掛津) : 남구 대명 9동의옛이름은 서괘진이라고 한다. 괘진이란 지명은 이곳을 세거지(世居地)로 정한 두사충이 이곳이 강가는 아니지만 모양이 흡사 강의흐름과 같고 나룻배가 닿는 곳과 같다고 해서 괘진(掛津)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서괘진과 동괘진의 분기점은 현 앞산공원으로 올라가는 현충로를 기점으로 서편이 서괘진이요, 동편이 동괘진에 해당되는 곳이다.
서괘진은 옛날 안지랑골 또는 안지랭이로 불리는 곳이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패한 후 이 골짜기에 안심하고 숨어 지내다가 갔다는 데서 고려 때부터 안지랑골로 불리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옛날의 서괘진인 이곳은 앞산의 울창한 숲과 맑은 공기를 품고 있어서 대구 시민들의 휴식처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⑤ 영선못과 영선시장 : 남구 대명 8동 2014번지로서 대봉동 영선시장과 그 부근 주택가는 옛날에는 못으로 영선못일아 불렀다.
영선못은 시가지에서 가까운데다 물이 많고 주변 경치가 좋아 이 부근 논밭에 물을 대는 동시에 대구 시민들의 휴식처로 여름에는 낚에와 수영, 겨울에는 얼음지치기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도시 발전에 따라 이곳 물을 끌어다 쓰던 농토에 집들이 들어서자 못은 필요가 없어 매운 후 그곳에 시장과 주택이 들어섰는데 도시가 팽창하기 전까지는 이 영선못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짓는 논이 아주 넓었다. 이 못을 만들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따른다. 조선시대 말엽 이 부근에 한 고관이 살았다. 어느날 도사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며 유심히 지세를 살피더니 고관집에 들어가 "나으리, 저기 보이는 저 넓다란 터에는 절대로 집을 세우지 마십시오. 그곳에 집을 지으면 나라에 근심될 일이 생깁니다. 그곳에 12년을 걸려 큰 못을 만든다면 거꾸로 나라에 큰 경사가 생길 것입니다." 고 일러주고는 사라졌다. 고관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워낙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나라에 좋은 일이 생긴다면 재산을 아끼고 수고를 하양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곧 사람들 모아 못파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나라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관이 자기 개인 재산으로 일삯을 주며 시키는 것이다. 수백 명의 일꾼이 눈비를 가리지 않고 땅을 파고 파낸 흙을 모아 못둑을 만들었다. 도중에 쓰러지는 사람도 생기고 필요 없는 못을 파서 뭘하느냐 부령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고관은 속짐작만 할 뿐 왜 파는지 아무런 설명없이 12년을 끌어 커다란 못을 완성했다. 못이 완성되자 대덕산 등 주위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잡아 가둠으로 여름 장마철에는 홍수를 면하게 되었고 가물 때는 그 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으니 국가적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이 전설은 농업을 위해 못을 만들 때 그냥 단순히 농사만을 구실로 내걸어서는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럴듯한 구실을 붙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영선못은 그 뒤부터 대명동 일대 수십만 평 논밭의 수원지 구실을 했고 장마철에는 홍수조절 역할을 했다.
대구시가 팽창하여 이 못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던 논밭이 모두 택지로 바뀌자 몽리지 없는 못은 필요 없게 돼 매립공사가 시작됐고 시장, 주택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못은 없어졌지만 영선(靈仙)이란 이름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⑥ 새 못 : 남구 대명 2동 1881 - 1882, 일제 초기 농업 용수를 얻기 위해 지금의 대명 2동 1881 - 2번지 일대와 대명 7동 1899번지인 삼각로타리와 경상중학교 사이에 약 만여평 규모의 저수지로 당시 주위의 논에 물을 공급해 주던 못이라고 한다.
새로 만들어진 못이라고 해서 '새못'이라 불리었고 못의 남쪽에 새못 안동네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의 대명 2동 경상중학교 남쪽 주위에 100여호의 초가집과 3호 정도의 기와집이 있었던 영세마을이었다고 한다. 1955년경 대구시의주거 지역 확보를 위한 구획 정리로 쓰레기와 주위 야산을 깎아 내린 흙으로 매립, 지금의 주택지가 되었으며 현재는 못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⑦ 탑마을 : 남구 대명 8동 15번지.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 8동 현 경북잠업 검사소와 남흥교회가 위치한 일대의 마을을 탑마을(탑동네)이라고 불러 오고 있다.
이 지역은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야산으로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 후 영선못이 만들어지고 주변 경치가 아름답게 되자 영선못둑에 활을 쏘는 사선이 만들어지고 이 언덕배기(현 남흥교회 자리)에 과녁판이 설치되어 궁사들이 과녁을 꿰뚫기 위한 시정의 초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 산마루에 일본인들이 충혼탑을 세워 일본제국주의에 충성을 강요하는 장소가 되면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이 충혼탑은 없어지고 6.25 때 현재 경북잠업검사소 자리에 UN군으로 참전한 미군(美軍) 통신소가 주둔하였다가 휴전 후에 철거하였다.
1956년경 도시 계획에 의해 남문시장에 형성되었던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철거민들의 임시 이주처로 이 동네가 형성되었고, 옛날 충혼탑이 있었다고 하여 탑마을(탑동네)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되어 지금도 탑마을로 통하고 있다.
⑧ 참나무뱅이 : 현재는 영선파출소 즉 대명 8동의 일부에 속하는데, 영선 파출소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예전에는 참나무가 많아서 '참나무뱅이'라 일컬어졌다. 현재까지도 그렇게 불려지고 있다.
⑨ 문둥골 : 현재 위치는 계명대학교 대명캠퍼스와 대명시장 사이를 말하는데, 그곳에서 문둥병 환자가 몇 명 살았다 하여 문둥골이라 했다.
⑩ 동괘진, 서괘진, 동계진, 서계진 : 앞에서 내려오는 칠곡(현재 남대구 등기소)을 중심으로 동편에 위치한 부락을 동괘진, 동계진이라 하고 서편에 위치한 부락을 서괘진, 서계진이라 부른다.
⑪ 신공동묘지 : 현재 대명 1동 정우맨션자리에 공동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신공동묘지라 한다.
⑫ 양지동(陽地洞), 양지마을, 아지뜸, 양지덤 : 현재 대명 1동 대흥목욕탕 자리에 이조말부커 비슬산 기슭(계명대 동산) 아지뜸에 과거 5~6호가 모여 살았는데 이 마을이 정남향으로 하루종일 햇살이 드는 따뜻한 양지라 하여 양지동이라 불리웠다. 대다수가 언덕에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재래 농업을 했으며 정착민은 일선 김씨였다.
⑬ 번디기 : 현대 댜명 6동으로 안지랑 우체국 86, 102번 도로 우편, 대명 6동 지역으로 평평하고 넓은 지역이라 하여 번디기라 한다.
⑭ 도촌(都村)·동개진(東開津)·서개진(西開津) : 약 250년전부터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다.
당시는 남구 대명동에 5개의 자연부락이 형성되어 왔는데 대명 9동 앞산아파트 북편 2000m지점에 부락을 동계진동이라 하고 현 대명 9동 사무소 부근 마을을 서계진동이라 하며 영남대학교 남편 마을을 장진동이라 부르고 대명 6동 부락을 골안이라 하고 이와 함께 장등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을 도촌이라 하였는데, 살고 있는 마을 주민 중에도 都氏 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 부락주민 70%가 도씨성) 도촌이라고 불리어졌다고 하고, 이조 중엽1600년경 대구지방에 무역을 교역할 때에는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현재의 화원유원지 부근에 대구 상인들과 상거래를 형성하였는데, 1700년경 갑자기 홍수로 인하여 낙동강물이 범람하여 상선이 정상적으로 운행을 할 수 없어 배가 대피하던 중 배의 일부가 대명천 부근에 정착하였는데 낙동강물이 줄어들면서 배가 다시 강으로 가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어 돛대가 걸려서 가지 못했다 하여 그 부근 마을을 도촌(현재 파크 맨션 뒷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⑮ 골안·곡내(谷內) : 현재 대명 11동으로 성명교회 위쪽으로 쭉 뻗은 도로에 인접한 마을을 일컫는 것으로 양쪽 골짜기 사이, 또는 골자기 안이라 하여 골안, 곡내(谷內)라 한다.
비둘기촌 : 현대 대명 4동으로 지금부터 200년 전 정조 12년 이마을 전주 이씨 이양종이 이 마을에 감자를 심어 전국 식량배급을 확대 실시코자 하였으나 당시 먹을 것이 적고하여 걱정하던 중 갑자기 까마귀떼가 모여들어 곡식을 해침에 식량난은 더 심했다. 마침 비이기라는 무당 점장이가 굿을 하여 이틀만에 까마귀떼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이 때부터 비둘기촌이라 부렀다. 비둘기촌은 무당의 이름이 飛자와 二자를 사용해서 처음에는 비두촌이라 하다가 옛이름을 따서 비이기를 비둘기라 하여 비둘기촌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