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다대포가 기점인 국토종주자전거길은 낙동강을 따라 뻗으면서 전국토로 연결되었다. 사는 신도시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자전거길을 달리는 마니아들을 무시로 만나게 된다. 대개는 혼자서 달리지만 연인들이나 부부처럼 커플을 이루거나 칠팔 명씩 떼 지어 달리는 팀도 드물지 않게 만난다. 알프스 어느 호숫가를 떠오르게 하는 잘 닦인 길을 달리는 자전거 행렬을 처음 목격한 것은 10여 년 전이었지 싶다. 그때 마니아들의 포즈는 영화 속 장면처럼 멋스럽고 세련되어 이제 우리도 드디어 선진국에 들어섰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도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7F93E5E67667A33)
황사에 휩싸인 하늘은 곧 비라도 뿌릴 듯 흐릿했다. 나라 전체가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공포에 휩싸여 마음이 침울했으나 가볍게 기분을 바꿀만한 묘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한낮이 지나면서 날씨가 맑아진다면 강가로 나가 그곳에 찾아든 새봄을 만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설핏 해가 기울 때까지도 하늘은 맑아질 줄 몰랐다. 봄맞이 생각을 포기할 수 없어 약간 어둑해지는 시각인데도 자전거에 올라 낙동강을 향했다. 기대했던 대로 강가엔 보송보송한 솜털을 잔뜩 매단 버들개지가 수면에 반사되면서 얼굴을 내밀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D13D3E5E67667B30)
약간 밋밋하지만 폰 카메라에 담은 버들개지 영상에다 낙동강 소식 메시지를 넣어 카톡 멤버들에게 띄우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작지만 자신의 정성을 직접 담았다는 생각에 기분을 약간 추스를 수 있었다. 그 영상을 수신한 몇 사람이 바로 까독, 까똑 보내온 답신도 마음을 밝게 해주었다. 버들개지 옆으론 수줍게 점처럼 작은 연둣빛 새싹을 밀어 올리는 수양버들 가지가 강바람에 살랑거렸다. 경칩이 닷새 전이었는데 이곳 매화는 성급하게 꽃을 떨구고 있어 화무십일홍을 실감나게 했다.
조금 전 아파트를 나설 때 우편함에 도착해 있던 시집을 배낭에서 꺼냈다. 올해 팔순을 맞아 58번째 시집을 펴낸 시인에게 매화향기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표지를 누가 디자인 했는지 지금까지 내가 받아본 책 중에서 가장 큰 활자로 배치한 시인의 이름자가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수록된 작품 중 시인이 성장기를 회상한 작품 ‘별책부록’ 일부를 옮겨본다. ‘…함양읍내에서 하나뿐인 서점…/ 신년호나 창간기념호가 나올 때는 별책부록으로/ 예쁘고 아담한 수첩식의 책이 딸려 있었는데/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기엔 안성맞춤으로/ 슬쩍해 보고 싶은 맘이 든 적도 있었다.
강물이 남해바다와 만나는 다대포 몰운대에서 강을 거꾸로 5km 거슬러 오르면 낙동강 하구 둑이 나타난다. 이 구간에서 강물은 밀려드는 바닷물에 몸을 약간 섞을 뿐인데 이곳 전체를 바다로 부른다. 둑을 경계로 남해와 낙동강이 나뉘는 것이다. 둑에서 다시 30여km를 거슬러 오르면 57만평 규모의 거대한 황산공원이 나타난다. 공원엔 미니기차를 비롯하여 오토캠핑장과 파크골프장 생태탐방선 선착장까지 있어서 부산을 비롯한 울산 김해 창원 등지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현역 프로선수가 만든 야구장도 인기를 끈다.
공원이 앉은 자리는 4대강사업이 있기 전까진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처음 이곳을 무단으로 점령한 도시 빈민들이 비닐하우스를 지었고 채소를 재배하면서 서로 난립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람들은 가난을 무기삼아 공권력을 비웃으면서 점점 뜨거운 감자가 되어갔다. 급기야 거름으로 분뇨를 뿌리기도 하면서 쓰레기와 오물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더러는 움막까지 짓고 거주하면서 불법으로 전기를 끌어다 위조품을 만들기도 했다. 4대강사업 공약을 내건 후보를 응원했던 난 황산공원에 대해서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A7E13E5E67667C31)
신라시대 지금의 양산은 명칭이 황산이었고 낙동강도 황산강이었다. 그런 연유로 황산공원이 되었다. 공원은 경부선 물금역 서쪽으로 역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강 건너 동신어산 사이에 위치한다. 강 상류 쪽 공원이 끝나는 지점엔 부산시 상수도취수장이 자리 잡았고 취수장을 지나면 길이 바로 끊긴다.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에 깎였을 절벽만 남았고 절벽 위엔 조선시대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 황산잔도가 있었다. 그 시절엔 황산잔도를 ‘황산베랑길’이라 불렀다. ‘벼랑’을 지역방언 ‘베랑’으로 불렀던 것인데 그런 것까지 의미를 부여하여 광고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영남대로는 푸른 강물을 아래로 두고 깎아지른 절벽 위를 지나고 있었기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 길은 한양에서 부산 동래부에 이르는 9대 간선도로 중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한양에서 동래까지는 960여 리나 되었고 그 안엔 29개 주요 지선까지 붙어있었다. 그래서 영남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을 찾아가는 길이자 한양에서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걸었던 길이며 보부상들이 괴나리봇짐을 지고 걸었던 길이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들이 서울을 향해 진격하느라 이용한 길이기도 했다.
1905년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벼랑길을 철로가 차지하자 육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사람의 왕래가 끊긴 벼랑 아래 흐르는 강물 위를 달리는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생겨날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목재데크 2km 길이로 만들어진 이 길은 2011년 ‘아름다운 국토종주 자전거길 20선’에 들기도 했다. 낙동강자전거길로부터 시작하여 한강 이남에는 새재와 남한강, 북한강, 경춘선, 아라, 오천, 금강자전거길이 차례로 생겨나면서 자전거 마니아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국토를 달리는 그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싶다.
이곳 자전거길 구간에는 고운 최치원이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던 임경대와 조선 고종 때 선비 정업고가 이름 붙인 경화대 그리고 보물 491호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된 용화사가 있다. 요산 김정한 소설 <수라도>의 주요배경처럼 역사문화에 관한 내력도 지니고 있다. 소설 속에서 요산은 ‘태고나루터’와 ‘대밭각단’ ‘냉거강다리’ ‘미륵당’ ‘돌부처’도 중요한 제재로 삼았다. 오봉산 자락 원동취수장 바로 밑에서 강 너머 김해 매리로 건너는 순환도로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강을 건너는 어려운 교각공사도 상당한 진척을 보인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006385E67667E29)
강은 지대가 낮은 터라 해가 저물자 사위는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새들이 집을 찾아드는 이때에 맞추어 안동 쪽으로 올랐던 자전거들이 연이어 씽씽 부산을 향해 달려갔다. 물개처럼 전신을 검게 변장한 사람은 체구가 왜소했고 그의 자전거는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물개는 내 카메라가 자신을 겨냥하는 걸 눈치 채고는 한쪽 팔을 흔들면서 큰소리로 환성을 질러댔다. 그 여인은 덩치에 비해 음성은 꽤나 우렁차면서 걸걸했다. 드디어 비가 후드득후드득 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비 오는 낙동강을 애절하게 부른 이미자의 ‘저 강은 알고 있다’가 떠올랐다.
곡은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백영호가 만들었기 때문에 언제 들어도 애간장 끊는 비감에 젖게 된다. 그런데 노랫말을 쓴 유동일이 비가 오는데도 저녁노을이 짙어진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결혼했던 1971년 만들어진 노래로 그 무렵에 이미 가수나 작곡가나 작사자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인물들이었다. 작사자가 비 내리는 날 낙동강을 답사했을 때 실제로 황혼이 짙어졌던 것일까. 하지만 내가 이 노래에 천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저 강은 알고 있다’란 노래 제목이 어린 날의 피란길 트라우마를 소환하기 때문이다. 바로 나의 아버지 때문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E86385E67667F30)
70년 전 여름날 낙동강 백사장. 강변 모래사장을 메운 시신과 중상자들을 그대로 버려둔 채 피란민들은 국군의 신호탄에 맞추어 낙동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 광복을 맞아 일본 강제징용에서 귀국한지 5년도 채 안 되었던 나의 아버지도 그 시신 속에 들어있었다. 그곳은 피란나선 김천에서 가까운 선산지역으로 아버지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했다. 당시 초등 1년생의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비규환의 현장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대로다. 당시 아버지는 한창 혈기왕성한 서른여섯 청춘이셨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A3DC3C5E67667F2F)
소도시 피란민들은 7월의 따가운 태양을 받으며 기진맥진하여 강변백사장에 당도했다. 강물은 별로 깊어 보이지 않았지만 전시인지라 강 건너 국군 텐트막사에서 도강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사람들은 큼직한 돌멩이들을 주어다가 백사장에 세워서 냄비와 주전자 같은 것을 그 위에 걸었다. 즉석에서 밀가루를 반죽하여 칼국수를 만들거나 수제비를 빚어 한 끼를 때우기 위해서였다. 피란 초기라 밀주를 꺼내 마시는 어른도 보였다. 걸친 옷가지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백사장에선 눈에 잘 띄지 않는 흰옷들이 대부분이었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끝내고 건널 강을 무연히 바라보며 한가한 얘길 나누고 있을 때 강 상류에서 4대씩 편대를 이룬 전투기들이 2백여 명 가까운 피란민들이 바글거리는 하류 쪽으로 접근해 왔다. 순간 사람들은 아군 비행기라는 것만으로도 보따리를 뒤져 태극기를 꺼내들었고 더러는 보따리나 수건을 풀거나 윗도리를 벗어서 전투기를 향해 흔들기 시작했다. 요란한 굉음을 남긴 전투기들은 우리를 지나쳐 강 하류를 선회하면서 급격하게 고도를 낮추나 싶더니 느닷없이 백사장에서 응원하는 피란민들을 향해 기관총으로 불을 뿜어댔다.
조금 전만 해도 평화롭던 백사장은 바로 생지옥으로 변했다. 전투기들은 몇 차례나 더 나타나 백사장에서 움직이는 성한 사람이 안 보일 때까지 총탄세례를 퍼부었다. 강을 건너 터덜터덜 남으로 향하면서 며칠이 지나서야 우리 피란민 속에 빨갱이가 섞였다고 인민군들이 조작하여 퍼뜨린 정보 때문에 우리가 폭격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청도까지 밀렸던 피란에서 돌아와서는 낙동강 상류 감천과 직지천이 만나는 곳에서 살았다. 그러고 직장은퇴 후엔 부산 북구 화명지역에서 강을 내려다보면서 살았으니 아버지가 잠드신 낙동강에 반평생을 붙어서 산 것 같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6DB3E5E68995505)
첫댓글 낙동강의 기억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