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or Dei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 찬미예수님
여러분은 살면서 가장 두려웠을 때가 언제인가요?
2독서한 자매님은 셋째를 임신했을 때 큰 병원 가보라는 말이 두려웠다했고,
가브리엘형제님은 공장에서 밤에 쓰러졌는데 새벽까지 아무 도움도 못 받고 버둥거렸을 때라고 하셨는데
충분히 공감 하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죽음을 가까이 느꼈을까요?
또 앞은 못 보는 요셉형제님은 못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했습니다.
두려움은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삶에서 찾아오는 ‘공포’라는 것이 있죠.
너무 공포스러울 때는 하느님이 끼어 들 자리가 없어요.
또 다른 두려움은 이태리어로 Timor Dei,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심이 있어요.
저는 살면서 교통사고가 참 많이 났어요.
그야말로 죽음 문턱까지도 가보고, 제 몸에는 흉터가 아주 많아요.
그런데 제가 가장 공포스러웠을 때가 34년 전 군종신부시절에 사고예요.
1월 눈 오는 밤 한 부대에서 미사를 드리고 다른 부대로 가려던 중이었어요.
중대장인가 대대장이 ‘미끄러워 못 올라가요. 전화해서 공소예절 하라하세요.’
하지만 기다리는 분들 생각에 그럴 수가 없었어요.
최전방엔 눈 하나가 주먹만 해요.
그리고 미사 전에는 눈이 안 왔었는데, 이미 지프차는 눈에 묻혀있었어요.
지프차라 올라갈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고 이동하기 시작했죠.
네 바퀴에 체인까지 쳤어도 중간에 서면 미끄러지니 그냥 계속 올라가야만해요.
또 양 옆은 깍아지른듯한 절벽인데 지뢰가 묻혀있었죠.
거의 정상에 다 올라가는데, 갑자기 차가 뱅 돌더니 절벽으로 굴러요.
지프차는 천장이 헝겊, 나는 핸들만 꼭 잡고 절벽 아래로 굴렀어요.
첫 번째 기적은 그 큰 차가 지뢰밭을 밀고 굴렀는데 지뢰가 안 터졌다는 거예요.
20미터 이상을 굴렀으니, 지프차는 찌그러진 깡통이 되고 저는 그 안에 끼어있었죠.
얼마 후 정신이 들어 눈을 뜨려니 아무리해도 눈이 안 떠져요.
머리가 터져 나온 피가 얼굴에 달라붙어 얼어서 눈썹이 떨어지질 않는 거예요
한편 미사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내가 안 오니 견인차 앞세우고 날 찾아나셨겠죠?
내가 올만한 길에서 ‘신부님’ 부르면서 왔겠죠.
그런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내가 굴러 떨어지고 순식간에 지프차가 파묻혔어요.
그러니 차바퀴 자국도, 떨어진 흔적도 안 보이는 거예요.
하지만 신부가 어디 갈 데가 없잖아요?
지뢰밭을 지나 이북으로 도망을 치겠어요? 탈영해서 마을을 가겠어요?
그런데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를 않으니.
저는 의식은 돌아왔는데, 눈에 쌓여있어 깜깜했어요.
지프차는 찌그러져 엔진이 배를 밀고 들어와 있어요.
입에서는 꿀럭꿀럭 피가 넘어오고. 아마 내장이 파열되겠죠.
저 꼭대기에서 신부님 찾는 소리가 들리지만 목소리는 생각으로만 맴돌 뿐이죠.
그때 제 나이가 33세. 딱 예수님 돌아가신 나이였어요.
처음에는 그 공포가 대단했지요.
그래서 가브리엘의 그 무서움, 아무도 없는 그 적막함. 살려 발버둥치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는
그 심정을 내가 이해하는 겁니다.
‘사람 살려요’ 하지만 목 위로 올라가지 않죠.
그런데 얼마 후 그 인간적인 공포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더군요.
‘죽기 전에 잘못을 성찰하고 회개하자. 사제로서 2년 살며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 짧은 시간에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잘못한 것들이 쫙 나왔어요.
어릴 때 옆집에서 사이다병 훔쳐다 하드 사먹은 것부터 남의 과수원에서 과일 따 먹은 것,
계란 훔쳐 먹은 것 등등의 생각이 흘러갔어요.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성모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그런데 눈에 쌓여 깜깜했던 눈이 갑자기 환해지는 거예요.
내가 죽어서 드디어 천당에 왔나보다 생각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군인들이 나를 찾아서 내려온 거예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운전병이 견인차를 운전하며 나의 흔적을 찾는데, 웬 여자가 길 한가운데 서있더래요.
그곳은 민간인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죠. 운전병이 너무 놀라 브레이크를 밟는데,
그 여인이 손으로 밑을 가리키고 몇 초 후 사라지더래요.
운전병이 넋이 빠져 내려서 그 여인이 가리킨 쪽에 플래시를 비추고 보았대요.
그런데 세상에!!
저 밑에 눈을 뚫고 뭔가 삐죽한 것이 올라와 있더래요.
지프차는 안테나가 길어요.
크락션 눌러 신부님 찾았다고 알리고 지뢰반 동원하여 지뢰를 피해 내려온 거죠.
그리고 플래시를 비추니, 나는 눈앞이 환해지니 천국에 온 줄 안거죠.
차를 다 뜯어내서 비행기로 원주 야전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많이 했었죠.
인간적인 극도의 공포심이 어느 순간에 차분해 지더군요,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이 세상의 두려움은 두 가지예요.
몸이 아파서 느끼는 두려움, 사고가 나서 느끼는 두려움, 또 하는 것이 안 되기에 정말 두렵기만 한 것도 있습니다.
그 인간적인 두려움을 뛰어넘는 두려움을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이라 합니다.
이집트왕의 경호 대장이었던 보디발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죠.
보디발은 권력과 돈 다 있었지만, 내시이기에 아내를 성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었죠.
이 보디발의 아내은 어릴 때 몸종으로 끌려온 요셉이 자라는 걸 봅니다.
나중에 청년이 되니 꽃미남이야.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어떻게든 유혹하려고 별짓을 다 했잖아요?
성경을 보면 그 때 요셉은 4가지의 무기를 갖고 유혹을 물리칩니다.
첫째는 ‘싫습니다!’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것이 유혹을 물리치는 첫 단추입니다.
양다리 걸치면 절대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요.
분명하게 ‘나는 싫습니다.’
마귀가 장난을 친다 해도 ‘너는 내 털끝도 못 건드려. 싫어.’
그런데 이 요물이 요셉을 포기하지 않아요.
요셉은 시종중에서도 제일 시종이라 주인마님께 하루에도 몇 번이고 보고 해야 되요.
그래서 두 번째로 요셉은 ‘멀리하기 시작해요.’
자기가 안 들어가고 다른 사람을 대신 들여보냅니다.
그러니까 나중엔 이 여인이 요셉의 옷을 잡고 침실로 끌고 가려고 하죠.
요셉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칩니다.
거부하는 게 첫 번째, 멀리하는 게 두 번째, 세 번째가 도망치는 거예요.
내가 이미 유혹의 한 가운데 와 있을 때는 기도할 시간 없어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는 유혹이 저 앞에 있을 때 하는 기도예요.
지금 내가 유혹 한 가운데 있다면 36계 줄행랑이 최고입니다.
나중에 자기 남편이 오니, 요셉 옷을 보이면서 자기를 겁탈하려했다고 하죠.
그래서 감옥에 갇히고, 그 감옥에서 꿈해몽으로 이집트 재상이 되죠.
요셉은 ‘싫습니다! 확실하게 표현하고, 안 되니 멀리하고, 그도 안 되니 도망칩니다.
그런데 사실 첫째, 둘째, 세 번째 것을 완벽하게 했다 해서 유혹으로부터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네 번째 것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반드시 있어야 되요.
솔직히 우리가 유혹 앞에 있을 때 그것 이기는 방법을 몰라서 유혹에 빠집니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우리의 무질서한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담대하고, 겸손하고,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아요.
오늘 독서가 말리키서였죠.
너무 짧아서 미리 읽어오지 않았으면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 생각 드네요.
오늘 말라키서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서의 핵심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인데, 세상의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르죠.
앞이 안 보이는 요셉형제님은 육의 눈은 없어도 영의 눈이 있기에,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에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 겁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세상을 올바르게 안 살수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하느님을 무서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1독서에서 ‘검불이 되게 태워버릴 것이다. 뿌리도 가지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지켜줍니다.
어줍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는 우리는 절대로 그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비단 성적인 유혹만은 아니겠죠?
실화하나를 들려드리며 강론을 끝내고자합니다.
군형무소에 사형수A와 사형수B가 있었습니다.
사형수A는 총으로 동료들 몇을 쏘아 죽였고 사형수B는 총을 갖고 탈영하여 민간인 둘을 쏴 죽여
군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사형수A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식욕만큼은 대단했어요.
죽음을 앞두고도 너무 고기가 먹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고기를 실컷 먹고 죽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교도소 지키는 장교에게
자기가 죽으면 시신을 해부용으로 미리 팔아 달라 했어요.
원래는 안 되죠. 그런데 어떻게 해서 10만원을 주고 미리 몸을 팔았어요.
그 돈으로 3만원어치 고기를 실컷 먹고 그 다음 날 사형 당했어요.
고기 먹을 때 옆의 죄수들이 맛있냐고 물었대요.
‘이놈아, 내 몸 판돈인데 맛이 있겠냐? 그냥 입에 넣는 거지.’
이렇게 사형수A는 자기 몸을 판 돈으로 3만원을 쓰고 죽었습니다.
자, 이제 사형수B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나 봅시다.
사형수A와 B는 연극으로 보면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그 1막은 같습니다.
사형수B에게는 친척들이 넣어 준 영치금이 15,000원 정도 있었죠.
처음에는 누구처럼 음식이나 사먹고 죽을까 하다가 생각하니 너무 허망한 거예요.
그때 마침 어느 성당에서 성탄절 교도소 방문을 왔어요.
신부님이 ‘저희는 성전이 없어요. 필요한 것은 많으나 기도 좀 해주세요.’ 하셨죠.
사형수B는 가지고 있던 15000원을 그대로 드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대의 한 귀퉁이라고 샀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신부님은 성전을 축성하는 날 ‘성당 모든 분들의 노력으로 완공이 되었지만 이 순간
잊어버릴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하면서 사형수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 때 참석했던 기자가 신문에 냈고, 그것을 대통령이 보게 되었죠.
형집행이 중단되고 무기징역수로 살다 23년 만에 사면 받고나와 잘 살고 계세요.
이 두 사형수의 이야기는 최후의 순간이라도 정신 자세와 가치관에 따라 인생과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각은 인생의 설계도라 합니다.
‘고기만 먹고 죽을 것인가, 삶이 얼마 안 남았어도 가치 있게 할 일이 무엇인가?’
사형수A는 죽음이 다가오는데도 감각적 만족을 탐닉, 동물적 본능이 앞섰습니다.
그러나 사형수B는 마지막 남은 생에 보람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막부터 인생이 달라집니다.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사형이 면제되었습니다.
3막에서 A는 지옥에 떨어지겠죠? 사람을 죽였으니까요.
생명연장을 받은 B는 세례를 받고 물과 성령으로 깨끗하게 죄 사함을 받습니다.
로마서 8장 6절에 ‘육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온다.’
고 했습니다.
내일 지구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그날 그 시간이 언제 내 앞에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땅 덩어리에 오더라도,
우리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하느님 안에 두려움을 가져야지
세상의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늘 아침에 눈뜨면
‘오늘 하루 어둠이 나에게 몰려오더라도 내가 그 어둠을 기쁨으로 물리치리라, 기도로 물리치리라’
하는 마음을 갖고 하루하루 기쁨으로 살아갑시다.
그 날 그 시간이 언제 어떻게 오든 한번은 죽어야 하는 사형수인 우리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의 울타리 안에서 세상의 두려움 없이 살아갑시다.
내 삶의 목표는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 천국 영원한 세상이라는 것을 믿도록 합시다.
아멘
♣2019년 연중 제33주일(11/17)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