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물
정윤천
너 때문에 목이 말라서 마실 물 한 잔을 따랐는데, 그릇 안에 별 모양 같은 게 떠서 어른거린다. 무슨 수로도 건져내지 못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마른 목 속으로 천천히 별 물을 들이켜고 말았다. 그때부터 손바닥에도, 손바닥이 스치는 손자국 위에도, 틈만 나면 묻어나오던 별의 기척을 어쩌나. 너 든 가슴은 또 어쩌나.
물방울과 보라색
정윤천
사랑의 눈망울 속에는 물방울과 보라색이
하나씩 들어있는 거라네
하루는 들에 나가서
보라색 꽃잎 몇 장 뜯어와 흰 봉투 안에
갈무리했던 일
꽃잎은 말라가면서
자꾸만 배어나오던 보랏빛
그러니까 그것은, 가슴으로 멍이 번지는
그런 일이었을 거라네
어느, 수요일의 오후 같은 속으로
느닷없이 한 차례 비라도 내리기 시작하면
마땅한 갈 곳 하나 쉬이 떠오르지 않아도
마땅치 않은 그 사이로 벌써, 저 먼저
떼굴떼굴 굴러가버리기 시작했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동그라미의 이름
그러니까 사랑은 물방울과 보라색이
함께 어른거렸던 거라네
십만 년의 사랑
정윤천
1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십만 년의 해가 오르고
십만 년의 달이 이울고
십만 년의 강물이 흘러갔다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려서는
아무래도 잘 헤아려지지 않을 지독한
고독의 시간
십만 년의 노을이 스러져야 했다
2
어쩌면, 십만 년 전에 함께 출발했을지 모를
산정의 별빛 아래
너와 나는 이제서야 도착하여 숨을 고른다
지상의 사람들이
하나 둘 어두움 속으로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하였다
하필이면 우리는 이런 비탈진 저녁 산기슭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는가
여기까지 오는데 십만 년이 걸렸다
잠들어 가는 지상의 일처럼 우리는 그만 잠겨져도 된다
더이상의 빛을 따라 나서야 할 모든 까닭이 사라졌다
3
천 번쯤 나는 매미로 울다 왔고
천 번쯤 나는 뱀으로 허물을 벗고
천 번쯤 개의 발바닥으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으리라
한번은 소나기로 태어났다가
한번은 무지개로 저물기도 하였으리라
4
물방울들이 모여
물결을 이루는 일만큼이나 멀고도
반짝이는 여정을 우리는 왔다
태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난다는 의미의
이름으로 불려진 나비처럼
날고 또 날아올라서 여기까지 왔다
바다인들 거슬려 오르려는 거꾸로 붙은 비늘,
금빛의 역린逆鱗같이는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경첩
정윤천
너를 열고 싶은 곳에서, 너에게로 닿고 싶을 때
아무도 모르는 저 은밀한 해제의 지점에서
쇠나비 한 마리가 방금 날개를 일으켰다는 뜻이다
그의 차가운 두 닢이 바스락거리기라도 하듯이
한번은 펼쳐주어야만, 나는 너에게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너를 한번 열어, 너에게로 간다는 사실은
어딘지, 너 이전의 지점같기도 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긴 날개의 쇠나비 한 마리가
비로소 활짝 펼쳐 주었다는 일이다
사랑의 경계에는 한사코 쇠나비 한 마리가
접은 날개의 기다림으로 깃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사과를 깎았던 저녁
정윤천
너와 헤어지고 온 저녁에
사과를 깎는다
생각해보니 그동안은
무심코 베어먹었던 사과
먹고 남은 깡치를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던 사과를
접시에 두 쪽으로 갈라놓고 났더니
잠시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서로의 사이를
떠올리게 해주던 사과
한참이나 말없이 내려다보게 했던 사과를
한 조각만 입으로 가져가 본다
너를 보내놓고 혼자서만 돌아왔던 저녁에
접시에 오래도록
한 조각만 남아있던 사과를
깎았던 저녁.
와온에서
정윤천
와온*에서는
세상의 모든 해가 여기 와서 죽는다
저녁쌀을 씻을 때도 뜨물 같은 게 한참이나 나왔다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한결 뚜렷해지던 쌀알들처럼
해도 자신의 몸을 씻는다는 것인지
와온에 와서 한참을 바라다보고 있으면
어디서부터인지 한번 스러져보고 싶지 않겠니
너를 향하여 들려주기는 하였던
가슴이 떨리는 말 한마디인들
저녁의 바다 한 가운데까지 이글거려 보일 수 있겠니
그만큼의 내용으로 타올라 보인 적 없던 날들이었다면
무엇으로 나를 향해 수긍해볼 수 있었겠니
더이상 아무 것도 남길 게 없어진 표정 곁으로
그 쪽을 향하여 송두리째 찬란해볼 수 있었겠니.
* 전남 순천시에 있는 일몰이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새들의 문자 같은
정윤천
새들도 편지를 쓰네. 허공의 빈 칸 위에 콕콕 찍어서, 어딘지 조금은 화들짝스러워 보이는 새들의 글씨. 그렇게 짐작이라도 해보면, 사랑의 독백 몇 마디 스미어 있을 것도 같았네. 무리를 지어 먼 곳을 함께 나는 그들도 결정적인 순간 앞으로, 새들도 한번 씩은 외로워져버리는지. 가야할 곳의 주소를 일러주지 않은 채 새들은 떠나가지만,
얼마든지 기꺼웠을 허공의 문자만으로, 어디선가 그것을 받아 읽어내는 까마득한 수신지가 있었다는 것처럼.
지구는 추운 별이어서
정윤천
지구는 추운 별이어서
고래는 제 아기들을 먼데서 낳아 돌아오고
멀리 있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한다
지구는 추운 별이어서
가끔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서
멈춘 걸음을 끌고 가는, 스스로의 발등을 내려다보게 한다
지구는 추운 별이어서
돌아보면 그 자리에 아직도 네가 서 있는 걸 믿고 싶어지는
내 마음의 서쪽
정윤천
5. 풍금의 길
기억의 건반 위에서 걸어나올지 모를
벌써 돌아서 와버렸음에도
두고 온 것이 있기라도 하다는
접혀진 악보같은 마음이었을 적에
혼자서만 내려놓고 등 뒤로 사라져간
산딸나무 여린 가지 아래의 일순 같기도 하였을
그 무엇이
이미 사소해져버린
지나치고 온 정거장의 이름들이나
시든 꽃다발의 뒤끝처럼 떠올려준다 하여도
돌아보면 언제든 울리어져 오는
풍금의 길
사랑의 일 초 2
정윤천
사랑을 지우는데 드는 시간은
일 초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초는
일 초만에 돌아와 제 자리를 잡고는 합니다
그러니 칼로 물 베기의 일 초입니다
일 초 동안 당신에게서 잠시 벗어나 보기로 합니다
그러니 그 때부터의 일 초는
전혀 딴 세상의 일 초입니다
먹구름과 번개가 동반하는 일 초입니다
장풍을 맞은듯 온몸이 후들거리는 일초입니다
당신에게로 돌아가는 일 초
사랑을 지워,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시간은
그러니 한사코 일 초입니다
일 초밖에 되지 않는 너무도 뻔한 상식의 시간입니다
첫댓글 [십만년의 사랑]은 이해리 시인이 낭송한다고 하셨습니다
아~~5월엔 꼭 가야하는데
근무가 또 맞지 않습니다. 노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꽃잎은 말라가면서 자꾸만 배어나오던 보랏빛..그러니가 그것은 가슴으로 멍이 번지는 그런 일이었을 거라네...봄이며 정윤천 시인 팬이에요.^^ '별 물'도 좋아하지만 '물방울과 보라색' 낭송에 콕 찍습니다.^^
두 편이 선택 되었군요. 고맙습니다. 열심히 읽어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날인데 가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별 물... 연습해 볼께요^^.
어린이가 있다면 같이 오십시오..........
'와온에서' 는 제가 콕 찍어봅니다. 좋아하는 시입니다.^^ 마음은 와온에 ...ㅎ
혜아 님, 여름안개 님, 낙첨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구는 추운 별이어서' 찜하고 싶습니다
그러지요. 늦었네요.
포항의 이종암입니다. 오랫만에 저도 이번 모임에는 참석하려합니다. 저도 낭송할 수 있는지요? 시간의 그 자리가 있다면 저는 <새들의 문자 같은>시를 낭독해보고 싶습니다. 정윤천 시인,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 시인입니다. 몇 달 전, 상주에 잠시 보고 인사도 없이 그냥 헤어져 내려와서 미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구. 시 낭송을 할 수 없어도 찾아가봐야 겠습니다. 많이 오셔서 먼데서 오는 손님 얼굴이 화-아-ㄴ 해졌으면 합니다.
그래요. 낙점 되었습니다. '새들의 문자 같은' 시
반갑습니다. 그 날 뵙겠습니다...
웬일인지......댓글이 사라져~~ 다시 인사드립니다. *^^*
종암샘~~~ 시하늘에서 만나면 더 반갑겠네요.ㅎ 기다릴게요.^^
낭송하실 분
1.별 물- 혜아 님
2.물방울과 보라색- 김영숙 님
3.십만 년의 사랑 -이해리 님
4.경첩 - 원무현 님
5.사과를 깎았던 저녁 - 박숙경 님
6.와온에서 - 곽도경 님
7.새들의 문자 같은 - 이종암 님
8.지구는 추운 별이어서- 하모하모 님
9.내 마음의 서쪽 - 남효만 님
10.사랑의 일 초 2 - 해돋이 님
솜나리 님에게 '사과를 깎았던 저녁'을 드리지요?
그럴게요...사과를 깎았던 저녁
경첩이 참 좋군요. 쇠나비의 날갯짓 소리가 안 나마 우짤까 걱종정 됩니다.
그 날 오셔서 낭송까지 하신다고?............ 좋지요.
잘 할 자신도 없는데
남 앞에 나서지 못하고
세상안으로 자꾸만 움크리고 작아지는 제모습에
제동을 걸기 위한 몸짓으로
마지막 사랑의 일초를 낭송하면
귀한 자리 해 주시는 여러분들에게
누가 될까요?
지금도 자신은 없지만... ㅎㅎ
저도 낭송하라고 누가 등 떠밀어 나가면 아직도 오금이 저립니다 ㅎ 그래서 낭송은 늘 딴나라 세상입니다...해돋이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누가 되긴요...꼭 낭송해주십시오. 즐겁게 듣겠습니다~
사랑의 일초 2 제가 할수 있는지요 첨인데 찜 하고싶은데 될런지...
어떻게 하지요?
해돋이 님께서 먼저 찜 하셨는데, 다른 걸 해보시면 어떨지?
내 마음의 서쪽 남았으면 찜
고맙습니다
갈수 있도록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간다면 남는 것 중 아무거나 하나 낭송해도 될 시간이나 있을런지요...생각해보니 정윤천 시인님의 시집 중에 <천천히 와> 라는 시가 마음에 닿습니다... 그거 할게요^*^
그렇게 하세요. 시집 <구석> 가져오셔서 친필사인도 받으시고...............
알겠습니다. 조정하겠습니다.
토마토와 고추 모종 심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작업 일찍 마치고 시와 아우러진 수성못의 밤 정취에 빠져볼까 합니다.
빨리 마치고 얼굴 보여주러 오세요!
저도 얼굴 뵌지 좀 오래 되어서...
요즘 주말마다 새싹과 새 꽃들의 향연을 즐기면서 봄날을 만긱하고 있답니다.^^
지난 주말엔 남도기행하느라 시골행을 포기했고, 그 새싹들의 안부도 궁금하고 해서 어린이 없는 우리집은
어린이날을 시골행으로 택했습니다.
참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