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곁을 지나 다람쥐가 쪼르르 밤나무 위를 올라갔습니다.
"어름 하나만 먹어도 돼?"
" 좋아 그 대신 씨를 많이 퍼트려 줘야 해."
밤나무를 칭칭 감은 어름 동굴은 다람쥐가 쉽게 딸 수 있게 가지를 당기어 주었습니다. 양볼이 미어 터지게 먹으며 불안한 듯 자꾸 주위를 둘러봅니다.
"괜찮아 솔개가 오면 내가 숨겨 줄께."
밤나무가 잎을 활짝 펴주었습니다. 다람쥐는 등을 기대고 하얀 바나나 같이 생긴 달달한 어름을 아껴아껴 먹었습니다. 동글동글 까만 어름씨를 한 입 가득 물고서 밤나무 높은 가지 꼭대기에 올라가 배에 힘을 주고 후욱 뱉었습니다. 지나는 바람이 놀라서 쏴악 흩어 졌습니다. 바람이 어름씨를 안고 여기저기로 날아갔습니다.
" 더 먹고 싶니? 여기도 있어."
"아니야 오늘은 그만 먹을래. 저기 사향제비나비 애벌레가 있던데......"
나무 위를 내려오던 날다람쥐의 소리에 여섯 개의 발로 붙어있던 애벌레가 더듬이를 쑥 내밉니다. 아작아작 씹던 입가엔 엉겅퀴 잎이 묻어 있습니다.
"안녕? 겨울양식을 많이 모았니? 밤이랑 도토리가 많이 없지? 비가 너무 많이 ! 내려서 그런가봐. 밤벌레 친구들이 크고 맛있는 밤이 올해는 많이 열리지 않았대."
" 그래 너도 넌 번데기로 겨울잠을 잔다지?. 이 어름덩굴에서 겨울을 날거니?"
"응. 하지만 아직은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난 먹어도 배가 고파 "
사향제비나비 애벌레는 엉겅퀴를 계속 갉아먹었습니다.
키가 하늘을 찌를 듯한 밤나무에는 인적이 드물어진 몇 년 전부터, 어름덩굴이 자라 칭칭 감아 가지들을 올리고 다람쥐와 산비둘기가 자주 날아와 쉬다가 가고는 했지요. 쨍쨍 여름을 물리치고 나면 가을바람 살짜기 불어 밤을 주렁주렁 매달아 단맛을 들입니다. 가을이 깊어지려 하면 가시 송송 쫘악 열어 통통 밤알 영그는데, 성질 급한 밤송이는 입을 벌리기도 전에 땅에 내려서 낙엽 속에 숨을 자리를 찾는답니다.
다람쥐, 노루, 두더지들이 쉴새없이 다녀가기도 하고 가끔 손가락들도 자루를 매고 올라오기도 한답니다. 밤나무는 그때가 제일 무섭대요. 떨어진 밤만 주워 가면 되는데 가끔 손가락들이 가지들을 부러트려 놓기도 한답니다. 어름나무도 주먹만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서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열매의 단맛을 주지요. 익으면 쫘! 악 입을 벌리는데요. 솜털 바구니 속, 포실포실 하얀 바나나에 검정 해바라 기씨를 넣은 것 같아요. 엄청 달디달지요. 그래서 누구나 이 어름을 좋아한답니다.
북쪽 멀리 있는 높은 산 뒤로 곧 해가 저물려고 하네요. 하루의 마지막 뜨거운 붉은 기운이 "잘 자라 인사"를 묻혀서 쏘아주는 저녁 햇살이랍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좀 전에 나와있던 구름 뒤의 달이 선명하게 모습을 보이겠죠. 솔개가 오늘도 밤나무 위를 뱅뱅 돌고있네요. 아직은 밤나무가 나뭇잎을 더 펼치고 있어야 할까 봅니다.
밤이 내리면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참 다정합니다. 밤나무도 어름나무도 산 짐승들도 밤이 거는 듯한 마술에 걸려들어 잠에 빠집니다. 밤의 친구 부엉이는 이 산의 친구들이 다칠까봐 불침번을 섭니다. 그래도 난 이 부엉이의 눈을 피해 풀숲이 우거진 나무에 가만히 엎드려 잡니다. 배가 고프면 혹시 나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니까요.
새벽이 열릴 때면 새들이 먼저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부산함을 떱니다. 나는 이 때를 제일 조심해야 합니다. 방심하여 마음놓고 자고 있다가 새들의 먹이가 되는 친구들을 보았거든요.
새벽하늘은 연노랑 빛이 점점 짙어져 주홍빛 빨강으로 변하다가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일 듯 맑은 햇살이 아침을 불러일으킵니다. 아침 햇살이 고루 퍼지면 붉은 기운이 굽이굽이 물결 쳐 잎사귀들 위에 간밤 살짝 내린 서리를 고운 보석으로 만듭니다.
반짝거림이 곳곳에서 일어나니 눈이 부시어 눈을 감고 흠뻑 일출의 기운을 받아들입니다.
아침이 나무에 걸릴 때쯤이면 밤새 어질러 놓고 놀다간 땅 밑 친구너구리의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날이 완전히 밝았습니다. 아침은 언제나 분주합니다. 맑은 물에 세수도 하고 몸에 묻은 찌꺼기도 털어 곱게 단장하고 풀잎 끝에 달려 있는 이슬방울을 먹어야 하니까요. 운이 좋은 날은 여린 산초잎을 먹을 수도 있어요. 다람쥐도 밤새 있었던 일을 알았는지 이리저리 마구 뛰어 다닙니다.
휘이휘이 이산 저 산을 전선줄을 타고 돌아다니던 내 친구 바람은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와서 어울려 놉니다. 그럼 오전이 벌써 후딱 가 버리지요. 오늘도 그렇게 하루가 열리었지요.
"구우쩍 구우쩍 구구구구!" 손가락들이 올라온다고 산비둘기가 급히 알려줍니다. 얼른 밤송이랑 어름을 숨겨야 합니다. 밤나무 아래를 보니 밤송이가 더러더러 있어 바람을 불어 ! 힘들어하던 나뭇잎을 떨구어 줍니다. 밤송이들이 숨어듭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바람이 일부러 큰소리를 내어 밤나무의 두근거리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손가락들은 다행히도 밤나무 곁을 스쳐 지나 멀리로 올라가는지 말소리가 점점 작아집니다. 밤나무가 산비둘기에게 손가락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보라고 부탁합니다. 바람이 손가락을 따라 갔어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지요.
다람쥐가 밤나무 아래로 와 밤톨을 찾아 물고 겨울잠을 지낼 동굴 속으로 쪼르르 달려갑니다. 나도 넝쿨을 타고 내려와 산초나무에 숨어들었습니다. 탁 쏘는 산초의 푸른 열매와 잎사귀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지요. 또한 가재가 사는 맑은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이곳은, 제가 나비가 되면 보금자리로 더할 때 없이 훌륭한 곳이지요. 하늘에 뭉개 구름이 떠다닙니다. 맑은 시냇물을 올려다 놓았는지 옥색 빛입니다. 여전히 햇살은 따스히 내리고요.
바람이 비둘기 보다 먼저 왔습니다. 손가락들이 내려오고 있다고 전합니다. 제 몸이 연둣빛에서 갈색으로 변화시켜 산초나무 가지에 위장하고 숨었지요. 이젠 겨울을 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쪽에서 보니 어름이 많이 달려있네. 와!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나무야? 키가 크네. 저 어름을 ! 어떻게 따지?"
손가락들의 손이 아예 닿지 않는 곳에 어름이 있으니 별 걱정은 없지만 어쩐지 오늘은 밤나무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안되겠어 여긴 아카시아나무가 너무 많아.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버리고 어름을 따자."
휴우!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밤나무 소나무 도토리등 나무들이 땅에 뿌리를 더 내밀려고 해도, 아카시아 나무의 뿌리가 너무 힘이 세서 늘 죽고 말았죠. 그러니 겨우 머리를 쏘옥 내민 새싹들은 아예 자라지도 못했답니다. 손가락들이 톱을 꺼내어 아카시아 나무를 벱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그들을 보니 마음이 아프지만 이제 우리도 다른 나무들과 함께 공평히 땅속 흙의 맛난 물과 영양분을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다행이 그 곁에 있던 밤나무들은 자르지 않고 이쪽으로 내려옵니다. 어서 곁을 지나가길 바랍니다.
밤나무가 갑자기 아래 밑동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난 아카시아 나무가 아니라고요."
어름 덩굴도, 바람도, 산비둘기도, 날다람쥐도, 사향제비나비 애벌레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머리 위로 소리개가 위협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나무는 벌써 절반이상 베어지고 있었습니다.
우우웅 쩌억 생채기로 눈물이 ! 흐르고 있습니다. 동그라미 여덟 개인 나이테가 보여지며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안돼요, 안돼요. "잘려진 밤나무는 어름덩굴과 함께 몸부림을 쳐서 건너편 소나무와 밤나무에게 가지들을 다 걸치었어요. 네 나무는 눈물을 같이 흘렸습니다. 그 바람에 나는 어름이 반 상 찬 부댓자루 안에 튕겨져 들어갔습니다. 얼른 조금 열린 어름 사이로 몸을 숨깁니다.
"이런! 아카시아나무가 아니었어. 음 아깝군."
"아 괜찮아 내년이면 댐 공사가 완공되어 수몰이 될 곳이니 괜찮아!.그래서 다들 보상금을 받고 밭이랑 작농을 그만 두었지.인적이 뜸해진 곳이야
어름이나 따가자구."
일행중 한 손가락이 쓰러진 밤나무와 어름덩굴에 올라옵니다. 너무나 미워서 덩굴이 밑으로 움직이자 나무를 오르던 손가락이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밤나무가 얼른 가지를 내어 주었습니다.
"나를 잘랐지만 일부러 자른건 아니잖아. 아카시아인줄 알았다잖아. 괜찮아 난 아직 완전히 잘리지 않았는걸!"
손가락은 위험한 것을 알고는 더 이상 밤나무와 어름 덩굴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손가락들은 나를 못 보았나 봅니다. 내가 튕겨둔 자루를 꼭 동여매더니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나 봅니다.
처음 듣는 웅웅거림과 통통통 흔들거림에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계속 몸이 움츠려 들기만 했습니다.
"어름을 참 많이 땄어, 덜 익은 것은 술 담아야지 " 하며 자루의 입구가 열렸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숲 냄새도, 나무도 다람쥐도, 더욱이 내 산초 잎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내가 좋아하던 그 시냇물 소리가 아닙니다. 내가 숨은 어름 자루가 들려 진다고 느끼는 순간.
"꺄아악! 이게 뭐야?......"
나도 놀라서 눈이 아주 커졌습니다. 손가락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손가락의 까만 눈 네 개가 껌벅거리다가 "와! 애벌레다 . 야호 신난다'며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저 쪽 너머로 바람이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 너무 반가웁고 무섭기에 " 아! 바람아 ! 여기가 어디야? 나 좀 데려가 줘. 너무나 무서워." 하고 마구마구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 그래. 괜찮아. 내가 여기 자주 올께. 여기는 손가락이 사는 곳인데 여긴 너무나 높아서 낙엽을 불러 올 수가 없어."
"뭐어? 그럼 난 어떡해 ?"
"하지만 걱정 마!. 여기에 사는 준이랑 현이 손가락은 곤충을 좋아해 . 그리고 화초가 많으니 네가 겨울 한 철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거야? 바람의 말에 마음이 좀 가라앉습니다.
'응"
" 대신 십자매만 조심해. 지금은 새장에 있으니까 괜찮아. 하지만 곁엔 절대로 가지마! 알았지?"
"응"
'내가 가끔 숲의 얘기를 전해 주러 올께. 울지마 "
바람이 불안한 애벌레의 마음을 달래 줍니다.
문이라는 것을 열자 신선한 풀 냄새가 산뜻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 속에 방아잎 냄새도 실려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풀이니까요.
화초가 참 많습니다. 숲에서는 전혀 볼 수가 없는 화초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얀 네모 위에 방아잎도 심어져 있고 고구마도 순도 심어져 있었습니다.
파도 있고 상추도 자라고 있었습니다. 친근감이 듭니다. 예전에 엄마가 보고 다녔던 얘기들을 해 준 것이 생각납니다. 엄마의 그리움이, 숲의 그리움이, 그리고 새로운 환경의 무서움이 막 밀려 와 눈물이 마구마구 납니다.
바람이 그만 울고 얼른 숨을 자리를 찾으라 일러 줍니다.
어떤 화분 위에 놓여졌는데 나는 일단 숨기 좋은 고구마에게로 기어갔습니다.
"안녕? 난 사향제비나비 애벌레야. 네게서 좀 쉴 수 있을까?"
"안녕? 그래 괜찮아. 나의 여린 잎을 먹어도 돼. 난 잎을 쉽게 더 만들 수 있거든."
"고마워.'
나는 ? ?이상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무서움이 사라지자 안도감에 잠이 마구마구 몰려왔습니다. 고구마 줄기와 잎 사이로 몸을 깊이 숨기고 잠이 들었습니다. "아! 여기가 손가락이 사는 곳인가 보다 "
새의 지저귐이 들렸습니다. 눈을 뜨니 새벽이 열리려 합니다. 어스름 밤 빛이 가고 새벽의 여명이 오려고 하자 아주 맑은 소리로 '찌로롱 찌리리 조로롱 조롱 쪼로로로롱 이 곳을 울립니다. 애벌레는 순간 소름이 돋아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고구마 순을 꼭 잡았습니다 .
"잘 잤니? 너 많이 힘들었구나. 노래를 부르는 저 새는 수놈 십자매인데 이름이 찍사리야. 재재재재 우는 건 암놈인데 이름은 찍수니야. 아직은 새장 안에 있으니 괜찮아.
"응.. 그래도 무서워. 새는 벌레를 잡아먹거든 "
" 참 너말고도 이 곳에 많은 곤충들이 다녀갔어. 준이와 현이가 곤충을 좋아해서 우리는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
"그래?"
"응. 봄이면 올챙이 도롱뇽들이 오고 큰비가 오면 다슬기도 오고 미꾸라지도 와 . 가을엔 귀뚜라미도 메뚜기도 땅강아지도 본다니까. 준이랑 현이가 시골 다녀오면서 데리고 와. 그리고 여기는 다른 사람들의 집보다도 화초가 많으니까 저 방충망이 열려 있으면 매미 ,잠자리, 벌들도 많이 날아들어 와 "
"그래?
"응 . 넌 운이 좋은 거야. 어디 네가 살던 곳의 얘기를 들어보자 "
"내가 살던 곳이 댐이 완공이 되면 물에 잠기게 된대. 손가락들이 아래에서 강을 막는 댐 공사를 하고 있대. 그 댐이 완성이 되면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비가 안 올 때 땅에서 필요한 만큼 물을 보내주는 거래."
"그래?. 그런 일도 있니? 안됐구나."
"응. 밤나무가 그러는데 그 곳은 원래 손가락 몇이 밭을 일구고 살고 있었대. 그런데 댐을 만든다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보내고 손가락들이 오는 것을 막아서 그렇게 숲이 깊어졌대. 그런데 가끔 손가락들이 밤을 주우러 오기도 해"
애벌레는 바람과 다람쥐 어름나무, 밤나무, 산비둘기 의 이야기를 해 주면서 또 눈물이 그렁그렁 해 졌습니다.
저기서 듣고 있던 덴트롱이 물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뭐니?"
"손가락을 몰라? 나를 여기로 데려왔잖아"
"뭐어? 그럼 인간을 손가락이라 물으니? 여기선 사람이나 인간이나 그렇게 불러 "
"으응 여기는 그렇게 부르니? 우리는 손가락이라 불렀어. 그 손으로 못하는 게 없어서 가끔 우리를 다치게도 하니까 . 그래서 우리는 손가락이 제일 무서워 해"
"후훗 우습구나 . 그 손가락이 여기선 우리를 아주 잘 보살펴 주는데"
애벌레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화초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찍사리 찍수니도 같이 웃었습니다.
"안녕들 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전 이번 겨울을 번데기로 무사히 지내면 사향제비나비가 된답니다. 전 엄마처럼 푸른 하늘을 날고 싶어요. 이렇게 기어다니지 않고 발에 꽃씨를 묻혀서 예쁜 꽃이랑 나무랑 인사하며 꿀을 따며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꿈이에요. 가끔 시냇물가에 안아서 목을 축이며 우아한 제 모습을 보는것이 제 소원이예요'
화초들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입니다".
"안녕? 난 덴트롱이라고 해"
"난 알로에"
"난 매발톱"
'난 군자란 "
"난 관음죽"
"난 돈나무"
"난 동백"
"난 춘란이야. 내 친구들을 그 곳에서도 많이 보았겠지?"
"네에,,,,, 다들 반가워요"
"난 방아야."
"방아님! 제가 방아잎을 좋아하는데 조금만 나눠주세요"
"그래. 얼른 건너와. 나도 잎을 잘 만들 수 있어. 대신 여린 잎은 조금자랄 때까진 먹지 마!"
"네! 정말 고마워요"
"난 상추".
"난 파. 만나서 반가워. 난 매워서 못먹을거야. 히히히히히히"
대파의 이상한 웃음 소리에 모두들 웃음 한바구니를 쏟아 내었습니다.
그 때 태양이 떠오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서 해를 맞으니 왠지 답답합니다. 눈물이 나려 합니다. 숲속의 새벽들은 여기저기서 보석으로 반짝이는데 여기선 붉은 햇살만 느껴집니다. 느낌이 너무 이상합니다.
그때 준이와 혁이 잠옷 바람으로 나와서 나를 찾아내었습니다. 앞으로는 더 꼭꼭 숨어서 나를 찾아내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애벌레가 방앗잎을 먹었네!. 다행이다. 그런데 나방일까? 나비일까? 어떤 애벌레인지 찾아 봐야겠지?'
"응. 오늘은 찍사리 찍쑤니 운동은 안되겠다. 벌레를 잡아먹으면 안되잖아 "
"응...그게 좋겠어 "
준이와 현이는 나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십자매들에게 모이와 물만을 주고 이 곳을 나갔습니다.
"야! 오늘은 너 때문에 우리가 신나는 비행을 못하잖아"
"무. 무슨 말이니?"
"우리는 햇살에 아침 비행을 해야 건강해. 항상 아침 비행을 한뒤 모이를 주는데 오늘은 준이가 새장 문을 열어주지 않고 그냥 갔잖아"
하며 새장 안에서 신경질을 마구 내었습니다.
"미안해......'
그 때 덴트롱이 "야 너희는 너네 집에서 싸면 될걸 높은 빨래 헹거에 앉아서 우리에게 똥을 찍찍 싸대잖아. 오늘 하루쯤 쉬면 어때? 자꾸 그러면 내 잎새들을 못 먹을 줄 알아?" 하고 십자매들에게 나무랐다.
"그래, 그래. 이 애벌레는 안정이 필요해. 그러니 오늘은 너희가 좀 참아 줘" 고구마도 애벌레를 감싸주었습니다.
'창가에 머문 바람이 가만히 웃고 섰습니다. 그래 애벌레는 십자매만 조심하면 겨울을 잘 날수 있을 거야. 음..... 아직 밤나무랑 숲 속의 안부를 전하지 않아야 되겠어'
바람은 전선줄을 따라 숲 속으로 날아갔습니다.
애벌레는 찍싸리 찍수니에게는 미안했지만 한 식구처럼 여겨주는 화초들이 고마웠습니다. 여기 이곳에서 겨울을 나야 될까 봅니다.
십자매들만 조심하면 된다는 바람의 말이 자꾸 귀에 들려 옵니다.
이틀이 지났습니다.화분을 옮겨 다니며 먹어보니 고구마 순과 덴트롱의 잎사귀는 단맛이 나며 연하고 부드럽고, 도도한 군자란이나 알로에는 쓴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관음죽은 다가가면 뽀족뾰족 따갑고 돈 나무는 거드름을 피우며 하늘만 보고 있습니다. 역시 파는 매워서 혼줄이 났습니다. 그래도 내가 제일 맛있는 것은 향이 좋은 방아잎 입니다. 매발톱은 쉬어야 할 때가 되었는지 시름시름 말라만 갑니다.
내가 온지 삼일 째 되던 아침. 준이와 현이는 직싸리와 찍쑤니를 비행을 시켰습니다. 밤나무 위를 날으던 소리개 마냥 우아하지는 않았지만 기류를 타고 위아래를 날으는 모습이 참 시원스러웠습니다. 그들이 둥지 안에 들어갈 때까지 애벌레는 잎 많은 덴트롱에 보호색으로 꼭꼭 변장하여 숨었습니다.
찍사리 찍수니는 나를 보고서도 째려만 보고 해꼬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내가 해 주는 산의 이야기도 안 듣는 척 하면서 좋아합니다.
이젠 나도 손가락이 사는 아파트 베란다라는 환경에 적응하여 같은 식구가 되어갑니다.
몸도 어느 정도 커졌습니다. 이젠 겨울을 지낼 힘도 지녔습니다. 옷을 만들어 번데기로 숨어버리면 찍싸리 찍쑤니도 무섭지 않습니다.
준이와 현이가 학교 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준이와 현이에게 자상한 엄마가 있듯이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죠.
쉬땅나무, 엉겅퀴, 누리장나무, 얇은 잎 고광나무, 신나무, 개화나무, 산초나무 등의 꽃을 좋아했던 엄마는 늘 꿀을 많이 따러 다니셨죠. 시냇가에서도 물과 무기질도 많이 드셔셔 몸을 튼튼하게 만드신 엄마는, 풀 사이를 낮게 천천히 날아다니면서 쥐방울덩굴이나 등칡의 잎 그 뒤에다 아무도 모르게 우리 형제 여섯을 한꺼번에 낳으셨죠.
우리는 붉은 자줏빛으로 마늘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요. 알에 서 깨어난 우리들은 처음에는 같이 어울려 다니다가 자라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잎과 줄기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 친구 바람도 어쩌지 못하는 큰 태풍이 몰아쳤지요. 우리들을 찾아다니면서 비바람에 다치지 않게 단도리를 해 주셨지요. 엄마의 곱던 날개옷이 많이 찢어지셨어요.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무서웠어요. 그것은 죽음이 가깝다는 것이었는데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죠.
"아가야! 너도 애벌레에서 번데기를 지나면 엄마처럼 우아한 검은 제비나비가 될 수 있단다. 이 밤나무 곁을 떠나지 말거라. 송충이가 되면 이 밤나무 옆에 산초나무가 있단다. 바람결 따라 산초 향이 묻어 올 터이니 꼭 찾을 수 있을 게다. 이 밤나무가 널 지켜 줄 거야. 엄마는 이제 아빠처럼 혼자서 여행을 떠날 거란다. 잘 지내거라 "
엄마는 검은 날갯짓으로 자상한 미소를 남기고 높이 날아가 버리셨죠. 그 뒤로는 엄마를 볼 수가 없었어요.
엄마의 말대로 난 굵고 짧으며 윤기가 도는 오렌지색 번데기 상태로 겨울잠을 자고 나면 이듬해 봄에 성충인 나비가 될 수 있어요. 엄마처럼 고운 사향제비나비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바람이 늘 다녀갑니다. 오늘도 밤나무 이야기를 해 줍니다. 마저 잘리지 않은 밑동으로 더 열심히 물과 영양분을 뿌리로 빨아들이고 있답니다. 손가락들이 잘라 낸 아카시아 나무뿌리가 힘을 쓰지 못하기에 흙을 더 차지 할 수 있어 좋다고 전해 줍니다. 여전히 바람은 내게 사람을 '손가락'으로 부릅니다.
어름덩굴도 어름을 다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가 온 이 곳에 온 이후로는 솔개를 한번도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늘 밤나무 꼭대기 높은 하늘에서 우아하고 힘찬 날갯짓으로 빙빙 선회하고는 했는데 어쩐 일인지 보이지를 않는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밤나무에는 다람쥐, 노루, 토끼들이 늘 다녀가고 산초나무도 열매를 똑똑 떨어뜨리고 있답니다. 봄이 되면 그 근처에 겨울을 잘 보낸 산초나무 싹들이 쏘옥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바람이 다녀가면 애벌레는 한 뼘 한 뼘 마음이 자라는 것을 느낍니다.
준이와 현이는 언제나 다정하게 말을 걸어옵니다. 그 형제는 곤충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랍니다 . 내가 사향제비나비 애벌레라는 것도 알아내었습니다. 아빠에게서만 나던 향기가 사슴의 뿔 사향에서 나는 향기와 같다는 것을 준이가 얘기를 해 줘서 알았습니다. 이 집에 온 것이 행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겨울나기가 걱정이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합니다.
"형 괜찮을까?. 나뭇잎으로 감싸면 실로 매달아 줘야 할까?"
"안 그래도 돼. 스스로 실을 내어 매달릴 수 있을 거야. 우리 애벌레가 있던 곳으로 되돌려 줄까? 어디에 두었는지 표시만 해 두면 자주 가서 애벌레가 나비 되는 과정을 관찰 할 수도 있잖아"
나는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래 난 밤 잎을 덮고 싶어. 난 산초 잎을 갉아먹고 싶어. 제발 나를 밤나무 곁으로 데려가 줘"
내가 여기에 온지 여섯 밤, 여섯 해가 다녀갔습니다. 어느 새 내 몸은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고 곧 올 겨울맞이를 해야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살 던 곳으로 간다면 난 꼭 나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따뜻한 봄이 5월 6월이 되면 내가 잠을 깨어 탈피를 하면 엄마처럼 세련된 사향제비나비가 될 것입니다. 꼬리에 태극 같은 무늬를 다섯 개씩 달고서 힘찬 날갯짓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밤이 내립니다. 내가 살던 숲에도 밤이 내리겠지요. 나는 꿈을 꿉니다.
날개를 쭈욱 펼친 나는 황갈색으로 가슴과 배의 양옆에 붉은 털이 나 있습니다. 밤을 무척 좋아하는 박쥐보다 내가 조금 더 큰것 같습니다.
아주 우아한 사향제비 나비가 되어 숲 속을 날아다닙니다. 나의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 줍니다. 바람이 전하여 준 말들이 하나도 틀림이 없습니다. 너무너무 좋아서 이 산 저 산을 날아다닙니다. 마음이 너무 좋아서 너울너울 하늘하늘 힘차게 날갯짓을 합니다. 발 아래 보이는 숲이 애벌레의 눈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산비둘기가 '조심해! 솔개가 떴어!' 하고 소리칩니다.
놀라서 눈을 떴습니다. 현이의 눈동자가 보이는 손바닥 위에 얹어졌습니다. "사향제비나비 애벌레야! 엄마랑 밤을 주우러 가기로 했어. 도토리도 주울 거야. 그리고 네가 있던 곳에 데려다 줄께. 꼭 나비가 되어야 해"
아아! 꿈만 같습니다. 내 그리운 숲 속으로 돌아갈 수 있답니다. 그 동안 정들었던 찍싸리와 찍쑤니랑 화초들 이 너도나도 축하를 해주니 내가 꿈이 아닌가 봅니다.
예전 자루 속에서 들었던 웅웅웅 이상한 소리며 흔들렸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건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라는 것인데 먼 거리를 움직일 때 이것을 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있던 곳은 생각보다 훨씬 먼 곳이었습니다. 나비가 되어도 제대로 찾아 갈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숲 냄새가 납니다. 아! 밤나무 향입니다. 너무나도 그리운 냄새입니다. 그 향이 오는 곳, 저 멀리서 내가 어름 자루에 실려 올 때부터 사라졌다던 그 솔개가 빙빙 선회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가슴이 벌렁벌렁 터질 것만 같습니다. 어느 새 옆에 온 바람이 '축하 해. 축하해, 어서 와." 하며 나를 어루만집니다. 숲 속 친구들이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마음은 벌써 바람을 따라 아름답고 우아한 날갯짓으로 숲 속 친구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습니다.
첫댓글 우아 대단 하시네요 박수 짝짝짝....
프린트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겠네요
우미님 드뎌 ^^ 저도 프리트 해 가서 집에서 읽겠습니다. ^^
잘읽었구요 눈나쁜데읽느라힘들었네 하여간 잘봤심다
남을 기쁘게 하는 재주는 귀한 것이겠죠? 글도 그런듯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