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춤을
둘째 딸이 결혼식 장소로 택한 곳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푼타 카나라는 곳이었다. 결혼식에 참석하러 11월 중순의 추운 날씨에 뉴저지를 떠났다. 네 시간 후에 시골 작은 공항에 도착하여 이동식 계단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니 따끈따끈한 햇볕이 기분 좋았다. 공항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 로비에 들어서니 바로 앞에 바다가 보였다. 남들 하는대로 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가까운 곳에서 피로연을 하면 되지 14년이나 연애하던 아이들이 외국 어느 섬에서 결혼식을 하겠다고 고집하니 유난을 떠는 것 같아서 못마땅했던 마음도 바다를 보는 순간에 풀렸다.
둘째 딸은 어려서부터 자립심이 강해서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하기를 좋아했다. 서너 살 때부터 머리 빗기나 옷 갈아입기도 혼자 해내는 게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가끔 야단치기도 했다. 자라면서 학교 공부, 과외 활동, 친구 사귀기도 스스로 결정했고, 대학교 입시 준비, 학교 선택 그리고 전공 결정 등의 중요한 일도 일일이 상의하기보다는 알아서 하는 편이었다.
결혼식 준비도 그랬다. 우리 부부는 딸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결혼식 올리기를 원했고 딸은 처음부터 섬에서 하는 특별한 결혼식을 고집했다. 의견이 다를 때는 딸에게 맡겨두는 게 낫다는 걸 경험으로 아는 나는 딸에게 그냥 맡겨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좀 비싸기는 했지만, 호텔비에 음식 대금과 모든 서비스 비용과 시설 이용료가 포함되어 있으니 신경 쓰이지 않아서 편하기는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 시간 외에는 휠체어를 굴려서 바닷가로 가 종려나무(Palm Tree)로 지붕은 엮은 오두막에서 술을 마시며 태블릿을 들여다보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눈앞에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수없이 지나가는 비키니 차림의 아름다운 미녀들을 보고는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으니 내가 나이 들긴 들었나 보았다.
나는 종일 바닷가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딸과 아내는 결혼식 준비에 바빴다. 준비라야 뭐 그리 대단한 건 없었으나 머리 손질, 화장 그리고 마사지 등에 제법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결혼식 하루 전날 아침에 미장원 예약 시간이 다 되었다며 아내를 데리러 바닷가로 온 딸이 그날 세시에 결혼식 예행연습이 있다고 했다. 연습이라야 별것 아니어서 신랑과 신부만 가면 되니 아빠는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바닷가에서 시원한 맥주나 마시며 시간을 보내면 된다고 했다. 신랑과 신부만 정장과 웨딩드레스를 입을 뿐, 하객들은 물론 양가 부모도 평상복 차림으로 결혼식에 참석하는 결혼식이라 복잡한 절차는 모두 생략하려니 했다.
결혼식은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있었다. 신랑 신부와 주례는 정원 앞에 있는 정자(영어로 Gazebo라고 했다.)에 들어가고 하객들은 그 앞에 늘어놓은 간이 의자에 앉고 하객들 자리 옆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와 간단한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날따라 웨딩 가운을 입은 딸은 눈부시게 예뻐서 유럽 어느 왕국의 공주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결혼식이 시작되면 딸은 식장 옆 개울에 걸쳐진 무지개다리 건너편에서부터 걸어들어 온다고 했다. 신부가 다리를 건너러 가기 전에 내 손을 잡아끌더니 다리 바로 앞에 세우고, “아빤 여기서 날 기다려.”라고 말하고는 다리를 건넜다. 아빠와 함께 입장하겠다는 말이었디.
“이거 큰일 났구나. 쌍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는 내가 딸을 데리고 입장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잠시 멍하니 서 있는데 요란스러운 음악이 연주되고 딸은 어느새 다리를 건너와 내 앞에 섰다. 나는 얼른 지팡이 하나를 길옆 풀밭으로 던졌다. 하나만 짚고 걸을 생각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지팡이를 모두 던지고 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다시 망설이다가 어깨에서 손을 내려서 딸의 팔을 잡고 함께 천천히 걸었다. 짧은 거리였지만 무척 긴장 되었다. 딸의 팔에서 내 손을 떼는데 사위가 다가왔다. 먼저 딸을 힘껏 안으며 말했다. “잘 살아야 해.” 그리고는 키가 커서 허리를 한껏 숙이는 사위를 안고서 같은 말을 했다. “잘 살아야 해. Be Happy.” 아내가 건네주는 쌍지팡이를 짚고 하객석에 앉으니 좀 아쉬웠다. 미리 알았더라면 딸과 함께 걷는 연습이라도 해 두었을 텐데. 그리고 딸 내외에게 더 멋있는 인사말을 해주었을 텐데. “얘는 왜 이리 아비를 놀라게 한담.”
결혼식 후에 바다가 보이는 야외에서 피로연이 있었다. 50명 가까이 되는 하객은 대부분 젊은이라 분위기가 매우 밝았다. 나는 신랑 신부의 가족을 위해 마련된 테이블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이국적인 풍경으로 둘러싸인 연회장은 젊은이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한껏 들떠있었다. 나는 샴페인에 맥주 그리고 바깥사돈이 두어 차례 날라다 준 위스키를 마시고 이미 적당히 취기가 올라 있었다. 아내가 날라다 준 음식을 열심히 먹는데 큰딸이 축하 인사를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매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큰딸의 목소리가 가끔 떨렸다. 그리고 신랑 친구의 축하 인사가 이어지고 바로 신랑 신부의 댄스가 시작되었다. 오래 사귄 사이여서 그런지 그리 연습한 것 같지는 않았어도 춤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춤이 끝나는가 했는데 작은딸이 내 테이블로 걸어왔다. 그냥 인사하러 오는가 했는데 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빠, 나하고 춤춰야 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얘는 왜 또 아빠를 이리 놀라게 하는 거야?” 제대로 걷지 못하니 춤을 추지 못하겠다고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 한 손은 딸의 손을 잡고 한 손은 딸의 허리에 두르고 천천히 연회장 한복판으로 걸어갔다.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시곗바늘 방향으로 돌았다. 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본 게 얼마 만인가? 행복해 보이는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주위 사람들을 잊었다. 마치 이 세상에 나와 작은딸만 있는 것 같았다.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는데 다시 살아나서 네가 결혼하는 걸 보게 되니 참 행복하다.”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아빠의 딸로 주신 하느님이 참 고맙다.”
그러자 딸이 눈물을 흘렸다.
나도 왈칵 눈물을 쏟았다.
음악이 그치고 딸의 팔을 잡고 천천히 내 테이블로 돌아왔다.
작은딸이 신부 입장이나 피로연에서 아비가 할 일을 왜 미리 얘기해 주지 않았을까? 미리 얘기했더라면 내가 한사코 못하겠다고 거절했을 것이다. 그걸 알고서 딸과 사위가 이런 작전을 쓴 것 같다.
얼마 후에 사위가 나에게 와서 나를 안으며 인사했다.
“아버님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그래 내 딸과 결혼해 주어서 고맙다. 그런데 네가 훌륭한 아내를 얻었다는 걸 평생 잊지 않으면 좋겠다. 나도 널 사랑한다.”
우리 딸과 사귀던 14년 동안 가끔 미웠던 사위가 그날은 왜 그리 듬직한 미남으로 보였는지…
휘영청 밝은 남국의 달빛 아래 신 나게 몸을 흔들어 대며 열기를 발산하는 젊은 하객들을 뒤로하고 나는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양치질하며 바라본 거울에는 피곤한 표정을 한 웬 늙은이가 있었다.
(2013년 1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