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심 : 지은이가 ‘밥심’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낱말. ‘빵’과 (‘힘’을 뜻하는 낱말인) ‘심’을 합친 말이다. ‘빵 + 힘’이므로, ‘빵에서 나오는 힘’, ‘빵을 먹어서 생기는 힘’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은 밥심이지!”하고 말할 때의 ‘밥심’은 ‘밥 + 심(힘)’, 그러니까, ‘밥에서 나오는 힘’, ‘밥을 먹어서 생기는 힘’이라는 뜻이다.
※ [판다곰의 음식 여행·13] 밀밭에서 취해보자
- 기사 입력 : 서기 2010년 양력 4월 27일
이제 밀을 살펴보자. 밀은 세계의 여러 곡식 가운데 가장 먼저 작물이 된 것에 속한다. 밀은 아프가니스탄과 캅카스(‘카프카스’/‘코카서스’라고도 한다. 조지아[로(Ro)시야식 이름은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과 로시야를 가르는 산맥이며, 로시야인이 ‘체첸’으로 부르는 ‘바이 나흐’족이나, 다게스탄 사람들도 이곳에서 산다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가 원산지로 알려졌으며,
메소포타미아(이는 서양인이 붙인 이름이고, 이 땅에 사는 아랍인들은 이곳을 ‘섬/반도’라는 뜻인 ‘자지라’로 부른다. 이 땅이 두 가람[티그리스/유프라테스]과 한 바다[걸프 해]로 에워싸여, 마치 반도 같기 때문이다 – 옮긴이) 지역에서 수메르(올바른 땅 이름은 ‘키엔기르’. ‘수메르’는 키엔기르의 적이자 이웃인 셈족이 붙인 이름이다 – 옮긴이)인들이 야생 밀을 심어 본격적인 농업(순수한 배달말로는 ‘여름지이’ - 옮긴이)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더위에 약해 열대 지방에서 재배할 수 없는 점을 빼면 성장 조건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기에 온대 지방, 동쪽으로는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과 한국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서유럽을 포함한 구대륙(‘유라시아’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옮긴이)의 세계 여러 지역으로 퍼질 수 있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곡식의 지위를 차지했다.
세계 전체의 생산량으로 따지면 신대륙(그냥 ‘아메리카’나 ‘거북섬’이라는 이름을 써야 한다 - 옮긴이)의 작물인 옥수수가 밀을 능가하지만, 옥수수는 주로 동물 사료용으로 쓰이기에, 사람이 먹는 곡식으로는 밀이 단연 으뜸이다(그러나 이는 중남미에서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옥수수를 먹는 사실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만만치 않은 옥수수가 인간의 주식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된다는 사실을 무시한 설명 아닌가? 그리고 이 설명대로라면, 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옮긴이).
생김새를 보면 이삭에 기다란 수염 같은 까락이 달린 것이 보리와 아주 비슷하다. 우리(한국인을 비롯한 배달민족 – 옮긴이)는 보리를 먼저 길렀고 밀은 그보다 늦게 재배하기 시작했기에 (한자로는 – 옮긴이) 보리를 대맥(大麥. 그러니까 큰[大] 보리 – 옮긴이), 밀을 소맥(小麥. 작은[小] 보리 – 옮긴이)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밀농사를 시작한 것은 무척 오래되었지만, 조와 기장, 보리와 쌀에 밀려 주곡의 위치를 차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여름에는 무척 고온인 우리나라에서는 밀이 잘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밀은 단것을 만드는 데에 쓰는 맥아처럼, 술을 빚는 누룩의 원료가 되는 절대 효용 가치를 지닌다. “밀밭에 가면 저절로 취한다.”는 이야기는 술을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한 발효제인 누룩을 반드시 이 밀로 만들어야 하는 까닭에 생긴 말이다.
▶ 로마의 기술 진보를 이끈 밀
밀 이야기는 잠시 동양을 벗어나 서양으로 갈 수밖에 없다. 서양 역사(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에서는 로마가 밀을 주식으로 한 이래로, 밀은 곡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서양의 대표적인 잡곡인 귀리와 호밀은 언제나 밀의 대용품 위치밖에 차지한 적이 없었다.
로마에서는 밀이 부족하면 아주 큰일이었다. 밀을 확보하려고 시칠리아와 이집트 등의 지중해 밀 산지에서 밀을 사들였고 로마의 위정자들은 시민에게 값싼 밀을 공급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이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들 가운데 빵집을 운영하는 사람은 대부분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빵집 하면 독일(올바른 이름은 ‘도이칠란트’ - 옮긴이), 프랑스의 빵부터 알려졌지만, 밀가루를 다루는 데에는 역시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다.
이탈리아의 파스타와 피자는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파스타의 수많은 종류만 보더라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얼마나 밀을 다루는 데에 능숙한지 알 수 있다. 물론 현재는 프랑스나 독일 같은 유럽의 여러 나라도 많은 종류의 빵과 밀가루 음식을 즐기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탈리아 사람들을 따를 방도가 없는 것 같다.
로마는 과학보다는 실용적인 기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로마의 기술이 진보한 바탕에 밀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밀 도정의 어려움이 기술적인 진보를 가져왔다는 뜻이다.
쌀이나 보리의 도정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쌀과 보리는 단단하게 말린 알곡을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는 것만으로도 껍데기를 벗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밀은 이렇게 해서는 도정할 수 없다. 밀은 낱알이 쉽게 깨지기 때문에 껍데기만을 손쉽게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밀은 말린 알곡을 통째로 부서뜨려 가루를 내고, 체에 걸러 껍데기를 제거하고 가루를 따로 모아야 한다(이제 ‘쌀밥’/‘보리밥’/‘조밥’은 있어도 ‘밀밥’, 그러니까 ‘밀알로 지은 밥’이 없는 까닭이 이해가 될 것이다. 밀알이 알곡을 통째로 부서서 가루로 만들어야 먹을 수 있는 곡식인데, 어떻게 낟알의 모양이 보존되는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겠는가?
이와 비슷한 사례로, 안데스 지역에서 서아시아식/남아시아식/유럽식 빵이 나타나지 않은 사실을 들 수 있다. [흔히 ‘잉카 제국’으로 불리는 타완틴수유 제국의 신민들을 비롯한] 안데스 원주민들이 고른 곡식/채소인 감자는 밀가루에는 흔한 ‘글루텐’ 성분이 없어서 찰기가 모자라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빵을 만들어 먹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안데스 원주민들의 나라인 ‘치무’ 왕국이나 ‘와리’ 제국이나 ‘차차포야’ 사람들의 나라나 타완틴수유 제국에서는 서아시아나 유럽에서 볼 수 있는 빵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문명이나 지역이나 민족이 고른 곡식은 그 곡식으로 만드는 음식의 모양이나 특성 – 나아가 음식문화 - 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 옮긴이).
이렇게 하면 밀 껍질이 가루에 많이 섞인다. 순수한 배젖만 분리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도정 방법에 따라 밀가루의 품질은 현격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또 밀의 제분은 집에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었기에, 제분 공장을 만들어 대규모로 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되었다.
그렇기에 수력 같은 자연의 힘을 빌리거나 동물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한층 유리했다. 또 도정 기구를 제작하고, 껍질과 가루를 분리하기 위해서도 송풍 장치 같은 여러 기계의 힘을 빌려야 했다. 이처럼 밀의 도정과 제분 공정에는 수많은 순서와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연히 로마의 기술 발전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물론 로마의 기술 발전에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수로의 건설, 일찍이 도로의 중요성을 인식한 토목 기술의 발달, 그리고 수많은 전쟁 등 많은 요인이 있었겠지만, 밀을 주식으로 했던 것도 그 원인 중 하나였으리라.
지금으로 보더라도 쌀의 도정 공장은 아주 작은 규모로도 가능하고 실제로 쌀의 산지마다 조그만 정미소가 세워져 있다. 심지어 요즘에는 마트나 슈퍼마켓에서 더 신선한 맛을 위해 소규모의 기계를 설치해두고 직접 도정해서 팔기도 한다.
반면 밀은, 대부분의 원료를 수입하는 것도 그 원인이겠지만 대규모 제분 공장이 따로 있다. 밀을 제분하려면 더 큰 규모의 공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밀가루는 찰기에 따라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으로 나누는데, 이 구분은 밀가루 안에 포함된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의 함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강력분은 주로 빵을 만들고, 중력분으로는 국수나 전, 박력분으로는 과자나 케이크를 만든다.
물론 도정하는 밀이 경질인가 연질인가에 따라 글루텐의 함량도 차이가 나지만 제분 과정에서도 배젖 부위에 따라 차이가 난다. 용도에 맞는 밀가루를 생산해야만 음식이 제대로 될 수 있으니 그러려면 더 큰 규모의 공장에서 세심한 가공 공정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 세계적인 밀 음식, 빵과 국수
빵을 만드는 일은 우리가 밥을 짓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였다. 쌀밥은 쌀을 물에 씻어 물과 불의 기운만 맞추면 금세 밥이 되지만, 빵은 밀가루에 효모를 섞고 여러 번 반죽하는 데에도 몇 시간이 걸리고 오븐이 적정한 온도가 되도록 먼저 불을 때고 반죽을 넣고 굽는 고된 공정을 겪어야 먹을 만한 빵이 된다. 이런 복잡한 공정을 일반 가정에서 끼니때마다 되풀이하기는 어렵기에 중세의 유럽에서는 장원마다 빵 공장을 운영했다.
앞서 이야기했듯 벼가 주식인 동아시아(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와 서아프리카도 이건 마찬가지였다 – 옮긴이)에서 보리와 조(나아가 수수와 기장과 피 – 옮긴이)가 잡곡이었다면, 유럽에서는 호밀과 귀리가 그 역할(구실 – 옮긴이)을 해냈다.
가난하거나 흉년이 들면 거친 껍데기가 섞여 있는 밀가루에다 호밀이나 귀리를 섞어 빵을 만들어 먹었던 것이다.
호밀은 메밀처럼 야생에 가까운 곡물인데, 부패하면 맹독성을 지닌 성분이 생긴다. 유럽에서는 흉년에 이 부패한 호밀이 든 빵을 먹고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지금은 밀가루로 만든 빵보다 호밀을 섞은 빵이 건강식으로 더 비싸게 팔리니 얄궂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나아가 요즘은 귀리가 ‘몸의 지방을 없애고’, ‘위장을 청소하고 똥이 잘 나오게 해서, 뱃살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며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으니, 이도 – 비록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나 -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다 : 옮긴이).
또 한 가지 대표적인 밀 음식은 국수다. 이탈리아의 마카로니, 중국의 국수가 유명하고 중국과 아랍, 이탈리아가 저마다 자신이 국수의 원조라고 주장한다. 국수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 사실 문헌상으로 원조를 추적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이탈리아로 돌아간 13세기 말까지도 이탈리아에 국수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고, 중국은 기원전 4000년경의 황하 유역 유적지에서 국수의 형태가 발굴되었으니, 마르코 폴로가 아랍을 거쳐 돌아간 사실을 미루어보면 중국의 손을 들어줄 개연성도 있는 것 같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무엇보다 6000년 전의 황하 유역에서 나왔다는 국수는 지금 그 ‘물증’이 사라진 상태다. 단, 하[夏]나라 때인 4000년 전, 잡곡으로 만든 국수는 유적지에서 나왔으니, 적어도 황하문명을 만든 이들이 하나라 때부터 국수를 만들어 먹은 건 인정해도 될 것이다 - 옮긴이).
또 중국의 이슬람교도(‘지나[支那] 정부의 지배를 받는 무슬림’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 옮긴이)인 위구르 민족이 사는 지역에서 둥글고 긴 국수 모양의 흔적이 발굴된 것을 보면 중국의 국수도 아랍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나는 지지난 해에, 국수와 만두가 맨 처음 비롯된 곳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고, 제하[諸夏] ‘한족[漢族]’들이 그것들을 받아들였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제하의 국수는 “아랍”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하리라 - 옮긴이). 하기는 맛있게 먹으면 됐지 그 발명자가 누구였는지가 뭐 그렇게 중요할까 모르겠다. 아무튼 이제 국수는 거의 전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다.
▶ 귀하디귀한 밀국수
우리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국수를 먹었다. 밀의 전래는 대개 중국의 전한(또 다른 이름은 '서한[西漢]' - 옮긴이) 시대(그렇다면, 서기전 1세기인 열국시대 초기나,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전인 서기전 2세기? - 옮긴이)쯤으로 짐작하고 있지만, 백제의 군창지에서 밀이 발견된 것으로 봐서 삼국 시대에 밀을 재배한 것은 확실하다.
국수는 국수틀로 뽑아내기도 하지만 밀가루 반죽을 하여 넓게 밀어서 칼로 썬 칼국수가 보통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밀은 귀한 곡식이었다. 고려(왕건이 세운 후기 고리[高麗] - 옮긴이) 때에는 연회의 성찬에 국수를 내놨다. 국수의 긴 면발이 장수를 의미한다고는 하지만 원래부터 귀한 잔치에 내놓는 귀한 음식이었다. 이 전통은 조선조(근세조선 시대 – 옮긴이)까지 이어져 큰 잔치에는 으레 국수를 내놓는 것이 전형이 되었다. 고려 귀족들은 연회가 잦아지자, 밀이 모자라 중국(북송 왕조 – 옮긴이)에서 밀을 수입하기까지 한다.
우리에게 밀이 흔해지고 국수가 특별한 음식에서 보통 음식으로 변한 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6.25 전쟁 – 옮긴이)을 거치면서 미국에서 원조 물자로 밀가루가 대량으로 들어오게 된 다음부터다. 그 이전에는 밀이 귀하기에 국수도 당연히 귀했고, 귀한 밀국수를 먹지 못하는 아쉬움은 사람들의 눈길이 밀과 비슷한 메밀로 옮겨가게 했다.
우리가 먹는 메밀국수의 메밀은 같은 '밀' 자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밀과는 전혀 다른 식물 종이다. 모양새부터 판이하고 알곡의 형태도 완전히 다르다. 다만 가루로 만들었을 때의 모양과 성질만 비슷하다.
메밀의 원산지는 동아시아 북부로 추정되며, 만주지역에서 주로 재배되었다. 환경 적응력이 밀보다 강해서 기후가 나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도 메밀을 심는 지역은 평안도의 산지나 강원도, 제주도 등 다른 곡식을 재배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런데 이 메밀은 찰기가 부족해 국수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루로 낸 다음 반죽하여 국수틀에서 눌러 작은 구멍들을 통과하게 하고 바로 그 밑에 뜨거운 물을 끓여 국수를 만든다. 막국수는 메밀을 껍질째로 빻아 국수를 만들었다고 막국수라 부르는 것이다.
메밀은 밀보다 더욱 야생종에 가깝기 때문에 약간의 독이 있다. 이 독성은 그리 강하지 않기에 약성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식물들은 자신의 종자를 보호하기 위해 씨앗에 독을 품는 경우가 많은데 밀이나 쌀 같은 곡물들은 사람이 길들인 것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이 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사실은 쌀에도 비소가 조금 들어있다 – 옮긴이).
일설에는 메밀을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들이 여진족(女眞族. 올바른 이름은 ‘주션’족 – 옮긴이)이었다고 한다. 여진족은 메밀에 독이 있어 이것만 상식(常食. 늘[常] 먹음[食] - 옮긴이)하면 몸에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중세시대부터 자신들의 적이자 원수였던 후기 고리/근세조선 사람들에게 – 옮긴이) ‘메밀을 많이 먹고, 몸이 나빠지라.’는 뜻에서 전해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메밀을 길러 국수나 묵(나아가 전병 – 옮긴이)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늘 상식하던 무김치를 곁들여 먹었다.
무에는 이 메밀의 독을 중화시키는 성분이 들어 있기에 아무런 탈이 없이 이 메밀을 즐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메밀의 독성을 생각하면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소리다. 메밀 냉면에 꼭 함께 먹는 무김치를 먹을 때마다 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 그 정도면 약과라니?
밀은 서양에서도 과자의 주요 재료였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밀을 이용한 과자들이 꽤 있다. 아마도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약과와 매작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약과는 고려 시대 유밀과의 일종이다.
지금은 약과만이 남아있지만 고려 시대에는 유밀과 종류가 몇 종이 더 있었다. 지금이야 과자들이 흔하지만 예전에는 무척 귀했다. 약과에 '약(藥)' 자가 붙어 약으로 쓰이는 과자라니 얼마나 귀하면 그런 이름을 붙였겠는가.
우리나라에서 밀은 누룩을 만드는 중요한 원료였기에 재배는 했지만 그 생산량이 무척 적었다. 기후가 밀 재배에 잘 맞지 않기도 하거니와 쌀, 보리, 조 등의 주곡 생산이 워낙 중요했기에 생산량이 떨어지는 밀을 재배할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쌀은 찰기가 많아 떡은 잘 될지언정 과자를 만들기는 어려운 곡물이었다. 과자에는 밀이 제격이었다.
약과와 매작과의 사례에서 보듯, 밀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그 당시로는 엄청나게 귀했을 식용유를 짜내 이를 튀겼으며 게다가 귀한 단맛을 내는 조청이나 꿀까지 썼으니, 이 과자들은 엄청나게 귀한 것이었다.
예전에 기름을 짜려면 참기름을 짜듯이 볶고 압착해서 짜는 방법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씨앗으로 기름을 짜내었지만 가장 많이 쓴 것은 참깨와 콩이었다(들깨도 포함해야 한다 – 옮긴이). 이렇게 압착법으로 기름을 짜면 요즘처럼 헥산을 이용한 화학공업의 방법으로 추출해내는 것보다 훨씬 비효율적이었기에 생산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지금 식용유가 흔한 데에는 신대륙에서 대량 재배되는 콩과 면화씨가 수입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탈유 과정도 큰 몫을 한다. 그런 방법이 없던 시절의 식용유는 귀했다. 조청도 귀한 곡물을 엿기름으로 당화해 얻는 귀한 것이었다. 꿀도 생산량이 얼마 되지 않으니 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약과처럼 밀가루를 튀겨 만든 달콤한 과자는 아주 성찬일 때만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 연등회, 혼례와 중요한 의례에 유밀과를 사용했는데, 귀족들의 사치 때문에 유밀과를 잔치에 너무 많이 사용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연회의 종류에 따라 이 유밀과의 그릇 수를 제한할 정도였다고 한다.
▶ 귀한 밀이 흔하디흔한 것으로
지금은 흔한 약과지만 그렇게 귀한 음식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먹으면 더욱 맛이 있을지도 모른다. 밀이 귀한 곡식이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밀이 중요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술을 만드는 누룩의 원료였기 때문이다. 술을 만드는 데서 밀이 없으면 가장 중요한 발효제인 누룩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술을 즐기는 민족이었기에 밭의 일부를 할애해 밀을 심었다. 밀로 누룩을 만들며 좋은 술의 향기와 취한 기분을 상상했을 것이다.
밀이 우리에게 값싼 것으로 다가온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헐벗은 우리를 먹여 살린 것은 미국의 잉여 농산물이었다. 한국과 미국이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진 밀가루 포대들이 수제비와 국수로 변해 우리 뱃속으로 들어갔다. 밀이 신대륙의 캐나다와 미국,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오스트레일리아의 평원을 차지한 뒤로는 한동안 밀이 넘쳐흘렀고, 식량이 한참 모자라던 1970년대에는 우리에게 '분식'이라는, 조금은 폄훼의 어조가 섞인 이름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정부의 강제시책으로 분식센터는 늘어갔고 차츰 밀가루는 빵과 국수로 (그리고 만두나 수제비로 – 옮긴이) 변해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냉전이 끝난 뒤에는 우크라이나와 로[Ro]시야산 밀가루도 한국에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 옮긴이).
그 옛날 귀하던 쌀조차 남아돌게 된 요즘은 다시 존귀한 재료였던 '우리 밀'을 찾는다(오늘날 한국에서 쌀이 남아돌고, 나아가 그 소비량까지 줄어든 까닭을 따로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면이 모자라니,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자[라픽 샤미].” - 옮긴이).
그동안 값싼 수입 밀에 밀려 밭 한 귀퉁이조차 차지하지 못하던 밀을 우리 손으로 가꿔 먹자고 한다. 그런 것을 보면 새옹지마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나는 우리밀을 기르는 일이 성공하기를, 그래서 한국의 밀 자급률이 늘어나기를 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으로 우크라이나가 밀을 세계에 팔지 못하게 되자, 한국에 밀이 모자라게 되었고, 그래서 밀가루 값과 그것들로 만드는 음식의 값이 오른 점을 생각하면, 이런 내 바람은 단순한 민족주의나 신토불이 사상이 아니다! - 옮긴이).
- 장인용 (출판인) 선생의 글
*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427010141§ion=04
(<프레시안> 기사)
- 단기 4355년 음력 10월 8일에, ‘먹고 마시는 일도 엄연히 갈마다.’ 하고 생각하는 잉걸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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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