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1층 특별전시실에서 2014.7.29부터 9.28일까지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LANDSCAPES : SEEKING THE IDEAL LAND)" 를 전시합니다.
우리의 이상향,유토피아를 찾아서 마음과 몸을 산과 물에 묻치어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소상팔경(瀟湘八景)','무이구곡(武夷九曲)','도원(桃源)'에 담아 보았습니다.
인물산수문전(人物山水文塼)
충남 부여 외리 출토, 백제 7세기, 각 29.0X29.0cm, 보물 343호
인물산수화전에는 세 개의 봉우리가 연결된 三山形의 산이 중첩해 있으며,
양 끝에 괴석이 웅장한 산세를 에워싸고 있다. 산등성이의 누각과 道人풍의
인물은 이 산 속이 신성한 장소임을 암시한다.
참고로 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출토된 무늬 벽돌은 모두 여덟 가지 종류가 있는데
원형의 蓮花文塼, 渦雲文塼, 鳳凰文塼, 蟠龍文塼과 사각형의 蓮座鬼形文塼,岩座鬼形文塼,
인물산수문전, 봉황산수문전으로 나뉜다. 이 벽돌은 바닥에 까는 敷塼이 아니라
벽면에 장식하는 壁塼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황산수문전(鳳凰山水文塼)
봉황산수문전에는 삼산형의 산과 함께 산꼭대기에 봉황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다. 이러한 산악은 지상의 현실세계와 봉황이 상징 하는 천상세계를
연결하는 청정한 공간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산수를 신비롭게 여겼던 고대인 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담무갈보살 . 지장보살예배도(曇無竭菩薩.地藏菩薩禮拜圖)
魯英, 고려 1307년, 칠 위에 금, 22.4x10.1cm
한 면에는 담무갈보살과 지장보살예배도가, 다른 한 면에는 아미타구존도가 그려져 있는
소형 불화이다.하단 양 끝에 촉이 있어서 어딘가에 꽂아두고 봉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촉과 촉 사이에 "大德十一年丁未八月日 謹畵魯英同願口得付 金漆書"라는 명문이 있어
이 불화가 1307년(충렬왕 33)8월에 노영이 그린 것을 알 수 있다.화면 상단에 예불하고 있는
인물은 고려 태조 왕건으로, 금강산에서 담무갈보살을 친견하는 장면이다. 담무갈보살 왼편
산봉우리는 금강산 특유의 수직적인 바위산이다. 금강산이 실경 산수화의 오랜 소재 임을
보여주는 예이자, 불보살과 인간이 만나는 청정한 무대로 산수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산수의 신성성을 보여준다.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金弘道(1745~1806년경), 조선 1801년, 비단에 엷은 색, 133.7X418.4cm, 개인소장
8폭의 큰 화면에 문인들이 꿈꾼 이상적인 전원 생활을 생생히 표현한 작품이다.
1801년 12월 수두를 앓던 純祖의 쾌유를 기념하여 제작된 것으로, 중국의 유학자
仲長統이 지은 [낙지론(樂志論)]의 내용을 주제로 삼았다. 제목인 '三公不換'은
풍요로운 자연 속 삶을 삼공의 높은 벼슬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뜻을 지닌다.
속세를 떠난 선비들이 책을 읽거나 모임을 즐기는 모습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곳곳에
서민들의 분주한 일상까지 서정적인 분위기로 그려냈다. 김홍도의 작품답게 중국에서
유래한 주제이지만, 자연과 함께 한 우리 옛 사람들의 이상적 삶의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김홍도 삼공불환도에 간재(艮齋) 홍의영(洪儀泳)이 쓴 글
辛酉冬十二月 玉候水痘 翌瘮 八域欣忭 留後韓公作禊屛 分于僚屬 盖識曠前之慶也
韓公及余得神禹治水圖 摠制得花卉翎毛 州判願爲三公不換圖 各取其好也 圖旣成
遂題仲長氏樂志論 取其語於副之圖 且期成其所好 無負仲長之論 檀園之畵也
艮齋題于檀園三公不換圖
[신유년(1801)겨울 12월에 임금의 병환인 수두가 나아서 온 나라가 기뻐하고 즐거워 하였다.
留後인 韓公이 계병을 만들어 휘하의 벼슬아치에게 나누어주니 대개 전에 없던 경사를
기념한 것이다.한공과 나는 <神禹治水圖>를 얻었고, 총제는 <화조영모도>를 얻었으며
주판은 <삼공불환도>로 하기를 원하니 각자 그 좋아하는 것을 얻었다. 그림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드디어 중장씨의 {낙지론}을 화제로 썼는데 그 말이 그림에 부합되는 것을
골랐다. 장차 그 좋아하는 바가 이루어지고 중장씨의 논한 내용과 단원의 그림에 나타난
뜻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간재(홍의영)가 단원의 삼공불환도에 쓰다]
*한자
참(疒+參瘮 : 놀라고 두려워 할 참, 냉병 참), 忭 (기뻐할 변) 禊(禊祭 계: 몸을 씻고 제사에 임하는)
평사낙안(平沙落雁)
작가미상, 조선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 비단에 먹, 126.4x48.9cm
조선 초기 소상팔경도 중 한 폭으로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전경의 왼쪽에는 가옥과 나무가 들어선 산자락의 일부가 보이고, 중경에는 양옆으로 산자락의
일부가 수면을 사이에 두며 비스듬히 마주하고 있다. 그 너머로는 江岸이 보이면서 遠山으로
이어지며 모래사장에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 보인다.
그림의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지은 시가 적혀 있다.
平沙落雁
玉塞多繒 繳 [옥새에는 주살이 많고] *繒 繳(증작)-활쏘기에서
金河欠稻粱 [금하에는 곡식이 없어]
兄兄弟弟自成行 [형제들이 서로 나란히 줄지어]
萬里到瀟湘 [만리를 날아 소상에 이르렀네].
遠水澄拖練 [먼 물은 피륙을 널어 놓은 듯 맑고]
平沙白耀霜 [넓은 모래톱은 반짝이는 서리처럼 흰데]
渡頭人散近斜陽 [뱃머리에 사람이 흩어지고 석양이 가까워]
欲下更悠揚 [내려 앉으려다 다시 날아오르네].
번역 하영휘
* 益齋 이제현의 '巫山一段雲 瀟湘八景'중 제1수이다(익재난고(益齋亂藁) 권10 '長短句')
동정추월(洞庭秋月)
소상팔경도, 文徵明(1470~1559), 명 16세기, 비단에 먹, 각 24.3x44.8cm, 상해박물관
湘水가 湘邑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가면 아득히 넓은 동정호에 이른다.
작가는 담묵으로 선염하여 호수에 비친 달로 표현하고 잔잔한 호수에 배를 띄워
물빛과 달빛을 바라보는 광경을 그렸다.
月出天在水 [달이 뜨니 하늘이 물에 있어]
平湖淨於席 [잔잔한 호수가 돗자리보다 깨끗한데]
安得謫仙人 [어떻게 하면 귀양 온 선인으로 하여금]
來聽君山笛 [와서 군산의 피리를 듣게 할 수 있을까]
徵明 [징명]
강천모설(江天暮雪)
湘江의 한가운데 위치한 명승지 귤자주(橘子洲)에서 비롯되었다. 귤자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 섬인데 이 그림은 한겨울 눈이 강천을 뒤덮어 산봉우리들이 하얗게
만물이 고요한 정경을 그린 것이다.
密雪灑空江 [함박눈이 빈 강에 펄펄 내리고]
雲冥天浩浩 [구름 잔뜩 끼어 하늘응 끝이 없는데]
寧知風浪高 [풍랑이 높은 줄 어찌 알리오]
但道漁蓑好 [도롱이를 입는 것이 좋다고 말할 뿐이네].
徵明 [징명]
평사낙안(平沙落雁)
南嶽인 衡山의 72개 봉우리 중 가장 높은 回雁峰에 이르러 큰 기러기가 여기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지 안았다고 한다. 평사낙안은 회안봉 아래 아득히
넓은 들과 모래사장에 갈대는 무성하고, 한 무리의 기러기 떼가 우거진 수초에 이끌려
오르락내리락 선회하다가 서서히 모래사장 위로 내려앉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征鴻戀廻塘 [멀리 날아온 기러기 휘도는 물가를 그려]
欲下還驚飛 [내려앉으려다 도로 놀라 날아오르네]
葦深繒작繁 [갈대 숲 깊어 주살을 쏘기 어렵고]
歲晩稻粱肥 [철이 늦어 곡식도 잘 익었는데]
徵明 [징명]
*한자
증작(繒작 : 주살-오늬에 줄을매어 쏘는 화살-의 줄, 오늬는 화살의 머리를 시위에
끼도록 에어 낸 부분)
산시청람(山市晴嵐)
이 그림은 바로 산촌의 시장이 막 끝나 사람들이 흩어진 정경을 묘사한 것으로,
산기슭에 다시 고요함이 찾아오고 물결은 반짝거리며 산은 청명하다.
鷄聲茅屋午 [닭 우는 초가집의 한낮]
靄靄墟煙白 [흰 연기는 뭉게뭉게 피는데]
市散人亦稀 [장은 파하여 사람도 드물고]
山空翠猶滴 [산은 비어 푸름이오히려 묻어나네].
徵明 [징명]
소상야우(瀟湘夜雨)
湘水는 호남성 永州에서 瀟水와 만나 소상이라 불린다. 소상야우는 瀟湘
두 江이 만나는 곳에 안개비가 내리는 밤풍경을 그렸다.
濕雲載秋聲 [먹구름은 가을 소리를 싣고]
萬籟集篁竹 [온갖 음향은 대숲에 모이는데]
江湖白髮長 [강호에서 백발이 길어]
獨擁孤蓬宿 [홀로 쓸쓸한 쑥 덤불을 끼고 자네].
徵明 [징명]
연사만종(煙寺晩鐘)
상강이 흘러 들어가는 남악 형산은 불교의 성지로 산 둘레에 수백 개의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 이 그림은 저녁이 되어 어둠이 주위를 뒤덮고 아무 소리 없이
고요할 때, 산사의 시간을 알리는 오래된 종만이 깊고 맑은 소리를 내어 산자락의
나그네가 이 웅장하면서도 심오한 종소리를 듣고,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정경을 그렸다.
日沒浮圖昏 [해가지니 탑도 어두워지고]
遙鍾隔煙嶺 [안개 낀 고개 너머 먼 종소리 들리니]
應有未眠人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이 있어]
冷然發深省 [냉철하게 내면을 깊이 성찰하리라]
徵明 [징명]
어촌석조(漁村夕照)
어촌석조는 바로 세속에서 名利를 좇는 사람들의 마음 속 이상향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세상 밖 桃源과 같은 어촌의 해질녘을 묘사한 것이다.
曬網白鷗沙 [흰 갈매기 나는 모래톱에서 그물을 말리고]
衝煙靑篛笠 [푸른 대삿갓 쓰고 안개를 헤치며]
欸乃一聲長 [어기여차 노 젓는 소리 긴데]
江空楚天碧 [강은 비고 초나라 하늘은 푸르네]
徵明 [징명]
원포귀범(遠浦歸帆)
橘子洲로부터 湘江을 따라 북으로 가면 바로 湘陰이다. 황혼무렵, 물결 잔잔한
강에 고기를 잡던 배들이 연이어 돌아오고 가족들은 문에 기대어 고개를 빼고
이들을 기다린다.
孤帆落日明 [외로운 돛 지는 햇빛에 밝고]
靑山相映帶 [청산은 물에 비치어 푸른 빛을 띠는데]
遙遙萬里情 [머나먼 만리를 그리는 마음]
更落靑山外 [다시 청산 밖으로 향하네].
徵明 [징명]
장동팔경도(壯洞八景圖)
鄭敾(1676~1759),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각 33.7x29.9cm
소상팔경은 勝景을 소재로 한 산수화의 대명사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주변에 있는
산수 중 팔경을 꼽아 理想景으로 삼는 '八景文化'가 형성되었다.
장동은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 일대를 이르는 지역이다. 산이 깊고 물이 맑아 탈속의
공간으로 여겨졌으며, 권세가들의 주거지도 많았다. 정선 역시 이곳에 거처를 두었기 때문에,
권력의 중심지에서 理想鄕을 소망했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내면을 잘 표출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장동팔경도]는 현재 중앙박물관 소장본과 간송미술관 소장본이 각각 전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소장본으로, 翠微臺, 大隱嵓, 獨樂亭, 聽松堂, 彰義門, 白雲洞, 晴暉閣, 淸風溪로
구성되었다. 이에 비해 간송미술관 소장본은 彰義門, 白雲洞, 晴暉閣 대신 紫霞洞, 水聲洞,
弼雲臺가 포함되어 팔경의 선정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위 그림 좌측은 백운동, 우측은 창의문
우측부터 "燕吳八景圖" 중
성남구사(城南舊社), 서산추색(西山秋月), 방재후월(舫齋候月)
우측부터
서호연사(西湖蓮社), 구봉초은(九峰招隱), 서산모애(西山暮靄)
우측부터
서산설제(西山雪霽), 적벽운범(赤壁雲帆)
연오팔경도(燕吳八景圖)
董其昌(1555~1636), 명, 1596년, 비단에 색, 각 26.1x24.8cm, 중국 상해박물관
동기창의 자는 玄宰, 호는 思白, 香光居士이며 華亭(지금의 松江)사람이다.
萬曆 17년(1589)에 진사가 된 후 예부상서까지 올랐다. 시호는 文敏이다.
서예는 처음에는 顔眞卿을 배웠으나, 후에 鍾유와 王羲之의 서법으로 바꿨다.
邢侗,米萬鍾,張瑞圖와 함께 '明末四大書家'라 불리게 되었다.
禪宗의 이론을 회화에 적용시켜 南北宗論을 주창하며 '南宗'을 문인화의 정통으로
높이 받들었는데, 이후 명.청대 화가들 대부분이 이 이론을 따랐다.
저서로는 [容臺集],[畵禪室隨筆] 등이 있다.
평생 북경에서 관직생활을 했는데 [연오팔경도]는 만력 24년(1596), 42세때 제작한
것으로 이 그림은 동기창이 귀향을 앞둔 고향 친구 楊繼禮를 위해 그린 것으로 '연'은 북경을,
'吳'는 이들의 고향 송강을 가리킨다. 두 지역의 풍경이 모두 담긴 그림을 그려서
오랜 친구에게 정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武夷九曲圖
武夷山上有仙靈 山下寒流曲曲淸 欲識箇中奇絶處 櫂歌閒聽兩三聲
一曲溪邊上釣船 幔亭峰影蘸晴川 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巖鎖翠烟
二曲亭亭玉女峰 揷花臨水爲誰容 道人不復荒臺夢 興入前山翠幾重
三曲君看架壑船 不知停櫂幾何年 桑田海水今如許 泡沫風燈敢自憐
四曲東西兩石巖 巖花垂露碧㲯毿 金鷄叫罷無人見 月滿空山水滿潭
*監+毛(람),參+毛(삼)자로, 람삼은 털이 긴 모양이란 뜻
五曲山高雲氣深 長時烟雨暗平林 林間有客無人識 欸乃聲中萬古心
六曲蒼屛遶碧灣 [6곡이라 푸른 병풍 바위는 푸르른 물굽이를 휘감아 돌고]
茅茨終日掩柴關 [온종일 이끼는 사립문을 덮고 있네].
客來倚櫂巖花落 [나그네가 노에 몸을 기대니 바위에서 꽃이 떨어지는데]
猿鳥不驚春意閑 [원숭이와 새가 놀라지 않고 봄빛은 완연하네]
七曲移船上碧灘 隱屛仙掌更回看 却憐昨夜峰頭雨 添得飛泉幾度寒
八曲風烟勢欲開 鼓樓巖下水瀠洄 莫言此處無佳景 自是有人不上來
*삼수변+縈(형)洄(회)는 물이 돌아 흐르는 모양
九曲將窮眼豁然 桑麻雨露見平川 漁郞更覓桃源路 除是人間別有天
계유칠월하한강세황사(癸酉七月下澣姜世晃寫)
표암 강세황이 1753년(영조29) 7월 하순에 그린 <무이구곡도>.
표암은 무이산의 절경을 실제로 보고 그린 것은 아니지만 인간 별천지에 대한
느낌을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묘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암봉의 형상을 갈필의
피마준(披麻皴)으로 나타내면서 경물을 소략하고 간결하게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15세기 후반 성리학을 심화시킨 李滉(1501~1570)과 李珥(1536~1584)의 학풍이
영향을 미치면서 朱子(1130~1200)의 학설을 존숭하고 구곡가의 전통을 수용했다.
이이는 海州 石潭에 은거하면서 [高山九曲歌]를 지었고, 이황은 [무이구곡도]를
송시열(1607~1689)이 [華陽九曲歌]를 지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무이구곡도의 구곡의 글은 주자가 "정사에서 한가로이 무이도가 10수를 짓다
(精舍閒居戱作武夷櫂歌十首)" 에서 나온 글이다.
주문공무이구곡도(朱文公武夷九曲圖)
朱文公眞像
家廟에 모셔진 주문공 60세때의 사진이다.
무이구곡도는 중국의 福建省 建寧府 崇安縣 남쪽에 있는 무이산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이다.
무이구곡은 36개의 봉우리와 37개의 암봉이 빼어나게 솟고 굽이쳐 흐르는 아홉 구비의
계곡을 가리킨다. 한무제 때 신선 武夷君이 산다하여 제사를 받들었고, 송나라 때는
玉蟾 葛長庚이 은거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남송 때 주자는 1183년 54세에 무이산 五曲 隱屛峰아래에 武夷精舍를 세워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학장소로 삼았고, 이 곳 12경을 시로 읊으면서 그림으로도 제작하였다.
무이산을 중심으로 주자의 幽居講道의 삶을 보여주는 무이구곡도는 주자의 사상을 잘 반영한
그림이면서 이상향으로서의 산수를 유람하고 즐기는 대상으로 볼 수 있다.
주문공무이곡도(朱文公武夷曲圖)
작가미상, 조선 1565년경, 종이에 엷은 색, 34.7x587.7cm, 영남대학교박물관
무이산의 설명문
구곡계의 설명문
무이정사잡영 병서 (武夷精舍雜詠 幷序)
무이구곡도발(武夷九曲圖跋)
무이구곡도발문 - 퇴계 이황의 발문
三十六洞天 無則已 有則武夷當爲之第一 故其中多靈異之跡 天生我朱子
不得有爲於天下 卒至卷懷棲遯於大 隱屛下 使夫靈異窟宅之地 變爲鄒魯道義之鄕
天意固有所未可知也 而彼一時天下之不幸而 豈不爲玆山之幸也耶
又豈不爲百世斯文之大幸也耶 世傳武夷圖多矣 余昔在京師 求得數本 倩名畵摹來
由其元本疎略 傳亦未盡 吾友李君仲久 近寄一本來 滿目雲烟 精妙曲盡 耳邊況若聞櫂歌矣
噫吾與吾友 獨不得同其時買舟幔亭峰下 輟棹於石門塢前 獲躋仁智堂 日侍講道之餘
退而與諸門人 詠歌周旋於隱求觀善之間 以庶幾萬一也 李君要余 書櫂歌於逐曲之上
旣書 仍識所感於卷末而歸之 嘉靖甲子 二月初吉 眞城李滉 謹跋
삼십육동천(도교에서 말하는 선경)이 없다면 몰라도, 있다면 武夷가 당연 첫째가 될 것이다.
그런 때문에 그 가운데에 옛날부터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가 많다. 하늘이 태어낸
우리 주자는 천하에 뜻을 펴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끝내는 포부를 감추고 大隱屛 아래에
은둔하여 靈仙窟宅(신선이 사는 곳)의 땅으로 하여금 변화하여 鄒魯 道義의 고을이
되게 하였으니, 하늘의 뜻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나 저 한때 천하의 불행은 어찌 이 산의
다행이 되지 않겠으며, 또한 百世 斯文의 큰 다행이 되지 않겠는가.
세상에 전하는 무이도는 퍽 많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몇 본을 구득하여 유명한 화공을
시켜서 모사하였는데, 그 원본이 소락하기 때문에 모사한 것 역시 썩 좋지 못하였다.
나의 벗 李仲久(李湛)군이 요즘 한 본을 부쳐 왔는데, 눈에 띄는 구름과 연기가 곡진하게
정묘하여 귓가에서 마치 櫂歌가 들린 듯하였다. 아 나와 나의 벗만이 그 주자의 시대에 같이
태어나서 만정봉 밑에서 배를 사 타고 가 石門塢 앞에서 닻을 내리고 仁智堂에 올라가서
날마다 주자를 모시고 도를 강설하고 여가에 물러가서 여러 문인들과 함께 隱求齋와
觀善齋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고 두루 돌면서 도리를 만에 하나라도 깨치기를 바라는
일을 하지 못하였다. 이중구 군이 무이의 곡마다 그 위에 도가를 써 달라고 나에게 요구하기에
이미 쓰고 나서 이어 卷末에 느낀 바를 써서 돌려보냈다.
가정 갑자년(1564년,명종19)2월1일에 진성 이황은 삼가 발문을 씀.
무이구곡도
蔡龍臣(1850~1941), 1915년, 종이에 색, 각 107.4x37.3cm
어진화사로도 유명한 石芝 채용신이 그린 무이구곡10폭병풍이다.
채용신은 초상화를 주로 그린 화가이지만, 산수화나 화조영모도들도 여러 점이
전하고 있다. 채용신의 산수화들은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화면을 채운 경물에
황갈색의 담채를 가하고, 매 장면에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무이구곡도에도 화면 곳곳에는 문인들이 배를 타거나 산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는 등,
화면 맨 좌측에는 밭을 갈다 잠시 쉬는 농부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있어 인물화에
능했던 작가의 성향을 잘 보여 준다. 또한 경치마다 지명과 건물명칭 등으 빼곡히
적었는데, 예를 들어 대왕봉, 옥녀봉, 天遊峰과 같은 기암 봉우리 뿐 아니라 주자가
강학을 펼쳤다는 文公書院, 갱의대(更衣臺) 등 모두 무이산에 실재하는 장소이다.
특히 이 작품에는 화면 상단에 주자의 [무의도가] 10수가 거꾸로 쓰여 있는것이 특이하다.
마지막 폭에는 "개국 524년(1915) 9월에 석지가 그렸다" 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
제1편을 마침니다. 이어서 제2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인용문은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 도록을 참조하였으며
사진과 글
권진순
2014년 8월2일
* 한문을 보정했습니다. / 이보
첫댓글 엊그제 전시장에 갔었는데 좋은 자료를 작성하신 권진순 씨가 후배인 것 같은데 반갑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