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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전과 혁신 세력의 등장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Friedrich Wilhelm Ludendorff). 1차 대전기 독일군 지휘관이었으며 독일의 패전은 군사적인 것이 아닌 경제 계획, 사상 동원의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라주장하였고, 이는 일본 군부와 관료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참전국이었지만 주 전장인 유럽에서 많이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당사국은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일본은 1차 대전을 기회 삼아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었고, 타자의 입장에서 전쟁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1915년 9월과 10월, 육군과 해군은 각각 임시군사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1차 대전을 분석하게 됩니다. 그 결과 1차 대전이 이전의 전쟁 양상과는 차원이 다른, 국가와 국민이 전방위적으로 동원되는 총력전으로 전개되었고 전쟁에서 동원·소비된 재정과 인력, 각종 물적 자원 등은 일본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임을 알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엄청난 산업력을 가진 독일 조차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해 국민의 염전주의가 팽배해지고, 전쟁 수행력이 떨어지면서 패전한 사실은 일본의 군부, 특히 육군에게 위기의식을 대두시켰습니다. 이 위기의식은 당대 육군의 세대교체와 맞물려 2개의 파벌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나는 총력전을 수행할 여력이 안되니 단기 결전의 태세를 유지해야한다는 현상유지파, 하나는 국가 전반을 총력전에 적합한 형태로 개조해야 한다는 군제개혁파였습니다. 훗날 양 세력은 국내외 혼란의 수습을 위한 접근법에서도 대립하면서 전자는 황도파(皇道派)로, 후자는 통제파(統制派)로 이어지게 됩니다.
1차 대전은 총력전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임과 동시에, 구미 열강들의 기술 발전 성과가 쏟아져 나온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전투기, 전차와 같은 것은 물론이고 인적·물적 자원을 대규모로 조직하고 분배하기 위한 관리 기술, 라디오와 선전 및 통신 기술 같은 것들이 전쟁에 동원됐습니다. 이는 군인 뿐만 아니라 관료와 자본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혁신관료, 신생재벌이라는 새로운 집단을 출현시켰습니다. 이들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앞으로의 세상을 결정할 것이라고 인식하였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장려하고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혁신관료들은 내무성, 사법성과 같은 전통적인 사무 부서보다는 상공성, 농림성과 같은 실무 부서에서 자신들의 기술적 전문 지식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고, 신생재벌들은 미국의 포드주의(Fordism)를 받아들여 기계를 활용한 대규모 생산체제의 확립, 합리적인 생산 및 경영체제로 기존 재벌들과 경쟁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들은 곧 기존의 관료나 재벌들과 비교되는 혁신세력들로 지칭되었습니다.
대공황과 혁신 세력의 대두
군과 민간의 혁신세력이 곧바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아직 중간 실무자나 말 그대로 '신생' 재벌에 가까웠고, 특히나 군은 1910년대 초중반 이래 지속된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조로 인해 전면에 나서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육군 내 군제개혁파는 미래의 총력전에 대비하기 위해 1920년대 들어 나름의 개혁에 착수하는데 이것이 바로 두 차례의 군축입니다. 개혁이 군축의 형태로 이뤄진 것은 이전 글에서 언급하였듯, 군의 명분 없는 적백내전 개입이 실패함과 동시에 국제 협조 체제의 진전이 이뤄지면서 대규모 군을 유지하면서 개혁하는 것이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군축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두 명의 육군대신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야마나시 군축은 실효성 없이 군을 줄인 셈이었고, 우가키 군축은 4개 사단을 감축하면서 군의 현대화를 일부 진행했습니다. 이렇듯 군과 민간의 혁신세력은 1차 대전을 기점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나, 정당과 기존의 관료, 재벌이 건재한 1920년대 중반까지는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1) 황도파와 통제파
1920년대 이래 국내외에서 나타난 난맥상은 군이 일약 정치의 중심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이자, 그래야 하는 동기가 됐습니다. 국가 경제 전반이 악화되자 하급 장교들과 사병들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들 중 대다수는 가난한 농촌 등지 출신으로 가정 부양을 위해 입대한 경우가 많았는데, 대공황을 계기로 농가 경제가 타격을 받으면서 이들도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육군에서 명망 높은 현상유지파의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 대장,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대장을 중심으로 결집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자유주의, 자본주의와 같은 과도한 서양 사상의 유입으로 인한 것이니 황도(皇道)를 바로 세움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는 황도파를 구성하게 됩니다. 한편, 나가타 데쓰잔(永田鉄山),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영관급 이상 고급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던 군제개혁파는 정당 내각으로는 총력전을 위한 개혁을 이뤄낼 수 없다고 인식했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정부가 국가 경제와 사회 전반을 통제하고, 자급자족 경제권을 건설해야한다는 통제파를 구성하였습니다. 황도파와 통제파의 위기의식은 다른 데서 기원하였으나 공통적으로 정당 내각의 실패를 국가와 민족의 위기이자 극복해야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황도파는 전문성이 부족한 젊고 낮은 계급의 인사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방향성을 띄었습니다. 황도를 바로 세우는 것은 존황토간(尊皇討奸), 덴노를 중심으로 정당과 재벌 등의 간신들을 토벌하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존황토간을 하면 황도가 바로 설 것이라는 두루뭉술한 목표의식 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실질적인 정치·사회적 담론이나 정책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암살과 쿠테타에 의존하게 됐습니다. 반면 통제파는 각종 산업 통제법안을 입안함으로써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확대하는 등 점진적인 방향을 띄었습니다. 다만 통제파도 쿠테타와 같은 방법론을 아예 거부한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만주사변과 만주국 수립입니다.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와 그 동료들은 만주의 확보를 통해 유사시 소련과의 결전에서 필요한 전략 요충지를 선점하고, 자급자족 국방경제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관념적인 황도를 중시하는 황도파와 실질적인 통제경제, 자급자족 경제를 지향하는 통제파는 서로를 부정적으로 인식했습니다. 때문에 1930년대 초반의 쿠테타 모의를 제외하면 양측은 거의 따로 행동했는데, 이런 상황으로 득을 본 것은 통제파였습니다. 황도파가 암살과 쿠테타를 거듭하면서 군의 입지는 점차 확대됐는데, 그러던 중 황도파가 독단적인 2·26 쿠테타를 결행했다가 몰락하면서 통제파가 손 안대고 코 푼 격이 된 것입니다.
2) 혁신관료와 신생재벌
혁신관료와 신생재벌은 대공황의 영향을 크게 받은 집단이었습니다. 특히 혁신관료가 그러했는데, 혁신관료들은 자유자본주의의 불필요하고 과도한 경쟁이 대공황을 초래했다고 인식했습니다. 한편으로 이들은 대공황을 전후하여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기존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보호무역과 블록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며 풍족한 자원과 시장을 가진 국가들을 일본과 같은 국가가 따라잡을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게 됩니다. 이는 새로운 경제체제의 모색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일본과 비슷한 입장이면서 더 나은 산업력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독일에 주목하였습니다. 전간기와 나치 시기 독일 역시도 부족한 자원과 시장으로 인해 선택지가 많이 제한된 상태였습니다. 이 때 독일의 경제학자였던 좀바르트(Werner Sombart)와 고틀(Friedrich von Gottl-Ottlilienfeld)은 자유주의 경제를 비난하면서 경제는 각 국가와 민족의 특성에 맞게 구성되어야하며, 사익이 아닌 공익을 추구하는 경제가 되어야한다는 주장을 발표하였습니다. 독일은 이러한 개념을 토대로 관리주의, 즉 강력한 정부에 의한 자급자족 국민경제를 지향하였고 부족한 천연자원은 합성 대체물을 통해 충당하려 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비롯한 혁신관료들은 독일의 모습에서 일본의 가능성을 엿보았습니다.
혁신관료와 신생재벌은 대공황 이후 세계 정세를 보면서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끝내는 사회주의와 관리주의의 두 갈래로 재편될 것이라고 인식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뉴딜 정책을 전개하면서 강력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관리주의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고, 소련과 독일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에 일본도 이러한 경향에 편승하여 미국, 소련, 독일, 일본의 네 광역 경제권으로 세계가 재편되도록 해야하며 이를 위해 일본의 경제도 관리주의로 전환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실제로 이들의 인식이 그런 것도 있으나, 대공황을 전후하여 관료와 재벌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이 팽배해지는 가운데 자유주의를 옹호하던 기존 관료와 재벌들로부터 자신들의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혁신관료들은 자유주의가 재벌의 시장 독점과 노동자들에 대한 저임금과 같은 각종 폐해를 자유라는 이름 아래 비호해준 것과 달리, 관리주의는 사익을 배제하고 공익을 추구함으로써 그간 소외되었던 노동자, 기술자와 같은 계층도 함께 이익을 볼 수 있음을 강조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팽이는 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그 회전력이 빠르면 빠를수록 팽이는 안정되고 더욱 빠른 속도로 돌면서 그 움직임과 관성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일정한 안정성을 갖게된다. 회전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팽이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회전 속도가 0에 도달해서야 팽이는 옆으로 쓰러지게 된다. 국방국가라는 것도 회전력이 최대에 달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전체, 즉 국가의 총력이 하나의 중심을 중심으로 최대한 회전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소명출판, 2015, 305~306쪽에서 재인용.
통제파의 대두와 이들의 존재는 상당한 시너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자급자족 경제권의 구축을 목표로 하던 통제파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내각의 재정 긴축으로 정리 해고나 경제적 타격을 받을 뻔 했던 혁신관료와 신생재벌은 이에 지지하고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받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자급자족 경제를 구축하기 위해 군부가 물리력을, 혁신관료가 국내와 점령지에서의 각종 정책 입안을 통한 실무적 뒷받침을, 신생재벌이 국가에서 요구하는 생산량을 충족시킴으로써 물적 자원의 충당을 담당하는 체제가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기존 관료들과 재벌들의 반발로 인해 관리주의 경제의 완전한 실현은 요원하였고, 만주국만으로는 일본의 군수, 산업 영역에서 필요로 하는 자원이 모두 충족될 수 없었습니다. 국내의 반발 무마와 자급자족 경제의 완수를 위해 관리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강화, 지속돼야 했고 그 결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전역은 끊임없이 확대됐습니다. 결국 자가당착, 계속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군부와 관료들은 이러한 상황을 일본인 뿐만 아니라 아시아인 모두를 위한 자급자족 경제,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같은 미사여구로 정당화하였습니다.
결론
군은 물론이고 혁신관료들과 기술자, 노동자, 신생재벌과 같은 이들은 정당 내각 하에서 비교적 낮은 지위나 좁은 입지를 갖던 집단들이었습니다. 군은 전술하였듯 정치·사회 전반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혁신관료와 기술자들은 행정 관료들에 비해 대우도 별로 좋지 못했고, 대공황 이후 긴축이 이뤄지면서 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불투명했습니다. 노동자와 신생재벌은 구 재벌의 저임금 정책, 시장 독점 등으로 인해 타격을 보는 입장이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국내외적 난맥상은 이들에게 새로운 체제를 모색하는 동기와 기회를 부여해줬으며, 1930년대의 쿠테타와 암살, 각종 통제법안의 입법과 자급자족 경제의 모색은 그 기회를 통해 구 세력과의 우열을 역전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단순히 도조 히데키와 같은 일부 급진적 군인에 의해 이루어진 독단적 '폭주'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근본적인 한계와 실패에 따른 유산, 중하 계층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것을 기회삼아 자신들이 중심되는 사상을 적극적으로 관철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차도 구 세력의 헤게모니, 메이지 헌법 체제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근본적인 개혁에 이르지 못했고 전쟁이라는 방법을 고집했다가 공멸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시기 일본은 군부만이 폭주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반이 그러한 담론에 열광하던, 국가 자체가 폭주한 시기였습니다.
본문의 경우에는 많은 집단과 개념들을 동시에 설명하려다보니 글이 중구난방, 중언부언인 느낌이 없잖아 있는데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끝으로 본편은 끝입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바로는 4부에서 군부를 다루고 5부에서 결론으로 마무리 짓겠다고 말씀드렸었는데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따로 결론을 빼내기에는 그 주제가 본론에서 너무 멀어질 가능성도 있고, 따로 한 개의 글을 꾸릴만한 내용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접었습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봐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앞으로 또 다른 주제의 글들로 찾아뵙겠습니다.
참고 문헌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어문학사, 2012.
안재익, 「1920년대 일본 총동원론의 형성과 전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3.
W. G. Beasley, 『일본제국주의 1894-1945』,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13.
쿠로노 타에루,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 논형, 2015.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소명출판, 2015.
한상일, 『쇼와 유신』, 까치,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