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물리학패러다임의 시대라고 한다면 21세기는 생물학패러다임의 시대라고 말하여진다. 물리학의 최근 추세도 생명현상을 어떻게 물리학적 언어로써 설명하느냐에 전위적 관심이 쏠려있다. 그렇다면 물리학은 뭐고, 생물학은 무엇인가? 물리학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수량적으로(quantitatively) 계측하고 설명한다. 그런데 생물학이 다루는 세계는 그러한 양적 계산이나 법칙으로 다 설명될 수가 없다. 물리학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환경을 지배하는 법칙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데 만족하지만, 생물학은 물리적 환경을 생명의 삶이 이루어지는 장(場)으로서 탐구한다.
생물학이 다루는 우주는 죽은 물리적 체계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생명적 우주다. 물리학에서는 실체 그 자체의 궁극적 규명이 중요하지만 생물학에서는 모든 실체간의 관계를 더 중시한다. 생물학적 우주는 관계된 우주이며, 따라서 모든 존재는 유기적 관계의 그물을 떠날 수 없다. 이것을 우리는 유기체적 우주(Organic Universe)라고 부른다. 이것을 우리 화엄사상에서는 ‘일즉일체(一卽一體) 일체즉일(一體卽一)’이라 불렀다.
물리학적·수량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모든 역사가 직선적 진보(linear progress)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생물학적 세계관은 역사를 순환적 평형(circular equilibrium)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인류의 20세기는 개발, 진보, 발전을 중시했다. 그러나 21세기는 개발보다는 생명의 건강을, 진보보다는 주변과의 조화를, 발전보다는 화해로운 내실을 중시한다. 박정희의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물리학적 진보사관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팽창주의의 한계는 이제 너무 명백하다.
21세기의 노무현시대는 그러한 진보사관에서 벗어나 생물학적 패러다임의 평형사관을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적 환경에 대한 노무현정권의 의식이 매우 박약한 수준에 머물고 있지 않냐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나는 결코 퇴보를 주장하지 않는다. 생명적 환경에 대한 우려때문에 경제적 실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제 성숙한 대한민국은 인간과 모든 우주생명체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를 경제적 실리와 매치시킬 수 있는 격조높은 문명의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실리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소득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적 측면이나, 시간이라는 함수를 고려한 원대한 결과까지를 포섭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에 눈이 멀어 내일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찌 경제적 실리라 말할 수 있으리오?
생물학적 패러다임의 원초적 출발점은 바다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바다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은 바다에서 육지로 진화되어 갔다. 삶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다와 육지의 사이에는 ‘뻘’이라고 하는 완충지대가 있다. 뻘은 깊은 바다보다 여러면에서 생명환경의 제약조건이 많다. 온갖 바다의 생명체들은 바로 이 뻘이라고 하는 열악한 조건에서 매우 복잡한 생존의 메커니즘을 개발시켰을 뿐 아니라 그에 걸맞는 정교한 기관들을 진화시켰다. 그리고 육지로의 진출을 서서히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영장류의 인간에까지 진화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이 뻘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생존력이 강한 생명체의 생성고리(eco-chain)가 이루어지고 있다. 뻘은 생명의 근원이며 보고이며, 모든 순환이 집약된 하나의 소우주(microcosmos)이다. 그것은 태극(太極)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 뻘 중에서도 특히 소중한 곳은 육지의 강이 흘러들어오는 하구에 위치한 뻘이다. 이 강하구(estuary)의 뻘은 육지의 모든 영양염이 유입되는 곳이며, 이 영양염과 햇빛을 이용하여 바다의 최초의 생물은 광합성(photosynthesis)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바다가 건성 짠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바다의 모든 퇴적물은 육지에서 흘러들어간 것이다. 바다의 모든 성분은 수십억년 동안 육지의 광물질, 퇴적물에서 흘러들어간 것이다. 바다를 살찌우는 곳이 바로 강하구의 뻘이다. 강하구는 바다의 자궁이요, 콩팥이요, 간이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기에 자궁이요, 모든 오염의 여과가 일어나기에 콩팥이요, 모든 효소의 화학변화가 이루어지기에 간이다. 이 강하구를 막는다는 것은 대지라는 어머니의 똥구멍을 막는 것과도 같다. 그 어머니는 똥독으로 곧 죽는다.
새만금이란 만경평야와 김제평야를 합친 만금(萬金)지역에 대해, 간척사업으로 생겨나는 약 1억2천6백만평의 새로 생겨나는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만경강과 동학혁명의 진원지 고부를 거쳐 호남평야 남부를 훑어 내려오는 동진강, 이 두 강이 만나는 천혜의 강하구갯벌로서, 경사각이 1°밖에 되지않는, 이 지구상에서 유례를 보기 힘든 위대한 뻘이다.
간척사업? 거 좋다 국토가 늘어나고 농토가 늘어나니까. 그런데 새만금사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간척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호남평야의 대부분의 농토가 삼국시대로부터 꾸준히 간척사업을 통하여 조성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간척은 움푹파인 만(灣)의 연안에 쌓인 세립질 퇴적물인 점토지역에 국한된 소규모의 간척이었다. 그리고 이 점토에서 염분이 빠져 농토가 된 후에 다시 오랜 시간을 걸쳐 새로운 점토가 생기면 또 다시 경계선을 확장해나가는 매우 점진적인 방식의 자연경계개간이었다. 그것은 점차적이고 열려진 방식(open system)의 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새만금사업은 김제 앞바다의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와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는 33㎞의 방조제(防潮堤)를 쌓는 작업으로 현대적인 중장비의 개념이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개간(開墾)아닌 폐간(閉墾)이요, 간척(干拓)아닌 간폐(干廢)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바다파괴사업이요, 간척지의 대부분이 농토로서 적합치 않은 모래밭일 뿐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이 앞바다가 모두 아름다운 산호초(coral reef)로 덮여있다면 아무도 감히 이런 식으로 개간한다고 덤비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강하구의 가치는 산호초의 가치보다 훨씬 높다. 이 지구상에 산호초면적이 62×10꺢헥타르인데, 강하구 면적 또한 총 180×10꺢헥타르밖에 되지 않는다. 1997년 ‘네이처’지의 과학적 평가에 의하면 헥타르당 산호초의 가치는 $6,075인데 강하구의 가치는 네배 가량이나 높은 $22,832이다. 그런데 경작지인 논의 가치는 불과 $92밖에 되지 않는다. 강하구에는 영양염순환(nutrient cycling)이 이루어지며, 모든 오염이 정화되며, 어마어마한 생명의 탄생이 이루어지며, 연안의 모든 어장의 근원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투자가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소출이다. 그러나 경작지는 종묘, 비료, 농약, 인건비, 그 모든 것이 투자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최열은 말한다.
“왜 쇠보다 금이 더 비쌉니까? 같은 광물이지만 금이 쇠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세계적으로 귀한 뻘을 6조원을 투자하여 흔해빠진 논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귀한 금을 돈 6조원을 들여 가장 흔한 쇳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이 우리나라 새만금정책인 셈이죠. 지금 부안지역 논이 시가 평당 2만5천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새만금계획대로 진행되면 탄생되는 논은 7∼8만원의 값이 나가야 합니다. 게다가 휴경농지를 헥타르당 300만원을 보상해주고 있는 판에? 생각해보세요! 중국보다 천배 비싼 농토에서 열배의 인건비로 일년에 한번 농사짓는 일모작으로 경쟁한다? 도대체 이런 난센스가 어디 있습니까?”
왜 이런 난센스가 우리나라엔 태연스럽게 자행되고 있을까? 새만금공사는 본시 우량농지확보라는 절박한 우리 농민의 내재적 요구에 의하여 생겨난 프로젝트가 아니다. 방조제의 무지막지한 선을 서해안 지도 위에 그은 것은 현 농림부 산하 농업기반공사의 전신인 농어촌진흥공사의 그 누구가 한 짓일 터이지만 그것을 현실로 구체화시킨 것은 노태우였다. 노태우는 왜? 87년 대통령선거에서 전북표를 긁어모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그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 공약을 집행할 의사가 없었다. 그런데 노태우대통령에게 공약실천의 강행을 요구한 것은 야당총재 김대중이었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91년 11월부터 대역사의 막은 올랐다. 현 대통령 김대중은 말한다: “새만금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순수하게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탄생된 새만금이지만, 누구든지 초창기에 이 프로젝트를 제청했을 때는 그것이 재앙을 불러오는 파괴적 공사가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뜻이다. 왜 생각지 못했을까? 제1의 이유는 우리가 살아온 20세기의 역사가 생물학적 패러다임이 아닌 물질적인 진보만을 추구한 직선사관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덮친 것은 ‘쌀’이라는 이데올로기다. 한국인들은 과거생활양식의 인습 때문에 쌀을 부(富)의 상징으로, 기준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따라서 쌀을 생산하는 농토의 확보는 절대적 선(善)으로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게다가 환경생태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삼년의 일이다. 이러한 인식의 심화를 초래한 사건이 1996년의 시화호오염의 비극이요 참안(慘案)이었다. 시화호비극의 결말은 결국 방조제를 다시 허무는 길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명약관화한 새만금의 결말을 예견하면서 왜 그러한 비극적 역사를 되풀이하려 하는가? 새만금 33㎞의 방조제를 막는 순간 순식간에, 1㎥당 10만개의 생명체가 살고 있는 제내지역 1억2천6백만평은 거대한 시체더미로 화할 것이며, 만경강과 동진강의 오염은 정화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거대지역을 개답(開沓)하기 위해서는 150개의 남산이 사라져야 한다.
왜 뻘을 죽여야 하는가? 우리에게 지금 뻘을 죽여야 할만큼 논의 필요성이 있는가? 새만금에 논이 생겨서 돈이 벌린다고 생각하는 미친놈은 아무도 없다. 지금도 뻘에 한나절 들어갔다오면 10만원은 번다. 논에서 그러한 소출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피해의 당사자인 전북도민들은 왜 그토록 열렬하게 수혜의 꿈만을 키우고 있는가? 여기엔 교묘한 사기가 있다. 당시 전북도지사 유종근은 새만금의 3분의 1을 세계최첨단의 공단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 자체가 위법적인 사기극에 불과하다. 새만금사업은 농지관리기금으로만 이루어진 것이며 오로지 농지조성이라는 목적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취득세에 붙어있는 농토세로 이루어진 것이며 원칙적으로 용도변경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지역언론은 차단했다. 그리고 타도사람들이 시기질투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식으로 문제의 핵심을 호도시켜 전북지역이기주의를 조장시켰다. 그런데 더 큰 문제의 실상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공단이 텅텅 빈다는 것이다. 공장이 들어설 조건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인근의 군장공단도 채워지지 않고 있는 판에 새만금에 무슨 최첨단 공장이 들어온다는 게냐?
그런데 왜 새만금은 열렬하게 추진되고 있는가? 올해만 해도 이미 1700억원의 예산이 책정되었다. 이러한 추진의 주체는 농업기반공사다. 그리고 물론 농업기반공사는 건설회사와 밀착되어 있다. 농업기반공사의 최대목표는 무조건 빠른 시일내에 33㎞의 방조제중 남은 4.5㎞ 구간을 빨리 메우는 일이다. 왜냐? 메우면 어차피 새만금공사를 마무리지을 수밖에 없고, 시화호의 경우처럼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추가예산을 계속 따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사가 이미 73.4%나 진척되어 다 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사기를 친다. 그러나 그것은 방조제진척에 한정되는 얘기일 뿐이다. 전체 공정으로 보면 아직 20%도 진척이 되지 않은 공사일 뿐이다. 노자는 말한다: “知止, 可以不殆.(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 그러나 농업기반공사는 그침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새만금이 아니라 공사조직 그 자체의 유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현재 1년에 도로·산업단지·주택으로 2만5천헥타르의 농지가 사라지고 있다. 새만금에 생기는 농지가 불과 2만8천3백헥타르다. 1년에 사라지는 농지만 훼손 안시켜도 새만금 공사는 전혀 필요가 없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쌀자급률은 108%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따라서 휴경농보상제가 추진되고 있다. 쌀 남아돌아간다고 2002년 상반기에만도 13만헥타르의 농지를 축소시켰다. 그런데도 화옹지구간척사업, 시화지역농지조성, 영산강지역간척사업을 강행하여 일을 벌임으로써 조직유지 위한 돈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이다. 동아건설이 자체적으로 간척한 김포매립지를, 부도나기 직전 자금압박 때문에 용도변경신청을 했다. 농림부·농업기반공사는 이것을 불허했다. 그리고 그 땅을 평당 19만원에 매입했다. 그런데 공사는 지금 이 땅을 물류·산업단지로 용도변경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농업기반공사는 국민을 위하여 식량공급을 원활히 하고, 농민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지원·관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공적 기관이다. 그런데 이 조직은 땅 만들고 용도변경하여 비싸게 땅을 파는 땅장사 기관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농지조성의 간척사업은 우리나라 역사의 단계에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따라서 농업기반공사는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필요한 수리조합이나 농업용수의 관리기능만 남아있는 조촐하고 효율적인 기구로 혁신되어야 한다. 새만금의 비극은 농업기반공사의 조직이기주의의 폐단이 빚은 것이며 우리나라 관료사회의 문제점의 시금석이다. 그것은 노무현정권의 리트머스시험지인 것이다. 농업기반공사에 메스를 가할 수 없다면 노무현의 관료제혁신의 구상은 허공의 메아리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최근 건축가 김석철은 새만금바다도시(aquapolis)라는 제3의 대안을 내어놓았다. 농지조성이라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벗어버리고, 방조제공사를 중단하고 갯벌을 살리며, 현재까지 진행된 방조제와 주변의 지형을 활용하여 방조제도시(Sea Wall City), 갯벌도시(Tidal Flat City), 하구도시(Cape Town)를 만들고, 군산·익산·전주·김제·정읍의 어번링(Urban Ring)과 연합하는 새만금·호남평야의 어번네트워크를 만들어, 새로 열리는 황해도시공동체의 중심으로 발전시키자는 참신한 안을 내어놓았다. 중국의 공산화로 닫혔던 황해가 이제 열리고 있고, 이에 대처하는 대국적 플랜으로서의 새만금을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로웠던 장보고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이다. 김석철안에서 물론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많다. 그러나 일단 방조제공사를 중단하고 갯벌을 살릴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그의 안은 전적으로 수용되어야 마땅하다. 전북도민들은 이제 기나긴 사기극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자멸을 초래하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 갯벌을 살려야 한다. 예산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명분으로 더많은 예산을 요구하고, 갯벌을 살리면서도 도민의 수입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선진기술의 모든 가능성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폭주기관차처럼 앞으로만 가는 농업기반공사의 감언에 더이상 농락당해서는 아니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농업기반공사의 플랜으로는 아무런 실이익을 얻을 수가 없다. 갯벌이 죽으면 전라북도는 죽는다. 그리고 서해안 전체의 어장이 죽는다. 호주·뉴질랜드에서 월동하고 시베리아로 돌아가는 도요물떼새 20만마리가 1300㎞를 이동하는 중간기착지가 바로 새만금 갯벌이다. 새만금 갯벌이 죽으면 이들이 죽는다. 인간을 위한 새들의 희생?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새들이 못사는 지구에서 결국 인간도 살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구의 생태계에는 국경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지구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새만금은 결코 전라북도의 소유물이 아니다. 나 도올도 익산·전주에서 6년을 산 전북인이다. 내 어찌 전북의 번영을 바라지 않을까 보냐? 나 도올의 진실을 믿어다오. 전북도민들이여! 그대들은 기만당하고 있다. 방조제를 중단하라! 갯벌을 살려라!
종교의 본질은 생명존중사상이다. 원불교가 말하는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도 그 궁극에는 생명존중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법신불(法身佛)은 곧 내가 말하는 생명적 우주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공적(空寂)이 아니다. 사은(四恩)의 첫째 은이 무엇이뇨? 천지은(天地恩)이다. 천지는 곧 우리의 부모며 동포며 법률이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일원화된 생명체인 것이다. 우리의 천지는 어디 있는가? 바로 새만금에 있다. 새만금에 살아 숨쉬는 법신불의 무한한 생명고리의 외침을 들으라! 그 외침을 듣지 못한다면 그대는 원불교도의 자격이 없다. 무엇이 소태산 대종사의 무시선(無時禪)이며 처처선(處處禪)이냐? 그것은 바로 간단(間斷)없는 생명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원불교도들은 도민들과 합심하여 새만금간척사업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새만금생명사업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인류최대의 재앙사업을 인류최대의 축복사업으로 변환시켜야 한다. 중단,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성취다. 막강한 뷰로크라시의 허구를 깬 자랑스러운 우리조국역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