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08
3월26일[성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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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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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7lpHyFXMd0
[예수회 김동일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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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서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환하게 꿰뚫고 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당신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며 배신할 것인지? 누가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할 것인지? 누가 당신 홀로 체포 당하실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놓을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제가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었다면, 즉시 노발대발했을 것입니다. 급한 성격에 제자들을 총집합시켰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제자들을 일렬로 쭉 세워놓고 일장 훈시를 했을 것입니다. 한명 한명 이름을 불러대며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혹독한 배신감과 고독함, 그로 인한 극도의 산란함 속에서도 철저하게도 제자들의 배신을 함구하십니다. 결정적인 배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제자들이 계속 캐물었지만, 끝끝내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그런 태도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쉽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각 개인의 자유의지를 철저하게 존중해주신다고.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고. 당신을 철저하게도 배신하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조차 본인의 선택에 맡긴다고?
실수도 하고 방황도 하면서 변화되고 성장하는 존재가 인간이니, 스스로 잘못을 인식할 때 까지 기다려주시는 예수님이시니, 그런 배신의 기회조차도 제자들에게도 체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영원하신 하느님,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에 비해 우리 인간은 너무나 가변적이고, 지극히 가벼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기세였지만,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의 잇속과 안위만을 궁리합니다. 어제 금강석보다 더 굳은 신념으로 결심하였지만, 오늘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마는 나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너무나도 나약한 우리 인간 존재 곁으로 사탄의 강력하고도 집요한 유혹은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우리의 취약함 부분을 거듭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어제의 대단한 결심을 오늘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제 당당한 주님의 제자였지만, 오늘은 배신의 참담함에 눈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서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비록 오늘 죄와 배신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할지라도, 다시 한번 고개를 주님께로 돌리며 그분의 크신 자비를 구하는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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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dTJWUu0J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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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연옥에라도 들어가는 사람의 수준은?>
초나라 장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낮에 시작한 파티가 밤이 깊도록 계속되자 연회석엔 무수한 촛불들을 밝혀 놓았습니다. 이렇게 연회의 흥취가 무르익고 있을 때였습니다. 왕은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허희라는 여인에게 여기 참석한 신하들에게 술 한 잔씩 따라드리라고 했습니다. 왕의 특별한 호의였습니다.
한참 허희가 술을 부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 촛불이 모조리 꺼져버리자 연회석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누가 허희의 가냘픈 허리를 감아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허희는 순간적으로 그 사람의 갓끈을 끊어 쥐고 몸을 뺀 다음 왕에게로 달려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왕은 불을 켜려는 시종들의 동작을 제지하면서 말했습니다. 오늘은 군신 간의 허물없는 즐거움을 위하여 마련한 자리니 경들은 지금부터 거추장스러운 갓끈을 모조리 끊어 팽개치고 마음껏 술을 들자고 권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갓끈을 끊어버리고 마음껏 즐기다가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봉을 자청한 당교라는 장수의 특별한 지략으로 예기치 못한 전과를 올리자 왕은 그에게 특별한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이미 왕으로부터 한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 더 이상 상을 받을 수 없다며 그 옛날 연회 석상에서 허희의 허리를 안은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군주나 보스의 자세여야 할 것입니다. 자칫 나에게 유익이 될 사람을 너무 엄하게 판단하여 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희망이 없는 유다와 같은 존재가 되면 끊어야 합니다. 그 기준을 너무 높이 잡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구역 판공을 하며 면담하는데, 의외로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 모르는데 성당에서 상처받아서 냉담한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고해성사 때 상처받아 냉담한 경우도 많았는데, 이는 거의 사제의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고해소까지 들어왔다면 이미 큰 용기를 낸 것이고 상처를 드러낸 상태이기에 아주 작은 질책에도 기겁하고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는 지옥-연옥-천국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사실 첫영성체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속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제야 연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연옥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50보 도망간 사람이 100보 도망간 사람을 탓할 수 있을까요? 연옥의 상태를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야 지옥에서 비로소 연옥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야 타인에게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 중년 신사분이 찾아와서 아픔을 호소하였습니다. 이 분은 사회에서 성공하고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자살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보복한 아들이 도저히 용서되지 않아 손이 부들부들 떨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이분은 아직 아버지 될 자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녀의 기준을 너무 높이 잡아놓아서 자녀가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모도 자녀와 같이 성장하는 중입니다. 이분은 자녀에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너무 주었고 사실 죽은 자녀에게 오히려 용서를 청해야 하는 상황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연옥, 아니면 지옥 수준에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2,4)라고 말합니다. 아직 천국에 오를 수준이 안되었다는 뜻입니다.
천국에 오르려면 그리스도처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순교할 당시가 직 천당에 오를 수준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잘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도망쳐 보니 자신도 별거 아니었습니다. 미디안 땅에서의 40년간의 도피 생활, 그것이 그의 연옥이었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의 하느님을 만나 소명으로 죽기 전까지. 작은 죄를 많이 짓는 것이나 큰 죄를 하나 짓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연옥에라도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죄인인 처지임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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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전임 신부님이면서 동창 신부님이 제게 ‘선물’을 하나 주고 갔습니다. 성당 마당에 ‘창고’를 하나 만들 수 있는 후원금을 주고 갔습니다. 신부님이 주신 후원금을 아끼기 위해서 형제님들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 모든 작업을 손수 하였습니다. 인터넷에서 창고를 세울 도면을 50$에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도면에 따라서 기초를 세우고, 그 위에 합판으로 바닥을 깔았습니다. 네 면의 벽을 만들어서 세웠고, 지붕으로 덮었습니다. 입구에는 문을 달았고, 벽에는 창문을 달았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모으면 근사한 창고가 마련될 것입니다. 매주 토요일 형제님들이 모여서 작업하였습니다. 식당을 하시던 형제님은 매주 맛있는 점심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형제님은 집에 있는 작업 도구를 가져 오셨습니다. 젊은 형제님들은 무거운 자재를 날랐습니다. 손재주가 없는 저는 현장을 보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후에 작업을 마치면 형제님들과 삼겹살에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부님이 제게 준 선물은 눈에 보이는 ‘창고’가 아니었습니다. 그 창고를 만들기 위해서 모인 형제님들의 마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묵묵히 땀을 흘리면서 창고를 만들고 있는 형제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게 큰 선물을 준 동창 신부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민족들의 빛이 되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배반했던 사람까지도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부활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제 죄의 상태에서 돌아서서 다시금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지만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배반도, 외부의 박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하였습니다.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어둠에 빛이 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현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은 몸과 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은 구원의 방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이웃에게 따뜻한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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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3,21-33.36-38: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빵을 받았으나, 축복받은 빵을 먹지 못했고 생명의 잔도 마시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게 갔고, 축성된 잔을 보지 못하였다. 유다는 다른 이들과 생명의 성사를 받지 못하도록 사탄이 그를 그곳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때는 밤이었다.”(30절)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행하며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언제나 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가 사탄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31절)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 했을 때, 그를 높이 들어 올리셨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영원하신 말씀이 취하신 인성도, 그 인간이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절)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절). 주님은 수난 때까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영광으로 옮겨가시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절) 베드로가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절)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다.
우리 안에도 유다와 같은 탐욕이 있어 주님을 버리고 어둠을 향해 나가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또한 베드로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분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항상 마시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이 빛과 어두운 밤을 넘나드는 삶의 연속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빛 속에 살 수 있었다. 유다는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고 말았다. 우리의 실수로 어두운 밤에 떨어졌더라도 즉시 빛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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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견고한 신념으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이토록 ‘산란하게’ 한 것은 “너희 가운데”에서 일어난 ‘배신’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나누며 함께 대의를 이룩하여 온 밀접한 관계가 그저 허술한 기만에 지나지 않았음을 들키는 자리, 그들이 지켜 온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면되는 자리가 배신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와 베드로를 대조시킴으로써 배신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고위층의 계략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하려는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을 “어서 하여라.”라는 준엄한 말씀에 유다는 밖으로 나가 자신의 계획을 구체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신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라고 선언한 그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은 사도는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19,26)뿐이었습니다. 그 말고는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던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유다와 달랐던 점은 배신의 현장에 계시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다는 점입니다(루카 22,61 참조). 배신의 순간을 지켜보고 계시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친 뒤 베드로가 흘린 눈물은, 다시 진실을 깨달은 구원의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 그 자체보다, 배신하는 순간조차 예수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고통스러워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둠이고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유다는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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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33)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6-38)
1)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르 14,50) 공관복음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8,7-9)
더욱이 베드로 사도는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서 예수님의 체포를 막으려고 했습니다.(요한 18,10)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합해서 생각하면, 제자들은 비겁하게 달아난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흩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마르 14,27)
이 말씀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배반한다는 뜻이 아니라, 목자를 잃은 양들이 흩어지는 것처럼 제자들이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흩어짐’은 잠깐 동안의 일이었고, 제자들은 다시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요한 20,19) 제자들의 공동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방어하거나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했어야 하지 않은가? 그것이 제자의 도리가 아닌가?”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다음 말씀을,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 군대는 로마제국의 전체 군대보다 훨씬 더 수가 많고, 로마제국 군대를 하느님의 힘으로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군대는 9군단까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또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2)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반대쪽으로 간 일, 즉 박해자들 편에 선 일입니다. <완전히 편을 바꾼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흩어진 일이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일은, 겁에 질려서 그런 것이지 편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나 다른 제자들의 행동을 배반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데, 유다의 경우에는 ‘배반자 유다’라는 고정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3) 배반자 유다는 자기 잘못을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고 자살해 버렸습니다.(마태 27,3-5) 그것은 큰 죄를 더 큰 죄로 덮으려고 한,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했지만 크게 통회하고 바로 돌아왔습니다.(마르 14,72) 그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배반자 유다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나버렸지만, 베드로 사도는 위대한 사도요 순교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성 목요일 밤부터 일요일 아침까지의 시간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고 복잡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그들을 모두 위대한 사도요 순교자로 변화시키는 ‘담금질’ 같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4) 우리의 신앙 여정도 온갖 걸림돌들을 극복하는 담금질 과정의 연속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주저앉아 있기도 하고, 중단하고 싶어질 때도 생깁니다. 그러나 사도들처럼 다시 일어나서 걸어가면 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계속 노력하면, 주님께서 분명히 지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2,32)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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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경험을 합니다. 그것이 좋은 것도 있겠고 또 좋지 않은 것도 있겠지요. 보통 말하는 집안도 학벌도 그만하면 좋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의 가슴에는 늘 허전하고 뻥 뚫린 것 같은 채워도 채워도 언제나 빈자리가 있습니다.
지금 부모 외에는 그의 출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사실 그는 입양아였던 것입니다. 그는 철이 들고 지금 부모가 낳아준 친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버림 받았다는 사실이 자신을 짖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에게는 따뜻했던 보금자리인 가정도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벌도 묻혀 버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청년과 같은 똑 같은 경험은 아니더라도 누군가 등을 돌리는 경우를 겪을 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나를 엄습하는 것이지요.
성주간이 되면서 전례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두 제자의 변심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스승님과 같은 식탁에서 빵을 나누던 제자였습니다.
복음은 침묵하고 있지만 왜 제자가 스승을 죽이려고 하는 대사제와 바리사이들에게 주님을 잡아 넘기겠다는 약속을 했는지 의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다에게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13,26)라고 말씀하시며 빵을 주십니다. 그는 그 빵을 받고 바로 주님을 떠납니다. 복음사가는 그 상황을 어둠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께서 당신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지금은 제자들이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자만의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두 제자들이 등을 돌리는 고통을 겪으십니다.
예루살렘이 떠들썩하게 환호하던 군중도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립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또 제자들에게까지 버림받는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마저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 49,4)
주님의 삶의 마감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을 갖고 소임을 다 하셨건만, 제자들마저, 군중의 마음도 떠난 죽음의 그 자리에 주님 구원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유일한 희망이시고 그 희망은 우리에게도 큰 빛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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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어제 임박한 예수님 죽음에 대한 예고에 이어, 성주간 화요일인 오늘은 제자들의 배반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가 펼쳐집니다. 지상에서 마지막 시간들을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최후 만찬 때에 펼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당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은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 예수님 예언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돈주머니를 맡아 오던 유다가 종교 당국에 당신을 넘기려는 계획과 늘 말이 앞서던 베드로의 약점이 어떻게 스승에 대한 부인으로 이어질지를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알고 계시면서도 두 제자의 배신과 부인이 그대로 펼쳐지도록 허락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느님을 굳게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더 이상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으셨던 이유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를 친구라 부르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음을 기억합시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4.17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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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요한 복음이 전하는 최후의 만찬 장면을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있음을 알고 계신 스승,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홀로 수난과 고통의 잔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그리스도, 인간적 번민과 두려움에도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잘 알고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스승님께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답하십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은 아무도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라고 서술합니다.
밤은 어둠으로 가득 찬 시간, 사탄이 일하는 시간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성자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전에 어둠과 사탄,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한편 스승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베드로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셔야 함을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알아뵙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에서 메시아의 비밀과 제자들의 몰이해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는 데 필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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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13,25)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더불어 살아가자면 그 관계 안에는 배신과 배반으로 상처받고 상실로 인해 아파할 수밖에 없겠지만, 결국은 사람만이 희망이다, 고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는 속담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믿는 사람에게 배신과 배반의 큰 상처를 받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도 바로 당신과 함께 3년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의 배신과 배반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셨습니다.”(13,21) 얼마나 예수님의 마음이 산란(=어수선하고 뒤숭숭하다.)했으면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엔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이49,4)라는 자조와 한탄에서 솟아 나온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13,21)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복음은 '마음이 산란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드러내 놓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상상하면 괜스레 제 마음 또한 덩달아 산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산란하신 까닭은 당신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그 나약함이 배신과 배반, 도망침의 근거이며, 그런 일이 일어난 다음에 제자들이 겪을 후회와 절망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연민이며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그런 예수님의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면서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13,25)라는 질문이 오히려 예수님의 산란한 심사를 더 불편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이 질문에는 “저는 아니겠지요?”(마르14,19)라는 자기암시와 자기변명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모르는 무지에서 한 질문일 뿐입니다. 우리 역시도 나만 아니면 된다, 는 의식이 없지 않나 성찰해 볼 일입니다. 사건의 본질보다도 ‘누구야?’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막말로 배신자가 누군지 알아서 어떻게 하려고요? 판단과 단죄 아니면 왕따 혹 축출하려고요. 이는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것과 같음을 이후에 일어나는 사실로 드러나잖아요.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의 저 간사하고 나약한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담백하게 받아들이시는 마음으로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13,26) 하고 언급하십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며, 유다를 도구 삼아 사탄은 미뤄놓았던 그 죽음의 잔을 마시게 하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원망보다도 안타까운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13,27) 하고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때는 밤이었다.”(13,30) 라는 표현에서 그 밤은 어둠의 시간이며, 죽음의 어두운 안개가 점차 도처에 내려앉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밤은 유다에게는 사탄의 유혹을 받는 밤으로 갈등과 고뇌의 밤이 되겠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자신을 통하여 아빠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자신 역시도 영광스럽게 되실 것임을 확신하는 밤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그 밤의 어둠이 짙어가며 갈수록 유다의 인간적인 고뇌와 혼란은 점점 더 깊어 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다는 빵을 받았지만, 축복한 빵도 먹지 않았고 축복의 잔도 마시지 않았음은 그가 생명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나아갈 수 없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잃을 사람은 잃겠지만 나약한 제자들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희망은 오직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의 희망은 오직 사람의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애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13,33)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베드로는 자신의 열정만을 믿고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도 내놓겠습니다.” (13,37) 라는 호언장담에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단 말이냐.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3,38)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물론 베드로는 훗날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3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21,17)라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십니다.”고 겸손스레 응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21,18)라는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는 자신이 고백한 바를 실천할 것입니다.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 하리이다.”(화답송 후렴/시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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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 18일, 신학교 추천서를 써 주셨던 이학노 요셉 몬시뇰님의 사제 생활 50주년을 기념하는 금경축이 있었습니다. 미사와 모든 행사를 마치고 몬시뇰님께서는 당신이 추천해 줬던 신부, 수녀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간 정말 빠르다. 나도 금경축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벌써 금경축이다.”
50년이라는 시간, 정말로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닐 수 있었습니다. 하긴 저 역시 엊그제 신학교 들어가겠다고 몬시뇰님께 추천받았는데, 벌써 사제 생활을 한 지도 25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지나고 나면 너무 빠른 시간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 천천히 지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 날짜를 기다릴 때, 사제 서품 날짜를 기다릴 때, 힘든 사목에서도 시간의 흐름은 너무나 느렸습니다.
물리적 시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느리게도 또 빠르게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나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시간이 잠깐 멈춰서서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진행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세상 안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에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함을 위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느님의 관점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 모든 마음이 예수님을 결국 배반하게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뜨끔해서 다시 마음을 되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그의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자기 이득을 취합니다.
잠시만의 만족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간은 잠시만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유한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영원의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특히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 살 것을 떠올린다면, 이 세상 안에서도 당연히 하느님의 시간을 쫓아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어떤 시간을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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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고백>
요한 13,21ㄴ-33.36-38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고백>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내가 하려는 일을
당신께서 모두 아시지만
내가 하려는 일이기에
당신께서 막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당신께 기쁨이면 좋으련만
내가 하려는 일이
당신께 슬픔일지라도
내가 하려는 일이기에
당신께서 막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당신께서 막지 않으심이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기에
내가 하려는 일이
당신께 슬픔이라면
내가 하려는 일을
어떻게든 하지 않는 것이
당신께 대한 나의 사랑이건만
자주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심심찮게
그 사랑 하지 못하는
내 스스로가 부끄럽고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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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해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마음이 넓어야 좁은 이를 품을 수 있는 법입니다. 마침내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하는 데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또 잘못할 것을 알면서도 용서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빼앗기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배반 앞에서도 늘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으로 가슴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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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누구인가?”>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
위 말씀은 예수님은 물론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요즘 참 절실히 깨닫는 것은 리더인 지도자의 중요성입니다. 세계든 나라든 사회든 가정이든 언제 어디서든 지도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리더의 중요함은 더욱 커집니다. 지도자에 따라 공동체의 흥망성쇠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민생입니다. 정말 정치 지도자를 잘 선택해야 할 4월10일 총선입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중 국가와 권력에 대한 내용을 일부 나눕니다.
1.국가권력은 호의와 온유함으로 지배해야 한다.
2.공평과 인내, 친절은 윗사람이 지녀야 할 아주 좋은 자질이다.
3.황제는 교회 위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
4.통치자는 많은 권력으로 구원받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
5.세상의 모든 권력은 실재가 아니라 꿈이다.
6.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7.재물은 탐욕으로 이끌고, 권력은 교만으로 이끈다.
신자이자 국민인 우리가 알아야할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신자들입니다. 지도자의 영원한 모델 예수님을 참 지도자로 모신 우리임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우리 역시 오늘의 다산 어른과 공자의 말씀도 유익합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 저울질한다면, 나 또한 인간의 마음을 잃은 도구로 변할 것이다.”-다산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함에도 염구는 많은 세금을 거둬 재산을 더 늘려줬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그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북을 울려 그의 죄를 다스려라.”’-논어
성지주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시 군중들의 환호, “호산나!”는 우리 식으로 하면 “하느님 만세! 하느님 찬미!”와 같습니다. 새삼 하루를 시작하면서 제가 작년 8월15일 광복절이후 바치는 만세육창이 옳았음을 확인합니다.
1.하느님 만세!
2.예수님 만세!
3.대한민국-한반도 만세!
4.가톨릭교회 만세!
5.성모님 만세!
6.성 요셉 수도원 만세!(우리가정 만세!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만세육창입니다. 지금은 성주간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고 답을 찾는 시기입니다. 성주간, 죽음을 예감한 예수님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처절히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역시 나는 누구인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참 지도자인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성주가 월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였습니다. 바로 여기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확인하신 예수님이셨고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우리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향유를 부어 주었던 여인도 예수님께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겠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종을 통한 자신의 신원확인이었습니다. 이런면에서 어제 강론 제목은 참 적절했습니다.
“주님의 종; 예수님 사랑하기, 예수님 알기, 예수님 살기, 예수님 닮기”
주님의 종인 예수님은 우리 삶의 영원한 지도자이자 중심이기에 우리의 신원확립에도 결정적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성주간 화요일 예수님 역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예수님은 배반자의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12제자들중 하나,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임을 지목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애제자에게 슬며시 물어봐달라 했을 때 예수님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자임을 알려주었고, 유다가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습니다.
주님의 빛나는 제자공동체에서 어둠의 멸망을 택한 유다였습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한결같을 수 있었음은 제1독서 주님의 종의 두 번째 노래 덕분이였음을 봅니다.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신원을 발견하고 확인한 예수님이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어찌 주님의 종, 예수님께만 해당되겠습니까? 또 하나의 주님의 종인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우리 또한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불림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태중교육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이런 진리를 깨달아 안다면 낙태는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고 자녀들을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임은 물론 부르심에 적절한 인물로 성장하도록 자녀교육에 기도와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시편 71,5-6ㄱㄴ)
오늘 복음에서 유다의 배반에 이어 베드로의 배반도 예고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베드로의 자만을 여지 없이 꺾어버림으로 장차 회개에로 이끄는 주님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참 놀랍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자 몇이나 될런지요? 베드로는 물론 모든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하고 복잡했을런지요! 예수님은 다음 이사야서의 주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위로와 힘도 받으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예수님뿐 아니라 또 하나의 주님의 종인 우리가 신원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상기하여 제자리를 찾게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섭리 안에 비로소 구원의 출구를 찾은 예수님의 영적승리의 고백이 감동적이요 이 또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The glory of God is the living person)’, 바로 이레네오 성인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우리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예수님을 닮아 베네딕도회의 모토대로 하느님의 영광이 되어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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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오늘 이 말씀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눈에 쏙 들어오며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는 앞의 얘기와는 반전을 예고하는 표현이지요.
앞에서는 헛수고, 헛고생을 얘기하다가 그건 그렇지만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무엇이 어떻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나를 버리지만 하느님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나의 일과 노력은 인간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헛수고가 되겠지만 영적으로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영광이 될 것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의 헛수고는 두 가지입니다. 일의 실패와 관계의 실패입니다.
보통은 공들인 일이 아무 성과가 없을 때 헛수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지 않았을 때 그렇게 얘기하지요.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이 헛수고의 기준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결과가 나지 않은 것으로, 그러니까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헛수고인 것으로 바꿔야.
그러니 우리 신앙인은 내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를 때 그렇게 애쓴 것이 헛수고가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땐 하느님 뜻과 달라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 곧 주님의 헛수고는 일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실패, 그러니까 제자 교육의 실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자식 농사의 실패입니다.
3년 동안 당신의 제자요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으로 그렇게 애써 키웠는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당신을 팔아넘기고 다른 제자들은 다 배반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아주 심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토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처럼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어서 터뜨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심란하심이 우리와 같은 의미의 심란하심일까요?
물론 좌절감 곧 제자 교육이 내 뜻대로 안 된 것의 심란하심이 아니라 사랑의 심란하심 곧 제자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이해해야겠지요.
우리만 해도 자식 농사가 잘되지 않았을 때 내 뜻대로 안 된 것 때문에 심란하지 않고, 자식이 불행할까 봐 심란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제 주님은 제자들의 배반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당신이 죽어갈 때 제자들은 요한 외에 아무도 당신 곁에 없을 겁니다.
그럴지라도 당신 곁에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며, 당신의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그리고 제자들도 지금은 배반하지만 나중에는 참 제자로 바뀔 것이라며 심란하심을 추스르십니다.
‘그러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을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됩시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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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21.38)
<두 배신!>
오늘 복음(요한13,21ㄴ-33.36-38)은 '예수님께서 유다와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신 예루살렘은 '이 지상에서의 예수님 여정의 최종 목적지'이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산란한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 죽음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당신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로부터의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예수님께서는 먼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그는 열두 제자들 가운데에서 돈주머니(재정)를 담당할 정도로 예수님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제자였지만, 그 신임에 배신으로 응답합니다.
이어서 '베드로의 배신를 예고'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는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말씀을 놓고,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13,36ㄱ)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13,36ㄴ)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13,37)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3,38)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나약함, 그리고 우리의 배신까지도.
그러니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그런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극진한 사랑이신 예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사랑에로 힘차게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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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FgLmmp8H9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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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 38)
무서운 것은 정말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느님을 팔아넘기고
배신을 합니다.
조금만 입맛에
맞지 않아도
외면하고 배신하는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길위에서도
배신과 배반이 있습니다.
언제나 배반하는 쪽은
나약한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위한
믿음이었음을 아프게
반성하게됩니다.
수 많은 배반의
역사속에서도
부활의 꽃은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는
결코 없습니다.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로
여실히 드러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배신한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우리를
끌어안으십니다.
비겁한 변명이 아니라
비참한 자기인정에서
베드로의 굵은 눈물은
믿음의 길을 다시
찾습니다.
믿음의 길을
다시 찾는
성주간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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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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