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학기 4주차 과제
“인류 멸망 시나리오”
정 우 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모든 종류의 소통과 작용들이 사회 전체의 질적 저하를 막아주는 최소한의 방벽 역할을 감당해왔다. 하지만 이젠 스마트폰과 쇼츠, 에어팟과 노이즈캔슬링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처절하리만큼 분절시키고 있다. 어쩌면 서로 얼굴 붉히고 언성 높이며 이웃과 다투던 시절이 더 나았을 지도. 앞집 옆집 뒷집에서 누군가 고독사하고 시체가 수십 일 넘게 썩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도무지 ‘알빠노’인 지금보단 말이다.
‘사람 人’이라는 한자가 서로 기대어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설명, 그리고 ‘人間’이라는 한자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리키는 뜻이라는 해설에서 우리는 인간됨의 최소한이 바로 이 긴밀한 관계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타자(他者)와의 상관을 통해서만 규명된다. ~의 아들, ~대학 졸업생, ~기업의 차장, ~교회의 집사, ~를 수료한 사람 등등. 사회적 관계라는 틀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규정하기 어려워진다. 이것이 인간이란 종(宗)의 특징이다. 우리는 ‘우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하나님도 인류를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나보다.
물론 인간이 독처하는 상황을 벗어나 누군가와 연대하려면 반드시 고통과 갈등이 수반된다. ‘유아독존’하던 자가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과정은 지난하고 버겁고 귀찮다. 현대 문명의 이기들은 이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가급적 피하라고 부추긴다. 누군가와 호흡을 맞대지 않고도 실재처럼 소통할 수 있다고 속인다.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대체할 수 있다며 꼬드긴다.
하지만 로그아웃과 죽음은 너무나 다른 양식과 무게감으로 이뤄지는 이별이다. 메시지와 손편지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거짓말은 우리가 물적 존재임을 애써 무시해버리는 사기에 가깝다. 자라나는 어린 세대는 이제 음성을 실시간으로 주고 받는 ‘통화’조차 꺼려한다. 차라리 턴제 방식의 DM 교환이 편안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긴장감도, 듣기 싫은 대화를 이어가야 할 불편함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긴장감과 불편함이 사실은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다.
지난 십수 년에 걸쳐 이뤄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절’은 인류가 점점 인간다움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정치적 옳음과 양성평등의 가치에 관한 파편적 지식은 날이 갈수록 발전을 거듭했으나 정작 그 지식들이 실존적 지혜로 승화할 수 있는 장(field)은 사라지고 있다. 누구든지 익명의 아무개로 치환되고 마는 댓글창에서는 진정한 사상의 발현도 발전도 이뤄질 리가 만무하다. 실재하는 상황 속에서, 상처받음과 훼손당함을 각오한 사람들끼리의 이름과 인격을 건 정면승부 없이는 PC주의든 페미니즘이든 디테일하고 실효성 있는 지혜의 축적이 불가능할 수 밖에 없으니까.
오늘날의 댓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 대다수는 특정한 타자를 향해 쓰인 문장이 아니라 그냥 댓글을 달아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쓰고 있는 선언적 표출에 불과하다. 우리는 학대 당하고 있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아이가 너무 불쌍해요”라고 하는 게 아니다. 진정 그 아이들이 불쌍해 견딜 수가 없다면 무언가 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갔을 테니까. 그저 학대 당하는 아동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나, 사회적 불의에 분연히 의분을 표명할 줄 아는 나에 도취되어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내일도 지하철에 앉아 귀에는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추가된 에어팟을 끼고, 눈은 스마트폰에 처박은 채 손가락을 토독거리며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염원하는 댓글을 쓸 것이다. 정작 같은 칸에 타고 있는 모든 이들로부터는 완전히 분리된 채,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고 말이다. 고독사한 노인의 기사에 ‘폭풍눈물’ 이모티콘을 달면서도 당장 눈 앞에 서 있는 80대 어르신에겐 눈길도 보내지 않는다. 간혹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몇몇 기괴한 광경들은 인류의 파멸 과정을 적나라하게 예시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현실에 뿌리내리고 부대껴야만 하는 관계망이 없이도 충분히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착각에 물든 많은 이들은 맘껏 비인간적인 행위를 해댈 수 있다. 그 대표적인 활동이 ‘혐오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과 엮이지 않을 것만 같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서는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는 존재다. 관계는 불가항력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그를 함부로 욕할 수 없게 옭아맨다. 그 얽어맴이 실은 우리의 인간성을 단단히 매어주는 안전벨트일지도 모른다. 그게 없으니 현실에 등을 돌린 채 익명의 가면을 쓰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이대남’, ‘한녀’, ‘영포티’ 등의 치졸한 혐오언어들을 맘껏 쏟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저질언어들은 결국 저질사회를 배태하고 만다.
만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쵸파의 스승인 Dr. 히루루크는 엄청난 명언을 남겼다. “인간이 죽는 순간은 곧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시점”이란 말을. 그동안 인류는 서로를 인지하고, 엮이고, 서로에게 고통과 상처를 안기고, 또 사랑함으로써 영원한 존재성을 획득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이 모든 것을 귀찮고 하찮게 여기기 시작함으로써, 영원한 죽음 곧 종말이라는 귀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